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유란시아서 - 곽현영 목사 수상록, 천주교 소식 본문
http://blog.daum.net/panyaji33/5480
( 출처 : 미국 푸른오솔길 공동체마을, 곽헌영 목사의 글)
말 그대로 눈을 뜨면 읽고,먹으면서도 읽는다.
자다가도 깨면 또 읽게 된다.
아직 완전히,아니 반도 이해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무언가에 끌려 계속 읽게 된다.
매일 약 200페이지 정도를 읽어 나가는데 갈수록 그 오묘함과 깊이,
풍성함과 합리성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내가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그게 놀랍고 신기하다.
15년 전 읽었을 때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그때는 정말 황당하고 괴이했으며 말도 안되는 소리로 여겨졌었다.
만일 그 때 예수의 일생과 가르침에서 깊은 감동과 유익을 얻지 못했더라면,
유란시아서는 일찌감치 내 손과 의식에서 멀어졌을 것임에 틀림없다.
그 때 그렇게 다가와서는 약 15년을 성경에 집중하게 나를 이끌었다.
나름 최선을 다하여 성경을 연구하고 풀이하고 강론하면서
비로소 진짜 질문들이 내 속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여기 저기 산발적으로 그 답이 도출되어 나타났고
일단 그 빛을 굳게 붙드는 훈련을 15년 정도 했다.
약 15년이 지난 지금...
마침내 그 빛이 환하게 밝아오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다.
바로 유란시아서를 통해서이다.
이렇게 될 줄은 정말 예상 못했다.
아무래도 용어와 내용이 너무 파격적이고 황당해 보여서 선뜻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그런데 무언가에 이끌려 정독을 해 나가기 시작하면서
마치 덮개가 벗겨지고 비늘이 떨어지듯이 모든 거부감과 회의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찬란하고 아름다운 보석과 같은 지혜들이 마구 쏟아져 들어오는 것을 체험한다.
아무라도 읽기만 하면 그렇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는 차라지 접하지 않는 것이 나을 수도 있는 그런 내용이다.
자칫 단순한 호기심이나 주위의 권면에 끌려 이 책을 열었다가는
도리어 부정적인 영향으로 손해를 입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래서 아내에게조차 함부로 읽으라고 권하지 않는다.
서서히 내 느낌과 말로 마음 준비를 시킨 후에 스스로 읽어나가도록 해야 좋을 것 같다.
아마 요즘 아내는 내가 이상해 보일 것이다.
늘 이 책을 읽고 있는 내 모습을 보기 때문에
도대체 뭐가 저렇게 대단한가 싶을 것이다.
이미 그 자체로 아내는 유란시아서의 무게를 느끼고 있다.
늘 시원찮아 보이는 남편이지만 경전 연구와 풀이,강론에 있어서 만큼은
인정을 해 주고 있기 때문에 성경을 대하는 이상으로 유란시아서에 심취한 모습이
상당히 신기해 보이는 모양이다.
그래서 한 마디씩 던지는 말에도 제법 귀를 기울인다.
한 번 의식을 주위로 죽 돌리면서 누구에게 이 책을 권해볼까 아무리 찾아보아도
적당한 사람이 잘 없다.
몇 달 전에 남아공에서 온 여성 변호사 Melene에게 처음으로 이 책을 선물하면서
읽어보고 무슨 감동이 오면 같이 공부하고 사역을 하자고 권해 보았다.
읽어보고 그 느낌을 내게 말해주겠다고 했는데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지금 카친 중에 두 분이 내 선배와 스승이 되어 나를 이끌어 주고 격려를 해주고 있는 중이다.
처음에는 지나치다 싶어 다소 거부감이 들었는데
유란시아사 통독을 하다보니 정말 대단한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존경심이 저절로 간다.
그리고 이런 분들이 곁에서 나를 격려해 주고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주신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른다.
아마 이분들이 아니었으면 지금 이 자리에 오지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함부로 유란시아서 통독을 권하고 싶지 않다.
적어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나라와 의에 굶주림이 강하지 않으면,
특히 아버지를 사랑하여 그의 뜻에 생명을 다하고자 하는 마음이나 결단이 없다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격이 될 것을 잘 안다.
실제로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고 사랑하지 않으며 그의 뜻을 따르기를 원치 않는 자는
동물과 다름 없고,이미 죽은 자라고 유란시아서는 선언한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그런 자들은 멸망하는 짐승 같다고 단호하게 판단한다.
반면 정말 진리를 알고 싶고,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기를 원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얻는 참된 생명의 비밀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그 무엇보다 앞서는 자라면 유란시아서는 그에게 가장 귀한 진리와 생명의
계시가 될 것임을 확신한다.
정말 놀랍다.
읽으면 읽을수록 더 깊이 빠져 들어가고 희미하던 부분이 밝아지며
궁금하던 의문들이 해소가 된다.
조금 아쉽다면 아무래도 번역서를 읽다보니 그 흐름이 매끄럽지 않고
의미전달이 좀 불투명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 한국어 번역 통독을 마치면 영어 원문으로 다시 읽고
해설까지 하는 작업을 해야겠다는 각오가 일어난다.
오늘도 하루 종일 유란시아서와 함께 할 것이다.
고맙게도 완전히 회복되지 않아 활동이 불편한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고,
만날 사람,해야할 일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감사와 감격이 넘치는 나날들을 누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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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ml2007님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wml2007&logNo=221424801769
필자가 20여 년 전 유란시아서를 처음 접했을 때 일부 목사와 천주교 신부들도 유란시아서를 접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필자로써는 유란시아서에 매료되고도 근 6개월을 소화하기에 울렁증을 느꼈는데, 성직자 입장에서는 어땠을까? 전향적으로는 유란시아서의 내용은 기독교적 교리나 신조, 전통과는 반대로 대치되기 때문에 저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단 정죄가 필연이기 때문이다.
특히 관심이 끌리는 것은 신부였다. 목사야 접했어도 혼자 심중에 둘 수 있지만, 사생활이 제한된 신부는 혼자만 가슴에 품을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유란시아서가 범용화 된 이유는 비중 있는 내용이 넘쳤기 때문으로 본다. 천주교는 체계적인 학문 연구가 잘 계승 발전할 수 있는 환경이라서, 어떤 주제에 깊이 있는 연구는 개신교보다는 앞설 수 있다. 그러나 개신교보다는 창의성이나 순발력에서 떨어질 수도 있다.
카톨릭(catholic)이란 보편적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지만, 어떤 개념을 보편화시키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들은 안다. 그 과정에서 형성된 기형아가 마리아의 승천설이다. 유란시아서는 이런 점을 알고 남편 요셉은 몇 살에 결혼해 몇 살에 사고로 죽음을 맞이했는지 상세하지만, 마리아의 그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예수님 돌아가신 다음해에 세상을 떠났다는 언급만으로 우상화 될 것을 미리 대비한 모습이다.
천주교에서 유란시아서의 내용이 비중 있게 다루어진 증거는 많다. 차**신부는 TV강론에서 종교를 진화종교와 계시종교로 나누었는데 이는 유란시아서만의 개념이다. 또한 최근에 정** 신부께서 최후의 만찬이 이루어진 년. 월. 일까지 유란시아서 내용에 있는 것을 그대로 언급해 무릎을 쳤다. 기독교계에서는 예수님의 태어나신 일(日),월(月)은 둘째고 해 마저 정론이 없다. 즉 천주교 지도층은 유란시아서는 신뢰의 수준을 넘어 인류의 미래에 대해 갈 길을 열어준다는 확신이 섰다고 이해된다.
서두른다는 것은 루시퍼, 켈리가스티아,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치명적인 약점인 것을 그들은 유란시아서를 통해 알고 있었다. 따라서 대중을 충격에 빠뜨리지 않으면서 단계적으로 인식시키는 과정중 하나가 교황청에서 우선 외계인이 있을 수 있다는 가설을 표명하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천주교가 단순히 개신교보다는 열린 자세라고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외계인을 인정하는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가 의미가 없다. 외계인들도 우리와 같은 죄인이라면 그들을 위해서도 십자가를 지셔야 했고, 그게 아니라면 그들은 신다운 존재다. 이런 괴리(乖離)일망정 민중은 우매해서 성직자가 뒤집으면 뒤집어지는 대로 따라 간다는 점이 계산됐을 것이다.
그리고 금년 6월 25일 교황께서는 하나님과의 직접 소통에 위험이 따른다는 내용을 언급했다. 이는 중간 매개자인 마리아 역할을 부정하는 개신교 측에서는 펄쩍 뛸 내용인데다, 극단적인 신자들은 적그리스도의 짓거리로 매도한다. 유란시아서는 우리가 신과의 접촉이 우리 안에 있는 사고조율사, 진리의 영, 성령과의 소통이고 인도함을 받는 것이지 직접 우주아버지와 소통한다는 생각은 착각이라고 한다. 천주교 측에서는 이 부분을 간과하지 않고 집어냈을 뿐이다.
유란시아서 독자라면 천주교의 이런 일련의 흐름이 정확하게 자로 잰 듯 앞날을 대비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챌 수 있다. 천주교의 조직력과 자금력으로 봐서 세기적인 변화를 일으키기에는 그들이 적격이다. 그쯤 되면 개신교는 천주교의 흐름에 반발이 예상되지만, 그들 중 깨인 목사들이 유란시아서 내용을 수긍하면, 스스로 분열로 힘을 못 쓸 것이다. 행운이라면 천주교와 개신교가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울수록, 그로 인해 유란시아서 연구가 더 뜨거워질 것이고, 타종교나 무신론자들에게 노이지 마켓팅(noisy marketing)이 될 수도 있다.
이에 유란시아서 독자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중장비 시동도 시동모터에 의해 작동이 되듯 카톨릭이라는 거대한 조직이 순항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세상에 유란시아서라는 책을 소개함으로 사회적 이슈로 떠오르게 하는 것으로 본다. 그게 멜기세덱이나 세례요한의 역할이었다. 유란시아서가 차세대를 위해 세계정부의 필요성을 언급했지만 힐러리 클린턴, 소로스, 버락 오바마 같은 선진국 지도자층들이 이에 대한 움직이고 있다니 유란시아서를 알았다 싶기도 하고, 몰랐더라도 얼마나 반가운 소식인가?
더불어 우리 유란시아서 독자들이야말로 조직문화가 갖는 경직성이나 폐쇄성을 벗어나 자유롭고 창의적인 사고로 앞길을 선도해 나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시대가 내려준 특권 아닌가?
[출처] 유란시아서와 천주교(개정)|작성자 바람
출처 :젊은공동체 개혁연대 원문보기▶ 글쓴이 : 피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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