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4. '한'의 '틀' 본문
4. '한'의 '틀'
1) '한'의 짜임새
지금부터는 '한'의 '틀'을 살펴보자. '한'의 '틀'은 이미 설명된 대로'한'의 짜임새이다.
그런데 이 짜임새는 '한'이 이런 요소들로 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한'을 우리 사람의 인식법칙에 맞추어 해설하므로써 '한'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만들어낸 짜임새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인식법칙은 글쓴이가 새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천부경> 자체에 담겨 수천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것이다.
'틀'이란 말에는 [베틀(방직기)], [날틀(비행기)] 등에서 보이는 기계(機械)라는 뜻이 있다. 기계는 여러 부속품들로 만들어지고, 부속품들은 일정한 방식에 따라 결합되며, 조작법에 맞추어 운전하면 고유한 기능을 발휘한다. '한'의 틀은 '한'의 개념을 몇가지로 나누어 지결합 하므로써, '한'을 체계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기능을 수행할 것이다.
여기서 설명되는 내용들은 <천부경>과 무인도(巫人道) 해설의 필수 기초가 되므로, 좀 어렵게 쓰인 부분이 있더라도 글쓴이의 의도를 파악하도록 노력해 주기 바란다. 이 부분을 제대로 이해해야 뒤의 내용들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부분을 읽는 동안 '한'을 체험할 수 있게 되면, 어떤 책을 읽더라도 그 이전에 비해 열배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특별히 당부하는 것이다.
2) 생김과 쓰임
'한'의 틀을 짜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풀이의 뿌리가 <천부경>이고 그 <천부경>에 담긴 진리가 음양오행(陰陽五行)의 형식을 띠고 있으므로, 여기서도 음양오행의 형식에 맞추어 해설하기로 하겠다. 음양오행의 자세한 내용은 따로 항목을 두어 설명하므로 여기서는 해설하지 않고, 그 체계만을 끌어 쓰도록 한다.
'한'의 틀에서 음양에 해당하는 것은 [생김]과 [쓰임]이다. 즉 생김과 쓰임은 '한'의 상대적인 두 측면이다. 이 생김과 쓰임은 이미 소개한대로 각기 '감'과 '꼴', '수'와 '짓'으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생김을 '감'과 '꼴'로 나눈 것은 생김이 단순한 형태만이 아니라 그 재질까지도 생김에 포함시킨 것이니, 이 생김은 [됨됨이], [타고남]의 뜻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쓰임도 마찬가지로 능력의 뜻인 '수'와 실행의 뜻인 '짓'을 합한 것이니, [해냄], [써냄]의 뜻이 되는 것이다.
이 생김과 쓰임은 다음과 같이 구조화 시키므로써, 이책의 기본 체계인 삼한체계의 형식을 갖추게 된다.
+-----+ +-----+
| 감 +---------- --+ +-------------+ 수 |
+--+--+ +------+ +-+------+-+ +------+ +--+--+
+----+생김 +--+ 틀 +--+ 쓰임 +----+
+--+--+ +------+ +-+------+-+ +------+ +--+--+
| 꼴 +-------------+ +-------------+짓 |
+-----+ +-----+
* 이 그림에서 굵은 선은 '틀'이 생김과 쓰임과 함께 삼한체계를 이룸을 나타내고, 가는 선은 '틀'이 나머지 넷과 함께 오행구조를 형성한다는 것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다.
생김이나 쓰임등은 여기서 직접 설명하는 것 보다, 나머지 네 요소를 설명하는 중에 저절로 이해되도록 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를 다루기 위해서는 나머지 네 요소의 내용을 대부분 끌어와야 하므로, 내용이 중복되고 산만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면 지금부터 '한'의 네 요소를 하나씩 해설해 보자.
5. '한'의 '감'
1) 자연성
['한'의 '감']이란 달리 [자연성(自然性)]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자연성이란 자연의 본성이다.
성(性)은 글자 자체가 [마음(心)을 낳는(生) 것]이라는 뜻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옛부터 동도학에서 진리의 상징으로 쓰여왔다. 그리고 이런 관례는 동도학이 종파에 관계없이 만물을 마음이 창조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자연성]을 ['한'의 '감']으로 나타낸 것은 '자연'을 '한'과 같은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성'을 '감'으로 보는 입장이 된다. 그렇다면 '감'은 어떤 것인가?
여기서의 '감'은 그 유래를 거슬러 올라가면 지신(地神)을 나타내던 고대어, ' '에까지 닿을 것이다. ' '은 [받드는 땅]으로 바꿀 수 있다. 왜냐하면 땅을 신으로 받드는 것이 토지신(土地神)이고, 그 이름이 ' '이기 때문이다.
이 [받드는 땅]을 줄여서 [받 땅]으로 만들면, 지금 쓰이는 [바탕]과 연결된다. 이 바탕의 뜻은 지금도 '감'에 남아 있다. 옷감 . 일감 . 장난감 등에서의 '감'이 그것이다. 여기서의 '감'은 바로 이뜻을 취한 것이다.
'감'이라는 말을 받아들여 쓰면서도 다시 [성(性)]이라는 말을 함께 쓰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이 '性'이야말로 한겨레의 뿌리인 풍류의 영광을 증명해 주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性'에는 두가지 뜻이 있다. 그 하나는 이미 말한 생심(生心)으로서, [마음을 만듦]의 뜻이다. [마음을 만드는 뿌리]의 뜻은 <중용>에서 "하늘의 명을 일러 성이라 부른다"라는 말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성을 드러냄(見性)]등에서의 '性'이며, 이 '性'은 도문에서 추구하는 마지막 목표이다.
다른 하나는 [낳는 마음]으로서 이 '性'은 도문에서 으뜸가는 죄악으로 취급되다시피 했으며, 지금도 교양있는 사람들은 입에 담아서는 안될 대상으로 여기는 [성욕(性慾)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고자 하는 마음]인 '性'은 동이조선이 세계를 다스리던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의지였고, 그 힘인 성력(性力)은 우주에서 가장 신성한 에너지로 숭배되었던 성력(聖力)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신정과 풍속]에서 이미 설명되었거니와, "자지가 성을 낸다"는 말에서의 [성]이야말로 풍류의 핵심에너지였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고등종교들이 '性'에서 '慾(욕)'을 떼어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유는, 고등종교 그 자체가 동이조선의 혈통을 통한 봉건적 세계지배에 반발하면서 형성된 [고대의 독립사상]이었기 때문인 것이다.
아무튼 '성(性)'이라는 낱말은 [자기완성]과 [종족보존]이라는 인간의 양대욕구가 뭉뚱그려져 있는 전통문화의 보물이다. 이 때문에 이 말은 반드시 되살려 써야할 말이고, 이 말의 올바른 부활은 <삼일신고; 인물훈> 해설에서 완성을 보게될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이 자연성도 삼한의 체계에 맞추어 세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틀을 짜 보기로 하자.
+------------------+
| 자연성(한'의 '감') |
+--------+---------+
+-------------+-------------+
+-----+---+ +-----+----+ +----+---+
|자 유 성 | | 절 대 성 | | 완전성 |
+---------+ +----------+ +--------+
자연성은 이 그림처럼 절대성(絶對性), 자유성(自由性), 완전성(完全性)으로 하는 것이 '한'의 '감'을 이해하는데 가장 유리할 것 같다.
2) 자유성
자연성의 첫째는 자유성(自由性)이다. 자유(自由)란 [스스로 말미암음]인 동시에 [스스로에 말미암음]이니, [저절로(自)]를 다른 말로 나타낸 것이다. [저절로]에 대해서 이미 설명했으니 여기서 더 보충할 내용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신학(神學)에서 신성(神性)으로 말하는 것들 가운데 자기원인성(自己原因性), 시원성(始原性), 창조성(創造性), 본체성(本體性)등으로 말해지는 것이 이 자유성이다.
3) 완전성
자연성의 중심이 되는 것이 완전성(完全性)이다. 사람이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면서, 흠없는 존재를 동경하여 부여한 신성이 완전성이라 할 수 있는 만큼, 가장 강조될 수밖에 없는 측면이다.
전일성(全一性), 영원성(永遠性), 항구불변성(恒久不變性), 전지전능성(全知全能性), 무소부재성(無所不在性), 지선극미성(至善極美性) 등은 모두 이 완전성의 다른 표현들이다.
4) 절대성
자연성의 핵심이 바로 이 절대성(絶對性)이다. 불가지성(不可知性), 불가설성(不可說性) 등을 내용으로 하는 절대성은 바로 초월성의 다른 이름이다. 그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므로 맞설 수도, 맞설 것도 없기 때문에 [마주함(對)이 끊어졌다(絶)]고 하는 것이다.
이 절대성은 상대세계에서는 존재할 수조차도 없는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이 개념이 전해내려 온다는 것은 상대세계를 벗어난 비상대성이 발견되었음을 뜻한다.
그 발견은 일반적인 원리, 법칙이 아니기 때문에 [발견]이라는 표현 보다는 [이르름]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어쨌든 이 비상대성을 경험하는 것이 진정한 "자연으로 돌아가기"요, 그 순간 사람은 신(神), 즉 절대자가 된다.
이런 부류의 가르침은 불교나 도교에서 처음으로 가르쳐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가르침의 뿌리는 앞에서 설명한 적이 있는 동이의 신전인 '솟터'이다. '솟터'는 [소도(蘇塗)]로 기록되어 전하는데, 이 병도 선생에 의하면 이는 우리말을 한자로 옮긴 것이라 한다.
이 '솟터'가 바로 [고분(古墳)]이며, 고분이 동이족의 세계국가였던 삼한조선(三韓朝鮮)의 신전임은 박 용숙 선생이 밝혀낸 바이며, 김 용옥 선생도 '솟터'가 바로 '아크로폴리스(Acropolice)'라고 말하고 있다.
박 용숙 선생은 여기에 더하여 '솟터(밀교신전인 고분)'에서 "환골탈태(換骨奪胎)를 가는케 하는 샤먼(神仙)비법이 항아리와 같은 각종 토기를 통하여 실천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솟터'의 한자표기인 소도(蘇塗)에도 이 환골탈태의 뜻이 들어있다. [蘇]는 [되살아날 소]로 푼다. 그런데 이[蘇]는 또 [甦(소)]로도 쓴다. 이 글자는 [更生(갱생)]으로서 곧 [거듭남]이다. 즉 '솟터'는 [거듭나는 터(땅)]였던 것이다. 이 [거듭남]이 앞에서 말한바 있는 [초월적 갱생]임은 말할 필요가 없다.
이 [거듭남]이 동이의 풍속이었음은 간단히 알수 있다. '夷(이)'는 [오랑캐]이다. [오랑캐]를 다른말로 [되놈]이라 한다. 이 [되놈]은 [되 ]을 거쳐 [되남]과 연결된다고 보더라도 문제될 것이 없다. 따라서 [되놈]은 솟터의 [신이(神異)]들이 스스로를 [되난 이]로 자처한 데서 유래한 이름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거듭남]을 통하여 사람이 신과 만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부 조물자(付 造物者)]이다. 신과 하나된 사람을 신과 구별하려 드는 것은 부질없는 짓이요, 그 때문에 동이(東夷)들은 스스로를 신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6. '한'의 '꼴'
1) 자연상
자연상(自然相)이란 '한'의 '꼴'이다. 자연상이란 자연을 대표할 수 있는 모습을 말한다. 여기서 '꼴'을 나타내는 말인 '상(相)'은 우리말에서 "볼 상 사납다", "울 상 짓는다", "상판대기" 등에서 쓰이는 '상'의 뜻으로 볼 수 있다.
[相]은 나무(木)와 눈(目)을 합친 글자인데, 나무의 모습을 통해 진리를 본다는 뜻이다. 나무는 절반이 땅에 묻혀 보이지 않으며, 기본 형태가 세모(옆모습)와 동그라미(몸통)로 이루어지고, 살아서는 그늘(陰)을 만들고 죽어서는 불(陽)을 낳는 등, 진리의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풍류에서 나무가 진리의 상징으로 쓰이는 것은 이런 특징들 때문이다.
아무튼 '한'의 '꼴'을 나타내는 자연상은 여기서 시도하는 자연론의 네 분야 중에서도 가장 황당한 분야이다. 그 까닭은 '감'이나 '수'나 '짓'들은 추상적인 개념화만 시도한 것이므로, 그래도 자연의 불가지성(不可知性)을 완전히 훼손하지는 않지만, '꼴'을 다루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습으로 표현해야 하기 때문에 '한'의 초월성을 완전히 파괴하기 때문이다.
본래의 자연상은 사람의 감각기관으로 본 모습이나 인식에 의해 특수화된 모습이 아니라,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이다. 여기서 말하는 특수화된 모습이란 해 . 달 . 산 . 물. 들 . 흙 . 돌 . 식물 . 동물 등 구체적인 사물로 이미 만들어진 모습을 말한다.
이 모습들이 특수한 이유는 수리적(數理的)이나 물리적(物理的)으로 가장 단순한 형태인 진공상태와 비교할 때, 이 모습들은 측량할 수 없을 정도로 특수화 되었기 때문이다.
수리적으로 볼 때 우주 전체의 질량에서 지구가 차지하는 비율이나, 우주의 일반적인 상태인 진공에서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환경이 형성될 확률등은 무한소(無限小)이다. 또 물리적으로 볼 때 통일장이나 전자기장, 또는 광자(光子)나 쿼크(quark)등이 우리 주변의 사물들로 조합될 확률도 마찬가지로 거의 영(0)에 가깝다.
그러므로 자연상을 말하는 것은 우습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사람의 감각기관에 의해 감지할 수 없는 수준인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인 진공상태]는 실용성이 없다. 결국 여기서 시도하는 자연상의 해설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사물의 형태 중에서 자연의 여러 작용들에 가장 널리 응용할 수 있는 모습, 달리말해 감각기관이 다른 꼴과 구별인식할 수 있는 최대한도라고 생각되는 꼴을 대상으로 한다는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 따라서 여기서 해설된 자연상을 진짜 자연상과 혼동하지 말고, 진짜 자연상에 도달하기 위한 디딤돌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 자연상도 자연성과 같이 삼한의 체계를 잡아, '맑음'과 '둥금'과 '꼬임'으로 부르기로 한다.
+------------------------+
| '한'의 '꼴' |
+-----------+------------+
+---------------+-------------------+
+-------+-------++------+----------++-------+--------+
| 맑 음 || 둥 금 || 꼬 임 |
+---------------++-----------------++----------------+
2) 맑음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자연의 가장 원초적 모습은 '맑음(淸)'이다. '맑음'이란 [들여다 보임]이니, 다른 말로 나타내자면 투명(透明) 또는 허명(虛明)이다.
이 '맑음'은 '빔(空)', '참(充)', '밝음(明)'의 세 측면이 어우러진 모습이다. 어려운 철학적 논의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깨달음에 도움이 될 실용적 설명이 필요하다는 입장에서, 현대과학의 관점을 이용하여 설명해 보자.
우주란 시간과 공간 모두가 빅뱅(Big- Bang)의 잔해(殘骸)이다. 즉 시간이나 공간이란 것들이 원초의 대폭발 에너지가 성질과 모습을 바꾼 것으로서, 빛의 다른 모습에 불과하다고 한다. 빛 에너지가 물질을 만들기 전의 상태를 우리말로 나타내면 그냥 [빛이다]로 표현 된다. 이는 곧 [빛임]이다.
이 [빛임]은 [비침]이나 [빛님]으로도 표기할 수 있는 것이 우리말의 음운법칙이다. 그리고 우리말에서 [빛님]이 [빈님]으로 바뀌고, 다시 [비님]을 거쳐 [비임], [빔]이 되는 것은 다만 시간문제일 뿐이다. 달리 말해 우리말에서 [빛임]과 [빔]을 같은 뿌리의 말로 보더라도 크게 틀리다고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빛임]과 [빔]이 한덩어리로 있는 상태를 [비침]이라 할 수 있다. 속이 훤하게 비쳐 보이는 상태가 [비침]이기 때문이다. 이 [비침] 상태를 나타내는 다른 말이 '맑음'이다. [밝음]은 [빈곳]을 채운다. 빛으로 [찬] 공간(빈곳)은 밝다. 그리고 밝은 허공을 맑다고 한다.
이런 논리를 바탕으로, '한'의 자연론은 '맑음'을 진리의 새로운 표상으로 내세운다. 그리고 '맑음'의 세 측면을 [빔], [참], [밝음]으로 정리하여, 풍류의 실상을 찾아가는 길잡이로 삼기로 한다.
3) 둥금
'맑음'이 형상 이전의 원초적 모습이라면, '둥금(圓)'은 형상있는 모든 것들의 기본형태이다.
'둥금', 곧 [원(圓)]은 유교에서의 천원지방(天圓地方), 불교의 원만구족(圓滿具足), 도교에서의 주천(周天)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여러 도학에서 공통적으로 최고진리의 표상으로 쓰이고 있다.
이런 사정은 우리 전통사상인 풍류에서도 마찬가지이며, <단군세기>에서는 "무릇 삼신이 하나라는 이치는 '대원일'에 그 뜻이 있으니 ......(夫三神一體之道 在大圓一之義)"라고 하여 삼한신과 동그라미(大圓一)를 동격에 두고 있다.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니니, 풍류에서는 '둥금' 그 자체를 신성(神性)으로 이해했고, 절대자인 신의 이름으로 쓰기까지 했던 전통 중의 하나일 뿐이다.
최 남선 선생은 우리 국조 단군왕검의 칭호인 '단군(檀君)'이 '당굴' 혹은 '당굴애'의 음역으로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인 수메르에서 신을 부르던 호칭인 '텡그리(Tengri)'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텡그리'는 [푸른 하늘]의 뜻이라고 하는데, 글쓴이는 이 '텡그리'가 '둥그리', 즉 동그라미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푸른 하늘]의 모습은 둥글다. 그런데 [푸른 하늘]은 낮의 하늘일 뿐이다. 나머지 절반을 차지하는 [검은 하늘], [현천(玄天)]이 포함되지 않는다. 이것이 최고신의 명칭이 되기는 어렵다고 본다면, '텡그리'의 본뜻은 [동그라미]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텡그리'는 '딩그르(Dingir)'로도 표기되는데, 고대의 상형문자로는 [ ]로 표시되었다고 한다. 이 모습은 [공(球)]을 이루는 세 개의 원주를 묶어놓은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아니, 보다 정확한 것은 원의 가장 뚜렷한 특징을 나타낸 기호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원을 같은 크기의 원으로 둘러싸려면 여섯 개의 원이 필요하다. 이 그림에서 가운데의 원을 합친 일곱 개의 원이 바로 텡그리의 기호인 것이다.
북두칠성의 일곱별과 칠요성(七曜星: 日. 月및 水. 火. 木. 金. 土星),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보좌 앞에 놓인 일곱 개의 금촛대(요한 꼐시록)와 창조의 일곱 날, 불교에서 말하는 칠불(七佛; 비바시. 시기. 비사부. 구류손. 구나함모니. 가섭. 석가불) 등은 모두 이 동그라미를 신성시(神聖視)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원을 진리의 상징으로 삼은 이유는 작도법의 원리에서도 찾을 수 있다. 하나의 원을 작도법의 측면에서 분석하면 세가지 요소의 종합형식으로 이해된다. 즉 중심 . 반지름 . 원주가 종합되어야 하나의 원이 성립하며, 이 중에 어느 하나를 변경하면 같은 크기의 원은 그려지지 않는다.
이렇게 세가지 요소가 결합되어 하나의 의미체계를 이루는 원의 특성은 '삼한신(三韓神)'의 표상으로서 가장 적합한 도형인 것이다. 이와같은 원의 특성은 원을 진리의 상징으로 삼는 풍습이 풍류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근거가 된다.
4) 꼬임
자연상의 마지막 모습은 '꼬임(糾.索)'이다. 이 '꼬임'의 뜻을 가장 확실하게 밝혀낸 학자가 김 상일 선생이다. 선생이 <한철학>에서 밝혀낸 [자루와 뫼비우스 고리와의 관계]는 철학의 새 지평을 열어낸 쾌거이다.
우리나라의 전래 자루를 만드는 방법은, 한폭의 베(그림의 a)를 비틀어 붙여(그림의 b) 바느질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면 양쪽의 바느질선은 자루의 몸통을 나선형으로 감싸게 된다(그림의 c).
이 나선형은 생명과학의 최고봉인 D. N. A 분자구조와 일치하는 형태이다. 우리 주변의 평범한 전통문화 속에까지 이렇게 심오한 진리가 숨어있었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동녘 동(東)]의 상형문자가 자루의 모습인데, 자루를 동쪽의 뜻으로 쓴 이유를 모른다고 한다. 그런데 이 자루가 동이족의 물건경전의 하나였다고 생각하면 그 이유가 밝혀지는 셈이다.
'한'의 '꼬임'은 여기서 머물지 않고, 뫼비우스 고리의 입체 모델인 클라인 원통과 한복바지의 재단원리에 까지 이어진다. 김 상일 선생에 의하면, 한복바지는 클라인 원통을 잘라내어 얻어지는 조각들을 이어붙여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선생은 다시 이 자루와 한복바지의 재단원리가 복희팔괘와 정역팔괘의 배치원리에까지 연결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원리에 의하면 현대과학에서 어떻게 접근해 볼 엄두도 못내고 있는 [공간의 굽은 형태]까지도 밝혀진다. 그것을 응용하여 미래의 시공간 초월문명을 건설하는 것은 전적으로 전통문화의 부활에 달려있다.
선생의 정의 중에 '한'의 '꼬임'과 같은 뜻이 되는 말로 '한의 비틀림'이라는 것이 있다. 선생은 이 [비틀림]을 "한의 궁극성을 실현하지 못하고, 한의 대치물에 투사하여 한의 대치물로 대리만족을 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한의 투사(Han's projection)'라고도 부른다.
글쓴이는 선생이 말하는 대리만족을 '한의 투사'로 쓰고, '비틀림'을 여기서 말하는 '꼬임'의 뜻으로 새롭게 정의하여 쓸 것을 제안한다. 그 이유는 '비틀림'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기에는 너무 좋은 말이기 때문이다.
'비틀림'이란 말이 좋은 이유는 이 말의 발음에 있다. '비틀림'이라는 소리에 포함시킬 수 있는 말로는 '빛틀님'과, '빛트임' 및 '빗틀림'이 있다.
먼저 '빛틀님'은 [빛틀]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빛틀]이란 빅뱅에서 출발하였다는 시공간 통합체로서의 통일장(統一場), 정확히 말하면 우주광장(宇宙光場)의 우리말이다. 우주는 공간적 요소(宇)와 시간적 요소(宙)를 합한 것이요, 시간이나 공간은 빛의 변형이므로 [빛의 마당(Light-field)]이다. 빛이 시간성과 공간성의 짜임으로 나타났으니 [빛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빛틀님'은 우주의 다른 이름이다.
이 '빛틀님'에서 '빛트임'이 파생된다. '빛트임'이란 사차원(四次元) 시공간구조의 모형이라고 말해지는 클라인 원통과 관계된다.
클라인 원통은 뫼비우스 고리를 입체로 만든 것인데, 고무호스 처럼 잘 늘어나는 재료를 가지고 그림처럼 만들어 보자. 고무호스의 잘라진 자리가 안팎으로 겹치게 붙이면 이 모양이 만들어진다. 이 형태는 안팎이 없는 형태로서, 소위 말하는 사차원 형태인데 이것을 삼차원 공간에서 만들게 되면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반드시 몸통 중의 한 곳에서 만나게 된다. 이때 포기하지 말고 구멍을 뚫고 들어가서 두 주둥이가 맞닿게 하면 되는 것이다.
이 원통을 만들 때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만드는 몸통의 벽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부딫치는 모든 벽(壁)이다. 달걀껍질이나 공거죽 처럼 안팎을 격리시키는 벽인 것이다. 현대과학은 이 벽 앞에서 좌절하고 있다.
이 벽을 부수지 않고서는 어떤 물체의 내면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사과를 쪼개어 씨를 얻고, 씨를 쪼개어 세포를 얻고, 세포를 쪼개어 분자를, 분자를 쪼개어 원자를, 다시 원자를 쪼개어 소립자를 얻어도 여전히 그것은 또 다른 [겉]이지 [안]은 아니었다.
상대성 이론에서 제시하는 우주관에 따르면 이 벽은 시간의 벽이라고 한다. 우리가 살고있는 세상을 기하학에서는 삼차원 공간이라고 한다. 점(.)이 영차원, 선이 일차원, 면이 이차원, 입체가 삼차원이라는 것이다. 말도 안되는 소리지만, 그렇게 보아서 안될 것도 없으니 그대로 받아들이도록 하자.
이 삼차원은 서로 수직으로 만나는 세 개의 좌표축에 의해 표현된다. 이 세 개의 좌표축 전체에 수직이 되는 새 좌표축이 있다는 것이며, 그것이 시간의 축이라는 것이다. 결국 지금 과학은 이 시간의 축을 공간에서 찾아내지 못해서 사물의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한다는 말이 되는 셈이다.
이 구멍만 찾아 뚫으면 시공간으로부터 자유로와진다고 하는데, 인류는 이 구멍을 오래 전에 이미 찾아서 뚫어 두었다. 그 자세한 내용은 신령학에서 설명하거니와, 여기서는 그 구멍이 바로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이요, 유교에서 말하는 중(中)이며, 도교에서 말하는 혈(穴)이라는 사실만 말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이 구멍을 뚫으면 빛이 트인다. 이 빛의 세계가 사차원 세계이다. 과거로 가는 길도, 미래로 가는 길도 이 빛의 세계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이 빛의 세계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에 있다.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이 구멍을 찾아서 [트기만 하면], 우리는 하느님의 품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이것이 '빛트임'이다.
이 '빛트임'의 다른 측면이 '빛흘림'이 된다. '빛흘림'이란 빛의 세계로 통하는 구멍을 뚫어서 흘러나온 빛으로 세상을 비추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광인(光人), 실제로 쓰였던 말로는 인황(人皇)이라 한다. 이 황(皇)이 우리 역사에서는 환(桓)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빗틀림'은 클라인 원통과 뫼비우스 고리를 만들던 그 '비틀어 붙임'이다. 평면을 비틀어 뫼비우스 고리나 클라인 원통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뒤집어 생각하면 우리들의 세계가 자연의 참모습에 대해 비틀려 있다는 뜻이 된다. 따라서 '한'을 발견하려면 현실을 비틀어 볼 줄 알아야 한다.
이 [비틀어 보기]가 불교에서 말하는 "고개만 돌리면 피안"이요, <주역>에서 말하는 "말씀이 艮에서 이루어짐(成言乎艮)"이다. 이艮(간)의 본래 글자 뜻은 [뒤돌아보다] 또는 [외면하다]이다.
7. '한'의 '수'
1) 자연능
'한'의 '수'란 자연의 가능성 또는 힘이다. 이를 자연능(自然能)이라 부르기로 하자. 자연이 어떤 것을 이루어 낼 수 있는 힘이 자연능이다. 이 자연능의 다른 이름이 본능이다. 본능이라고 말하면 보통 동물적 충동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는 언어관습의 영향을 받은 때문일 뿐이고, 본능의 원래 뜻은 여기서 말하는 '한'의 '수'와 같은 뜻이다.
본능이 동물적 충동의 뜻으로 쓰인 것은 두가지 생각의 영향을 받은 탓이다. 그 하나는 사람과 동물을 구별하는 생각인데, 사람은 정신작용이 있어 다른 동물과 구별되므로 정신작용을 나타내는 본성(本性), 본심(本心)을 주로 쓰게되어 본능이란 표현을 별로 쓰지 않게 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육체를 죄악시하는 생각이다. 정신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은 육체적 요소, 특히 식욕과 색욕 등을 동물적 욕구로 보아 멸시하게 되었고, 자연히 육체적 욕망의 뜻을 가지는 본능이란 말을 멀리하게 된 것이다. 본(本)이라는 글자가 [뿌리]의 뜻이고, 뿌리는 [자지]의 상징이기 때문에 풍류에 대항하여 성립한 고등종교 문화에서는 이 말이 거부감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능력 그 자체는 육체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모두에 쓸 수 있는 말인만큼, 본능이란 말을 동물적 능력의 뜻으로 한정시킬 이유는 없다. 이책에서는 본능이란 말을 육체적, 정신적 능력은 물론이요, 초월적 능력의 의미까지 포괄하는 뜻으로 되살려 쓰려고 한다. 즉 이 책에서 쓰는 [본능]은 ['한'의 능력]이라는 뜻으로 이해해 달라는 말이다.
이 자연능도 삼한의 체계로 틀을 짤 수 있으니, 그 세 측면을 '텃수(性能)', '될수(相能)', '쓸수(作用能)'로 하면 각기 자연성(自然性), 자연상(自然相), 자연작용(自然作用)에 대응시킬 수 있다.
이렇게 틀을 짜면 자연능이 바로 자연법칙과 같은 뜻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법칙(法則)이란 사물의 존재나 작용의 방식인데, 그 방식이라는 것이 사물의 바탕이나 모습에 간직되어 있는 '수(가능성)'가 드러나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자연능은 자연법칙이요, 자연법칙은 자연의 본성(本性)과 본상(本相)이 드러나는 버릇이다. 단 이 버릇은 이미 드러난 결과보다는, 잠재되어 있으면서 반복적으로 비슷한 결과를 만들어 내는 원인심상(原因心象)에 더 많은 비중을 두는 개념이다.
여기서 말하는 원인심상이란 건축에 있어서의 설계도와 같은 것이다. 대지(垈地)의 조건과 자재의 변화에 따라 형태 및 외관상 약간의 변화는 있을지라도, 같은 설계도를 써서 지은 집은 비슷하다. 이와 같은 것이 자연능으로서의 '수'이다. 같은 '수'가 만들어내는 자연의 모습은 같은 설계도로 지은 집처럼 비슷하다는 뜻이다.
2) 텃수
자연의 본능(本能)중에서 '바탕(性)'의 능력이 '한'의 '텃수'이다. '텃수'는, 앞에서 자연성을 자유성, 완전성, 절대성으로 나누었으므로 그 본성들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이 된다. 이를 세 측면으로 나누어 틀을 짜자면 유무상통성(有無相通性), 무내외성(無內外性), 무소부재성(無所不在性)으로 잡을 수 있다.
① 유무상통성
자연에서는 있음(有)과 없음(無)이 반대개념이 아니라 상대개념이 된다(물론 개념이란 말이 이상하지만, 지금부터는 이 사실은 더 거론하지 말기로 하자).
동도학에서는 유무(有無)가 상통(相通)한다는 생각이 오래전부터 진리로 받아들여지고 가르쳐졌기 때문에, 있음과 없음의 문제가 배우는 사람들을 크게 괴롭히지 않았다. 불교의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나, 도교의 <노자>에 나오는 "유무동출이이명(有無同出而異名; 있고 없음이 같이 나왔으되 이름만 다르다)"은 있음과 없음이 자연의 드러난 부분과 드러나지 않은 부분의 차이에 불과하다는 가르침이다.
그런데 서양에서는 [모든 존재가 최초의 원인자인 '실체(substance)'에서 나왔다]는 생각이 철학적 사고의 뿌리를 이룬다. 따라서 무(無)는 존재의 특별한 형태가 아니라 비존재(非存在)로 간주되고, 이와같은 관점에서는 유무상통이라는 생각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게 된다.
최근의 이론물리학에 와서야 서양에서도 공간에 대한 이해가 바뀌면서, 있음과 없음이 같은 존재의 두 측면이라는 생각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공간은 전자기장(電磁氣場) 또는 통일장(統一場)이라고 규정되고, 장(場; field)은 [물질화 되지 않은 에너지의 충만상태]로 이해되고 있다. 이 장(field) 중에서 에너지가 집중된 곳이 물질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물질화하지 않은 장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로 남아 있는데 그것이 진공이라는 것이다.
이와같은 공간에 대한 서양인들의 태도변화는 아인슈타인에 의해 본격화되고, 폴 디랙(Dirac paul)의 반입자(反粒子) 이론에 의해 완성되었다. 철학적으로 헤겔이 도입한 유무상통성이 디랙의 방정식에 의해 증명되므로서 실체(substance)의 개념이 무너져내린 것이다.
그러나 현대물리학이 동양사상과 알몸으로 만나는 밀회장소는 [불확정성 원리]라는 간판을 내건 노름방이다. "어떤 과학적 관찰이나 실험도 관찰자의 주관(관찰행위)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고 말하는 이 불확정성의 원리는, 아인슈타인이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며 발버둥쳐 저항했지만 끝내 현대물리학의 주류로 정착하고 말았다.
이 이론은 [사람의 생각]이 객관세계를 구성하는 일부요소라는 사실을 밝혀내므로서, 마음을 중시하는 동양의 도학과 서양의 자연과학이 동침할 자리를 깔아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이후의 연구성과가 극히 미진하다는데 있다. 과학은 아직도 정신요소의 계량화를 시도할 엄두도 못내고 있으며, 동도학은 불확정성 원리를 이용한 진리체계를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양자론(量子論)이 지나치게 복잡하고 전문적인 논리학과 수학을 이용하기 때문에 다른분야의 학자들이 끌어다 쓰기가 어렵고, 동도학은 용어 선택시에 개념규정을 소홀히하여 교설(敎設)의 의미가 명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이유는 피상적인 것일 뿐이요, 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두 이론을 결합해야할 주체인 인간 그 자체에 대한 탐구소홀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있음과 없음]이라는 철학적 과제에 초점을 맞추는 경우에는, [있고 없음]이 사람의 사고능력과 어떻게 결부되는지를 밝혀야 올바른 해답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다시말해 [있음과 없음]이 객관적 상태를 기술하기 위한 개념이 아니라, 주관적 판단을 표현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임을 알게되면 둘을 종합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이다.
'있음(有)'은 [사람이 인식할 수 있음]일 뿐이다. 그 인식은 보거나(視), 듣거나(聽), 맛보거나(嘗), 냄새맡거나(嗅), 만지거나(觸), 생각할(想) 수 있음이다. 이 범위를 벗어나면 '없다(無)'고 규정된다.
현대철학에서 "인식되지 않은 것은 없는 것이다"라는 명제와 "인식되지 않아도 있는 것은 있는 것이다"라는 명제가 싸우고 있지만, 이것은 별로 의미가 없는 논쟁이다. 왜냐하면 초점이 빗나갔기 때문이다. 문제는 [인식될 수 있음]과 [인식될 수 없음]의 문제이지, [인식하고 있음]과 [인식하지 않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인식될 수 있음]과 [인식하고 있음]은 표현은 비슷하지만 그 뜻은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 화성에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이 있는 것이 아직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있다. 이때 그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답은 {있다}이다. 지금 인식되지 않았지만 '사람'은 인식될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절대무(絶對無)는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없는 것이다. [절대무]라는 이름과 개념은 있을지라도, 그 이름은 [아예 인식될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없는 것이다. 이것은 어떻게 말을 바꾸더라도 뒤집을 수 없는 진실이다.
인식의 문제에서 하나 더 생각해야 할 내용은 [인식되지 않은 것]과 [인식되지 않는 것]의 구별이다. 철학은 이쪽으로 길을 잡아야 했는데 [인식될 수 있음과 없음]이라는 비슷하지만 다른 표지판을 따라가면서 미로에 빠졌던 것이다.
[인식되지 않은 것]은 인식될 수 있는데 아직 인식하지 않은 것이요, [인식되지 않는 것]은 기억되지도 예상되지도 않는 것이다. 여기서의 초점은 인식 그 자체이다. 이 문제는 불립문자의 해설에서 이미 다루었으니 여기서 반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인식되지 않은 것을 인식하는 것은 발견이다. 모든 학문적 업적은 발견이다. 그러나 인식되지 않는 것을 겪는 것은 창조이다. 여기서 발견과 창조를 구별하는 이유를 오해하게 되면, 또다시 유무의 굴레에 빠져든다. 겪는다는 것이 인식이 아니면 무엇이냐고 묻게 되면 다시 대책이 없다. 그럴 때 해줄 말은 "문 닫고 들어오너라" 밖에 없다. 이제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
철학의 으뜸가는 논쟁거리인 있음과 없음의 문제는 사람의 판단기준에 초점을 맞출 때 해결된다. 그 판단의 기준은 사람이 인식하는 여건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바뀌고, 그때마다 있음과 없음의 판정은 백 남준의 비디오 아트 작품화면처럼 멋대로 바뀐다.
물론 여기서의 기준변경이 논리학에서 말하는 논리적 오류에 해당하는 것임은 글쓴이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기준변경에 따라 변하는 유무의 두바뀜을 소개하고자 한 것이다.
유무상통성은 이 여러 관점 중에서 두 번째 관점을 이용하여 접근할 수 있다. [관점 2]에서는 [관점 1]에서 기준이 되었던 '집'이라는 [사물] 대신, '터'라는 [공간]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렇게 관점을 바꾸었을 때, 특정 사물의 '있음'과 '없음'이 [공간]을 통해 한꺼번에 '있음'으로 돌아서는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집'이라는 [특정사물]을 '물질'이라는 [일반사물]로, '터'라는 [특정공간]을 '공간'이라는 [일반공간]으로 바꾸어 주면, '있음과 없음'이 [공간]을 통해 종합된다고 말해도 된다. 결국 사물의 '있음'은 [공간]이 {유성(有性)}으로 인식된 것이고, '없음'은 [공간]이 {무성(無性)}으로 변성한 것이된다.
이와 같이 유무(有無)의 대립이 공간을 통해 해소되고, 내외(內外)의 대립이 뒤에서 설명되는 구멍(孔)을 통해 해소되므로써 대통일시대가 열리게 되고, 그 대통일시대의 토대는 공간의 가능성인 '텃수' 개념이 이루게 된다. 이 '텃수'의 시대를 다른말로 하자면 가이아(Gaia; 대지의 여신)가 문명을 주도하게 되는 {신가야(新伽耶)시대}인 것이다.
② 무내외성
'텃수'의 두 번째 요소는 안팎의 구별이 무의미하다는 무내외성(無內外性)이다. 이 무내외성은 앞의 자연상에서 설명된 '한'의 '꼬임(비틀림)'에서 파생되는 자연능이다.
무내외성을 가능케하는 자연상의 두 요소는 '빛틀림'의 두 측면인 '비틀림(꼬임)'과 '빛트임(뚫림)'이다. '비틀림(꼬임)'은 뫼비우스 고리에서 보이는 [꼬임]이요, '빛트임(뚫림)'은 클라인 원통에서 반드시 뚫려 있어야 하는 [구멍]으로서, 이 [꼬임]과 [구멍]은 각기 2차원과 3차원의 분리와 대립을 해소하는 통일문(統一門)인 것이다.
부부(夫婦)를 다른 말로 내외(內外)라고 한다. 내외를 연결시켜 주는 신체기관은 보지인데, 그 때문에 풍류에서는 이를 옥문(玉門)이라고 높여 불렀고, 풍류의 전통을 이어받은 <노자>에서는 옥문을 다시 곡신(谷神) 또는 현빈(玄牝) 등으로 신격화하고, 다시 이 구멍에 철학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 [바로 그 빈곳(當其無)]이다. [바로 그 빈곳]은 <노자> 제 11장에 나오는 말로서, 수레바퀴나 그릇이나 방의 쓰임새는 모두 [빈곳]이라는 사실을 강조한 말이다.
③ 무소부재성
무소부재성(無所不在性)이란 [없는 곳이 없다], [모든 곳에 있다]는 자연의 본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를 자연능으로 이해할 때에는 [性] 대신 [能]이란 말을 써야겠지만, 지금 다루는 주제가 '텃수'이므로 [性]을 써도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이 무소부재성은 어렵게 생각하면 끝이 없지만, 앞의 유무상통성에서 설명된 내용을 이용하면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사물의 유무가 공간에 초점을 맞출 때 통합되었었다. 사물이란 것도 이 공간까지 분석하고 나면, 사물의 개체성이 소멸되고 만다. 물질의 최소단위인 전자와 양전자라는 소립자도 빈공간에서 쌍창생되므로, 결국 모든 사물의 바탕은 진공(眞空)인 것이다.
전자와 양전자(입자와 반입자)로 분할되기 이전의 공간에서는 사물의 개체성이 없어지므로서 만물의 통일성만 남게된다. 바로 이런 공간이 유무의 대립개념을 해소시켜 준다. 이 때에는 우주 전체가 [나]이다.
자연의 '터'는 바로 이 공간과 같은 것이다. 이 공간은 쪼개지는 법이 없이 한 덩어리이며, 대우주 전체가 한 자리일 뿐이다. 그 한 자리를 나누어 보고 쓰는 것은 사람의 생각일 뿐이다.
이 하나인 자리를 이해할 때, 사람은 자기자신이 모든 곳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어느 한 자리에 집착하여 그 자리에만 머물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와같이 특정한 자리에서 자기가 보고자 하는 것이 나타난다는 사실을 물질을 통해 확인한 것이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원리]인 것이다.
3) 될수
자연상이 가진 가능성이 '한'의 '될수'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꼴값'이 바로 '될수'인 것이고, '꼴'을 달리 '됨됨이'라고도 하기 때문에 '될수'로 이름붙인 것이다.
자연상은 앞에서 '맑음', '둥금', '꼬임'의 세가지로 정리하였다. 따라서 '될수'도 이 세가지 모습이 다른 여러 모습을 지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된다. 이 중에서 '맑음'은 앞에서 설명된 '텃수'의 뿌리가 되고, '꼬임'은 뒤에 설명될 '쓸수'의 바탕이 된다.
앞에서 설명한 '텃수'의 '자리'가 바로 '터'이고, 그 '자리'를 순수공간이라고 볼 수 있다. 순수공간에 대해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이미지가 바로 '맑음'인 것이니, '맑음'의 '될수'는 '한'의 '텃수'와 같아지는 것이다.
'꼬임'이 '쓸수'의 바탕이 되는 것은, '꼬임'이 자연상 중에서도 보통모양이 아니라 특수한 모양이기 때문이다. 물체에 의해 모양을 갖추지 않은 형태를 생각할 수 있는가? 그것이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데도, 사람의 정신은 모양을 만들어낸다. 정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면서도, 정신과 물질의 종합형태를 만들어낸 것이 바로 클라인 원통 모형이다.
이미 언급된 바와 같이 클라인 원통은 4차원 입체이고, 4차원이라 하는 것은 현대과학에서 공간의 세 방향에 수직축이 되는 시간축에 의해 형성된다.
공간과 시간이 결합하여 일어나는 것이 변화(變化)이다. 변화는 공간의 한 형태인 물상(物像)이 쓰임을 받아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꼬임'이 '쓸수'의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옳은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가 보는 모든 사물의 모습을 만들어 내는 '될수'의 중심은 자연상 중에서도 '둥금'의 본능이 되는 셈이다. 여기서는 이런 관점에서 '될수'를 [중심성], [주변성], [관계성]의 셋으로 정리하려 한다.
이 셋은 각기 원(둥금)의 세가지 구성요소인 중심점, 원주, 반지름이 가진 성질에 도학적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① 중심성
원의 중심이 가지는 성질이 중심성(中心性)이다. 원의 다른 구성요소들은 여러 개의 부분으로 쪼갤 수 있음에 비해, 원의 중심은 하나의 원에서 오직 하나의 점으로 나타난다.
반지름은 무수히 많이 그려낼 수 있고, 원주도 하나이지만 여러 개의 호(弧)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중심은 둘 이상을 그릴 수도 없고, 둘 이상의 조각으로 쪼갤 수도 없다. 이 유일성(唯一性)이 특정사물에 나타나면 자기중심성(自己中心性) 또는 주체성(主體性)이 된다.
또 이 중심은 원을 그릴 때 맨 처음 정해지며, 한 번 정해지면 원을 다 그릴 때 까지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다. 여기서 시원성(始原性)과 불변항구성(不變恒久性)이 나온다.
이 중심성이 동양사상에서 최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가운데 중(中)이다. 유교의 집중(執中)과 중용(中庸), 불교의 중도(中道), 도교의 황정(黃庭)등이 모두 이 중심성의 별칭인 것이다.
이 중에서 도교의 [황정]을 좀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황(黃)은 오행의 중앙인 토기(土氣)의 색이다. 이 황색의 토기가 뭉쳐서 금단(金丹)이 되는 것이다. 정(庭)은 마당(場)과 같은 뜻인데, 밑바탕을 나타낸다. 사람의 기본 바탕이 되는 토기의 상징이 황정이므로 중(中)의 뜻이 되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이 중심성이 고대 자연철학의 원자(原子)로 나타난다. 원자(原子)의 한자 뜻은 [맨 첫 씨], [둥근 씨]로 풀이할 수 있다. 이는 여기서 말하는 중심성과 그 뜻이 같다. 따라서 아톰(Atom)을 원자(原子)로 옮긴 것은 탁월한 번역이라 할 수 있다.
그리이스어에서 '아톰(Atom)'은 [만물의 가장 기본이 되는 입자]를 뜻하는데, 그리스 문화의 뿌리가 되는 수메르 문화와 우리문화와의 관련성을 근거로 추측한다면, 이 말의 뿌리는 우리말의 '으뜸'일 것으로 생각된다. '으뜸'은 시원, 궁극의 뜻이니 '아톰'과 소리나 뜻이 같다. '으뜸'의 모음 [ㅡ]를 [.]로 바꾸어 주면 ' '이 되고, 이는 히브리인들이 최초의 인간조상을 부르는 이름인 '아담(Adam)'과도 연결된다.
따라서 원자는 물질의 최소단위를 부르는 이름에 국한되지 않고, 중심성을 인정할 수 있는 모든 존재(사물)의 기본단위로 규정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그런데 원자(原子)라는 말은 물리학에서 물질의 최소단위를 나타내는 말로 통용되고 있으므로, 이책에서는 비물질적 요소까지를 포괄하는 기본단위를 나타내는 말로 원자(元子)라는 말을 쓰기로 한다. 이 원자(元子)는 원자(原子)의 뜻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한글로는 변함없이 [원자]로 나타내고, 그러면서 물리학적 의미에 국한되지 않기 때문에 한자를 바꾼 것이다.
이 원자(元子)는 존재의 기본단위이므로 크기에 제한이 없다. 우주전체도 하나의 원자, 한 사람도 하나의 원자, 전자나 광자 등의 소립자도 하나의 원자로 취급된다. 원자를 이렇게 규정하는 것은 수학에서 말하는 [점이란 위치는 있으나 크기는 없다]는 명제를 과감히 포기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 뜻 대신에 원자라는 말을 쓰므로서, 언젠가는 수학적 개념들까지도 수정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대신하고자 한다.
원자의 기본형태는 동심원(同心圓)이다. 동심원은 반지름을 어떻게 잡느냐에 따라 좁쌀보다 작게 그릴수도 있고, 또 전체우주 보다 크게도 그릴수 있다. 원은 다른 모든 형태의 기본이기도 하다. 원주를 꺾는 방법만 바꾸어 주면 어떤 폐곡선도 만들 수 있으니, 어떤 사물의 형태로도 바꿀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도형이 동심원인 셈이다.
② 주변성
원주(圓周)의 '될수'가 주변성(周邊性)이다. 원주는 원의 테두리인데, 테두리는 어떤 사물의 가장자리, 그 중에서도 끄트머리에 자리한다. 이 테두리는 원자의 입장에서 보면 원자 자체의 겉모양을 결정하면서, 한편으로는다른 원자와의 상호작용을 담당한다. 이런 원주의 역할을 도학적으로 서술한 것이 주변성이다.
이 주변성도 세 측면으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왕래불이성(往來不異性)인데, 이는 가는 것이 곧 오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성질이다.
원주상에서의 운동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결과가 된다. 앞으로 나간만큼 떠난 그 자리로 다가가고 있으니, 가는것과 오는 것을 구별할 이유가 없다. 또, 원주상의 한 점이 움직이면 다른 점이 그 자리를 메워주게 된다. 한 점이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점이 따라 움직여주지 않으면 그 원주는 끊어지고 말 것이다. 떠난 만큼 이미 돌아와 있기 때문에 원주가 유지되는 이 성질도 왕래불이성의 한 모습이다.
주변성의 둘째는 평등성(平等性)이다. 자연상의 첫째인 '맑음'의 균일성(均一性)이 '둥금'의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 원주상의 모든 점들이 원의 중심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놓이는 성질이 바로 평등성이다.
거리를 등차(等差)로 보는 것이 억지인 것 같으나, 거리(또는 격리정도)야말로 등차판정의 핵심요소이다. 산악숭배나 동방(東方)숭배 등은 태양과 거리가 가까운 자연물에 높은 등급을 매긴 것이요, 거울이나 불꽃을 신성시하는 것은 태양과 성질이 가까운 사물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원주의 이런 평등성은 지금까지 한 번도 증명되지 못한 인간의 평등성에 대한 증명으로 사용될 수 있다. 하나의 원주를 하나의 부류로 보고 원주상의 각 점들을 구성요소로 보게되면, 구성요소들 끼리의 본질적 평등성을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그 부류를 인류라고 하면, 인간들 끼리의 자연적(본질적) 평등성을 인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변성의 세 번째 내용은 자타일체성(自他一體性)이다. 이 자타일체성은 중심성에서의 동심원에 대응하는 동주원(同周圓)을 그려보면 쉽게 이해된다.
하나의 원자는 우주 전체의 모든 원자들과 원주로 연결될 수 있다. 이는 모든 원자가 다른 원자들의 테두리에 포함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 성질이 주변성의 핵심의미이다.
이 주변성을 관점을 달리하여 살펴보면, [어떤 원자의 중심성이 다른 원자의 입장에서는 주변성이 된다]는 원칙이 성립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두 개의 원자 사이에는 서로가 서로의 주변이 되는 관계가 성립하는데, 이런 관계가 성립되는 성질을 [상호주변성(相互周邊性)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원자의 자기중심성과 상호주변성은 사실상 우리들이 경험하는 모든 관계의 기본성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성질이 천지자연의 모든 존재와 변화를 만들어 내는 창조의 원동력인 것이다.
③ 관계성
원의 세가지 구성요소 중에서 남은 것은 반지름이다. 이 반지름에서 '될수'의 세 번째 요소인 관계성(關係性)이 나오게 된다.
관계성이란 반지름이 원의 중심과 원주를 연결(매개)하는 성질이다. 원의 중심과 원주상의 한 점을 매개하는 것은 기하학적으로는 대단한 일이 아니지만, 하나의 원을 원자로 보는 이 자연론의 입장에서는 원자와 원자를 매개하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앞에서 설명된 중심성과 주변성을 통합하는 상호주변성을 도출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반지름으로 이해되는 관계성의 역할이다. 이 관계성에 의해 우주를 구성하는 모든 원자들은 하나의 통일된 상호작용구조 속으로 융합될 수 있다.
이 상호작용구조는 자기중심성을 반영하는 동심원과 상호주변성을 반영하는 동주원을 함께 그린 모습으로 나타낼 수 있다. 이렇게 그려진 상호작용구조를 [관계구조(關係構造)]라고 부르기로 하자.
이 관계구조는 자기중심성과 상호주변성을 결합시켜 만들어낸 것이지만, 반대로 관계성의 두 요소를 뽑아낸 것이 자기중심성과 상호주변성이라 할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 관계구조야말로 자연의 기본형태로 이해될 수 있다.
바로 이 관계구조의 모양이 유교에서 말하는 복희씨의 그물이요, 불교의 화엄경에서 말하는 인드라의 그물이다. 이 모양을 대우주에서 확인한 것이 우주의 거품구조인데, 거품구조란 말은 사실 여러모로 적합하지 못한 말이며, 그물구조로 바꾸어 주어야 현대과학이 말하는 여러 원리, 법칙들과 모순을 일으키지 않는다. 어차피 그런 것들은 글쓴이의 담당분야가 아니니 더 말하지는 않기로 한다.
4) 쓸수
자연의 작용가능성(作用可能性)을 '쓸수'라 한다. 자연능(自然能) 중의 작용능(作用能)이 '쓸수'인 것이다.
자연의 존재와 변화의 궁극원인이 소립자 수준을 넘어선 에너지공간 수준까지 추적된 지금, 이 물리학의 성과를 수용하면서 동도학의 정신론과 연결시켜 주는 이론체계의 수립은 현대학문의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그 이론적 모형은 클라인 원통과 상대론적 양자론 및 질량불변의 법칙을 결합시키므로써 얻을 수 있다. 그 수학적, 물리학적 접근은 여러 가지로 글쓴이의 능력 밖이므로, 여기서는 도학적 해명만을 시도하기로 한다.
먼저 앞의 자연상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클라인 원통은 '한'의 꼬인 모습이다. 이 '꼬임'에서 자연의 모든 작용이 생겨난다. 그런데 이 '꼬임'은 어디까지나 우리들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꼬인 것이지, '한' 그 자체가 꼬여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한'에서 사람이 생겨날 때 음양의 두 기운을 꼬아서 새끼를 낳은 것이다. 풍류에서는 이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아기를 낳으면 반드시 짚으로 꼰 새끼에 숯이나 솔가지를 끼워서 대문에 금줄을 치는 것이다. 새끼(索)와 새끼(子)가 같은 말로 되어 있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이 꼬임을 제대로 이해한 셈이 된다. 현대과학의 생물학에서 유전암호를 담고있는 핵산(DNA)의 분자구조가 이중나선, 즉 두겹 새끼의 형상이라는 사실은 '꼬임'에 접근하는 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생겨날 때 꼬여서 태어났기 때문에, 사람이 세상을 보면 반드시 꼬인 꼴로 나타나는 것이며, 바로 그 때문에 사람이 진리를 발견하려면 한바퀴 돌려서 사물을 보는 고개돌리기의 과정이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진리의 [眞(진)]의 본래 뜻이 [뒤집어질 전(顚)]인 것이다.
이 '꼬임'이 지닌 '쓸수'는 첫째 전일성(全一性), 둘째 대칭성(對稱性), 셋째 순환성(循環性)으로 정리할 수 있다.
① 전일성
전일성(全一性)은 클라인 원통의 속성이다. 클라인 원통에서는 표면과 이면의 구별이 없어진다. 클라인 원통의 한 점에서 똑바로 앞으로 나가면 두 구멍 중의 하나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다른 한 구멍을 통해 빠져나와서 제자리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클라인 원통의 원래 주제가 표면(밖)과 이면(안)의 통합이었기 때문에 표면과 이면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 두 요소는 유무(有無), 시공(時空), 심신(心身)등 모든 상대적인 요소로 바꾸어 놓아도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시말해 우리들이 상대적이라고 느끼는 모든 요소들은 클라인 원통과 같은 '비틀림'을 이해할 때 통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클라인 원통의 어떤 면이 이와 같은 상대성의 통합을 가능케 하는 것인지를 찾아 내어야 전일성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 위대한 통합자(조절자)가 바로 여러 번 강조된 '구멍'이다. 클라인 원통의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몸통벽에 뚫어야만 하는 '구멍', 그것이 바로 양성통합(兩性統合)의 관문이며, 그것을 부르는 이름들이 무(無), 공(空), 중(中), 혈(穴) 등인 것이다.
벽에다가 구멍을 뚫는다는 생각이 풍류의 중요한 풍습을 낳았는데, 그것이 바로 석벽에 뚫린 동굴을 이용하거나, 석벽에 구멍을 뚫어 만든 굴에서 수련하는 풍습이다. 단군신화의 수련동굴도 이런 사실을 알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관점이 옳다는 증거도 이미 나와 있으니, 김 상일 선생이 밝힌 한복바지의 재단원리가 <천부경>의 수리와 일치한다는박 용숙 선생의 연구결과가 바로 그것이다.
이 중심혈(中心穴)이 중요한 이유는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구멍'이나 우주의 다른 모든 위치나 자연의 전일성이 반영되어 있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구멍 자체의 객관적인 의미는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의식이 상대성을 토대삼아 사물을 인식하면서 전일성이 파괴되어 통합의 필요가 생겼으므로, 인간의 주관과 관계될 때에만 이 구멍이 중심혈로서의 의미를 가진다는 말이다.
이 중심혈의 과학적 의미는 폴 디랙의 상대론적 양자론(相對論的 量子論)에 압축되어 있다. 디랙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과 20세기 물리학의 또 다른 혁명이랄 수 있는 원자와 원자 이하의 물질의 행동방식에 관련된 양자이론을 조화시켜 상대론적 양자론을 제창하였다.
상대론적 양자론의 유용성은 전자의 성질을 설명하므로써 입증되었다. 전자는 고유의 회전운동을 하는데, 우리들의 일상경험과는 달리 두 바퀴를 돌아야 본래의 모습이 나타난다는 특성이 있고, 상대론적 양자론은 그 이유를 수학적으로 밝혔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이 '한'의 자연론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클라인 원통을 반으로 쪼갰을 때 만들어지는 뫼비우스 고리의 특성이 전자의 특성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즉 일반 고리에서는 출발점에서 한 바퀴를 돌아오면 출발점에 닿지만, 뫼비우스 고리에서는 두 바퀴를 돌아야 제자리에 되돌아 오는 것이다.
상대론적 양자론의 결론은 반입자이론(反粒子理論)이라고 할 수 있다. 반입자 이론은 상대론적 양자론의 방정식이 반드시 실수와 허수의 쌍으로 된 답을 얻게 되어있는 것을 '새로운 입자의 존재가 예견된다'고 이해하였고, 실제로 실험실에서 그 입자를 만들어 내므로서 입증된 이론이다.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반입자는 다른 소립자가 없던 빈 공간에서 갑자기 튀어나왔고, 그 때문에 반입자는 진공에 대한 견해를 바꾸어 주었다. 즉 진공은 절대무가 아니라 물질이 아닌 에너지의 바다로서, 물질이 형성될만큼의 에너지만 주입되면 물질을 창조해 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만들어진 반입자는 전자와 반대되는 성질을 가진 양전자(陽電子)부터 발견되었는데, 양전자는 모든 물리적 성질이 전자와 정반대이며, 전자와 만나게 되면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하고 광자(光子)가 되어버린다고 한다.
상대론적 양자론의 자세한 내용은 글쓴이가 모두 알지 못하지만, 상대론적 양자론이 상대성이론과 불확정성원리를 조화시킨 이론이라는 점에 우리는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익히 알려진대로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의 통합에 대한 이론이다. 그리고 불확정성원리는 관찰자의 주관적 의식이 객관세계의 존재방식, 즉 위치나 운동량 등을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글쓴이는 이 둘을 통합한 상대론적 양자론이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에 대한 올바른 견해가 아직 성립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하고, 그 의미를 밝혀보려 한다.
먼저 반입자이론 중에서 입자(전자)와 반입자(양전자)가 만나면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하고 광자로 바뀐다는 점에서, 우리는 [존재와 비존재가 빛(광자)을 매개로 만나고, 또 둘은 빛(광속)을 경계로 나뉘어 있다]는 견해를 얻을 수 있다. ...... {추정 1}
다음에는 전자의 회전방식이 뫼비우스 고리 위를 움직이는 것과 비슷하다는 사실과, 클라인 원통이 두 개의 뫼비우스 고리로 쪼개질 수 있다는 사실을 묶어, [입자와 반입자가 클라인 원통을 둘로 쪼개 얻어지는 두 개의 뫼비우스 고리에 대응한다]는 견해를 얻을 수 있다(단 이때 주의할 점은 클라인 원통을 쪼개는 분할선이 어떤것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다는 것이다). ........ {추정 2}
셋째로 사람의 주관적 의식이 객관세계의 물질의 존재방식을 결정짓는다는 불확정성원리와 상대성이론이 조화(결합)된 것이 상대론적 양자론이라는 사실에서, [입자와 반입자 모두가 사람의 주관의식이 창조(존재방식을 결정)한 객관적 실체이다]라는 견해를 얻을 수 있다. ...... {추정 3}
이 세가지 {추정}들로부터 상대론적 양자론의 의미에 대한 다음과 같은 도학적 가설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가설 1} : {추정 2}의 클라인 원통을 분할하는 경계선이 바로 {추정 3}의 실체를 창조하는 '주관의식'이다.
{가설 2} : {가설 1}의 '주관의식'은 {추정 1}의 '빛'이다. 이 '빛'은 두 측면으로 나누어지는 데, 그 하나는 매개성 빛(광자)이고 다른 하나는 분할성 빛(광속도)이다.
{가설 3} : {가설 1}의 '주관의식'은 또한 클라인 원통의 구멍이다. 이 구멍은 공간에서는 결코 찾아지지 않지만 분명히 공간속에 있고, 시간이 만든 벽을 허물면 발견된다.
{가설 4} : {가설 3}의 시간의 벽은 바로 실체이고, 실체의 내면이 클라인 원통의 구멍이다. 실체의 내면이란 바로 원자핵이고, 이미 과학은 실체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이다.
{가설 5} : {가설 4}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상대성이론부터 시작되는 핵물리학은 물리법칙이아니라 심리법칙이다. 바로 이것이 물리학의 종점이며, 핵물리학부터는 기계적으로탐구해서는 안되는 정신세계이다.
여기서 제시된 다섯가지 가설을 하나로 묶으면 <천부경>의 핵심귀절인 "본심본태양"이 얻어진다. 결국 "본심본태양"은 상대론적 양자론의 부축을 받아 다시 일어나는 것이며, 그 의미를 위의 가설들을 이용하여 나타내면, [주관의식 = 중심혈 = 빛 = 통일장]이 된다. 이것이 '한'의 자연론이 제시하는 [대통일이론(大統一理論)]이다.
이 대통일이론을 확장, 부연한 것이 이책 <제3부>에서 다루는 신령학(神靈學)이다. 이 신령학은 과학의 끝에서 재출발해야 할 새문명의 새학문으로서, 지금까지 이룩된 과학적 성과를 인간을 위해 사용하기 위한 유일한 대안이다.
이 대통일이론의 본체모형으로는 클라인 원통보다 적합한 것이 없음은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모형에서는 모든 상대성이 종합되어 전일성을 나타내게 되는데, 이를 물리법칙으로 나타내면 [질량불변의 법칙(열역학 제1법칙)]이 된다.
열역학(熱力學)적으로 닫힌 체계(에너지 출입이 일어날 수 없도록 고립된 체계)에서 어떤 열역학적 변화가 일어날 경우, 변화가 있기 전과 후의 에너지 총량은 변화가 없다는 것이 질량불변의 법칙이다. 이는 우주가 닫힌체계라고 볼 때, 우주 안의 모든 변화는 부분적인 관점에서는 변화이지만, 전체적 관점에서는 무변화라는 뜻이다.
이렇게 되면 [변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라고 생각된 것]이 있는 셈이니, 양자론에서 말하는 "주관의식이 객관적 실체의 존재방식을 결정한다"는 원리가 거짓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원리 또한 전일성의 한 측면이니, 우주에 무한한 형태의 변화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한결같다]는 뜻으로서의 전일성이다.
이 전일성에서 대칭성이 파생된다.
② 대칭성
어떤 변화도 부분적인 것일 뿐이요, 전체적으로 보면 변화가 없다는 전일성은 사물의 변화가 대칭성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왜냐하면 어떤 변화는 반드시 그 변화를 상쇄시키는 변화를 동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는 이유 또한 '꼬임'에서 나온다. 꼬기 위해서는 반드시 힘의 중심축이 있는 것이고, 그 꼬임의 축이 바로 자연의 대칭축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꼬임이 없으면 대칭도 없고, 대칭축이 없으면 꼬임도 없다.
그러면 이 대칭축은 무엇인가? 대칭축은 기준(基準)이다. 대칭되는 두 사물의 대칭점은 대칭축으로부터 정확히 같은 거리에 있게 된다. 즉 대칭축을 기준으로 삼아 두 대칭점은 같은 거리만큼 떨어져 있으므로하여 대칭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대칭축, 달리말하면 기준이 갖는 이 등거리성(等距離性)을 우리는 중(中)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중(中)이 바로 앞의 전일성 해설에서 말한 [중심혈]인 것이다. 클라인 원통으로 묘사된 '한'이 중심혈에 의해 존재와 비존재로 나뉘어 있는 [형태적 특성]이 바로 대칭성이다. 다시 말하자면 현상계의 모든 대칭성은 [중심혈]로서의 마음이 만들어내는 변형자연상(變形自然相)이라는 뜻이다.
이 대칭성은 현대과학의 중요한 연구대상 중의 하나이다. 젠닝 양(Chen Ning Yang / 楊振寧)과 로버트 밀즈(Robert Mills)는, 수학자 소푸스 리(Sophus Lie)가 회전대칭성을 대수(algebra)로 표현한 리 대수(Lie algebra)를 연구하여, 게이지 장(gauge field / 計機場) 이론을 만들어 내었다. 게이지 장 이론은 우리가 기하학적 대칭성을 공간의 각 지점에 부여하면, 새 장(場)의 존재가 자동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것은 우리가 공간의 각 지점마다 다른 게이지(측정표준)를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말은 우리가 게이지를 선택하므로서, 새로운 장(場 : field)을 창조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대칭성이 제공한다. 즉, "게이지 장들이 대칭성의 결과였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대칭성을 이용하여 새로운 양자장을 창조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 (관점 1)
이렇게 만들어진 게이지 장들은 양자장(量子場) 위에 새롭게 만들어진 양자장이므로, 다른 양자장들과 구별되고 상호작용도 해야한다. 이 중에서 게이지 장을 다른 양자장들과 구별하는 것, 즉 게이지 장의 관측이 불가능하다는 문제가 대두되었고, 이 문제는 [자발적으로 깨진 게이지 대칭성]의 아이디어에 의해 20년만에 극복되었다. 게이지 장은 "대칭성이 {자발적으로} 깨어질 수 있고, 대칭성이 깨어지면 게이지 장의 다른 부분들이 그들 자신을 매우 다르게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게이지 장은 관측되지 않더라도, "자발적으로 대칭성이 깨어진 결과가 약한 상호작용이나 전자기적 상호작용의 차이로 나타나므로, 게이지 장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대칭성이 저절로(이것이 [자발적]의 실제 뜻이다) 깨뜨려진다고 말하는 것은, 실제로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어떤 요인에 의한 것이므로, 물리학자들은 대칭성을 깨뜨리는 입자를 생각하여 도입했고, 그 도입자인 피터 히그스(Peter Higgs)의 이름을 따서 히그스 입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입자는 1988년까지는 발견되지 못했다.
즉, {대칭성을 자발적으로 깨어지게 하는 입자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 (관점 2)
게이지 장이 관측되지 않는 이유에 대한 두 번째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 [숨겨진 대칭성]의 아이디어이다. [숨겨진 대칭성]이란 게이지 장의 대칭성이 깨어지지 않고 남아있는데도 관찰되지 않는다면, 그 이유는 그 대칭성이 다른 양자(量子)들의 내부에 완전히 숨겨져 있거나 갇힌채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갇힌 게이지 장들은 강한 상호작용의 [색깔을 띤] 쿼크결합 아교입자들이 된다고 생각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의 관점을 얻었다.
그것은 {대칭성은 소립자(물질)의 내부에 있는 것이다} ......... (관점 3)
게이지 장 이론은 와인버그 - 살람 모형(Weinberg - Salam model)에 의해, 실제적인 물리현상의 설명에 활용되었다. 이 모형으로 설명된 약한 상호작용과 대칭성의 관계를 살펴보자.
"대칭적 상황속에서 네 개의 똑같은 질량이 없는 아교입자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대칭성이 자발적으로 깨진 후에는, 이 아교입자들 중에 단지 하나만이 질량이 없는 채로 남아있으며, 이 입자는 전자기적 상호작용의 광자로 확인된다. 다른 세 개의 아교입자들은 양성자 질량의 1백배나 되는 엄청난 질량을 얻는다. 이들이 약하게 상호작용하는 아교입자들이며, 보통 W+ 그리고 W- 라 불리는 같은 질량의 두 입자는 양과 음의 한단위 전하를 가지고, Z0 는 전기적으로 중성인 약한 아교입자다. 원래 네 개의 질량없는 아교입자들의 달라지는 질량들이 깨진 대칭성을 반영한다."
우리는 여기서 대칭성이 깨어진 후에도 질량의 변화없이 남아있는 아교입자인 광자를 주목해야 한다. 대칭성이 깨어진 후에도 질량의 변화없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대칭성의 깨어짐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하나의 관점을 얻을 수 있다.
{빛이 바로 대칭축의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에 대칭성의 깨어짐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다} ...... (관점 4)
이제 이 네가지 관점과 앞의 전일성에서 제시된 가설들을 묶어서, 대통일이론의 내용을 보충할 도학적 가설을 만들어 보도록 하자.
{가설 1} : [관점 1]을 근거로, 사람은 대칭성을 이용하여 물질장(物質場)을 창조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때 대칭성을 이용한다는 것은 대칭성을 깨뜨린다는 뜻이다.
{가설 2} : [관점 2]에서 대칭성을 자발적으로 깨뜨리는 히그스 입자는 사람의 어떤 요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사람의 인식행위이다. 이 가설의 근거는 [가설 1]에서 주장된 내용과 [관점 3]의 내용을 종합하여 얻어지는 의식(意識)의 정체이다.
{가설 3} : 의식의 정체는 [집중력(執中力)]이다. 집중력이란 [중을 잡는 능력]이며, 다른말로 나타내자면 [기준 설정 능력]이다. 사람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시공간 상태의 균형을 알아내는 본능이 있으며, 그 본능이 발휘되어 끊임없이 중을 잡아간다.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균형계측의 범위가 틀리기 때문이다. 본능이 관장하는 범위는 전체자연이지만, 일상의식이 관장하는 범위는 경험의 한계 까지이다. 그 때문에 일상의식은 자신이 대칭성을 깨뜨려 물질장을 만든 사실마저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가설 4} : [가설 3]에서 말한 의식의 정체, 즉 기준 설정 능력으로서의 본능은 [관점 3]에서 말하는 숨겨진 대칭성이다. 그리고 그 초의식(기준 설정 능력으로 이해되는 의식)이 있는 곳은 물질의 내면이다. 그런데 양자(소립자)들 수준까지 쪼개 보았지만 앞에서도 말한 적이 있듯이, 물질의 내부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다만 소립자의 내부를 역학적으로 분석하여 쿼크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 쿼크들 사이의 상호관계에 수학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 물리학의 현재 상황이다. 따라서 물질의 내부가 어디인가를 밝혀야 할 필요가 있다.
{가설 5} : 물질의 내부가 바로 소립자 세계이며, 소립자를 다시 쪼개는 것은 의미가 없다. 그리고 소립자 세계는 객관적 실체세계가 아니라 주관적 의식세계이다. 즉 소립자의 세계는 사람이 자신의 의식이 활동(생동)하는 경향을 수학을 도구로 논리화한 것이다. 그 때문에 미시세계(소립자 세계)의 운동법칙이 거시세계의 운동법칙과 판이하게 달랐던 것이다.
미시세계가 의식세계라는 사실은 상대성이론에 의해 뒷받침 된다. 상대성이론은 시간을 변수로 채택한다. 그런데 물질은 공간적 요소이므로 시간을 앞지르거나 거스르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경험만 가지고 판단하더라도 의식은 시간으로부터 자유롭다. 결국 상대성이론은 빛을 매개체로 물질과 정신을 이미 통합해 놓은이론이었던 것이다.
{가설 6} : [관점 4]에서 대칭축으로 간주한 빛은 클라인 원통의 중심혈이다. 즉 존재와 비존재가 만나고, 시간과 공간이 만나며, 물질과 정신이 만나는 경계선이 바로 빛이다. 이것이 '한'의 자연론이 제시하는 대통일이론의 최종결론인 것이다.
[가설 6]에서 얻은 최종결론을 통해 '한'의 '쓸수'가 '꼬임'에서 유래하며, 그 '쓸수'가 대칭성을 이용하여 현대물리학이 밝힌 모든 물리법칙을 낳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물리학의 궁극을 밝히는 것이 아니라, 물리법칙 중에 포함되어 있는 심리법칙을 추려내어 도학의 체계를 바로세우는 일일 뿐이다. 그리고 그 작업의 일환으로 이책이 쓰여진 것이며, 그 작업의 길잡이로 삼은 것이 <천부경>이요, 그 현실적용이 신령학이다.
③ 반본성
반본성(返本性)은 대칭성에서 파생되는 성질로서, 자연의 어떤 변화도 결국 본래상태로 되돌아 온다는 성질로서, 이반본성은 대칭성이 전일성(완전성)을 파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타난다.
대칭성의 기준이 되는 중심축인 클라인 원통의 중심혈은, 4차원의 입장에서 보면 우주의 모든 곳이다. 이를 불교에서는 "일체만물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一體萬物 悉有佛性)"라고 하고, <성경>에서는 "하느님이 그 지으신 것들을 보시니 모두가 보기에 좋았더라"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3차원 세계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3차원 입체로 만든 클라인 원통에서는 반드시 원통 벽면의 일부가 파손되어야 하며, 그 파손된 자리를 기준으로 내외가 구별된다. 뿐만아니라 그 구멍이 시간의 경과를 따라 끊임없이 자리를 바꾸고 있다. 즉 특정공간을 지키고 있으면 그 구멍도 같이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그때에도 시간위치가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구멍을 지키는 방법은 의식이 시간의 경과를 따라잡는 것이다. 즉 현재 구멍이 시간의 변동을 따라가는 바로 그 공간에 의식도 같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바로 [기억의 족쇄]이다.
기억의 족쇄란 이미 변해버린 과거를 현재로 착각하는 심리현상인데, 그 첫째 원인은 사람의 육체적 조건임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즉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받아들여 상(相)을 만드는 지각능력의 한계가 중심혈을 떠나게 만드는 주범(主犯)인 것이다.
그러나 중심혈을 벗어난 어떤 변화는 [작용 반작용의 법칙]에 따라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변화를 일으켜, 두 변화 에너지가 상쇄되어 본래상태를 회복하게 된다. 인간에게 주어진 미래인식능력은 바로 이 반본성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빛이 뭉쳐서 사물을 만들었다면, 그것이 풀어져 빛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 있어야 하는데, 정신이 그 과정을 더듬어 갈수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신학을 탐구대상에서 제외시킨 과학이 밝혀낸 모든 자연법칙은, 본질적으로 이 반본성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보아야 옳다.
이 반본성을 달리 표현하면 조화성(調和性)이다. 조화란 상대적인 성질들을 조절하여 균형을 이루게 하는 것인데, 이 조화의 본질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일어난 변화가 서로 만나 반대 에너지가 상쇄되면서 본래의 안정상태로 돌아가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8. '한'의 '짓'
1) 자연작용
자연작용(自然作用)이란 '한'의 '짓'이다. '짓'이란 '일(事)이니, 자연이 어떤 일을 하며, 그 일을 어떻게 하는지를 밝히는 것이 자연작용 해설의 주제이다.
이 자연작용은 <천부경> 해설과 천부역의 주제가 되므로 여기서 상세히 다룰 필요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설명을 하더라도 <천부경>과 천부역의 해당부분에서 어쩔수 없이 다시 설명해야 하는 내용이 대부분이므로, 여기서 설명한다면 중복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뿐만아니라 지금까지 살펴본 '한'의 세 측면도 자연작용을 분석하여 체계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그 내용들이 모두 자연작용에 응용된다. 그러니 여기서는 자연작용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삼한의 체계로 정리하여, 개념을 이해하는 선에서 만족하기로 하자.
2) 완전작용
자연의 작용은 완전작용으로 대표된다. 완전작용(完全作用)이란 동시에 일어나는 완전한 상호작용이라는 뜻이다.
자연은 시공간 통합체이며, 전체적으로 파악될 때에는 시간이나 공간이 모두 그 일부로 포함되어 버린다. 자동차를 말할 때, 차체나 엔진이 모두 자동차의 구성요소로 취급되는 것이지, 독립된 개체로 취급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자연작용에는 시간의 선후가 성립될 수 없고, 모든 작용이 지금 현재에 일어난다. 또 자연작용은 기준지점이 설정되지 않으므로, 공간적 방향이나 거리 등의 개념이 성립되지 않고, 모든 작용이 전체에서 한꺼번에 일어난다. 따라서 어느 한 지점을 잡았을 때, 그곳에서 일어나는 어떤 변화는 다른 모든 곳에서도 일어나 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는 자연이 완전하여 더 이상 더할 것도 뺄 것도 없기 때문에 일어난다. 굳이 변화라는 개념을 도입해야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완전한 상태에서 완전한 상태로 바뀌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을 완전작용이라 하는 것이다.
이 완전작용은 자연작용을 다른말로 나타낸 것이다. 이 완전작용을 분석하면 무위이화(無爲而化), 상대작용(相對作用), 회전작용(回轉作用)의 세가지 작용을 찾을 수 있다.
3) 무위이화
무위이화(無爲而化)란 [함(爲)이 없지만 되어진다]라는 뜻으로, [아무런 작용을 하지 않음에도 본래상태와는 달라졌음]을 나타낸다.
이는 앞의 완전작용과 비슷하면서도 차이가 있다. 비슷한 점은 전체적으로 변화가 없다는 점이고, 다른 점은 부분적으로 볼 때에는 분명히 변화가 있다는 점이다. 이는 자연이 이미 변하지 않는 전체와 변하는 부분으로 분리인식 되었음을 의미한다.
다시말해 자연의 작용이라는 것이 엄밀히 말해서, 관찰자의 의식이 자연을 분리인식한 결과에 불과한 것이라는 뜻이요, 다시 말을 바꾸면 모든 작용을 의식이 일으키는 것이란 뜻이다.
우리들의 언어습관에 따른다면 완전작용은 작용의 범주에 포함시키기 어려운 작용이고, 실제적인 자연작용은 이 무위이화부터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무위이화와 같은 뜻의 다른 표현이 <천부경>의 "용변부동본(用變不動本; 쓰임은 변하지만 그 본체는 움직이지 않는다)"이다.
4) 상대작용
자연작용의 가장 큰 특징은 이 상대작용(相對作用)이다. 무위이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작용에 대한 반작용이 있어야 한다.
상대작용이란 바로 이 작용과 반작용이 동시에 일어난다는 뜻이다. 물론 여기서의 동시(同時)란 인식된 동시가 아니라 원칙적 동시이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여기서 자세히 다룰 필요가 없을 것이다.
5) 회전작용
'한'의 '꼴' 중의 하나인 '둥금'의 특성이 자연작용에 반영된 것이 회전작용(回轉作用)이다. 이 회전작용은 회전운동과 주회운동(周回運動)을 총칭하는 것이다.
회전운동은 전자에서부터 은하계에 이르기까지 발견되는 자전현상에서 자연작용의 기본형태임을 알 수 있고, 주회운동 또한 지구의 공전운동에서부터 인체내의 혈액순환과 같은 변형형태까지 고려한다면 그 비중을 무시할 수 없는 자연작용이다.
'한'의 자연론에서는 이런 회전작용의 원인이 지금까지 밝혀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중시하고, 그 원인이 자연의 형태가 둥글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회전작용이 <천부경>에서 "삼사성환(三四成環; 삼(三)과 사(四)로 고리를 이룬다)"이라는 구절로 우주의 기본법칙의 하나로 제시되어 있다
바로 이 때문에 그 많은 고대사상들이 원(圓)을 진리의 표상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보고, 원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우주가 형성되는지를 <천부경>을 통해 해명하므로서 도학의 새 지평을 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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