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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경> 해설 - 삼신의 가르침 본문
<천부경> 해설
I. 삼신의 가르침
1. 풍류의 경전
풍류의 진리는 세계 모든 문명의 뿌리가 되면서도, 제대로 보존된 경전 한권도 없는 실정이다. 민족사의 흥한령(興韓嶺)으로 평가할 수 있는 단재 선생이 "우리 민족사에 있어서는 사서(史書)의 소실은 있었을지언정, 위서(僞書)의 조작은 거의 없었다"하고, "근래에 와 <천부경>(天符經) . <삼일신고(三一神誥)> 등이 처음 출현하였으나, 누구의 변박(辯駁)도 없이 고서로 인정하는 이가 없게 되었다"라 하여, 근세에 발굴된 자료들도 일단 사료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역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삼성기> . <태백일사> . <규원사화> . <단기고사>등 귀중한 자료들이 학계의 공인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서 중국의 역사문헌을 인용한 기록은 사료적 가치가 있고, <고기(古記)>를 인용한 이 문헌들은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무슨 매국적 작태란 말인가? 비록 그 이유가 <고기>에 대한 무지에 있는 것이라 해도, 소위 역사학자들이 방패로 삼을 변명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고기>는 이미 설명한 바 있듯이 동이족의 정통 역사기록이다. <古記>에 다른 뜻이 있음을 모르고, 단순히 [오래된 기록]이라는 글자 뜻에 국한시키다 보니 <고기>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폐단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왕 글자 뜻을 중시할 바에는 [古]의 글자뜻인 [선조(先祖)]의 뜻과, 박용숙 선생이 논증한 [신전(神殿)]의 뜻도 고려해야 했고, 글쓴이같은 초보자도 찾아낸 [왕검]의 뜻도 밝혀서 그 진위를 가리고 의미를 추구했어야 했던 것이다.
<고기>는 [조상의 기록]인 동시에 [신전의 기록]이며, [왕검에 대한 기록]이다. 따라서 그 기록은 세속적 기록이 아니지만, 세속의 일도 신전과 관계된 부분은 기록되게 되므로 한편으로는 세속적 역사기록도 된다.
그러나 <고기>의 기록방식은, 그것이 신전기록인 이상 역사적 사실을 왕조중심으로 기록하지 않고 신들을 중심으로 기록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 때문에 <고기>의 내용들은 후대에 [신화(神話)]라는 이름을 얻은 것이다. 그러므로 [신화]는 지어낸 거짓 이야기가 아니라 정말로 신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것이니 [신화]라는 이름이 옳은 것이다.
따라서 고대의 신화에 기록된 내용이기 때문에 믿을 수 없다는 논리는, 다른 나라의 경우라면 몰라도 우리민족에게 만큼은 통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대에 신(神)이라고 불린 초인간들은 세계의 어느 곳에서 나타났던지를 막론하고 동이족 신이(神異)들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군신화]라는 이름은 올바른 이름이며, 우리민족의 위대성을 증명하는 이름으로서 세계에 자랑할 기록이다. 그리고 이 단군신화에는 우리말로만 풀어낼 수 있는 역사적 . 종교적 . 철학적 의미가 겹겹으로 퇴적되어 있다.
이런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단군신화에서 찾아지는 의미와 같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는 <환단고기>가 위서(僞書)가 될 수 없는 책이라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단군신화는 우리민족이 아닌 중국인의 역사기록과도 일치함을 <삼국유사>에서 이미 밝히고 있는 점에서, 그 사료적 가치가 지대한 것이다.
<환단고기>에 수록된 여러 <고기>들은 단군신화와 큰 줄거리가 같고, 단군신화에 담긴 의미들과 같거나 그 의미를 보완하는 내용들이라는 점에서 의심의 여지가 없는 [신전기록]의 일부들이다. 게다가 그 내용들이 신전에서 빠져나간 기록의 일부로 보이는 <산해경> . <수신기>등과 일치함을 볼 때, 그 역사적 진실성을 의심할 수 없다.
이와같은 사정은 <태백일사>에 수록된 <천부경>과 <삼일신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두가지와 <참전계경>을 합하여 [민족의 삼대경전]이라고 일컫는데, 이 [삼대경전]이라는 이름의 유래도, 삼대(三大)에 삼한(三一)의 뜻이 있는 점을 고려하면, [삼한으로부터 받은 경전]으로도 생각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 이 세 경전의 상호관계를 살펴보면, <천부경>이 천지창조의 원리법칙을 밝히고, <삼일신고>가 대종(大宗)의 가르침인 종교의 성립원리와 교리의 기본골격을 밝혔으며, <참전계경>은 사람의 올바른 길인 윤리를 밝힌 책으로서, 이 세 경전이 삼한(三皇)의 체계와 부합하고 있음을 보더라도 진서진경(眞書眞經)이 틀림없다.
이 세 경전은 동이족 천신들이 최후까지 비전(秘傳)한 풍류의 최고핵심경전이다.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에 깊이 숨긴 것이요, 깊이 숨겨졌기 때문에 세상에 공개되는 것이 늦어진 것이다.
<산해경>이나 <수신기>, <신농본초경>, <황제내경> 및 <주역>등이 진한이 진시황에 멸망당하고 마한(흉노)이 한무제에게 밀려 황하유역을 상실하던 시기를 전후하여 중국역사에 등장하는 것과 비교할 때, 이 책들이 동학포덕 두회갑째인 1980년도에 세상에 나온 것은 그 비중을 반증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공개된 시기가 늦다는 이유만으로 그 기록들을 가짜라고 매도하는 일부 인사들의 주장은, 도문(道門)에서 전해지는 비인부전(非人不傳)의 원칙도 모르는 소치라 하겠다.
[비인부전]이란 [人]이 천지의 으뜸인 단군을 뜻하므로, 오직 단군에게만 전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후대에 [人]의 의미가 확장되었다 하더라도 그 범위는 동이족에 한정되는 것으로 보아야 옳다.
이 비인부전의 원칙은 구전심수(口傳心受)의 방법에 의해 지켜져 왔다. 고대종교는 외부인에게 전해질 신탁(神託)같은 것이나 문서로 만들었지, 외부인에게 유출되어서는 안될 중요한 경전은 통째로 외우게 했다. 불교인들의 독경이나, 유교인들이 사서삼경을 통째로 외워 과거에 응시하는 전통들은 모두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비중은 크지 않으면서 일반인들의 생활에 큰 이익을 줄 수 있는 경전들은 먼저 유출되어 홍익인간케 하고, 하위경전을 모르는 일반인들에게는 쓸모가 없는 핵심경전은 중심신전의 몇몇 신들만 외우고 있다가, 세계문명의 위기를 맞아 비로소 공개한 것이다.
그 전승과정에 담긴 선현들의 피땀과 눈물을 되새기지 못한다면, 이 책의 가치를 결코 알아볼 수 없다. 그러니 외래사상에 골수까지 오염되어버린 얼치기 . 얼간이 . 얼뜨기들이 이 책을 위서로 매도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아무리 부정적인 논란이 끊이지 않더라도 <천부경>이 삼신의 가르침을 온전히 담고있는 풍류의 핵심경전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을 증명하는 데에는 역사 문헌적 자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 인류가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체계와 신앙체계의 뿌리라는 사실을 밝혀내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이 작업이 지금부터 시작하는 <천부경> 해설의 주제이다.
풍류의 삼대경전과 그것들이 수록된 환단고기가 풍류의 직속경전이라면, 그 이외의 책들은 모두가 풍류의 부속경전이라고 하겠다. 그 중에서도 삼대경전과 직접 연결되는 구조를 갖춘 <주역> . <노자 ; 도덕경> . <황제내경> . <화엄경> 등은 풍류의 직속경전에 포함시켜도 큰 무리가 없을 정도이다. 그 이외에도 유교 . 불교 . 도교 및 기독교 등의 고등종교의 고대경전들은 이 경전들의 해설서를 변형시킨 것으로, 모두가 풍류의 부속경전에 포함시킬수 있다.
풍류의 경전 범위를 이렇게까지 넓게 잡는 이유는, 첫째로는 앞의 [풍류대도]에서 보았듯이 세계전역에 퍼져있는 모든 문화가 풍류의 후속문화인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이유는 삼대경전의 하위체계를이루던 부속경전들의 대다수가 수많은 전란과 천재지변으로 인해 소실되었거나 약탈당했기 때문에, 풍류의 원형을 복구시키려면 외부에 유출된 자료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에서 국교로 신봉되었던 불교와 유교의 경전들은 대부분이 풍류의 경전을 받아다가 고친 것이거나, 약탈해간 경전들을 그대로 쓴 것들이다. 유교의 경우에는 이미 살펴본 대로 주왕실이 조선의 대권을 찬탈한 나라였고, 불교의 경우에도 우리나라에서 믿어진 불교는 대승불교인데, 대승불교의 경전중의 대부분이 용수보살이 [바다의 용왕]에게서 가져간 풍류의 경전임은 안창법 선생이 <한민족의 신선도와 불교>에서 밝힌바 있다.
이제 우리는 기존의 고등종교(우리가 외래종교라고 말하는 종교)들의 경전과 사상을 이용하여 풍류의 원형을 복구하는 일이 풍류의 불완전함을 자백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풍류의 최고진리성과 시원종교였던 역사를 입증하는 것이라는, 발상의 전환을 이루어야할 시점에 서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서두에 밝히는 이유는, 여기에 동원되는 많은 논리와 인용되는 많은 문헌들이 풍류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이 풍류의 진리라고 볼 수 없다는 반론을 사전에 방지하고, 설명되는 내용 그 자체에 주의력을 기울일 것을 요구하기 위함이다.
2. <천부경>의 대략
1) <천부경>의 위상
<천부경>은 풍류의 으뜸 경전이다. 세상에 허다한 종교와 경전이 있으나 종교중의 으뜸은 풍류요, 그 풍류의 최고경전이 <천부경>이다. 따라서 <천부경>은 풍류의 으뜸 경전인 동시에 인류의 으뜸 경전이다.
글쓴이가 <천부경>의 진리를 역학의 이치와 연결시켜 해석하는 데에만 십년을 보내고, 그동안에 수집된 자료에 다시 두 해의 시간을 투자해서 앞에 설명한 [풍류대도]를 썼던 가장 큰 이유는 [<천부경>이 풍류의 으뜸 경전이다]라는 이 열세자를 증명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만큼 앞에 설명된 내용을 믿을 수 있다면, 이 말도 믿어도 좋다.
<천부경>의 유래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정설로 공인된 학설이 없는 실정이다. 지금 국내에 유포된 <천부경>은 조선말엽과 대한제국시대에 시작되어 일제의 식민지배 시대까지 이어진 의병항쟁에 참여한 애국지사들에 의해 발굴, 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그 발굴된 장소가 묘향산 석벽이라는 점과, 또 우리 민족의 고대 활동무대가 만주와 몽고 일대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천부경>의 유래와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은 남북통일과 고토회복 후에 환단의 옛 유적을 본격적으로 발굴할 수 있을 때까지 유보하는 것도 한 방안일 것이다.
<천부경>의 진위여부에 대한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래에 이르러 전통사상을 연구하는 학자들이라면 누구나 <천부경>을 최고의 경전이라는 찬사를 붙여 거론하는 실정이며, 시중에 나와있는 해석만도 수십종이 넘는다. 이는 우리 겨레가 <천부경>에 걸고있는 기대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고, <천부경>의 위상을 평가하는 간접적인 척도이기도 하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천부경>의 단락구분이나 토씨 붙이기 등, 가장 기초적인 부분에서조차 의견일치를 못보고 있으며, 따라서 제대로 된 해석으로 인정받는 해석도 없는 것이 <천부경> 연구의 현주소이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천부경>해설을 발표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주제넘고, 한편으로는 별 실익이 없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풍류를 다루면서 <천부경>을 거론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니, <천부경>에 대한 확실한 견해표명 없이 전통사상을 논의하는 것은 수박 겉햟기 식의해설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천부경>은 전통사상 전반의 모태이자 지도원리로서, 전통문화 전반에 침투해 있는 생명소이기 때문이다.
<천부경>의 위상 중에서 첫머리에 거론되어야 할 내용은 <천부경>과 역학(易學)의 관계일 것이다. 지금까지 역학은, 중국인들에 의해 창시되어 고려 말엽에 성리학과 함께 수입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이는 여러 가지 반박자료들이 나타남에 따라 논란이 많고, 복희씨가 동이족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역의 창제(創製)도 자연히 동이족의 공적으로 돌려지게 되었다.
<천부경>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천부경>에 역학의 모든 진리가 들어있으며, 따라서 <천부경>이 <주역>의 뿌리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천부경>에서 역학의 기본이치를 모두 증명해 내지 못하는 한 이런 주장이 공인받을 수 없음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천부경>이 역학의 뿌리라는 주장이 잘못된 것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천부경>은 분명히 역학의 뿌리이며, 여기서의 뿌리라는 말은 단순히 <주역>보다 오래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천부경>이 역학의 상위체계라는 뜻이다.
지금까지 [하늘의 계시를 본받아 제정된 절대적 진리]라는 미명하에 무조건적인 믿음을 요구해왔던 음양오행론과 팔괘구궁론 등의 역학이론들은 <천부경>의 부연체계에 지나지 않는다. 뿐만아니라 서양문명의 뿌리를 이루는 아라비아 수학 및 자연과학도 <천부경>의 부연체계이다.
<천부경>이 역학의 상위체계임을 증명할 수 있는 길을 개척한 사람은 최재충(崔載忠) 선생이다. 선생은 <민족의 뿌리(우리말 우리글 우리얼)>이라는 책으로 발표한 <천부경> 수리해설에 성공함으로써, <천부경>의 전모를 밝힐 수 있는 탄탄대로를 보여준 것이다.
선생의 <천부경> 수리해설은 인류문화의 일대 전환점으로 평가되어야 할 위대한 업적이니, <천부경>의 수리가 밝혀지므로써 인류문화의 뿌리인 풍류의 성립기반이 해명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이 수리해설이 역학과의 관계 및 인체와의 관계 정도까지만 해명된 상태지만, 이 내용들을 토대로 고대의 여러 문화유산을 재조명한다면, 지금도 그 수수께끼를 밝히지 못하고 있는 고대건축 . 음식문화 . 한의학 등의 분야에서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많은 유익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보들을 토대로 개조될 문명은 지금의 문명이 지닌 것과 같은 문제점들을대부분 해소한 문명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문명의 문제점은 정신과 물질을 분리시킨 근대적 사고방식이 만들어낸 것인데, 풍류의 진리는 정신과 물질의 공통근원을 바탕으로 하는 진리체계이기 때문에 현대문명의 문제점을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천부경>의 진리는 또 고등종교들의 교리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삼위일체설]의 원리를 밝히고 있고, 여러 종교교리의 기본골격을 이루는 성스러운 수(數)의 근거를 밝혀준다. 한마디로 말해서 <천부경>은 고조선인 용왕의 나라, 즉 진국의 실체를 증명할 근거가 되는 것이다.
<천부경>이 이처럼 위대한 경전인 만큼, 완벽한 해설을 시도한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여기서 해설할 수 있는 내용은 최재충 선생의 수리해설을 기초로하여, <주역>과 황제내경으로 나뉘어 있는 역학의 종합체계를 도출하는 정도이다.
그리고 좀더 욕심을 내어, 현대과학이 이미 밝혀놓은 여러 가지 물리법칙 중에서 이 종합체계와 부합되는 몇가지 보기를 소개하므로써, 역학이 미신이 아니라 정신과 물질을 통일한 완전한 과학임을 보여주고자 한다.
2) <천부경> 원문 및 해석
<천부경>은 아직까지 통일된 해석도 없을 뿐 아니라, 원문 자체도 두가지 종류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원문의 차이는 두세 글자에 지나지 않고, 어떤 쪽을 취하더라도 의미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원문에 대한 해석은, 그리 길다고 할수도 없는 81자의 글자를 해석하는 것이면서도, 각양각색이다.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나쁘게 생각하면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글이라서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어 생각하면, 해석의 목적과 초점에 따라 어떤 분야에도 적용할 수 있는 궁극진리를 <천부경>이 담고있기 때문이라 할수도 있다.
따라서 여러 사람의 각기 다른 해석은 모두 그 해석자의 전문분야에서 찾아지는 특수원리들로서 존중되어야 할 것이며, 다른 관점에서 볼 때 틀린다고하여 부정하거나 함부로 취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최근에 와서 학문의 분야간 교류와 유기적 관련성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아직까지 여러 분야의 다양한 관점을 무리없이 수용할 수 있는 틀(패러다임)이 마련되지 못했다.
그 이유를 학자들간의 자존심이나 이해관계에서 찾기도 하는데, 그런 것은 부차적인 이유일 것이다. 왜냐하면 학문통합이 서로에게 도움이 되면 되었지 손해될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다 큰 이유는 기존의 틀로 통합할 수 없을 정도로 각 학문분야가 발전해버렸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이렇게 본다면, <천부경>을 두고 각 분야별로 여러 해석이 나올수 있다는 것은, <천부경>이 장래의 학문통합을 위한 패러다임으로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근래에 <천부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연구를 모두 접하지 못하는 상황을 안타까워 하던 중, 이 책을 다 쓰고 나서 사단법인 한배달 측이 주관한 <천부경> 학술대회 자료집으로 출판된 <천부경 연구>를 입수하였다.
그 속에는 이 책에서 <천부경> 수리의 기본전제로 삼은 쵀재충 선생의 해석과, 고대사 분야의 지침으로 삼은 박용숙 선생의 해석이 들어있었다. 그 분량이 적지 않지만, 이 책이 그분들의 연구성과를 토대로 해설을 전개하고 있으므로 부록으로 제시하는 바이다.
본래는 여러 학자들의 해석을 골고루 소개하려고 하였으나, 두분의 해석이 분량이 많아 다른 분들의 해석은 포기해야 했다. 그래서 대표로 현재까지 전해져 오고있는 가장 오래된 주석으로 알려진 전병훈(全秉薰) 선생의 해석을 소개한다.
① <천부경> 원문
(묘향산 석벽본)
일시무시일석삼극무
진본천일일지일이인
일삼일적십거무궤화
삼천이삼지이삼인이
삼대삼합육생칠팔구
운삼사성환오칠일묘
연만왕만래용변부동
본본심본태양앙명인
중천지일일종무종일
(一始無始一析三極無盡本天一一地一二人一三一積十鉅無愧化三天二三地二三人二三大三合六生七八九運三四成環五七一杳衍萬往萬來用變不動本本心本太陽昻明人中天中一一終無終一)
(고운 선생 사적본)
一始無始一析三極無
盡本天一一地一二人
一三一積十鉅無愧化
三天二三地二三人二
三大三合六生七八九
運三四成環五七一杳
衍萬往萬來用變不動
本本心本太陽昻明人
中天中一一終無終一
② 문리(文理)해석
하나(一)는 시작(始)이 없는(無) 시작(始)이다. 하나(一)는 세 끝으로 쪼개지되(析三極), 근본은 다함이 없다(無盡本). 하늘의 하나는 하나요(天一一), 땅의 하나는 둘이요(地一二), 사람의 하나는 셋이다(人一三). 하나를 쌓아(一積) 열로 커서(十鉅), 다함이 없이(無櫃) 셋이 된다(化三). 하늘의 둘은 셋이요(天二三), 땅의 둘도 셋이요(地二三), 사람의 둘도 셋이다(人二三). 큰(大) 삼(三)을 합(合)하면 여섯(六)이니, 일곱 . 여덟 . 아홉을 낳아(生七八九) 돌고(運), 셋(三)과 넷(四)으로 고리를 이룬다(成環). 다섯(五) . 일곱(七) . 하나(一)는 묘하게(妙) 넘쳐흘러(衍), 무수히(萬) 가고(往) 와서(萬來), 쓰임(用)은 바뀌어도(變) 뿌리는 움직이지 않는다(不動本). 본래 마음(本心)은 본디(本) 태양(太陽)이 높이 뜬 것처럼(昻) 밝으니(明), 사람(人)은 가운데(中)로서 하늘(天)과 땅(地)의 으뜸(一)이다. 하나(一)는 끝(終)이 없는(無) 끝(終)인 하나(一)이다. (묘향산 석벽본)
③ 전병훈 선생의 해석
天符經<삼가 註한다>
<天符라는 글자는 黃帝素問에 보인다. 대개 다섯이 운행하여 하늘의 조화와 한가지가 되는 것(五運行同天化)을 일러 天符라 하니 이것은 사람이 겸성합천(兼聖合天)인 까닭이다>
經에 이르기를 一始無始
<소자 병훈> 삼가 주석한다(이 말은 각 구절마다 반복되는데, 앞으로 이 말은 생략하기로 한다). 천지는 허무의 가운데서 나니, 천지의 앞에는 다만 혼돈한 일기(一氣)가 있어 충막무짐( 漠無朕)한 까닭에 무시(無始)라 한다. 무시는 무극이며, 무극은 태극이니 태극이 움직여 陽을 낳고 고요하여 陰을 낳아 천지가 비로소 서는 고로<子丑의 會이다> 일시(一始)는 무시(無始)에서 나온다고 한 것이다. 一이라는 것은 태극의 一이니, 원신(元神)이 움직인다라는 것이 이것이다.
一析三
태극의 一이 이미 天一을 낳아 셋(三)으로 나누어진 즉 하도경(河圖經)의 一이 셋을 포함한다는 ○의 이치다. 셋은 천지인으로 이루어져 만물을 낳는 까닭에 노자 또한 一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極無盡
무극은 태극이니 태극의 곧 천지인물(天地人物)을 낳는 원리(元理)로서 능히 움직이는 까닭에, 천지인물이 비록 마치고 다하는 때가 있으나, 태극의 낳는 이치와 근원적인 신묘함(生理元神)은 궁극적으로 다하는 때가 없다.
本天一一
하늘은 태극의 一로써 그 근본됨은 개벽(開闢) 앞이니, 곧 天一로써 水를 낳는 까닭에 天一一이라 말한 것이다.
地一二
땅 또한 태극의 一에 근본되니, 하늘은 땅의 바깥을 포함하고 땅은 하늘의 가운데 있어(天包地外 地在天中) 地二는 火를 낳는 까닭에 地一二라 말하는 것이다.
人一三
사람 또한 태극의 一에 근본하니, 天一地二水火가 이미 생한 즉 해와 달이 운행하고, 감리(坎離)가 서서 기화(氣化)하여 사람을 낳는다. 셋은 삼재(三才)인 까닭에 人一三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상의 가르침은 시초개벽(始初開闢)의 이치를 밝힌 것이다.>
一積十鉅
天一의 一부터 一三의 一까지 쌓여서 十이 된다. 무릇 四象의 十을 살펴보면 가운데가 五로써 十五를 이룬 즉 조화(造化)가 갖추어진다. 北一은 西九를 얻어 十을 이루고, 西四는 北六을 얻어 十을 이루고, 東三과 南七 또한 그러하니 그 유행생성(流行生成)이 크도다. 鉅(거)는 大다.
無 化三
천지의 수는 十五로 이루어지니, 대화유행(大化流行)이 쉬지않아 三生物의 조화를 함유하여 모자라는 때가 없다고 이르는 것이다. 작게는 하루 . 한달 . 일년이요, 크게는 원회운세(元會運世)니 造化流行이 어찌 모자라는 때가 있으리요. (궤)는 乏(핍)이다.
天二三
위에는 개벽을 말하는 까닭에 天一一이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음양교구(陰陽交 )의 스(數)를 들은 까닭에 二三이라 말하는 것이다. 二陰三陽은 천수(天數)가 五로써 하늘 가운데 또한 음양을 갖춘 까닭에 이르는 것이다. 공자 계통의 역에서 천수는 三으로 하고, 지수는 二로 하니, 의수(倚數)가 되고, 이것은 대개 양수를 먼저 말한 까닭이다.
地二三
이것 또한 음양의 수를 말한 것이니, 앞 장과 한가지이다. 역에 지수(地數)가 다섯이며 땅 가운데 또한 음양을 갖췄다고 이른 까닭이 이것이다.
人二三大三合六
사람과 더불어 천지는 바탕이 한가지인 까닭에 이 구절에 이르러 대삼합육이라 하니, 곧 三陽이 六陰과 교합함을 이르는 것이다. 삼재가 서로 만나 낳고 조화하는(生化) 이치의 수(理數)를 이룸이 이와같이 명백하다. 대개 乾坤은 일년에 한 번 서로 만나고, 해와 달은 일삭(一朔)에 한 번 서로 만나니, 먼저 있는 바는 기화(氣化)이고, 사람을 낳고 이어서 형화(形化)하니 낳고 낳음이 다하지 않는다. 그런즉 세계의 살림살이가 비록 구역은 다르나 고르게 평등한 동포임이 명백하다.
生七八九
삼재가 서로 만나 坎六의 수가 東八의 木을 낳고, 木은 南七의 火를 낳고, 火는 중앙의 土를 낳고, 土는 西九의 金을 낳으니, 四象五行生物(사상오행생물)의 도가 완전히 이루어져 서고, 理氣(이기)가 유독 인간의 오장에 온전히 갖추어졌다. <腎(신)은 水며 智(지)요, 心은 火요 禮(예)라는 말인데 아래에 상세하다. >이는 하도 낙서와 더불어 오행 순역(順逆)의 차례와 쓰임이 동일하다. 그러니 마땅히 강해(講解)하면 신역(身易)의 법을 운용하게 되니 유익하다. 이른바 水火의 交와 金木의 會라는 것들이다. 사람은 영명지각(靈明知覺)이 있는 까닭에 스스로 떳떳한 행위를 하니, 능히 수장성명(修長性命)을 겸하여 옛사람의 양능(良能)을 이룰 수 있다. <이상의 가르침은 삼재생성의 이ㅣ를 밝힌 것이다. >
運三四成環
인신(人身) 가운데 三木의 日과 四金의 月을 운용한다는 것은 도가(道家)의 오행의 술(術)과 뒤집어져 있다. 三木은 火를 낳고 火는 離(리)가 되니 離火 가운데의 水가 眞水이다. <이른바 龍이 火의 안에서 쫒아 나온다는 것이다. >四金이 水를 낳고 水가 坎(감)이 되니 坎水 가운데의 火가 眞火이다. <호랑이가 水의 가운데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 진수진화(眞水眞火)로써 승강(昇降)한다는 뜻이다. <後昇前降(후승전강)이니 子午昇降을 말한다.>(眞水眞火가) 오래고 오래되어 丹(단)을 이루고 仙(선)을 이루는 까닭에 運三四라 이르는 것이다. <대개 左昇右降하고 右昇左降이니 卯酉運用을 말한다.>
運은 운행의 참뜻이요, 環(환)은 곧 丹의 형상이며 단서(端緖)가 없는 까닭에 成環(성환)이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環의 가운데는 곧 현관(玄關)이니, 가히 알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玄關의 설은 아래에 상세하다>
五七一妙衍
五는 곧 土의 生數요, 七은 火의 成數가 된다. 一, 이것은 水의 生數이니, 道家가 이르는 것으로써 三家를 서로 볼 수 있다. 妙(묘)는 神用凝結(신용응결)의 뜻으로써, 참뜻은 土 . 火 . 水를 운용하는 것이다. 수승화강(水昇火降)이 위와 같아 도를 이루고, 나아가서 출신(出神) 자손을 낳으니, 나의 神氣(신기)가 천지에 가득차서 천지와 더불어 상하가 한가지로 유행하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오호! 兼聖極哲(겸성극철)의 대도라. (이것으로써) 玄牝(현빈)에 精氣(정기)를 운용함이 신묘하고 진실한 신통의 묘가 이루어짐이 황제(黃帝)의 兼聖과 같이 한 하늘에 근원하니, 性命凝住(성명응주)의 精神專學(정신전학)이다. <이상의 가르침은 成眞證聖(성진증성)의 法이다>
이 經은 하늘이 팔면의 영롱함을 안은 것과 같으니, 사람이 인지(仁智)를 봄이 비록 다를 수 있으나 스스로 運三四로부터 妙衍에 이르기까지는 神易을 운용하여 仙을 이루는 진정한 法을 가리킨 것이니, 배우는 사람이 깊이 깨달아 소홀히 할 수 없다.
萬往萬來
이미 妙衍이 이루어져 참 내가(眞我)가 聖仙하니, 神化가 하늘에 합하여 만겁(萬劫)의 왕래가 나의 고유한 것이 되니, 나의 양신(陽神)이 상하를 종회아여 두루 가지 않음이 없어 우주가 손에 있으니, 日用人事에 이르기까지 만가지 기틀의 왕래가 비록 무궁하나 능한 주재자가 있구나. <이상의 가르침은 兼聖濟世(겸성제서)의 法이다.>
用變不動本
모든 일에 변화가 오니, 내가 그 변하는 것을 사용한다. 마음에 저울이 있으니 저울로써 일의 경중을 저울질하여, 변화에 따라 마땅함을 통제하는 까닭에 用變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開物成務(개물성무)하고, 人民利用(인민이용)하고, 經邦濟世(경방제세)하니, 不動의 그 化가 가서 만가지 변화에 수작하나 마음의 근본은 움직이지 않는다. 고로 治成無爲至德(치성무위지덕)의 세상이 반드시 있을 것이니, 兼聖極哲이 아니면 그 누가 능히 그렇게 하리오.
本心本太陽昻明
사람의 본심은 곧 太極乾金(태극건금)이니, 태양의 신기가 뇌(腦) 가운데 凝晶(응정)하여 靈明(영명)한 것이다. 上智(상지)인 兼聖)은 본래 스스로 이와 같으나, 배우는 사람은 欲(욕)에 인하여 입도(入道)하니, 欲을 제어하여 물욕의 어두움이 없음에 이르면 심체(心體)의 밝음이 이에 그 근본으로 돌아와, 道가 밝고 德이 충만함이 마치 태양이 사사로움과 가리움이 없어 공평하게 밝은 것과 같이 되는 것이다. 곧 밝음이 우주를 비추어 만화(萬化)를 조성하니 가이 천지와 더불어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道가 깨지고 마음의 근본이 逼眞(실물과 흡사한 것)한 것이 어찌 일찍이 이와 같음이 있었겠는가. 오직 道家로써 하려는 마음(爲心)을 떠나니, 易에 "밝은 것이 두 번 일어나는 것이 離卦(리괘)니 大人이 밝은 것을 이어 사방에 비춘다"라 하고, 불교와 서양철학에서도 모두 삼계가 오직 마음이라 하니, 지금 이 구절로써 마음의 근본을 증명하니 어찌 우주 안에 새로운 서광이 나오지 않는다 하리오. 腦神(뇌신)이 마음의 理가 되어, 더욱 확연하고 더욱 밝으니, 心學은 개산(開山)의 祖라 이르지 않겠는가. 오호 지극하다. 민중이 추대하여 임금이 되어 태양의 광명과 같이 정치하니 또한 어찌 一統(일통) 민주세계가 법받을 것이 아니리오.
人中天地一一從
천지 가운데가 열리고 사람이 그 간운데 위치하니 삼재가 되어 참여한다. 이른바 사람이란 것은 천지의 마음이니,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 이것으로써 사람이 치중화(致中和)한 極功(극공)으로 천지가 서게되고 만물이 자라나니, 천지와 더불어 德을 합한다. 천지가 믿는자는 큰 나(大我)여서, 진실한 나는 곧 태극의 한 분자이다. 작은 나는 몸을 이룬 것으로 능히 천지의 가운데 서니, 아! 또한 지극함이여!하물며 지금 우내(宇內)가 서로 통한 바 五州가 일가이니, 治世太平하려는 자는 그 반드시 胎仙兼聖(태선겸성)의 천수(天手)에 있어야 할 것이다. <장차 일통세계의 元首되는 자는 上仙兼聖하여 천지의 가운데에 서는 자가 아니겠는가. >사람과 더불어 천지가 하나이니, 하나는 서로 마치고 시작하는 것이다. 장차 戌亥(술해)의 會인즉, 天地人物이 숨을 마치는 시기인 까닭에 하나 하나가 마친다고 이른 것이다.
無終一
無終一은 戌亥의 會에 一氣가 크게 숨을 쉬어, 海宇(해우)가 변동하고 산이 일어나고 강물이 빠지며 人物이 사라지고 녹아서 천지가 다시 혼돈을 이룬다. 그러나 태극의 一은 마치고 쉼이 없는 이치이니, 다시 子丑의 會에 이르러 생동이 시작되는 까닭에 無終一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이에 가히 천지의 운행을 믿을 수 있으니, 마치고 다시 시작하는 태극의 一은 고요하면 다시 움직이고, 움직이면 다시 고요한 것이 끝이 없는 圓과 같은 것이다. 지극하도다. 至神兼聖의 經이라. <주해를 마친다.>
3) <천부경>의 구조상 특성
<천부경>은 형식과 내용면에서 볼 때, 몇가지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먼저 형식상의 특성은 수리(數理)를 기본골격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천부경>의 전체 글자수는 81자로, 이는 자연수의 전체 구역수인 [9]를 제곱한 수이다.
자연수의 전체 구역이란, 하나부터 열까지의 자연수가 만들어 낼수 있는 [실질적 내용이 있는 구역]이다. 이렇게 말할 때, 자연수는 내용을 담아내는 울타리와 같은 것으로 이해된다.
一 二 三 四 五 六 七 八 九 十 : 자연수 10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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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 3-+ 4-+ 5-+ 6-+-7-+ 8-+ 9-+ : 구역수 9구역
그리고 81자의 글자 중에서 숫자만 가려내면 모두 31자가 되어, 삼신일체의 의미가 된다. 이 수를 한자로 쓰면 [三十一]이 되는데, [十]은 태양신의 부호이므로 삼신일(체)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글자수는 모두 50자가 되는데, 이 숫자는 동양사상에서 특별한 중요성을 가진다. 왜냐하면 이 수가 <주역>의 점법(占法)에서 괘를 만드는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즉 점칠 때 쓰는 산가지(算木)의 수가 모두 50개인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천부경>에서 찾아지는 또 다른 역리구조와 관계되므로서, <천부경>을 해석할 중심방향을 지정해 준다. 숫자까지도 포함한 <천부경>의 전체 글자수는 81자인데, 이 81자를 점으로 취급하여 그 점들을 가로와 세로로 이어주면, 가로 세로 각 아홉줄의 모눈이 만들어지고, 그 모눈에 나타나는 눈(작은 네모)은 모두 64개가 되어 <주역>의 64괘와 일치한다.
<천부경>의 구조를 대강만 검토해 보아도, 동양사상의 최고봉이라고 일컬어지는 <주역>의 구조와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것을 보면, <천부경>과 <주역>이 깊은 관계가 있음을 알수 있고, 이는 <천부경>을 <주역>과 연계시켜 풀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또 앞에서 복희씨가 환인(桓因)이라고 밝혔던 사실과, 복희씨의 업적 중에서 첫머리로 꼽히는 것이 [처음으로 팔괘를 그은 것]임을 생각한다면, <천부경>과 <주역>을 연관시킬 필요성은 더 커진다고 할 것이다.
다음으로 내용상의 구조를 보면, [삼한부] . [수리부] . [문리부]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수미상관(首尾相關)의 형태로 배치된 점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여기서 우선 밝혀둘 것은, 이 내용구분이 글쓴이가 <천부경>의 내용을 참작하여 나눈 것으로 일반적인 구분은 아니라는 점이다. 각 부분은 다음과 같이 나뉜다.
첫째, [삼한부]는 맨 처음의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과 맨 마지막의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을 합친 열글자(十字)이다. 여기에는 <천부경>의 전체내용이 자연의 어떤 측면을 설명하려 하고 있는지와, 그 표상이 무엇인지를 풀어내기 힘들게 숨겨두었다.
[수리부]는 "석삼극(析三極)" 부터 "오칠일묘연(五七一妙衍)"까지의 50글자이다. 우주의 존재와 변화원리를 수리로 압축해 놓은 부분이 이 수리부이다. 이 글자수가 <천부경> 수리와 역리와의 관련성을 보여준다는 것은, 이것이 <주역>의 대연수(大衍數)이고, 수리부의 마지막 글자가 [衍]으로 끝난다는 점에서 거의 확실하다. 그러므로 수리부는 역학의 원리를 압축해 놓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문리부]는 "만왕만래(萬往萬來)"부터 "인중천지일(人中天地一)"까지의 21자이다. 이 숫자는 단군신화에서 곰이 사람이 되는데 필요했던 시간인 삼칠일과 같은 숫자로서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이 숫자는 동이족인 사람(人)을 상징하는 숫자로 쓰였다는 뜻이다. 이 숫자가 동이족을 상징하는 숫자로 쓰였던 이유는 인체수리와 관계된다.
인체수리에서 [3]은 코에 배정되고 [7]은 성기(性器)에 배정되는데, 코는 수련의 중심점이요 성기는 치세(治世)의 중심기관이다(인체수리는 [천부역 . 자연수]에서 소개된다).
좀더 알기쉽게 말하자면 정신의 한계를 풀어 신령과 교통하는 길은 호흡을 조절한 수련을 통해 개척할 수 있으므로 코와 연관되고, 육체의 제약을 극복하고 영원히 사는 길 중의 하나는 자신의 분신을 남겨놓는 것이며, 더 넓은 세상을 정복하는 길은 자신의 분신을 온 땅에 퍼뜨리는 것이므로 성기와 관계된다.
따라서 [3 × 7 = 21]은 천상과 지하의 교류와 일체화를 상징하는 수가 된다. 실제로 <천부경>에서 [2]는 땅이요, [1]은 하늘이므로 이 논리가 전혀 근거없는 것은 아니며, 풍류의 세계지배의 원리가 <천부경>에서 나왔음을 보여준다.
이 문리부는 사람이 달성해야 할 마지막 목표가 무엇인지를 제시해 놓은 부분이기도 하다. 우주의 변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근본이 있음을 제시하고, 그것이 바로 본심이라는 사실, 그리고 본심이 태양처럼 높고 밝아서 사람이 천지의 으뜸이 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 형식적 측면과 내용적 측면을 합치면 <천부경>의 종합적 이해가 가능하다. 그 내용은 여기서 다루기보다 기초가 되는 역리를 어느정도 설명한 뒤에 다루는 것이 좋을것으로 생각되어, [천부역 . 변역론]에서 다루기로 한다.
그러나 <천부경>을 해설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천부경>은 인류의 모든 신앙체계와 지식체계의 뿌리로서, <천부경>을 완전하게 해석하려면 인류가 이룩한 모든 지적유산들과의 비교검토가 병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단계에서 그것은 희망사항일 뿐이며, 장기적으로 여러 분야의 석학들이 모여서 추진해야할 대과업이다.
여기서는 이런 사정을 솔직히 고백하여 이 해설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변명으로 삼고, 다만 <천부경>의 문장해석과 숨은 의미 및 관련된 내용들을 가능한데까지 추적하는데 주력하기로 하자. 그리고 관련된 내용의 소개는 여러 종교의 교리들을 중심으로 하되, 과학분야의 이론들 중에서 관계되는 내용도 포함시키기로 한다.
현대과학은 이미 단순한 기술학의 수준을 넘어선지 오래 되었으며, 일반대중의 가치관 형성을 주도하는 종교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과학이라는 종교의 신은 [우주]요, 교리는 물리법칙이요, 사제는 과학자이고, 성전은 자연환경이고, 신도는 과학적으로 증명되는 것만이 진리라고 믿는 모든 사람들이다.
그리고 묘하게도 이 과학종교는 풍류와 닮은 점이 너무도 많다. 이들이 정권을 장악하고, 진화를 목적으로 출산에 개입하기만 한다면 그들의 역할은 옛날 동이들이 하던 역할과 같은 것이다. <천부경> 진리의 상당부분이 과학의 극한(極限)발전단계인 지금에 와서야 증명되는 것을 생각하면, 과학발전과 풍류부활에는 모종의 연관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직도 과학이 <천부경>의 진리를 따라잡을 수준은 아니며, 오히려 현대과학은 <천부경> 진리의 기초단계에 도달했다고 생각된다.
<천부경>은 기존의 동양도학 전체의 상위체계인데, 현대과학은 이제서야 동양도학의 하위체계인 역(易)의 초보 수준인 이진법을 활용하고 있고, 반입자를 발견하므로써 2500년 전에 동양도학이 만물의 본체로 내세운 허공의 의미를 이해하게 되었다.
글쓴이도 <천부경>을 연구한지 3년이 되기까지는 동양도학이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일반상식을 그대로 믿고 있었고, 인류구원의 희망은 핵물리학이나 유전공학 같은 첨단과학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라는 무식한 생각을 가졌었다.
그러나 <천부경>을 통해 동양도학의 진리들을 새롭게 이해하므로써, 도학이야말로 과학이 뛰어넘을수 없는 불멸의 진리임을 알수 있었다. 특히 <천부경>이 동양도학의 궁극임을 확인하고 난 후로는, 이땅에 태어나 이 진리를 접할수 있었음을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다.
그리고 글쓴이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천부경>의 탐구는 곧 도학 전반의 탐구와 같으므로 <천부경> 연구로 인해 시야가 좁아지거나 편견에 빠지는 부작용이 없고, 경문이 간단한만큼 핵심과 윤곽이 모두 드러나있기 때문에 다른 분야의 체계구성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러니 한겨레의 젊은이들이여! <천부경>을 연구하라! 그것만이 배달의 후손에게 맡겨진 인류구원과 세계교화의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4) <천부경> 해설체계
<천부경>은 응용가능성이 무한하기 때문에, 계획성 없이 덤비다가는 잡학사전이나 만들게 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기준을 정해두고, 그 기준에 따라 해설하려고 한다.
① 앞에서 설명한 <천부경>의 구조를 기준으로 [삼한부], [수리부], [문리부]로 나누어 해설하되, 문장순서에 따라 다시 세분하여 해설한다.
② 각 부분을 세분할 때에는 분절(分節)에 얽매이지 않고, 의미파악에 도움이 되도록 나누기로 한다. 예를들면 "大三合六生七八九運"을 [大三合], [大三合六], [六生七], [六生七八九], [六生七八九運], [七八九運]등으로 자유롭게 나누므로써, 한 구절이 내포하는 의미를 가능한데까지 모두 추적하는 데에 역점을 두려한다.
③ 각 단락의 해설은 다음 체계를 기본으로 한다.
㉮ 단락(구절) 자체의 의미해설
㉯ <천부경> 속의 다른 부분에서 관련되는 내용의 해설
㉰ 단락 자체의 내용 중 다른 종교의 교리와 일치하는 부분의 소개 및 해설
㉱ 과학이론 중 관련되는 내용 소개 및 해설
㉲ 기타
④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내용 위주로 해설하여 전체적인 윤곽을 파악하는데 주력하고, 관련되는 내용들 중에서 전문적이거나 지엽적인 내용들은 <천부경>의 부연체계인 천부역과 인도(人道)등에서 다루므로써,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지지 않도록 한다.
II. '한'의 자연론
1. 삼한부 해설
1) 삼한부의 범위와 내용
[삼한부]는 맨 처음의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과 맨 마지막의 "일종무종일(一終無終一)"을 합친 열 글자(十字)이다. 그러나 이 간단한 열 개의 글자에는 <천부경>의 내용 전체를 이끄는 기본원리가 숨겨져 있다.
우선 이 열글자가 십자로 표현되는 사실을 주의하자. 믿기 어렵겠지만, 이 십자가 태양신의 상징인 동시에 신전의 상징으로서의 '한'인 것이고, 그 때문에 [삼한부]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점을 증명하는 것은 이 두 구절을 다섯자씩 나누어 처음과 끝에 배치한 점이다. 무(無)를 가운데에 두고 일(一)을 가로로 배치하며(一無一), 시(始)와 종(終)을 아래위로 배치하면 열십자의 형태가 나온다.
결국 이렇게 만들어진 두 십자와, 열 개의 글자가 뜻하는 십자를 합하여 세 개의 십자가 나오고, 이 셋이 각각 천지인(天地人)을 상징하도록 한 것이다. 이와 비슷한 형태로 <천부경>의 글자를 배치해서 해석한 사람으로는, 대종교의 전임 총전교로서 얼마전에 작고한 권태훈 선생이 있다.
이 [삼한부]는 '한'을 열 개의 글자로 푼 다음, 그것을 머리와 꼬리에 나누어 배치하여 시종이 없는 순환을 나타내므로서, <천부경> 전체가 하나의 원으로 상징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 원은 단순한 원이 아니라 열십자가 상징하는 것이 공(球)이므로, 공으로 만들어진 원(圓)인 염주와 비슷한 고리를 나타낸다.
열십자가 공을 나타내는 것은, 공처럼 생긴 지구본에서 적도와 경선(자오선)이 만나는 곳이 모두 열십자로 되어있음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염주와 비슷하다 한 것은 염주(또는 도우넛)처럼 생긴 고리가 다시 공의 경선과 위선이 되는 사차원 공이 <천부경>이 말하려는 우주의 실상이라는 뜻이다. 이런 모양은 그려낼 수가 없는데, [십자와 공] 그림의 경선과 적도가 이 [고리] 그림을 나타낸다고 생각하면 되겠다.
이런 측면들은 <천부경>의 내용이 사소한 글자배치 까지도 소홀히 할수 없으며, 또 <천부경>에 담긴 진리가 무궁무진하다는 사실을 대변하는 것이다.
이 내용과 관련되는 <천부경>의 구조가 만(卍)자 구조이다.
만자구조란 <천부경>의 몇몇 글자를 만자 형태로 배치시켜 중대한 비밀을 담아놓은 것을 뜻한다. 이렇게 만자가 되도록 선을 그린 것도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라, 글자를 보고 일(一)자를 하나로 묶고 나머지는 따로 묶은 것이다. 이 그림은 풍류에서 오래전부터 쓰이던 문양이라는 의미 이상은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그리면, 몇가지 새로운 의미가 드러난다. 첫째 의미는 만자가 두 개의 뫼비우스 고리를 나타낸다는 사실이다. 즉 <천부경>은 두 개의 뫼비우스 고리를 붙여 만든 클라인 원통이라는 사실을 이 그림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이 내용은 많은 설명이 필요하므로 뒤에 별도로 다룬다).
<천부경>의 숫자 배치가 우주의 꼬인 모습을 담고있다는 사실에서, <천부경>을 무수히 다른 방식으로 재조합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실제로 황우연씨는 <천부의 맥>이라는 책에서 <천부경>이 가로, 세로, 대각으로 읽어도 모두 뜻이 통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둘째 의미는 무(無)와 중(中)의 뜻이 저절로 풀린다는 것이다. [일-일-육-일-일] 고리는 중심점의 상하로 배치되어 시(始)와 종(終)의 시간성을 반영한다. [無-九-六-三-中] 고리는 좌우로 배치되어 [一 . 六 . 一]의 공간적 확장성을 반영한다. 이 공간고리에서 [九-六-三]은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 [6]은 [3]과 [9]의 중간에 해당하는 수이다.
수개념이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물체에서 생겨났다고 볼수 있는만큼, 공간고리에서 [6]이 [3]과 [9]의 중간수가 되도록 배치한 것은 나머지 수들과의 관계에서도 이 성질을 적용하라는 의미로 풀수 있다.
이렇게 풀어보면, [無]와 [中]에 [二]와 [十]을 넣을 수 있게 된다. [六]이 [二]와 [十]의 중간이 되기 때문이다. 네 개의 [1]이 문제가 될 것 같지만, 약간 억지를 써서 네 개의 [1] 중에서 두 개는 [11]을 나타낸다고 보면 문제가 없어진다. 이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十]이 [無]가 되어 드러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다시말해 [無]가 [十]이요, [中]이 [二]라는 뜻이다. 이 사실은 [中]의 양쪽에 [1]과 [3]이 있고, [1]과 [3]의 가운뎃 수가 [2]라는 점을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이 간다. 같은 원리가 [1]과 [9]의 사이에 놓인 [無]에도 적용되어 [無]가 [十]이 되는 것이다.
바로 이 비밀을 가르치기 위해서 동이족들은 [卍]자를 신성시하여, 솟대 위에 두 마리의 봉황을 앉혀두었던 것이라는 추리도 가능하다. 두 개의 [새 을(乙)]자를 겹치면 만자가 나오기 때문이다.
<천부경>의 구조 자체가 이런 비밀을 담고 있음을 이해한다면, 박용숙 선생이 김상일 선생의 연구를 원용하여, "<삼국유사>에 나오는 점찰법회(占察法會)가 <천부경>의 원리를 이용하여 한복(韓服)을 만드는 행사였다" 라고 말한 것이 올바른 학설임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의 점찰(占察)이 곧 하도 . 낙서의 운행법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점찰이 입체기하학의 원리가 된다는 것은 능히 이해 가능하다" 라고 주장한 것은 <천부경>의 핵심을 꿰뚫은 탁견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내용들은 천부역에서 자세히 설명된다.
뿐만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밥보다 옷을 앞에 내세우는 [의식주(衣食住)]라는 말이 왜 생겨났는지도 짐작할 수 있게된다. 예수가 "사람이 빵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것이니라"라고 말한 것이, 사차원의 진리를 풀면 누구나 오어이병(五魚二餠)의 기적을 행할수 있음을 말한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천부경>의 진리라는 사실은 재론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제 "일시무시일"에서 우리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항을 설명해 보자. "一시무시일"에서의 앞에 [일(一)]과 뒤의 [일(일)]은 다르다. 앞의 [一]은 '한'이다. 그에 비해 뒤의 [일]은 '한나'이다. 여기서의 '한나'는 [큰 나] 즉 [대아(大我)]이다.
'한나'는 내 속에서 발견된 '한'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주의 창조주이다. <천부경>은 [빛의 현상학]으로 우주의 창생과정을 설명한다. [빛의 현상학]이란 우주창조는 빛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인데, 이 빛이 곧 사람임을 "본심본태양앙명 인중천지일"로 나타내고 있다.
'한나'는 세상을 인식하는 순간, 보다 정확히 말하면 느낌을 통해 받아들이는 순간에 우주를 창조한다. 천지(우주)는 시작도 끝도 없는 [그러함]인데, 사람이 그것을 감각기관의 도움으로 인지하는 바로 그 때 그 사람에 의해 재창조되는 것이다.
<천부경>의 창조론은 이런 철학적 창조론을 "일시무시일"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글쓴이가 <천부경>의 창조론을 해석하는 기본입장은 이런 관점이다.
2) '한'의 자연론
삼한부는 비록 열자밖에 안되는 짧은 문장이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까지도 간단한 것은 결코 아니다. 위에서 풀어 쓴 내용만 부연하더라도 책 몇권 만들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그런데 삼한부의 중요성은 이 열글자가 담고있는 의미를 풀지 못하고서는 <천부경>을 이해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천부경>의 수리부와 문리부를 모두 풀이하여도, <천부경>의 구조에 나타난 클라인 원통의 성질을 모르면 그 내용들을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클라인 원통의 성질이란 자연의 통일구조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 내용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학문분야를 이룩할 수도 있는 내용이다. 무엇보다도 이 내용은 <천부경> 진리의 해설에 꼭 필요한 도구가 되고, <천부경>의 현실적용인 '한'의 현시론에도 필수적이다. 이 내용들을 '한'의 자연론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하여, <천부경> 해설의 길잡이로 삼고자 한다.
2. '한'과 도학
1) 종합진리의 모형
모든 학문이 그 출발점부터 잘못되어 있는 지금, 가장 시급한 과제는 모든 학문의 공통기초를 제공할 수 있는 종합진리의 구축이다. 현대과학의 성립과 발전의 밑바닥에 뉴턴의 세계관이 있었듯이, 하나의 학문이 뿌리내리고 싹트기 위해서는 기초체계가 필요하다.
이 책에서는 현대학문의 대안으로 도학을 제시하고, 도학의 기초가 될 종합진리의 모형으로서 천부경을 으뜸경전으로 삼는 풍류를 부활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천부경>에 담긴 진리를 해설하는 기본관점으로 제시하는 것이 ['한'의 자연론]이다.
이 '한'의 자연론은 글쓴이가 지난 1984년 어느날, 크리슈나 무르티가 쓴 "자기로부터의 혁명"이란 책에 제시된 내면관찰법을 따라 수행하여 우연히 스스로의 참모습을 얼핏 구경하고, 그 초의식 상태에서 물러난 후에 쓴 것이다. 즉 말이 필요 없었던, 짧았지만 완전히 행복했던 그 경험을 일상생활의 언어를 사용하여 메모해 두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해 겨울 <천부경>을 알게되었고, <천부경>을 연구하면서 얻은 지식들 가운데 그때의 깨달음과 뜻이 통하는 것들을 최근에 이르러 종합시킬 수 있었다. 한 때의 깨달음을 10년 이상이나 걸려서야 일상생활 용어로 표현할 수 있었던 셈이다.
'한'의 자연론은 어떤 도학에도 적용시킬 수 있는 종합진리이다. 내용 자체는 그렇게 다양한 분야를 다루지 않지만, 그 내용들이 사람의 사고법칙을 체계화한 것이므로 어떤 학문에든지 적용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학문이든지 사람의 생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의 자연론은 원(圓), 즉 동그라미로 세계를 설명한다. 바로 이 동그라미에 사람과 세계의 비밀이 숨어있다. 거의 모든 도학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진리의 표상이 바로 원인 것이다.
그러면서도 원이 어떻게 진리의 표상으로 정착되게 되었는지, 그 이유에 대한 탐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실정이다. 달리 말하면 원이 어떤 과정을 거쳐 삼라만상을 창조하고 변화시키는지, 또 그것이 인간의 존재상황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밝히려는 연구가 미흡하다는 것이다.
'한'의 자연론은 원의 창조법칙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의 출발점인 동시에, <천부경>으로 역리(易理)를 밝혀내므로써 어느 정도는 성공한 논리이다. 원이 합리적 발생법칙을 따라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동양도학의 공통분모를 찾아내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그 작업이 성공한다면 동양도학의 모든 성과를 집대성할 수 있는 골격을 짜는 것과 같다. 따라서 이 부분을 이해해 두기만 하여도 도학분야의 책들을 읽고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2) '한'의 도학적 이해
'한'은 한겨레의 혼(魂)이다. 바꾸어 말한다면 '혼'은 곧 '한'이다. 지금은 혼을 얼이라고 부르고 있으니, 한겨레의 혼을 '한얼'로 불러도 될 것 같다.
이 한얼은 너무나 위대하여 혹독한 박해를 받아왔다. 그 위대한 혼이 되살아나면 사리사욕으로 쌓아올린 자신의 기업이 무너질 것을 두려워한 집권계층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얼의 고목(古木)에 새싹이 움틀 때 마다 모질게 도려내려고 했기 때문이다.
무당의 맥으로 이어지는 이 초인(超人)의 얼은 초인의 지배에 반발하던 제후들의 반란에 의해 붕괴되고, 조선 배달국을 조각내어 세습왕권을 수립한 반란제후들은 풍류에 대항하기 위해 신흥종교를 정책적으로 지원하였으니, 이렇게 성장한 것이 소위 오늘날의 고등종교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집권계층이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불교와 유교등 외래종교에 밀착하여 풍류의 맥을 왜곡시킨 역사가 천년이 넘는다.
천년이 넘는 기간동안 배척을 받아 소멸의 위기에 직면했던 한얼의 참모습을 올바로 되살려, 체계적 연구의 길을 열어놓은 민족의 스승이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선생과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선생이다.
이 두분의 사상을 간단히 요약할 수는 없지만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들자면, 단재의 업적은 '한'이 '임금'의 뜻임을 밝히므로써 '삼한'을 '국조삼신'에 결부시킬 수 있는 길을 열어 '한 나라'의 뿌리를 찾아낸 것이요, 육당의 업적은 '불함문화론'을 제창하고 ' '개념을 사용하여 광명사상을 민족혼의 핵심으로 부각시킨 것이다.
일제 침략기간 동안 독립투사들의 피땀어린 연구와, 해방 후 그 정신을 계승한 민족사학자들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한얼'은 민족정신의 핵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렇게 부활한 '한'을 학술적으로 연구하여 철학적 체계를 정립한 학자가 김상일 선생이다. 1983년에 발표한 <한철학>에서 '한'의 유래와 낱말 뜻을 정리하고, 다시 여러 철학사상을 이용하여 '한'의 철학적 의의를 정립한 그의 학문적 기여는 탁월한 것이다.
김상일 선생과 비슷한 시기에 민족사상을 연구해 온 여러 학자들이 다양한 연구결과를 발표하였는데, '한'을 민족사상의 으뜸표상으로 제시한 분으로는 <천부경> 수리해설의 최고 권위자인 최재충(崔載忠) 선생(우리 말, 우리 글, 우리 얼), <한단고기>를 주해한 임승국(林承國) 선생 등이 있으며, 이 분들의 책은 글쓴이가 이 책을 쓰는데 많은 도움을 받은 책들이다. 글쓴이의 연구는 이 여러 선생들의 연구를 이어 나가는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 자리매김 하고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후배의 역할은 선배들의 연구를 토대로 보다 넓은 영역을 개척하고 발전시키는 것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기존의 연구성과들을 검토해 보면 한가지 문제점이 발견된다.
그것은 일제의 악랄한 민족말살시책에 대항하여 전통사상을 수호하기에 역점을 두다보니 '한'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우리의 전통사상과 세계의 다른 사상들과의 관계를 밝히는 면에서는 소홀한 점이 보인다는 것이다.
특히 대부분의 연구가 선생 자신들의 전문분야와 관계되는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한'의 특정한 측면을 부각시켜 해설하였고, 여러 학문분야에 자유롭게 적용할 수 있는 일반적이고 종합적인 모형이 정립되지 못한 것이 가장 아쉬운 일이다.
그 원인은 '한'을 기존 학문의 테두리에 끌어들이지 않고서는 학문적 공인을 받을 수 없었던 시대적 상황 때문이라 할 것이며, 이는 '한'의 독자적 위상 정립이 얼마나 힘겨운 과업이었던지를 웅변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한'이 인류문명을 이끌어 나가는 최고진리의 표상으로 복귀하기 위해서는 '한'의 독자적인 틀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한'의 자연론은 그런 모델의 시안(試案)으로 제시되는 것이며, 모든 학문분야에 적용시킬 수 있는 일반원칙으로서의 '도학적 틀'의 구성을 목표로 씌어진 것이다.
3) '한'의 뜻
'한'이라는 낱말은 수천년간 한겨레와 함께 살아 숨쉬는 동안, 수많은 뜻을 담게 되었다. 안호상(安昊祥) 선생은 우리말에서 '한'이 무려 22가지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밝혔는데, 그 뜻들은 다음과 같다.
(1)크다(大) (2)동이다(東) (3)밝다(明 . 鮮) (4)하나다(單一 . 唯一) (5)통일하다(統一) (6)꾼,뭇(大衆) (7)오래(久) 참음 (8)일체, 전체 (9)처음(始初) (10)한나라, 한겨레(韓民族) (11)희다(白) (12)바르다(正) (13)높다(高) (14)같다(同) (15)많다(多) (16)하늘(天) (17)길다(長) (18)으뜸이다(天) (19)위다(上) (20)임금(王) (21)온전하다(全) (22)포용하다(包容)
김 상일 선생은 이 뜻들을 몇가지 관점으로 나누어 중요한 개념들을 정리하고 있다.
그 첫째는 역사 . 문화적 관점으로서 ① 우두머리를 <한>으로 부른데서 [임금]의 뜻이 나왔고, 이 뜻은 '간', '칸', '찬' 등의 음으로 세계각지에 퍼져있다고 하며 ② 태양숭배의 풍습에서 유래한 [밝음], [해]의 뜻이 있다.
둘째는 종교적 관점으로서 ①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환하다>고 표현한 데서 유래한 [크고 밝음]의 뜻과 ② 땅을 덮은 큰 울타리라는 뜻의 [하늘]과 ③ 위의 ① 및 ②의 뜻에 인격이 부여된 [하느님]의 뜻이 있다.
셋째는 철학적 관점으로서 ① 수리적 개념으로서 [낱]으로서의 [하나]와 [온]으로서의 [전체]가 모두 <한>이라는 말로 표현되므로서 양면적 의미를 가지게 되고 ② 이 관념이 철학에 응용되어 [비시원적(Nonorientable)]이라는 뜻을 가진다. [비시원적]이란 김 상일 선생의 독자적 철학용어로서, "시공간의 어느 원점에서 생각을 출발시키는 것을 반대하는 말"이라고 정의하고 있다(<한철학>, p. 37.)
이 개념정리는 '한'의 체계적 이해에 많은 도움을 준다. 그러나 도학적 관점에서는 한 가지 아쉬운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것은 초월적 측면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위에 소개된 의미들에 [스스로의 초월의식 상태에서 발견되는 절대진리]로서의 '한얼'이 추가된다면, '한'의 도학적 체계구성에 필요한 의미는 모두 구비된다고 하겠다.
여기서 이 '한얼'이 빠진 것은 지금까지 학자들이 이 초월적 '한'을 다루기보다는 [논리 안에서의 '한']을 주로 다루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한'은 논리적 측면보다 초월적 측면이 훨씬 중요하고 범위도 넓다.
이책에서는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초월적 측면을 '한'의 핵심요소로 보고, 논리적 '한'은 초월적 '한'의 현실적용이라고 이해하는 입장을 취하고자 한다. 이렇게 하면 지금까지 과학의 영향을 받아 초월적 측면을 애써 외면해왔던 한계를 극복하고 전통도학의 진면목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4) '한'의 도학적 의미
① 개요
'한'의 뜻이 정리되면, 그 뜻들이 기존의 학문에서 사용되는 말들과 어떻게 관련되는지를 밝히는 것이 도학의 순서이다. 특히 '한'이 다른 도학 분야에서 쓰이는 어떤 말들과 비슷한 뜻인지를 밝히는 것이 이 대목의 주제이다. 이 작업은 '한'의 뜻을 확실히 하는 작업인 동시에, '한'의 인류문화 속에서의 지위를 결정할 작업이 되기도 한다.
다만 여기서 '한'이나 '한'과 같은 뜻을 가지는 다른 도학적 진리들의 구체적인 의미해설은 시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기서 소개되는 도학용어들이 한의 자연론에 의해 재해석 되도록 하려는 것이 글쓴이의 야무진 꿈이기도 하다.
② <천부경>의 [일(一)]
'한'은 <천부경> 여든한글자 중에서 처음과 끝에 배치되어 있는 '一(일)'로 이해된다. <천부경>의 첫구절과 끝구절은 각각 "一始無始一(일시무시일)"과 "一終無終一(일종무종일)"인데, <천부경> 수리해설의 권위자인 최재충 선생은 맨 첫글자인 '一'은 반드시 '한'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글쓴이의 생각도 같다.
그리고 이 '한'은 그 어떤 규정도 용납하지 않는 [초월적 진리]라고 하는데, 이 입장은 이책의 앞 부분에서 설명된 [절대진리]를 '한'으로 보는 입장과 같은 것이다. 그 '한'의 구체적인 뜻은 계속해서 소개되는 다른 용어들의 뜻과 관련시켜 이해할 수 있다.
③ 노자(도덕경)의 도(道)
<노자(도덕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도'는 그대로 '한'의 설명이다. "도를 도라고 할 수 있다면 참된 도가 아니니(道可道 非常道), 이름지어 부를 수 있다면 올바른 이름이 아니다(名可名 非常名)"라는 말은 '한'의 초월적 측면에 대한 가장 적당한 해설이다.
또한 이 구절은, '한'이 가지는 여러 뜻 중에서 어느 하나의 뜻에 초점을 맞추면 '한'의 생기(生氣)를 손상시키게 된다는 의미까지도 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구절 이외에도 도덕경에 나오는 도에 대한 여러 표현은 <천부경>의 '한'이 가지는 다양한 의미들을 설명하는 구절로 활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혼돈하면서도 이루어지는 무엇인가가 천지보다 먼저 있었다. ...... 나는 그 이름을 알지 못한다. 억지로 이름을 지어 도라고 부른다. ...... 도는 자연을 본뜬 것이다(有物混成 先天地生 ...... 吾不知其名 强字之曰道 ...... 道法自然)", "도가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고, 둘은 셋을 낳고, 셋은 만물을 낳는다(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천도는 마치 활시위를 메기는 것 같다. 높은데는 누르고 낮은데는 돋우며, 남아도는 것은 줄이고 모자라는 것은 더해준다(天之道 其猶張弓與. 高者抑之 下者擧之, 有餘者 損之 不足者補之)" 등에서의 '도'는' 한'의 또다른 이름으로 손색이 없다.
글쓴이가 보기에는 도덕경이 <천부경> 해설서로 생각될 정도로, 도덕경에는 풍류의 진리들이 압축, 요약되어 있다.
④ 유교의 천(天)
유교의 경전에 수없이 등장하는 '天(천)'은 '한'으로 읽어도 된다. '天'은 본래 태양신을 나타내는 글자였고, 뒤에 하늘(허공)의 뜻이 더해졌으며, 하늘과 태양신의 신격이 더해져 상제(上帝)의 뜻이 된 것이다. 이런 뜻들은 우리말 '한'의 뜻과 완전히 일치한다.
여기에 공자 이후에 형성된 도리원(道理源)으로서의 '天'이 '한'의 초월적 측면에 대응될 수 있는만큼, '한'과 '天'은 같은 것이다.
⑤ 불교의 空(공)
불교에서 최고진리의 표상으로 말해지는 '空'도 '한'과 뜻이 통한다. '空'은 '하늘', '빔' 또는 '없음', '구멍' 등의 뜻을 가진다. [하늘(한)]은 [비어(空)]있고, [환]히 [틔어(空)] 있으며, 아무것도 없지만(空), 만물이 그 구멍(空) 속에서 생겨나니 [큰(大)] 근원이 된다.
'空'을 [초월적 진리]로 이해할 때에도 '한'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空'의 초월적 측면을 체계화한 용수보살(龍樹菩薩; 나가르쥬나)의 중도론(中道論)에서는 "양변을 여읜 곳이 중(中)"이라고 한다는데, 이는 말을 바꾸면 "안(이쪽)에도 있지 않고, 밖(저쪽)에도 있지 않으면서, 둘을 모두 포용한다"는 뜻이 된다.
[안]에 있지 않으면 [한 데(밖)]에 있을 것이요, [밖]에 있지 않으면 [안]에 있을 것이다. [안]은 [한]의 약한 발음이며, [한], [안], [칸], [환]등은 같은 말에서 분화한 말이라고 한다. [안]과 [밖]을 [하나]로 뭉뚱그려 [한 가운데(大中)]로 들어가는 것이 중도(中道)이니, 중도도 '한'과 다른 점이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 '空'을 깨우쳐 절대자가 된 사람이 '붇다(Buddha; 佛陀)'이다. 소승불교에서는 불타(佛陀)가 단순히 [깨달은 사람]을 뜻하지만, 대승불교의 <법화경(法華經)> 같은 데에서는 삼계의 절대자로 이해된다. 그런데 바로 이 불타가 '한'의 변형 중의 하나인 것이다.
'불(佛)'은 [불(火)]과 같은 소리이며, 이는 [불 빛]인 [밝음]을 얻어 [어둠(無明)]을 벗어난 사람이다. 범어(梵語)의 '붇다'는 우리말의 [(불이) 붙다]와 소리가 같고, [불]이 [붙으]면 [환]할 것이다.
또 '붇다'는 [둘 이상의 물건이 합해진다]는 뜻의 [붙다(着)]와도 소리가 같다. 나뉘었던 것이 [붙]으면 온전한 [하나]가 될것이며, 그 순간 상대적 세계는 소멸되고 절대의 세계가 열릴 것이니, 여러 모로 '붇다'는 '한'과 통하는 것이다.
⑥ 기독교의 God(신)
우리나라에서 행세하는 기독교의 '하나님', 즉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자신이 '한'임을 스스로 밝힌 경우에 해당한다.
이상한 말로 들릴 수도 있겠으나,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하며 모든 역사에 관여하는 하나님이, 성경을 번역하는 것 같은 중요한 사업에 역사하지 않았을 리가 없으며, 이미 역사하는 마당에 다른 신의 이름을 도용하거나 가명을 썼을 리도 없다. 따라서 기독교의 하나님은 '한'이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고학적 자료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모체는 수메르 문명이다. 수메르 유적에서 출토된 점토판 중에 길가메쉬 서사시란 것이 있는데, 거기에는 성경에 나오는 에덴동산 이야기와 비슷한 내용이 있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은 이 내용이 히브리인들에 의해 다듬어져 성경의 창세기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바는, 고고학자들의 관점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모체문명이라고 하는 수메르 문명의 주인공들인 수메르인들이 섬기던 신(神)들 중에서 최고신의 이름이 '안(AN)'이라는 사실이다. 이 '안'이 '한'과 같은 계열의 말일 가능성은 김 상일 선생이 여러모로 제시하고 있다.
기독교는 유대인들의 민족신앙이 예수에 의해 발전적으로 승화되어 형성된 종교라고 할수 있겠는데, 유대인의 민족명은 히브리(Hebrew)이다. Hebrew는 [헤브류]로도 읽을 수 있는데,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첫머리에 나오는 [부여왕(夫餘王) 해부루(解夫婁)]와 같은 소리로 볼 수 있다.
무슨 헛소리냐고 생각할 사람들을 위해 한가지 증거를 더 제시하자면, [부여]가 바로 역(易)의 원조인 복희(伏羲)씨이며, 복희씨의 짝이 바로 [여와(女渦)] 또는 [여희(女羲)]라는 사실이다. 앞의 [풍류대도]에서 이미 밝힌 내용과 같이, 유대인의 시조가 먼 옛날 우리 동이조선에서 갈라져 나간 갈래일 가능성은 아주 높다.
아무튼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에 대한 묘사도 '한'의 뜻과 일치한다. 하나님은 하늘에 있고, 빛을 내어 만물을 창조하였으며, 오직 한 분이다. 결국 하나님은 본명이 [한]이었으며, 객지를 떠돌아 다니는 동안 쓴 별호가 '엘로힘', '야훼', '갇(God)' 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자연론의 내용
1) 미련한 짓
지금부터 시도하는 '한'의 해설보다 미련한 짓도 별로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을 묘사하거나 설명하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며, 억지로 설명을 한다 해도 '한'에 대한 오해와 선입관만 보태주는 결과를 낳기 쉬운 때문이다.
그 이유는 이미 밝힌대로 '한'이 [분별하고 헤아리는 생각]으로는 결코 경험조차 할 수 없는 것인만큼, 생각된 내용을 짜맞추어 만들어진 말을 가지고 [생각할 수도 없는 것]을 말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해설은 [기껏해야 본전]일 수밖에 없는 모험이요, 잘못하면 [여러 사람 버려놓기 십상인] 해설이다. 그런데도 왜 이 미친 짓을 해야만 하는가?
지금까지 인류를 이끌어 온 철학과 종교의 으뜸가는 진리, 또는 수행의 마지막 목표들은 한결같이 "설명할 수도 없고 묘사할 수도 없는 것"으로 말해져 왔다. 다만 그것을 나타내는 억지 이름을 붙여 놓았으니, 그런 것이 있다고 믿고 찾아보라고 가르쳐 왔고, 배우는 사람들은 그런 엉터리같은 가르침을 믿고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이 엉터리같은 가르침이 실제로는 [가장 올바르고 뛰어난 가르침]이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사람들 조차도 지금은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는 현실이 이런 미친 짓을 해야하는 이유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 원인이 요즘 사람들이 진리에 대해 너무 많이 알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문제를 더 어렵게 만든다. 물론 그 [앎]이 깨달음이 아니라 지식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말이다.
어린 아이들은 사물을 인지(認知)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가르쳐 주어도 알지 못할 것을 부지런히 물어본다. 그런데 교육의 기회가 개방되고 지식이 널리 보급된 오늘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지식에 대한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궁극적 진리에 대한 호기심도 일반화되면서, 가르쳐 주어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그러나 요즘 세상에는 그런 사람들에게 지식의 한계를 깨우쳐 주고 올바른 학문태도를 심어주는 스승은 찾아보기 어렵다. 오히려 설익은 지식들을 짜맞추어 혹세무민하는 무리들이 행세하면서 잘못된 지식들을 주입시키고, 배우는 이들은 대책없이 세뇌당하는 것이 학계와 종교계에 만연된 병폐이다.
이런 병폐를 치유하는 길은 두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옛 선현들이 "최고의 진리는 말로 나타낼 수 없다"고 가르친 참뜻을 직접 확인할수 있도록 해 주므로써, 지식의 굴레에 매이지 않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최대한 비슷한 말로 설명해 주는 극약처방이다.
여기서 해설하는 '한'의 자연론은 바로 이 극약처방에 해당한다. 이는 분명히 미련한 짓이다. 그런 줄 알면서도 이 무식한 짓을 하는 이유는, 현대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이 해설이 최소한 한 두 가지 정도의 공헌은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그 한가지는 여러 가지 지식의 짜집기로 만들어진 거짓 진리들을 분별할 판단기준으로서의 역할이다. 지금 행세하는 여러 이론체계들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여러 분야의 가르침들을 끌어 모아 종합학문적 체계를 갖춘 것이므로, 어지간한 분별력이 없으면 그 진위(眞僞)를 분간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 역할을 감당하려면, 이미 진리로 판명된 이론들과 충돌하지 않으면서, 새로운 견해를 폭넓게 수용할 수 있는 파격적인 이론체계가 필요하다.
이런 이론체계는 기존 이론들의 짜맞추기 만으로는 만들어질 수 없으며, 이미 제시되었으면서도 표현할 말을 찾지 못했던 진리들을 표현할 말을 새로 만들어 내어야 하는 것이다. 이 '한'의 자연론은 바로 이 작업의 물꼬를 트려고 하는 것이다.
이 해설이 한 가지 더 공헌할 부분은 지금까지 종교적 진리들이 소홀히 다루어 왔던 현실적 측면에의 기여이다. 도(道)는 본래 초월적인 허무의 측면과 현실적인 형색(形色)의 측면을 포괄하는 종합체계이다. 그런데 오랜 세월에 걸쳐 종교계의 가르침은 초월적 측면에 역점을 두었고, 현실세계는 뛰어넘어야 할 굴레라고 가르쳐 왔다.
그 결과 도학은 실속없는 공리공론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었고, 일반인들은 도인들을 현실도피자로 보게 되었다. 도인들은 도인들 대로 현실생활에 유능한 사람들을 속물(俗物)로 평가절하 하면서 스스로를 위안하고, 진리의 현실적용과 실생활의 개선에는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사람이 생존해 있는 이 현실세계가 도의 영역에서 제외시킬 수 없는 일부임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현실생활의 개선은 도학의 중요한 사명의 일부임에도 불구하고, 무욕(無慾)만을 주장하고 현실도피를 권장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교화방법이 아니다. 좀 심하게 표현하자면, 절대적 진리를 귀동냥한 주제에 자기가 직접 경험한 것처럼 혹세무민하는 사기군이 아니라면, 반드시 도통한 사람이 아니라도 현실개선에 힘 쓸 것이다.
실제로 성인으로 추앙받는 위인(偉人)들은 현실개선을 위한 방법과 마음가짐을 완벽한 체계를 세워 가르치고 또 그 가르침을 몸소 실행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석가의 설법과 교단개창, 공자의 철환천하(轍環天下; 수레 몰고 온 세상을 돌아다님), 예수의 살신성인(殺身成仁)등은 진리를 얻은 사람들이 사는 삶의 모범이라 할 수 있다.
보기에 따라서는 그들의 행위가 그들이 가르친 [현실적 욕망을 벗어나 절대적인 평화를 누리는 것]과 위배되는 행동처럼 보일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거기에 평생의 정열은 물론이요,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바쳤던 것이다.
성인들이 현실참여에 더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그들이 가르친 이상향이 현실세계 밖의 별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똑바로 본 것]이라는 가르침을 스스로 실천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인들의 가르침을 배우는 도인들의 현실참여는 당연한 것이다.
도학의 현실적용을 위해서는 그 시대에 맞는 논리가 필요하다. 지금 시대는 과학적 사고가 일반인의 의식구조를 지배하고 있는 시대이다. 그런만큼 합리적 논리나 과학적 지식으로 해명되지 않는 가르침은 [맹목적 신념]이나 [미신]등으로 매도되기 십상이다. 따라서 지금 시대에는 지금 시대에 맞는 논리로 진리를 설명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과학지식은 이미 신학(神學)의 영역을 따라잡았고, 여러 종교에 비전된 진리들을 남김없이 증명해 내었을 뿐만 아니라, 우주와 생명의 물질적 창조원리까지도 밝혀내고 있다. 그러나 철학이나 종교는 절대적 진리에 대한 탐구소홀로 인해, 과학을 지도하거나 바람직한 발전방향을 제시해야할 본연의 임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가장 시급한 과제는 과학문명의 올바른 발전을 유도할 수 있는 새로운 진리체계의 구축이다. 인간의 심성(心性)을 지도해 왔던 옛 도학의 진리들을 과학적 지식으로 재조명하여, 과학이 도달할 수 없는 도학 영역의 참모습을 합리적 논리로 해명해야 한다. 바로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한'의 자연론과 같은 미련한 극약처방이 필요한 것이다.
2) 자연론의 주제
'한'의 자연론의 주제는 '한'의 도리적(道理的) 측면을 밝혀 이론화 하려는 것이다. [도리]란 심리(心理)와 물리(物理)를 종합한 자연의 이치이다. 즉 '한'의 자연론은 인간을 포함한 전체우주의 모든 현상에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이론체계이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자연론은 '한'을 '자연(自然)'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해설한 것이된다. 여기의 자연이라는 이름은 <노자>의 "道法自然(도법자연)", 즉 "자연을 본뜬 것이 도"라는 말을 받아들인 입장이다.
이 책의 주제가 도학(道學)이며 도학의 대상은 도(道)인데, 그 도라는 것은 억지로 지은 이름이요, 이름짓기 전의 도는 [저절로 그런 그 무엇]이다. 바로 이런 관점을 "도법자연"이라는 말이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자연'이라는 이름을 선택한 것이다.
또, 사람들이 스스로의 내면세계를 '마음'이라 하고 외부세계를 천지자연이라고 불러온 전통도 고려하여 이 이름을 붙였다. '한'의 주관적(내면적) 초월경(超越境)은 말로 전할수 없지만, 그 객관적 작용법칙은 사람의 신체적 조건이 유사한 만큼 공통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 객관적 측면을 정리한 이론적 틀이 '한'의 자연론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결국 자연론의 주제는 [자연]으로 불리기도 하는 '한'인데, 그 내용을 모두 다룰 수 없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리라 생각된다. 그렇다고 생각나는대로 무작정 아무 대상이나 들쑤신다면, 재미는 있을지 몰라도 공부에 도움은 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몇가지 중심주제를 선택하여 체계를 잡았는데, 그 중심주제는 '한'의 '감' . '수' . '꼴' . '짓' . '틀'로 하였다. 이 말들은 김 상일 선생의 <한철학>에서 사용된 용어들인데, 이 말들의 유래가 오래되고, 그 말에 담긴 뜻이 넓고 깊으며, 일상생활에 지금도 쓰이는 말들인 만큼 반드시 되살려 발전시켜야 할 낱말이라고 생각되어 채택한 것이다.
김 상일 선생은 '한'의 철학적 개념을 '감' . '꼴' . '짓' . '틀'의 네 요소로 나누어 고찰하는데, '감'은 사물의 재료(또는 소재)의 뜻이고, '꼴'은 사물의 모습(또는 형태)이며, '짓'은 그 하는 일(또는 작용)의 뜻이며, '틀'은 그것들이 종합된 기본 됨됨이의 뜻으로 설명한다.
여기에 가능성의 뜻으로 쓰이는 '수', 즉 [할 수 있다], [될 수 있다], [싹수가 보인다] 등에서의 '수'를 더하여 자연론의 '틀'을 짜려는 것이다. 이 다섯 요소는 오행을 고려한 것으로서,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아진다.
이 다섯 주제 중에서 '틀'을 제외한 나머지는 다시 둘씩 묶을 수 있는데, 그림에서 보는 것 처럼 '감'과 '꼴'을 '생김'으로, '수'와 '짓'을 쓰임으로 묶는 것이다. 여기서의 생김과 쓰임은 도학에서 체(體)와 용(用)이라고 부르는 것에 해당한다.
+--------------------+--------------------+--+
| 감 | 꼴 |생|
| (바탕) +------+------+(됨됨이) |김|
+--+-------------+ 틀 +-------------+--+
|쓰| (쓸모) +------+------+(씀씀이) |
|임| 수 | 짓 |
+--+--------------------+--------------------+
생김새는 사물의 몸뚱이에 대해 쓰는 말이다. 몸뚱이의 밑바탕이 '감'이다. 이 '감'이 다른 사물과 구별될 수 있는 모습을 갖춘 것이 '꼴'이다. 따라서 [생김 중의 생김(體之體)]이 '감'이요, 이 '감'이 쓰인 것이 '꼴'이므로 [생김 중의 쓰임(體之用)]이 '꼴'이다.
쓰임새는 몸뚱이가 움직이는 모습이다. 움직이는 데에는 힘이 있어야 하는데 이 힘이 '수'이다. 즉 '수'는 쓰임의 바탕이 된다. 쓰임의 모습이 '짓'이다. 결국 쓰임 중의 쓰임(用之用)이 '짓'이요, 쓰임 중의 생김(用之體)이 '수'이다.
그러면 '틀'은 무엇인가? 틀은 몸뚱이 그 자체이다. 짜임새와 겉모습은 물론 그 둘이 결합되어 해낼 수 있는 솜씨까지를 모두 싸잡아 '틀'이라고 한다. 이 다섯 측면을 밝히면 이책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한'의 생김과 쓰임의 전체 틀이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3) 자연의 뜻
'자연(自然)'은 [저절로 그러함]이다. [저절로]라 함은 어느 누구에 의해 어떻게도 되어지지 않았음이요,[그러하다]함은 모든 됨됨을 대신할 수 있는 말이다.
[저절로]는 '나' 까지도 '나'를 '나'라고 생각해 보지 않은 절대무규정 상태이다. '내'가 규정되지 않았으니 당연히 '너(나 이외의 것)'도 규정되지 않는다. [저절로]란 원인을 알 수 없을 때 쓰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여기서는 결코 그런 뜻이 아니다. 아예 원인이 없을 때 쓰는 말이 [저절로]인 것이다.
이런 상태가 있는가? 있다. 서양철학에서는 헤겔에 의해 단 한 번 도달된 자리가 여기이고, 그 때문에 헤겔이 자신에게서 철학이 완성되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도학에서는 한소리 했던 사람(득도했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다 가본 자리이다. 서양에서 도학이 행세하지 못한 이유는 알아들을 만한 사람조차 없었던 탓인 것이지, 동도학의 진리가 틀린 탓이 아닌 것이다.
[그러하다]가 가리키는 됨됨이는 모든 틀, 즉 모든 생김새와 쓰임새이다. 있고 없고, 크고 작고, 차고 비고, 오고 가고, 움직이고 머물고, 춥고 덥고, 맑고 흐리고, 밉고 곱고, 달고 쓰고, 좋고 싫고, 늘고 줄고, 되고 말고, 살고 죽는 이 모든 됨됨이들이 [그렇다]는 말로 나타내어진다. [그렇지 않다] 까지도 "안 [그렇다]"로 나타내어지는 [그렇다]의 한 상태인 것이다.
'자연'은 이런 [저절로]와 [그렇다]를 묶어 만들어진 말이다. 그러나 이미 생각되고 말해졌기 때문에, 이 말에 묶였다 하면 그 순간에 "개미 쳇바퀴 돌기"가 시작된다. 그건 결코 글쓴이의 의도가 아니고, 그런만큼 이 말에 묶이더라도 글쓴이에게는 책임이 없음을 미리 말해둔다.
이 [저절로 그러함]은 최 제우 선생이 이미 도학적 의미를 부여해 놓은 말이기도 하다. <동경대전(東經大全)>의 {불연기연(不然其然)}은 배우는 마음자세를 상세히 지적하고 있는 도학의 큰 길잡이로서, '있음(有)'과 '없음(無)'이라는 철학적 주제를 통해 '자연'을 이해한다.
"노래하기를 천고의 만물이여, 각각 이름이 있고 각각 형상이 있도다.
보는 바로 말하면 그렇고 그런 듯 하나, 그 부터 온 바를 헤아리면 멀고도 심히 멀도다. 이 또한 아득한 일이요, 헤아리기 어려운 말이로다.
나의 나된 것을 생각하면 부모가 이에 계시고, 뒤에 뒤될 것을 생각하면 자손이 저기 있도다. 오는 세상에 견주면 이치가 나의 나된 것을 생각함에 다름이 없고, 지난 세상에서 찾으면 의심컨대 사람으로서 사람된 것을 분간키 어렵도다.
아! 이같이 헤아림이여, 그 그러함을 미루어 보면 그 그러함이 그 그러한 것 같으나, 그렇지 않음을 찾 아서 생각하면 그렇지 않고 또 그렇지 않도다.
왜 그런가. 옛날에 천황씨는 어떻게 사람이 되었으며, 어떻게 임금이 되었는가. 이 사람의 근본됨이 없음이여, 어찌 불연이라고 이르지 않겠는가. 세상에 누가 부모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 선조를 상고 하면 그렇고 그렇고 또 그런 까닭이니라. ...... 임금은 맨처음 자리를 전해준 임금이 없건마는 법강을 어데서 받았으며, 스승은 맨처음 가르침을 받은 스승이 없건마는 예의를 어데서 본 받았을까.
모를 일이로다. 모를 일이로다. ...... 무릇 이와 같은즉 불연은 알지 못하므로 말하지 못하고, 기연은 알 수 있으므로 이에 기연을 믿는 것이다. 이에 그 끝을 헤아리고 그 근본을 캐어본 즉, 물건이 물건되고 이치가 이치된 큰 일이 얼마나 먼 것이냐. ...... 이러므로 기필키 어려운 것은 불연이오, 판단하기 쉬 운 것은 기연이라. 먼데를 캐어 견주어 생각하면, 그렇지 않고 그렇지 않고 또 그렇지 않은 일이오, 조물자에 붙여보면 그렇고 그렇고 또 그러한 이치인저.
이 {불연기연}은 만물의 시초에 대한 의혹을, 인류의 첫 조상에 대한 고찰을 이용하여 추적해 나가는 형식으로 되어있다. "내가 있음은 부모가 있기 때문이지만, ...... 천황씨는 부모도 없이 사람이 되고, 뿌리없이 임금도 되고 스승도 되었다. (이 문제를) 생각하여 밝히고자 하면 그렇지 않음만 나오지만(不然不然又不然之事), 조물주에 갖다 붙여보면 그렇고 그런 이치가 된다(其然其然又其然之理)"는 것이다.
여기서는 존재의 근거가 [있음(有)]을 '그럼(其然)'이라 하고, 근거가 [없이(無)] 존재함을 '안그럼(不然)'이라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유무]라는 철학적 주제를 인간의 시초에 적용시켜 살피는 것이다.
여기서 '기연(其然)'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자연'이다. 自(자)를 其(기)로 바꾸었으되 그 뜻에는 실질적인 변화가 없다. 이는 <노자>의 '자연'을 재해석하여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기연'이 '자연'과 같은 말이 되는 것은 맨 마지막 구절에서 알 수 있다. "조물자에게 붙여보면, 그렇고 그렇고 그러하다(付之於造物者卽 其然其然又其然)"라는 구절에서 주의할 부분은 [붙이다(付)]이다. 왜냐하면 이 말을 잘못 이해하면, 모르는 부분을 조물자의 소관으로 돌리고 적당한 수준에서 의문을 포기하는 것으로 보기 쉬운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붙이다]는 {조물자에게 가서 붙다}는 뜻, 즉 {천지창조의 근원으로 돌아간다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때 나(自)와 남(他)을 동시에 초월하는 [그것(其)]이 그저 [그렇게(然)], 또는 [규정되지 않은 상태(然)]로 있다는 것이 이 구절의 참뜻이다.
조물자와 내가 하나로 붙을 때, 모든 '안그럼(不然)'이 '그럼(其然)'으로 바뀐다는 것이니, [조물자와 하나됨으로써] '불연'과 '기연'의 유무(有無) 시비(是非)를 종합통일한 [절대적 긍정]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상태에 이른 것을 수운은 "시천주"라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한'의 자연론이 말하는 '자연'도 {조물주에게 가서 붙어 얻어진 절대긍정으로서의 그럼(其然)}인 것이다. 우리는 지금 살펴본 내용을 통해, 동학이 단지 유교와 불교 및 도교를 융합한 정도가 아니라, 기독교의 창조론까지도 발전적으로 조화시켜 두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자연'은 미개발 상태로 방치된 자연이나, 정복하고 이용해야할 생존경쟁 장소로서의 자연들과는 격이 틀리는 자연이다. 이 자연은 심리적 내면세계까지도 포함하는 인간적인 자연이며, 주관적 자아와 객관적 외부세계로 갈라진 틈새를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물아일체(物我一體)의 자연이다.
더욱이 이 합일상태는 주관의식조차도 형성되지 못하여 환경에 피동적으로 복종된 상태가 아니라, 주관의식이 성립한 후 스스로의 왜소하고 무기력함을 절감한 다음, 그 왜소하고 무기력한 자신이 바로 대우주를 창조하여 운영하고 있는 절대자임을 재확인한 합일상태이다.
이를 의식적 측면에서 살피면, 주체의식(主體意識; 육체를 주관하는 동물적 의식)이 주관의식(主觀意識; 대상을 인식하고 사고까지 하는 의식)의 단계를 거쳐, 주재의식(主宰意識; 자기우주를 자기가 다스리는 의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이 주재의식이 인지(認知)하고 있는 [주객관 통합세계]가 여기서 말하는 '자연'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한'의 자연론이 다루는 '자연'은 가장 원초적 자연인 동시에 가장 발전된 자연이요, 또한 가장 인간적인 자연이다. 학문의 초점을 이 자연에 맞출 때, 환경문제나 소외문제 등은 저절로 해결될 수 있으며, 지금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린 자연법 사상이나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맥빠진 구호가 새로운 활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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