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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FO 외계인 무한(無限)의 메시지[천부경 8장-6]‘우주=무한=하나=사랑’ 본문
UFO 외계인 무한(無限)의 메시지[천부경 8장-6]
‘우주=무한=하나=사랑’
<천부경>은 8번째 문장에서 빛을 내어 아낌없이 주기만 하는 태양의 모습을 인간들이 추구해야 할 가장 바람직한 롤모델로 제시한다.
우리 모두가 ‘무한의 사랑과 행복’을 상징하는 ‘태양(별)’에서 왔으니 태양처럼 빛을 내고(행복) 빛을 주며(사랑) 살아가야 한다(昻明人, To be a shining stars)는 메시지다. 사람도 ‘우주의 빛’ 태양(별)처럼 ‘빛(사랑-행복)’을 내야 한다는 천명(天命)이다.
‘사랑’(본능적/호르몬적 사랑이 아닌 우주적/보편적 사랑)으로 가득한 ‘무한(無限)의 이치(理致)-천리(天理), 천도(天道), 무극대도(無極大道)-를 인간세상(사회)에 적용해 인류를 널리 이롭게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화세계(理化世界) 사상도 <천부경>의 8번째 문장에 뿌리를 둔 것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동시에, 일체의 차별과 분리없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하나’라는 ‘天地人(천지인) 合一(합일)’ 정신과 일맥상통한다. 우주만물이 둘(二)이 아닌 ‘하나(一)’라는 <천부경>의 ‘天地人(천지인) 合一(합일)’ 정신은 곧 일체만물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고 하나라는 불교의 만법일여(萬法一如)-만법부작이(萬法不作二)-만법귀일(萬法歸一) 철학과 같은 것으로 그 바탕에는 위대한 마하반야의 지혜, ‘우주적 사랑(Universal love)’이 자리잡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도 모든 것들이 ‘하나’가 아닌 ‘둘-셋-넷-다섯…’식으로 분리되어 있고 다르게 보인다면 ‘진리’가 아닌 ‘헛된 망상과 환상(Ilusion)’을 보고 있는 것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로 맺어지고 얽혀 있기 때문에 ‘너’와 ‘나’가 따로 있을 수 없다. ‘너’와 ‘나’가 본래 둘이 아닌 똑같은 하나(一)인데, 전체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어찌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Universal Love’
나사렛 예수가 인간세상을 향해 큰 소리로 “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도 내주어라”라고 한 것도 우주의 무한성과 일체성에 기반한 우주적, 보편적 사랑(Universal Love)을 말한 것이다. 예수는 간음한 여인도 대자대비한 사랑으로 용서(포용)하고,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던 바리새인(유대인)들도 사랑의 품에 안으려고 했다. 무한우주에 가득찬 차별과 성역없는 자연 그대로의 ‘빛(태양)의 사랑’을 일깨우기 위해 가르쳤고 자기희생까지 무릅쓰며 몸소 실천했다.
‘깨달은 자’ 붓다도 마찬가지였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붓다의 설법을 듣고 나서 그에게 가까이 다가 왔다. 그리고선 느닷없이 “당신의 말은 사기다. 당신은 사이비다”라고 비난하며 붓다의 얼굴에 침을 뱉고 욕설을 퍼부었다. 하지만 붓다는 웃기만 할 뿐 어떤 대꾸의 말도 반박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후였다. 그 남자가 붓다에게 찾아와 무릎을 꿇고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닌가. 그 때 붓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저 조용히 미소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괜찮습니다. 당신의 오해가 풀려 다행입니다. 오늘 지금의 당신은 나에게 침을 뱉었을 때의 당신이 아닙니다. 나 역시 그 때의 나가 아닙니다. 당신도 변했고 나 또한 변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당신에게 그 어떤 나쁜 감정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아무렇지 않으니 당신도 아무 걱정 말고 늘 행복하고 웃으세요.”
온 우주를 차별없이 밝혀주는 태양/별처럼 붓다 역시 언제나 ‘이유 없이’ 철철 넘치는 우주적 사랑(대자대비)을 보여주었다. 붓다는 “우주만물은 ‘하나’로 연기(緣起)되어 너와 나가 따로 없는 ‘무아(諸法無我)’이기에, 그리고 무한(無限) 속에서 모든 것이 영원히 순환하며(諸行無常) 서로 섞이므로 다 똑같은 존재”라며 “일체의 차별없이 무한한 사랑으로 상생(相生)하라”고 가르쳤다.
‘중도(中道)’
붓다가 가르친 ‘중도(中道, Middle Way)’ 또한 ‘사랑’과 다름이 아니다. 하나도 빠짐없이 구석구석 빛을 보내주는 ‘태양의 불편부당(不偏不黨)한 마음’을 닮으라는 얘기다.
‘中道’란 진보와 보수처럼, 극과 극으로 편을 갈라 아웅다웅 싸우는 ‘양극단(兩極端)’-하나의 극단과 또 다른 극단-을 버리는 것을 말한다. 극과 극을 버린다는 말은 양극, 양변을 다 취하는 것으로,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 차별없이 모든 곳(것)에 골고루 빛을 주는 태양처럼 다 포용하라는 뜻이다. 받을려고 하지 않고 그저 무조건 주기만 하는 ‘사랑’과 같은 말이다.
‘양변을 차단하고(쌍차) 양변을 비춘다(쌍조)’는 불경(佛經)의 ‘쌍차쌍조(雙遮雙照)’도 ‘중도(中道)’를 일컫는 말이다. 극과 극으로 맞서는 양변(兩邊)을 다 아우르면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해지면서 내면으로부터 빛이 나온다(적광, 寂光)는 화두도 있다. 이 ‘적광(寂光)’은 앞에서 살펴본 성현들의 ‘후광(後光)’과도 통하고, 5개 뇌파 가운데 안정적인 파동을 그리는 ‘행복파’ ‘명상파’와 같은 ‘알파파’ 방출로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쪽으로의 쏠림이나 치우침없이 양쪽을 다 아우르는 ‘하나됨(一)’의 중도(中道)에 설 때 비교적 진폭이 완만하고 균일한 파동의 알파파, 곧 ‘중간파(Middle wave)’가 나오면서 평정심을 유지하고 행복해진다는 얘기다. 반대로 양극단(좌-우, 진보-보수…)에 서게 되면, 자기 진영이 유리할 때는 펄쩍 뛰며 뛸 듯이 기뻐하다가도 불리해지면 땅이 가라 앉을 정도로 낙심하게 된다. 자연히 기복(급등락)이 아주 심한 뇌파(베타파)가 방출될 수 밖에 없다.
톱니바퀴처럼 날카롭고 불안정한 뇌파가 나오는 상황이 만성화 된다면 마음(정신)이 심히 불안하고 스트레스가 쌓이면서 우울증, 화병(火病) 같은 이상증세가 오게 마련이다. 마음의 병은 곧 육체의 병으로 발전하고 병이 깊어지면 고통도 가중되어 두려움과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이렇듯 한 쪽으로 치우쳐 서로를 미워하는 ‘양극단(兩極端)’은 늘 희비가 엇갈리면서 ‘고통(苦痛)’과 ‘불행(不幸)’을 초래한다. 하지만, 아무 이유없이 모두를 포용하고 사랑하는 ‘중도(中道)’는 ‘평화(平和)’와 ‘행복(幸福)’을 가져다 준다. 한 편은 ‘약(藥)’을 먹고 병원 신세를 질 가능성이 높겠지만, 다른 한 편은 늘 ‘세로토닌’이란 행복 호르몬이 샘 솟기 때문에 약을 먹을 필요가 전혀 없을 것이다.
태양/별처럼 피아(彼我)를 가리지 않고 골고루 빛을 주는 ‘중도(中道)’야말로 행복한 삶의 열쇠다. 우주법칙 또는 자연법(Natural Order)을 의미하는 ‘연기법(緣起法)’이나 ‘무아론(無我論)’도 똑같다. 우주만물이 서로 손에 손을 맞잡고 ‘하나(一)’로 얽히고 이어져 있는 모습이 ‘사랑’ 아니면 그 무엇이란 말인가.
“한 사람의 생명은
인류 전체보다 더 중요하다!”
현실을 보면 ‘중도(中道)’처럼 양극단을 다 포용(용서)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우주만물의 실상(참모습)인 ‘무한(無限)’에는 본질적으로 상극이나 대립이 결코 존재하지 않고 일체만물이 하나로서 무궁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반야심경>에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고 했듯이 삼라만상 우주에는 100% 더러운 것도 100% 깨끗한 것도 없다. 100% 선한 것(사람)도 100% 악한 것(사람)도 없다. 100% 흰 것도 없고 100% 검은 것도 없다. 100% 음(陰)도 없고 100% 양(陽)도 없다. 음(陰) 속에 또 양(陽)이 있고, 양(陽) 속에 또 음(陰)이 있다. 마찬가지로 공(空) 속에 또 색(色)이 있고, 색(色) 속에 또 공(空)이 있다. 근본, 진리는 음양동근(陰陽同根)이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다. 또 이기일원(理氣一元)이고, 천지인(天地人) 합일(合一)이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Everything is one)’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We are one)’여야 한다. 여기엔 단 하나, 단 한사람의 ‘예외(열외)’도 있어선 안 된다.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손에 손을 잡고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 무한(無限)의 단일 네트워크에서 그것을 구성하는 단 하나의 물질(입자)이라도 제외되어 없어진다면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으면 저것도 사라진다…’는 연기법(緣起法)에 따라 모든 것(우주만물)이 다 사라지게 된다. 있으면 다 있고, 없으면 다 없는 것(All or Nothing)이야말로 절대적인 우주법칙이요, 만고불변의 자연법이다.
무한우주의 일부인 인간 세상 역시 절대적인 사랑의 우주법칙(자연법)을 벗어날 수 없다. 때문에 단 한사람의 열외도 왕따도 있어선 안 된다. 만일 70억 명의 인류 가운데 어느 한 사람을 희생시켜야만 나머지 69억 9999명이 생존할 수 있다고 치자. 그렇더라도 그 한 사람을 결코 희생시켜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을 죽이고 전체가 생존할 바엔 차라리 전부 죽는 편이 낫다.”
한 사람의 생명은 전 인류의 생존보다 더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1명을 죽이는 것을 수락하고 허용한다면 10명을 죽이는 것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10명에 대한 사형을 묵인한다면 100명, 1000명의 죽음도 거리낌없이 받아들이게 된다. 이런 식으로 해서 갈수록 사회 전체에 다수를 위해서는 소수를 희생시킬 수 있다는 다수결 원칙이 확립되어 폭력과 전쟁이 난무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생명을 경시하는 이른바 ‘책임감의 마비’ 현상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게 된다.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끼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것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범죄였다. 이제까지 무고한 민간인 30만여 명의 귀한 생명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한 전례가 없다. 그런데도 원폭을 투하한 미군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은 오늘날까지 반성과 사죄는커녕 계속 목을 뻣뻣하게 하고 있다. 일말의 책임감과 양심조차 없는 단적인 사례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이처럼 30만명을 한 순간에 앗아갔다면, 100만명, 1000만명, 나아가 1억명, 10억명, 70억명은 왜 죽이지 못하겠는가?
이처럼 단 한 사람의 죽음을 묵인할 경우 결국 전 인류를 몰살시킬 수 있는 것이다. 우주에 만연한 사랑과 조화처럼 완전하고도 전면적인 사랑과 관용, 비폭력(평화)만이 정답이다.
태양(별)이 빛을 줄 때 사람에 따라 양(量)에 차별을 두는 가? 공부 잘 한 사람에게는 90%, 100%의 빛을 주고 공부 못 한 사람에겐 60%, 70%의 빛을 주는가? 도둑질 하다 걸린 사람에겐 빛의 양과 세기를 50% 이하로 줄여 주는가? 태양의 빛은 언제나 한결같이 100%다.
무한의 사랑은 100%다. 우주에 50%, 70%, 99%짜리 사랑은 없다. 따라서 누가 누구를 사랑한다면 ‘100% 사랑’인 것이지, 상황에 따라 어떤 때에는 70%만 사랑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90%만 사랑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자연의 이치에도 맞지 않는다. 여러 친구들 중 A 친구에게는 자신이 갖고 있는 사랑의 50%만 주고, B에게는 75%만 주며, C에겐 100% 다 준다는 말도 성립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한다면 ‘100% 사랑’이어야만 된다. 100% 다 아낌없이 주지 않으면서 누구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위선(僞善)이요, 거짓 사랑이다. 내가 나 자신을 100% 사랑하듯이 타인에게도 마찬가지다. 똑 같이(하나 같이) 100% 사랑해야 한다. ‘우주=무한=하나’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한우주에 가득찬 사랑의 참된 의미다. <천부경> 전문 81자 가운데 ‘하나’를 뜻 하는 ‘한 일(一)’자가 11번으로 가장 많이 나오는 까닭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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