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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눈 수련법-수행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고대 비밀 가르침(密敎)

제3의 눈 수련법-수행

柏道 2018. 6. 2. 13:29


수행

제3의 눈 수련법 - 오쇼

 

​1

미간에 집중하고 마음을 사념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에 머물게 하라. 정수리까지 호흡의 정수(精髓:prana)로 가득 차게 하라. 그리고 정수리에서 빛이 쏟아지듯 호흡의 정수가 쏟아지고 있음을 느껴라.

 

이 방편은 가장 심오한 명상 테크닉 중의 하나이다. 이를 이해하라. '미간에 집중하라······.' 생리학자들은 미간에는 인간의 몸 가운데서 가장 신비스러운 부분인 '샘(galand)'이 있다고 말한다. 송과선(pineal galand)이라고 불리는 샘은 티벳에서 '쉬바네트라(shivanetra)'라고 불린다. 그것은 시바의 눈, 제3의 눈, 탄트라의 눈을 뜻한다. 이 눈은 미간에 있다. 그러나 그 기능은 아직 의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직 그 기능을 작동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에라도 작동될 수 있지만 저절로는 절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그것을 열기 위해서는 어떤 수련이 필요하다. 이 제3의 눈은 눈먼 것이 아니라 닫혀 있을 뿐이다.

 

궁을 명상 수련법이 바로 제3의 눈을 여는 테크닉이다. 이 방편은 가장 간단한 집중법이다. 그대는 사실 몸의 어떤 부분에도 쉽사리 집중하지 못한다. 그러나 이 미간에, 제3의 눈에 집중하면 그대는 대번에 최면 상태로 들어간다. 두 눈은 제3의 눈에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이렇게 되면 몸의 다른 부분으로 주의를 옮기기가 힘들어진다. 이 제3의 눈은 자석과 같다. 그래서 이 세상의 수많은 방법들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이 방편과 연결되어 있다. 이 방편은 집중하기 가장 간단할 뿐만 아니라 송과선 그 자체가 집중을 돕고 있는 기능이 있다. 그것은 자석과 같은 작용으로 그대의 집중력을 끌어당기고 있다. 흡수하고 있는 것이다.

 

옛 탄트라 문헌에 따르면 집중은 제3의 눈에게 있어서 음식이라고 한다. 제3의 눈은 배가 고프다. 몇 생 동안을 굶주려 왔다. 그대가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굶주렸던 것이다. 그대의 집중력을 제3의 눈에 기울이게 되면 그곳은 되살아나게 된다. 그곳에 음식이 주어진다. 집중력이 제3의 눈에 있어서 음식인 것이다. 한번 그대가 거기에 집중하고 나면 그때부터 집중은 어렵지 않다 제3의 눈 그 자체에 의해서 끌어당겨지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처음에 정확한 지점을 아는 것이다.

 

먼저 두 눈을 감아라. 그리고 두 눈의 시선을 모아 두 눈썹 한가운데로 옮겨가라. 그리고 바로 그 중앙점을 느껴라. 그대의 시선이 중앙점 부근으로 이동하게 되면 두 눈은 고정될 것이다. 두 눈을 움직이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이때 비로소 그대는 정확한 지점을 포착한 것이다.

 

"두 눈썹 사이에 집중하라. 마음을 사념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에 머물게 하라." 그대의 집중력이 정확한 지점에 꽂혔을 때, 그대는 난생 처음으로 이상한 현상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그대 앞에서 사념의 구름들이 흘러가고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대는 이 사념의 구름들을 주시하는 주시자이다. 한번만 이렇게 제3의 눈에 고정되면 그대는 더 이상 사념에 휩쓸려 다니는 노예가 아니다. 그대는 사념을 지켜보는 주시자가 되는 것이다.

 

보통 그대는 주시자가 아니라 사념과 하나가 된다. 화가 날 때 그대는 화가 된다. 성(性)속에 있을 때 그대는 성이 된다. 욕망 속에 있을 때 그대는 욕망이 된다. 어떤 사념이 그대를 찾아와도 그대는 그 사념이 된다. 그대와 사념 사이에 어떤 간격도 유지할 수가 없다. 그러나 그대가 제3의 눈에 한번 집중하게 되면 그때는 사념의 주시자가 될 것이다. 제3의 눈을 통해서 그대는 사념들을 구경할 수 있다. 오가는 군중들을 구경하듯이 그대는 사념의 이동을 지켜볼 수 있는 것이다.

 

창문을 통해서 길거리의 사람을 볼 때 그대는 자신을 그 사람들과 동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과 멀리 떨어져 하나의 방관자로 남는다. 여기 분노가 있다. 이제 그대는 분노를 볼 수 있다 분노를 하나의 사물처럼 볼 수 있다. 이제 그대는 '나는 지금 화가 났다'라고 느낀다. 그대는 '화내는 자'가 아니다. 그대가 더 이상 화내는 자가 아닐 때 분노는 그 힘을 잃는다. 분노는 그대를 침범하거나 정복하지 못한다. 분노의 바람이 제 스스로 불어왔다가 불어갈 뿐, 그대는 자신의 중심에 고요히 남아 있다.

 

이 방편은 '주시자'를 발견하는 테크닉이다. 이제 그대는 사념들을 구경하라. 그 사념들과 만나라. 그대의 집중력이 제3의 눈에 고정될 때 두 가지 일이 일어난다.

 

첫째, 그대는 주시자가 된다. 그대의 몸에 통증이 일어날 때 이를 주시하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을 그대 자신이라고 여기지 말라. 동일시하지 말고 방관자. 주시자가 되라. 그대가 주시하게 되면 그대의 의식은 제3의 눈에 고정될 것이다.

 

둘째, 그 역 또한 성립된다. 그대가 제3의 눈에 의식을 고정시킴으로써 그대는 주시할 수 있다. 그대는 사념들을 지켜볼 수 있다. 그 기로 호흡의 미묘한 진동을 느낄 수 있다. 호흡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먼저 호흡의 정수(The essence of breathing)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호흡을 할 때 공기로써만 호흡하지 않는다. 의학은 말한다. '우리는 공기를 통해서 호흡을 한다' 라고 말이다. 그러나 선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공기는 단지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공기를 통해서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공기라는 매개체에 실려오는 기(氣)에 의해서 호흡한다.'

 

도대체 기라는 존재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과학은 아직까지 그것을 규명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몇 사람의 연구가들은 공기 이상의 신비스러운 어떤 것을 느꼈다. 호흡은 공기를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알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들은 매우 미묘해서 느끼기 힘들다. 이것들은 비물질적 존재다. 공기는 물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미묘한 어떤 것이, 비물질적 어떤 것이 공기를 통해서 움직이고 있다.

 

잘 집중하게 되면 그것의 느낌을 느낄 수 있다. 활기에 찬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대 속에서도 생명력이 넘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아픈 사람과 같이 있을 때에는 그대 속에서 뭔가 빠져나가고 있는 것같이 느낀다. 병원에 한번 가보라. 단순한 문병 일로 갔음에도 그대는 피로를 느낀다. 그것은 그대의 생명력이 빼앗기고 있기 때문이다. 병원의 공기는 생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병원에 가게 되면 그대의 기는 그들에게로 흘러나가 버린다.

 

그리고 많은 인파 속에 있을 때 왜 그렇게 숨이 막히는가? 역시 그대의 생기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숲 속에 가보라. 그대 속에서 생명력이, 기가 넘치고 있음을 느낄 것이다.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의 기가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다. 이 필요 공간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기는 파괴되고 말 것이다.

 

공기는 땅속으로 뚫고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기는 아무리 깊은 땅속이라도 뚫고 들어갈 수 있다. 이를 안다면 매개체(공기)가 필요없이 그대는 기와 직접 연결 될 수 있다. 그러면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이라도 땅속에서 삼매에 들어가 있을 수 있다. 제3의 눈에 집중함으로써 그대는 호흡이 아니라 호흡의 정수,즉 기를 느낄 수 있다. 이 기를 느낄 수 있다면 그대는 윤회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정수리까지 호흡의 정수로 가득 차게 하라.' 호흡의 정수를, 기를 느낄 때 정수리까지 가득 넘치고 있다고 상상하라. 어떠한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대의 집중력이 제3의 눈으로 모여들 때 이는 가능하다. 그대 머리 전체가 이 호흡의 정수로 가득 채워진다고 상상하라. 이렇게 상상하는 순간 호흡의 정수는 실제로 사하스라라 챠크라에까지 넘치게 된다. 그 다음 호흡의 정이 빛이 쏟아지듯 정수리로부터 쏟아지고 있다고 상상하라. 이렇게 호흡의 정이 쏟아지기 시작할 때, 빛의 샤워 밑에 있을 때 그대는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것이 내적인 재탄생의 의미이다.

 

제3의 눈에 집중하게 되면 그대의 상상력은 하나의 파워를 갖게 된다. 이 테크닉을 수련하기 전에 먼저 그 마음의 상태가 순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이 순수는 일반적 순수의 개념과는 다르다. 제3의 눈에 집중하기 전에 그대의 마음이 순수하지 않을 때 그대의 상상력은 위험하다. 그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 모두 위험하다. 최면에 걸린 사람을 보라. 그는 무엇이든지 명령만 들으면 즉시 행동에 옮긴다. 명령이 좋든, 나쁘든, 불합리하든 그런 것과 관계없이 그는 명령을 따를 것이다. 이 제3의 눈 명상법은 모든 최면술의 기본이다. 제3의 눈에 있어서는 상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둘이 아니다. 이 때문에 우선 먼저 순수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신성은 언제나 영원히 이 제3의 눈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기에 신성이 꿈꾸는 것은 모두 사실화되는 것이다. 그대 역시 이 제3의 눈에 집중하면 그대가 꿈꾸는 것은 모두 사실화될 것이다. 제3의 눈에 집중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꿈이 현실화되듯이 이 현실 전체가 그대로 꿈이 될 것이다. 꿈과 현실은 근본적으로 같다. "이 세상은 환영이다. 꿈이다."라고 성현들이 말했을 때 이 말은 단지 이론적인 주장이나 철학적인 이론이 아니다. 이는 구체적인 경험이다.

 

제3의 눈에 집중되어 있는 사람의 내면적 경험이다 그러므로 제3의 눈에 집중되어 있을 때 기가 아침 햇살처럼 그대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넘치고 있다고 상상하라. 이 상상만으로 기의 이 충만은 그대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집중은 한 점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것은 사색이 아니다. 그것은 생각의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한 점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으로 하여금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 사념 속에서는 마음이 미친 사람처럼 날뛴다. 그리고 사색에서는 미친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일정한 방향으로 한길로만 가는 것이다 그는 그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리고 집중 속에서는 마음이 아예 움직이도록 허락되지 않는다.

 

사념 속에서는 마음이 어디든지 갈 수 있다. 그리고 사색 속에서는 그리고 집중 속에서는 아예 마음이 움직일 수 없다. 오직 한 점에만 머물러야 한다. 모든 에너지가 그 한 점에 모인다. 마음이 일정한 곳만 가도록 되어 있다.

 

궁을 수련은 집중과 연관되어 있다. 사념이나 사색의 마음은 제3의 눈을 통해 한 점에 집중할 수 있다. 그때 명상이 일어난다. 명상은 마음이 사라지고 없는 상태이다. 그것은 무심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네 단계가 있다. 사념, 사색, 집중, 그리고 마지막으로 명상이다. 명상은 집중의 상태로 만족하지 않는다. 마음자체가 사라져야 한다.

 

따라서 명상은 마음에 의해서 이해되어질 수 없다. 집중까지는 마음이 도달할 수 있다. 마음은 집중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명상을 이해할 수는 없다.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명상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집중 속에서는 한 점에서라도 마음이 머물 수 있지만 명상에서는 그 한 점마저 사라져야 한다.

 

사념 속에서는 마음에게 모든 방향이 열려 있다. 그리고 사색 속에서는 오직 한쪽 방향으로만 열려 있다. 집중 속에서는 방향이 없다. 오직 한 점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명상 속에서는 그 한 점마저 허락되지 않는다. 마음은 존재할 수 없다. 명상은 마음의 죽음, 마음의 자살이다. 자살은 스스로만이 할 수 있다. 명상 역시 수행을 통하여 스스로 체득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 내 영혼의 성자들

​2

미간에 집중하라.

마음을 사념이 일어 나기 전의 상태에 머물게 하라.

정수리까지 호흡의 정으로 가득차게 하라.

빛이 쏟아지듯 정수리로부터

호흡의 정이 쏟아지고 있다고 상상하라.

두눈썹 사이 미간에 집중하라.

미간은 제3의 눈, 시바의 눈, 탄트라의 눈을 뜻한다.

이 제3의 눈은 두 눈썹 사이에 있다.

이제 3의 눈은 눈 먼 것이 아니라 닫혀 있을 뿐이다.

제3의 눈을 열기 위해서는 어떤 수련이 필요하다.

두 눈썹 사이에 집중하라.

두 눈을 감아라. 그리고

두 눈을 두 눈썹 사이의 그 중간에 집중하라.

물건을 보듯이 그렇게 미간에 총 집중하라.

그러나 눈을 떠서는 안된다.

반드시 두 눈을 감은 채로 이어야 한다.

이 미간에, 제3의 눈에 집중하게 되면

두 눈은 대번에 최면의 상태로 들어간다.

두 눈은 제3의 눈에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을 것이다.

이 제3의 눈은 집중의 자석이다.

그대의 집중력을 제3의 눈에 집중하게 되면

그 곳은 되살아나게 된다.

그 곳에 음식이 주어졌다.

집중력이 제3의 눈의 음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그대의 집중력이 샘 그 자체에 의해서

끌어 당겨짐을 느낄 수 있다면

이제 그 곳에의 집중은 어렵지 않다.

중요한 것은 다만 정확한 지점을 아는 일이다.

정확한 지점을 알기 위해서는 두 눈을 감아라.

두 눈의 시선을 두 눈섭의 한가운데로 옮겨가라.

그리고 바로 그 중앙점을 느껴라.

그대의 시선이 중앙점 부근으로 이동하게 되면

두 눈은 고정될 것이다.

두 눈을 움직이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이때 그대는 비로소 제3의 눈의 정확한 지점을 포착한 것이다.

두 눈썹 사이에 집중하라.

마음을 사념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에 머물게 하라.

그대 집중력이 정확히 제3의 눈에 꽂혔을 때

난생 처음으로 이상한 현상을 경함할 것이다.

난생 처음으로 그대 앞으로 사념의 구름들이

흘러 간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대는 이 사념의 구름을 지켜보는 주시자이다.

집중력이 이렇게 제3의 눈에 고정되면

그대는 사념의 주지자가 된다.

사념에 휩쓸려 가는게 아니라 이 사념들을 지켜보는

주시자가 되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 그대는 주시자가 아니다.

그대는 그대의 사념과 그대 자신을 동일시 한다.

화가 날 때는 분노가 된다.

사념들이 이동할 때는 그 사념의 주시자가 아니라

사념과 하나가 되어 같이 이동한다.

그대는 이제 사념이다.

그대는 사념의 형태를 취한다.

성 속에 있을 때 그대는 성이 된다.

분노 속에, 욕망 속에 있을 때 그대는 분노가, 욕망이 된다.

아~아~ 어떤 사념이라도 이동하게 되면 그대와 동일시 된다.

이 때문에 그대는 그대 자신과 사념 사이에

어떠한 틈도 가질 수 없다.

제3의 눈에 집중하게 되면

그 때는 사념의 주시자가 될 것이다.

제3의 눈을 통해서 그대는 사념의 주시자가 될 것이다.

이 제3의 눈을 통해서 그대는 볼 수 있다.

흘러가는 구름을 보듯, 오가는 군중들을 보듯,

사념의 이동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대의 집중력이 제3의 눈에 고정될 때,

첫째, 그대는 주시자가 된다.

아플 때 심한 두통이 그대 몸을 휩쓸 때 이를 지시하라.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그것과 그대 자신을 동일시 하지 말아라.

동일시 하지 말고 관찰자, 주시자가 되어라.

이때 주시는 가능해지며 그대의 의식은

제3의 눈에 고정 될 것이다.

둘째, 그대의 의식이 제3의 눈에 고정됨으로써

주시 그 자체가 잠 깰 것이다.

이 때 그대는 자신의 사념들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호흡의 미묘한 바이브레이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호흡의 정을 호흡의 형태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먼저 호흡의 정이

호흡(the essence of breathing)의 형태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호흡을 할 때 공기로써만 호흡하지 않는다.

우리는 공기를 통해서 호흡을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탄트라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공기는 단지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공기를 통해서 호흡하는 것이 아니라

공기라는 매개체에 실려오는

프라나에 의해서 호흡한다.

제3의 눈에 집중함으로써 그대는 호흡이 아니라,

호흡의 정을 프라나를 느낄 수 있다.

이 프라나를 느낄 수 있다면

그대는 삼사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정수리까지 호흡의 정으로 가득차게 하라.

호흡의 정을, 프라나를 느낄 때

정수리까지 가득 넘치고 있다고 상상하라.

어떠한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대의 집중력이

제3의 눈으로 모여들때 이는 가능하다.

그대의 집중력이 제3의 눈에 있을 때

상상하는 것만으로 어떠한 현상이라도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대 머리 전체가 이 호흡의 정으로

가득 채워 진다고 상상하라.

사하스라르 챠크라까지 넘친다고 상상하라.

이렇게 상상하는 순간 호흡의 정은 실제로

사하르라르 챠크라에까지 넘치게 된다.

그 다음 호흡의 정이 빛이 쏟아지듯 정수리로부터

쏟아지고 있다고 상상하라.

이렇게 호흡의 정이 쏟아지기 시작할 때

빛이 이 샤워 밑에 있을 때 그대는 다시 태어나게 된다.

이것이 내적인 재 탄생의 의미이다.

제3의 눈에 집중하게 되면 그 대의 눈에 집중하게 되면

그대의 상상력은 하나의 세력의 파워를 갖게 된다.

이 테크닉 수련하기 전에 먼저 그 마음의 상태가 순수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대 자신에게나 타인에게나 모두 위험하다.

누구를 해하고자 한다면 상상만으로 그를 죽일 수 있다.

이 때문에 우선 먼저 순수해져야 한다.

제3의 눈에 잊어서는 상상의 세계(imagination)와

현실의 세계(actualization)가 둘이 아니다.

상상은 현실이다. 구체적인 사실이다.

그러므로 꿈과 현실 사이에는 아무런 간격이 없다.

꿈은 현실이 된다.

이 때문에 상카라는 말했던 것이다.

이 세상은 꿈에 지나지 않는다.

신성의 꿈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 신성은 언제나 영원히 이 제3의 눈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기에 신성이 꿈꾸는 것은 모두 사실화 되는 것이다.

그대 역시 이 제3의 눈에 집중하게 되면

그대가 꿈꾸는 것은 모두 사실화 될 것이다.

제3의 눈에 집중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꿈이 현실화 되듯이

이 현실 전체가 그대로 꿈이 될 것이다.

꿈과 현실은 근본적으로 같다.

이 세상은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상카가가 말했을 때 이 말은

단지 이론적인 주장이나 철학적인 이론이 아니다.

이는 구체적인 경험이다.

제3의 눈에 집중되어 있는 사람의 내적 경험이다.

그러므로 제3의 눈에 집중되어 있을 때

프라나가 아침 햇살처럼 그대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넘치고 있다고 상상하라.

이 상상만으로 프라나의 충만은

그대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3

 

사랑하는 오쇼,

두 눈과 제 3의 눈의 관계에 대해 설명해 주십시오. 시각(視覺)과 관계된 명상법들은 어떤 방식으로 제 3의 눈에 영향을 주게 됩니까?

 

우선, 두 가지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첫째는, 제 3의 눈의 에너지는 실제로 두 눈에서 흐르는 에너지와 같다는 것이다. 똑같은 에너지이다. 그 에너지가 새로운 중심에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제 3의 눈은 이미 거기에 있었지만, 작동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보통의 눈이 보고 있는 한 제 3의 눈은 볼 수 없다.

 

똑같은 에너지가 제 3의 눈 안으로 흘러들어야 한다. 에너지가 두 눈으로 흐르지 않을 때 그 에너지는 제 3의 눈으로 흐를 수 있고, 제 3의 눈으로 흐를 때 두 눈은 보지 않게 된다. 두 눈은 그대로 있지만 그대는 두 눈을 통해서 볼 수 없을 것이다. 두 눈을 보게 하는 에너지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새로운 중심으로 이동할 것이다. 이 중심은 두 눈 사이에 있다. 이 중심은 완전한 상태로 거기에 있다. 언제라도 작동할 수 있다. 하지만 작동하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다. 같은 에너지가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두 번째로, 두 눈을 통해서 볼 대 그대는 육체를 통해서 보고 있는 것이다. 제 3의 눈은 실제로는 육체의 일부가 아니라, 육체, 즉 숙시마 샤리르(sukshma sharir)라는 감추어져 있던 두 번째 신체의 일부이다. 제 3의 눈은 육체 내에 그 대응점이 있지만 육체에 속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생리학에서는 제 3의 눈이나 이와 유사한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두 개골을 분석하고, 꿰뚫어보고, 엑스레이로 찍어 보아도 제 3의 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지점이나 구체적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제 3의 눈은 유체, 숙시마 샤리르의 일부이다. [...]

 

어떻게 제 3의 눈이 이 시각 명상법과 연관이 되는가> 거기에는 깊은 연관이 있다. 실제로 이 명상법은 제 3의 눈을 열기 위한 것이다. 그대의 두 눈이 완전히 멈춘다면, 돌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있다면, 이 두 눈에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기 때문에 에너지는 두 눈으로 흐르지 않고 멈춘다.

 

그대가 두 눈을 멈춘다면 에너지는 더 이상 두 눈을 통해 흐르지 않는다. 하지만 에너지는 계속 흘러야 한다. 때문에 에너지는 움직인다. 진동과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이 에너지 때문이다. 에너지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대의 눈은 죽은 사람의 눈과 같을 것이다. 돌처럼 굳어지고, 죽어 있을 것이다.

 

한 점을 응시하면서 시선을 전혀 다른 곳으로 돌리지 않으면 정지(停止)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돌연 두 눈을 통해서 움직이던 에너지가 두 눈을 통해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에너지는 움직여야만 한다. 에너지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두 눈은 가만히 있을 수 있지만 에너지는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이 두 눈이 에너지에 대해 닫혀 버릴 때, 갑자기 문이 닫혀 에너지가 두 눈을 통해서 움직이지 못하게 되어, 에너지는 새로운 길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그 때 제 3의 눈이 바로 가까이에 있다. 바로 양 눈썹 사이 0.5인치 깊이에 있다. 제 3의 눈은 두 눈 바로 가까이에, 가장 가까운 지점에 있다.

 

그대 두 눈의 에너지가 풀려날 때, 첫번째로 일어날 수 있는 일은 그 에너지가 제 3의 눈으로 움직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물이 흐를 때 구멍을 하나 막으면 물이 가장 저항아 없고, 가장 가까운 다른 구멍을 찾아 흐르는 것과 같다. 알아서 저절로 찾아낼 것이다. 그대는 특별히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이 육체의 두 눈에 대해서도 그대는 그저 에너지가 그 속으로 움지이지 않도록 막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에너지가 자기 갈 길을 찾을 것이고, 제 3의 눈을 항해 움직일 것이다.

 

이 제 3의 눈을 향한 에너지의 움직임이 그대를 전혀 다른 세상 속으로 변형시킨다. 그대는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기 시작하고, 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낄 것이며, 전에는 맡아보지 못했던 냄새들을 맡게 될 것이다. 새로운 세계, '유체의 세계(subtle world)'가 펼쳐지기 시작한다. 그 세계는 이미 거기 있었다. 그것을 보는 눈도 이미 거기 있었고 유체의 세계도 이미 거기에 있었다. 둘 다 거기에 있었지만 드러나지 않을 뿐이다.

 

일단 그대가 이러한 차원에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많은 사실들이 그대에게 분명해질 것이다. 예를 들어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이 있을 때, 그대의 제 3의 눈이 작동하고 있다면, 그대는 그 사람이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즉시 알 수 있을 것이다... 아이가 갓 태어났을 때, 제 3의 눈을 사용하는 수련을 매우 깊이 한 사람들은 아이가 태어난 바로 그 순간 그 아이가 언제 죽을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죽음의 그림자는 아주 희미하다. 6개월 뒤에 죽을 사람이 있으면, 제 3의 눈이 어느 정도 작동하는 사람이라면 죽음이 찾아오기 6개월 전에 그 죽음을 볼 수 있다. 죽음의 그림자는 짙어진다. 실제로 그대 죽음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으며 그대는 이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두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제 3의 눈을 이용해서 그대는 오라(aura)를 보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이 그대에게 다가올 때, 그 사람은 그대를 속일 수 없다. 그가 뭐라고 말하든 그것이 그의 오라와 일치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은 결코 화내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도 모른다. 하지만 붉은 오라가 그가 분노로 가득 차 있음을 보여 줄 것이다. 그 자신은 오라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오라의 상태만큼은 속일 수 없을 것이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지 오라를 통해서 진짜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다. 제 3의 눈을 통해서 그대는 빛, 오라를 보기 시작한다. ...[계속]

 

4

제3의 눈 수련법

제3의 눈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 단계

가) 눈의 이해

 

①눈동자는 물질적이면서 동시에 비물질적이고, 그대와 그대의 육체가 만나는 곳입니다.

②눈동자는 그대의 비밀을 푸는 열쇠이고, 그대 자신의 내면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 입니다.

③눈동자는 유동적이며 계속 움직입니다.

꿈을 꾸지 않거나 사념이 없을 때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눈동자의 움직임은 사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눈동자를 멈추면 사념이 멈추고 사념을 멈추면 눈동자도 정지합니다.

눈동자는 계속 대상을 바꿔가며 흘러갑니다.

외주의 대상을 향한 움직임을 멈추면 눈동자는 내면으로 방향을 전환 합니다.

③-1. 눈을 감아라

눈을 감은 후 그대 내부의 세밀한 부분들을 자세히 살 펴보십시오.

그리하면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알게 될 것입니다.

눈동자가 움직이지 않도록 눈을 완전히 감고, 눈동자가 돌처럼 굳어지게 하십시오.

* 사선정(四禪定) :

1)눈을 감는다.

2)눈동자를 고정시킨다.

3)몸 속을 들여다 본다.

4)마음을 들여다 본다.

육체의 세밀한 부분은 마음이며, 마음의 거친 부분은 육체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마음도 육체도 아닙니다.

③-2. 전체를 보라

대상을 나누지 말고 전체적으로 보십시오.

부분적으 로 나누어 볼 때, 눈동자가 한 부분에서 다른 부분으로 움직이고 그에 따라 사념이 일어납니다.

모든 사물의 재질에 주목하지 말고 그 형태에 주목하십시오.

재질은 물질적인 부분이고 형태는 정신적인 부분 입니다.

대상이 어떤 성질을 갖고 있든지 그것에 대해 어떤 사념도 떠올리지 말고,

아무 생각도 일으키지 말며 그냥 지켜보기만 하십시오.

그러면 자신이 모든 물질의 중심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③-3. 사람이나 사물을 볼 때 처음 보는 것처럼 하라

모든 것을 처음 보는 것처럼 대할 때, 거기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새롭게 주목해서 보십시오.

마치 한번도 보지 못한 것 처럼 혹은 이 세상에 없었던 것처럼 혹은 상상도 못해본 것처럼

혹은 장님이 처음 눈을 떴을 때 처럼 보십시오.

그리하면 그대의 눈동자는 생기가 넘치며 살아나게 될 것 입니다.

그대는 그 눈으로 자신의 내면까지 보고 과거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현재 속에 머무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대는 이런 수련으로써 눈을 순수하고 생기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대는 그 순수한 눈으로 자신의 내면 세계를 볼 수 있습니다.

나) 보통 눈과 제3의 눈과의 관계

①제3의 눈을 움직이는 에너지도 보통 눈을 움직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같은 에너지입니다.

에너지가 보통 눈으로 흐르지 않을 때 제3의 눈 속으로 들어갑니다.

같은 에너지가 변형되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②제3의 눈은 신체에 속하는 부분이 아니라 유체(幽體)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신체가 죽을 때 사라지지 않고 또 다른 탄생을 얻습니다.

유체의 눈 곧 제3의 눈이 움직일 때 그대는 영혼을 볼 수 있습니다.

유체의 세계는 유체의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각 명상법은 제3의 눈을 열기 위한 방편입니다.

어떤 대상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나서 천천히 그 대상으로부터 그대의 시력을 제3의 눈으로 옮기십 시오.

그런 다음 그 대상은 지워버리십시오.

이어 그대의 사념 또한 지워 버리십시오.

그러면 그대 만이 홀로 남을 것입니다.

이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자신을 깨닫게 됩니다.

드디어 그대는 자신의 중심으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미간에 마음을 집중하고 정수리까지 호흡의 정수(精髓:prana)로 가득차게 하십시오.

그리고 정수리에서 빛이 쏟아지듯 호흡의 정수가 쏟아 지고 있다고 상상하십시오.

이 방편은 가장 심오 한 명상 테크닉 중의 하나이니, 이것을 체험하고 이해 하도록 하십시오.

‘미간에 집중.....’

생리학자들은 미간에는 인간의 몸 가운데서 가장 신비스러운 부분의 하나인

‘샘(galand)'이 있다고 말합니다.

‘송과선(pineal galand)'이라고 불리는 샘은 티벳에서 ‘쉬바네트라(shivanetra)'라고 불립니다.

그것은 시바의 눈이고 제3의 눈이며 탄트라의 눈입니다.

이 눈은 미간에 있습니다.

그것을 열기 위해서는 어떤 수련이 필요합니다.

이 제3의 눈은 눈먼 것이 아니라 닫혀 있기 때문에 수련을 통해 그것을 열어야 합니다.

이 수련법이 바로 제3의 눈을 여는 기술입니다.

이 방편은 가장 간단한 집중법입니다.

그대는 사실 몸의 어떤 부분에도 쉽사리 집중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미 간에, 제3의 눈에 집중하면 두 눈은 제3의 눈에 고정 되어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일단 이렇게 되면 몸의 다른 부분으로 주의를 옮기기가 힘들어집니다.

제3의 눈은 자석과 같습니다.

세상의 수많은 수련 방법들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이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3의 눈을 통한 집중은 송과선이 집중을 돕고 있기 때문에 아주 쉽게 행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처음에 정확한 지점을 아는 것입니다.

먼저 두 눈을 감으십시오.

그리고 두 눈의 시선을 모아 두 눈썹 한가운데로 옮기십시오.

그대의 시선이 중앙 부근으로 이동하게 되면 두 눈은 고정되어 움직이기조차 어려워질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그대는 정확한 지점을 포착한 것입니다.

그대의 집중력이 정확한 지점에 꽂혔을 때, 그대는 난생 처음으로 이상한 현상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대 앞에서 사념의 구름들이 흘러가고 있음을 느끼게 되며,

그대는 이 사념의 구름들을 바라보는 주시자가 될 것입니다.

보통은 그대가 주시자가 아니라 사념과 하나가 됩니다.

화가 날 때 그대는 분노와 하나가 되며, 성적인 욕망을 품고 있을 때 그대는 성과 하나가 됩니다.

어떤 사념이 오면 그대는 그것과 하나가 되며, 그대는 사념과 조금도 간격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대가 제3의 눈에 한번 집중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사념의 주시자가 됩니다.

제3의 눈을 통해서 그대는 사념들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창문을 통해서 길거리의 사람을 볼 때, 그대는 그대 자신을 그 사람들과 동일시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의 방관자로서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무엇에 분노를 느낄 때, 이제 그대는 분노를 마치 하나의 사물처럼 바라볼 수 있으며,

이제 그대는 “내가 지금 화가 났구나!”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대는 이제 더 이상 ‘화내는 자’가 아니게 되며,

그럴 때 그대의 분노는 그 힘을 잃게 되어 분노가 그대를 침범하거나 정복하지 못하게 됩니다.

분노의 바람이 제 스스로 불어왔다가 지나갈 뿐 그대는 자신의 중심에 고요히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대가 육체와 마음을 그대 자신과 동일시하지 않고 주시자가 되는 것입니다.

서양 의학에서 우리는 단지 공기를 호흡한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선도에서는 단지 공기를 매개체로 삼아 ‘기(氣)’를 받아 들인다’고 합니다.

도대체 ‘기(氣)’라는 존재가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 과학은 아직까지 규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氣)’라는 것은 잘 집중하게 되면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활기에 찬 사람과 함께 있을 때 그대는 자신도 생명력이 넘치고 있음을 느낄 것이며,

아픈 사람과 같이 있을 때 그대 자신도 동일하게 불편함을 느낄 것입니다.

이른 아침 숲 속에 가 보십시오.

그대 속에 생명력 곧 ‘기(氣)’가 넘치고 있음을 느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신의 ‘기(氣)’를 순환시켜야 합니다.

순환시키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기(生氣)’는 파괴될 것입니다.

공기(空氣)는 땅속을 뚫고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氣)’는 아무리 깊은 땅속이라도 뚫고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를 안다면 공기(空氣)라는 매개체 없이도 그대는 ‘기(氣)’를 직접 순환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면 수십 년 아니 수백 년이라도 땅속에 있으면서 삼매에 들어갈 수도 있겠지요.

제3의 눈에 집중함으로써 그대는 호흡이 아니라 호흡의 정수 즉 ‘기(氣)’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정수리까지 호흡의 정수로 가득 차게 하십시오.

호흡의 정수 즉 ‘기(氣)’를 느낄 때 그것이 정수리까지 가득 차서 넘치고 있다고 상상하십시오.

이렇게 상상하는 순간 호흡의 정수는 실제 사하스라라 챠크라에까지 넘치게 됩니다.

그 다음 빛이 쏟아지듯 호흡의 정수가 정수리로부터 쏟아지고 있다고 상상하십시오.

이렇게 호흡이 정이 쏟아지기 시작할 때 곧 빛의 샤워 밑에 있을 때,

그대는 다시 영적으로 태어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됩니다.

제3의 눈에 집중하게 되면 그대의 상상력은 하나의 파워를 갖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테크닉을 수련하기 전에 먼저 그 마음의 상태가 순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제3의 눈에 집중하기 전 그대의 마음이 순수하지 않을 때 그대의 상상력은 위험합니다.

최면에 걸린 사람을 보십시오. 그는 무엇이든지 명령만 들으면 즉시 행동으로 옮깁니다.

명령이 좋든 나쁘든, 합리적이든 불합리적이든 그런 것과 관계없이 그는 명령에 따릅니다.

이 제3의 눈을 통한 명상법은 모든 최면술의 기본입니다.

제3의 눈을 통해 집중 상태에 들어갔을 때 상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가 둘로 분리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우리 자신이 순수해져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신성은 언제나 영원히 제3의 눈에 집중되어 있고,

그러기에 신성이 꿈꾸는 것은 모두 사실화되는 것입니다.

그대 역시 제3의 눈에 집중하면 그대가 꿈꾸는 것은 모두 사실로 드러날 것입니다.

제3의 눈에 집중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꿈이 현실화되듯이

또한 이 현실 전체가 그대로 꿈이 될 것입니다.

꿈과 현실은 근본적으로 같은 것입니다.

“이 세상은 환영이고 꿈이다”라고 성현들이 말했을 때 이 말은 단지 철학적인 설명이 아니라,

이는 구체적인 경험으로 제3의 눈에 집중되어 있는 사람의 내면적 경험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제3의 눈에 집중되었을 때,

정기가 아침 햇살처럼 그대 머리 위에서부터 발끝까지 넘치고 있다고 상상하십시오.

그러면 상상을 통한 기의 충만, 그것만으로도 그대는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입니다.

해인 수련은 집중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념이나 사색의 마음은 제3의 눈을 통해 한 점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그때 명상이 일어납니다.

명상은 마음이 사라지고 없는 상태에서 가능한 것으로 무심의 경지입니다.

이런 무심의 단계는 세 단계를 거친 후에 도달합니다.

곧 사념, 사색, 집중을 거친 후에 마지막으로 명상의 단계에 도달합니다.

사념 속에서는 마음이 미친 개처럼 어떤 방향으로든 갈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사색 속에서는 오직 한쪽 방향으로만 갈 수 있고,

집중 속에서는 어느 한 방향도 사라지고 오직 한 점만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명상 속에서는 그 한 점마저도 사라집니다.

명상 속에서 마음은 존재할 수 없으며, 명상은 마음의 죽음입니다.

마음의 죽음은 스스로 경험해본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명상은 수행을 통하여 스스로 체득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5

 

밤의 명상

밤에 명상을 할 수록 당신은 마치 하나의 씨앗이 싹터서 꽃을 피우듯 무엇인가 안에서 열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고 놀랄 것이다. 두 눈을 꼭 감고 빛을 그려 보아라, 빛을 볼 때마다 그것과 조화를 이루어라, 빛에 맞추어 느끼기를 계속하면 축복은 커질 것이다.

트라탁

몇달동안 계속해서 불꽃을 바라본다면, 당신은 세번째 눈이 완전하게 작용하기 시작한다. 그때 당신은 더욱 예민해지고 더욱 빛으로 가득 차게 된다. 트라탁이란 눈물을 의미하는 말에서 나왔다. 그래서 당신은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릴 때까지 불꽃을 쳐다보아야 한다. 깜빡거림 없이 똑바로 응시를 계속하라. 그러면 세번째 눈이 열리기 시작할 것이다. 당신은 30분에서 40분 동안 눈을 깜박거리지 않고 끊임없이 응시해야 한다.

 

흰점

깨달음은 밖의 사념의 세계에서 안의 실존의 세계로 눈을 돌려 그곳에서 영원히 안주하는 것이다. 깨달음은 지금 여기이다. 과거와 미래는 사념의 세계이고, 지금 여기는 무사념의 세계이다. 깨달음은 흰 점이다. 멀리 보면 백은색 오각형의 별이며, 가까이서 보면 양미간의 순백의 점이다. 만상은 종종 탈락되고 오직 흰 점만이 남는다. 흰 점은 공, 무이다.

지켜보는 자

지켜보는 자는 나를 지켜보고, 나의 생각을 지켜보며, 주위 환경을 지켜본다. 밤에는 밤 꿈을 지켜보고 낮에는 낮 꿈을 지켜본다. 대상은 어떠한 대상이든 모두가 꿈이며 환상이다. 지켜보는 자 만이 실존이다. 지켜보는 대상은 수없이 많으나 허공에서 삼바비 무드라를 지켜봄은 정선된 지켜봄이다. 이것이 우주의 중심에 서는 최고 최선의 방법이다. 이 지켜봄은 대상이 없고 지켜보는 자도 없다면, 공,무의 세계에 서는 것이다. 궁극이다.

단지 지켜보다

꿈을 보는 순수 의식처럼 대상들을 거울처럼 단지 지켜보고 있다. 기쁨도, 고뇌도, 두려움도 미움도 단지 지켜보고 있다. 모든 형상, 사념도 단지 지켜보고 있다.

모든 대상은 허상이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것은 꿈이다. 모든 꿈은 사념으로 만들어 졌다. 단지 지켜보는 자, 영원한 실존을 체험하라.

 

회광반조

제3의 눈을 여는 일체의 비법은 두 눈을 통해서 에너지가 흘러나가기 때문에, 에너지의 부족으로 몇 생을 통해서 제3의 눈은 열리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에너지가 제3의 눈을 여는 데 필요한 만큼 공급을 못한다. 성관계, 영화, 텔레비젼, 지나친 독서, 분노, 번뇌, 기타 육체의 혹사, 정신적 과도, 이 모든 것이 제3의 눈의 개안을 가로막고 있다. 제3의 눈을 열고자 하면 육체의 눈은 휴식시키고 제3의 눈에 에너지를 모아야 한다.

인내

양 눈의 중앙부에 있는 아주나를 열고자 하면,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주의 중심부에 도달하지 못한다. 이것은 18세때 제5중추를 확립했을 때의 나의 체득이다. 라이리 마하사야도 삼바비 무드라의 확립을 위해서는 영원히 밀고 나가는 자세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6

트라탁

트라탁을 하는 동안 그대는 30-40분 동안 눈을 깜박거리지 않은 채 계속해서 한곳을 응시해야 한다. 그대의 모든 의식이 눈으로 와야 한다. 그대는 눈이 되어야 한다. 모든 것을 잊어버려라. 몸의 나머지 부분을 잊어버려라. 눈이 되어라. 눈을 깜박거리지 말고 계속해서 응시하라. 그대의 모든 의식이 눈으로 모이게 되면 그대는 긴장의 절정에 이르게 될 것이다.

​눈은 신체 중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이다. 때문에 가장 긴장을 많이 하게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눈이 긴장하면 마음도 긴장하게 된다. 눈은 마음으로 통하는 문이다. 그대가 눈이 되고, 눈이 긴장의 정점에 다다르면 마음 또한 긴장의 정점에 다다르게 된다. 그대가 그 정점에서 떨어져 내릴때, 그대는 아무 노력 없는 휴식의 심연 속으로 떨어진다.

​트라탁은 의식 속에 최고조의 긴장을 만들어 낸다. 그 최고조의 지점에서 정 반대의 현상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휴식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트라탁을 하는 동안 생각은 저절로 멈출 것이다.

​서서히 그대의 의식은 눈으로 모이게 될 것이다. 그대는 깨어있게 될 것이다. 더 이상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눈은 생각할 수 없다. 모든 의식이 눈에 모이면 마음에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남지 않게 된다. 마음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오직 눈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생각은 존재하지 않는다.

눈이 깜박거리려 할 때를 조심하라. 마음이 생각 쪽으로 에너지를 모으려 하는 것이다. 그대의 의식을 눈으로부터 마음으로 되돌리려 하는 것이다. 따라서 끊임없이 한곳을 응시해야 하는 것이다. 눈을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대는 마음에 에너지를 주게 된다.

그대의 시선은 절대적으로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그대가 눈을 움직이지 않고 한곳만을 응시할 때, 마음 또한 움직이지 않는다. 마음은 눈과 함께 움직인다. 눈은 내면의 마음과 외부세계를 이어주는 문이다. 눈이 완전히 고정되면 마음은 멈춘다.

 

이 기법은 눈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왜냐하면 마음에서 시작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마음을 통제하는 것은 어렵지만, 눈은 통제 할 수 있다. 눈은 외부의 기관이기 때문이다. 깜박거리지 말고 그대의 두 눈을 한 곳에 고정시켜라. 눈이 정지하면, 마음 또한 정지한다.

7

 

당신의 제3의 눈은 자각에 배고파하고 있습니다...

탄트라와 하타 요가의 믿음 체계에는 쿤달리니라고 하는 개념이 있습니다.

[탄트라나 하타 요가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없다면 아주 간단하게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탄트라는 일종의 비전의 방법입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기괴하고 이상하게 보이는 꽤 많은 것들을 포함합니다. 별도로 탄트라에 대해서 글을 쓸 것입니다.

하타 요가는 요가의 한 줄기이며 다양한 신체적 훈련과 호흡에 매진하는 것입니다. 하타 요가의 많은 것들과 탄트라는 공통적입니다. 여기서는 탄트라, 하타 요가 또는 프라나얌의 상세한 것까지는 들어가지 않고 제3의 눈 명상법을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탄트라, 하타, 프라나얌은 다른 장에서 곧 다루겠습니다.]

우리의 몸에는 일곱 개의 차크라가 있다는 것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차크라들은 (차크라는 원을 의미합니다.) 우리 몸에 각기 다른 부위에 위치합니다. 이 차크라 중에서 6 차크라가 ‘아즈나 차크라’로 알려져 있는데 이마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신비한 제2의 눈의 자리라고 말해집니다.

이 차크라의 신체적 위치는 이마의 중앙입니다. 우리 눈 사이 바로 위입니다. 쿤달리니 (에너지 장)는 1 차크라 (물라다라 차크라, 척추 기저부)로부터 여행을 시작하여 2, 3, 4,... 등을 거쳐 7 차크라까지 올라간다고 합니다. 7 차크라에서 최상의 의식과 만나게 됩니다. 아즈나 차크라는 6 차크라입니다.

제3의 눈 명상은 이 6번째 의식의 센터 주변을 맴돕니다. 이 아즈나 차크라는 우리의 제3의 눈이 있는 센터로 여겨집니다. 우리 몸에는 물리적인 세 번째 눈이 없지만 미묘하고 영적인 차원에서는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의식의 자극적인 센터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으로 경험되고 있습니다. 트라타카는 아즈나 차크라의 명상 기법입니다. 우리가 제3의 눈에 의식을 집중하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즉각적으로 명상 상태에 도달하게 됩니다.

이제 이 명상 기법의 과학적인 설명이나 영적인 의미에 대한 설명 없이 이 단순한 명상 기법의 정확한 방법을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방법 :

[이 명상을 여행하는 도중 기차나 버스 안에서는 하지 마세요. 몸이 움직이게 되면 이것을 적절하게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가부좌로 앉습니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의자나 침대에 편안히 앉습니다.]

척추를 똑바로 유지합니다.

눈을 감습니다.

세 번 깊게 들이쉬고 내쉽니다.

이제 이마 중앙에 집중합니다. 눈 사이 가운데에서 몇 센티 위에 위치합니다.

눈을 감고 두 눈을 이 제3의 눈 지점으로 모읍니다. 눈을 감고 위로 쳐다보라는 뜻입니다. 감은 눈을 20~25도 위쪽으로 집중합니다. 이제 약 2초 간격으로 마음속으로 100부터 1까지 거꾸로 숫자를 세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는 동안 눈은 제3의 눈에 집중한 상태입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는 것을 풀어주겠습니다.]

문 : 제3의 눈의 정확한 위치를 아는 것은 너무 모호하게 보인다. 두 눈을 이마 중앙에 집중하려고 하면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 혼란스러워진다. 정확하게 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답 : 아주 간단합니다. 약 20~25도 위를 바라보며 눈을 이마 중앙으로 모으면 두 눈의 특정한 부위가 고요해질 것입니다. 완벽하게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힘이 서서히 당신의 눈을 자기에게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석과 같을 것입니다. 이 상태를 경험할 때, 거기가 올바른 지점입니다.

무엇을 느끼게 될 것인지 알겠습니까? 눈에 쾌적한 긴장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의 쾌적한 긴장입니다.

어떤 긴장이 있게 될 것이지만 그것을 즐기게 될 것입니다. 3, 2, 1에 도달하게 될 때면 제3의 눈 안과 주변에 이상한 감각이 느껴질 것입니다. 그것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느낌일 것입니다. 계속 제3의 눈에 집중하세요.

일단 눈이 고요해지는 상태에 도달하게 되면 당신의 생각을 볼 수 있는 것처럼 느끼게 될 것입니다. 마치 스크린처럼 당신의 생각이 당신 앞에 나타나는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몸의 내적인 생각과정을 어떤 것을 통해서 보게 되는지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제3의 눈을 통해서 그 모든 것들을 관찰합니다.

당신의 생각은 멈출 것입니다. 그것들이 나타나면 마치 꿈처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당신 안에 있는 진정한 주시자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당신 안에 있는 주시자를 쉽게 인지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몸과 마음과는 다른 어떤 것, 하지만 당신의 일부인 것 말입니다.

이런 상태에 10~15분 정도 머무르세요.

이제 서서히 정상 상태로 돌아오세요. 눈에서 긴장을 풀고 서서히 제3의 눈에서 정상 위치로 돌아오세요. 긴장을 풀어 자유롭게 만드세요. 의식을 제3의 눈에서 옮겨오세요.

몇 분 동안 조용히 있으세요. 눈이 정상적인 움직임을 하게 하세요. 세 번 정도 깊이 숨을 쉽니다. 서서히 눈을 뜨세요. 명상이 끝났습니다.

제3의 눈 명상은 집중력을 개발하는 아주 강력한 방법입니다. 이것은 또한 눈에 매우 도움을 주는 훈련입니다. 눈이 건강해질 것입니다. 하루 중에 얼마나 많은 긴장을 했든 상관없이 이 명상을 매일 아침과 저녁에 하게 되면 눈이 맑아질 것입니다.

아즈나 차크라에 대한 명상 또한 직관력을 기르는 데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이 명상을 규칙적으로 하면 직관을 개발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직관과 투시력이라는 개념은 여기에서 의도하는 바를 넘어선 것이라고 명백히 밝힙니다. 여기서 우리는 단지 명상을 배우는 데에 한정시킬 것입니다. 어떤 형이상학적이거나 초자연적인 능력을 얻기 위해 명상을 배우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명심하세요.

순수하게 명상의 즐거움을 위해 명상을 배우세요. 그것이 주는 즐거움을 위해 명상을 배우세요. 거기에서 뭔가를 기대한다면 옆길로 샐 것입니다. 어떤 것도 기대하지 마세요. 그러면 많은 보상을 얻을 것입니다.

경고의 말 :

이 제3의 눈 명상에 대해서 당신에게 충분한 정도로 조심스럽게 설명을 하였지만 아직도 저는 이 명상의 예민함에 대해서, 그리고 약간의 경계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알아야 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아즈나 차크라에 대해 명상하는 것은 미묘체의 일부에 대해 명상하는 것입니다. 제3의 눈에 대해 명상할 때 이마 중앙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제3의 눈이 쿤달리니 에너지를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열이 해로운 것은 아니지만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3의 눈 부위에 가려움을 동반한 뜨거움의 느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즉시 중단하세요. 아마추어로서 이 쿤달리니의 복잡함과 그 다양한 경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명상을 단지 고요하고 사념이 없는 상태에 도달하는 데에 한정시키는 것이 좋습니다.

제3의 눈 부위에 너무 많은 열감이 느껴지기 시작하면 이 명상에 너무 깊이 몰입하지 마세요. 만일 우리가 그 안에 담겨진 더 큰 의미를 다룰 능력이 없다면 오직 적절한 선에서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저 행복하고 명상적이 되세요. 제3의 눈 명상을 쿤달리니 각성이라는 생각을 버리고 하세요. 그저 들은 것만을 하세요. 그러면 명상 속에 있게 될 것입니다. 쿤달리니 각성은 이 일에 전적으로 매달리는 요기들의 개념입니다. 우리는 21세기의 평범한 사람으로서 쿤달리니 각성에 요구되는 시간도 없고 인내심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해서 더 알고 싶고 더 실험해보고 싶다면, 개인적으로 지도해줄 수 있는 요기의 조언을 들으세요. 명상에 관련해서는 제가 이야기한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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