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오강남교수의 도마복음 (33절) 지붕 위에서 외치라 본문
33. 지붕 위에서 외치라
깨친 이의 사명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귀로, 또한 다른 귀로 듣게 된 것을 지붕 위에서 외치십시오. 누구도 등불을 켜서 바구니 아래나 숨겨진 구석에 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등경 위에 두어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그 빛을 보게 할 것입니다.”
Jesus said, "Preach from your housetops that which you will hear in your ear. For no one lights a lamp and puts it under a bushel, nor does he put it in a hidden place, but rather he sets it on a lampstand so that everyone who enters and leaves will see its light."
33a. Jesus said: What you hear in your ears preach from your housetops.
33b. For nobody lights a lamp and puts it underneath a bushel basket or in a hidden place. Rather, it is placed on a lampstand so that all who go in and out may see the light.
Jesus says:
(1)"What you will hear with your ear {with the other ear} proclaim from your rooftops.
(2) For no one lights a lamp (and) puts it under a bushel, nor does he put it in a hidden place.
(3) Rather, he puts it on a lampstand, so that everyone who comes in and goes out will see its light."
“여러분의 귀로, 또한 다른 귀로”하는 말은 필사 과정에서의 실수일 수도 있고, “다른 귀”는 우리 속에 있는 ‘내면의 귀’, 보통 사람의 귀로는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을 수 있는 ‘특별한 귀’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한문에 ‘성인聖人’이라고 할 때 쓰는 ‘거룩할 성聖’이라는 글자에 ‘귀 이耳’가 들어가 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이런 귀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외치라고 했다. 그것은 복음, 곧 ‘좋은 소식’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조건에 얽매여 고통을 당하던 내가 깨침을 통해 나의 참나[眞我]를 발견하고, 변하여 새 사람이 됨으로써 해방과 자유를 누리며 살 수 있다고 하는 소식처럼 복된 소식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소식을 자기 혼자만 간직하고 살 수는 없다. 다른 사람들과 나누어야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의 길에서 실천해야 할 여섯 가지 ‘바라밀’을 이야기하는데, 맨 처음 실천 사항이 바로 사람들과의 ‘나눔’이다. 전통적인 불교 용어로 ‘보시布施, dana'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보시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첫째, 재시財施로 물질을 나누는 것, 둘째, 무외시無畏施로 다른 사람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 셋째, 법시法施로 진리를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이 셋 중에서 진리를 나누는 것을 가장 훌륭한 나눔이라 본다. 그리스도교 용어로 하면 진리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는 것이다. 물론 복음을 전파한다는 것과, 내 교회나 내 교파의 교인 수를 늘리는 데만 신경을 쓰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이다.
독일 출신 종교학의 대가로 시카고 대학에서 가르친 요하임 바흐Joachim Wach는 진정한 종교적 체험이 갖는 네 가지 특성[1. 궁극 실재로 여겨지는 것에 대한 반응 2. 인간의 전 존재로 반응하는 전폭적인 반응 3. 강도에 있어서 가장 강한 체험 4. 행동을 수반] 중 한 가지가 그 체험이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기막힌 종교적 체험을 했으면,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한 이사야와 같은 심정으로 그 체험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진리를 나누거나 전한다고 하여, 스스로 완전히 깨치지도 못한 사람이 부산하게 쏘다니며 요란을 떠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선 등불을 켜는 일이 중요하다. 그리고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놓기만 하면 된다. 변화된 나의 영적 상태를 구태여 숨기려고 애쓸 필요 없이, 내 속에 밝혀진 내적 빛을 가지고 가만히 그 모습 그대로만 유지하면 된다. 제20절 풀이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뭔가 한다고 요란스럽게 하지 않고 그냥 있어도 ‘오가는 사람들이 모두 볼 수 있게’될 것이다. 중세의 위대한 신비주의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의 말이 생각난다.
무엇을 할까보다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할까를 더 많이 생각해야 한다. 성결의 기초를 행위에다 두지 말고 됨됨이에다 두도록 하라. 행위가 우리를 성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행위를 성화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본질적 됨됨이에 있어서 위대하지 못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든 그 행위는 헛수고에 그치고 만다.
진정한 전도란 변화된 사람의 ‘무위의 위無爲之爲’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한 가지 언제나 명심할 일이 있다. 외친다고 해서 아무에게나 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앞의 제8절 풀이에서도 지적한 것과 마찬가지로 너무나 심오한 진리, 진주같이 귀중한 진리를 돼지에게 주면 돼지는 그것을 짓밟을 뿐 아니라 그것을 주는 사람을 물어뜯어 해친다는 사실이다. 우리도 남을 물어뜯지 말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우리에게 있는 작은 빛이라고 함부로 남에게 던지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눅8:16, 11:33, 12:3, 마5:15, 10:27, 막4:2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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