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오강남교수의 도마복음 (47절) 동시에 두 마리 말을 탈 수 없고 본문
47. 동시에 두 마리 말을 탈 수 없고
‘냐냐’와 ‘도도’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한꺼번에 두 마리 말을 탈 수 없고, 두 개의 활을 당길 수 없습니다.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데, 한 주인을 존경하면 다른 주인을 경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나 오래 익은 포도주를 마시고 곧바로 새 포도주를 마시지 않습니다. 새 포도주는 헌 가죽부대에 넣지 않습니다. 새 포도주가 헌 가죽부대를 터뜨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래 익은 포도주를 새 가죽부대에 넣지 않습니다. 포도주가 망가지기 때문입니다. 낡은 천 조각으로 새 옷을 깁지 않습니다. 그것이 새 옷을 찢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Jesus said, "It is impossible for a man to mount two horses or to stretch two bows. And it is impossible for a servant to serve two masters; otherwise, he will honor the one and treat the other contemptuously. No man drinks old wine and immediately desires to drink new wine. And new wine is not put into old wineskins, lest they burst; nor is old wine put into a new wineskin, lest it spoil it. An old patch is not sewn onto a new garment, because a tear would result."
47a. Jesus said: one person cannot ride two horses at once, nor stretch two bows,
47b. nor can a servant serve two masters as he will respect one and despise the other.
47c. No one drinks vintage wine and immediately wants to drink fresh wine.
47d. Fresh wine is not put into old wineskins because they might burst. Vintage wine is not put into new wineskins because it might be spoiled.
47e. A patch of old cloth is not sewn onto a new garment because it would tear.
Jesus says:
(1) "It is impossible for a person to mount two horses and to stretch two bows.
(2) And it is impossible for a servant to serve two masters. Else he will honor the one and insult the other. (3) No person drinks old wine and immediately desires to drink new wine.
(4) And new wine is not put into old wineskins, so that they do not burst; nor is old wine put into (a) new wineskin, so that it does not spoil it.
(5) An old patch is not sewn onto a new garment, because a tear will result."
그 당시 알려졌던 속담을 모아놓은 것이다. “두 마리 말을 한꺼번에 탈 수 없고, 두 개의 활을 한꺼번에 쏠 수 없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은 공관복음에도 있는데(마6:24, 눅16:13), 여기선 아무런 해석을 붙이지 않은 『도마복음』과는 달리,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다.
공관복음에서는 새 포도주를 헌 가죽부대에 넣을 수 없다고 했다. 새 포도주가 발효해서 팽창하면 낡은 가죽부대는 그 압력을 견디지 못해 터지고 말기 때문이다. 여기 『도마복음』에는 묵은 포도주를 새 가죽부대에 넣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이고 있다. 맛있는 포도주를 아직 가죽 냄새가 나는 새 가죽부대에 넣으면 포도주에 좋지 않은 맛이 더하여 포도주가 망가지기 때문이다. 또 공관복음에서는 새 천 조각을 낡은 옷에다 대고 깁는 사람은 없다고 했다. 빨래를 하면 새 천 조각이 줄어들면서 헌 옷을 잡아당기기 때문에 헌 옷이 더욱 크게 찢어지지 때문이다. 그런데 『도마복음』에서는 반대로 낡은 천 조각을 새 옷에 대고 깁지 말라고 했다. 필사 과정에 혼돈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아무튼 둘이 같이 갈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점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요즘은 컴퓨터 기술 중에 ‘멀티태스킹multitasking'이라고 하여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기능을 좋게 여긴다. 또한 밥을 먹으면서 텔레비전도 보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도 한다. 그러나 불교에서 말하는 명상법으로, ‘마음 다함mindfulness’,‘마음 챙김’혹은‘정념正念’이라는 수련에서는 한 가지 일을 할 때 거기에만 온 정신을 집중하고 몰두하도록 가르친다. 삶에서 일어나는 여러 문제들이 이런 능력이 부족한 데서 생기는 것이라고 한다. 컴퓨터와 사람은 다른 모양이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베드로는 자기도 물 위를 걷게 해달라고 했다. 예수님이 오라고 하자 그는 배에서 내려 물 위를 걸어서 예수님을 향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거센 풍랑이 닥쳐오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물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살려달라고 소리치자 예수님이 곧 손을 내밀어 그를 건져주시면서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마14:31)라고 하셨다. 이때 ‘의심하다distazo’라는 낱말의 그리스어 본래 뜻은‘두 쪽을 보다’라는 것이다. 오로지 예수님만 바라보고 걸으면 되는데 거센 풍랑을 보면서 두 마음이 들었다. 이처럼 두 마음을 품은 것이 ‘의심’이다. 의심을 뜻하는 영어의‘doubt’이나 독일어의 ‘Zweifel’도 어원적으로 ‘두 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특히 독일어에서는 ‘Zweifel’을 더욱 심하게 한다는 뜻으로‘Verzweifelung’이라고 하면 ‘절망’이라는 뜻이 된다.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나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나 둘 중 하나를 타고 있으면 문제가 없는데, 이 둘을 한꺼번에 타려고 하면 결국 허둥지둥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멈추지 않고 계속하고 있으면 절망이다. 여기서도 이 말이든 저 말이든 하나를 타고, 이 주인이든 저 주인이든 하나를 골라 섬기면 문제가 없을 텐데, 둘을 한꺼번에 하겠다는 데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다.“의심하는 사람은 마치 바람에 밀려 출렁이는 바다 물결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은…… 두 마음을 품은 사람이요, 그의 모든 행동에는 안정이 없습니다.”(약1:6-8)라고 한 말을 확인하는 셈이다.
그런데 이 절을 보면 마치 ‘이 말도 저 말도’하는 ‘도도주의both/and’가 아니라 ‘이 말이냐 저 말이냐’하나를 골라잡아야 한다는 ‘냐냐주의either/or’를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도마복음』에서 지금까지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야’한다는 것을 기본 가르침으로 강조하고, 심지어 바로 앞 절에 이분법적 사고를 지양하고 모든 것을 통전적으로 보는 어린아이 같은 시각을 가지면 세례 요한보다 더 위대하게 된다고 주장했는데, 여기서는 왜 양자택일, 이항대립 같은 것을 강요하는 모순된 입장을 보이는가?
흔히 ‘이것도 저것도’하는 도도주의를 취하면 모든 것을 무원칙적으로 다 허용하는 것이라 잘못 알고 있다. 다원주의적인 태도는 자칫 모든 것을 무조건 받아들이는 입장이라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다원주의도 다원주의 자체를 부정하는 입장까지 받아들이거나 인정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면 다원주의 자체가 무의미해기고 다원주의 자체가 성립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에 대해 이런 견해도, 저런 견해도 모두 일리 있는 것이라 인정하고 둘을 다 받아들임으로써 사물의 진면목을 더욱 뚜렷이 알 수 있는 깨침을 얻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다원주의이다. 그러나 그런 깨침 자체를 부정하는 견해마저도 받아들이는 것은 다원주의와 상관없는 일이다. 코끼리를 만진 장님들이 서로 자기가 경험한 바를 제시하면 그것을 모두 일리 있는 말이라 인정하는 것이 다원주의적 입장이다. 하지만 그중 하나가 자신의 말만 절대적으로 옳고 다른 사람의 말은 절대적으로 틀렸다고 주장하면서, 너희가 다원주의입장을 취하려면 너희 말이 틀렸다고 하는 나의 이런 주장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강변한다고 생각해보라. 그의 말을 받아들이면 다원주의라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되고 만다. 다원주의란 그런 ‘독단’을 배격하자는 것이지, 이런 독단까지도 무조건 받아들이자는 것이 아니다. 이런 억지 주장을 인정하라는 낡은 부대와 그런 독단을 허용할 수 없는 새 포도주는 양립할 수가 없다.
여기서 두 말을 한꺼번에 탈 수 없다거나 두 활을 한꺼번에 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깨침을 거부하는 삶과 깨침을 추구하는 삶, 혹은 깨침을 얻기 전의 삶과 깨침을 얻은 후의 삶을 서로 대비시키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는 물론 두 가지 중에서 깨침을 추구하는 삶, 그래서 깨침을 얻고 자유를 구가하는 삶을 택해야 하는 것이다.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 낡은 가죽부대와 새 포도주, 새 옷과 낡은 천 조각에 대한 것도 모두 새로움과 낡음을 대조하고 이 둘이 양립할 수 없음을 강조하는 말들이다. 공관복음서에는 바리새파와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의 논쟁과 관련해서 이런 말들이 한편으로 낡은 종교로서의 유대교와 다른 한편으로 이제 새로 등장하는 그리스도교를 서로 대비시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마9:16-17, 막2:21-22, 눅5:26-39). 그러나 여기 『도마복음』에서는 아직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를 차별한다는 의식이 만개하기 전의 서술로서 오로지 깨침을 거스르는 일체의 낡은 사고방식이나 행동을 버릴 것을 촉구하는 말로 쓰인 것이라 보면 될 것이다. 쟁기를 잡았으면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눅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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