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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올의 큐복음서 이야기【 Q57 】분쟁의 검, 너 자신의 십자가 본문
도올의 큐복음서 이야기
【 Q57 】분쟁의 검, 너 자신의 십자가
章 | 말 씀 |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느뇨?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紛爭)의 검(劍)을 주러 왔노라. 나의 말씀은 아비와 아들을 가르고, 어미와 딸을 가르고, 시어미와 며느리를 가르리라. 아비와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너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 |
마태 10 |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
누가 12 |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
이 구절로 인하여 마치 예수가 분쟁론자요,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인물인 것처럼 규정되고 인용될 때가 많다. 뭐 그러할 리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자가 있겠지만, 콘스탄티누스대제의 잔악한 살인들이 이 구절을 외우면서 이루어졌고, 십자군전쟁을 떠나는 병사들이 이 구절을 외쳤고, 마야 · 잉카문명을 멸절시킨 스페인의 신부들이 이 구절을 외쳤고, 1 · 2차세계대전의 군목들이 이 구절을 인용하면서 설교를 했다. 기독교역사는 인류에게 전쟁을 가르쳐온 역사였다. 오호라!
예수운동의 요체는 여태까지 보아왔듯이 철저한 세속적 가치의 부정이었다. 자율적으로 자신을 낮추고, 소유를 거부하며, 식탁교제를 위하여 있는 것을 나누고, 무한정한 관용과 용서를 실천하는 운동이었다. 이러한 예수운동은 신실한 참가자들에게 필연적으로 가족과의 마찰을 초래할 수 있다. 인간이 가족주의에 묶여 있는 한 이웃사랑의 보편주의를 실천하지 못할 때가 많다. 아마도 이 시점에서 예수운동은 공자(孔子)운동과 결별될지도 모른다. 공자는 가족주의적 가치로부터 세계를 바라보았다. 가정을 통하여 수신 · 제가 · 치국 · 평천하의 원대한 이상을 실현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예수는 가정과의 결별도 불사할 것을 요구했다. 이 요구는 일차적으로 예수운동의 참가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와 관련지어 원시불교 승단(samgha)의 정황을 떠올려도 무방할 것이다.
" 화평이 아닌 분쟁 " 이란 말은 궁극적으로 무소유의 실천을 위한 평화의 메시지였다. 인간세의 평화는 화평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투쟁과 분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운동의 무소유 · 무가정주의는 현재 기독교인들이 가족이기주의적인 탐욕의 확대에 골몰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하면 참으로 가슴에 와닿는 말씀이다.
" 십자가를 진다 " 라는 표현은 전혀 "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 라는 명제를 전제로 하지 않는다. 헤롯대왕이 BC 4년에 죽은 이후, 유대인들이 신권통치의 부활을 요구하며 반란을 일으켰는데, 로마군대는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였고 2000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십자가형에 처하였다. 따라서 " 십자가를 진다 " 라는 표현은 예수 당대의 사람들에게 그 의미가 리얼하게 전달되는 일상적 말이었다. 십자가형은 대개 도시에 진입하는 어귀의 길목에 전보산대처럼 늘어놓는다. 그런데 비극적인 것은 십자가형에 처해질 바로 그 죄수들이 본인의 무거운 십자가를 짊어지고 동구 밖까지 몇 킬로미터의 여정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죽음의 행진을 불사할 수 있는 자기부정(Negation of Self)의 용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본문의 표현을 정확히 고구하라: " 너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 이것은 예수의 십자가가 아니다. 실존적 " 나 " 자신의 십자가인 것이다.
출처: 큐복음서 도올 김용옥 / 통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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