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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서의 원본 『큐복음서』 본문
복음서의 원본 『큐복음서』
기독교 성서학자들 사이에서 오랜 논란거리 가운데 하나가 ‘큐(Q)복음서’ 문제였다. 신약성서 중 공관복음서의 기초 자료가 된 원텍스트가 있었다는 것이 이 논란의 핵심인데, 그 원텍스트를 부르는 이름이 ‘큐복음서’다. 큐복음서는 가설로만 존재하다가 점점 실체성을 얻어가고 있다. 결론적으로 <큐복음서>는 텍스트를 도올 김용옥 교수의 관점에 따라 편집해 번역하고 상세한 주석을 단 책이다.
도마복음서가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20세기에야 알려졌듯이, 큐복음서도 오랫동안 성서학적 가설로 나돌았을 뿐 실체성을 입증할 증거는 없었다. 큐복음서 가설이 처음 제기된 것은 19세기 초였다. 독일 신학자 크리스티안 헤르만 바이세(1801~1866)가 공관복음서를 연구하던 중 1838년 ‘큐자료’ 가설을 제시했던 게 발단이었다. '공관복음서'란 신약성서 가운데 공통의 자료와 공통의 관점으로 서술된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을 가리킨다. 이 세 복음서 가운데 마가복음이 가장 먼저 성립됐으며 나머지 두 복음서가 마가복음을 공통 자료로 삼아 기술된 것임이 바이세 당대에 밝혀졌다. 바이세는 여기에 더해 마태·누가 두 복음서가 마가복음 말고 또다른 ‘자료’에 근거해 기술됐다는 ‘제2자료설’을 내놓았다.
1945년 이집트 니그함마디에서 발견된 도마복음
그러니까 기독교 복음서는 예수의 행적과 가르침을 담고 있는데, 마태, 누가복음 이전에 마가복음과 별도로 가상의 자료 "Q"가 있었다는 가설을 바탕으로, "Q“의 내용을 재구성한다. 20세기 중반 이후 다양한 고고학적 발굴과 역사연구에 힘입은 최신 서구 성서신학의 추세는 "Q"를 이론상으로 구성한 가상의 자료가 아닌 예수의 핵심적이고 오리지날한 가르침을 담은 최초의 복음서로 간주한다. 이러한 최신 신학의 추세이 제2자료가 바로 ‘큐자료’ 또는 ‘큐복음서’다. 제2자료를 큐자료라고 부르게 된 건 ‘자료’를 뜻하는 독일어 크벨레(Quelle)의 머리글자를 그냥 빌려다 쓴 데에 맞추어 도올 김용옥에 의해 편집 · 번역 큐복음서의 본문과 주석을 싣고 있다.
이 큐자료는 1세기 뒤 다른 독일 신학자 아돌프 폰 하르나크(1851~1930)가 그동안의 연구성과를 총괄해 희랍어(고전 그리스어)로 된 ‘큐복음서’를 ‘복원’함으로써 나름의 실체성을 얻었다. 그러나 그 복음서는 순전히 문헌학적 연구와 논리적 추론에 의지해 도출해낸 결과였으며, 물증은 따로 없었다. 그런 이유로 큐복음서는 성서학자들 사이에서만 관심거리였을 뿐, 일반에 공개되지는 않았다. 기존의 기독교 신앙에 일대 타격을 줄 수도 있는 ‘복음서’를 널리 알릴 용기가 성서학자들에게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터진 것이 ‘도마복음서 출현 사건’이었다. 1945년 12월 이집트 나일강 상류 나그함마디 지역의 바위틈에서 대량의 성서 고문서가 발견됐는데, 거기에 ‘도마복음서’가 끼어 있었던 것이다. 공관복음서보다 더 이른 시기에 성립된 것이 분명한 도마복음서는 놀랍게도 내용의 35%가 ‘큐복음서’와 일치했다. 더 놀라운 것은 공관복음서가 모두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돼 있음에 반해, 도마복음서는 예수의 말씀으로만 이루어졌다는 사실이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라는 말씀 형식으로 이루어진 도마복음서는 그 형식이 큐복음서와 똑같았다. 이로써 큐복음서가 가설적 차원을 넘어 실체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도올 김용옥이 번역하고 해설한 〈큐복음서〉는 모두 8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는 ‘신의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가 부활했다’라는,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 되는 이야기는 전혀 없고, 대신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치는 지혜의 말씀이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도올 김용옥은 큐복음서야말로 도그마화하기 이전 초기 ‘예수교’의 실상을 보여주는 자료이자 “살아 있는 예수의 직접적 말씀”이라고 말한다.
이에 성서신학자들의 마태 · 누가복음 연구가 진행되어 "Q“의 내용을 재구성할 수 있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Q“ 자료라는 것 자체가 가설적인 것이므로, 그 내용이 신학자들 사이에서만 언급될 뿐 일반인에게 공유될 길은 없었다. 20세기 중반 이후 다양한 고고학적 발굴과 역사연구에 힘입은 최신 서구 성서신학의 추세는 "Q"를 이론상으로 구성한 가상의 자료가 아닌 예수의 핵심적이고 오리지날한 가르침을 담은 최초의 복음서로 간주한다. 그러니까 이 책은 이러한 최신 신학의 추세에 맞추어, 도올 김용옥에 의하여 편집 · 번역된 『큐복음서』의 본문과 주석이다.
조선왕조의 부패한 지배계급의 탄압으로부터 시작하여 일제강점기의 폭압으로 이어진 기나긴 수난의 역사 속에서 조선민중의 가슴에 불을 지폈던 피세(避世)와 구원의 열망이기도 했다. 그리고 해방 후에도 그 열망은 우리민족이 걸어야 했던 전쟁과 독재의 마수 속에서 마냥 확대되어만 갔다. 그러나 이러한 고난의 역정이 반사적으로 선사한 기독교 공동체의 확산은 그 고난의 진원의 진실이 옅어지면서 공동체 자체의 조직과 권력과 부를 유지하기 위한 세속적 운동으로 변절되어갈 수밖에 없다. 한국 기독교는 영혼 없는 육체, 생명력이 없는 형해, 신앙 없는 허세, 공동체 유지의 필연성이 결여된 콘크리트 건물이 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본능적으로 비판받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예수는 가혹한 비판자였다. 예수의 가르침은 예수 당대의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비판을 수용할 줄 모른다면 그것은 독단의 벽을 쌓아 올리며, 자멸을 자초할 뿐이다. 현세적 조직의 부와 권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종교를 건강하게 만드는 동력이 될 수 없다(7 ~ 9쪽).계속 콘크리트 건물만 짓고 체조 경기장에서 부흥회만 되풀이할 것인가? 나 도올은 말한다. 한국 기독교는 재건되어야 한다(10쪽).
기독교의 재건은 기독교의 본질을 항상 새롭게 구현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다. Q복음서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동시에 인용된 가장 오랜 된 문헌으로 1945년에 이집트에서 발굴되었다. Q복음서는 현존하는 복음서 밖의 이상한 자료가 아니라, 정경복음서 내에 있는 또 하나의 권위 있는 정경자료라는 사실에 있다(18쪽). Q복음서는 ‘살아있는 예수’의 직접적 말씀이다. 예수의 말씀인 4복음서와 Q복음서, 도마복음서를 읽는다면 예수의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이미 세속화 된 기독교가 처절한 자기반성의 기회로 예수의 본질로 회개해야 하지 않을까? 나를 포함해서 말이다. (29쪽)
요약하자면, 큐복음서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걱정하는 것만큼 요상한 책이 아니다. 신약과 구약의 정경만 인정하는 사람들에게는 불경스러운 자료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좀더 예수의 실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이성을 최대한 동원해서 뼛속 깊이 예수를 인정하고,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거쳐야 할 단계라 생각한다.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의 파괴력이 더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큐복음서의 모든 내용을 읽어도 기존 4복음서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예수 자신의 카리스마가 아닌 하느님의 카리스마가 예수를 통하여 베풀어지는 것일 뿐이다. 천국은 예수가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통하여 일어날 뿐이다(to occur through him)(179쪽).어찌 보면 큐복음서는 특별한 내용이 거의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단, 도올 김용옥의 새로운 시각은 역사적 예수를 만나게 하고 이성적 눈으로 예수를 바라보게 한다.
좌로부터 이정배·유태엽·도올·김명수·채수일 교수
저자는 “예수는 ‘신앙의 대상’인가 아니면 ‘따름의 대상’인가”를 묻는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선포한 ‘케리그마’의 그리스도에 비중을 둘 경우 예수는 전지전능한 신적 존재로서 인간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고 복을 비는 기복과 예배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 예수에 비중을 둘 경우 예수는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의 모델’로 이해되며, 그의 생애와 가르침은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제자직’의 원형이 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초기 그리스도교 예수운동 집단들의 화두는 “우리가 믿는 예수가 어떤 분이냐”는 물음으로 집약된다고 했다. 이것이 초기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예수의 상(像)은 결코 하나로 통일되지 않았고, 다양했다는 증거라고 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운동이 조직화·체계화하면서 예수에 관한 ‘통일된 상’이 요구되고, 예수의 생애, 활동, 수난, 부활이 종합된 예수 드라마가 형성되어 갔을 것으로 보았다.
기독교에 관한 건강한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종교를 떠나서 누구라도 읽어보시길 권한다. 특히, 예수의 생생한 육성과 교리 속에 갇히지 않은 역사의 예수를 만나고 싶다면 더 그럴 것이다.
큐복음서와 한국교회
도올 김용옥(발제자)
2008년 5월 27일 오후 5~8시
김리교신학대학교 100주년 기념관
1. 큐복음서는 현재 세계 기독교인들이 존숭하는 신약성서 정경 내에 함장되어 있는 또 하나의 복음서이며, 2세기를 걸쳐 엄밀한 문헌비평을 통하여, 특히 공관복음서를 구성하고 있는 여러 갈래의 자료더미에서 발굴해낸 문헌이다. 따라서 큐복음서에 관한 논의는 보수신학의 입장에서도 외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정경 외의 외경자료가 아니라 기독교신앙의 원점으로서 따르지 않을 수 없는 성경 그자체에 내장되어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큐복음서를 신학논의에서 제외시킨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경을 부정하는 것이며, 자신의 신앙의 원점을 거부하는 것이며, 기독교의 궁극적 존립근거를 외면하는 것이다. 큐복음서는 기독교의 여하한 논의로부터도 소외될 수 없다. 따라서 큐복음서의 도전은 여태까지의 어떠한 도전보다도 더 본질적인 것이며, 기독교신앙의 원래적 모습과 미래적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2. 큐복음서는 기본적으로 마가자료를 제외한 마태, 누가에 공통된 자료이지만, 학자들의 추정범위에 따라, 마태, 마가, 누가에 공통된 자료, 혹은 마태-누가에 각각 독자적으로 있는 자료도 극히 제한된 범위에서 포용된다. 그러나 이 자료는 기본적으로 예수의 말씀을 기록한 가라사대파편(Logion-Quelle)의 모음이라는 특징을 지닌다. 논어에는 공자의 생에에 관한 정보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것은 공자의 말씀만을 편집한 것이다. 큐복음서는 공자의 논어와 같은 어록복음서(Sayings Gospel)이다. 공자의 생애에 관한 정보는 사마천의 사기(공자세가)에 집약되어 있는데, 공자세가야말로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설화복음(Narrative Gospel)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다. 현존하는 4복음서는 모두 설화복음서의 장르에 속한다.
3. 논어와 사기(공자세가)의 관계와 큐복음서와 공관복음서 관계 사이에는 모종의 유비가 성립한다. ‘내러티브’는 예수의 말씀이 아니라, 예수에 관한 이야기다. 그런데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가장 기초적으로 사용된 자료가 바로 예수의 말씀자료이다. 설화복음서 내에 어록복음서가 채입된 것이다.
4. Q자료의 가설은 19세기 초부터 크리스티안 빌케(Christian Wilke), 크리스티안 헤르만 바이세(Christian Hermann Weisse) 등에 의하여 논리적을 제기되었고 20세기 초 아돌프 폰 하르낙(Adolf von Harnack)은 Q자료를 희랍어원문으로 재구성해냈다. 그런데 Q자료가 가설적 문헌으로서 논리적으로 구성되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이 확고한 체제를 갖춘 하나의 복음서로서 실체화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은 바로 도마복음서의 출현이었다.
5. 도마복음서의 출현으로써 어록복음서가 설화복음서 이전에 이미 엄존한 하나의 문헌양식이라는 사실이 역사화 되었으며, 따라서 큐자료는 더 이상 설화복음서에 종속된 가설적 문헌이 아니라 마가복음서 이전의 예수운동(Jesus Movement)의 실태를 전하는 독립적 복음서로서 새로운 인식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의 전환은 필연적으로 큐공동체(Q community)를 전제로 하게 되었으며, 큐공동체의 사회사적 연구는 예수운동에 관한 새로운 그림을 그리게 만들었따. 오순절교회나 예루살렘교회, 혹은 안티옥 중심의 바울의 선교활동과는 맥락을 달리하는 수많은 예수운동의 실체를 상정하게 만든 것이다. 그것은 예수운동을 단순한 초기형태의 소박한 기독교운동으로 보는 시각을 탈피한다. 예수운동을 유대교라고 하는 좁은 민족사적 울타리에서 해방시켜 헬레니즘-로마문명 속의 보편적 사상운동의 한 양태로서 조망케 만드는 것이다.
6. 나 도올은 예수교와 기독교를 개념적으로 구분한다.
예수교란 문자 그대로 예수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역사적 예수가 그냥 보통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메시아)라고 하는 사도들의 신념을 따르는 신앙공동체의 운동을 말하는 것이다. 대체로 교회(에클레시아)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회중을 말하는 것인데, 설화복음서는 당초로부터 교회 즉 그리스도공동체의 소산이었다. 교회는 애초부터 종말론적 회중(eschatological congregation)이었다. AD 70년 이후, 예루살렘성전이 멸망하고 종교적 하이어라키의 권위가 상실되고 국가와 민족이 해체되어 가는 위기상황에서, 이스라엘사람들에게 메시아사상은 절박한 요청이었다. 이 메시아사상에 부응하는 이미지로서 역사적 예수(Historical Jesus)의 실상은 별로 적합한 그림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새롭게 부상한 주제가 절박한 재림사상(imminent Second Coming)이었다. 재림은 부활을 요청하고, 부활은 죽음(십자가)를 요청하고, 죽음은 수난(Passion)을 요청하고, 수난은 드라마적 기술 즉 내러티브를 요청한다. 설화복음서는 이러한 논리적 맥락에서 탄생된 교회의 요청이다. 그러나 어록복음서는 이러한 교회의 요청 이전의 산물이다. 즉 어록복음서는 기독교의 산물이 아닌, 예수교의 산물이다.
7. 큐복음서 내에도 종말론적 함의를 지니는 파편이 포함되어 있기는 하나, 현재 우리가 발굴한 큐복음서는 이미 설화복음서의 드라마적 맥락에서 윤색된 자료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 반추되어야 한다. 종말은 역사 즉 시간 자체의 종말이 아니라, 역사 속의 한 사건일 수도 있다. 큐복음서 속의 종말론은 묵시론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지혜론적 경고로서 해석될 수도 있다.
8. ‘本立而道生’이라는 말이 있듯이(논어, 學而), 본(本)을 먼저 정확히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록복음서는 설화복음서의 본이다. 말(末)을 가지고 본을 흐리게 할 수는 없다. 예수의 말씀이 본(本)이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예수에 관한 이야기(내러티브)가 본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9. “예수를 믿는다”는 명제는 실제로 별 의미가 없다. 그것은 마치 “장미꽃을 믿는다”라는 명제와 비슷하다 “장미꽃의 형태적 아름다움을 사랑한다”든가, “장미꽃의 향기를 좋아한다”라고 말한다며 명제는 보다 유의미해진다. 즉 “예수를 믿는다”라고 할 때에 그 예수는 반드시 더 기술되어야만 하는 개념이다. “예수의 말씀을 나의 삶의 신조로 삼는다”라고 말하면 그것은 보다 구체적 함의를 지니게 될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할 때 과연 “예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 옳은가, “예수에 관한 이야기를 믿는다”는 것이 옳은가? 독자들이 스스로 판단해 보라.
10.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도 기독교인들에게는 빼어놓을 수 없는 신념의 일조이기는 하나, 그러한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과연 우리 삶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의미를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바울조차도 부활을 물리적 사건으로 말하지 않았다.
11. 큐복음서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명시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큐복음서는 기본적으로 기독론(Christology) 형성 이전의 문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큐공동체의 사람들은 부활론적 사상을 그들의 신념의 중심으로 생각하지 않았다는 의미맥락을 노출시킨다. 나는 큐복음서의 사상에서도 십자가는 부정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에서도 궁극적으로는 부활보다 십자가가 더 중요하다. 십자가는 자기부정이요, 자기희생이며, 현세적 모든 가치의 전도를 수반하는 것이다.
12. 현금의 한국 기독교는 십자가 없는 부활만을 외치려 하며, 현세적 가치의 부정이 배제된 현세적 가치의 영화를 향유하려는 성향을 강하게 노출시키고 있다.
13. 큐복음서는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의 핵심이다. 따라서 그것은 기독교인들의 삶속에서 실천해야 할 지고의 가치를 제시하는 것이다. 공관복음서에서 큐복음서의 메시지를 제거해버리면 그것은 실제로 디오니소스의 신화이야기나 오시리스의 부활이야기와 별 차이가 없어진다. 죽음과 부활의 내러티브는 지중해 연안문명이나 메소포타미아유역문명에 공통된 신화적 패러다임이었으며, 그 이전에 그것은 융이 말하는 바 인간의 집단무의식의 한 아키타입에 불과한 것이다. 부활을 중심으로 기독교의 교리를 구성하면 오히려 기독교의 생명력이 상실된다. 부활이나 재림(종말)사상이 의미를 지닐 수 있었던 것도 1세기말 전후의 시대적 환경의 제약 때문이었다. 기독교의 영원한 생명력은 오직 역사적 예수의 말씀에 있다. 예수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돌아가는 것만이 기독교인의 생명적 삶의 진면이다.
14. ‘예수의 말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큐복음서에 담겨있다. 큐복음서에 담겨져 있는 내용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내가 지금부터 본 토론회에서 강술하려는 것이다.
15. 한국의 기독교는 서방의 선교사들이 일방적으로 전해준 것이 아니라, 조선왕조 후대의 유학자들이 조선왕조애 내재하는 이념적 허구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주체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이러한 주체적 수용은 세계 기독교 전도사에 별로 유례가 없다. 이러한 주체적 수용의 형극의 길은 조선왕조의 멸망을 가져오고 개화의 개벽을 초래했으며, 신교육과 과학을 진흥시키고, 일제에 항거하는 저항정신을 길러주었다. 그리고 반독재투쟁의 시기에는 자유이념의 보루로서 해방신학,민중신학의 발흥과 함께 역사의 진보를 이룩하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16. 그러나 이러한 역사의 주체세력으로서의 성장과 함께 교회가 대형화 되면서 세속적 가치에 집착하게 되었으며, 또 기독교신앙과 서구화(미국화)가 오버랩 되면서 현대적 교육의 첨단에 서는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기독교적인 가치를 보수적 가치로서 해석하고 수용함으로써 방대한 반동 블록을 형성하였다. 우리 사회의 진보적 가치가 질식되어가고만 있는 불행한 결과가 초래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예수의 말씀을 외면하고 묵시론적 환상에만 매달리며, 논리적 토론을 거부하고 맹목적 신앙에만 굴종함으로써 우리사회의 합리적 소통을 저하시키는 역할에 기독교가 앞장서고 있다는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큐복음서의 메시지는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새로운 상식적 소통과 보편적 담론의 기풍을 진작시킬 수 있다고 나 도올은 확신한다.
17. 큐복음서는 기존의 어떠한 교리에도 안티테제의 역할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교리 이전의 원초적 핵심을 일깨울 뿐이다. 그것은 기독교의 알파요 오메가다.
18. 20세기를 통하여, 브레데, 슈바이처 담론, 불트만의 비신화화를 거쳐 오늘날의 역사적 예수의 재발견, 그리고 쿰란, 나그함마디 문서의 출현, 큐복음서의 발견에 이르기까지 1세기의 찬란한 신학적 성과는 2천 년 동안 가톨릭 중심의 기독교가 받아온 어떠한 도전과도 비교가 될 수 없는 매우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혁명적 도전을 이미 야기시켰다. 이 도전에 대해 아무리 눈감으려 해도 기독교는 눈감을 길이 없다. 한국의 기독교가 이 도전을 적극적으로 수용치 않는다면 잠시 극성했다가 폐허가 되어버린 사막의 고문명처럼 쓸쓸한 잔해만을 남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도전을 수용하여 주체적인 생명의 길을 걸을 것인가, 기존의 교리만 답습하여 종속적인 죽음의 형해만을 남길 것인가 하는 것은 이 땅의 기독교인들이 스스로 선택해야 할 일이다.(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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