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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도마복음과 카발라 본문

천지인 공부/카발라

도마복음과 카발라

柏道 2018. 11. 26. 23:30


도마복음과 카발라, 김태항



도마복음은 예수의 12사도 제자 중 한명이었던 디두모스 유다 도마가 썼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원본은 1898년 이집트 옥시링쿠스에서 그리스어 조각 필사본으로 발견되었고, 이후 1945년 나그함마디 지역에서도 콥트어로 쓰여진 문서의 일부분이 발견되었는데 두 문서의 내용이 일치한다고 한다. 원본이 발견된지 고작 120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오히려 성경보다 114 구절 밖에 되지 않는 도마복음이 예수가 전하고자 한 진리에 더욱 가깝다고 볼 수 있다.


1. 성경의 잘못된 해석

성경에서 베드로는 예수를 3번이나 부인한 제자였다. 그런 베드로가 로마 카톨릭의 반석이 되는 교황권을 가질 수 있었는지 나는 항상 궁금했었다. 도마복음에서 예수는 스스로를 낮춰 제자들에게 자신은 스승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저자에 의하면 카톨릭에서는 베드로가 예수에 의해 교회가 세워질 반석으로 선택되었다고 주장하지만 도마복음에 의하면 최초의 예수 후계자는 베드로가 아니라 야고보였다고 한다.

마태복음에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죽음의 힘도 감히 그것을 누르지 못할 것이다."(마태복음 16:18)라고 나와있다. 그러나 성경의 그리스 원본 구절은 이렇다.

"Kagw de soi legw oti su ei Petros kai epi tauq q petra oikodomhsw mou qn ekklhsian kai pulai adou ou katiscusousinauqs." 그리스어로 Peter는 Petros/Petrus이고 의미는 바위라고 한다. 위에 그리스 원본에 명시된 petra는 같은 의미의 바위란 단어이자 여성 명사이다. 그러니 이 구절에서 너는 베드로이다라는 말 대신 너는 바위이다로 해석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이 구절을 올바르게 해석한다면 "이것은 바위이며 이 바위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다."가 맞는데 예수가 죽고 난 후, 기득권이 민중을 통치하기 위해 필요에 의해 절대권력을 만들어 정치적으로 해석을 했다라고 일부 성서 연구가들은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성경에서 Logos를 말씀이라고 번역 한 것부터가 성경이 가지고 있는 한계성이 내포되어 있다. 구약은 수메르 시대부터 구전되어 온 성경(어쩌면 수메르 이전 까마득한 먼 시대에서 전해져 내려왔을수도 있다고 생각한다)이라 오래되었고, 신약은 예수 사후 필사를 하는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내용의 삭제나 첨가가 있었고 또 기득권에 의해서도 수정된 부분이 많아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성경은 예수가 올바르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과 다르지만 예수는 저 구절을 통해 진리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라고 주장했다. 



2. 왜 예수는 비유를 통해 진리를 알렸는가?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하늘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은 받지 못하였다." (마태복음 13:11)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알게 해주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들려준다." (마가복음 4:11)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에게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 뜯을지도 모른다." (마태복음 7:6)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나의 비밀을 받을만한 가치 있는 자들에게만 나의 비밀을 말하노라. 그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알지 못하도록 하라." (도마복음 62절)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거룩한 것들을 개에게 주지 말라. 개들이 그것을 거름더미 위로 던져버릴 것이니라. 진주를 돼지에게 주지 말라." (도마복음 93절)

 여지껏 성경을 읽으며 제일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이다. 내 성향과 관련이 있지만, 개인적으로 비유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한 구절에 많은 의미를 함축시켜버리면 사람마다 각자가 지니고 있는 관점이 다르니 본래 의미가 잘 전달이 되지 않고 와전이 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비유와 상징은 문장을 꾸며주기 적절한 정도의 수식어로서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동안 예수가 왜 비유를 통해 진리를 전파했는지 참 궁금했었는데 (그냥 우주의 창조 원리와 카발라를 비유가 아닌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알려줬다면 종교간의 싸움이 없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2천년전엔 물리와 자연과학은 발달하지 않았고, 그 시절 인류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육안으로만 확인할 수 있는 하늘의 낮과 밤이었을 뿐이니 카발라의 열쇠였던 일루미네이션을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었겠지만. ) 

2천년 전, 인류는 진리를 이해하기에 의식 수준이 낮은 차원에 있었기 때문에 마치 초등학생에게 대학 수준의 철학을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어린아이에게 보석을 주면 그것이 보석인줄 모르고 쓰레기통에 버릴 것을 우려해 준비된 자에게 진리를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3. 가부장적인 신의 모습과 페미니즘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그대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 사람의 아들이 될 것이며 그대가 '산이여 여기서 물러가라'고 말하면 산은 물러갈 것 이니라." (도마복음 106절)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길 "마리아가 우리에게서 떠나도록 합시다. 여자들은 생명을 얻을 가치가 없기 때문이지요."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그녀를 남자로 만들기 위하여 그녀를 인도할 것이니라. 이것은 그녀가 남자를 닮은 살아있는 영이 되도록 함이니라. 자신을 남자로 만든 모든 여자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니라." (도마복음 114절)

과거 무신론자였던 시절, 신을 부정했던 것은 가부장적 모습 때문이었다. 신은 자비롭고, 온화하며, 모두를 사랑한다는 기독교의 가르침대로라면 남성과 여성의 지위는 동등해야 하지 않냐고 반문했다. 만약 신이 성별이 있다면 아마 남자도 여자도 아닌 양성적인 존재일거라고 생각했다.

도마 복음을 비롯하여 다른 복음서에서 신은 남성인 하나님 아버지로 표현된다. 유대 신비 사상인 카발라에서는 신은 양성일체로 표현된다. 구약의 야훼는 남성도, 여성도 아니었고 아버지로 불리는 것은 그 시대의 가부장적 문화의 유산일 뿐이었다고 한다. 우주는 음과 양으로 움직이며 위와 아래, 앞과 뒤, 남성과 여성, 신과 나로 분리 되어 있다. 즉, 신은 이원성 너머에 있고 우리는 이 이원성을 극복해야 한다. 남자에게도 여성성이 있고 여자에게도 남성성이 존재한다. 페미니즘은 성소수자를 포함하여 각자의 성을 존중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함으로써 평등한 사회를 이루고자 하는데에 의미를 두고 있다.
예를 들어 어린 여자아이에게 앉을 때 여자처럼 조신하게 다리를 오므리고 앉으라고 하거나, 남자 아이에게 남자는 강하고 단단해야 한다고 주입시키는 것, 이런 전통적인 성역할에 고착된 사고방식이 남성과 여성 모두를 억압하고 있고 오늘날 성별의 갈등에서 오는 싸움으로 야기되고 있다.

창세기에서 아담과 이브는 뱀의 유혹으로 선악과를 먹고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게 되었는데 이것도 어떤 사건을 비유적으로 상징한 것 뿐이라고 한다. 물질우주가 만들어지고 어둠을 빛으로 변화시키고자 신의 일부였던 우리 영혼들은 이 세계로 내려오게 되었다. 여기서 추방은 신과의 분리이며 신성 상실이다. 아담은 인류의 첫 조상도 아니었고, 선악과를 먹은 인간을 신이 노여워해 오늘날 우리가 원죄라는 주홍글씨를 쓴 것은 더더욱 아니다. 유대인의 의식 수준을 반영하고 있는 구약 성경에는 남녀의 성차별적인 구절이 많이 있다. 에덴동산에서 이브가 사과를 따먹었고 그로 인해 여성(이브)는 출산이라는 형벌을 지니게 되었는데 이것은 터무니없는 말이고 당시 유목인들의 문화가 반영된 결과이다. 
베드로는 막달라 마리아를 싫어했지만 예수는 "그녀를 남자로 만들기 위해 그녀를 인도할 것이니 이것은 그녀가 남자를 닮은 살아있는 영이 되도록 함이라. 자신을 남자로 만든 모든 여자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이 의미는 그 시대 한계이자 고정관념이었던 남성우월의식과 성차별을 깨뜨리고자 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한다.

아담은 특정한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지칭하는 상징이라고 한다. 카발라 천지 창조론을 보면 신은 수 많은 불꽃으로 퍼져나와 인간의 영혼이 되었다. 즉, 처음부터 영혼의 숫자는 결정되어 있었으며 그 숫자는 변동이 없다고 한다. 이 많은 영혼들이 일시에 특정 사건으로 인하여 추락한 것을 비유로 표현한 것이 아담 설화라고 한다.그럼 혼의 숫자가 정해져 있다면 인구 증가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우리는 생명이 지구에만 존재한다고 믿고 있지만 우주에는 수 많은 태양계가 있고 그들 행성에는 수 많은 생명이 존재한다. 대기나 환경이 지구와는 다르니 그 조건에 어울리는 형태로 생명이 존재하는데, 영혼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 있든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고 한다. 영혼은 윤회를 하고 있고, 지구에 인구가 증가 하고 있는 것은 윤회를 통해 영혼이 행성을 이동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4. 윤회의 원리와 신성회복

"너희의 율법서를 보면 하느님께서 '내가 너희를 신이라 불렀다.'라고 한 기록이 있지 않느냐? 이렇게 성서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신이라고 불렀다. 성경 말씀은 영원히 참되시다." (요한복음 10장 34~35절)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사람들이 당신들은 어디서 왔느냐?'고 물으면 '우리는 빛에서 왔으며 빛이 스스로 생겨나기 시작하여 스스로 형성되고 형상으로 나타난 그곳에서 왔노라' 대답하라. 사람들이 '그것이 신이냐?'고 묻거든 '우리는 그것의 자녀들이며 살아계신 아버지의 택함을 입은 자들이라' 말하라. 만약 그들이 '당신 안의 아버지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하면 사람들에게 말하라 '그것은 움직임과 휴식이라' 말하라." (도마복음 50절)

카발라의 우주창조론에서 물질이 창조되려면 5원소가 필요하다고 나온다. 먼저 신의 영으로부터 공기가 나오고 , 공기에서 물이 나오고, 물에서 불이 나오고, 마지막으로 물의 한 부분인 흙이 나오는데 오각별인 펜타그램의 다섯개의 점은 이 5원소를 나타낸다고 한다. 이 원리는 동양의 오행과도 유사성이 있어 보인다. 이 5원소를 통하여 우주가 형성되고 운행이 되고 있으며 물질의 근원이 되는 원초적인 원소라고  한다.
성경에는 비유가 참 많다. 만약 흙으로 사람을 빚어 입김을 불어넣으니 사람이 되었다는 구절을 그대로 믿는다면 성경을 제대로 읽을 수 없다. 물질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태초에 신(빛)과 함께 합쳐진 존재였고 어떤 사건에 의해 그 근원으로 부터 분리되어 떨어져 나왔다. 

거리에서 길을 걸으며, 그리고 버스와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매일 마주하는 직장 동료들, 나의 부모와 친구.. 그들은 또 다른 나이다. 모래 한 알에서 온 우주를 보고, 한 떨기 들풀에서 천국을 보라는 신비주의 시인이었던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처럼 이렇게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으니 신은 곳곳에 편재한다는 말씀이 딱 맞다. 그러니 당신은 나이기도 하고, 나는 당신이기도 하다.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우리는 모두 하나(전체)라는 것을 증명한다. 개인이 길고 긴 윤회를 통해 깨달음을 얻고 영계로 가는 것은 태초에 떨어져 나왔던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것(신성회복)이라고 한다.

하지만 윤회를 통해 어느 시기까지 깨닫지 못하면 최후의 날에 우리의 영혼은 어둠속에 버려진다고 한다. 우주는 주기적으로 어떤 원칙에 의해 생성하고 소멸되는데 신이 우리를 덜 사랑해서 그런것도 아니고,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 법(law)이 있듯이 우주에도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규칙(rule)이 존재한다고 한다. 법칙이 무너지면 우주의 존재 근거는 사라진다. 신은 질서이며 우주도 질서이고, 우리도 질서속에 살아가고 있다. 신은 어떤 특정인을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않고 개인적인 감정이 아닌 법칙에 의해 우리를 판단한다. 성령은 신의 질서이고, 질서가 있으니 우리는 우주의 이치에 맞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까지도 빛보다 어둠을 사랑해서 물질 욕망에 매여 있는 사람은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빛이 사라지고 어둠만이 남은 공간에 버려진다고 한다. 




5. 자기 자신을 알라

우주는 4계(영계, 멘탈계, 아스트럴계, 물질계)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물질계이며 붓다와 예수는 신성을 회복하여 영계로 갔다. 이 4계를 극복하고 균형상태에 도달할 때 우리는 전체(무한, 빛, 신)에 돌아가서 하나가 된다고 한다. 십자가의 4점은 4계를 지칭하는 것이고 자신의 업(운명)을 깨달아서 십자가가 되는 의미라고 한다. 책을 읽으며 놀랐던게 불교의 스와스티카 표식도 십자가의 또 다른 형태라고 하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십자가는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고,기독교가 십자가를 자신의 것으로 차용했을 뿐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인간의 원죄를 인정하고 순하고 착하게(복종하며) 살라는 것이 아니라(물론 죄를 짓지 않고 착하게 살아야 하겠지만) 그런 단순한 의미를 넘어 물질계에서 욕망과 부정을 극복하고 상위 차원인 깨달음을 얻으라는 의미이다. 십자가는 완성을 의미하며 깨달음의 상징이다.

붓다는 35세에 깨달음을 얻고 80세까지 법을 설파하셨다. 자신을 아는 것은 한 개인이 태어나고 자라오면서 축적한 모든 기억과 경험, 지식 그리고 내 정체성인 에고(자아)가 아닌 침묵 속에 우리의 생각이나 행동을 지켜보는 참나를 찾는 것이라고 한다.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나를 내려놓고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될 때,  신이 무엇이며 우주가 무엇인지, 신과 자신과의 관계가 무엇인지 비로소 깨달을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물질 욕망을 서서히 없애 마지막 단계에서는 모든 재물에 대한 욕망도 사라지고 텅 빈 마음 상태가 되어야 하는데, 그 텅 빈 마음이 되어야 하늘나라이자 진리인 LOGOS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출처] 도마복음과 카발라|작성자 Mina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