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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의 카발라 - 17장. 주요 축일들 본문

천지인 공부/카발라

비전의 카발라 - 17장. 주요 축일들

柏道 2018. 9. 12. 14:17


비전의 카발라 - 17장. 주요 축일들



17장

 

주요 축일들

 

 

한 해의 도정 속에서 황도대의 서클을 순환하면서 태양은 분점分點과 지점至點으로 알려진 네 개의 포인트들을 통과하게 된다. 춘분점과 추분점은 일 년 중 태양이 적도를 지나면서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두 날에 해당된다. 이 두 날은 3월 21일과 9월 21일이다. 한편 동지점과 하지점은 태양과 적도 사이의 각도가 최고인 두 날에 해당된다. 이것은 일년중 낮이 가장 짧은 12월 21일, 동지날과 낮이 가장 긴 6월 21, 하지날이다.

 

이른바 4대 축일, 크리스마스, 부활절, 성요한절, 성미카엘절은 이 네 개의 절기에 상응한다. 이 네 축일은, 인류로 하여금 그 날 태양이 우주 속에서 특히 강력한 자류를 방사하고 있음을 상기시키고 그 사실을 인식함으로써 그 에너지를 진화의 촉진에 이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비전가들에 의해 제정된 것이다. 이 네 포인트는 계절의 변화가 발생하는 절기로, 각 계절에 해당되는 적절한 특별한 힘들의 결절점이다. 각 계절의 힘들은 대천사들에 의해 조직되고 조정된다. 그리고 대천사들의 명에 의해 수많은 하위의 영들이 특정한 에너지와 힘들을 행성의 모든 부분에 분배한다.

 

당신은 자연의 모든 일들이 자동적으로 발생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거기에는 만군의 영들이 적극적으로 관련된다. 그들은 각각 광물, 식물, 동물, 그리고 인간을 돌보는 임무를 맡고 있다. 모든 계절적 변화는 그들의 활동의 결과이다.

 

먼저 3월 21일의 춘분에 대해 알아보자. 춘분은 대천사 라파엘의 영향 아래 있다. 라파엘은 하위 영들에게 명령하여 식물과 관련된 활동을 하게 한다. 그들은 식물에게 성장과 재생의 힘들을 분배한다.

대천사 라파엘은 수성(머큐리)의 권역에 거주한다. '라파엘'이라는 이름은 '치유자, 신' 또는 '신성한 의사'라는 의미이다. 이 대천사와 그의 수하 천사들의 사명은 신성한 힘들을 조종하여 치유의 분야에 사용하는 것이다.

 

계절을 지배하는 각 대천사들은 동일한 신성한 힘을 조종하여 다른 파장, 다른 성질을 띠게 만든다. 고대인들은 특정한 공식을 사용하여 라파엘과 언제 어떻게 교감하는 지 정확히 알았다. 그들은 라파엘과의 교감을 통해 식물의 치유적 속성들에 대한 과학을 알아내었다. 그리스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는 헤르메스(머큐리)의 힘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수 천년 동안 헤르메스의 지팡이(카듀세우스)가 의술의 심벌이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봄이 오면 이런 사실들에 대해 생각하라. 그리고 자신을 대천사 라파엘과 연결시켜라. 그에게 식물, 씨앗, 꽃들의 비밀스런 힘들을 알려달라고 간구하라. 그것들이 지닌 가치로부터 당신이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봄에 자연이 소생할 때 그것은 우리에게 영적인 소생의 필요성을 상기시켜 준다. 식물들이 수액의 올라옴과 더불어 새로운 생명의 유입을 받듯이 우리들 역시 내면에서 영적인 수액을 상승시켜 우리의 영체들에 새로운 생명을 불러 일으켜야만 한다.

 

이 절기의 축일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이다. 이 축제 속에서 자연의 생명과 혼의 생명은 동일한 의미를 가진다. 상징학에 정통하다면 당신은 비전가의 생명이 자연의 생명과 부합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비전가의 삶은 순차적으로 특정한 목적을 가진 일련의 상징적 에피소드들로 구성된다.

 

예수의 삶은 지구와 우주의 전개 과정의 패턴을 따르고 있다. 그것은 우주적인 의미를 지닌 하나의 상징이다. 예수가 탄생하고 십자가 처형을 받고 부활했듯이 우주 역시 탄생하고 죽고 소생하게 된다.

세계 모든 나라의 전통 문학 속에는 빛과 어둠의 힘들 사이의 투쟁에 대한 수많은 신화와 전설들이 존재한다. 6월 21일, 하지가 되면 우리는 빛이 어둠을 누르고 승리하는 기간에 접어들게 된다. 그리고 며칠 후 6월 24일, 우리는 요한절을 맞는다. 그날이 되면 우리는 관습적으로 밤새도록 불을 피운다. 하지를 지배하는 대천사는 우리엘이다.

 

교회에서는 이 대천사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 이유가 궁금할 것이다. 동지, 춘분, 추분을 각각 주관하는 대천사 가브리엘, 라파엘, 미카엘은 모두 크리스천들에게 익숙하다. 그러나 우리엘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우리엘은 빛의 대천사이다. 그의 이름은 '신은 나의 빛이다'라는 의미이다. 성요한절은 태양이 게자리(거해궁)로 진입하는 시기와 일치한다. 성요한절은 불의 축제일이다. 그것은 열매뿐만 아니라 자연의 모든 것들을 익게 하는 여름의 열기의 축제이다. 여름에 자연은 불타오른다.

 

그러나 이 불은 육체적, 관능적 사랑의 불이기도 하다. 어떤 나라들에서는 성요한절의 밤에 온갖 성적인 흥분에 빠진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대천사 우리엘과 하지 축제를 경시하는 이유이다.

 

카발라의 생명나무에서 우리엘은 세피라 말쿠트, 지구(흙)의 대천사이다. 따라서 우리엘은 지구의 내적인 불과 연결된다. 그의 수하 천사들은 금속, 보석들과 관련된 작업을 한다. 이것은 그리스의 신 헤파이스토스(불칸)의 일이다. 헤파이스토스는 불을 이용하여 금속과 광물을 다룬다. 왜냐하면 불은 광물과 금속을 녹일 수 있는 유일한 힘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광물, 금속과 관련된 지하 영역과 사탄적 불의 영역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지하라는 근접한 공간이라도 사탄의 세계는 금속, 광물과 관련된 불의 영역과는 완전히 분리돼 있다. 이 자연의 지하 대장간에서 일하는 영들은 신성한 존재들이다. 그러나 지옥에 거주하는 존재들은 타락한 혼들이다.

 

빛이 가장 강력해지고 밤과 어둠의 힘이 물러나는 이 하지 기간 동안 의식적이 되고 깨어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내적인 어둠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받게 될 것이다. 밤이 길어지고 빛이 스러질 때, 세계의 생명 자류가 반대 힘의 압력에 의해 물러나기 시작할 때는 이런 유의 작업을 할 시기가 아니다. 내적, 외적 조건들은 더 이상 부정적 힘들에 대해 직접적인 공격을 할 상태가 아니다. 그러나 빛이 우세한 시기에 우리는 좋은 여건 속에서 세계를 위한 긍정적인 작업을 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개인적 문제들을 해결한 상태라면 더욱 그러한 작업을 할 권리, 아니 의무를 가지게 된다.

 

우리엘은 불의 대천사이다. 그는 물질적 불과 연결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불타오르는 성 에너지의 불과도 연결된다. 우리가 대천사 우리엘과 교감하는 법을 반드시 배워야만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성적인 에너지를 승화시키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불을 다룰 수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승화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상태에서 또 다른 상태로의 변화이다.

 

물은 온도가 섭씨 0도 이하일 때 얼어서 고체가 된다. 살짝 1도만 올라도 그것은 녹아서 다시 액체가 된다. 그리고 물을 100도로 가열하면 그것은 증기로 변한다. 만일 증기 안에 포함된 수소로부터 산소를 분리시키길 원한다면 훨씬 더 높은 열이 필요하다. 특정한 가스나 액체를 변형시키는데 극고온을 사용하는 공학자들의 유일한 문제는 열에 저항할 수 있는 적절한 용기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전학에서는 물질을 다루는 이 모든 현대 공학 기법들을 일찍이 고대로부터 알고 있었다. 인간의 본질에 통달한 비전가들은 강력한 원소들의 순환과 변형을 가능케 해주는 순환망과 정묘한 도관들이 인체에 구비돼 있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나는 지금 인체의 순환계통이나 신경계통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모세혈관을 말하는 것도, 그것보다 더 섬세한 신경섬유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훨씬 더 정묘한 망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것은 물질을 에테르 상태로 변형, 승화시켜준다. 이 과정은 우리의 몸 안에서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다. 우주 지성은 인체(폐, 심장, 뇌, 특히 척추)에 이 지극히 복잡하고 정묘한 망을 구비시켰다.

 

이 변형은 모든 인간 속에서 발생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한다. 아니, 대개의 경우 전혀 알지 못한다. 영적인 연금술이 우리의 혼과 몸속에서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무의식적인 작용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그것에 대해 의식적이 되어야만 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물질을 보다 정묘한 차원으로 승화시키는 채널 망이 우리에게 완전히 구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만 한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 승화작용을 위해 우리자신을 가장 잘 준비시킬 수 있을까? 순수하고 조화로운 삶을 사는 것을 통해서이다. 그리고 천상으로부터 오는 강력한 빛의 흐름에 우리 자신을 여는 것을 통해서이다.

 

대천사 미카엘은 9월 22일의 추분을 주관한다. 이날 태양은 천칭좌로 진입함으로써 새로운 사이클을 시작한다. 과일과 견과들이 나무로부터 떨어지고 땅바닥에 빈껍데기를 남긴 채 썪는다. 곡식들이 탈곡되고 밥으로 만들어지거나 곡창에 보관된다. 보관된 종자들은 나중에 다시 파종되어 새로운 성장의 사이클을 시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 분해와 분류과정은 식물의 세계와만 관련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과도 관련된다. 과일이 나무로부터, 씨앗이 과일로부터 분리되는 것처럼 인간의 혼도 몸으로부터 분리된다. 물리적이 아니라 영적으로. 육체는 봉투이고 혼은 천상의 토양에 심어진 씨앗이다.

 

인간은 하나의 과일이다. 무르익게 되면 인간은 지상의 과일이나 씨앗처럼 땅바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천상으로 승천하게 된다. 가을은 헤르메스 트리스메기스투스가 말한 '분리'의 계절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거친 것으로부터 정묘한 것을 분리해야만 한다. 부드럽게, 기술적으로.' 이 말은 물질로부터 영적인 것을 분리시킨다는 의미이다. 전체 자연은 가을에 이 분리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의 도래를 준비한다. 대천사 미카엘이 와서 물질체로부터 혼을 분리시키면 물질체는 뒤에 남겨져 죽게 된다. 이처럼 비전가는 생명을 해방시키기 위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어떤 물질이 죽는 것을 허락한다.

 

분리는 생명의 법칙이다. 예를 들어 당신은 이것을 음식과 관련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는 음식물에서 먹을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고 분리한다. 우리는 과일을 먹을 때 오물과 껍질을 씻어내고 깎아서 버린다. 물질적인 차원에서 이런 작업을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인 차원에서 그런 분리법을 알아야만 하고 분리할 수 있어야만 한다. 안타깝게도 영적인 차원에서 그 작업을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엇을 깎아내고 버려야 할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모든 것을 통째로 삼킨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털과 꼬리까지 모두 삼키듯이! 우리는 대천사 미카엘로부터 분리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무엇을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 배워야만 한다. 순수물과 불순물, 유용한 것과 무용한 것, 이익이 되는 것과 해로운 것, 살아 있는 것과 죽은 것을 어떻게 식별하고 분리시키는 지 배워야만 한다. 우리의 모든 불행은 이런 식별력의 부재에 기인한다.

 

대천사 미카엘은 육체로부터 혼을 분리시킨다. 왜냐하면 혼은 지상에 영원히 머물지 않고 저 먼 천상의 장소들을 여행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자연의 작용 방식을 인식하고 있는 비전가는 말한다. '나의 혼은 아래에 묶여 있다. 어떻게 하면 혼을 해방시킬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이 무거운 물질의 외투로부터 혼을 분리시킬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무르익기를 기다려야만 한다. 그것이 무르익었을 때 대천사 미카엘이 와서 그것을 물질의 껍데기로부터 해방시킬 것이다.' 미카엘절은 풍부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그것이 총체적인 해방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죽음, 즉 육체로부터의 분리는 고급계로의 상승을 가져온다. 미카엘은 혼을 데리고 간 뒤 저울질을 한다. 그는 칼로 혼을 지상에 묶어두는 연결을 끊어버린다. 그러고 나서 그는 혼을 저울질하고 심판한 뒤 그 진보의 정도에 상응하는 영역으로 데리고 간다.

 

대천사 미카엘은 균형과 정의의 힘을 행사한다. 결과적으로 그 힘은 우리로 하여금 선과 악을 식별할 수 있게 해 주는 힘이다. 그것은 선을 해방시키고 악을 변형시키는 힘이다. 그러나 선과 악은 너무도 밀접하게 서로 꼬여있기 때문에 성급하게 분리시키려면 어떤 해악이 초래되곤 한다. 대대물待對物을 분리시키는 기술은 모든 기술들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

 

모든 시대를 통해 비전가들은 자연에서 지혜를 얻어왔다. 우리는 껍데기를 손상시키지 않고 그 안의 견과를 추출해 낼 수 없다. 그러나 자연은 그 방법을 알고 있다. 자연은 그것이 무르익기를 기다린다. 껍데기가 스스로 열려 알맹이를 내놓을 때까지. 임산부와 아기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태아가 다 성장하기 전에 탯줄을 끊어버리면 산모와 아기의 생명이 위험하다. 그러나 기다린다면 과일은 저절로 떨어질 것이고 탯줄도 안전하게 분리된다. 이 분리는 성숙의 상징이다.

 

당신은 성경에 나오는 밀과 가라지의 비유를 기억할 것이다. 밀밭에 난 가라지들을 뽑아야 할지 묻는 종들에게 주인이 대답한다.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밀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추수기는 알곡이 여물 때이다. 우리는 때를 기다려야만 한다. 그러고 나서야 악으로부터 선을 분리시킬 수 있다. 그 분리는 대천사 미카엘의 작업이다.

 

대천사 미카엘은 지구를 정화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오랜 세월 동안 악의 무리들은 지구를 거대한 파괴적 힘들로 범람시켰다. 이 힘들은 거대한 저장소에 축적되고 용 또는 뱀으로 알려진 괴물의 형체를 띤다. 이 용은 열국을 미혹케 하고 신의 자식들을 오도하며 인류의 모든 고통의 원인이 된다. 그것은 굉장히 강력한 상념체(에그레고어)이다. 커다란 자기 희생과 용기를 지닌 사람들이 온 몸을 던져 이 괴물과 목숨을 다해 싸워왔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물리치지 못했다.

 

그러나 때가 되면 미카엘이 일어나 그것을 무찌르게 될 것이다. 대천사 미카엘은 이 상념체를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 그와 그의 천사군단은 인류가 수세기 동안 주님에게 간구해온 기도에 응답할 것이다. 그의 승리는 계시록과 성경의 여타 서책들에 예언돼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미카엘에게 연결시키고 우리를 보호해 달라고 간구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의 승리를 더욱 확고히 하기 위해 우리의 노력이 그의 노력과 연결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간구해야만 한다. 빛은 어둠을 물리칠 것이다.

 

그것은 예언돼 있고, 결국 그렇게 될 것이다. 우리는 그 승리에 일조해야만 한다. 태양 영, 신의 강력한 빛나는 힘, 대천사 미카엘이 지휘하는 이 전쟁에 참여하는 신의 자식들은 불의 천사의 입맞춤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입맞춤은 그들에게 영적인 계명을 가져다 줄 것이다.

 

12월 21일은 동지이다. 그것을 주관하는 것은 대천사 가브리엘이다. 동지로부터 바로 며칠 뒤는 크리스마스이다. 크리스마스는 탄생, 즉 물질 속으로의 하강, 응고, 결정화를 기념하는 축일이다. 이 개념들은, 자연이 얼어붙는 겨울의 특징을 반영한다.

 

대천사 가브리엘은 물질을 응고시키는 속성을 지닌 힘들을 지배한다. 만일 달의 영향이 다른 힘에 의해 중화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식물, 동물 등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응고, 석화시킬 것이다. 대천사 가브리엘은 모든 종류의 구현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다. 어떤 개념, 계획을 구현시키기를 원할 때 비전가는 이 축일의 시점이 가져다주는 우호적인 상태들을 이용한다. 동지는 지상에 어떤 결과물을 낳는데 길한 시기이다. 다른 축일들은 분리, 소생, 점화에 상응한다. 이에 비해 크리스마스는 물질적인 실현과 관련된다.

 

4대 절기(춘분, 추분, 하지, 동지) 또는 4대 축일은 일년 중 가장 중요한 날들이다. 그것들은 각각 4 혹성에 의해 지배받는다. 춘분은 수성, 하지는 금성, 추분은 태양, 동지는 달. 이 날들은 자연의 축제일이다. 천사, 대천사, 자연의 모든 힘들, 심지어 신성한 어머니 그 자신도 이 축제에 참여한다. 이 날들의 중요성, 그리고 이 시기에 우주에 넘치는 거대한 힘들의 중요성을 이해한 사람들만이 축제에 진정으로 참여할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축일들을 어떻게 보내는지 알고 있다. 특히 크리스마스.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크리스마스는 먹고 놀고 마시는 날에 불과하다. 그날 사람들은 온갖 광기에 빠져든다. 그리고 결국 완전히 녹초가 되어 뻗고 만다. 소생과 빛을 가져다 주어야 할 축일이 그들에게는 오로지 의식을 더욱 어둡게 만들 뿐이다.

 

요전 날, 나는 텔레비전에서 축일의 의미에 대한 토론을 지켜보았다. 작가, 영화감독, 사회학자, 언론인 등이 토론자로 나왔다. 그들은 공휴일과 축제일들이 일상의 단조로운 반복을 깨고 휴식과 즐거움을 위한 건강한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에 인간에게 이롭다는 데 모두 의견의 일치를 보였다. 토론자들은 하나같이 즐거움, 이완, 레크리에이션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었다.

 

아무도 그 행복한 날들을 인간이 더욱 발전하고 더욱 고귀하고 아름답게 되는데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실망했다. 그들은 모두 즐기고 시간을 '죽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축일들이 인간을 진보시키고 고귀하게 만드는 데 공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를 이해해 주길 바란다. 나는 일반인들과 다르다. 어쩌면 나는 기인일지 모른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일이든 축제든 우리의 모든 활동들은 진보, 진화라는 오로지 한 가지 목적, 한 가지 영적인 이상을 향해 집중되어야만 한다. 물론 일반인들이 하는대로 행동하는 것은 당신 자유이다. 당신은 여느 사람들처럼 놀고 즐길 수 있다. 그러나 지금처럼 정체되고 불안정하고 무기력한 노예, 희생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놀이와 여흥은 그것을 변화시킬 수 없다. 어째서인가? 거기에 이상이 결여돼 있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이것에 귀착한다! 나는 사람들에게 묻곤 한다. '당신의 이상은 무엇인가?' '잘 모르겠는데요.' 사람들이 이렇게 대답하면 나는 그들에게 말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운명의 노예요!' 사람들은 숭고한 이상, 완벽한 이상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큰 이익을 가져다 주는 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것은 삶에 의미를 주는 유일한 것이다.

 

1958년 9월 29일, 세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