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신과 나눈 이야기 1(1) 본문
신과 나눈 이야기 1.
신과 나눈 이야기 1(1)
book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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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봄, 내가 기억하기로는 부활절 무렵이었던 것 같다. 내 인생에서 아주 기이한 일이 일어났다. 신이 당신들과 이야기하기 시작한 것이다-나를 통해서!
사연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그 무렵 나는 사생활 면에서도 직업상으로도, 그리고 정서면에서도 몹시 불행했다. 내 인생은 모든 면에서 실패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오래 전부터 내 생각을 편지 형식으로 적는 습관을 갖고 있었기에(그걸 부친 적은 거의 없지만), 이 날도 친숙한 노란색 종이철을 집어들어 감정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전과는 달리 나를 괴롭히는 사람에게 편지를 쓸 것이 아니라, 내 모든 고통의 원천, 그 최대의 원흉과 직접 맞붙어 보기로 했다. 나는 신에게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건 원망스런 마음으로 마구 퍼부어댄 편지요, 혼란과 비틀린 심사와 비난으로 가득한 편지였다. 또한 그것은 한 무더기의 분노어린 질문들이었다.
왜 내 인생은 순탄하게 굴러가지 않는 겁니까? 잘 굴러가게 하려면 대체 뭐가 필요하단 말입니까? 어째서 나는 다른 사람들과 행복하고 즐거운 관계를 가질 수 없는 겁니까? 필요한 만큼의 돈을 만져보는 일 같은 건 내 평생 한번도 없을 거란 말입니까? 그리고 마지막이자 가장 힘주어 한 질문은 대체 내가 무슨 짓을 했길래 늘 이렇게 고통스런 삶을 살아야 한단 말입니까? 였다.
그런데 내가 그 누구도 대답해줄 수 없는, 쓰디쓴 이 마지막 질문을 휘갈기고 나서 펜을 내던지려 했을 때, 놀랍게도 보이지 않는 어떤 힘에 단단히 붙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내 손은 종이 위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펜이 저절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뭔가 더 써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도, 어떤 생각이 저절로 흘러나 오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흐름을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흘러나온 것은.......
너는 이 모든 질문에 대답받기를 참으로 원하느냐, 아니면 그냥 푸념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냐?
나는 놀라서 움찔했다....... 잠시 후 내 마음 속에 한 가지 대답이 떠올랐다. 나는 그것도 글로 적었다.
양쪽 다입니다. 나는 분명 푸념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들에 해답이 있다면 죽는 한이 있어도 꼭sure as hell 듣고 싶습니다!
너는 온갖 것들에 대해서....... “죽는 한이 있어도”라고 하는군. 하지만 기왕이면 “살아서 꼭sure as Heaven"이라고 하는 게 더 멋지지 않느냐?
그래서 나는,
그게 무슨 뜻인가요?라고 물었다.
미처 깨닫기도 전에 나는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나는 글을 쓰는 게 아니라 받아쓰기를 하고 있었다.
그 받아쓰기는 삼년간 계속되었는데, 그 당시에는 나는 그것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내가 종이에 적고 있던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은, 질문을 완전히 다 적고 나서 나 자신의 생각들을 떨쳐버리기 전에는 절대 내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받아 적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빨리 대답이 나오는 바람에, 그걸 쫓아가려고 마구 휘갈겨쓰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혼란스러워지거나, 그 말들이 어딘가 다른 데서 오는 것이라는 느낌을 놓칠 때면, 나는 펜을 놓고 대화에서 벗어났다가 다시 영감-이런 표현을 써서 미안하지만 그 상태에 가장 잘 들어맞는 말은 이것뿐이다-을 느꼈을 때, 비로소 노란 종이철 앞으로 돌아가 받아쓰기를 다시 시작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이런 대화는 계속되고 있다. 나는 처음엔 그걸 믿지 않았고, 그 다음엔 나 자신에게 퍽 의미있는 대화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그것이 나만을 위한 게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그것은 이 책을 만나는 당신들 모두를 위한 메시지다. 내 의문은 곧 당신들의 의문이기도 하니까.
여기서 참으로 중요한 건 내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들의 이야기이므로, 나는 당신들이 가능하면 한시바삐 이 대화에 뛰어들었으면 한다. 당신들을 여기로 데려온 건 바로 당신들의 인생체험이다. 이 책에 나오는 모든 내용은 당신들 저마다의 체험과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그렇지 않다면 당신들은 지금 이 대화에 참여하지도 않았으리라.
자, 이제 내가 아주 오랫동안 궁금하게 여겨왔던 한가지 의문, 즉 신은 누구에게, 어떻게 이야기하는가?라는 의문에서 시작하여 신과의 대화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내가 이 질문을 던졌을 때 받은 대답은 이러했다.
나는 모두에게 말하고 언제나 말한다. 문제는 내가 누구한테 말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내 말을 귀담아 듣는가이다.
의아해진 나는 그 문제를 더 자세히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신을 이렇게 말했다.
먼저 말한다talk를 교류한다communicate로 바꿔보자. 뒤의 것이 훨씬 낫고 훨씬 충실하며 더 정확한 말이다. 우리가 서로에게, 즉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내게 얘기하려 할 때 우리는 곧바로 말의 한계에 갇히고 만다. 이 때문에 나는 말만으로 교류하지 않는다. 사실 내가 말로 교류하는 일은 거의 없다. 내가 가장 자주 쓰는 교류 형식은 느낌이다.
느낌은 영혼의 언어다.
만일 네가 어떤 것을 놓고 무엇이 자신에게 참인지 알고자 한다면, 네가 그것을 어떻게 느끼는지 살펴보라.
느낌이란 건 알아차리기 어려울 때가 많다. 받아들이기가 훨씬 더 어려운 경우도 자주 있고. 그러나 네 가장 내밀한 느낌 속에 감춰진 것이야말로 네 가장 고귀한 진실이다.
비결은 그런 느낌들에 다가가는 것이다. 어떻게 하는지 보여주겠다. 물론 네가 원한다면 말이다.
나는 신에게 원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당장 원했던 것은 내 첫 번째 질문에 대한 좀 더 완벽하고 충실한 대답이었다. 그러자 신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생각으로도 교류한다. 생각과 느낌은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지만 같은 것은 아니다. 생각으로 교류할 때 나는 자주 영상을 사용한다. 그 때문에 교류 도구란 면에서 생각은 단순한 말보다 효과가 크다.
느낌과 생각 외에 나는 체험이라는 운송수단을 쓰기도 한다. 체험은 참으로 위대한 전달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느낌도 생각도 체험도 모조리 실패할 때, 나는 말을 쓴다. 사실 말은 가장 비효율적인 전달자이다. 말은 너무나 빈번하게 잘못된 해석이나 오해를 낳곤 한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말의 본질이 그렇기 때문이다. 말은 그저 입 밖에 내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 느낌과 생각과 체험을 드러내는 소리. 말은 상징이자 ‘기호’이고 ‘표식’이다. 말은 진리가 아니다. 말은 실체가 아니다.
너희가 뭔가를 이해하고자 할 때 말의 도움을 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너희에게 앎을 주는 것은 체험이다. 물론 너희가 체험할 수 없는 것들도 있다. 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앎의 다른 도구들도 주었다. 느낌과 생각이라는 도구들을.
그런데 여기서 최고의 역설은 너희가 ‘신의 말’은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체험은 아주 하찮게 여긴다는 점이다.
사실 너희는 체험을 너무나 하찮게 여기고 있어서, 체험한 신이 말로 들은 신과 다를 때 아무 생각 없이 체험을 버리고 말을 간직한다. 마땅히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데도.
너희가 어떤 것을 체험하고 느낀다는 것은, 그것을 사실로서 알고 직관으로 안다는 것을 뜻한다. 반면에 말이란 오직 너희가 아는 것을 상징할 수 있을 뿐이어서 종종 너희의 앎을 어지럽힌다.
자, 이런 것들이 내 교류 도구들이다. 하지만 이것들이 그 자체로 교류 방법인 것은 아니다. 모든 느낌과 모든 생각과 모든 체험과 모든 말이 다 나한테서 나오는 건 아니기에.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을 빌어 많은 말을 해왔고, 많은 생각과 많은 느낌이 내가 직접 창조하지 않은 근거들의 뒷받침을 받아왔으며, 많은 체험이 그런 근거들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도전은 통찰력으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다. 신에게서 나온 메시지와 다른 출처에서 나온 자료의 차이를 알기란 쉽지 않다. 그럴 때 다음과 같은 기본 원칙을 적용해보면 문제가 간단히 풀린다.
너희의 ‘가장 고귀한 생각’, ‘가장 명확한 말’, ‘가장 강렬한 느낌’은 항상 내 것이다. 그보다 덜한 모든 건 다른 출처에서 온 것이다.
초심자조차도 가장 고귀하고 가장 명확하고 가장 강렬한 것을 확인하기란 결코 어렵지 않을 것이다. 이제 구별하기는 쉬운 일이 된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다음과 같은 지침들도 주려 한다.
‘가장 고귀한 생각’이란 예외 없이 기쁨이 담겨 있는 생각이며, ‘가장 명확한 말’이란 진리를 담고 있는 말이며, ‘가장 강렬한 느낌’이란 너희가 사랑이라 부르는 바로 그 느낌이다.
기쁨과 진리와 사랑.
이 셋은 서로 뒤바뀔 수 있으며, 하나는 언제나 다른 것들을 가져다준다. 그것들이 어떤 순서로 놓여 있는가는 하등 중요하지 않다.
이 지침들을 가지고 어떤 메시지가 내 것이고 어떤 것이 다른 출처에서 온 것인지 결정하고 나면, 남은 단 하나의 문제는 내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이는가? 아닌가? 뿐이다.
너희는 내 메시지를 대부분 그냥 흘려버린다. 어떤 메시지들은 너무 훌륭해서 진짜 같아 보이지 않고, 또 어떤 메시지들은 너무 어려워 따를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유로, 많은 메시지들은 단순히 잘못 이해되기 때문에. 그리고 대다수 메시지는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에.
내 메시지의 가장 강력한 전달자는 체험이다. 하지만 너희는 체험조차 무시한다. 아니, 너희는 특히 이것을 무시한다.
만일 너희가 자신들의 체험에만 귀를 기울였더라도 너희 세상이 지금같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희가 체험을 거듭거듭 되풀이해서 겪게 되는 것은 체험에 귀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목적은 방해받지 않을 것이고 내 의지는 무시당하지 않을 것이기에, 너희는 늦든 빠르든 결국 그 메시지를 받아들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너희에게 강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결코 너희를 지배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너희가 선택한 대로 할 수 있는 힘, 자유의지를 주었고, 그것을 너희에게서 도로 빼앗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기에. 앞으로도 영원히 그런 일은 없을 것이기에.
그러므로 너희가 우주의 어느 구석에 있든 나는 몇천 몇만년을 두고 같은 메시지들을 너희에게 전하고 또 전하고 또 전할 것이다. 너희가 내 메시지들을 받아들일 때까지, 그것들을 가까이 두고 너희 자신의 것이라 말할 때까지, 나는 끝없이 보낼 것이다.
내 메시지들은 몇백만년에 걸쳐 몇천번의 순간에 몇백가지 형태로 올 것이다. 너희가 진실로 귀 기울인다면 그것들을 놓칠리 없을 것이며, 한번이라도 진실로 듣고 나면 그것들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우리의 교류는 가장 진지하게 시작될 것이다. 과거에 너희는 그저 나한테 이야기하거나 기도하거나 나를 중재하거나 내게 탄원하기만 했다. 그러나 한번이라도 진실로 듣고 나면 그때부터 나는 너희에게 답해줄 수 있다. 또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처럼 할 수도 있다.
이런 교류가 신에게서 왔다는 걸 제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이것이 내 멋대로의 상상이 아니라는 걸 어떻게 알 수 있냐구요?
그게 어떻게 다르단 말이냐? 너는 내가 다른 경우에도 그러하듯이, 네 상상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쉽게 일할 수 있다는 걸 모르겠는가? 나는 어느 때라도 한가지 혹은 여러 가지 장치를 써서 그 순간의 목표에 정확히 들어맞는, 그야말로 딱 부러진 생각이나 말, 느낌 따위를 네게 줄 것이다.
네가 이제까지 자신의 힘만으로 이렇게 명확하게 말한 적이 한번도 없으니, 이 말들이 나한테서 왔음을 알 것이다. 예전에 이미 네가 이 질문들에 이렇게 분명하게 답할 수 있었다면, 아마 너는 이것들을 묻지도 않았으리라.
신은 누구와 교류합니까? 특별한 사람들이 있습니까? 또 그렇게 하는 특별한 시기가 있는 겁니까?
모든 사람이 다 특별하고 모든 순간이 다 소중하다. 다른 사람보다 더 특별한 사람, 다른 때보다 더 특별한 때 같은 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신은 특별한 방법으로 특별한 사람들과만 교류한다고 믿는 쪽을 선택한다. 이런 선택으로 많은 사람들이 내 메시지를 들어야 하는 책임에서 벗어나고, 내 메시지를 훨씬 덜 받아들이며(이건 또 다른 문제이지만), 다른 누군가의 말을 전부라고 여긴다. 너희는 내게 귀 기울일 필요가 없게 된다. 이미 다른 사람들이 나한테서 온갖 주제들에 관해 듣고 있는 걸로 판단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들에게 귀 기울여 들어달라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내 말이라고 전하는 것에만 귀 기울이면 되므로 너희는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다.
많은 사람들이 개인 차원에서 내 메시지를 외면하는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만일 너희가 직접 내 메시지를 받고 있음을 인정한다면, 당연히 그것을 해석할 책임은 너희에게 떨어진다. 지금 이 순간에 너희가 충분히 잘 받아들일 수도 있는 메시지를 해석하려 애쓰기보다, 너희는 타인들(심지어 이천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해석을 받아들이는 쪽이 훨씬 더 안전하고 훨씬 더 편하다고 여긴다.
하지만 나는 신과 교류하는 새로운 형식으로 너를 초대한다. 그것은 양방향의 교류이다. 실제로 나를 초대한 건 너다. 왜냐하면 나는 네 부름에 답해서 지금 이 순간 이런 형식으로 네게 왔기에.
어떤 사람들, 예컨대 예수 같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당신의 메시지를 더 잘 듣는 것 같은데, 그건 왜 그런 겁니까?
그 사람들은 진실로 들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기꺼이 듣고자 하며, 두렵거나 미친 짓같아 보이거나, 완전히 잘못된 것처럼 여겨질 때조차도, 기꺼이 나와의 교류에 문을 열어놓고자 한다.
우리는 자기가 들은 게 틀린 것처럼 여겨질 때도 신에게 귀 기울여야 합니까?
틀린 것처럼 여겨질 때 특히 더 그래야 한다. 만일 너희가 매사에 자신이 옳다고만 여긴다면 신과 대화할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그냥 앞으로 나가면서 너희가 아는 바 그대로 행동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시간이 시작된 이래 너희가 줄창 해온 게 바로 그런 짓임을 잊지 마라. 그리고 이 세상이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 보라. 너희는 분명 뭔가를 놓쳐왔다. 너희가 이해하지 못하는 뭔가가 분명히 존재한다. 너희가 이해하는 것은 너희에게 옳게 여겨질 것이다. “옳다” 자체가 자신이 동의하는 어떤 것을 가리킬 때 너희가 쓰는 용어이니까. 그러므로 너희가 놓친 것은 처음에는 “틀린” 것으로 보일 것이다.
여기서 앞으로 나가는 단 하나의 방법은 자신에게, “내가 ‘틀렸다’고 생각한 모든 것이 사실은 ‘옳다’면 어떻게 되는가?” 물어보는 것이다. 위대한 과학자들은 누구나 이 방법을 잘 알고 있다. 하는 일이 순조롭지 않을 때 과학자는 기왕의 모든 가설들을 제쳐 두고 새로 시작한다. 모든 위대한 발견들은 틀렸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의지와 능력에서 비롯되었다. 여기서 필요한 건 바로 그런 의지와 능력이다.
너희는 자신들이 이미 신을 알고 있다고 중얼거리는 짓을 멈출 때까지는 신을 알 수 없다. 너희는 자신들이 이미 신의 이야기들을 들었다고 생각하는 짓을 멈출 때까지는 신의 말을 들을 수 없다.
나는 너희가 나한테 너희의 진리를 말하는 짓을 그만둘 때까지는 내 진리를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신에 관한 내 진리는 당신한테서 온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말했는가?
다른 사람들이요.
어떤 다른 사람들?
지도자들. 목사들. 랍비들. 사제들. 책들. 거기다 성서도요!
그런 것들은 믿을 만한 출처가 못된다.
그것들이 믿을 만한 출처가 아니라구요?
그렇다.
그럼 뭐가 믿을 만한 출처인가요?
네 느낌에 귀를 기울여라. ‘네 가장 고귀한 생각들’에 귀를 기울여라. 네 체험에 귀를 기울여라.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네 선생들이 말한 바나 네게 책에서 읽은 바와 다르다면, 말들 쪽을 잊어버려라. 말이란 건 가장 믿음직스럽지 못한 진리 조달업자이다.
당신한테 말하고 싶은 게 너무 많고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예컨대, 어째서 당신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죠? 진실로 신이 존재하고, 당신이 바로 그라면, 왜 당신은 우리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겁니까?
나는 수도 없이 되풀이해서 그렇게 해왔으며, 지금도 또 한번 그렇게 하고 있는 중이다.
그게 아니고, 반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확연한 드러남 말입니다.
예를 들면?
예컨대 바로 지금 제 눈 앞에 나타나는 식으로 말입니다.
바로 지금 나는 그렇게 하고 있다.
어디 계시는데요?
네가 바라보는 곳 어디에나.
아니, 나는 반박할 여지가 없는 방식을 말하는 겁니다.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방식말입니다.
그게 어떤 방식이어야 한다는 건가? 너는 나를 어떤 형상, 혹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게 하려는 거냐?
당신이 실제로 지니고 있는 형상이나 모습으로요.
나는 너희가 이해하는 어떤 형상이나 모습도 지니고 있지 않기에 그건 불가능하다. 내가 너희가 이해할 수 있는 형상이나 모습을 취할 수는 있으나, 그러면 누구나 하나같이 자기네가 본 것이 신의 많은 형상이나 모습들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형상이자 모습이라 여길 것이다.
사람들은 내가, 자기네가 보지 못하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자기네가 보는 대로의 존재인 줄 믿는다. 하지만 나는 어느 특정 순간에 화(化)한 무엇이 아니라, ‘위대한 보이지 않음’Great Unseen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아닌 것이 나다. 나는 없음am-notness에서 나오고 항상 그것으로 되돌아 간다.
그럼에도 내가 특정의 형상, 곧 사람들이 나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 여기는 형상으로 나타나면, 사람들은 나를 영원히 그 형상으로 규정한다.
그래서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다른 형상으로 나타나야 했다면, 앞서 나를 본 사람들은 이들에게, 나타난 것은 내가 아니라고 말한다. 자기네에게 나타났던 모습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고, 똑같은 것을 말하지도 않았으니, 어찌 그것이 나일 수 있겠냐고 말하면서 말이다.
이제 알겠느냐? 나 자신을 어떤 형상,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는가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어떤 방식을 택하고 어떤 형상을 하든 반박할 수 없는 경우는 결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자신의 정체를 의심할 여지없이 명백하게 입증해줄 행동을 한다면.......
.......그게 악마의 짓이라거나 그저 누군가의 상상일 뿐이라고 말할 사람들, 혹은 나 아닌 다른 어떤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만일 내가 나 자신을 ‘전능한 신’, ‘하늘과 땅의 왕’으로서 드러내고, 그것을 입증하려고 산을 옮긴다 해도, “그건 악마가 틀림없어”라고 말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또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은 외부 관찰이 아니라 내면 체험을 통해 신 자신에게 스스로를 드러내는 법이니까. 그리고 일단 내면 체험으로 신 자신이 드러나게 되면 외부 관찰은 필요하지 않다. 또 외부 관찰이 필요하다면 내면 체험은 가능하지 않고.
게다가 신 자신을 드러내라는 요구는 실현될 수 없다. 그런 요청 행동 자체가 곧 신이 그곳에 없다는, 즉 신의 어떤 것도 지금 드러나고 있지 않다는 진술이기에. 그런 진술은 그런 체험을 낳는다. 왜냐하면 어떤 것에 관한 너희의 생각은 창조력을 갖고 있고, 너희의 말은 생산력을 갖고 있으며, 너희의 생각과 말은 함께 어우러져 너희의 현실을 만들어내는 엄청난 힘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지금 신이 드러나지 않는 현실을 체험할 것이다. 신이 존재한다면 굳이 신의 존재를 청하지 않을 것이기에.
그 말씀은 원하는 어떤 것도 청할 수 없다는 뜻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실제로는 그것을 오히려 밀쳐낸다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것은 오랜 세월에 걸쳐 되풀이 되어 온 질문으로, 나는 이런 질문이 나올 때마다 항상 답해주었다. 하지만 너희는 내 대답을 듣거나, 믿으려 하지 않았다.
지금의 용어와 지금의 언어로 그 질문에 다시 답해주겠노라. 그건 이러하다.
너희는 너희가 청하는 걸 갖지 못할 것이며, 너희가 원하는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다. 너희의 요구 자체가 결핍에 관한 진술이며, 뭔가를 원한다want는 너희의 진술은 정확히 그런 체험, 곧 모자람wanting을 너희의 현실에 만들어내는 작용을 할 뿐이다.
그러므로 올바른 기도는 간청의 기도가 아니라 감사의 기도다.
너희가 현실에서 체험키로 선택한 것에 대해 미리 신에게 감사할 때, 사실상 너희는 그것이....... 실제로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다. 따라서 감사는 신에게 보내는 가장 강력한 진술,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대답해주는, 하나의 확약이다.
그러므로 결코 간청하지 마라. 감사하라.
하지만 만일 내가 뭔가를 기대하고 신에게 미리 감사를 드렸는데, 그게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면요? 그럴 경우 환멸과 쓰라린 심정에 사로잡힐 수도 있을텐데요.
감사를 신을 조종하는 도구, 우주를 기만하는 방책으로 써서는 안된다.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너희의 정신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의 진실을 알고 있다. 만일 너희의 지금 현실에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너무나 확실히 알면서도, “이렇게 저렇게 해주신 것에 신께 감사드립니다”고 말하고 있다면, 너희는 신이 너희보다 똑똑하지 못해서 너희에게 그것을 마련해주리라고 기대하는 것이냐?
신은 너희가 아는 것을 안다. 그리고 너희가 아는 것은 너희의 현실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음을 아는데, 어떻게 그것에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습니까?
믿음. 만일 너희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갖고 있다면 산도 옮길 것이다. 그것이 있다고 내가 말했기에,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대답해주리라고 내가 말했기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 너희가 이름을 댈 수 있는 모든 스승들을 통하여, 너희가 어떤 것을 선택하든 ‘내 이름’으로 선택한다면, 그것이 있게 되리라고 내가 너희에게 말했고 또 말해왔기에, 너희는 그것이 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네 기도에 아무 응답도 오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기도란 있는 그대로에 대한 열렬한 진술이다. 따라서 어떤 기도도 응답없이 지나가지 않는다. 모든 기도, 모든 생각, 모든 진술, 모든 느낌에는 창조하는 힘이 있다. 그 기도를 얼마나 열렬하게 진실로서 지니는가에 따라, 바로 그 정도에 따라, 그것은 너희의 체험 속에서 구체화될 것이다.
기도에 응답이 없었다고 할 때에도, 실제로는 가장 열렬하게 품고 있는 생각이나 말, 혹은 느낌이 작용한다. 하지만 너희가 알아두어야 할 건, 생각을 조종하는 것은 언제나 생각 뒤의 생각이란 점이다. 여기에 비밀이 있다. 이것을 ‘받침 생각’ Sponsoring Thought이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걸하거나 간청한다면 너희가 선택하는 것을 체험할 가능성은 훨씬 더 낮아진다. 그 모든 간청의 배후에 있는 ‘받침 생각’은, 자신은 지금 원하는 걸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기에, 그런 식의 받침 생각이 너희 현실이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뒤덮을 수 있는 단 하나의 받침 생각은 무엇을 요구하든지 간에 신은 틀림없이 들어줄 거라는 믿음을 가진 생각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믿음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 수는 아주 적다.
신이 모든 요구를 언제나 들어주리라고 믿어야 하는 게 아니라, 그런 요구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는 걸 직관으로 이해할 때 기도하기는 훨씬 수월해진다. 그럴 때 그 기도는 감사의 기도가 된다. 그것은 결코 요구가 아니다. 그것은 있는 그대로에 대한 감사의 진술이다.
기도가 있는 그대로에 대한 진술이라고 하실 때, 신인 당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며, 기도 뒤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그 기도가 만든 결과일 뿐이란 말씀입니까?
만일 너희가, 모든 기도를 듣고 어떤 기도들에게는 “그래”라고 하고, 다른 기도들에게는 “안돼”라고 하고, 그 나머지 기도들에게는 “어쩌면, 하지만 지금은 안돼”라고 말하는 어떤 전능한 존재를 신이라 믿는다면, 너희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신이 그런 주먹구구식 결정을 한단 말인가?
만일 신이 너희 삶의 모든 것을 창조하고 결정하는 존재라 믿는다면, 너희는 잘못 생각하고 있다.
신은 창조자가 아니라 관찰자다. 그리고 신은 너희가 삶을 살아갈 때 기꺼이 너희를 거들기 위해 옆에 서 있겠지만, 너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는 아니다.
너희 삶의 환경이나 조건을 만들거나 만들지 않는 건 신의 직분이 아니다. 신은 자신의 형상대로, 자신의 닮은꼴로 너희를 창조했다. 너희는 신이 너희에게 준 힘을 가지고 그 나머지를 창조했다. 신은 너희가 알다시피 생명의 과정과 생명 자체를 창조했다. 하지만 신은 너희에게 너희가 원하는 대로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자유선택권을 주었다.
이런 의미에서 자신에 대한 너희의 의지는 너희에 대한 신의 의지이기도 하다.
너희는 나름의 방식으로 너희의 삶을 살고 있으며, 나는 그것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
신이 너희가 하는 일에 여러모로 마음쓰리라는 생각은 너희가 빠져 있는 크나큰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말을 들으면 무척 서운하겠지만, 나는 너희가 뭘하든 마음쓰지 않는다. 하지만 너희라고 아이들을 밖에 나가 놀게 할 때 아이들이 뭘 하는지에 신경을 쓰는가? 그 애들이 술래잡기를 하든 숨박꼭질을 하든 흉내놀이를 하든, 너희에게 그것이 중요한 문제일까? 아니다. 아이들이 완벽하게 안전하다는 걸 너희가 이미 알고 있으니, 그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너희는 아이들을 편안하고 만사가 순조로워 보이는 환경 속에 놓아두었다.
물론 너희는 늘 애들이 다치지 않기를 바랄 것이다. 그리고 애들이 다친다면 당장에 달려가서 애들을 도와주고 치료해주며, 다시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고, 다음날 다시 나가 놀게 해줄 것이다. 하지만 이튿날에도 애들이 숨박꼭질을 택하든 흉내놀이를 택하든 너희는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너희는 애들한테 어떤 놀이가 위험한지 얘기해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애들이 위험한 짓을 하는 걸 막을 수는 없다. 항상 그렇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순간마다 다 그렇게 할 수는 없다. 현명한 부모는 이 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부모는 그 결과에 마음쓰는 것을 결코 그만두지 못한다. 과정에는 그다지 마음쓰지 않으나 결과에는 무척 마음쓰는 이같은 양면성이 신의 양면성을 설명할 때 비슷한 예가 된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보면 신은 결과에도 마음쓰지 않는다. 궁극의 결과에 대해서는, 궁극의 결과는 보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의 결과가 불확실하다는 생각은 인간들이 품고 있는 두 번째 크나큰 환상일 뿐이다.
너희의 가장 큰 적인 두려움을 낳는 것은 궁극의 결과에 대한 이같은 의심이다. 너희가 결과를 의심한다면 너희는 창조주, 즉 신을 의심해야 하고, 신을 의심한다면 너희는 평생동안 두려움과 죄책감 속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너희가 신의 의도와 이같은 궁극의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신의 능력을 의심한다면, 어떻게 한시라도 마음 편히 쉴 수 있겠는가? 어떻게 단 한번이라도 진실로 평화를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신은 의도대로 결과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한 능력을 갖고 있다. 하지만 너희는 이것을 믿지 못하거나 믿지 않으려 한다(너희가 신의 전능함을 주장한다 하더라도). 그리하여 너희는 신의 의지를 훼방놓을 방법을 찾아내려고, 신과 맞먹는 힘을 너희의 상상 속에서 창조해내야 했다. 이렇게 해서 “악마”라 부르는 존재가 너희의 신화 속에 탄생했다. 너희는 신이 이 존재와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상상까지 해왔다(신도 너희가 하는 식으로 문제를 풀 거라고 생각하면서). 마지막으로 너희는 신이 이 전쟁에서 실제로 질 수도 있다고 상상해왔다.
이 모든 것이 사실상 너희가 알고 있다고 여기는 신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것이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다. 문제는 너희가 환상 속에 살고 있으며, 그 때문에 두려움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신을 의심하겠다는 너희의 바로 그 결심 때문에.
그러나 네가 새로운 결정을 내린다면? 그러면 어떤 결과가 빚어질까?
내가 말해주겠다. 너는 부처처럼, 예수처럼, 그리고 너희가 일찍이 숭배했던 그 모든 성인들처럼 살게 될 것이다.
그러다 다수의 성인들에 대해 그러했듯이, 사람들은 너를 이해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평온함과 삶의 기쁨과 마음 속의 법열을 설명하려 들면, 그들은 네 말을 듣긴 하겠지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네 말을 따라하겠지만 거기에 덧붙이려 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네가 찾지 못한 걸 네가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해하다가, 이윽고 질투를 키워갈 것이다. 질투는 얼마안가 분노로 바뀌어, 그들은 화를 내면서 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쪽은 너라는 걸 네게 납득시키려 애쓸 것이다.
그리고 네가 느끼는 기쁨에서 너를 떼내지 못한다면, 그들은 크나큰 분노에 휩싸인 나머지 너를 해치려 들 것이다. 그리고 네가, 그래봤자 소용없다, 죽음조차도 네 기쁨을 방해할 수 없고 네 진실을 바꿀 수 없다고 하면, 그들은 분명 너를 죽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네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그 평온함을 보게 되면, 그들은 성자라 부르며 다시 너를 사랑할 것이다.
자기네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게 사람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죠? 우리는 왜 그렇게 하는 거죠?
인간의 모든 행동은 그 가장 깊은 단계에서는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 곧 두려움이나 사랑에서 시작된다. 사실 영혼의 언어 속에는 단 두 가지 감정, 단 두 마디 말만이 존재한다. 이 둘은 내가 우주와, 너희가 오늘날 알고 있는 바대로의 세상을 만들었을 때, 함께 창조했던 위대한 양극성의 두 극단이다.
이 둘은 너희가 “상대성”이라 부르는 체계가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두 극점, ‘알파’와 ‘오메가’이다. 이 두 극점이 없다면, 현상에 관한 이 두 개념이 없다면, 어떤 다른 개념도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쪽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밖에는 다른 어떤 행동 동기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밖의 모든 개념들은 이 둘의 파생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저 같은 주제의 변주들, 다른 꼬임들일 뿐이다.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너는 그게 사실임을 알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받침 생각’이라 부른 것이다. 받침 생각은 사랑이나 두려움에서 비롯된 생각이다. 이것은 생각 뒤의 뒤의 생각이다. 이것은 최초의 생각이며, 원초의 힘이고, 인간 체험의 엔진을 움직이는 생짜 에너지이다.
따라서 사람들의 행동이 거듭 반복체험을 하게 되는 것이 이런 사정 때문이며, 사람들이 사랑하다가 파괴하고 다시 사랑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이 감정에서 저 감정으로 늘 흔들린다. 사람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사랑을 낳고 사랑은 두려움을 낳고.......
........그리고 그 이유는 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첫 번째 거짓말, 너희가 신에 관한 진실이라 여기는 바로 그 거짓말에서 찾을 수 있다.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으며, 신은 너희를 조건부로 받아들이며, 따라서 궁극의 결과는 불확실하다는 그 첫 번째 거짓말에서. 너희가 항상 거기에 있는 신의 사랑에 기댈 수 없다면 대체 누구의 사랑에 기댈 수 있단 말인가? 너희가 제대로 해내지 않는다고 해서 신이 뒤로 물러나 움츠린다면 평범한 인간들이야 더 말할 나위도 없지 않겠느냐?
........그리하여 너희가 지고한 사랑을 맹세하는 바로 그 순간 너희는 가장 큰 두려움을 맞아들이게 된다.
왜냐하면 너희는 “사랑한다”고 말하자마자 과연 상대방이 그 말을 되돌려줄 것인지를 걱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 말을 되돌려받는다 해도 너희는 그 순간부터 이제 막 찾아낸 사랑을 잃게 될까봐 걱정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너희의 모든 행동이 상실에 맞선 방어라는 반작용이 된다. 심지어 너희는 신의 상실에 맞서 자신을 지키려 한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지Who You Are’(이하 ‘자신’으로도 번역-옮긴이) 안다면, 자신이 신이 창조한 가장 장대하고 가장 비범하고 가장 멋진 존재임을 안다면, 너희는 결코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그토록 경이로운 장대함을 그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그런 존재에게서는 신조차도 흠을 찾아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자신이 누군지 알지 못하며, 엄청나게 못난 존재로 생각한다. 그러면 너희는 자신이 그토록 못난 존재라는 생각을 어디에서 얻었을까? 온갖 것들에 대해서 너희에게 자신들의 의견을 전해준 유일한 사람들, 즉 너희의 어머니와 아버지에게서이다.
이들은 너희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어째서 그들이 거짓말을 한단 말인가? 그러나 그들은 너희에게 이건 지나치고 저건 부족하다는 식으로 말해오지 않았던가? 너희는 그들이 너희를 바라보긴 하지만 받아들여주지는 않는다는 걸 몇 번이나 느끼지 않았던가? 그들은 너희가 가장 충만감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에 종종 너희를 나무라곤 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그들은 너희 더없이 분방한 상상 중 얼만가를 무시해버리도록 유도하지 않았던가?
너희가 받아온 메시지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다. 이것들은 기준에 맞지도 않고, 따라서 신(God)에게서 나온 메시지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그 메시지들은 너희 세계의 신들(gods)에게서 나왔음이 너무나 명백하기 때문이다.
너희에게 사랑이 조건부라고 가르친 사람들은 너희 부모들이다. 너희는 그들이 내세우는 조건들을 숱하게 경험했다. 또 너희의 사랑하는 관계에서조차 이런 체험을 고려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도 너희 부모들이다.
그것은 또 너희가 내게 적용하는 체험이기도 하다.
이런 체험에서 너희는 나에 관한 결론을 이끌어내며, 이런 틀 속에서 너희는 너희의 진실을 이야기한다. “신은 사랑의 신이지. 하지만 우리가 그 분의 계명을 어긴다면 그 분은 우리를 영원히 추방하고 영원히 단죄하실 거야.”
너희는 너희 부모가 내린 추방을 체험했고, 그들이 내린 단죄의 고통을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그것과 다르리라고 너희가 상상할 수 있겠는가?
너희는 조건없이 사랑받는 게 어떤 건지 잊어버렸다. 너희는 신의 사랑을 체험했던 걸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하여 너희는 세상에서 보는 사랑의 모습에 따라 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상상해보려 애쓴다.
너희는 부모의 역할을 신에게 투사(投射)해왔기 때문에, 너희가 한 짓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심판한 다음, 상을 주거나 벌을 주는 신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것은 너희의 신화에 근거한, 지나치게 단순화된 신관(神觀)이다. 이것은 내 본질과는 아무 관계도 없다.
너희는 이렇게 영적 진리들이 아니라 인간의 체험에 근거한, 신에 관한 사유체계 전체를 만들어낸 뒤, 사랑을 둘러싼 실체 전체도 창조해냈다. 그것은 복수심에 불타는 무서운 신이라는 개념에 뿌리를 둔 실체이며, 두려움에 그 근거를 둔 실체이다. 그것의 받침 생각은 틀린 것이지만, 그런 생각을 부정한다면 너희의 신학 전체가 무너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신학을 대신할 새로운 신학이 참으로 너희를 구원해준다 할지라도, 너희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두렵지 않은 신, 심판하지 않는 신, 벌줄 이유가 없는 신이라는 개념은 그냥 너무나 근사해서, 신의 본질에 관한 너희의 어떤 거창한 관념으로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두려움에 근거한 사랑의 실체가 너희의 사랑 체험을 지배하고 있으며, 사실 그런 체험을 실제로 창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너희는 자신이 받는 사랑이 조건부라는 것도 알고 있으며, 나아가 자신이 같은 식으로 사랑을 주는 걸 경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가 자신의 조건들을 굳게 지키거나 물리거나 설정하는 동안에도, 너희의 한 부분은 이런 게 진짜 사랑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너희는 사랑을 펼치는 그런 방식을 바꾸기에는 무력하다고 느낀다. 너희는 자신에게 말한다. ‘이제까지 나는 확고한 사랑법을 배워왔다. 이제 또 다시 불안정한 상태로 되돌아간다면 나는 영원히 저주받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다. 불안정한 상태로 되돌아가지 않는다면 너희는 영원히 저주받을 것이다.
[사랑에 관한 너희의 (잘못된) 생각 때문에, 너희는 자신에게 끝내 순수한 사랑을 체험하지 못하리란 저주를 내리고 있으며, 또 그 때문에 참된 나(神)를 끝내 알지 못하리란 저주를 내리고 있다. 하지만 너희가 나를 영원히 거부할 수는 없을 것이기에, 우리가 화해하는 순간은 반드시 올 것이기에, 너희는 결국 순수한 사랑을 체험하고 내 참모습을 알게 될 것이다.]
단순히 인간관계와 관련된 것들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행동이 사랑이나 두려움, 어느 한쪽에 뿌리박고 있다. 상업과 산업, 정치, 종교, 2세 교육, 너희 국가들의 사회문제, 너희 사회의 경제 목표에 영향을 주는 결정들, 전쟁과 평화와 공격과 방어와 침략과 항복에 관련된 선택들, 즉 탐낼 것인지 양보할 것인지, 쌓아둘 것인지 분배할 것인지, 합칠 것인지 나눌 것인지에 대한 결정들-너희가 지금까지 내린 이 모든 자유로운 선택 중에서 존재할 수 있는 단 두가지 생각에서 나오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없다. 즉 사랑이라는 생각이나 두려움이라는 생각에서.
두려움은 움츠러들고 닫아걸고 조이고 달아나고 숨고 독점하고 해치는 에너지다.
사랑은 펼치고 활짝 열고 풀어주고 머무르고 드러내고 나누고 치유하는 에너지다.
두려움은 우리 몸을 옷으로 감싸나, 사랑은 우리가 발가벗고 설 수 있게 해준다. 두려움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틀어쥐고 집착하게 하나, 사랑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눠주게 한다. 두려움은 갑갑함을 지니나, 사랑은 정을 지닌다. 두려움은 움켜잡지만, 사랑은 보내준다. 두려움은 사무치게 하지만, 사랑은 달래준다. 두려움은 공격하지만, 사랑은 치유한다.
인간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이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하나에 근거하고 있다. 그 외에 다른 감정이란 없기에 너희에게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러나 이 둘 중 어느 쪽을 선택하느냐는 너희의 자유다.
당신은 아주 쉽게 말씀하시나 우리가 결정을 내리는 순간에는 두려움이 이기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건 왜입니까?
두려움 속에서 살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너희는 가장 잘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고, 가장 강한 자가 승리하며, 가장 영리한 자가 성공한다고 들어왔다. 너희는 지고한 사랑의 영광에 대해서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그리하여 너희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가장 잘 적응하고 가장 강하고 가장 영리한 사람이 되려고 발버둥치며, 어떤 상황이든 자신이 이에 못미치는 것처럼 여겨지면 잃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못미치는 건 곧 잃는 것이라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당연히 너희는 두려움에 뒷받침된 행동을 선택한다. 너희가 이제까지 배워온 게 바로 그런 것이기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가르치는 것은 이렇다. 너희가 사랑에 뒷받침된 행동을 선택할 때 너희는 생존 이상을 하게 될 것이고, 이기는 것 이상을 하게 될 것이며, 성공 이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럴 때 너희는 ‘자신이 참으로 누구인지’Who You Really Are(이하에서 ‘참된 자신’으로도 번역-옮긴이), 또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를 깨닫는 충만한 영광을 체험할 것이다.
이렇게 하려면 너희는 악의는 없으나 잘못 알고 있는 너희 속세 선생들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다른 원천에서 나온 지혜를 지닌 사람들의 가르침을 들어야 한다.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너희 중에도 그런 스승들은 많다. 너희에게 이런 진리들을 보여주고 가르치고 이끌어주고 깨우쳐주는 사람들 없이, 내가 너희를 그냥 버려두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러나 깨우쳐주는 자들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너희 외부에 있는 어떤 사람이 아니라 바로 너희 내면의 소리이다. 이것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어 내가 첫 번째로 사용하는 도구이다.
내면의 소리는 너희에게 가장 가까우니 내가 말하는 가장 큰 소리이다. 그것은 자기 외의 다른 모든 것들이 너희가 규정하는 식대로 참인지 거짓인지, 옳은지 그른지, 혹은 좋은지 나쁜지 말해주는 소리이다. 그 소리는 너희가 그냥 내버려두기만 하면 스스로 알아서 방향을 정하고, 배의 진로를 잡고, 여정을 이끌어주는 레이더이다.
그 소리는 너희가 읽고 있는 바로 그 말들이 사랑의 말인지 두려움의 말인지 당장 그 자리에서 이야기해준다. 너희는 그 이야기에 따라 그 말들을 유의해야 할지 무시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다.
당신은 내가 항상 사랑에 뒷받침된 행동을 선택한다면, 내가 누구고 어떤 존재가 될 수 있는지 깨닫는 충만한 영광을 체험할 거라고 하셨는데 이 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모든 삶에는 단 하나이 목적만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너희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충만한 영광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 밖에 너희가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들은 모두 이 기능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그 외에 너희의 영혼이 해야 하고, 너희 영혼이 하고 싶어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목적의 경이로움은 그것이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끝남은 일종의 한계인데, 신의 목적에는 그런 한계가 없다. 더없이 충만한 영광 속에서 자신을 체험하는 순간, 너희는 바로 그 자리에서 더 큰 영광이 실현되기를 꿈꿀 것이다. 체험이 깊어질수록 너희는 더 깊게 체험할 것이며, 깊게 체험할수록 너희의 체험은 깊어질 것이다.
거기에 내재된 가장 심원한 비밀은 삶이 발견의 과정이 아니라 창조의 과정이란 데 있다.
너희는 자신을 발견하고 있는 게 아니라 자신을 새롭게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누구인지’Who You Are찾아내려 애쓰지 말고 ‘자신이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지’Who You want to be(이하에서 ‘되고자 하는 자신’으로도 번역-옮긴이)판단하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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