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다석 유영모의 어록 자료 본문
얼나 (靈 道 法)
●우리 앞에는 영원한 생명인 얼(성령 정신)줄이 드리워져 있다. 이 우주에는 도(道)라 해도 좋고 법(法)이라 해도 좋은 얼줄이 영원히 드리워져 있다. 우리는 이 얼줄(하느님)을 버릴 수도 없고 떠날 수도 없다. 이 한 얼줄을 생각으로 찾아 잡고 좇아 살아야 한다. 이 얼의 줄, 정신의 줄, 영생의 줄, 말씀의 줄에 따라 살아가야 한다. (1956)
●이 사람은 10년 전에 이러한 말을 한 일이 있다. 자고서 남은 것이 깸이다. (睡餘覺).깬다는 것은 잠을 푹 잔 뒤에 깨는 것이다. 우리가 8시간 동안 잘 잔 뒤에 깨면 머리가 산뜻하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와서 참나인 얼나를 모르고 있는 동안은 잠을 자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얼나를 모르고 있는 동안은 잠자고 있는 것이다. 그 동안 몇 년이나 잠을 자고 있는데 잠자고 있는 동안은 자기가 잠자는 줄도 모르고 있다. 한잠 푹 잤으면 깨야 한다. 게으른 잠에 빠지면 안 된다. 얼나인 하느님이 참나임을 아는 것이 깨는 순간이다. (1956)
●사람의 몸뚱이라는 것은 벗어 버릴 허물 같은 옷이지 별 것 아니다.몸에 옷을 여러 겹 덧 입는데 몸뚱이가 옷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 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속옷·겉옷 아무리 겹겹이 입었더라도 벗어 버릴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옷은 마침내 벗어 버릴 것이라 결국 사람의 임자는 얼(靈)이다. 사람의 생명에서 불멸하는 것은 얼나뿐이다. 입은 옷이 아무리 화려하고 찬란해도 낡으면 벗어 던지게 된다. 그것이 비록 살(肉)옷이요 몸(身)옷이라도 늙으면 마침내 벗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드러나는 것은 얼나뿐이다. 얼나는 영원한 생명인 하느님이시다. (1956)
●시작해서 끝나는 것은 몸의 세계다. 그러나 상대를 끝맺고 시작하는 것은 얼의 세계다. 나서 죽는 것이 몸나이다. 몸나가 죽어서 사는 것이 얼나이다. 얼나는 제나(自我)가 죽고서 사는 삶이다. 말하자면 형이하 (形而下) 생명으로 죽고 형이상(形而上)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몸 나로 죽을때 얼나가드러난다. 그러므로 몸나의 인생을 단단히 결산을 하고 다시 얼나의 새 삶을 시작한다. 몸삶을 끝내고 얼삶을 시작한 얼 삶에는 끝이 없다. 그래서 얼나는 영원한 생명이다. (1956)
●대낮에 영원(하느님)과 사귀겠다는 것은 허영이다. 우리가 참되게 사는 것은 영원(하느님)과 통신할 수 있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한낮의 밝음은 우주의 신비와 영혼의 속삭임을 방해한다. 얼의 숨길은 밤에 잘 뚫린다. 잠 잘 때처럼 얼의 숨길이 잘 뚫릴 때가 없다. 낮에는 전혀 듣지 못하는 얼의 숨길을 밤에는 들을 수 있다. 그런데 낮에 허영에 취해서 날 뛰는 것도 모자라 밤에까지 연장하여 불야성(不夜城)을 만들고 있다. 이것은 점점 더 정신적으로 어두운 데로 들어가는 것이다. 영원(하느님)과 얼의 숨길이 끊어지기 때문이다.그것은 인생을 몰락시키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대낮보다 더 밝게 하는 빛은 얼의 빛이다. 저 천체(天體)의 빛은 참빛이 아니다.
우리가 우주의 영원한 소식을 받아들이고 얼의 숨길로 들어가는 것이 우로 올라가는 길이다. 이 세상 밝은 날에 오래 사는 것이 좋은 줄만 알고 있다가 참으로 하느님께서 보내시는 얼소식을 알고 보면 이 세상에서 사는 몸삶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참으로 영원한 얼나라 그곳으로 가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난다.
대낮처럼 밝은 게 한없이 좋긴 하지만 그 대신 잊어버리는 것이 많게 된다. 더구나 굉장한 것을 잊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영원(하느님)과의 생활 곧 얼의 숨길을 잊어버린다. 사람들은 낮을 좋아하고 밤에는 쉬는 줄 알고 있기 때문에 밤에 저 깜박이는 별들이 영원(하느님)과 속삭이는 것을 모르고 있다. 하느님은 영원이요, 무한이요, 절대요, 영혼이다. 천문학자에게는 낮이란 별로 가치가 없다. 우주의 신비를 캐려는 사람에게는 어떻게 하면 저 태양을 가릴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저 별들의 눈빛이 영원(하느님)과의 속삭임을 더 많이 듣고 알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리하여 영원(하느님)과 늘 같이 하고 싶은데 낮이 있으므로 낮에는 하느님과의 통신이 끊어지게 된다. (1956)
●학문의 시작은 자각(自覺)부터다. 자각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학문이 많다고 해도 그것은 노예에 불과하다. 우선 남을 보기 전에 나를 보아야 한다. 거울을 들고 나를 보아야 한다. 거울이 옛날부터 내려오는 말씀이다. 경(鏡)이 경(經)이다. 이 거울 속에 참나(얼나)가 있다. 말씀이 바로 참나(얼나)이다. 가온찍기(「.」)이다. 말씀을 풀어보는 동안에 붙잡히는 것이 진리인 이치요 참나인 정신이다. 우리가 할 것은 가온찍 기밖에 없다. 점을 찍는 것은 생각 속에 말씀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느님의 생명인 얼나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세상에 많은 사람이 참나(얼 나)를 무시한 채로 살아가고 있다. 참으로 기막히는 일이다. 이 세상에 서 참나처럼 값비싼 것이 없는데 이를 무시하고 덧없이 살고 있다. (1956)
●참나는 없이 있는 하나의 긋(점)이요 찰나다. '나'라 하는 순간 이미 나는 아니다. 참나는 없이 있는 나다. 그런 나만이 참나라고 할 수 있다. 빛보다 빠른 나만이 참나다. 날마다 새롭고 새로운 나만이 참나다. 참나는 말씀의 나요 성령의 나다. (1956)
●사람은 몸나로만 살다가 참나로 바뀐다. 감정의 맘나로 살다가 참을 생각하는 정신으로 바뀐다. 참을 생각하는 정신에서 제나(自我)가 없는 얼나가 된다. 이것이 사람이 걸어가야 할 인생길이다. 봄이 여름으로 바뀌고 여름이 가을로 바뀌고 가을이 겨울로 바뀌는 것이 자연이다.하늘 땅 펼친 자리에 계속 바뀌어 가는 것이 자연이요 인생이다. 이러한 발전과 변화의 대법칙을 따라 세상에 나타난 하나의 현실이 된 것이 나다. 내가 해야 할 사명을 받아 나의 할 일을 하는 것이 나다. (1956)
●은하 우주도 수레처럼 움직여 돈다. 상대세계에서는 움직이지 않는 정(靜)이란 없다.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있다면 수레의 축(軸)일 것이다.그러나 축이 참으로 있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축이란 한 긋(點)이다.움직이는 상대 세계에서는 머무르고 싶어도 머무를 수 없는 무주(無注)이다. 이 상대세계에 축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얼나(靈我)이다. 하느님이 보내신 하느님의 생명이라 얼나는 없는 곳이 없는 절대(絶對)이다. 그러므로 갈 곳이 없고 올 곳이 없다. 따라서 머무를 곳도 없다. (無去無來亦無住)(195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 14:6-개역성경) 하느님이 주신 얼나가 길이 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는 하느님이 예수의 마음속에 보낸 얼나가 예수 자신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임을 깨달은 것이다. 예수는 참나(얼 나)와 길, 참나와 진리, 참나와 생명이 둘이 아닌 것을 깨달았던 것이 다. 참나(얼나)를 길(道)로 표현한 이가 노자(老子)요, 참나(얼나)를 진리로 표현한 이가 석가요, 참나(얼나)를 생명으로 표현한 이가 예수다. (1956)
●우리가 사는 것을 사람으로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으로 산 다고 말하면 잘못하는 말이 된다. 나는 정신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침내 궁신지화(窮神知化)에 이르러 하느님이 주시는 얼나로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아버지와 나(얼나)는 하나이다" (요한 10:30)에 이른다. (1956)
●나의 속나(얼나)는 참(하느님)의 끄트머리다. 사람들이 나(얼나)가 무엇의 끝인지를 잘 알지 못한다. 그리고는 이 세상의 처음(머리)이 되려고 야단들이다. 그러나 처음(머리)은 하느님뿐이다. 나는 하느님의 제일 끄트머리의 한 긋(점)이다. 우리가 참을 찾는 것도 하느님의 끄트머리인 이 긋(얼나)을 찾자는 것이다. 참이란 이 긋이요, 이 긋이 참이다. 이 긋은 속나요 참나요 얼나이다. 이 긋(얼나, 절대)에서 처음도 찾고 마침도 찾아야 한다. 영원한 하늘과 무한한 땅과 신비한 생명이 하나가 된 것이 이 긋(얼나)이다. 이 긋은 우주에 켜진 하나의 불꽃이다. (1956)
●자꾸 바뀌(變易)고 자꾸 사귀(交易)고 그 가운데 바뀌지 않는 불역(不易)을 가져야 한다. 바뀌는 것은 상대세계요 바뀌지 않는 것은 절대세계다.바뀌는 것은 겉나(몸나)요 바뀌지 않는 것은 속나(얼나)이다. 절대세계는 상대세계를 내포하기 때문에 바뀌면서도 바뀌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바뀌는 겉나(몸)에서 바뀌지 않는 속나(얼나)로 솟나면 무상(無常)한 세상을 한결같이 여상(如常)하게 살 수 있다. 나는 무상한 세상을 여상하게 살 수 있는 평상항(平常恒)이다. 참사(眞人)은 제 속에 긋(點, 얼나)을 가지고 있다. 몸은 죽어도 죽지 않는 영원(하느님)과 이어진 긋을 지니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생각을 지니고 정신을 가지고 있으며 속알을 가지고 얼나를 가지고 있다. (1956)
●비행기가 활주로를 굴러 가다가 날아 오르듯이 사람은 생각으로 추(推理)하다가 초월하게 된다. 그리하여 영원한 세계(하느님 나라의 나라)로 직입(直入)하여 직관(直觀)하게 된다. 그런데 초월해서 들어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제 속으로 자기의 뿌리 밑둥을 제가 파고 들어간다. 아버지가 따로 계시지 않는다. 하느님의 소자(小子)되는 얼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사람이 상대세계에 빠져 버리면 앎(知)이 굳어져 버리고 만다. 절대세계를 놓치고 아무 것도 모르면서 무엇이든지 다 아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하여 완고하고 교만해져 자기를 제일로 알게 되는 어리석은 생각에 빠진다. (1956)
●불교에서는 평생 몇 가지 일을 해보겠다고 하여 해를 등지고 제 그림자를 딛고 가는 일을 한다. 앞에 있는 그림자를 어떻게든지 밟아 볼까 하는 그따위 생각을 한다. 약은 사람은 그것을 보고 그러한 어리석은 일이 어디 있느냐고 한다. 제 그림자를 제가 밟겠다는 어리석은 놈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것이 괜찮을 때가 있다. 몇십 년 이렇게 의심 한 끝에 가서는 무슨 생각을 얻는 것이 있다. 상식이 풍부하여 약은 사람은 이러한 의심을 안 낸다. 소위 불교의 참선공념(空念)이 다 그따위 일이다. 어리석은 일에 자꾸 의심을 낸다. 참으로 의심을 하고 알려면 어리석은 편이 낫다. 상식이 있어 약으면 제 그림자를 밟겠다고 하겠는가?알아야 진리다. 알아본다는 것이 진리이다.하느님을 알려는 나가 진리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얼나가 하느님을 찾아 알려고 하는 것이다. (19i6)
●몸살림은 겨우겨우 살면 되지 더 바라지 않는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저 몸 성하기를 바란다. 몸이 성하면 다른 것은 바랄 것이 없다.다음으로 바랄 것이 있다면 마음 놓이다. 하느님의 성령인 진리의 나(얼나)를 담기 위하여 마음을 비우는 것이다. 마음 놓이면 더 바라지 않는다. 하나 더 붙인다면 바탈을 이루는 것이다. 맘속 깊이 들어가면 하느님을 닮은 영성(靈性)의 얼나가 있다. 이 얼나를 온전히 들어내는 것을 도교에서는 성성 (成性)이라 하고 유교에서는 양성 (養性)이라 한다.
몸 성히(健康) 맘 놓이(放心) 바탈 이뤄(成性) 이렇게 세 가지를 가지고 줄곧 우(하느님)로 오르고자 한다. 어떠한 신앙을 갖겠다고 하는 것은 기독교 유교·불교 어느 것을 믿거나 그것은 각자의 할 탓이다.신앙과 정신은 자유이기에 나로서 무어라 말하지 않는다. 어느 종교를 믿거나 몸은 성해야 하고 맘은 놓여야 하고 바탈을 이뤄야 한다.
●얼을 드러내는 골짜기가 얼굴이다. 누구나 얼굴을 쳐들고 다니는 것을 보면 아마 얼굴만이 영원 생명인 얼이 드러날 것이라는 상징인지 모르겠다. 얼굴만은 누구나 번듯하게 드러내 놓고 보이려 함은 그것이 몸보다 훨씬 중요한 마음이 드러나서 그런가 보다. 몸은 옷이요 얼이 임자다. 몸 위에 얼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얼 밑에 몸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얼이 임자요 몸은 딸림이다. (1956)
●사람은 이름을 자기로 아는 사람도 있다. 명예에 취하여 체면을 지키다가 거짓말을 하고 속 빈 겨껍질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이름이란 남이 부르기 위하여 붙여 놓은 것이며 내 이름 류영모(柳永模)도 이름에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름이란 마치 감옥에서 죄수에게 붙여준 죄수 번호와 같은 것이다. 이름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가 감옥 속에 갇힌 죄수라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이름이란 수치지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이름 없는 얼나가 나의 본바탕이다. 나란 영원한 생명(큰얼 하느님)이 폭발하여 나타나는 참나(얼나)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긋(얼나) 찾아 자각한 인생은 이름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진리인 얼나(靈我)에 무슨 이름이 붙을 리가 없다. 얼나는 하느님의 생명인 얼(성령)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만나면 이름 석 자를 외우느라고 애쓰지만 영원한 입장에서 보면 어리석은 일이다. 세상에는 살아서 죄수의 번호인 이름에 잡혀서 사는 사람도 가엾지만 죽어서까지 이 번호(이름)를 영원히 간직하기 위하여 돌에 새겨두는 것은 한심한 일이다. 명함을 돌장으로 바꾸어 두지만 그것도 얼마 못 가서 부서진다. 영원한 것은 참나인 얼나뿐이다. 얼나는 영원자(하느님)의 아들이다. 내 속에 그 얼나가 와 있다. 얼나가 드러나는 것이 덕성(德性)이요 신성(神性)의 인격이다. 내 마음속에 온 하느님 아버지의 형상(얼나)이다. (1956)
●영원한 생명(얼나)은 고정할 수가 없다. 고정하면 죽는다. 발전해 가는 것에 이름이 있을 수 없다. 이름은 고정된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나(얼나)는 이름이 있을 수 없다. 이름을 붙이면 그것은 나가 아니다. 벌써 다른 것으로 바뀐다. 큰얼(大靈)이신 하느님은 본래 이름이 없다. 하느님에게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하느님에게 이름을 붙이면 이미 하느님이 아니요 우상이 되어버린다. 참나(얼나)도 이름을 붙일 수 없다. 이름을 붙이면 벌써 참나(얼나)는 아니요 허수아비가 된다. 이름을 좋아하는 사람은 허수아비를 좋아하는 도깨비장난이다.서로 이름이라는 가면을 쓰고 가면극을 벌리고 있는 것이 이 세상이다. (1956)
●제나(自我)의 마음은 제나가 내서는(부려서는) 안 되고 얼나(靈我)가 다스려서 내어야(부려야) 한다. 몸의 욕망에 끌려서 마음을 내면 견물생심(見物生心)의 탐욕이 된다. 몸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죄악이다. 무슨 맛을 그리워하는 것은 못쓴다. 무엇을 즘 갖겠다든지 좋은 소식을 즘 듣겠다고 하는 것은 실제 마음이 거기에 머뭇거리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런 생각은 하나의 우상이니 삼가야 한다. 희로애락(喜努哀樂)에 허우적이는 제나(自我)를 초극(超克)해야 한다. 무위(無位),무주(無住)의 얼나만이 제나의 희로애락을 조화시킬 수 있다. 그것이 중용(中庸)에서 말하는 중화(中和)의 길이다. 얼나가 제나를 절제(節制)하여 다스리는 중화(中和)의 길이 바르게 사는 길이다. (1956)
●10년을 하루같이 지내는 그 사람하고 나하고는 친형제보다 낫다고 말하기도 한다. 남녀가 사랑하게 되어 부부가 되면 두 몸이 아니라 한 몸같이 되었다고 한다. 하나라지만 실제로 얼마만큼 하나같이 된 것인지 멀정한 거짓말이다. 그런 말은 스스로를 속이는 일이다. 참으로 하나가 되는데는 생명 밑(근원)인 얼(성령)이 터지는 생명문제가 여기에 들어간다. 참으로 두 사람이 하나같이 되려면 두 사람 모두가 제나에서 얼나로 거듭나야 한다. 영원한 생명인 얼나에는 너와 나라는 나눔이 없다. 얼나는 너와 나가 없는 공통의 한 생명인 것이다. 얼나로 하나가 되면 부르고 대답할 필요도 없다. 거기서 이견(異見)이 나을 리가 없다.
● 참을 안다는 것은 하느님과 얼로 교통이 되어서 아는 것이다. 하느님과 얼(성령)로 통하는 점이 있어야 올바르게 발달이 된다. 꼭 무슨 신앙이 아니더라도 자꾸 하느님과 통해야 일이 된다. 성경에도 자연에 는 성령이 충만하다고 이른 것이 있다. 동양에서 기상천외(奇想天外)라는 말이 있다. 하느님께 일러주는 것을 아는 것이 발전하는 것이다. (1956)
●묵은 맥 덩어리에 핀 곰팡이 한 알갱이 같은 나라는 존재인데 내 속에 으뜸인 하나(절대)에서 나온 이상한 것, 바른 것, 근본(根本)인 것이 하나 있는데 이는 하느님 씨(얼나)다. 이것을 인식하려고 하는 것이 삶의 지상 목표이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이 하느님의 씨(얼나)를 싹틔운 사람이라고는 몇 안 된다. 얼나의 씨를 싹틔운 사람을 이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다. 이 세상에 몇 천 년의 역사가 흘렀어도 얼나의 씨가 싹튼 사람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최후의 승리를 한다는 이것이 아직 그 참 뜻이 어디에 있는지 모른 채 멸망할 제나(自我)만을 바라보는 이러한 세상에 싹튼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사람들의 얼씨가 싹트고 안 트고는 별 문제로 하고 이 사람도 싹이 텃는지 안 텃는지 모르겠다. 싹이 트는지도 모르는 가운데 정신적인 살림이 구차하나 이렇게 사는 것을 나는 자랑하고 싶다. 언제나 마음이 평안하다. 옆에 사람들은 알 수 없겠지만 하느님의 씨가 마음속에서 싹이 트는 척만 해도 기쁘기 그지없는데 얼싹이 터서 자라난 사람은 얼마나 좋을 것인가? 얼싹이 튼 사람으로 온 세상이 가득찬다면 이 세상이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1956)
●누에는 애벌레, 고치, 나비로 탈바꿈의 변형을 한다. 죽음을 고치로 보면 이제 나비가 되어 날기 위해서 고치가 되는 것이다. 죽음이란 나비가 되기 위한 준비다. 그러므로 죽어야 한다. 얼의 자유를 위해 몸은 죽어야 한다. 몸의 죽음이 없으면 얼의 자유도 없다. 거짓나인 몸이 부정될 때 참나인 얼나를 깨닫
'마스터와 가르침 > 다석'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혼의리더 씨알사상연구소 (0) | 2018.01.24 |
---|---|
씨알사상 지상중계 ④우주와 종교-박재순(씨알사상연구소장·목사) (0) | 2018.01.24 |
인성교육 의무화를 앞두고 최근 창간된 인터넷신문 ‘인성교육' (0) | 2018.01.24 |
다석의 천지인 명상법 (0) | 2018.01.24 |
유영모와 함석헌,그리고 한민족의 하나님 신앙 (0) | 2018.01.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