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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고요하라 그리고 알라 내가 하나님임을 본문

배움과 깨달음/숨터일지

고요하라 그리고 알라 내가 하나님임을

柏道 2024. 6. 18. 04:39

너희는 잠잠하라

 

"너희는 잠잠하라!

내가 하나님인 것을 알라"

(시 46: 10, 현대인의 성경)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시편 46편 10)

 

Be still and know I AM God

고요해져라! 그리고 내가 신임을 알라.

 

■ -잠잠함을 통해 사람은 진리를

참으로 알 수 있습니다.

■ 고요함, -침묵을 통해 자신의 본질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 가만히 있음,-명상을 통해서 

신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신학을 배우고

사경회로 성경 지식을 쌓고  

예배로써 교리와 지식을 더하는 

방법과 같은 ■에고의  노력으로는

신을 제대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모든 지식을 다 안다고 해도

모든 능력을 다 행한다 해도

에고는 에고고 육은 육일 뿐입니다.

 

영은  생각이 아니며, 

마음이나 믿음이나 지식도 아니기에  

교육과 지식으로 생겨난 믿음은

수박 겉핥기식의  추측, 환영, 망상에 

가까운 빗나간 열성과 고집일 뿐,

진정한  의미로써

영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일은 (육적인 방법으로는 알 수 없고)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고전 2:13)

 

조셉베너는 아래 영상에서

 비교적 쉽게 영을 설명합니다.

https://youtu.be/dPO5q88ALVk

유튜브 검색어 "내 안의 나(조셉베너)"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한 사람 안에 이미 존재하는

두개의  각기 다른 면과 같습니다.

동전은 같은 성질인데 반해

영과 육의  양면은

각기 전혀 다른 두개의 성질이고

전혀 다른 두개의  인식입니다.

육이 에고 의식이라면

영은 순수 의식(영)입니다.

 

에고의식(육)은 언제나 

신과 자신을 분리하여 타자화합니다.

고대인들은 타자화된 신을 믿고 경배합니다.

미개한 고대 종교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인식의 오류위에 교리의 뼈대가 건설된 거죠.

 

타인과 나를 분리함으로써

분리된 개체로써 자신을 인식하지만,

순수의식(영)은 예수님의 인식과 같습니다.

아버지와 예수님 자신을 하나로 인식합니다.

영은  아버지와 예수님, 즉 신과 나를 여럿이

아닌 하나로 인식합니다. 에고의 믿음으로는

죽었다 깨나도 이것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요한14:10)

 

요한복음 17장

"21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22절.  우리가 하나가 된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하나로 인식되는 차원이 있습니다.

육은ㅡ 성경을 지식으로 배우고

어떤 교리적 체계로써

믿음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육은 늘 언제나 -분리하고 나누려고 하는

에고의 한계 안에 갇혀 있습니다. 

그 한계는 영적 실재와는 딴 판입니다.

 

깨닫지 못한 자들이

열성으로 움켜쥐고, 믿고 있는 것은(=진리)

사람들과 종교들을 갈갈이 찢어놓은 환영입니다.

항상 분리하는 일이며 차별하는 것입니다. 

늘 나누는 작업이고  다름을 강화하는 것입니다.

믿는 자와 안믿는자를 나누고 기독교와 타종교,

정통과 이단을 나누고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우파와 좌파로 나누어 상대와 대립합니다.

그러므로 항상 대립합니다. 시위, 유세,

다툼과 분쟁. 말싸움, 전쟁 상태입니다.

에고의 믿음과 신앙이란 눈에 쌍심지를 키고

늘 판단하고, 늘 배척하고, 늘 싸우는 것입니다.

 

에고의 믿음이란, 

좋으면 좋을 수록, 더 열성당원이 됩니다.

좌우 이념전쟁,  종교차별 교리전쟁, 사람차별,

분리분파, 자기 주장, 자기 의로움으로 용암끓듯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마음 상태가 그들에게는

훌륭한 믿음이요, 믿음의 증거인 셈입니다

이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현상입니다.

 

 영은 이와 정반대입니다.

에고의 광적인 질주를 멈출 때,

사울의 열성적인 신앙,신념을 멈출 때,

에고를 강화하는 종교적인 자기 의와

열심과 충성,  분주함을 다 내려놓을 때, 

에고가 침묵하고 고요하며 잠잠할 때

그제서야 비로소 드러나는  것입니다.

영은 에고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에고로서 알 수 있는 성질이 아닙니다.

에고와는 완전히 다른 인식이기 때문입니다.

 

에고가 생각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을

보는 것이며 깨딛고 자각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하나이라고 하시듯,

내가 신과 하나임을 자각하는 것이고

깨닫는 것이며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체험적 깨달음 없다면

지적으로 받아들이기는 불가능한

전혀 생소한 하나의 차원이 됩니다

 

에고의 측면이 늘 파도(생각 감정으)로

쉴새없이 재잘대고(믿음의 합리화. 변호함. 주장함)

늘 변하며 요동치는  바다의 표면과 같다면,

영의  측면은 깊고 광대한 

바다 속의 고요함과 같습니다.

말 많음이 아닌 말 없음이 그 특징입니다.

가짜는 화려하고 번지르르하고 눈부시지만

진짜는 흠모할 만한  것이 없고 소박합니다.

 

에고는 항상 촐싹대며 시끄럽지만

영은 깊고 조용하게 움직이는 평화요.

사랑이요, 순수의식=신의식입니다.

 

그래서 목사든 신학자든 누구든지

신, 순수의식을 깨닫지 못한 채,

나는 신학으로 신을 잘안다. 진리를 본다

스스로 자고하여 자만으로 큰소리친다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한복음 9장 41절의 말씀이 그에게

응하게 되는 불상사가 일어납니다. 

지식으로 접근하는 많은 사람들이

영에 대해, 신에 대해, 진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스스로 잘 안다고 착각합니다.

 

스스로 "모른다" 는 입장을 견지한다면 

죄가 없겠지만,  더 나아가 고요속에서

깨달을 수 있는 기회라도 있겠지만...

"나는 이미 진리도 신도 잘 알고 있다,"

나는 본다고 하는, 자만심으로 꽉 차 있다면

참된 진리, 진정한 신, 나의 본질을

깨달을 수가 없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ㅡ예수 그리스도의 향기ㅡ

 

"생각의 파도가 멈출 때 비로소 완벽한

합일의 상태에 들어간다"
-파탄잘리-

 

"고요함은 신의 불멸이 당신의 내면에서

살아 숨쉬는 것이다"
-파라마한사 요가난다-

 

고요함이란?

생각의 파도를 멈추는 것이다.

-柏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