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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신심명 38 욕취일승(欲趣一乘) 물오육진(勿惡六塵) 본문

영성수행 비전/신심명(信心銘)

신심명 38 욕취일승(欲趣一乘) 물오육진(勿惡六塵)

柏道 2023. 10. 2. 22:31

38 욕취일승(欲趣一乘) 물오육진(勿惡六塵)

    일승으로 나아가고자 하려거든 육진을 미워하지 말라.  

 

‘일승(一乘)으로 나가고자 한다면, 육진(六塵)을 싫어하지 말라.’고 한 일승(一乘)은 하나의 수레를 타고 성불(成佛)한 부처라는 뜻으로 일불승(一佛乘)이라고도 한다.

부처님께서 정각(正覺)을 이루신 후 제자들의 근기에 따라 지도하셨는데 제자들 중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사람들을 후에 성문승(聲聞乘)이라 부르고, 참선수행을 통해 깨달은 사람들을 연각승(緣覺乘), 보살행을 통해 깨달은 사람들을 보살승(菩薩乘)이라 부르게 되었다. 수행승들 중에 보살승이 성문승이나 연각승보다 상위(上位)에 있다는 주장이 나오게 되자 삼승(三乘)간에 갈등이 일어나는 현상이 생겼다. 이 때 부처님께서 수행 방법에 따라 다른 부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경로를 통해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깨달음을 얻은 부처는 한 가지 밖에 없다고 하신 법문이 일불승(一佛乘)이다. 산정(山頂)에 오르는 데는 여러 가지 경로가 있으나, 어떠한 경로를 통해 산정에 올라갔어도, 산정에 오른 사람이 볼 수 있는 시야(視野)에는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여 삼승(三乘)의 평등성을 말씀하신 동시에 어느 승(乘)이 어느 승(乘)보다 상위(上位)라고 생각하고 집착하는 그 자체가 산정(山頂)에 오르기는 요원하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라고 하신 것으로 이해된다. 말하자면 삼승(三乘)론을 세워 편을 가르는 것은 깨닫지 못한 사람들의 행위라고 보는 것이고, 깨달은 사람들의 입에서는 그런 말이 나올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육진(六塵)이라함은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대상인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인데, 이를 싫어하지 말라고 했다. 싫어하지 말라는 말씀은 첫째, 육진의 경계에 대해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심을 갖지 말라는 말씀이고 둘째, 내 마음과 육진 경계와의 관계를 별개로 두지 말라는 말씀이다. 즉 내 마음과 경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경계와 더불어 있고, 경계가 내 마음과 더불어 있으니 경계가 곧 내 마음이고, 내 마음이 곧 경계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볼 수 있는 사람은 색성향미촉법이 곧 부처님의 몸이고, 소리고, 맛이라고 볼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대상을 부처님의 몸이요, 말씀이요, 맛이라고 볼 수 있을 때 그 대상이 곧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고, 법신(法身)이며, 향과 꽃으로 장엄된 화장세계(華藏世界)라고 보는 마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을 곧 유심정토(唯心淨土)라고 하는데, 이 세계, 이 우주가 정토(淨土)인 것은 오직 내 마음에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사람은 특별히 싫어하는 사람, 싫어하는 물건, 싫어하는 음식이 없다. 오직 일체에 있는 그대로 감사하고 수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에는 항상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있고, 옳고 그른 것이 있으며, 하고 싶은 일과 하기 싫어하는 일이 있게 마련이니 과연 어떠한 수행이 육진(六塵),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 등 어떠한 것도 싫어하는 마음이 없을 수 있을까?

위 게송 ‘29) 일공동량(一空同兩) 제함만상(齊含萬象) 하나의 공은 양단과 같아서 삼라만상을 똑같이 다 포함한다.’고 하였는데 양단이 공한 깨달음의 지혜와 자비심(慈悲心)으로 만상을 볼 때 물오육진(勿惡六塵)과 제함만상(齊含萬象)이 가능하게 된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