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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심명 18 수유반조(須臾返照) 승각전공(勝脚前空) 본문

영성수행 비전/신심명(信心銘)

신심명 18 수유반조(須臾返照) 승각전공(勝脚前空)

柏道 2023. 10. 1. 10:16

 18 수유반조(須臾返照) 승각전공(勝脚前空)

    잠깐 사이에 돌이켜 비춰 봐도 [눈]앞의 공함보다 수승하리라.  

 

수유(須臾)의 수(須)는 모름지기 ‘수’이고, 유(臾)는 잠깐 ‘유’이니, 수유(須臾)는 ‘모름지기 잠깐이라도’가 된다. 반조(返照)의 반(返)은 돌아올 ‘반’이고, 조(照)는 비출 ‘조’인데, 반(返) 자나 귀(歸) 자는 주로 본래의 자리로 돌아온다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므로, 본래의 자리, 즉 원점(原點)을 돌이켜 비추어 본다가 되니 수유반조(須臾返照)는 모름지기 잠깐사이라도 마음의 자성(自性)을 돌이켜 비추어 보면이 된다. 승각전공(勝脚前空)의 승각(勝脚)은 보다 수승하다는 뜻이고, 전공(前空)은 ‘앞의 공(空)이니’ 눈앞의 공이고, 눈앞의 공은 경계(境界)를 공(空)으로 관(觀)하는 수행법이다.

경계(境界)를 관(觀)하는 수행법에는 화관(火觀), 수관(水觀), 백골관(白骨觀), 수식관(數息觀), 공관(空觀) 등과 같이 수행하는 대상을 불(火)이라고 바라보거나, 물 혹은 백골(白骨)이라고 바라보는 것이 익숙하게 되면, 생각하고 바라보는 대로 그 대상이 바뀌어 나타나게 된다. 공관(空觀)이란 앞에 있는 경계, 즉 수행의 대상을 바라보면서 생각으로 공(空)하다고 보는 것이다. 계속해 보다보면 그 경계가 공하게 보이는데 공해진 경계를 앞에 나타난 공이라 해서 이 게송에서 전공(前空)이라 했다.

자기 내면에 있는 마음의 근본자리를 반조(返照), 즉 돌이켜 보는 것이 자기 밖에 있는 경계를 공(空)하게 한 것보다 수승하다는 말씀으로 해석된다.

왜 반조(返照)가 전공(前空)보다 수승(殊勝)한가?

전공(前空)은 눈앞에 있는 대상이 공(空)한 것을 보았지만 그 법(法)이 공한 이치를 보지는 못하였다. 법이 공한 이치란 몸과 마음 등 일체 경계가 제행무상(諸行無常), 즉 제법은 인연(因緣)따라 이루어진 것이고, 인과 연은 시간과 장소가 변함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공한 것인데 이 이치를 알지 못하고 공한 것만 보았으니 반조(返照)보다 못하고, 또 제법무아(諸法無我)의 이치도 모르니 불생불멸하는 적정열반(寂靜涅槃)에도 들 수 없으니 반조(返照)가 전공(前空)보다 수승하다고 했다. 그러나 혹 어떤 수행자가 전공(前空)을 이루었다고 하면 적어도 거친 번뇌는 소멸하였다고 볼 수 있으나 미세한 번뇌까지 소멸하여 일체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불생불멸의 적정열반에 까지는 이를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즉 비록 전공(前空) 수행법으로 전공(前空)을 얻었다고 하여도 마음 속 번뇌를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하였기 때문에 무념(無念)에 들 수는 없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조(返照)하는 수행이 더 수승하다고 할 수 있다. 

반조(返照)는 수행의 포인트를 자기의 마음자리로 잡고 한 순간도 끊어짐이 없이 그 마음자리를 되돌려 보는 것을 관조(觀照), 즉 비추어 보는 것이므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번뇌의 생멸을 바라봄으로서 이들이 일어나는 이치를 찾아 그 원인을 소멸하는 작업을 계속 반복함으로서 구경에 일체번뇌를 제거하고 적정에 들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본 게송에서는 자기 내면을 반조(返照)하는 수행법이 자기 외면에 있는 것을 전공(前空)하는 수행법보다 수승함을 말씀하는 것으로 해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