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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一者)로의 회귀(回歸) 본문
일자(一者)로의 회귀(回歸)
1. 신화(神化)의 3단계
신화(神化; deification)는 동방정교회의 신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는다. 본 논문에서는 신플라톤주의들이 설명하는 회귀를 동방정교회의 神化130) 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130) Daniel B. Clendenin, EOT, p.47.
神化는 일자(一者)로의 회귀(回歸)를 神學的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례이다. 동방정교회에서 神化는 인간이 하느님으로 되는 과정으로, 神化는 헬라어 테오시스(theosis; θέωσις)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神化는 카타르시스(katharsis) 의 정화(淨化)를 거쳐서, 테오리아(theoria)의 관상(觀想) 실천으로, 神과 人間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테오시스(theosis)는 신플라톤주의에서 一者로의 回歸이며 동방정교회에서의 목표이기도 하다.
오리게네스(Oregenes, 185?~254?)는 완성으로 가는 길을 정화, 조명, 열매의 단계로 설명한다. ① 정화, 즉 관상을 위한 준비를 갖추고, ② 조명, 관상의 능력이 길러져서 ③ 열매를 맺는 단계이다. 영혼은 관상을 수행해서 자신의 참된 본성을 찾게 된다.131) 이 단계는 신화에 이르는 단계인 카타르시스・테오리아・테오시스와도 연결된다.
신화는 인간이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신화는 관상을 통해서 가능한데, 이는 플로티노스가 『엔네아데스』에서 일자로의 회귀로 설명했던 내용이다. 회귀는 만물과 만법이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의지이자 실천이다.
(표 3)은 카타르시스・테오리아・테오시스의 사전적 의미를 설명한 것이다. 인간은 관상을 통해서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고, 그곳에서 절대자를 만나는 체험을 한다. 이들 세 가지는 어느 하나라도 빠져서는 안 되는 과정이면서 요소이다. 테오리아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지를 보면서 그 원형을 닮으려는 수행에 있다.
131) Andrew Louth, The Origins of the Christian Mystical Tradition: From Plato
to Denys, New York: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p.80.
동방 정교회 카타르시스 테오리아 테오시스
사전적 의미 정화, 회개 관조, 관상 회귀, 신화
(표 3) 신화의 3단계와 의미
플로티노스에게 있어서, 이미지에 대한 관념은 유출과 회귀의 운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 ……이미지는 어떤 중재자 없이 원형으로부터 직접 흘러나온다. 더욱이, 그 원형을 고대하며 이미지는 원형을 향해서 돌아가고자 한다. 이미지와 원형 사이에 존재하는 닮음으로 말미암아 이미지는 원형을 알 수 있고, 원형을 관상함으로써, 원형을 더욱 심오하게 알게 되어 더 원형에 닮아간다. 사실, 관조하는 것은 회귀하는 것이다. 이제 관상하는 것이 내면의 행위이다. 존재의 단계로 올라가는 것은 더 깊게 스스로, 자기 존재의 핵심으로 들어가는 것이다.132)
이처럼 원형은 모상으로 나타나는데, 모상을 관상하면 원형을 닮아가면서 회귀에 이르게 된다. 모상을 관조하는 것은 그 원형을 닮아가고 존재의 본질로 들어가는 것이다. 플로티노스는 ‘테오리아’를 통하여 원형으로 회귀하는 과정을 강조하고 있다. 신화는 단계와 과정을 거치면서 이르게 되는데, 동방정교회에서 신화에 이르는 3단계를 살펴보기로 하자.
1) 카타르시스(katharsis)
카타르시스(κάθαρσις)는 정화, 배설이라는 의미로 쓰이는 문학 용어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비극은 드라마 형식을 취하고 서술 형식을 취하지 않는데, 연민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으로 바로 이러한 감정의 카타르시스를 실현한다(1449b)”133)라고 말한다. 카타르시스는 신학용어로 정화라는 의미로 쓰이지만 단순히 몸과 마음의 깨끗함을 뜻하지 않고, 윤리적인 실천을 포함하고 있다. 카타르시스는 경건한 마음을 갖는 것으로 금욕적 정화라고 할 수 있다.
132) Andrew Louth, 위의 책, pp.142-143.
133) Aristoteles 지음, 천병희 옮김, 『수사학/시학』, 파주: 숲, 2018, p.361.
플로티노스는 『엔네아데스』에서, ‘어떤 대상의 본질을 알려면 먼저 자신을 정화하고 관조해야 한다(Enn Ⅳ, 7, 10)’134)고 설명한다. 신화가 되는 체험은 사람의 정화와 비례한다. 사람은 욕망으로부터 깨끗해질수록 하느님을 더 높게 체험한다.135) 신화로 가는 첫 단계에는 프락시스(praxis; πραξις)라는 실천적인 수행이 있다. 그러한 수행을 하는 사람은 금욕적이고 깨끗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136) 프락시스는 원리(原理)에 의해 시작되는 실천인데 여기서도 정화는 필수적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오물에 빠지거나 진흙으로 더럽혀졌다면, 그의 타고난 안락함은 사라지고, 보이는 모든 것은 그를 더럽히는 더러운 것들이다. 그의 추악한 상태는 그를 부패시키는 다른 물질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다시 아름다움을 찾으려면, 그가 할 일은 자신을 닦고 정화시키고 자신의 본모습을 만드는 일이다(Enn Ⅰ, 6, 5).137)
그러므로 정화된 영혼은 모두 이데아와 로고스이며, 육체에서 완전한 자유롭고, 정신적인 것이며, 전적으로 신적인 질서인데, 아름다움의 원천이 솟아오르는 그 신적인 질서이면서 모든 아름다움을 망라한다. 따라서 정신을 향해서 상승되는 영혼은 모든 힘에서 아름다워진다(Enn Ⅰ, 6,6).138)
인간이 로고스에 들어가려면 모든 정념(情念)으로부터 자신을 정화시켜서 무정욕의 상태(apatheia; ἀπάθεια)에 도달해야 한다. 오리게네스는 플라톤적인 용어를 사용하면서, 영과 물질, 혼과 몸 사이에 대조를 전개한다. 그는 그 과정에서 금욕적인 생활을 강조했다. 그가 생각하는 금욕의
134) Plotinus, 앞의 책, p.405.
135) Archimandrite George, Theosis: The True Purpose of Human Life, Mount
Athos: Holy Monastery of Saint Gregorios, 2006, p.57.
136) Archimandrite George, 위의 책. pp.50-51.
137) Plotinus, 앞의 책, pp.68-69.
138) Plotinus, 위의 책, p.69.
본질은 물질과 몸으로부터 영혼을 해방하는 것이라고 믿었다.139) 그 실천은 동방정교회에서도 살펴볼 수 있으며, 카타르시스는 단지 정화에 한정하지 않고 회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정교회에 따르면 인간 범주의 한계성과 살아 있는 하느님의 무한성에서 보면, 하느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영적이고 지적인 카타르시스, 또는 정화를 필요로 하는데, 이는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모든 잘못된 관념들을 제거하는 정신의 정결이다. ……다른 지역에 있는 정교회 신학자들은 이러한 지적인 정화나 카타르시스를 회심(metanoia)의 관점에서 언급하는데, 이는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타고난 관념에서부터 돌아가는 의식이다. 우리가 하느님에게 다가갈 때, 경외와 놀람의 감정을 가지고 시작해야 한다.140)
카타르시스는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회개하는 것을 포함하는 것이다. 회개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죄의 의미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신학(神學)에서 죄(罪)는 하마르티아(hamartia; ηαμαρτια)로서 이 뜻은 ‘과녁에서 벗어난 것(missing the mark)’이다. 과녁은 궁극의 목적이고 본래의 계획이다. 인간은 죄로부터 벗어나 신의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기 위한 과정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회개이다. 회개는 헬라어로 메타노이아(metanoia;μετανόια)이며, 그 사전적 의미는 “하느님과 그분의 뜻에서 벗어나 살던 사람이 자기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에게 돌아가는 행위”141)이다. 회개라는 의미는 ‘뉘우쳐서 고치다’라는 뜻으로, 메타노이아의 의미를 충분히 살리고 있다. 카타르시스는 메타노이아(참회)를 통해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회귀를 뜻한다. 이처럼 사람은 회개를 통해서 원래의 자리 또는 궁극으로 갈 수 있다.
139) Bernard McGinn 외 지음, 유해룡 외 옮김, 『기독교 영성(Ⅰ)』; John D. Zizioulas,
「초기 기독교 공동체」, 서울: 은성, 2012, p.79.
140) Daniel B. Clendenin, EOC, p.56.
141)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 『가톨릭 대사전』 12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p.9833.
인간은 원죄로 인해서 자신이 있어야 하는 원래의 자리와 신이 계획한 목표에서 벗어났지만, 회개를 통해서 원래의 계획으로 돌아갈 수 있다. 회개는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과정을 거친다. 카타르시스에는 정화와 더불어 회개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원래의 계획과 본성을 찾아 가는 시초가 되는 단계이다. 그래서 이 단계는 신화로 가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과정이다.
2) 테오리아(theoria)
테오리아(Θεωρία)는 관상142)을 의미한다. 동방정교회 신자들은 이콘을 관상하면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려는 수행 또는 기도를 한다. 플로티노스는『엔네아데스』에서, ‘영혼에서 관상이 이뤄지면서 높은 단계로 회귀(回歸)한다(Enn Ⅳ, 8, 7)’143)고 설명한다. 관상은 ‘바라봄’이라는 뜻으로, 내면을 보는 것과 외물을 보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동방정교회의 테오리아는 그림이라는 외물을 통해서 내면의 영혼이 하느님에게 다가가는 단계이다.
관상은 ‘함께’라는 뜻의 ‘con’과 성소(聖所)를 뜻하는 ‘templum’의 합성어로서, 다함께 성소에서 사물의 근원인 하느님을 발견하고 바라보는 것이다.144)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이론적 학문(982a)”145)으로 관조를 설명하고 있으며,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도 ‘완전한 행복은 일종의 관조적 활동(1178b)’146)이라고 했다. 철학에 있어서, 행복은 최고선이자142) 궁극의 목적이다.
142) 그리스도교 신비신학 전통에서는 인간 영혼의 능동성과 수동성에 따라 습득관상과 주
입관상의 두 가지 관상기도로 나뉜다. 습득관상(acquired contemplation)은 기도하는
이의 노력이나 은총으로 신비를 체험할 수 있고, 주입관상(infused contemplation)은
스스로의 노력이 아닌 순전히 하느님의 은혜로 이뤄지는 기도이다. 일반적인 관상기도
는 보통 주입관상 또는 주부적(注賦的) 관상을 말한다.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
『가톨릭 대사전』 1권, 서울: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p.530.
143) Plotinus, 앞의 책, p.416.
144) 가스펠서브, 『교회용어사전』,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13, p.524.
145) Aristoteles 지음, 조대호 옮김, 『형이상학』, 서울: 길, 2017, p.37.
관상수행은 테오리아를 통해서 신화로 가는 과정이다. 이는 수행자가 모상을 ‘바라봄’으로 궁극의 깨달음을 얻는 것과 마찬가지로 테오리아는 목적을 향해가는 단계이다. 그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행복은 테오리아가 되는 만큼 지속된다. 행복은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테오리아에 수반되는 결과로서의 가치이다. 따라서 테오리아를 더 많이 하는 사람은 더 행복하다. 테오리아는 그 자체로 소중한 것이다. 나아가 행복은 어떤 종류의 테오리아일 것이다(1178b)’147)라고 했다.
테오리아는 지혜에 이르도록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형이상학』에서 “테오리아가 무엇을 만들어 내거나 생산하는 지식이 아니라는 것은 최초로 철학을 한 사람들을 보아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지금도 그러하듯, 사람들이 최초로 철학적 지혜를 추구하게 된 이유는 다름 아닌 경이감을 체험했기 때문이다(982b)”148)라고 설명한다. 이는 회귀하면서 얻게 되는 신비적인 체험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는 로고스의 성육신이다. 그가 인간이 된 것은, 인간이 그리스도와 결합해서 신화가 될 수 있음을 제시한다. 이는 신이 주관하는 구원의 계획과 일치하며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과 소명을 말하는 것이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이를 신화라고 한다.149) 로고스는 하느님의 이성(reason)이다. 구원과 영성은 로고스에서 나오는 것으로, 하느님은 자신을 인간 로고스에 합일하여 그것을 조명함으로써 구원을 허락한다. 그러므로 영성이 추구하는 바는 로고스를 통해서 수행하는 하느님에 대한 관상이다.150) 관상에는 신비적인 요소가 포함되어 있으며 신화에 이르는 과정에서 종교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146) Aristoteles 지음,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니코마코스 윤리학』, 서울: 길,
2011, p.375.
147) Aristoteles 지음,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위의 책, pp.375-376.
148) 위의 해석은 김성진의 논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번역한 내용이다. 김
성진, 「탈레스 철학의 작용영향사와 아리스토텔레스의 테오리아」, 『서양고전학연구』 제
24권, 한국서양고전학회, 2005, p.134.
149) 이후정, 「신화(神化)의 신학: 웨슬리와 동방교부」, 『신학과 세계』 제37호, 감리교신학
대학교, 1998, p.198.
150) Bernard McGinn 외 지음, 유해룡 외 옮김, 앞의 책, p.78.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들에서도 영혼이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을 신플라톤주의적인 구조로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세속을 떠나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여, 정화를 통해서 덕을 쌓아가면서, 하느님에 대한 신적 관상에 이르는 여정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전통을 잇는 중세의 관념에서 보면, 관상은 진리에 대한 기쁨과 경이로 가득 찬 응시이다.151) 플로티노스의 『엔네아데스』에 따르면, ‘영혼은 지적 원리[정신] 주위를 맴돌며 그를 바라보며 그것을 통해 깊이 있는 하느님을 보는데(Enn Ⅰ, 8, 2)’,152) 여기서 신을 체험하는 것은 신화의 상태를 의미하며,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관상이다.
루돌프 오토(Rudolf Otto, 1869-1937)는 종교적인 성스러움을 나타내는 용어로써 누미노제153)를 제시했다. 누미노제는 성스럽고 절재적인 존재를 만날 때 일어나는 종교적인 체험을 뜻한다. 루돌프 오토의 누미노제는 이콘을 통해서 얻게 되는 감정을 설명할 수 있는 용어이기도 하다.
독일의 신학자인 루돌프 오토는 그의 책 『성스러움의 의미』(The Ideaof the Holy)에서 장엄한 신비에 대한 복합된 감정, 공포, 그리고 매력, 신 앞에서 자신만이 가지는 불완전에 대해 압도적인 감정인 “누미노제”를 말했다. 동방신학자들은 직접적인 묘사보다 종종 그림, 이미지, 그리고 은유를 사용해서 모든 인간의 묘사를 거부하는 그 분과 인간의 만남을 그리고자 했다.154)
151) 한국가톨릭대사전 편찬위원회, 『가톨릭 대사전』 1권, 서울: 한국교회사연구소, 2006,
p.531.
152) Plotinus, 앞의 책, p.77.
153) 그는 라틴어 ‘누멘’(numen)이라는 단어로부터 ‘누멘적인 것’(das Numinöse)이라는
용어를 만들었다. 이는 어떤 대상이 누멘적인 것으로 여겨질 때마다 나타나는 누멘적인
마음의 상태이다. Rudolf Otto 지음, 길희성 옮김, 『성스러움의 의미』, 왜관: 분도출판
사, 2009, p.39.
154) Daniel B. Clendenin, EOC, pp.56-57.
인간은 성스러운 존재를 만나면서 종교적인 체험을 하게 되는데, 루돌프오토는 체험에서 얻게 되는 감정을 누미노제라고 명명했다. 동방정교회인들은 이콘을 통해서 누미노제를 체험한다. 이콘은 단순한 도상이 아니라 그 안에 하느님의 성육신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다. 그것은 성서에 나오는 성인과 순교자의 내용, 성스러운 게시, 그리고 가르침을 상징한다. 동방정교회인들은 이콘을 통해서 테오리아의 단계에 들게 되며, 마침내 테오시스로 이르게 된다. 그들은 이콘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관상하면서 그를 닮으려고 한다.
3) 테오시스(theosis)
테오시스(θεοσις)는 신화(神化)로 번역되는데 그 뜻은 ‘신성화’, ‘신과의
만남’, ‘신이 되는 것’이다. 동방정교회에서 신화는 관상을 통해서 이뤄진다. 인간이 관상을 실천해서 도달하는 신화, 즉 궁극의 완성은 인간이 신의 모상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이때 인간은 관상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결합이 이뤄진다.
테오시스! 이 깊고 심오한 단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인간이 신성한 영역, 하느님의 분위기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인간과 신성한 것의 결합을 의미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신화의 의미이다. 그래서 인간의 본성은 영화(靈化)를 향해 움직이고 있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과도한 물질주의는 파괴되어 사라져야 한다. 인간 영혼이 현재의 아둔함에서 빛나는 영성으로 변화되기 위해서 영혼을 닦아야 한다. 그것이 신성함과 함께 인간의 결합이 실제가 되는 방식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으로 바뀐다. ……그것은 하늘나라 안에서 자유로운 행복이신 하느님과 모든 인간들의 결합이다. 인간의 본성은 신적인 본성의 생성물이 된다.
그것은 원래의 아름다움으로 재생산되며 새로운 생명으로 재탄생한다.
그것은 신성한 결연을 통해서 재창조된다.155)
인간은 누구나 신화를 성취하라는 고유한 소명을 가지고 있다. 즉 우리는 하느님이 되어야 할, 자신이 하느님을 닮은, 하느님과 결합해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 인생의 목적은 우리가 하느님의 본성과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는 것이고, 신의 은총과 힘을 연결하려는 자가 되는 것이고, 하느님처럼 되는 것이다.156) 인간이 관상으로 신화가 될 수 있는 근거는 신화의 주체가 있기 때문이다. 그 주체는 바로 로고스의 씨앗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 씨앗에는 하느님의 로고스가 이미 인간 저마다에게 있는 것이다.
관상의 형태는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도 나타난다. 밀교의 삼밀수행에서 관상은 의밀수행의 과정인데, 밀교행자는 만다라, 월륜, 오상성신, 아자, 오자엄신관 등과 같은 문자와 도상을 ‘바라봄’으로써 대일여래의 세계를 체득한다. 관불(觀佛)은 삼매에 이르면서 부처가 되는 수행과정이다. 이콘이 관상의 수단이라면, 불교 도상은 관불의 방편이다. 종교와 철학에서, 완성을 뜻하는 신화는 관상을 통해서 가능하며, 이 방법은 바로‘바라봄’이다. 인간은 형상(形象)으로 나타난 대상을 바라보면서 그 원형과 하나가 될 수 있다.
2. 신화의 회귀성(回歸性)
세 가지의 위격은 유출과 회귀의 과정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유출은 완전한 단일로부터 다수가 나오고, 다수는 다양하게 변화하여 지식의 단계로 세분화된다. 이 유출의 과정은 ‘넘쳐흐르는’ 과정으로 세 위격 사이에서 아래 단계로 넘쳐흐르며 하강한다.
155) Daniel B. Clendenin, EOT, p.184.
156) Daniel B. Clendenin, EOT, p.184.
유출은 회귀와 연관성을 가지며, 유출은 일자가 단일성을 펼치는 것이고, 회귀는 선(善)이 만물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모든 것은 선을 추구하고 선으로 되돌아가려고 하는데, 이것이 회귀이다.157) 이처럼, 회귀는 단순히 만물이 선으로 가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선 또한 만물을 이끌게 하는 상호작용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신성하고 신비로운 종교의 힘으로 구원을 받고자 한다. 회귀는 종교적 구원의 또 다른 이름이다. 플로티노스는 관조를 통하여 회귀가 된다고 설명했는데, 그것은 원형이 담겨진 모상을 관조함으로써 가능하다.
모상을 관상하더라도 원형에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이 관상의 효과이자 이유이다.
위(僞; Pseudo) 디오니시우스(Dionysius, 1402?~1471)의 신학은 위계적 3단계의 구조론을 보이는데, 이는 프로클로스(Proclos, 410?~485)의 사상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형상들을 다루면서 그 형상에 대해서 신의 속성과 결부시킨다.158) 위 디오니시우스가 전개하는 ‘신적인 것-천상적인 것-교회적인 것’이나 ‘삼위일체-천사-인간’을 존재질서로 설명하는 부분은 프로클로스의 ‘일자-정신-영혼’의 세 가지 요소로부터 도입되었다. 이 위계질서에는 두 가지 운동방향이 있다.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향하면서 빛이 낮은 단계의 것들에게 비춰주고 그것들에게 힘을 주는 운동이며, 다른 하나는, 낮은 단계에 있는 것들이 창조의 목적대로 신을 닮아 가며 그와 합일되는 운동이다.159) 위계질서의 두 가지 접
근은 아래로 유출하는 것과 위를 향해 회귀하는 이유를 설명한 것이다. 이는 운동이 한 방향에서 이뤄지는 것이 아닌 양방향에서 일어나는 상호작용임을 의미한다.
프로클로스와 마찬가지로 위 디오니시우스도 회귀는 구원의 의미를 지닌다.
157) Andrew Louth, 앞의 책, pp.37-38.
158) 전광식, 「중세스콜라철학에서의 신플라톤주의적 요소: Proklos철학의 영향사를 중심
으로」, 『철학연구』 제82집, 대한철학회, 2002, p.194.
159) 전광식, 『신플라톤주의의 역사』, 서울: 서광사, 2004, p.132.
신과의 합일을 위하여 영혼은 ‘정화-조명-합일’의 단계를 거치면서, 마지막 단계에서 탈아(脫我)의 경지에 이른다고 보았다. 그가 사용하는 ‘기도’, ‘탈아’, ‘신과의 동화’, ‘신과의 신비적 합일’ 등은 프로클로스가 받아들인 고대의 종교사상에서 나온 개념들이다.160) 탈아는 영어 ‘ecstasy’를 번역한 것으로, 보통 탈혼, 황홀경으로 번역된다.161) 여기서 말하는 탈아는 궁극에 도달해서 합일하는 것에 초점을 둔 것을 말한다. 인간은 신비적인 합일을 통하여 탈아의 경지에 오르는데, 이는 신화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이 체험에 대해서, 플로티노스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완전한 무(無)와의 접촉은 영혼의 본질에서 있을 수 없다. 가장 낮은 데로의 하강은 악에 들어가는 것으로, 비존재가 되지만 완전한 무는 결코 아니다. 영혼이 다시 상승하기 시작하면 외적인 존재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이 된다. 이렇게 영혼은 초탈하여 무가 아닌 자기 자신 안에 있다. 자기 집중으로 영혼은 더 이상 존재의 질서에 있지 않고 신안에 있게 된다. 완전한 인간은 존재로 성장하면서 교류하고 존재의 초월자와 일치한다. 이처럼 자기는 고양되어 우리는 신과 닮게 된다. 만약 우리가 고양된 자신으로부터 여전히 원형의 모상으로 더 높게 통과한다면, 우리는 모든 여정의 종착지에 이른다. 다시 물러난다면, 우리 자신이 한 번 더 모든 질서를 알게 될 때까지 우리는 미덕을 깨우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짐을 가볍게 하고 정신[지적 원리]을 향해 미덕으로 나아가고 그 안의 지혜를 통해서 신에게 이른다. 이는 신들의 삶이자 신과 같은 삶이고 축복받은 사람들의 삶이며, 우리를 여기에 속박하는 외적인 것으로부터의 초월이자, 땅 위의 만물 안에서 즐기지 않는 삶이며 외로이 단독자를 경험하는 삶이다(Enn Ⅵ, 9, 11).162)
여기에서 “외로이 단독자를 경험하는 삶”이란 플로티노스의 관점에서 신비적 탐구의 본질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160) 전광식, 위의 책, p.132.
161) 영문판에는 이 상태를 “Ecstasy”로 표기하고 있다. Adrew Louth, 앞의 책, p.48.
162) Plotinus, 앞의 책, p.709.
그것은 홀로 초연하게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일자를 향한 고독의 길이다.163) 일자의 유출로 하강한 영혼이 초탈해서 다시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서, 수행자는 자기에 대한 집중이 필요하다. 이러한 집중은 관조를 통해서 가능하다.
선(善)에 대한 이해, 즉 선과의 만남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읽은 이것[국가]은 숭고한 가르침으로, 우리가 이해해야 할 가르침은 선을 향한‘바라봄’이 아니라, 먼저 그것에 대한 지식을 얻는 것이다. 우리는 유비와 추상에 의해서, 선의 속성과 선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것을 이해함으로써, 선을 향한 높은 단계에 의해 이러한 가르침에 도달한다. 정화는 선을 목적으로 한다. 그래서 미덕과 모든 정당한 질서는 정신 안으로 상승해서 신들과의 향연을 하며 그 안에 머문다. 이런 방법으로 우리는 자신에게나 그 밖의 모든 이들에게 “보이는 자”이면서 “보는 자”가 된다.
존재와 정신이 같은, 완전한 생명체인, 우리는 더 이상 외적 존재로서 하느님을 보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가까이에 있다. 그 다음이 그것이고, 그것은 정신 위에서 빛을 내면서 바로 가까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모든 알음알이를 그만두어야 한다. 이 절정에서 훈련받고 아름다움에서 세워진 참구(參究)하는 이는 그가 머무는 곳의 알음알이를 계속해서 지니고 있다. 하지만 별안간 아래로부터 솟아나는 정신의 파도인 그 꼭대기에 의하여 그 모두를 저 너머로 휩쓸려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게 그는 위로 들어 올려져 눈이 뜨이고, 통찰은 눈을 빛으로 넘치게 한다(Enn Ⅵ,7, 36).164)
위의 문장에서는, 영혼이 별안간 일자와 합일되는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체험은 영혼에서 상승하여 일자와의 합일을 통해서 황홀경에 이른 상태이다.165) 플로티노스는 일자를 향해 회귀하는 과정을 ‘별안간’으로 설명한다.
163) Andrew Louth, 앞의 책, p.50.
164) Plotinus, 앞의 책, p.666.
165) Andrew Louth, 앞의 책, p.46.
“별안간”이라는 용어는 선(禪)에서 “단박”에 해당되는 내용이며, 깨달음의 내용으로 본다면 돈오(頓悟)에 해당된다. 하지만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회귀는 불교의 깨달음과는 차이가 있다. 다시 말해서, 일자로의 회귀는 붓다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별안간”은 일자와 합일이 되는 순간일 뿐이며, “별안간” 일어난 신비적 체험이 불교의 깨달음으로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플로티노스가 말하는 회귀가 영혼의 상승으로 일자와 하나가 되는 것이라면, 불교의 깨달음은 중생이 미혹에서 벗어나 자성이 청정함을 확인하는 것이다.
회귀에는 ‘정화-관상-회귀’의 과정을 거친다. 이들은 단계성을 지니지만, 이미 이들 안에는 회귀를 담고 있다. 정화는 ‘회개’라는 것을 통해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고, 관상은 모상을 통해서 원형으로 돌아가고자 함이며, 회귀는 그 자체로 완성이다. 따라서 정화와 관상에는 그 자체로 회귀를 함의하고 있기 때문에 완성의 단계인 회귀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암블리코스는 회귀를 플로티노스와 다른 실천체계를 제시하는데, 그것은 바로 주술(呪術)이다.
이암블리코스는 플로티노스와 프로클로스 사이에서 활동했던 신플라톤주의자로서, 그는 플로티노스의 정신을 높은 예지적 세계와 낮은 지성적 세계로 구분하여, 전자를 이데아의 정신으로, 후자를 살아 있는 존재자의 정신으로 보았다.166) 그가 제시하는 영혼의 마지막 목표는 ‘신과의 동화(ομοιωσις θεω)’이다. 그 방법은 신적 계시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플로티노스는 ‘신과의 동화’를 회상과 자신의 신적 성질의 완전한 구현으로 해석한다. 이에 반해 이암블리코스는 신학과 철학으로 인간의 구원은 불가능하며, 오직 주술(theurgia)만이 영혼의 정화가 가능하다고 했다.167) 이들은 신과의 동화를 이성적인 활동이 아니라 주술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 시기에 활동한 신플라톤주의자들은 ‘신과의 동화’가 이뤄지는 과정을 신비주의적인 면으로 설명한다.
166) 전광식, 『신플라톤주의의 역사』, 서울: 서광사, 2004, p.38.
167) 전광식, 위의 책, pp.39-40.
플로티노스가 고취했던 테오리아와는 대조적으로, 신플라톤주의자들 중에는 마법을 예식화한 수행의 결과로 황홀경에 이르는 방식을 설명하기도 한다. 마법은 관상과는 대조적이지만 마법 의식에 의해서 인간 안에 있는 신성한 힘을 살아나게 한다. 그 결과로 인간은 황홀경을 체험하게 된다.168) 이들은 마법적인 주술을 통해서 합일이 되는 신비적인 체험을 제시한다. 합일의 원칙, 즉 궁극의 대상과의 만남은 관상수행뿐만 아니라 주문에 의한 수행으로도 신과의 합일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밀교가 단지 문자와 도상을 관상하는 수행뿐만 아니라, 구밀에서 진언을 통해서 불계(佛界)에 이르는 방식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이처럼 회귀 과정에서 얻게 되는 신비적인 체험은 관상에만 한정되지 않고 주문을 수반한다. 그래서 이들은‘신과의 동화’가 이뤄지는 과정을 더욱 신비주의적으로 접근한다.
168) R. T. Wallis 지음, 박규철・서영식・조규홍 공역, 앞의 책, p.196.
출처:
신플라톤주의와 밀교의 수행 비교
: 관상과 관불을 중심으로
송승훈 : 동국대학교 대학원 선학과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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