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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기도란 무엇인가? 본문
관상기도란 무엇인가?
- 기자명 권명수
- 승인 2007.05.16 16:31
- 관상기도를 어느정도 해본 신자들은 관상기도를 매우 강력한 기도라고 말한다.
기도란?
관상기도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도에 대해 논의가 필요하다. ‘기도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장 자주 듣게 되는 대답은 ‘하나님께 인간의 간구와 소원을 아뢰는 행위’다. 이 말에는 하나님께 인간의 실존적 상황에서 발생한 문제를 간구하는 기도의 한 측면을 잘 드러낸다. 또 다른 기도 이해는 ‘하나님과의 대화’다. 대화로서의 기도 이해는 인간과 하나님께서 서로 말을 주고받는 쌍방적인 대화를 강조한다. 신자가 하나님께 간청하는 상향식의 대화와 이런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응답하시는 하향식 대화의 영역이 있다. 하향식 기도에서는 인간의 간구기도에 대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응답을 경청과 순종하는 면이 강조된다. 첫 번째 기도 이해에서 부족한 면을 대화적 기도 이해에서 보충해준다. 기도가 하나님과의 ‘대화’라는 말에는 신자가 주님께 아뢰는 길과 주님께서 인간에게 사랑으로 응답하시는 길인 양자 간의 쌍방통행적 특성이 잘 드러나고 있다.
기도를 열심히 많이 하기로 소문이 나있는 한국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부족한 면은 기도의 두 번째 측면인 주님께서 인간에게 찾아오셔서 인간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청종의 부분이다. 관상기도는 이와 같은 경청과 순종의 부분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그래서 한국의 기독교인이 이러한 기도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은 이제 한국교회의 상황이 경청의 기도의 경시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관상이란?
먼저 관상에 대한 논의를 해보자. 관상(觀想)이란 한자말은 ‘마음의 상을 바라본다’는 뜻이다. 곧 조용히 눈을 감고 호흡을 가라앉히며 있노라면 마음속에 여러 가지 생각·영상·정서들이 흘러들어오는 것들을 글자 그대로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관상은 영어로 ‘contemplation’이다. 영어 앞 단어인 ‘con’은 ‘함께’, ‘강하게’라는 뜻이고, 뒤의 ‘temple’은 ‘관찰하기로 표시된 특별한 장소’, ‘성전’ 등의 뜻이다. 이 단어의 뜻은 ‘주의를 기울여 집중적으로 바라보고 관조하기 위한 구별된 지역이나 장소’를 의미한다. 그리하여 관상을 통해 그 대상과 일치가 이루어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러한 관상의 상태는 교회 역사상 여러 영성 전통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 크게는 긍정(kataphatic) 전통과 부정(apopathic) 전통을 통해서 관상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본다. 긍정 전통에서는 언어와 이미지와 논리를 통해서 주님과의 일치된 상태를 지향한다. 이 전통은 기독교 역사에서 주류를 이룬다. 이에 비해 부정 전통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나 이미지들을 하나님과 일치를 지향하기보다는, 이런 것 없이 가슴으로 수동적인 상태에서 직관적으로 주님과의 일치를 지향한다. 이 전통은 역사적으로 제도권 교회에서 그리 유력한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깊은 신앙심을 갖고 주님과의 일치와 헌신을 지향하는 신자, 수도자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영성 생활의 방편이 되었다. 여기에는 헤지키즘, 관상기도 등이 있다.
관상과 관상기도 서로 구별해야
![](https://blog.kakaocdn.net/dn/w8OYo/btrSZ4oXjiZ/9IU2vC09sZHYkOngff0RbK/img.jpg)
어번 홈즈는 <그리스도교 영성 역사>란 책에서 기도의 현상을 크게 4가지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사색적(spepculative) 기도, 감정적(affective) 기도, 상상적(imaginative, kataphatic) 기도, 비우는(emptying, apophatic) 기도다. 사색적 기도는 성경을 묵상·공부·독서를 통해 주님의 뜻을 알아가는 것이다. 감정적 기도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상상적 기도는 예수회의 영성 수련방법이나, 동방 교회의 성화를 보며 기도하는 방법 등이 이에 속한다. 곧, 십자가 위의 달려서 피를 흘리시는 주님을 상상하면서 우리의 신앙심을 키우고 기도하는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비우는 기도는 주님의 현존에 머무르며 가슴으로 기도하며 직관으로 주님의 뜻을 찾고 기도하는 방식이다.
독자들이 예상했다시피, 필자가 말하는 관상기도는 비우는 기도인 부정 전통의 기도를 말하고 있다. 외관상으로는 동양의 명상 전통과 별로 구별이 되지 않아서 오해를 많이 받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전통에 익숙한 상상적, 사색적 전통의 기도를 해온 신자들이 비우는 스타일의 기도에 대해 여러 가지 부정적 태도와 비판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이 기도 전통은 1세기부터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관상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관상기도란 용어에 대해 다뤄보기로 한다. 한국영성치유연구소 이만홍 소장은 관상기도를 묵상(黙想)기도라고 부른다. 관상이란 용어가 ‘동양 종교적’ 어감이 있기에 이를 배제하기 위해서다. 또한 관상기도를 침묵기도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이유는 관상기도는 입으로 소리 내어 간구하거나 마음속으로도 주님께 간구하는 등의 행위를 하지 않고, 침묵 가운데 머무르며 주님께 가슴의 마음 문을 여는 행위를 지칭하기 때문이다. 또한 관상기도를 ‘명상기도’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이는 뭔가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눈을 감고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관상기도와 일반 기도와의 차이점
필자는 위에서 다룬 내용을 아빌라의 데레사가 경험적으로 고백한 기도의 7궁방을 다음과 같이 3가지로 분류한다.
1) 구송(口誦)기도(vocal prayer). 간청하는 기도, 우리들이 소리를 내거나 마음속으로 소망을 주님께 아뢰든지 간에 말로 주님께 간청하는 기도를 말한다.
2) 명상기도(meditation). 기독교 신자들이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큐티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본다. 경건생활로 행하는 큐티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만약 큐티가 끝나고 나서 침묵 가운데 하나님 속에 편히 쉬는 시간을 보내는 관상기도를 한다면 큐티의 효과는 배가 될 것이다.
3) 관상 기도(contemplative prayer). 이 말은 ‘하나님 안에서 쉼’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과정을 거쳐 주님과의 일치(communion, 친교, 합일)를 지향한다. 관상 기도를 크게 둘로 구분해볼 수 있다. 첫째는 능동적(active) 관상기도는 신자인 우리가 시간을 들여서 의지력으로 주님께 나아와 기도를 하는 것을 말한다. 관상기도를 한다고 할 때 이 단계의 관상기도를 수련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의지적으로 주님께 지향하며 침묵 가운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기도의 단계와 종류를 구분해 다루는 것은 개념적으로 구분해서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실제의 기도생활에는 위 세 기도가 뒤섞이며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면, 자신은 관상기도를 한다고 침묵 가운데 있으면서도, 외부적으로는 소리 내어 말을 하지 않지만 마음속으로는 간구기도를 하고 있을 때가 있다. 또는 특정 대상에 대해 사고하며 성찰하는 명상기도를 할 수 있다.
관상기도는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이기에 경험 있는 적절한 지도자에게 안내와 훈련을 받아야 좋은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 관상기도와 관련된 몇 권의 서적을 읽고 기도를 실천할 때에 어려움이 있다. 어려움에 부딪히게 되면 초기에는 열심히 얼마간은 기도할 수 있겠지만, 비슷한 현상이 반복되게 되며 시간이 지날수록 오래 기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
관상기도를 해야 한다는 성경적 근거는 무수히 많다. 지면 관계상 구약과 신약의 대표적 본문을 몇 개 언급하도록 한다.
영성의 분야에서 미국과 한국에서 많은 독자를 지니고 있는 유진 피터슨이 <관상적 목회자>란 책에서 목회자는 밖으로 분주하기보다는 주님 안에서 잠잠하여야 한다고 이사야서 30장 15절 “주 여호와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돌이켜 조용히 있어야 구언을 얻을 것이요, 잠잠하고 신뢰하여야 힘을 얻을 것이거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고”란 말씀의 예를 들어 책망했다.
시편은 관상기도의 성경적 근거 구절들이 많이 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 여기서 ‘가만히 있어’의 영어 표현은 ‘be silent’로서, 침묵 가운데 있어서 내가 하나님 됨을 알라는 중요한 말씀이다. 또한 엘리아 선지가가 하나님의 호렙산의 동굴에서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열 19:1~18)고 성경은 기록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마 5:3)라고 산상수훈의 첫 구절을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마음을 비운 자가 가난한 자이고, 빈 마음에 성령께서 임하신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에는 관상사상을 의미하는 구절이 많다. 요한복음 14장 10절, 14장 20절, 17장 21절 등에 반복적으로 나오는 “아버지가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라는 말씀은 관상기도를 통해 기도자가 마음을 비워 그곳에 주님을 모시고 그분이 내주하여 나의 주인이 되는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다.
로마서 8장 26~28절은 관상기도하는 신자의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는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여 주십니다”(롬 8:26)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데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해주신다는 구절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런 성령의 활동을 도와주는 일로서 조용히 침묵 가운데 마음을 비워드리는 일인 것이다. 이것이 곧 관상기도다.
마지막으로 관상기도수련회 때마다 인용하는 구절인 요한계시록 3장 20절. “내가 문을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말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로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개역) 여기서 주님께서 문을 두드리실 때 ‘문을 연다’는 것은 우리가 침묵 가운데 머무르며 다른 생각을 멀리하고 주님께로 우리의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주님을 초대하면 내 영혼 안에 들어오시겠다는 말씀으로 해석한다.
렉시오 디비나와 관상기도
1세기 초부터 기독교신자들은 렉시오 디비나(거룩한 독서, 성독)를 하며 신앙생활을 해왔다. 당시에는 지금같이 성경이 인쇄되지 않아서 흔치 않았기에, 회당에 비치된 성경말씀을 듣기만 했다. 그래서 이들은 1) 말씀을 듣고(Lectio) 2) 이 말씀을 명상하고(meditatio) 3) 이 말씀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하고(oratio) 4) 말씀과 주님의 현존 안에서 쉼(contemplatio)의 4단계를 거치는 영성생활을 거쳤다고 관상기도를 대중화시킨 토마스 키딩은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현재 신자들이 많이 하는 큐티를 하고, 나중에 침묵 가운데 머물러 말씀의 능력과 주님의 현존 속에 머물러 말씀의 능력이 머리에서 가슴 판에 새겨지는 시간을 보낸다면 참으로 생명력 있고 생수가 풍부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의 관상의 단계를 실천하기 위해 관상기도 훈련을 하고, 이를 위해 관상기도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관상기도는 매우 강력한 기도다. 이 기도를 어느 정도 해본 신자들은 한결같이 말하고 있다. 침묵 기도의 힘은 크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기도 방법들을 경시하거나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중보기도, 통성기도를 폐지할 수도 없고, 폐지해서도 안 된다. 인간은 언어를 매개로 활동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언어적 기도의 힘을 밑에서부터 받쳐줄 침묵 속에서 우러나오는, 존재의 근원에 접촉으로 나오는 에너지가 받쳐주는 기도는 매우 힘이 있다. 필자가 바라기는 간구하는 기도를 20분 하고서,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경청의 기도로서 관상기도를 20분 정도 하여 균형을 이루는 기도가 되길 바란다. 이제 많은 분들이 이 기도에 관심이 있는 것을 보면서 한국에서도 신자들의 기도와 영적 성숙이 트기 시작했음을 보는 것 같아 기쁘다.
권명수/ 한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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