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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교, 화폭에서 시를 읽다(32.최종회)-마드리드(프라도 미술관, 소피아미술관,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시문학 2016.4월호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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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철교, 화폭에서 시를 읽다(32.최종회)-마드리드(프라도 미술관, 소피아미술관,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시문학 2016.4월호

柏道 2022. 12. 9. 07:59

김철교, 화폭에서 시를 읽다(32.최종회)-마드리드(프라도 미술관, 소피아미술관,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시문학 2016.4월호

 
화폭에서 시를 읽다(32.최종회)
-마드리드(프라도 미술관, 소피아미술관,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김철교(시인, 배재대 명예 교수)


2015년 7월 13일 (화) 오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과 소피아 미술관


드디어 오랜 미술관 순례기가 막을 내린다. 서양화 중심의 미술관들을 거의 다 방문한 셈이다. 대략 60여개의 미술관을 혼자 혹은 아내와 함께 찾았고, 그 결과를 시문학사의 배려로 32회에 걸쳐 연재했다. 앞으로는 한국미술을 중심으로 한 동양미술과 관련된 미술현장을 찾을 계획이다.



<월간 시문학>에 연재하면서 아쉬웠던 점은, 시문학사에서는 괘념치 않았지만 내 스스로 많은 지면을 차지하는데 대한 눈치가 보여, 미술관들이 소장한 보다 많은 그림들을 소개하지 못하였고, 또 그러한 작품들을 소재로 한 나의 자작시들을 포함하지 못했다. 앞으로 단행본으로 출간할 수 있다면 보다 많은 그림을 소개하고 또 자작시들을 보완할 계획이다.



그동안 많은 그림을 보고 얻은 수확은 내 온몸에 푹 삭혀서 좋은 시와 그림을 생산해 내는데 풍성한 밑거름이 될 것을 확신한다. 내가 쓴 색안경이 다채로워졌다고 할까. 어차피 모든 예술가는 자기 나름의 독특한 색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일 테니까. 앞으로 나의 문예론을 쓰는데 밑거름이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다.



안목은 학습의 결과라고 했다. 그동안 부지런히 미술관을 방문하여 그림 속으로의 항해를 통해, 예술이 어떻게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림은 말없는 시, 시는 말하는 그림”라고 말한 그리스 시인 시모니데스를 믿고, 그림과 시의 관계에 대해 읽고 생각하고 써오는 동안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림에 대한 안목과 아울러 시에 대한 안목도 좀 넓어졌다고 할 수 있을지.


마지막으로 생각해 보고 싶은 주제는 현대예술이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을까 하는 점이다. 아마 수많은 갈래로 흩어진 한강의 지류들이 모여 한강 물줄기를 이루어 바다에서 통합되어 가듯이,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다양한 몸짓들이 모여, 구원의 바다에 이를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구원에 이르는 길은 지류들처럼 다양할 것이다. 그러나 바다까지 이르는 동안 풍부해지고 곰삭아져 모든 것을 포용하는 인류의 구원을 이루어 내리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쯤 가고 있는 것일까?



아우슈비츠 이후로 서정시를 쓰는 것은 야만이라고 말한 바 있는 아도르노(Theodor Wiesengrund Adorno)가 말하기를, 현실의 고통을 표현하지 못하는 예술은 진정한 예술이 아니라고 했다. 미(美)는 추(醜)에서 나왔으며, 현실을 아름답게만 표현하는 예술이야말로 현실의 고통을 회피하고 왜곡 시킨다는 것이다. 예술은 현실의 고통을 표현함으로써, 소위 현대와 같은 ‘관리되는 사회’에서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예술가들이 현실의 고통을 다양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도 아도르노가 싫어하는 전통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술도 공존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소위 문화중산층에 호소하고 있는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고등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말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문화특권층, 다시 말하면 자칭 소수 문화엘리트라는 사람들을 위한 예술은 그들만의 잔치가 되는 경우가 많다. 클래식 그림들의 전시회는 인산인해를 이루기가 일쑤이지만, 현대의 난해한 설치미술 혹은 미디어 미술 전시회에는 발길이 뜸한 것이 이를 대변하고 있다. 물론 예술가들은 어쩌면 남들의 시선보다는 자신의 엘리트 의식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전시회를 하고, 시집을 상재하고, 딱딱한 연구서를 발간하는 것은 과연 자신만을 위한 것일까? 남들의 시선에 기대어 보고 싶기도 하고, 또 아직은 최선의 삶의 체제인 자본주의 사회를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다면 물질만 추구하는 사람은 제쳐 두고라도 소위 정신도 돌아볼 수 있는 여유가 있는 문화중산층에게는 구원의 방정식을 풀어주어야 하는 것이 예술가의 의무가 아닐까 싶다.


국내외 미술관들과 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를 본 결론은, 현대에서는 기발한 아이디어가 예술을 리드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현대미술관에도 기발한 설치작품과 미디어작품들이 넘쳐나고 있다. 그러나 그 기발함은 스토리텔링이 뒷받침이 되지 않으면 우리 이해의 한계를 넘는 것이 너무 많다. 문학도 마찬가지로 일부 시인들 중에 온갖 혐오스러운 이야기, 소통이 단절된 시들을 써놓고 그것을 ‘시’라고 한다. 비평가들은 또 거기다 맞장구를 치고 있다. 어떤 시는, 시를 쓴 시인도 평을 하는 평론가도, 그 시가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른다고 한다. 그래서 시도 독자를 잃고 있다. 물론 아도르노는 예술가는 보편성과 전체성을 부정해야 하며, 예술이 쉬우면 사람들이 수동적으로 수용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어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렇다면 그러한 예술을 이해하는 사람의 수가 소수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평론가의 역할이 필요할 것 같다. 평론가는 작품의 시시비비 상하고저를 가리는 역할도 필요하겠지만 무엇보다 예술작품에 대한 충실한 해석으로 생산자(예술가)와 소비자(독자, 관람객) 사이에 튼실한 다리를 놓는 역할도 중요할 것이다. 특히 시각예술은 머리의 이해보다는 가슴의 느낌에 기댈 수 있지만, 언어예술은 머리에서 해석이 되어야 가슴까지 내려올 수 있다. 따라서 그 역할을 비평가가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한편의 시를 아무리 이리저리 살펴보아도 느낌이 없을 때, 비평가가 풀어주는 글을 읽고 ‘아하’하고 무릎을 칠 때가 적지 않다. 비평가의 견해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위 생각의 빌미, 생각의 문은 열어주는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물론 평론이란 대상 작품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고 그에 대한 평가를 제시하기에 앞서, 나름대로 하나의 완성된 예술작품이어야 할 것이다. 세잔이 사과를 그리고 난 후, 그 사과는 아무런 의미가 없고, 오직 세잔의 화폭 속에 있는 사과만이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 것과 같다. 따라서 평론가의 글이 그 작품과 관련이 없는 매우 주관적인 것일지라도 나름대로 완성된 작품이라면 나무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이든 평론이든 가능하면 쉽게 썼으면 하는 바램이다. 어렵기만 한, 마치 덜 익거나 이상한 맛이 나는 과일 같은 글들은, 먹을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은 이 바쁜 세상에, 아무리 몸에 좋다 해도 망설이기 마련이다. 물론 아서 단토(Arthur Danto)의 예술철학에 기대어 보면 나름대로 다 수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예술의 종말’을 이야기 했는데, 그 말은 ‘예술의 끝’이라는 말이 아니라 예술의 해방과 새로운 시작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보편적인 예술의 정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예술에 대한 어떠한 제한이나 구속이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모든 예술가나 비평가는 하나의 작품을 놓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고 평가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읽힌다. 덜 익은 예술가와 평론가들에게 아서 단토의 주장은 마치 구원의 메시지와도 같지 않은가! 내가 지금까지 32회에 걸쳐 이야기했던 것들이 혹시 좀 모자라거나 잘못된 것들이 있더라도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견강부회해 본다.

1. 프라도 미술관(Museo Nacional Del Prado)



마드리드의 프라도 거리를 따라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 프라도 미술관, 티센-보르네미서 미술관은 삼각형으로 위치하고 있어 '골든 트라이앵글(Golden Triangle)'이라고 부른다. 그중에 대표적인 프라도미술관은 1819년에 페르난도 7세에 의해 왕실미술관으로 문을 열었으며, 1868년 이사벨라 2세 때 국유화되었다. 15세기 이후 스페인 왕실에서 수집한 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으며, 회화 약5천점, 판화 약2천점, 조각 700여개 등을 소장하고 있는 유럽 3대 미술관의 하나이다.



프라도 미술관의 특징은 단 한 작품도 훔쳐온 것이 아니며,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문화 예술에 관심이 많아 그림 값을 지불하고 사온 작품들이라는 것이다. 또한 과거 유럽 사람들은,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이 되고 있는 피레네 산맥 너머에 있는 스페인을 미개인들의 나라로 생각했기 때문에, 스페인의 작품들이 다른 서유럽으로 퍼져나가지 않아, 스페인 회화 작품은 프라도미술관에서 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프라도 미술관에서 제공하는 우리말로 된 안내서에 추천되고 있는 주요 명화들 중에서, 티치아노 <다나에와 황금비>, 푸생 <파르나소스>, 카라바조 <다윗과 골리앗>, 엘 그레코 <삼위일체>와 <목동들의 경배>, 벨라스케스 <시녀들>, 렘브란트 <홀로페르네스의 연회에서의 유디트>, 고야 <옷을 벗은 마하>와 <옷을 입은 마하> 그리고 <마드리드의 1808년 5월 3일>, 루벤스 <삼미신>과 <동방박사의 경배>, 베로네제 <비너스와 아도니스>, 틴토레토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예수>, 라파엘로 <추기경 초상>, 뒤러 <아담과 이브>, 안젤리코 <수태고지>, 보쉬 <쾌락의 동산>, 로히르 반 데르 웨이덴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 소로야 <해변의 아이들> 등을 ‘자전거나라’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 자세히 살펴보았다.



(1) 안젤리코 <수태고지>









이탈리아 출신 화가인 안젤리코(Fra Angelico, Giovanni, 1378-1455)의 <수태고지>는 여러 언어로 지원되는 프라도 미술관의 팸플릿 표지에 나오는 천사의 그림이 들어 있다. 귀도 디 피에로(Guido di Piero)라는 본명을 가진 이탈리아 피렌체 출신의 이 화가는 천사가 마리아께 예수의 잉태를 알리는 수태고지 장면을 화폭에 담았다. ‘프라 안젤리코’라는 화가의 이름은 그가 죽은 뒤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천사와 같은 수도사'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림 오른편 파란 베일을 쓴 여인이 예수 잉태 전의 성모 마리아이며, 화면 중앙 황금빛 날개를 달고 마리아 앞에 무릎을 꿇어 예수의 잉태를 알리는 천사는 가브리엘이다. 화면 왼쪽 위에서부터 마리아에게로 향하는 금빛 사선은 성령으로 잉태됨을 의미하는 표식이며, 화면 왼쪽에는 선악과를 따먹은 후 에덴의 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이브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2) 루벤스 <삼미신>


폴랑드르(지금의 벨기에)의 화가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의 대표작인 <삼미신(三美神)의 주제는 이미 고대 그리스 조각에서 자주 다루어졌던 것이다. 제우스와 에우뤼노메(Eurynome)의 딸로 태어난 아글라이아(Aglaia), 에우프로쉬네(Euphrosyne), 탈리아(Thalia)는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동행하며 시중을 드는 여신들로 등장한다.



삼미신은 많은 화가들이 그렸는데, 라파엘로가 그린 삼미신(Les trois Grâces, 15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17.8x17.6Cm, Musée Condé)은 루벤스가 그린 그림의 삼미신과 유사한 포즈를 취하고 있지만, 프라고나르(Jean-Honoré Fragonard, 1732-1806)가 그린 삼미신(Les Trois Grâces, 18세기경, 캔버스에 유채, 900 x 1340cm, 프라고나르 미술관)과는 그 분위기가 다르다. 프라고나르가 그린 삼미신은 모두 정면을 바라보고 있으며 포즈도 위의 두 그림들과 다르다. 삼미신은 르네상스 미술 이후 고대의 명칭과는 달리, 순결, 사랑, 아름다움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순결한 처녀가 사랑에 눈뜨게 되면 아름다워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Oil on Wood, 220.5 x 182 cm, Oil on Canvas, 900 x 1,340cm,
Museo del Prado, Madrid> Musee Fragonard, France>





루벤스의 그림에서 벌거벗은 세 여신은 숲속 광장에서 춤추듯 손과 팔로 서로를 붙잡고 있다. 나뭇가지에는 여신들이 벗어놓은 옷들이 걸려 있고, 큐피드는 나팔을 안고 여신들을 내려다 보고 있다. 루벤스는 이 작품에서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여인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두 번째 아내 헬레네 푸르망(Forment)을, 오른쪽에는 첫 번째 아내 이사벨라를 그려 넣어, 가장 이상적인 여인으로 자신의 아내 두 사람을 모델로 한 것이다.


(3) 고야 <옷을 벗은 마하>와 <옷을 입은 마하>











1800-03. Oil on Canvas, 95x190 cm. Museo del Prado, Madrid>




스페인 미술을 대표하는 고야(Francisco de Goya, 1746-1828)는 1800년에 <옷 벗은 마하>를 그렸고, 1803년에는 <옷 입은 마하>를 그렸다. 중세나 르네상스 시대에도 누드화가 그려졌지만 그것은 여신을 그린 것이었고, 인간 여성을 그린 누드화는 <옷을 벗은 마하>가 처음이라고 한다. 이 그림은 스페인 종교재판에서 외설스럽다고 압수 판결을 받았으며 고야는 그림에 옷을 입히라는 압력을 받았지만, 고야는 그림에 옷을 입히는 것을 거절하고 <옷 입은 마하>를 새로 그렸다는 것이다.



그림의 모델인 마하가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고야는 모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가장 유력한 후보는 고야의 애인이었던 알바 공작부인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마하는 실존 인물이기보다는 이상화된 여성으로 보는 주장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두 작품은 모두 1803년 스페인의 재상 마누엘 고도이(Manuel Godoy)의 저택에서 발견되었다. 당시 엄격한 가톨릭 국가였던 스페인에서 <옷 벗은 마하>를 공개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고도이는 <옷을 입은 마하>를 걸어둔 벽을 밀어서 한 바퀴 돌리면 <옷을 벗은 마하>가 나오는 비밀 공간을 만들어놓고 사람들과 함께 감상했다는 설도 있다.

(4) 보쉬 <쾌락의 정원>






220x195 cm, Wings: 220x 97 cm, Museo del Prado, Madrid>




폴랑드르 출신 화가 보쉬(Hieronymus Bosch, 1450-1516)가 그린 <쾌락의 정원>은 미술사 사상 가장 해석이 불가능한 그림이라고 한다. 세 폭의 제단화로 그려진 이 작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신기한 형상들로 인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신비롭기도 하고 오싹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이같은 보쉬의 개성적인 표현과 상상력은 무엇보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제단화의 오른쪽에는 아담과 이브가 있는 에덴동산이 그려져 있으며, 중앙에는 이상한 새와 동물들과 사람들이 엉켜서 즐기고 있는 괘락의 동산이 그려져 있다. 왼쪽 지옥에는 귀를 관통하는 칼, 거대한 사람의 뱃속에서 고문 받고 있는 사람들, 사람보다 큰 새의 배설물이 되어 나오는 인간들이 묘사되어 있다. 보쉬는 무엇을 근거로 이 그림을 그렸는지 여전히 수수께끼가 되고 있다.


2. 소피아 미술관(El Museo Nacional Centro de Arte Reina Sofía)


소피아 미술관은 이전에 국립병원이었던 건물 일부를 보수하여 1988년 5월 27일에 '국립 소피아 왕비 예술센터 박물관'이 되었다. 1992년 5월 10일, 전신인 스페인 현대 미술관(Museo Español de Arte Contemporáneo)의 소장품들과 함께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일반적으로 19세기까지의 예술품은 프라도 박물관에 소장하고 그 이후의 작품을 소피아 미술관에서 소장하며, 소피아 미술관에는 스페인의 근현대 미술 작품을 중심으로 피카소, 달리, 미로 등 20세기의 뛰어난 예술가들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스페인 작가들 외에도 조르주 브라크, 알렉산더 콜더, 르네 마그리트, 막스 에른스트, 프랜시스 베이컨, 마르크 로스코 등의 작품도 전시되어 있다.


(1) 피카소 <게르니카>










소피아 미술관의 소장품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피카소의 <게르니카>로 별도의 특별공간에 전시되어 있는데, 1937년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의 폭격에 의해 폐허가 된 게르니카의 비참한 상황을 그렸다. <게르니카>는 수차례의 예비 드로잉과 함께 보존되고 있은데, 피카소가 생존해 있던 동안에는 뉴욕 현대 미술관에 임대되어 있었으며, ‘스페인이 민주화 된 후 게르니카를 스페인으로 반환해달라는 피카소의 유언에 따라 1981년에야 스페인으로 돌아와, 1992년 소피아 미술관에 자리를 잡았다.



1937년 스페인 정부가 피카소에게 파리 만국 박람회 스페인관에 걸릴 그림을 의뢰했다. 마침 프랑코 정권은 히틀러의 협력을 받아 스페인 바스크 지방에 있는 인구 칠천명의 케르니카를 폭격하였고, 그 사진이 신문에 게재되었다. 그 폭격으로 2,5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대부분이 노인, 여자, 어린이들이었다고 한다. 이 사진을 보고 스케치를 시작한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그해 6월에 파리 만국박람회에 걸면서 전쟁의 참혹성을 세계만방에 널리 알렸다. 이 그림이 52개국이 참가한 박람회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그가 당시 천착한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동물인 미노타우로스를 활용하고, 입체주의 양식을 채택한 그림이다. 황소 미노타우로스와 고통으로 울부짖는 여인, 신문기사를 오려낸 듯한 기법, 표호하는 말발굽아래 펼쳐지는 아비규환 등을 그리고 있지만, 말 뒤에 전등과 자유의 여신상 손에 들여 있는 횃불은 그나마 희망을 나타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참혹함을 강조하기 위해 검정, 흰색, 회색만을 사용하여 그 호소력이 배가되고 있다.

(2) 달리 <창가의 소녀>와 <거대한 마스터베이터>







1925, Oil on papier-mâché, 105x74,5 cm, Masturbateue, 1929, Oil on Cavas,
Reina Sofia, Madrid> 110x150 cm, Leina Sofia, Madrid>




달리가 21세인 1925년에 그린 <창가에 있는 소녀>는 여동생 안나 마리아를 그린 것이다. 언뜻보면 그저 평범한 그림이라고 하겠으나, 달리가 1922년에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에 매료되어 그의 그림에 꿈과 무의식을 표현하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을 알면서 부터는 뭔가 현실과 환상 세계에서 갈등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밝음과 어둠의 경계인 창문에 기대에 밝고 평화로운 세계를 동경하는 불안한 현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커튼과 뒷머리와 소녀의 겉옷의 주름들이 그러한 불안을 강조하고 있는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달리의 대표작의 하나라 할 수 있는 <거대한 마스터베이터, 1929>는 ‘내 자신의 이성적 불안의 표현’이라고 달리가 언급한바 있다고 한다. 당시는 친구 엘뤼아르의 아내인 갈라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때이다. 그림 오른쪽 여자의 상반신이 보이고 그녀의 얼굴은 남자의 다리 사이 성기가 있는 부분에 눈을 감고 다가가 냄새를 맡으며 황홀경에 빠져 있는 모습이다.



그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는 남자의 코는 바닥을 향하고 있으며 메뚜기가 붙어 있는데 메뚜기의 배와 남자의 목에는 개미가 우글거리고 있어 그의 불안한 심리를 묘사하고 있다. 남자의 얼굴은 발그레해서 흥분상태인 듯한 모습이다.


(3) 아폴리네르 시집 <알코올(Alcools)>


기욤 아폴리네르(Guillaume Apollinaire, 1880-1918)의 첫 시집 초판본을 소피아 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20세기 초의 시대정신을 충실하게 구현한 시인으로 평가받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집 『알코올』은 우리나라 황현산이 번역하여 출판사 <열린책들>에서 출간한 바 있다.



아폴리네르는 1880년 이탈리아 로마에서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모나코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생애의 대부분을 프랑스에서 지내다가 죽기 2년 전에야 비로소 프랑스에 완전히 귀화하였다. 1918년 그는 전쟁에서 입은 상처와 스페인 독감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을 3일 앞두고 38세의 나이로 짧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는 화가 피카소와 브라크 등과 교류하였으며, 전위예술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1898년부터 여러 잡지에 시를 발표하기 시작하였으며, 프랑스 문학사에서 상징주의의 황혼기이며 초현실주의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 시기인 20세기 초에 작품활동을 하였다. 당대의 시대정신을 가장 충실하게 구현한 시인으로 평가받는다.



『알코올』은 아폴리네르의 첫 시집으로, 1913년 메르퀴르 드 프랑스(Mercvre de France) 출판사에서 발간되었다. 부제인 「시집, 1898-1913」이 말하듯이 『알코올』은 아폴리네르가 시인으로서 처음 이름을 알린 이후 15년간의 결산이라고 할 수 있다.





<아폴리네르의 첫 시집 ‘알코올’. 우측에 피카소의 그림이 실려 있다.>




2015년 7월 14일 (수) : 마드리드 티센-보르네미서 미술관





(고갱의 <옛날에>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조반나 토르나부오니 부인의 초상>이 있는
티센-보르네미사 미술관 안내 팜프렜)




독일과 헝가리계 귀족인 티센-보르네미사 가문은 성공한 사업가들로, 대대로 미술 작품을 수집해 왔다. 특히 미술관을 설립한 티센 남작의 할아버지가 예술에 관심이 많아 많은 미술품을 수집하였기 때문에, 작품들을 한곳에 모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미국의 폴게티 재단, 영국, 독일, 스페인 정부가 티센의 소장품을 유치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는데, 결국 스페인 정부가 마드리드 중심지의 비야에르모사 저택(Palacio de Villahermosa)을 미술관 건물로 제공하게 되었다. 1992년에 현재 위치인 프라도 거리(Paseo del Prado)에 티센 미술관이 정식으로 개관되었고, 티센 남작이 스페인 정부에 소장품의 대부분을 헐값에 넘기면서 1993년부터 티센 컬렉션은 스페인 국가 소유가 되었다.



프라도 미술관과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센터가 스페인 미술품을 중점적으로 전시하고 있다면, 티센-보르네미서는 유럽 미술의 흐름과 특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다채로운 컬렉션을 자랑한다.



이탈리아와 플랑드르의 르네상스 시대 작품, 유럽 낭만주의 작품, 인상파화가들의 작품, 미래주의와 입체주의에서 팝아트에 이르기까지의 근현대미술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미국의 현대미술 작품을 다량 소장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하겠다.



미술관에서 추천하는 작품과 도록을 들춰보니, 두치오 <그리스도와 사마리아인, 1310-11>, 반에이크 <수태 고지, 1433-35>, 한스 홀바인 <헨리 8세의 초상, 1537>, 마틴 존슨 히드 <폭포 가까이에 있는 난초와 벌새, 1902>, 고갱 <마타 무아(옛날에), 1892>, 뭉크 <저녁, 1888>, 에곤 쉴레 <강가의 집들, 1914>, 코코슈카 <막스 쉬미트의 초상, 1914>, 피카소 <클라리넷을 든 남자, 1911-12>, 샤갈 <마을의 부인, 1938-42>, 간딘스키 <세개의 점이 있는 그림 No. 196, 1914>, 달리 <잠이 깨기전 석류나무 주위에 벌이 날아다니는 것에 의해 야기된 꿈, 1944>, 피카소 <거울을 든 어릿광대, 1923>, 호퍼 <호텔방, 1931>, 오키프 <달이 뜬 뉴욕거리, 1925>, 로이 리히텐슈타인 <목욕하는 여인, 1963> 등이 관심을 끌었다.


(1) 두치오 디 부오닌세냐 <그리스도와 사마리아인>






panel, 43.5x46 cm, Museo Thyssen-Bornemisza>




요한복음 4장에 예수와 사마리아인의 대화 이야기가 나온다. 당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상종하지 않았는데, 유대인인 예수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달라고 말을 건다. 대화 중에 예수께서 “이 물을 마시는 사람은 곧 다시 목마를 것이오. 하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오.”라고 하자 여자는 그 물을 자기에게도 달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믿게 된다. 바로 그때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하는 것을 보고 놀란다는 이야기이다.



이탈리아 시에나 화파(Siense School)의 화가인 두치오(Duccio di Buoninsegna, 1255-1318)는 바로 성경에 있는 이 장면을 그린 것이다. 초록색 돌로 만든 것 같은 우물에 예수님이 앉아 있고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와 밧줄이 달린 두레박을 들고 있다. 우물 뒤에는 바위가 보이는데 이는 시골길에 있는 우물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오른쪽에는 제자 네 명이 성문 밖으로 나오는 모습이 보이는데 이들은 시내로 갔다가 돌아오는 중이다.



예수가 앉아 있는 우물과 우물의 기단은 단축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단축법은 기본적으로 눈의 착시를 이용하여 어떤 형태를 좀더 설득력있게 제시하기 위한 기법이라는 점에서는 일종의 원근법에 속한다. 제자들이 서 있는 길이 뒤로 물러선 듯이 그려진 것이나 성문의 아치 여러 개를 겹쳐서 표현한 것 등이 두초가 사용한 원근법과 단축법이다. 당시까지는 주로 중요한 대상을 크게 그리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지만, 두치오는 단축법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활용하여 이 그림을 그린 것이다.


(2) 코코슈카 <막스 슈미트의 초상>







Max Schmidt, 1914, 1914, Oil on wood, 181 x 220 cm,
Oil on canvas. 90 x 57.5 cm, Kunstmuseum, Basel>
Museo Thyssen-Bornemisza, Madrid>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는 1905년 빈 미술공예학교에 들어가 회화를 공부했으며, 당시 유행한 아르누보와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그는 빈 분리파(Wien Secession)에 가담하여 1908년과 1909년의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했다. 빈 분리파는 1897년 클림트를 주축으로 낡고 판에 박힌 사상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 미술과 삶의 상호 교류를 통하여 인간의 내면적인 의미를 미술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결성되었다.



코코슈카는 또한 빈에서 격렬히 일어난 표현주의 운동에 참여하여 내면의 심리를 관통하는 독특한 표현양식과 이미지를 선보였다. 시인이며 극작가로도 활동한 그는 희곡 <살인자, 여인들의 희망(Murderer, the Hope of Women, 1909>을 발표해 표현주의 연극의 창시자라는 평을 얻기도 하였다. 시집 <꿈꾸는 소년들(Die träumenden Knaben, 1918)>도 출간한 바 있다.



코코슈카는 1909년 근대 건축가이자 작가인 아돌프 로스(Adolf Loos)를 만나면서 분리파의 장식적인 양식을 포기하고 대신 표현주의 예술 및 문학 운동에 더 깊이 빨려들어갔다. 그는 인간의 내면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왜곡된 형상을 제시했고, 불규칙하고 굴곡이 심한 선과 차갑고 어두운 색채, 그리고 강하고 거친 붓 터치는 그의 작품의 특징이 되었다. 특히 초상화를 그릴 때 인물의 외형적 생김새에 치중하기보다는 심리적이며 정신적인 내면을 중시하여 이를 나타내려고 애썼다. 이러한 경향이 티세-보르네미사 미술관에 있는 막스 쉬미트의 초상화에도 잘 나타나 있다.



코코슈카는 1914년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미망인 알마 말러(Alma Mahler)와의 격정적인 사랑을 소재로 한 <바람의 신부(폭풍우), 1914>를 통해 명성을 확고히 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드레스덴 미술 아카데미의 교수로 활동했으며, 1931년 나치가 집권하면서 히틀러 독재정권의 탄압이 심해지자 프라하로 이주하였다. 독일에서는 그의 작품을 퇴폐미술로 간주하여 전시는 물론 작품 활동조차 금지되었다.



1938년 영국으로 망명해 제 2차 세계대전 중이던 1941년 올다 팔코프스카(Olda Palkovska)와 결혼하고 1946년 영국 시민권을 얻었다. 1953년 이들 부부는 스위스에 정착하였으며 코코슈카는 1980년 9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1911년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미망인이며 그보다 7세 위인 알마 말러를 만나 3년간 격정적인 사랑에 빠졌다. 훗날 코코슈카는 이때가 "내 생애에서 가장 혼란한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오스트리아군에 입대했을 때에야 알마와 관계를 끊을 수 있었다.



코코슈카가 알마와 사랑에 빠졌을 때 그린 〈바람의 신부, 1914>는 화가와 알마가 사납게 날뛰는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는 거대한 조가비 안에 나란히 누워 있는 모습이다. 자유분방한 붓놀림은 그림 전체가 소용돌이치며 빙글빙글 도는 느낌을 준다. 두 연인이 누워있는 침대에는 차갑고 냉랭한 분위기와 거센 바람이 가득하다. 알마의 손을 행여나 놓칠까봐 꼭 잡고 있는 오스카의 퀭한 눈이 인상적이다. 알마는 워낙 자유분방하여 언제 사라질지 몰랐기 때문에, 집착과 편집증을 보이는 코코슈카는 늘 불안했다. 당시 빈에는 화가인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등은 물론이고, 음악계엔 구스타프 말러, 쇤베르크 등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들이어서 사랑에 있어서도 거칠 것이 없었다.



알마 말러는 화가 에밀 쉰들러의 딸로 태어나 음악과 미술에서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았으며 훗날 작곡가로써 이름을 남겼다. 아버지 제자였던 클림트와 사귀었지만 스스로의 자유로움을 중시하던 클림트였기에 쉽게 그녀를 놓아주어, 구스타프 말러와 결혼하게 된다. 남편이 죽고 코코슈카를 만났지만, 결국은 당대 유명 건축가인 '발터 그로피우스'와 1915년에 재혼하였다. <바람의 신부>가 1914년에 그려졌다는 사실을 보며, 코코슈카의 번민이 이해될 수 있다.


(3) 호퍼 <호텔방, 1931>






Thyssen-Bornemisza, Madrid>




미국출신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 1882-1967)는 1889년부터 1900년까지 뉴욕 상업미술아카데미에서 삽화를 공부하고, 이어 뉴욕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삽화와 회화를 배웠다. 체이스(William Merritt Chase)와 헨리(Robert Henri)에게 사사했으며, 1906년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뉴욕에 있는 광고회사에 취직했다. 1908년 뉴욕에 정착하여 줄곧 이곳에서 살았다. 그는 광고미술과 삽화가로 활동하며 생계를 유지해 나가는 한편 회화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고 틈틈이 작품을 제작했다.



호퍼는 1913년 <항해>를 뉴욕 ‘아모리 쇼’에 출품하고 처음으로 작품을 팔았으나 1923년까지는 단 한 작품도 팔지 못했다. 1924년 미술학교에서 함께 공부했던 니비슨(Josephine Nivison)과 결혼하였으며, 그녀는 호퍼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의 모델이 되어줌은 물론 그의 예술에 있어서도 조언을 아끼지 않은 인생의 동반자였다. 이 시기부터 호퍼는 수채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이 무렵 뉴욕에서 열린 그의 두 번째 개인전에서 전시 작품들이 모두 판매되는 행운을 안았다.



호퍼는 1925년에 <철길 옆의 집, 1925>을 발표하여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 작품과 아울러 <호텔방, 1931>에서도 미국 현대사회의 외로움과 고독의 정서를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의 회화는 일상생활의 한 단면을 자연스럽게 펼쳐 보여주지만, 그 안에는 미국 도시민들의 삶을 특징지었던 상실감과 소외감, 절망감을 환기시킨다.”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는 팝아트와 슈퍼리얼리즘에 영향을 미친 선구자로 여겨지고 있으며, 20세기 미국인의 삶의 단면을 무심하고 무표정한 방식으로 포착한 그의 작품은 1960년대 이후 오늘날까지 미술은 물론 영화 분야에까지도 큰 영향을 끼쳤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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