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조셉머피의 요한복음 해설: 당신안의 평화] 요한복음 1장 본문
잠재의식을 바꿔라!
조셉머피, 당신안의평화
[조셉머피의 요한복음 해설] 요한복음 1장
조셉머피 :
너무나 유명한 분이죠. 잠재의식의 힘을 비롯해서, 부자가 될 수 있다, 잠자면서 성공한다 등 베스트셀러 작가십니다. 성공학에 관심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이 분 책 한권 이상은 봤을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셉머피가 성공학에 대한 작품만 쓴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조셉머피는 동서양의 다양한 경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바가바드 기타, 주역, 성경 등 경전이라면 모두 관심을 가졌죠. 그 이유가 모든 경전은 같은 말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상징에 가려져 그 본 의미를 왜곡해서 받아들이기 때문에 경전들이 다 다른 이야기처럼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조셉머피의 사상에 영향을 미쳤던 인물은 압둘라였습니다. 압둘라는 네빌 고다드의 스승이기도 한데, 그는 에티오피아 랍비로서 카발라에 능통했던 사람입니다. 카발라는 모든 상징의 바이블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성경 안에 담겨진 상징의 의미도 해석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런 분에게 영향을 받았던 조셉머피였기에 성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셉머피의 저서 중에는 신기하게도 주역강의도 있고 성경강의도 있습니다.
지금 소개해드릴 이 책은 요한복음 전체를 해설한 책입니다.
그는 네빌고다드처럼 성경을 단순히 신앙의 경전으로 보지 않고, 마음에 대한 교훈을 상징적으로 풀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을 보면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상징은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리고 성경에서 실천적인 교훈을 어떻게 얻게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저는 당신 안의 평화를 2판을 대비해 내용들을 수정 작업 중에 있습니다.
수정 작업을 마친 부분들을 조금씩 올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요한복음 1장 전체를 수정해서 올렸는데, 앞으로 수정되는 데로 계속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이 책의 번역은 www.legacyofmurphy.com 의 운영자이신 김민님께서 번역료 한푼 받지 않고 해주셨습니다.
조셉머피 박사님에 대해 궁금한 것은 직접 사이트에 가셔서 김민님에게 질문을 주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요한복음 1장 해설
요한복음 1장 1절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였으니,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었더라.
태초에 란 모든 창조과정의 시작을 의미한다. 위의 절을 즉시 우리 삶에 적용해보자. 성서에서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시어 그들을 고치셨으며 위경에서 건지시도다. [시편 107:20 ]라는 구절을 보았을 것이다. 당신이 어머니의 건강을 위해 기도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때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말을 보낼 수 있다. 말은 당신의 소망 혹은 명확한 생각이나 개념을 의미한다. 당신의 소망, 즉 말은 명확하고 분명해야 한다. 지금 어머니가 완벽히 건강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 사고는 실제적인 것이다. 트라워드 [토마스 트라워드, 1847-1916] 판사였고, 큄비와 함께 신사상 운동의 아버지로 평가 받는다 가 말했듯이 이것은 그 자체의 과학과 방식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가 강제로 이 씨앗(생각)에 생명을 줄 수도, 자라나게 할 수도 없다. 당신은 그것을 땅에 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어서 성장을 촉진시킬 뿐이지, 강제로 자라게 할 수 없다. 그것 안에는 그 본연의 생명력과 스스로 자라나게 하는 힘이 있다.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것은 당신이 해야 할 두 번째 단계이다. 여기서 함께 라는 것은 느낌에 의해서 두 개의 생각을 연결시키는 것으로 느낌과 확신을 의미한다. 마음을 고요히 만들고 어머니를 창조한 치유의 존재를 생각한다면 당신의 마음은 수용적receptive으로 된다. 이 수용적 마음은 소망이라는 씨앗을 심는 토양이다.
하나님의 치유력이 지금 당신의 어머니를 ‘조화, 건강, 평화라는 하나님의 완벽한 모습’으로 변화, 치유, 회복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알라. 마음속에서 건강하다는 상황과 분위기를 취할 때까지 이것을 계속하라. 심지어는 집에서 어머니가 늘 해오던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어머니가 하나님의 기적이 자신에게 일어나 놀라운 치유가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다. 당신은 이런 것들을 신성한 마음의 작업터에서 굉장히 생생하고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
건강하다는 느낌은 이제 당신 어머니의 마음에서 부활하고 어머니의 잠재된 치유와 건강의 힘을 깨어나게 한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이유는 오직 하나의 마음이 있고 마음의 법칙에는 시공간의 제약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이 어머니가 완벽하게 건강하다는 생각을 한다면 어머니 역시 즉각적으로 느낄 수 있다. 신의 마음 세계에서 당신이 어머니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어머니와 동일시된다. 수신처인 어머니는 당신이 쏟아내는 우주의 방송을 받는다. 왜냐하면 주관적으로 당신과 어머니는 하나이고, 주관적, 무저항적, 수용적인 마음의 상태에서는 이곳과 저곳이라는 공간적 제약이 없어 당신의 생각은 제약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무어라고 말하든 주위 사람들이 어떠한 견해를 말하든, 그것들에는 주의를 두지 않고 위와 같은 방식으로 하루 2-3차례 기도해야 한다.
당신의 생각과 느낌이 치유의 말words임을 깨달아야 한다. 당신에게는 이런 치유 능력이 있다. 당신은 정신적mental으로 신중한 수술을 행하는 정신적 의사인 것이다. 수술 도구(생각과 느낌)는 항상 잘 소독되어 있어야 한다. 단호하게 모든 공포를 거부하고 당신이 선언하는 것은 어머니의 신체를 다스리고 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앎으로써 확신을 가지고 말해야 한다.
생각은 그것에 맞게 발아發芽하고 성장한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당신은 어머니가 건강하다는 개념에게 생명을 주는 것에 성공했다.
당신은 이것에 믿음과 기대라는 물을 주어 싹이 트도록 했다. 그리고 당신의 말(당신의 내적느낌, 건강에 대한 확신)은 신神이다. 또한 신God은 선(善)Good이다. (신God과 선Good은 동의어이다) 건강한 어머니에 대한 생각은 완벽한 치유를 일으킨다. 이렇게 기도의 공식을 적용시켰다. 요한복음의 내용 전체는, 의식이 어떻게 하나의 생각을 받아들여 그것이 경험과 사건이 되는지를 가르친다.
요나를 삼켰던 고래 이야기는 바로 그런 내용이다. 고래는 당신의 잠재의식을 나타낸다. 잠재의식은 어떤 생각(요나)을 사실로 느낄 때 받아들인다. 그리고 들어온 것은 밖으로 표현(땅으로 내뱉다)된다. 요나는 고래 배에서 3일 동안 있었다고 전해진다. 3일은 당신의 기도가 응답 받았다는 느낌이나 확신에 도달하는 시간의 길이를 의미한다. 이것은 실제 3일과는 무관하다. 숫자 3은 어떤 생각이 당신 의식 속에 완전히 흡수될 때까지 그 생각과 정신적으로 작업하는 시간의 길이를 표현한 것이다.
요한복음 1장 2절, 1장 3절, 1장 4절
(2) 그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느니라.
(3) 만물은 그에 의해서 지은 바 되었으며, 이미 지음받은 것 가운데 그가 없이 지어진 것은 아무 것도 없더라.
(4)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오직 하나의 창조의 힘, 하나의 근원이 있다. 신神은 인식認識, 절대적 의식Unconditioned Consciousness, 생명이라 불린다. 오직 하나의 생명이 있고 이 세상 모든 것은 이 생명을 통해서, 즉 이 의식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성서에서는 신을 "I AM"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존재를 의미한다. 태양, 달, 별, 행성 등은 "나는(I AM)"이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해서 탄생된 것이다. 사실, 우리가 보고 있는 모든 것은 I AM의 무한한 차별성으로 나타난 것이다.
오직 하나의 원인, 실체, 근원이 있다. 당신이 무엇이든지 "나는(I AM)"에 느낌으로써 결부시킨다면, 그것은 당신 세계에 나타난다. 이것이 성서에서 말하는 "그와 같은 방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것은 없다." 의 의미이다.
느낌이 없다면 아무것도 만들 수 없다. 그래서 당신이 현재 빈곤을 느끼고 있다면 당신은 가난해지고 만다. 반대로 당신이 풍요롭다고 느끼면 풍요롭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존귀하다고 느끼면 또 그렇게 된다.
"빛" 은 성서에서 지성을 의미한다. 무한한 지성은 당신 안(I AM)에 있다. 당신의 모든 일이 신에 의해 인도된다고 느끼고 깨달아라. 그렇게 한다면 당신은 그런 인도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때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라는 구절의 의미를 느끼고 알 것이다.
요한복음 1장 5절, 1장 6절, 1장 7절
(5) 그 빛이 어두움 속에 비추어도 어두움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더라.
(6)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7) 그가 증인으로 왔으니 빛에 관하여 증거하려 함이며, 모든 사람이 그를 통하여 믿게 하려 함이더라.
"어두움"은 무지 또는 마음의 법칙에 대한 앎의 부족을 의미한다.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 그대로 우리 자신이 된다는 것을 모를 때 우리는 어두움 속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속성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절대적 존재가 스스로 제한한 상태에 머무른 것이다.
인간은 자신이 누구인지 발견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인간은 로보트가 아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그 경험의 원인이 자신의 마음태도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외부세계의 구속감에서 깨어나기 시작한다.
마음의 법칙을 알지 못하면 소망을 성취할 수 없다. 여기서 "요한"이라는 이름은 특정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진리를 인식하기 시작하는 의식상태를 의미한다. 우리 모두는 빛(신)의 증인이 되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마음과 육체와 주변세상에 조화, 건강, 평화를 나타낼 때 우리는 진정한 빛의 증인이 된다. 끊임없이 자신을 개선transcending시키는 것을 예수님으로 상징할 수 있다. 그는 모든 사람 안에 있는 힘을 설명해주는 길잡이다.
우리 모두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당신은 내가 하는 일을 할 것이요, 이보다 더 큰일들도 할 것이다.
예수님이 사용했던 힘은 우리 모두 안에 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이 했던 것처럼 수용적인 상태까지 우리의 의식을 고양시키면 우리도 역시 장님 눈을 뜨게 하고, 귀머거리 귀를 트이게 할 수 있다. 예수님이 했던 모든 것을 우리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믿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장 8절, 1장 9절, 1장 10절, 1장 11절
(8) 그 사람은 그 빛이 아니었고 그 빛에 관하여 증거하라고 보내심을 받았더라.
(9) 세상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비치는 참 빛이 있었으니
(10) 그가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에 의해서 지은 바 되었으나 세상은 그를 알지 못하더라.
(11) 그가 자기 백성에게 오셨으나 자기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더라.
8절에서는 당신의 지성(요한의 또 다른 이름)이 진실한 빛이 아니고, 내부의 무한한 지성이 표출된 것이 진실한 빛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신의 지혜로 나의 지성이 물들어 깨어날 때 나는 빛을 목격하게 된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겠다. 나는 이 장을 쓰기 며칠 전에 해결하기 곤란한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다. 그 때 긴장을 풀면서 마음을 차분히 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한한 지성은 해답을 알고 있다. 지금 그 해답을 얻었다."
그리고는 이 문제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하던 집필을 계속했다. 이 장의 후반부를 쓸 때, 마치 토스터에서 토스트가 나오듯이 그 해결책이 나의 현재의식 속으로 튀어 나왔다. 이것은 내부의 인도, 즉 직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직감은 내며의 마음속에 있는 신의 지혜가 해결책 또는 응답의 형태로 현재의식에 나타난 것이다. 우리는 이 신성이 보내주는 내면의 인도를 수행하기 위해서 지성(요한)을 사용한다.
"모든 사람에게 비친 참 빛"이란 인간 안에 있는 나는I AM, 즉 신을 의미한다. 간단히 일상적 용어로 말하자면 인식認識 또는 의식意識이 세상의 빛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점차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만약 어떤 것에 대해서 당신이 알지 못하면 그것은 당신 세계에 있지 않다.
당신으로부터 몇 블록 떨어진 곳에서 집이 무너졌다고 가정하자. 만약 당신이 그 장면을 보지도 못하고 그 무너지는 소리 또한 듣지 못했다면, 당신에게는 그 일이 발생하지 않은 것이다. 당신의 빛(인식)은 그것을 모르고, 따라서 그것은 당신 의식의 일부분이 되지 못했다.
당신이 인식하는 것이 당신 세계 속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명심하라. 다시 말해서, 당신의 인식은 당신 세계를 창조하는 빛이다. 내가 당신의 세계라고 말하는 것은 당신의 신체, 환경, 그리고 당신의 모든 경험을 의미한다.
당신은 이미 5절에서 "그 빛은 어둠 속에서 비치고"란 구절을 읽었다. 잘못된 개념, 틀린 이론, 그리고 부정적인 사고는 당신의 어둠을 의미한다. 만약 선풍기가 목을 뻣뻣하게 할 수 있다고 믿으면 이것은 잘못된 빛, 틀린 지식이고 그 믿음에 따라 당신 세계에서 그와 같은 것을 겪게 된다.
당신을 고무시키는 사고와 개념, 당신을 고양시키고 고귀하게 하고 치유시키고 축복하는 생각이 진실한 빛인 하나님의 지혜이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은 당신 마음을 환하게 비추고 평화와 안정을 준다. 나는 당신이 인식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우리 마음의 이미지와 생각의 틀에 따라 우리 자신의 세계를 만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10절은 당신의 의식이 당신 세계의 창조자이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모든 것의 원인이 그들 자신의 의식상태임을 모른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의식의 상태란 당신이 생각하고 느끼고 믿고 마음에서 동의한 것을 의미한다.
11절은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의식상태가 그의 모든 경험의 원인이라는 진리를 믿지 못한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는 외부에서 벌어진 일이 자신의 고통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원망한다.
(12) 그러나 누구든지 그를 영접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즉 그의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니라.
예수님이 이용했던 힘은 모든 사람 안에 있다. 하나님이 전능全能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면 우리가 전화기를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죽은 자를 다시 살릴 수 있고 장님을 치유시킬 수 있고 예수님이 했던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는 이것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믿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가 단정하고 있는 진리를 자신 내면에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 계속 기도해야 하는 이유이다.
우리가 아무개 아들이라고 믿는 한, 결코 하나님의 일을 하지 못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님의 힘을 인정하고 믿는 것이다. 그러면 기적은 일어난다.
(13) 그들은 피나 육신의 뜻으로나 또한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였고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들이라.
(14)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므로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으로)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서 언급한 "피나 육신"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제한을 상징한다. 하지만 우리의 생각과 마음의 이미지에 반응하는 전능한 영적인 힘을 인정할 때 우리의 한계는 사라진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본성을 말한다. 그리고 그 본성은 아름다움과 진리와 선, 그리고 완전함과 완벽함이다. 당신이 치유되었다는 느낌과 하나가 된다면 치유될 것이다. 이것은 "육신이 되어"라는 구절을 직접 경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당신의 소망)은 육신이 된다(이루어지다). 그래서 당신의 기도는 응답되어 조화와 행복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은 성경에서 "영광과 진리로 가득찬 독생자(당신의 최고의 소망)의 영광(신성한 사고의 실현)을 본다"고 표현되었다.
(15) 요한이 그에 관하여 증거하여 외쳐 말하기를 “이 분이 내가 말한 그 분이라. 내 뒤에 오시는 그가 나보다 앞선 것은 그 분이 나보다 먼저 계셨음이라.” 고 하니라.
(16) 우리 모두가 그의 충만한 데서 받았으니 은혜 위에 은혜니라.
(17) 율법은 모세를 통해 받았지만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 것이라.
당신은 요한과 같다. 당신은 항상 자신의 의식 상태를 목격하고 증언한다. 그래서 모든 외적 변화는 내적 변화 때문에 일어난다.
니콜 박사(*Maurice Nicoll(1884-1953)영국의 정신과 치료의사)는 그의 저서에서 성서에 나오는 기적, 풍자, 비유에 대해 언급했다. 그는 성서에 나오는 비유, 우화, 담화는 문자적 의미를 떠나서 그 자체에 내적이면서 심리적인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다음 구절을 보자.
"내 뒤에 오시는 그가 나보다 앞섰다."
치유되었다는 의식과 확신은 실제 치유보다 앞서야 한다. 손이 마비되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의 치유력이 자신의 손을 치유시키고 회복시켜, 다시 생기를 불어넣는다고 10-15분 동안 매일 여러 번 단언함으로써 자신의 손을 치유한 적이 있다. (그는 정기적으로 저자의 강연에 참석한 사람이다.)
그는 새로운 사람이 된 것이다. 손이 마비된 사람은 죽었고, 완벽한 손을 가진 사람은 깨어났다. 이것은 과거 의식 상태에서는 죽고 새로운 관념에서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17절의 의미는 율법과 말, 우주적(모세)인 것과 개인적인 것(예수님)을 의미한다. 모세는 당신의 소망이고 예수님은 당신의 확신이다. 모세와 예수님은 의식의 두 가지 면을 말한다. 모세는 ‘느낌이 창조자’라는 법칙을 우리에게 주었다. 예수는 우리의 현재의식과 잠재의식의 조화로운 결합과 기능을 의미하며 그리스도는 법칙의 이행을 의미한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간단히 일상적인 말로 표현하면, 나는 내가 바라는 상태가 이미 이루어진 느낌으로 가득 차 있다는 의미이다. 은혜와 진리(사랑과 자유)는 이 의식 상태를 뒤따라 일어난다.
(18) 아무도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독생자 그가 하나님을 분명히 밝히셨느니라.
(19) 또 이것이 요한의 증거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내어 그에게 묻기를 “네가 누구냐?” 고 하였더니
(20) 요한이 시인하고 부인하지 아니하였으니, 시인하기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하더라.
(21) 그들이 묻기를 “그러면 네가 무엇이냐, 네가 엘리야냐?” 고 하니, 그가 말하기를 “나는 아니다.”고 하자, 그러면 “네가 그 선지자냐?” 고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아니다.” 고 하더라.
(22) 그러므로 그들이 그에게 말하기를 “네가 누구냐? 우리로 우리를 보낸 자들에게 가서 답변하게 하라. 너는 네 자신을 무엇이라고 하느냐?” 고 하니,
우리 육안으로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마치 어려운 수학 문제에 대한 해답을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본다. 모든 사람은 유일한 존재의 자식이다. 우리 모두는 유일한 신 또는 생명의 표현이라는 자식이다. 당신의 명확한 소망은 또한 하나님의 아들, 즉 무한한 존재의 사고이다. 건강에 대한 소망은 신의 치유의 힘을 선언한 것이자 명백한 약속이다.
요한(지성)은 그리스도(신의 지혜)가 아니다. 네가 엘리야냐? 엘리야란 ‘하나님이 구원자’라는 의미이다.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원할 때 우리는 먼저 무한한 지성이 우리 내부에 있고 그것이 우리 사고에 응답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다시 말해서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 네가 그 선지자냐? 여기서 선지자란 예수님 또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내적 느낌과 확신을 말한다. 요한은 진리를 깨닫는 당신의 현재의식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당신이 외부현상을 거부하고 마음을 고요히 한 채, 주관적 세계에 있는 신의 지혜와 힘을 호출하는 것이다. 당신이 해결책을 조용히 생각하면, 당신이 가야할 길을 알려주는 신적 지혜의 내적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23) 그가 말하기를 “나는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것처럼 ‘주의 길을 곧게 하라.’ 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음성이라.” 고 하더라.
(24) 보냄을 받은 자들은 바리새인들로부터 왔더라.
(25) 그들이 그에게 묻고 말하기를 “네가 그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그 선지자도 아니라면 어찌하여 네가 침례를 주느냐?” 고 하니,
(26)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나는 물로 침례를 주지만,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분이 너희 가운데서 계시는데,
"광야에서 외치는 음성"은 우리 안에서 솟아나는 우주적 충동, 이상, 자극 등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 안에서 옳은 것을 하려는 생명이자 신의 원리이다. 옳은 일을 하기 위한 광야에서 외치는 음성과 같다. "광야"에 있다는 것은 우리가 제한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내면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을 깨닫지 못하면, 외부의 평판이나 쓸데없는 생각과 견해 속에 있게 된다. 왕국이란 저 멀리 떨어진 어떤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생명과 하나인 채로 존재한다.
우리 마음속의 잘못된 믿음을 제거(세례, 침례)하고 신의 진리를 받아들일 때 평화, 화합 그리고 기쁨의 왕국으로 들어갈 수 있다. 요한(현재의식)은 물로써 세례를 한다고 한다. 물론 우리는 머리에 물을 부음으로써 깨끗해지지 않는다. 우리는 "오직 우리 발을 깨끗이 씻을 때에만 우리 몸 전체가 깨끗해진다. 13:10" 라는 진리를 행해야 한다.
"발"은 우리의 이해를 상징한다. 우리가 잘못된 믿음과 미신에 대해서 죽을 때, 우리는 신의 존재란 우리의 의식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아님을 믿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의 의식은 형태, 모양이 없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다. 형태 없는 힘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의 사고와 느낌에 따라 모양을 취한다. 당신의 마음과 의식의 세계에서 당신은 당신 세계의 왕이자 그리스도이다.
왕으로서 입을 의복은 사랑의 분위기라는 옷이다. 또 왕관은 신의 힘에 대한 인식이다. 당신이 쥐는 홀笏, 권장權杖은 이 힘을 축복하고 치유하고 고무鼓舞시키는 당신의 권위를 말한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물로써 세례한다." 물은 물론 여기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예수님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그에게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솟아오르는 샘물이 되리라." 4:14
"물" 이란 인간 마음 안의 최고의 권위를 가진 하나님의 지혜와 진리를 의미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자신의 마음을 떠맡은 사고의 힘을 인식해 모든 적들을 추방하고 이 신적인 힘을 현명하고 건설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될 것이다.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이 물을 구하는데, 물이 없어서 그들의 혀가 갈증으로 덮으면. 이샤야 41:17"
지금 당신이 세례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여기서 물은 당신의 의식을 의미한다. 물은 어떤 용기에 담든 거기에 맞춰서 모양을 취한다. 그 "용기"의 역할을 하는 것은 당신의 지적태도와 느낌이다. 우리의 정형화되지 않은 의식은 우리의 사고, 느낌, 믿음에 의해서 항상 형태(상태, 경험, 우리 삶 속에서의 사건들)를 취하게 된다. 당신이 이것을 이해했다면 당신을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가진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외부의 힘과 외부의 원인이라는 잘못된 믿음을 제거하고 당신을 세례시킨다.
건강에 대한 느낌이 건강을 낳고, 부에 대한 느낌이 부를 가져온다.
(27) 내 뒤에 오시는 그분은 나보다 앞선 분이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 자격도 없느니라. 고 하더라.
(28) 이런 일들이 요단 강 건너편 베다바라에서 있었으니, 그곳은 요한이 침례를 주던 곳이라.
(29) 그 다음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보라,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27절에서는 현재의식이 주관적 자아라는 깊은 마음의 신발 끈을 풀 수 없다는 것을 설명한다. 여기서 주관적 자아란 단순히 잠재의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신의 존재나 우리 안에 있는 "I AM"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발"은 이해를 상징하는데 신발이 발을 덮고 있다고 한다. 그 뜻은 현재의식이 인간 내부에 있는 무한한 지혜와 지성의 행동방식과 창조의 비밀을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방식은 알아 챌 수가 없다. 로마서 11:33 참조
현재의식은 우리 기도의 응답이 어떻게, 언제, 어디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지 모른다. 현재의식에게는 많은 것들이 불가능하게 보인다. 하지만 인간 내부의 보이지 않은 힘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네가 믿을 수만 있다면,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라. 마가복음 9:23
29절의 "하나님의 어린 양"은 12궁도에서 태양이 백양궁 자리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한다. 고대인은 태양을 세상의 구원자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태양이 하늘 높이 떠오를 때 세상을 어둠과 죽음으로부터 다시 살리기 때문이다. 요한(당신의 지성)이 예수님(내부에 있는 신의 힘)을 알아볼 때 당신은 자신의 소망과 열망을 이룰 수 있고 당신의 죄(당신 소망의 성취의 실패와 목표에 도달하는데 좌절)는 사라진다.
(30) 이분이 내가 전에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선 것은 그분이 나보다 먼저 계셨음이라.’ 고 말했던 그분이라.
(31) 나는 그분을 알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내가 물로 침례를 주러 왔노라.” 고 하더라.
(32) 또 요한이 증거하여 말하기를 “나는 성령께서 하늘로부터 비둘기 같이 내려와, 그분 위에 머무시는 것을 보았노라.
(33) 나는 그분을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시어 물로 침례를 주라고 하신 그분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내려와 그 위에 머무는 것을 보리니, 그가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이라.’ 고 하시기에,
(34) 내가 보았고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노라.” 고 하니라.
(35) 그 다음날 다시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시는 것을 보고 말하기를 “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 고 하니,
(37) 두 제자가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를 따라가더라.
(38) 그때 예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무엇을 찾느냐?” 고 하시니, 그들이 말씀드리기를 “랍비여, (랍비는 해석하면 선생이라.) 어디에 거하시니이까? 라고 하니,
(39) 주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와서, 보라.” 고 하시더라. 그들이 가서 주께서 거하시는 곳을 보고, 그 날은 주와 함께 머물렀으니, 이는 그때가 제십시쯤 되었음이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주를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였더라.
(41) 그가 먼저 그의 형제 시몬을 만나 말하기를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다.” 하니 그것을 해석하면 그리스도라.
(42) 그리하여 그가 시몬을 예수께 데려오니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라. 너를 게바라 부르리라.” 하시니 그것을 해석하면 돌이라.
(43) 그 다음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고자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시니,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오라.” 고 하시더라.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의 성읍인 벳새다 출신이더라.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만나서 그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고, 또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 사람을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 하니
(46) 나다나엘이 그에게 말하기를 “나사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느냐?” 고 하니, 빌립이 그에게 말하기를 “와서 보라.” 고 하더라.
(47)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관하여 말씀하시기를 “보라,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에게는 간사함이 없도다.” 라고 하시니
(48) 나다나엘이 주께 말씀드리기를 “주께서 언제부터 나를 아시나이까?” 라고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여 말씀하시기를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었을 때 내가 너를 보았노라.”고 하시니라.
(49) 나다나엘이 대답하여 주께 말씀하시기를 “랍비여, 주는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주는 이스라엘의 왕이시니이다.” 라고 하더라.
(50) 예수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고 하니 네가 믿느냐? 네가 이보다 더 큰 일들을 보리라.” 고 하시고
(51) 또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이 후로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리라.” 고 하시더라.
위의 절들은 기도에 대한 뛰어난 공식을 표현한다. 38절에서 어디에 거하시니이까? 라는 질문이 나온다. 물론 이것은 어떤 마을이나 거리 주소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다. 이것은 당신이 어떤 마음의 상태, 의식상태에 머물고 있습니까? 라는 의미이다. 당신은 사랑과, 하나님과 하나라는 의식 속에서 살고 있습니까? 우리는 세상의 부정적인 것에 흔들리거나 영향 받지 않도록 우리 마음을 단련해야 한다.
제자 안드레, 시몬, 빌립 그리고 나다나엘은 우리 안에 있는 힘과 기능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아이엠I AM이나 의식을 상징한다. 안드레는 진실을 보는 인지認知를 의미한다. 당신이 하나님이 그 해답을 알고 있고, 해결책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 행복한 결말에 대해서 묵상할 때 당신은 제자 안드레의 기능을 사용하는 것이다. 시몬은 좋은 소식을 듣는 것을 의미한다. 당신이 더 이상 외부상황에서 희망과 용기를 찾지 않는다면 이 기능을 사용하는 것이다.
42절에서 시몬의 이름은 돌(반석)로 바뀐다. 돌은 굳은 믿음을 의미한다. 돌은 고정되어 있고, 단단하게 굳어져 있다. 이것은 당신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지금 당신은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내부의 보이지 않는 영혼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 법칙에 대한 당신의 자각은 외부의 현상과 외부의 변화에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유지하게 할 수 있다.
다음 기능은 빌립이다. 이것의 의미는 끈기이다. 빌립은 말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말 조련사는 엄격하지만 친절하며 인내, 끈기, 결단력을 지니고 있다. 이런 자질은 당신의 기도가 이루어지는 데에도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은 며칠 해보다가 안 되면 바로 포기한다. 그들은 “무슨 소용이 있어? 아무짝에도 쓸모 없잖아.”라고 말한다. 이제 빌립처럼 당신의 말(분위기)을 타고 승리의 길을 떠나라. 계속해서 당신 목표에 의식을 집중하면 결국 당신 안에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다. 그것이 빌립의 자질을 이용하는 것이다.
빌립은 하나님의 선물(우리의 소망)을 의미하는 나다나엘를 만난다. 45절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본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했고, 또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 사람을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 요셉은 올바르게 단련된 상상력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원하는 해결책이고 이것은 나사렛(줄기, 싹, 착상, 사고)으로부터 온다. 만약 우리가 터무니 없이 큰 싹, 즉 계획을 가지더라도 그것을 의식 속에서 명확히 지금 존재하는 현실로 보게 된다면 우리는 마음으로 안드레를 호출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이루어주는 신에 대한 믿음을 가진다면 시몬(듣는 기능 또는 내부의 좋은 기운의 느낌)을 호출하게 된다. 우리는 이것이 우리 안에서 주관적인 실체가 될 때까지 이 분위기를 유지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빌립을 부르고 있다. 그리고 나다나엘(신의 선물인 우리의 소망의 실현)이 나타난다. 그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렇다. 이것은 예수님(나의 응답 받은 기도, 나의 해결책)이고 그는 나사렛(내가 품은 사고나 소망) 사람이다. 이것은 요셉의 아들, 즉 내가 주관적으로 사실이라고 상상하고 느낀 것이 실체화 된 것이다.”
우리가 소망을 제한하지 않고 의식 속에서 완전히 받아들이면, 참으로 우리는 음험함 없는 이스라엘 사람인 것이다. *음험한 없는 이스라엘 사람은 예수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48절에서 무화과나무의 의미는 내적 힘을 발견하기 까지는 슬픔, 제한의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세 제자를 부른다면 우리는 이 제한 속에서 벗어나 결핍의 무화과나무 밑에 더 이상 앉아 있지 않게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해답은 의식 안에 있다. 그러나 어떻게, 어디에서 그것을 찾을 것인가? 이것에 대한 해답은 다음 절에 들어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기도하기 전에, 그것은 이미 완성되어 있다. 우리는 주관적, 정신적으로 이미 형성되어 있는 것을 단순히 표현할 뿐이다. 지금,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라. 그리고 명상 상태에서 당신이 원하는 상태를 상상하고 그것과 하나가 되어라. 나는 당신이 얼마나 자주 이것을 행할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만약 이 마음의 그림을 충실하게 유지한다면 전능의 힘이 당신의 이상을 실현시켜 줄 것이다. 당신이 마음에 그린 것은 성취할 수 있다. 높은 꿈을 가져라. 그리고 그것을 자각하라.
당신이 소망하는 상태에 있다는 기쁨 속에 도취될 때면 당신은 당신의 이상과 함께 마음의 하늘을 오르게 된다. 그리고 잠시 후 당신은 다시 현재 상태, 사건들, 경험들의 객관적인 면으로 내려온다. 이러한 단순한 진리를 실행하는 것을 다음 구절로 표현할 수 있다.
세상으로 들어오는 모든 사람에게 비치는 참 빛이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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