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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과 신하들 본문

배움과 깨달음/역사와 철학

당태종과 신하들

柏道 2022. 4. 4. 08:49
당나라 태종이 좌우 신하들에게 물었다. “제왕의 일에서 창업이 더 어렵소, 수성이 더 어렵소?”
​가장 신임받는 두 신하 가운데 방현령이 먼저 대답했다. “천하가 혼란스러울 때 많은 강적들을 물리쳐야 하므로 창업이 더 어렵습니다.” 이어서 위징이 대답했다. “어렵게 창업을 했지만 제왕은 곧 교만해지고 여러가지 사치스러운 일들을 벌이므로 백성은 곧 피폐해집니다. 따라서 수성이 더 어렵습니다.”
두 사람이 말을 마치자 태종이 말했다.
​“방현령은 짐과 함께 천하를 평정하면서 갖은 고생을 했고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겼소. 그러고 간신히 살아남았기에 창업의 어려움을 아는 것이오. 위징은 짐과 더불어 천하를 안정시키며 교만과 방종의 병폐가 생길까 우려했고, 그로 인해 폐망의 길로 들어설까 염려하는 까닭에 수성의 어려움을 아는 것이오. 지금은 창업의 어려움은 이미 지나갔소. 앞으로는 수성의 어려움을 공들과 함께 신중히 헤쳐 나가고 싶소.”
​당 태종과 그 신하들의 언행을 모은 <정관정요>에 실린 고사다. 당 태종은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중국 황제다. 중국의 고구려 정벌을 이끈 인물이기 때문이다. 당 태종은 조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안시성을 지키는 양만춘에게 대패하게 된다. 수십만명에 달하는 당나라 군대는 고작 몇천명에 불과한 고구려 군대에 대패했다. 당 태종이 양만춘이 쏜 화살에 한쪽 눈을 잃었다는 야사도 있다.
​비록 고구려에 패해 큰 망신을 당하기는 했지만 당 태종은 중국 최전성기를 이끈 황제다. 위징과 방현령 등 훌륭한 신하들을 폭넓게 기용했고 그들의 도움으로 당나라를 세계 최강 제국으로 만들 수 있었다. 특히 위징의 경우 초기에는 반대파였지만 당 태종이 그의 인물과 능력에 반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인 사람이다. 당 태종은 정적이던 형을 죽이고 패권을 쥔 다음 위징을 불러 물었다.
​“그대가 우리 형제를 이간한 것은 무슨 이유인가?”
​위징은 이렇게 대답했다.
​“제가 모시던 태자께서 제 말을 들었다면 틀림없이 지금의 재앙은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모시던 태자께 충성을 다한 것이 무슨 잘못입니까? 관중도 제나라 환공의 허리띠를 화살로 맞혀 죽이려 하지 않았습니까?”
​당 태종은 위징의 담대함에 반해 신하로 삼았고 그와 함께 훌륭하게 나라를 다스려나갔다. 위징은 황제에게 의견을 제시하는 역할을 하는 간의대부로 일하면서 당 태종에게 수백번이 넘는 간언을 했다. 이를 통해 천하를 통일하고 황제 자리에 오른 태종이 가질 수도 있는 교만함을 견제하고 겸손함과 올바른 자세로 백성을 평안하게 이끌도록 했던 것이다.
​위징이 고사에서 예로 든 관중도 역시 처음에는 제환공 반대편에 섰던 인물이다. 심지어 화살을 쏴 제환공을 죽이려고 한 적도 있었다. <여씨춘추>에는 이렇게 실려 있다.
​관중이 노나라에 아직 잡혀 있을 때 제환공은 자신을 섬기던 포숙을 재상으로 임명하려고 했다. 그러자 포숙은 오히려 관중을 천거하며 말했다. “임금께서 제나라 왕에 만족하시면 저를 쓰시면 됩니다. 하지만 천하의 패왕이 되려면 관중을 쓰십시오.”
​그러자 환공은 “그는 나의 원수이자 활로 나를 쐈던 자니 쓸 수 없소”라고 대답했다. 이에 포숙은 이렇게 답했다. “관중은 자신의 군주를 위해 남을 쐈던 것입니다. 만약 임금께서 그를 신하로 삼으신다면 그는 임금을 위해 다른 사람을 쏠 것입니다.”
​환공은 마침내 포숙 의견을 따라 관중을 재상으로 임명했다. 그 후 관중이 나라를 잘 다스려 큰 공을 세울 때마다 환공은 반드시 먼저 포숙을 칭찬하며 포상했다. “공을 세운 것은 관중이지만 관중을 얻게 한 사람은 포숙이다.” 나라를 위해 공을 세우는 것보다 훌륭한 인재를 천거하는 것이 더 중요하고 두고두고 상 받을 만한 일이라는 것이다.
​순자는 “임금의 도는 사람을 잘 알아보는 것이고 신하의 도는 일을 잘 아는 것이다(主道知人 臣道知事·주도지인 신도지사)”라고 했다. 새로운 지도자가 반드시 새겼으면 하는 역사의 지혜다.
조윤제(인문 고전연구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