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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민족사, “어머니 상처가 너무 큽니다”/김상일 전 한신대 교수 본문
아리랑민족사, “어머니 상처가 너무 큽니다”/김상일 전 한신대 교수
어느 나라 민족마다 도저히 그 나라의 말을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할 수 없는 것들이 한두 개는 있다. 독일어의 ‘그리움’을 의미하는 ‘sehnsucht’와 프랑스의 ‘정신’을 의미하는 ‘esprit’가 그것들이다. 우리 말에도 그런 것이 있는 데 ‘한’이 그것이다. 중국어로 ‘恨’이라고 적고 민중 신학자들이 1980년대에 영어로 ‘resentment’라고 번역했지만 근처에도 못 가는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규태는 Sehnsucht가 번역하기 어려운 이유를 독일의 고유한 지형과 풍토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불어의 Esprit를 정신으로 번역하기 보다는 차라리 원음 그대로 ‘에스프리’라고 그냥 두는 것이 좋다고 한다. 에스프리 역시 프랑스의 지형과 기후 풍토에서 자생된 것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 풍토적 개념으로는 제대로 파악될 수 없다.
한국인들의 한맺혀 생기는 병인 ‘화병’은 세계 의학 사전에도 그대로 적는 수밖에 없다. 한자 한恨을 보면 ‘마음心’의 ‘뿌리艮’란 뜻이다. 근根이 나무의 뿌리인 것을 보면 근사한 표현같다. 마음의 표피에 있는 것이 아니고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한이라는 것이다.
恨을 限과 연관시키면 ‘sehnsucht’나 ‘esprit’와 같이 한국이 처한 지정학적 환경과 풍토적 여건과 연관돼 그 연대를 알 수도 없는 오랜 시간을 두고 우리 마음 속 깊은 뿌리 같은 곳에서 저절로 형성된 것이다.
임인년壬寅年 호랑이해가 밝았다. 먼 곳에서 포효咆哮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야 하는 데 그렇지 않다. 어딘가 사람이 쳐놓은 함정에 빠져 우는 처참한 울음소리 같다. 만주벌을 달리다 백두산 산마루에서 해 뜨는 동해바다를 바라보고 내뿜는 함성이 아니고, 함정에 갖혀 울부짖는 신음소리 같이 들린다.
만약에 함정에 토끼나 다람쥐가 빠져 있다면 이들을 보고 ‘한 맺힌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높은 산봉우리 그리고 깊은 산골짜기를 넘나들던 호랑이가 함정에 빠져 있다면 이를 두고 ‘한 맺혔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뿌리 깊이 맺힌 한은 필경 함정에 빠진 호랑이의 그 가슴속에 맺힌 한일 것이다.
흥안령 마루턱을 비바람 찬이슬 눈보라 속을 걸어 걸어 넘어와 만주벌이 살만한 곳이구나 하고 보금자리를 편지도 얼마 안 돼 그것도 외세와 결탁한 동족의 손에 무참히 짓밟히고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버리거나 겨우 몇 개의 가지들이 반도라는 함정에 빠진 지 수 천년 동안 쌓이고 쌓인 것이 ‘한’일 것이다.
1980년 대 민중신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된 한은 이렇게 한을 통시적으로 읽지 못하고 공시적 즉, 정치 사회적으로만 읽은 유감이 있다. 한은 결코 지금 현재의 공간에서만 생긴 것이 아니다. 통시적으로 생긴 것이 표출된 것일 뿐이다. sehnsucht나 esprit 같이 말이다. 한의 재발견에는 성공했으나 곡해하고 말았다.
20대 총선에서 어느 대통령 후보가 “어머니 상처가 너무 큽니다”하고 울었다. 후보자의 살아 온 인생역정은 이 나라의 가까운 민족사와 떠나서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대통령 후보자의 한 생은 이미 개인의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것이고 역사적인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또 다른 여운을 던져 주었다.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 같이.
한을 두고 함석헌 옹은 ‘송아리얼’이라고 했다. 함 옹은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서 “한 옛적[太古] 일을 보면 한민족의 자라난 보금자리는 한반도가 아니고, 만주였다. 장백산 기슭 송아리얼의 언저리 여기는 늘 나라들이 까 나오는 보금자리였다. 우리 단군조선이 나오고, 부여가 나오고, 고구려가 나오고, 고구려가 나오고, 그 다음 금金도 청靑도 여기서 나왔다.
송아리얼은 남쪽으로 흐르지 않고, 얼음과 눈이 쌓인 북해로 돌려놓았다. 하필 북으로 흐르게 했을까? 북으로 흘렀기 때문에 그 보금자리에서 까 나와 가지고 남으로 내려오면 발전이건만도 그만 그 밑뿌리를 내버리게 되고, 남으로 내려 온 가지만이 남아 간신히 전체를 대표해 명맥을 부지하고 있게 되었다.
송아리얼의 벌과 반도가 만일 한 자리 단원에 들게 되었더라면 남으로 내려온 한족이 요렇게 간들간들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 근본을 잊고 되는 물건이 어디 있더냐?”(78쪽)
함 옹에 의하면 우리의 뿌리는 만주땅이라는 것과 그 뿌리가 남으로 뻗어 내려와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밑뿌리는 그냥 두고 잔가지들만 남으로 내려와 이들 잔가지들만 자라 마치 뿌리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돼 버린 것이 우리 역사라는 것이다. 신라다 고려다 조선이다 하는 것이 모두 잔가지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아니 그 잔가지마저 이제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대륙을 안 방 같이 넘나들며 포효하던 범이 지금 작은 주머니 같은 함정속에 들어 와 잔가지만 치고 있는 것이 우리 역사라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한과 한에서 유래한 화병을 함 옹이 바로 진단을 했다. 우리가 처음부터 다람쥐나 오소리 정도였다면 생기지도 않을 병이 한이고 화병이다.
아리랑 민족은 대륙을 말타고 달리던 기상과 기백을 가진 민족이었다. 그래서 恨이란 限에 처했을 때에 마음의 뿌리에서부터 생기는 병이다. 남방의 습기와 무더위, 북방의 건조와 추위, 태백과 곤륜에서 불어 온 바람에 삭혀진 것이 우리의 한이고 화병의 유래이다.
흥안령 산마루턱을 봇짐 지고 남부여대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지만, 바다 건너 왜구들이 쳐들어오니 다시 우리는 압록강 두만강을 건넜다. 그러나 거기서도 살 수 없어서 또 남으로 내려왔다. 19세기 말부터 눈물 젖은 두만강을 뗏목을 타고 다시 올라갔다. 해방이 되자 다시 내려왔다. 이것이 지금 70-80대라면 경험한 역사이다. 마치 함정에 빠진 호랑이가 살려고 함정 안을 뛰었다 내렸다 하는 형국이다. ‘잘살만 하니 난리났다’란 말을 수도 없이 들었을 것이다. 그때 마다 부른 노래 그것은 ‘아리랑’이었다.
함 옹과 같이 17세기 북애자는 “아 슬프다. 강만 건너면 이미 남의 땅이 되었구나! 눈물흘리며 이 나라의 역사학자란 자들은 강단을 꿰차고 앉아 위서타령이나 하면서 연대기나 셈하고 있으니 이는 죽은 자식 나이 세는 것과 무엇 하나 다른 것 없다”고 탄식한다.
병자호란을 겪고 난 다음 1675년 경 북애자는 “지금 세대의 사람들은 헛된 글에 빠져 하릴없이 쇠약해지고, 자신의 도는 버리고 송나라 유생이 내뱉은 침을 곱씹으며, 이미 스스로 힘이 없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고 있으니 그저 죽은 자식 나이 헤아리기일 따름이다”고 한탄했다.
거기에 더하여 점술에 빠져 “무당과 도깨비만 믿으며 부정한 사당만 중하게 여겼다. 이로써 사람들은 모두 약빠르고 방자하여, 용감하나 굳세지는 못하였다...
지금 조선의 형세가 저무는 해를 따라가듯 하기에 수백 년이 지나지 않아 조선은 반드시 강한 이웃에게 다시 패망할 것이니,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누가 능히 지탱하겠는가!”(규원사화, 만설 중에서)
북애자가 이 글을 쓴 17세기 말(1675년)에서 20세기 초까지 그의 예언대로 나라는 수백년이 지나지 않아서 망하고 말았다.
지난 대선후보 4자 토론에서 사회자는 미국, 일본, 중국, 북한 4자 가운데 그 우선순위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재명 후보 제외하고 다른 3자들은 그 순위를 읊었다. 이 질문은 질문자체를 하지 말아야 하고 했다면 대답도 하지 말았어야 한다. 사대에 찌들려 이젠 함정에 갇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화병은, 恨은 限없이 크고 웅대하고 장대하던 것이 초라해지고 붙잡혀 갇힌 몸이 되었을 때에 반드시 생기는 가슴 속의 병이다. 그래서 화병은 한국적인 독특한 지형학적 환경에서 생긴 불가피한 병이다. 다시 말해서 토끼와 다람쥐가 함정에 빠져서는 생기지 않지만, 호랑이는 반드시 생기는 병이 화병이다.
‘선진국’ 나팔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20대 대선이 시작되었다. 한 후보자가 드디어 유세장 대중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 후보가 우는 것도 처음 보았다. “어머니 상처가 너무 큽니다”하면서 울었다. 이 후보가 살아 온 삶의 족적을 볼 때에 한 가족사가 이 나라 현대사를 요약하고도 남음이 있다.
욕설은 민중의 한에서 나오는 언어이다. 민중신학자들이 민중의 욕설을 신학적으로 조명한 것은 업적으로 남는다. 욕설은 한맺힌 민중의 한에서 나오는 언어이다. 라캉은 언어가 사물에 대하여 아무리 다 표현하려고 해고 다 그려낼 수 없어서 글이 그림이 되고 그림이 그리움이 된다고 하면서 이를 ‘욕망desire’이라고 한다. 그의 ‘욕망의 그래프’는 20세기를 대표할 정도이다.
어린 애기가 젖을 먹고 배가 불러도 무언가 모자라 우는 데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워서 우는 것이라고 한다. 바로 이것이 ‘욕망’이다. 만약에 말하는 어른이라면 욕설로 분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는 것과 그리움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데 라캉은 이를 ‘쥬이상스’(향락)라고 한다.
역설적으로 울음과 웃음이 분리되지 않는 ‘웃품’ 같은 것이다. 이를 프로이트는 ‘쾌락의 원칙’이라고 한다. 더운 것을 먹으면서도 시원하다고 하는 한국인들의 야릇한 정서 같은 것 말이다. ‘아리랑’ 그것은 웃픔의 노래였고, 한의 정서였고, 그래서 우리 고유란 쾌락의 원칙이 되었다.
한 맺혀 우는 눈물은 ‘누淚’라 하지 않고 ‘누泪’라고 한다. 이 둘은 글자 모양에서 잘 표시하고 있다. 누淚는 눈물이 흘러내리며 우는 눈물이고, 누泪는 흘러내리지 못하고 눈 안에서 글썽이는 눈물, ‘눈물을 머금’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누泪를 영화 ‘서편제’가 그려내고 있다.
대선후보들이여, 압록강 두만강까지는 아니더라도 임진강변에라도 가 눈물을 머금고 돌아와 다음 토론장에 나가시기 바란다. 함정에 빠진 우리를 누가 먼저 건져 줄 것이라고? 미국, 일본, 중국 아니면 미국, 중국, 일본이라고? 저 나라들이 당신들의 말을 들었을까 낯이 뜨겁다.
서양인들은 자기들 조국을 ‘father land’라고 하지만, 우리는 ‘모국母國’이라 한다.
“어머니 상처가 너무 큽니다.”
김상일 전 한신대학교 철학과 교수
어느 나라 민족마다 도저히 그 나라의 말을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할 수 없는 것들이 한두 개는 있다. 독일어의 ‘그리움’을 의미하는 ‘sehnsucht’와 프랑스의 ‘정신’을 의미하는 ‘esprit’가 그것들이다. 우리 말에도 그런 것이 있는 데 ‘한’이 그것이다. 중국어로 ‘恨’이라고 적고 민중 신학자들이 1980년대에 영어로 ‘resentment’라고 번역했지만 근처에도 못 가는 번역이라고 할 수 있다.
이규태는 Sehnsucht가 번역하기 어려운 이유를 독일의 고유한 지형과 풍토 때문이라고 한다. 한편 불어의 Esprit를 정신으로 번역하기 보다는 차라리 원음 그대로 ‘에스프리’라고 그냥 두는 것이 좋다고 한다. 에스프리 역시 프랑스의 지형과 기후 풍토에서 자생된 것이기 때문에 다른 나라 풍토적 개념으로는 제대로 파악될 수 없다.
한국인들의 한맺혀 생기는 병인 ‘화병’은 세계 의학 사전에도 그대로 적는 수밖에 없다. 한자 한恨을 보면 ‘마음心’의 ‘뿌리艮’란 뜻이다. 근根이 나무의 뿌리인 것을 보면 근사한 표현같다. 마음의 표피에 있는 것이 아니고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한이라는 것이다.
恨을 限과 연관시키면 ‘sehnsucht’나 ‘esprit’와 같이 한국이 처한 지정학적 환경과 풍토적 여건과 연관돼 그 연대를 알 수도 없는 오랜 시간을 두고 우리 마음 속 깊은 뿌리 같은 곳에서 저절로 형성된 것이다.
임인년壬寅年 호랑이해가 밝았다. 먼 곳에서 포효咆哮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야 하는 데 그렇지 않다. 어딘가 사람이 쳐놓은 함정에 빠져 우는 처참한 울음소리 같다. 만주벌을 달리다 백두산 산마루에서 해 뜨는 동해바다를 바라보고 내뿜는 함성이 아니고, 함정에 갖혀 울부짖는 신음소리 같이 들린다.
만약에 함정에 토끼나 다람쥐가 빠져 있다면 이들을 보고 ‘한 맺힌다’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높은 산봉우리 그리고 깊은 산골짜기를 넘나들던 호랑이가 함정에 빠져 있다면 이를 두고 ‘한 맺혔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 우리 민족의 가슴 속에 뿌리 깊이 맺힌 한은 필경 함정에 빠진 호랑이의 그 가슴속에 맺힌 한일 것이다.
흥안령 마루턱을 비바람 찬이슬 눈보라 속을 걸어 걸어 넘어와 만주벌이 살만한 곳이구나 하고 보금자리를 편지도 얼마 안 돼 그것도 외세와 결탁한 동족의 손에 무참히 짓밟히고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버리거나 겨우 몇 개의 가지들이 반도라는 함정에 빠진 지 수 천년 동안 쌓이고 쌓인 것이 ‘한’일 것이다.
1980년 대 민중신학자들에 의해 재발견된 한은 이렇게 한을 통시적으로 읽지 못하고 공시적 즉, 정치 사회적으로만 읽은 유감이 있다. 한은 결코 지금 현재의 공간에서만 생긴 것이 아니다. 통시적으로 생긴 것이 표출된 것일 뿐이다. sehnsucht나 esprit 같이 말이다. 한의 재발견에는 성공했으나 곡해하고 말았다.
20대 총선에서 어느 대통령 후보가 “어머니 상처가 너무 큽니다”하고 울었다. 후보자의 살아 온 인생역정은 이 나라의 가까운 민족사와 떠나서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대통령 후보자의 한 생은 이미 개인의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것이고 역사적인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또 다른 여운을 던져 주었다. 막심 고리끼의 ‘어머니’ 같이.
한을 두고 함석헌 옹은 ‘송아리얼’이라고 했다. 함 옹은 『뜻으로 본 한국 역사』에서 “한 옛적[太古] 일을 보면 한민족의 자라난 보금자리는 한반도가 아니고, 만주였다. 장백산 기슭 송아리얼의 언저리 여기는 늘 나라들이 까 나오는 보금자리였다. 우리 단군조선이 나오고, 부여가 나오고, 고구려가 나오고, 고구려가 나오고, 그 다음 금金도 청靑도 여기서 나왔다.
송아리얼은 남쪽으로 흐르지 않고, 얼음과 눈이 쌓인 북해로 돌려놓았다. 하필 북으로 흐르게 했을까? 북으로 흘렀기 때문에 그 보금자리에서 까 나와 가지고 남으로 내려오면 발전이건만도 그만 그 밑뿌리를 내버리게 되고, 남으로 내려 온 가지만이 남아 간신히 전체를 대표해 명맥을 부지하고 있게 되었다.
송아리얼의 벌과 반도가 만일 한 자리 단원에 들게 되었더라면 남으로 내려온 한족이 요렇게 간들간들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제 근본을 잊고 되는 물건이 어디 있더냐?”(78쪽)
함 옹에 의하면 우리의 뿌리는 만주땅이라는 것과 그 뿌리가 남으로 뻗어 내려와야 하는데 그렇지도 못하고 밑뿌리는 그냥 두고 잔가지들만 남으로 내려와 이들 잔가지들만 자라 마치 뿌리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돼 버린 것이 우리 역사라는 것이다. 신라다 고려다 조선이다 하는 것이 모두 잔가지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아니 그 잔가지마저 이제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대륙을 안 방 같이 넘나들며 포효하던 범이 지금 작은 주머니 같은 함정속에 들어 와 잔가지만 치고 있는 것이 우리 역사라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의 한과 한에서 유래한 화병을 함 옹이 바로 진단을 했다. 우리가 처음부터 다람쥐나 오소리 정도였다면 생기지도 않을 병이 한이고 화병이다.
아리랑 민족은 대륙을 말타고 달리던 기상과 기백을 가진 민족이었다. 그래서 恨이란 限에 처했을 때에 마음의 뿌리에서부터 생기는 병이다. 남방의 습기와 무더위, 북방의 건조와 추위, 태백과 곤륜에서 불어 온 바람에 삭혀진 것이 우리의 한이고 화병의 유래이다.
흥안령 산마루턱을 봇짐 지고 남부여대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지만, 바다 건너 왜구들이 쳐들어오니 다시 우리는 압록강 두만강을 건넜다. 그러나 거기서도 살 수 없어서 또 남으로 내려왔다. 19세기 말부터 눈물 젖은 두만강을 뗏목을 타고 다시 올라갔다. 해방이 되자 다시 내려왔다. 이것이 지금 70-80대라면 경험한 역사이다. 마치 함정에 빠진 호랑이가 살려고 함정 안을 뛰었다 내렸다 하는 형국이다. ‘잘살만 하니 난리났다’란 말을 수도 없이 들었을 것이다. 그때 마다 부른 노래 그것은 ‘아리랑’이었다.
함 옹과 같이 17세기 북애자는 “아 슬프다. 강만 건너면 이미 남의 땅이 되었구나! 눈물흘리며 이 나라의 역사학자란 자들은 강단을 꿰차고 앉아 위서타령이나 하면서 연대기나 셈하고 있으니 이는 죽은 자식 나이 세는 것과 무엇 하나 다른 것 없다”고 탄식한다.
병자호란을 겪고 난 다음 1675년 경 북애자는 “지금 세대의 사람들은 헛된 글에 빠져 하릴없이 쇠약해지고, 자신의 도는 버리고 송나라 유생이 내뱉은 침을 곱씹으며, 이미 스스로 힘이 없이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고 있으니 그저 죽은 자식 나이 헤아리기일 따름이다”고 한탄했다.
거기에 더하여 점술에 빠져 “무당과 도깨비만 믿으며 부정한 사당만 중하게 여겼다. 이로써 사람들은 모두 약빠르고 방자하여, 용감하나 굳세지는 못하였다...
지금 조선의 형세가 저무는 해를 따라가듯 하기에 수백 년이 지나지 않아 조선은 반드시 강한 이웃에게 다시 패망할 것이니,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누가 능히 지탱하겠는가!”(규원사화, 만설 중에서)
북애자가 이 글을 쓴 17세기 말(1675년)에서 20세기 초까지 그의 예언대로 나라는 수백년이 지나지 않아서 망하고 말았다.
지난 대선후보 4자 토론에서 사회자는 미국, 일본, 중국, 북한 4자 가운데 그 우선순위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재명 후보 제외하고 다른 3자들은 그 순위를 읊었다. 이 질문은 질문자체를 하지 말아야 하고 했다면 대답도 하지 말았어야 한다. 사대에 찌들려 이젠 함정에 갇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한 처사라 아니할 수 없다.
화병은, 恨은 限없이 크고 웅대하고 장대하던 것이 초라해지고 붙잡혀 갇힌 몸이 되었을 때에 반드시 생기는 가슴 속의 병이다. 그래서 화병은 한국적인 독특한 지형학적 환경에서 생긴 불가피한 병이다. 다시 말해서 토끼와 다람쥐가 함정에 빠져서는 생기지 않지만, 호랑이는 반드시 생기는 병이 화병이다.
‘선진국’ 나팔 소리가 울려퍼지면서 20대 대선이 시작되었다. 한 후보자가 드디어 유세장 대중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 후보가 우는 것도 처음 보았다. “어머니 상처가 너무 큽니다”하면서 울었다. 이 후보가 살아 온 삶의 족적을 볼 때에 한 가족사가 이 나라 현대사를 요약하고도 남음이 있다.
욕설은 민중의 한에서 나오는 언어이다. 민중신학자들이 민중의 욕설을 신학적으로 조명한 것은 업적으로 남는다. 욕설은 한맺힌 민중의 한에서 나오는 언어이다. 라캉은 언어가 사물에 대하여 아무리 다 표현하려고 해고 다 그려낼 수 없어서 글이 그림이 되고 그림이 그리움이 된다고 하면서 이를 ‘욕망desire’이라고 한다. 그의 ‘욕망의 그래프’는 20세기를 대표할 정도이다.
어린 애기가 젖을 먹고 배가 불러도 무언가 모자라 우는 데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이 그리워서 우는 것이라고 한다. 바로 이것이 ‘욕망’이다. 만약에 말하는 어른이라면 욕설로 분출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는 것과 그리움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데 라캉은 이를 ‘쥬이상스’(향락)라고 한다.
역설적으로 울음과 웃음이 분리되지 않는 ‘웃품’ 같은 것이다. 이를 프로이트는 ‘쾌락의 원칙’이라고 한다. 더운 것을 먹으면서도 시원하다고 하는 한국인들의 야릇한 정서 같은 것 말이다. ‘아리랑’ 그것은 웃픔의 노래였고, 한의 정서였고, 그래서 우리 고유란 쾌락의 원칙이 되었다.
한 맺혀 우는 눈물은 ‘누淚’라 하지 않고 ‘누泪’라고 한다. 이 둘은 글자 모양에서 잘 표시하고 있다. 누淚는 눈물이 흘러내리며 우는 눈물이고, 누泪는 흘러내리지 못하고 눈 안에서 글썽이는 눈물, ‘눈물을 머금’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누泪를 영화 ‘서편제’가 그려내고 있다.
대선후보들이여, 압록강 두만강까지는 아니더라도 임진강변에라도 가 눈물을 머금고 돌아와 다음 토론장에 나가시기 바란다. 함정에 빠진 우리를 누가 먼저 건져 줄 것이라고? 미국, 일본, 중국 아니면 미국, 중국, 일본이라고? 저 나라들이 당신들의 말을 들었을까 낯이 뜨겁다.
서양인들은 자기들 조국을 ‘father land’라고 하지만, 우리는 ‘모국母國’이라 한다.
“어머니 상처가 너무 큽니다.”
김상일 전 한신대학교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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