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진보의 카리스마, 그것이 우리가 살 길이다. 본문
♧정말 멋진 글( 필독문)입니다.
긴 문장이지만 꼬옥 읽어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길 잃은 중도의 정치적 명분을 찾아주는 멋진 글입니다.
"진보의 카리스마, 그것이 우리가 살 길이다.
기득권 카르텔이 화력을 총동원해 밟으려 했던 조국과 추미애. 그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한 사람은 오랫동안 검찰개혁을 주장하며 앙가주망을 실천해온 진보적인 지식인이었고 한 사람은 당대표로서 5선 의원으로서 또 조국 장관의 후임 법무부 장관을 맡아 검찰총장과 정면으로 각을 세운 행정가로서 원칙에 충실한 정치인이었다. 아니 두 사람의 공통점을 더 간명하게 말하자면 진보의 카리스마를 갖춘 사람들이었다.
저들이 조국에게 반기를 들었던 진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민주당의 기성 정치인들도 이미 기득권이 된 사람들이다. 이렇게 저렇게 때가 안 묻을 수 없고 정치라는 것이 타협의 산물이니만큼 저들과 필요에 따라 정치적 딜도 했을 것이다. 카메라가 돌아갈 땐 서로 잡아먹을 듯 웬수 같이 굴어도 돌아서고 나면 형님 아우하고 선배님 후배님 했을 것이다. 그들은 아무리 개혁의 목소리를 높인다 해도 적당하게 당근 몇 개 던져주고 타협이 가능할 것이라 보았을 공산이 크다. 아니면 검찰의 문서고에 푹 익히고 발효시켜 언제든 필요하다면 짜잔 하고 꺼내들 수 있는 데스 노트가 차고 넘치거나.
그러나 조국과 추미애는 그 문법에서 벗어난 사람들이었다. 어떠한 딜도 안 먹힐 원칙주의자. 조국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백여건의 압수수색과 수십 개의 혐의에도 표창장을 제외하곤 마땅히 벌할 것이 없다는 것에서 이미 증명되었다. 부정한 돈이나 거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임이 드러났음에도 여전히 비난의 화살을 맞는 현실은 진보의 무능력이 빚은 참사다. 추미애도 약점이 있었다면 검찰과의 전면전 당시 날아갔을 것이다. 기껏 그들이 내민 카드가 아들의 병가 외출이었다. 이렇게 무결점인 정치인이 있다면 나와 보라고 해라. 저들이 두 사람을 집요하게 인격살인하려 든 이유는 바로 타협을 모르는 별종들이라는 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시장이 되고 도지사가 되었음에도 가족 그 누구에게도 기회를 주지 않았던 이재명도 같은 결을 가진 사람이다. 이재명이 가진 가장 큰 무기는 앞의 두 사람처럼 기득권과 어떠한 거래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강자에 대한 비타협적인 태도는 타고나는 것이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강약약강이 아니라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강강약약의 태도도 비슷하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의 강점은 뭐니뭐니해도 진보의 카리스마를 보여줄 수 있는 적임자라는 점이다.
해방이후, 아니 해방 이전 일제가 문화통치를 시작한 1920년대부터 친일파가 이 땅의 기득권을 장악해 온 세월이 백년이 넘었다. 만만한 세월이 아닌 것이다. 골수에서 만들어진 피가 온몸의 모세혈관으로 도달하는 데에는 그만한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대한민국은 그것을 수백 수천 번 반복하며 방방곡곡 오지 산골짜기에 이르기까지 골수에 사무치도록 보수적 성향이 강한 나라이다. 꼭 그게 아니어도 본래 보수보다 진보가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법이니 웬만큼 왔다 싶어도 마치 형상기억합금처럼 보수지형으로 돌아가는 것은 물리적인 법칙인지도 모른다. 이런 환경에서 문재인 지지율, 이재명 지지율로 대변되는 진보성향의 국민이 40%에 가깝다는 것은 매우 기적적인 일이다. 이것이 바로 어려울 때마다 나라와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한 우리 국민의 저력이다.
대한민국에서 중도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건 해방정국의 여운형이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싶다. 여운형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다. 좌중을 압도하는 호랑이같은 명연설과 철봉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으로 국내 최초의 야구단을 이끈 체육인으로서의 강인함, 일본이든 미국이든 가리지 않고 소통했던 개방성은 익히 알려진 바다. 1919년 일본의 초청을 받아 일본의 제국호텔에서 연설할 때 일본이 주문한 조선자치가 아닌 조선의 독립을 외쳐 보기좋게 엿먹인 그는 지도자적 카리스마를 보여주고도 남는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저격당할 때까지 그는 정치계의 슈퍼스타였다.
그 후 진보의 정치적 카리스마를 보여준 이는 김대중과 노무현이었고 재야에는 백기완 선생이 있었다. 실제로 김대중과 노무현은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질서의 변화 속에서도 실력으로 진보의 유능함을 증명했다. 민중의 아픔에 공감하는 진정성과 멀리 내다보는 거시적인 안목, 좁은 한반도가 아니라 아시아, 나아가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통찰력을 제시한 지도자였고 실제로 그 기간 동안 한국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인수위도 없이 개문발차한 문재인 정부는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선방하고 진보의 최대 약점이라 지적되는 국방 외교 안보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냈다. 단군 이래 최대 국운상승기라는 점에 아니라 할 사람이 있겠는가.
진보의 장점은 눈앞에 당면한 과제도 중요하지만 50년 100년을 내다보는 거시적인 아젠다를 생산한다는 데 있다. 미시적인 과제에 대해서도 깨알같이 접근해야 함은 물론이다. 이 두 가지는 함께 가는 것이지 결코 분리되는 문제가 아니다.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정의당이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는 것은 조국 정국에서 비판대열에 동참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참신하고 미래지향적인 아젠다를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멀리 내다보는 눈을 거두고 미시적인 것에 눈을 돌리는 순간 진보정당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한 것이다. 사람들이 진보정당에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 눈을 감은 결과가 현재의 정의당이다.
이번 대선은 해방 전에 태어난 분도 살다살다 이런 선거는 처음 겪는다 할 정도로 기괴하다. 무당 비선 실세의 존재에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이 맞나 싶게 무당과 사술이 매일같이 하늘을 뒤덮는데도 여론지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니 조급해 할만도 하다. 하지만 탄핵촛불 때도 그랬다. 후반부로 갈수록 국정농단에 분노해서라기보다 그게 대세이고 마치 지각있는 시민이라면 당연히 참여해야 하는 일로 여겼던 것이다. 도로 안에 앉은 사람들과 인도변에 앉은 사람들의 간극은 컸다. 퇴근 후 동료들과 몰려와 맥주캔을 따는 사람들에게 촛불집회는 신명나는 축제이자 카니발이었던 것이다.
그게 중도층이다. 왠지 빠지면 시대에서 소외되는 기분이고 나도 그곳에 갔다고 인증하면 여기저기서 멋지다고 해주니 깨어 있는 시민 코스프레도 하고 스마트하게 보이기도 한 것이다. 무엇보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뿌듯하고 벅찬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진보가 중도층에 줘야 하는 건 그런 자신감과 참여하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켜줘야 하는 것이다. 그곳에 나도 있었다고 으스대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해줘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게 정치적 효능감이다. 나의 행동이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했다는 뿌듯함, 왠지 그곳에 나도 있었다고 하면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은 충만함. 인간은 밥으로만 사는 동물이 아니다.
그런 기분이 시너지를 일으키며 광화문과 세종로, 청와대로 가는 길을 뒤덮었고 탄핵이 인용되었을 땐 팡파레를 울리고 헹가래를 치며 모두가 역사의 주인이 되었던 것이다. 시민으로서 이런 가슴 벅찬 느낌을 가져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87년 6월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무용담으로 하는 말들은 모두 내가 역사의 주인공이었다는 가슴 벅참이다. 그런 점에서 16년 탄핵촛불과 19년 서초동 촛불은 4.19와 5.18이 그랬던 것처럼 두고두고 유전자에 각인되어 민주주의의 깊은 우물이 될 것이다.
민주당이 놓치고 있는 것은 그런 효능감을 빼앗아갔다는 것이다. 저쪽이 개판이니 이번엔 너희들 전폭적으로 밀어줄 테니 한번 실력 발휘해 봐, 이게 지난 총선이었는데 마치 졸부들처럼 돈을 억만금 쌓아두고도 동네잔치에 십 원 한 장 내놓지 않는 구두쇠에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금고에 넣어만 둔 쫄보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너희 실력이 겨우 이 정도였어? 하고 떠나는 것이다. 탄핵촛불에 나도나도 하며 몰려와 맥주 캔을 건배하고 오징어를 씹으며 즐거워했던 사람들이 말이다. 당시 초기부터 쭉 광화문으로 상경했던 나는 후반부로 갈수록 그런 이들이 점점 많아지는 걸 보고 설령 탄핵이 성사되지 않는다 해도 이번 싸움은 이긴 싸움이라는 확신을 가졌었다.
이번 대선도 그런 자세로 치러야 한다. 민주당의 게으름이야 이미 지난 일, 돌이킬 수도 없으니 앞으로 남은 40여 일만이라도 되는 집안의 면모를 보여주어야 한다. 후보는 더 이상 눈물이나 읍소가 아니라 이재명 자신의 주무기인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어야 한다. 중도층은 후보의 서민적 행보, 가난했던 지난 삶에는 관심 없다. 그것이야말로 저들이 쳐놓은 그물에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다. 소확행도 좋지만 더 큰 아젠다를 제시하고 이번 설에 친구든 가족이든 만나 권커니 잣커니, 옳으니 그르니 화제에 올릴 수 있는 그 무엇을 주어야 한다.
충성을 다하는 군사들과 장수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전쟁은 사령관이 지휘하는 것이고 사령관의 리더십의 크기만큼 승패가 가려지는 법이다. 저들이 무당놀음에 빠져있을 때 우리는 시대적 대전환이라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자질로 프레임을 전환하자. 나를 위한 이재명을 넘어 대한민국을 위한 이재명이라는 믿음과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대형 아젠다와 논쟁거리들을 던져 달라.
더 이상 내로남불이니 무조건 잘못했다느니 하지 말고 아닌 건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틀린 건 틀렸다고 지적질하는 본모습을 보여 달라. 숟가락 하나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될 집안을 기웃거리지 잘못했다고 자꾸 읍소하는 집안은 매력이 없다. 후보의 어깨가 쳐지면 유권자들은 등을 돌리는 법이다. 특유의 저돌적이고 공세적인 리더십을 십분 발휘하여 대선을 유권자의 정치적 담론의 훈련장이 될 수 있도록 국면을 전환해 달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과나 읍소가 아니라 강력한 카리스마다.
진보의 카리스마, 이것이 우리가 살 길이다."
긴 문장이지만 꼬옥 읽어보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길 잃은 중도의 정치적 명분을 찾아주는 멋진 글입니다.
"진보의 카리스마, 그것이 우리가 살 길이다.
기득권 카르텔이 화력을 총동원해 밟으려 했던 조국과 추미애. 그 두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한 사람은 오랫동안 검찰개혁을 주장하며 앙가주망을 실천해온 진보적인 지식인이었고 한 사람은 당대표로서 5선 의원으로서 또 조국 장관의 후임 법무부 장관을 맡아 검찰총장과 정면으로 각을 세운 행정가로서 원칙에 충실한 정치인이었다. 아니 두 사람의 공통점을 더 간명하게 말하자면 진보의 카리스마를 갖춘 사람들이었다.
저들이 조국에게 반기를 들었던 진짜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민주당의 기성 정치인들도 이미 기득권이 된 사람들이다. 이렇게 저렇게 때가 안 묻을 수 없고 정치라는 것이 타협의 산물이니만큼 저들과 필요에 따라 정치적 딜도 했을 것이다. 카메라가 돌아갈 땐 서로 잡아먹을 듯 웬수 같이 굴어도 돌아서고 나면 형님 아우하고 선배님 후배님 했을 것이다. 그들은 아무리 개혁의 목소리를 높인다 해도 적당하게 당근 몇 개 던져주고 타협이 가능할 것이라 보았을 공산이 크다. 아니면 검찰의 문서고에 푹 익히고 발효시켜 언제든 필요하다면 짜잔 하고 꺼내들 수 있는 데스 노트가 차고 넘치거나.
그러나 조국과 추미애는 그 문법에서 벗어난 사람들이었다. 어떠한 딜도 안 먹힐 원칙주의자. 조국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백여건의 압수수색과 수십 개의 혐의에도 표창장을 제외하곤 마땅히 벌할 것이 없다는 것에서 이미 증명되었다. 부정한 돈이나 거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사람임이 드러났음에도 여전히 비난의 화살을 맞는 현실은 진보의 무능력이 빚은 참사다. 추미애도 약점이 있었다면 검찰과의 전면전 당시 날아갔을 것이다. 기껏 그들이 내민 카드가 아들의 병가 외출이었다. 이렇게 무결점인 정치인이 있다면 나와 보라고 해라. 저들이 두 사람을 집요하게 인격살인하려 든 이유는 바로 타협을 모르는 별종들이라는 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시장이 되고 도지사가 되었음에도 가족 그 누구에게도 기회를 주지 않았던 이재명도 같은 결을 가진 사람이다. 이재명이 가진 가장 큰 무기는 앞의 두 사람처럼 기득권과 어떠한 거래도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강자에 대한 비타협적인 태도는 타고나는 것이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강약약강이 아니라 강자에게 강하고 약자에게 약한 강강약약의 태도도 비슷하다. 그런 점에서 이재명의 강점은 뭐니뭐니해도 진보의 카리스마를 보여줄 수 있는 적임자라는 점이다.
해방이후, 아니 해방 이전 일제가 문화통치를 시작한 1920년대부터 친일파가 이 땅의 기득권을 장악해 온 세월이 백년이 넘었다. 만만한 세월이 아닌 것이다. 골수에서 만들어진 피가 온몸의 모세혈관으로 도달하는 데에는 그만한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대한민국은 그것을 수백 수천 번 반복하며 방방곡곡 오지 산골짜기에 이르기까지 골수에 사무치도록 보수적 성향이 강한 나라이다. 꼭 그게 아니어도 본래 보수보다 진보가 더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법이니 웬만큼 왔다 싶어도 마치 형상기억합금처럼 보수지형으로 돌아가는 것은 물리적인 법칙인지도 모른다. 이런 환경에서 문재인 지지율, 이재명 지지율로 대변되는 진보성향의 국민이 40%에 가깝다는 것은 매우 기적적인 일이다. 이것이 바로 어려울 때마다 나라와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한 우리 국민의 저력이다.
대한민국에서 중도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던 건 해방정국의 여운형이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싶다. 여운형은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였다. 좌중을 압도하는 호랑이같은 명연설과 철봉으로 다져진 탄탄한 몸으로 국내 최초의 야구단을 이끈 체육인으로서의 강인함, 일본이든 미국이든 가리지 않고 소통했던 개방성은 익히 알려진 바다. 1919년 일본의 초청을 받아 일본의 제국호텔에서 연설할 때 일본이 주문한 조선자치가 아닌 조선의 독립을 외쳐 보기좋게 엿먹인 그는 지도자적 카리스마를 보여주고도 남는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저격당할 때까지 그는 정치계의 슈퍼스타였다.
그 후 진보의 정치적 카리스마를 보여준 이는 김대중과 노무현이었고 재야에는 백기완 선생이 있었다. 실제로 김대중과 노무현은 신자유주의라는 세계질서의 변화 속에서도 실력으로 진보의 유능함을 증명했다. 민중의 아픔에 공감하는 진정성과 멀리 내다보는 거시적인 안목, 좁은 한반도가 아니라 아시아, 나아가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통찰력을 제시한 지도자였고 실제로 그 기간 동안 한국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인수위도 없이 개문발차한 문재인 정부는 팬데믹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아 선방하고 진보의 최대 약점이라 지적되는 국방 외교 안보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냈다. 단군 이래 최대 국운상승기라는 점에 아니라 할 사람이 있겠는가.
진보의 장점은 눈앞에 당면한 과제도 중요하지만 50년 100년을 내다보는 거시적인 아젠다를 생산한다는 데 있다. 미시적인 과제에 대해서도 깨알같이 접근해야 함은 물론이다. 이 두 가지는 함께 가는 것이지 결코 분리되는 문제가 아니다.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정의당이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는 것은 조국 정국에서 비판대열에 동참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참신하고 미래지향적인 아젠다를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멀리 내다보는 눈을 거두고 미시적인 것에 눈을 돌리는 순간 진보정당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한 것이다. 사람들이 진보정당에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 눈을 감은 결과가 현재의 정의당이다.
이번 대선은 해방 전에 태어난 분도 살다살다 이런 선거는 처음 겪는다 할 정도로 기괴하다. 무당 비선 실세의 존재에 촛불을 들었던 사람들이 맞나 싶게 무당과 사술이 매일같이 하늘을 뒤덮는데도 여론지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니 조급해 할만도 하다. 하지만 탄핵촛불 때도 그랬다. 후반부로 갈수록 국정농단에 분노해서라기보다 그게 대세이고 마치 지각있는 시민이라면 당연히 참여해야 하는 일로 여겼던 것이다. 도로 안에 앉은 사람들과 인도변에 앉은 사람들의 간극은 컸다. 퇴근 후 동료들과 몰려와 맥주캔을 따는 사람들에게 촛불집회는 신명나는 축제이자 카니발이었던 것이다.
그게 중도층이다. 왠지 빠지면 시대에서 소외되는 기분이고 나도 그곳에 갔다고 인증하면 여기저기서 멋지다고 해주니 깨어 있는 시민 코스프레도 하고 스마트하게 보이기도 한 것이다. 무엇보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뿌듯하고 벅찬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다. 진보가 중도층에 줘야 하는 건 그런 자신감과 참여하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켜줘야 하는 것이다. 그곳에 나도 있었다고 으스대고 싶은 마음을 갖게 해줘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게 정치적 효능감이다. 나의 행동이 세상을 바꾸는 데 일조했다는 뿌듯함, 왠지 그곳에 나도 있었다고 하면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은 충만함. 인간은 밥으로만 사는 동물이 아니다.
그런 기분이 시너지를 일으키며 광화문과 세종로, 청와대로 가는 길을 뒤덮었고 탄핵이 인용되었을 땐 팡파레를 울리고 헹가래를 치며 모두가 역사의 주인이 되었던 것이다. 시민으로서 이런 가슴 벅찬 느낌을 가져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87년 6월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무용담으로 하는 말들은 모두 내가 역사의 주인공이었다는 가슴 벅참이다. 그런 점에서 16년 탄핵촛불과 19년 서초동 촛불은 4.19와 5.18이 그랬던 것처럼 두고두고 유전자에 각인되어 민주주의의 깊은 우물이 될 것이다.
민주당이 놓치고 있는 것은 그런 효능감을 빼앗아갔다는 것이다. 저쪽이 개판이니 이번엔 너희들 전폭적으로 밀어줄 테니 한번 실력 발휘해 봐, 이게 지난 총선이었는데 마치 졸부들처럼 돈을 억만금 쌓아두고도 동네잔치에 십 원 한 장 내놓지 않는 구두쇠에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금고에 넣어만 둔 쫄보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너희 실력이 겨우 이 정도였어? 하고 떠나는 것이다. 탄핵촛불에 나도나도 하며 몰려와 맥주 캔을 건배하고 오징어를 씹으며 즐거워했던 사람들이 말이다. 당시 초기부터 쭉 광화문으로 상경했던 나는 후반부로 갈수록 그런 이들이 점점 많아지는 걸 보고 설령 탄핵이 성사되지 않는다 해도 이번 싸움은 이긴 싸움이라는 확신을 가졌었다.
이번 대선도 그런 자세로 치러야 한다. 민주당의 게으름이야 이미 지난 일, 돌이킬 수도 없으니 앞으로 남은 40여 일만이라도 되는 집안의 면모를 보여주어야 한다. 후보는 더 이상 눈물이나 읍소가 아니라 이재명 자신의 주무기인 강력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어야 한다. 중도층은 후보의 서민적 행보, 가난했던 지난 삶에는 관심 없다. 그것이야말로 저들이 쳐놓은 그물에 스스로 들어가는 것이다. 소확행도 좋지만 더 큰 아젠다를 제시하고 이번 설에 친구든 가족이든 만나 권커니 잣커니, 옳으니 그르니 화제에 올릴 수 있는 그 무엇을 주어야 한다.
충성을 다하는 군사들과 장수들이 아무리 많다 해도 전쟁은 사령관이 지휘하는 것이고 사령관의 리더십의 크기만큼 승패가 가려지는 법이다. 저들이 무당놀음에 빠져있을 때 우리는 시대적 대전환이라는 절체절명의 시기에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과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자질로 프레임을 전환하자. 나를 위한 이재명을 넘어 대한민국을 위한 이재명이라는 믿음과 확신을 가질 수 있도록 대형 아젠다와 논쟁거리들을 던져 달라.
더 이상 내로남불이니 무조건 잘못했다느니 하지 말고 아닌 건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틀린 건 틀렸다고 지적질하는 본모습을 보여 달라. 숟가락 하나 들고 다니는 사람들은 될 집안을 기웃거리지 잘못했다고 자꾸 읍소하는 집안은 매력이 없다. 후보의 어깨가 쳐지면 유권자들은 등을 돌리는 법이다. 특유의 저돌적이고 공세적인 리더십을 십분 발휘하여 대선을 유권자의 정치적 담론의 훈련장이 될 수 있도록 국면을 전환해 달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과나 읍소가 아니라 강력한 카리스마다.
진보의 카리스마, 이것이 우리가 살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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