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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빚진 자 - 롬 1:8~15 본문

성경과 영성신앙/복음과 구원

복음의 빚진 자 - 롬 1:8~15

柏道 2021. 12. 22. 06:19
하용조목사
복음의 빚진 자

복음의 빚진 자
롬 1:8~15

그 사람이 누군가를 알아보려면 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보면 됩니다. 사람은 그 사람이 가진 옷이나 집이나 지위나 명예를 가지고는 알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법은 그 사람의 생각과 그 사람의 사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만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바울은 자나깨나 예수님입니다. 감옥에 있으나 밖에 있으나 그의 관심은 예수님입니다. 좋은 환경이나 나쁜 환경이나 높은 위치나 낮은 위치나 그의 관심은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그런 말을 했습니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무엇을 먹으나 굶으나 주를 위하여 나는 산다. 그분이 사도 바울입니다. 여러분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이 제일 많이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이 곧 여러분 자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그는 제일 서두에 자신을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요,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함을 받은 사람이다”라고 선포합니다. 그것이 그가 하고 싶었던 첫 번째 말입니다. 사도 바울의 핏속에는 예수님의 피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살 속에는 예수님께서 살아 있습니다. 그 몸에는 예수님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에 건드리기만 하면 그는 예수님 밖에는 말이 나오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을 이렇게 미치게 했고 사도 바울을 이렇게 한 생각으로 몰고 간 것은 바로 복음입니다. 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문안 이전에 먼저 이 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합니다. 육신으로 말하면 이 복음은 다윗의 혈통에서 났고 성결의 영으로 말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나셨으며 부활하사 하나님의 아들로 인치심을 받은 그분이 바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얘기를 한 다음에 사도 바울은 문안하기 시작합니다.

사도바울의 문안

한번도 만나진 않았지만 성도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고대 서신에는 기본적으로 서두에 3가지 형식의 말을 합니다. 첫째는 문안이요, 둘째는 감사요, 기원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로마의 성도들에게 첫째는 문안을 하고, 둘째는 감사를 하고, 셋째는 기원을 하는 형태로 문안합니다. 먼저 사도 바울이 로마의 성도들에게 한 문안의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로마서 1:5~7입니다. 로마에 있는 주님의 교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님의 평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7절에 보면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는 로마의 성도들은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입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입니다. 또, 로마에 있는 교인들을 향해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우리 자신을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이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다. 바로 이것이 교회입니다. 6절에는 너희도 그들 중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입은 자다라고 하며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물이라고 합니다.

이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소유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모든 이방인들 중에서 예수를 믿어 순종하는 사람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들 중에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단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유물이 된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사도바울은 그런 표현을 썼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고 성도로 부르심을 입었고 하나님의 소유물인 로마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가 넘치기를 축원했던 것입니다. 이런 문안 인사와 축복을 하고 나서 감사의 말을 합니다.


로마 성도들로 인한 감사

8절을 보십시오.

여기서 ‘첫째는’이라는 말은 ‘무엇보다도’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로마의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하나님께 정말로 감사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8절 후반부에 보면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소수의 무리였습니다. 유명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사회적인 영향력을 가진 신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대로마를, 세계의 중심이요, 세계의 수도요,

모든 길이 다 로마로 통한다고 하는 로마를 변화시켰다는 것입니다. 로마에게 영향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그 로마에게 어떤 소문이 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바울이 가슴이 벅찹니다. 너무 감동스러운 것입니다. 아직 로마를 가 보지는 않았지만 그 소문이 자기 귀에까지 들리게 된 것입니다. 이런 비슷한 표현을 데살로니가전서 1장 8절에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한 적이 있습니다.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니야, 아가야에게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짐으로 우리는 아무 할말이 없노라”

여러분 바울 일행이 데살로니가에는 3주 있었습니다. 날짜로 하면 20일 정도입니다. 그동안 복음을 전했고 핍박을 받아 쫓겨났습니다. 그 결과로 데살로니가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의 믿음이 얼마나 신실하든지, 재림에 대한 믿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순수하고 참 귀하든지 그 소수의 무리들이 가진 예배가 마게도니아 전지역과 아가야 전지역에게 다 소문이 퍼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소문이 각처에 퍼져서 더 이상 할말을 잃어버렸다 라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로마에서도 일어났습니다. 대 로마에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로마에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 영향력은 드디어 전 로마를 뒤집어 버린 것입니다.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할 만큼 로마에 영향력을 준 소수의 무리들이었습니다.

나는 우리들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로마가 변했는데 왜 서울은 안 변하겠습니까? 로마가 그 소수의 사람들의 믿음으로 변화되었다면 우리들도, 우리 온누리교인들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이런 생각을 합니다. 어떻게 소문이 났을까? 상세한 내용은 없습니다만 우리들은 상황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 소수의 무리들이 다른 질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소문이 날 리가 없습니다. 너나 나나 같은데 무슨 소문이 날 수 있겠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을 향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안 믿는 나나 믿는 너나 무엇이 다른가 하는 것 아닙니까? 달라야 변화를 줍니다. 그래야 소문이 납니다. 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이고, 지성적이고, 다 똑같으면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 때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삶의 질이 달라야 합니다. 믿음의 내용이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세상적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 때 세상 사람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우리가 교회가 커서 충격 받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질이 달라서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틀이 다르기 때문에, 가치관이 다르기 때문에 세상이 충격을 받는 것입니다.

생각이 다르면 소수의 사람들이라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진짜 믿음을 가지면 두세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서 기적과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너희를 생각하면서 정말 뿌듯하고 너희를 안다는 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이렇게 좋구나, 감사하다. 그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이 이름만 듣고도 감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아프리카에도 소문나고 북한에도 전해지 바랍니다. 북한에도 그 사람의 이름만 듣고도 벌벌 떨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온누리교회 믿음의 소문이 퍼지기를 바랍니다. 그때 우리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영적능력과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기원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한번도 보지 못했던 로마인의 교인들에게 교회에게 먼저 문안 인사를 하고 두 번째 그들의 믿음이 각처에 소문난 것 때문에 감사를 드리고 세 번째로 이제 기원합니다. 내가 로마에 있는 너희들에게 지금 편지를 쓰고 있는데 이러 이러한 기도의 목적을 가지고 편지를 쓰고 있다. 같이 함께 이런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9절에서 12절까지는 내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네게 줌으로 우리가 서로 교제하고 서로 위로를 받고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삶을 살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13~15절 말씀으로 내가 그렇게 복음을 로마에 전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가고자 했던 것은 나의 복음에 빚진 마음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너희에게 가서 이 빚진 마음을 풀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9~10절까지를 함께 읽읍시다.

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로마의 성도들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해 왔다고 간증합니다. 가본 일도, 본 일도 없지만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로마가 있었습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와 교회들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가기 전이지만 그는 끊임없이 기도해 왔다고 말합니다. 그 기도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신다고 합니다. 굉장한 자신감입니다.

사랑하면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기도하지 않는 줄 아십니까?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꼭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마음은 있지만 기도가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마음이 없지는 않습니다. 마음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원수라도 이름 부르고 기도하게 되면 사랑하게 됩니다. 기도하면 그 사람이 내 마음 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기도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본 일이 없는 성도들이 항상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에 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증거한다고 말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 마음 가운데 이러한 마음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북한을 위한 기도가 매일 있기를 바랍니다.


복음이 없는 지역을 위한 기도가 여러분의 가슴 속에서 흘러넘치기를 축원합니다. 그 기도가 있어야 합니다.

어떤 한 예수를 잘 믿는 여학생이 옥스퍼드에서 서른이 안돼서 죽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성자와 같았습니다. 그녀가 죽었을 때 그녀의 소지품에서는 4백여 명의 선교사의 이름과 주소가 있었습니다. 그녀의 장례식에서 그 문지기의 말이 그녀의 장례식에 이상한 빛, 성령이 감돌았다고 말했다고 하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녀는 선교사로 가지는 않았지만, 나이가 비록 30살도 되지 않았지만 그 선교사들을 위해 계속 기도해 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는 이런 기도가 필요합니다. 이런 기도가 사도 바울의 가슴 속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가 변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이렇게 보지도 못하고 가보지도 않았던 사람들을 위하여 왜 그렇게 열심히 기도했을까요? 왜 그들을 그렇게 사랑했을까요?


11절의 설명을 보십시오.

로마방문의 목적


내가 너희를 보고 싶은 이유는 너희가 로마에 소문이 있을 정도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데 내가 받은 성령 체험을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은혜는 나누어주고 싶은 것입니다. 은혜를 받으면 혼자 그것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만약 가지고 있으면 가짜입니다. 진짜 은혜는 꼭 나누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 체험은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믿음을 견고하게 만들어 주고 싶은 강한 영적 열망이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배울 것은 믿음을 견고케 하기 위해서는 영적인 은사들이 말씀만을 배워서만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받았으면 이러한 성령의 체험들이 함께 합해질 때 믿음은 흔들리지 않고 체험적이 되는 것이고,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머리로만, 마음으로만, 성경으로만 믿음이 모두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말씀으로 얻은 그 믿음은 성령 체험으로, 성령의 은사로 성령의 열매들로 나타나야 되고 그것이 합해져야 합니다. 그제서 우리의 믿음은 견고해지고 흔들리지 않고 되는 것입니다.


로마를 가고 싶어하는 두 번째 이유는 12절에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어주고 서로 교제를 나눔으로 말미암아 믿음이 견고해질 뿐만 아니라 피차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 라고 하십니다. 12절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서로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믿음을 가진 사람들끼리 확인하고 격려하고 위로함으로 말미암아 서로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고 아름다움을 격려하면서 나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혼자 있으면 외롭고 흔들리기 쉽습니다. 모닥불은 모아져야 합니다. 성도들은 연합해야 합니다. 혼자 있으면 약해집니다. 혼자 있으면 잘 믿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서로 믿음을 격려해야 합니다.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은사들을 서로 나누어야 하고 그러한 성령의 은사들을 나누며 교제함으로 우리는 서로 위로를 받고 격려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위로받아야 할 존재입니다. 위로가 필요 없을만큼 강한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권력을 가지고 있고 똑똑하고 아무리 모든 것을다 성취했던 사람이라도 혼자서는 외로운 것입니다. 혼자이면 외롭습니다. 격려하고 위로해야 합니다. 서로 힘을 주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13절에 또 하나의 이유를 이야기합니다.


내가 여러 번 가고 싶었다. 그 이유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들어가니까 그들이 예수를 믿고 순종하게 되었고 그들에게 성령의 체험들과 기적들과 초자연적인 역사들이 나타났고 삶과 가치관이 변하기 시작했고 생활양식이 변하게 되어 그들의 삶에 어떤 열매들이 있게 되었다. 이런 것입니다. 예수 믿는 다는 것이 어찌 보면 쉬운 것입니다. 복음을 듣고 전도 받아 구원을 얻고 믿게 되는 것, 성령의 체험이 나타나고 성령의 은사들이 나타나 삶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는 것입니다. 생각이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 믿는 사람의 열매들을 맺고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전체적인 그림입니다.

이제 나는 너희들이 예수를 믿고 믿음의 소문이 소문이 단단해 지기를 바란다. 그리고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기를 바라고 마지막으로 열매 맺기를 바란다. 믿음의 열매가 있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로마에 있는 너희들에게 가기를 원한다. 13절 마지막 부분에는 로마에 여러 번 가기를 시도했다는 말을 했는데 사도행전 19장 21절에도 그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의 개인의 생각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은 생각입니다. 내가 로마를 보고 싶다고 하는 열정은 관광이 아니라 성공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유명해지고 내가 어떤 일을 성취하러 로마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로마에 이 복음을 주기 위해 가고 싶다고 말한 것입니다. 우리는 젊었을 때 야망을 갖습니다. 공부하러 유럽이나 미국으로 떠납니다. 돈을 벌려고 집과 고향을 떠납니다. 성공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방문도 아니고 장사도 아니라 복음을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내가 떠나는 것은 주님을 위해서 입니다. 내가 돈을 많이 벌려고 하는 것은 다 예수님을 위한 것입니다.” 말은 그렇게 합니다. 죽을 때까지 계속 그 말만 합니다. 그러다가 죽을 때야 그 말이 생각이 납니다. 살아있는 평생의 삶은 내 개인의 생활이나 얽매어 아무 것도 못하다가 나이가 들어 다 죽게 되어 주를 위해 무엇을 해보겠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것과는 다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를 가기 원하는 복음에 대한 열정이 있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께 이런 말을 하고 싶습니다. 그만큼 적당히 하고 오십시오.

세상이 적당히 있고 졸업할 때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위해 일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쉽게 늙어버리고 말 것입니다. 사도행전 23장 11절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유라굴로 강풍 속에 위기에 처해 있던 사도 바울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를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나를 증거하여야 하리라.”


사도바울과 로마는 뗄 수 없는 영적인 관계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로마를 보아야 하리라, 로마를 가야 하리라, 여러분은 무엇을 보고 싶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하셔야 하며 어디로 가야 합니까? 이제 14절과 1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내가 다 빚진 자라”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는 복음의 빚이란 의식이 있었습니다. 나는 복음에 빚진 자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데로 로마에 있는 너희들에게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노라 우리는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깊은 원인들, 이유들을 알게 됩니다. 첫 번째, 피상적인 이유는 내가 가진 은사들을 나누어주어서 믿음을 서로 격려해 주어서 뿌리를 깊이 내려서 열매 맺는 삶을 주는 것이 목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제일 처음에 나타나는 목적보다 더 깊은 목적은 로마에 있는 너희들에게 복음을 증거하러 간다는 것입니다.
더 깊은 목적이 있는 데 그것을 16장에 가면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두 가지를 말씀드립니다. 복음 때문이다. 15절에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은 복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만 필요한가 하는 것입니다. 아닙니다. 복음은 이미 하나님을 알고 믿고 있는 사람에게도 이 복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로마에 있는 너희들에게도 내가 또다시 복음을 설명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다시 들려져야 합니다. 복음은 계속 전해져야 합니다.


교회에서 문제되는 사람은 초신자입니까? 예수 오래 믿은 사람들입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는 복음을 듣습니다. 복음을 생각합니다. 복음대로 삽니다. 그러나 갈수록 오래 믿게 되면 복음은 희미해집니다. 그것은 다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복음3:16 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압니다. 그 다음에 교회 생활에 익숙해지고 형식에 익숙해 집니다. 예수님은 간 곳 없고 율법적인 신앙생활로 우리는 얼굴이 두꺼워지고 우리는 반들 반들해 갑니다. 너무 익숙한 것입니다. 그래서 내용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형식주의와 율법주의에 빠집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매너리즘에 빠집니다. 그렇게 값없이 믿었던 복음을 행위와 율법으로 예수 믿는 것으로 돌아가 버리고 맙니다. 그들은 감격을 잃어버립니다. 예수는 다 있고 구원은 있다고 말하는데 구원의 기쁨은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너무 교회 생활에 익숙합니다. 테크닉만 늘어갑니다. 믿음이 성장하거나 인격이 성숙해지는 것이 아니라 기술만 느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자신을 속이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잘 믿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을 가르칠 자격이 있다고 생각 합니다.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들에게도 복음이 필요합니다. 복음을 또 다시 들어야 합니다. 복음은 또 들려져야 합니다. 이 예수님과 함께 이 충만함과 기쁨으로 사느냐 말입니다. 이 주님을 전하고 싶은 뜨거운 열정이 아직도 식지 않았느냐 말입니다.
그 감격은 아직도 살아 있느냐 말입니다.

15절을 다시 보십시오.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다시 복음을 전하기 원한다. 우리의 믿음은 언제나 순수해야 합니다. 복음이 언제나 순수 한데로 첫사랑의 관계로 우리는 있어야 합니다. 20년, 30년이 지났어도 우리는 율법주의에 빠지거나 매너리즘에 빠지거나 교회가 익숙하기 때문에 편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 때문에 감격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언제나 신선한 충격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로마 성도에 대한 빚 또 한 가지 1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내가 다 빚진 자라 고 합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의 마음속에 있는 하나의 의식과 정신은 부채의식, 즉, 빚진 자의 마음이 갖고 싶다는 것입니다. 빚져 본 적이 있습니까? 그 심정을 아십니까? 참 무겁습니다. 빚을 갚아야 하기 때문에 항상 죄인입니다. 큰소리 못 칩니다. 그것이 빚진 자 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복음의 빚진 자의 의식이 있었습니다. 누가 무어라고 하지 않아도 항상 그것이 마음에 눌립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종교적이고, 율법적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던 사람입니다.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러 가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복음에 눈을 떴습니다. 머리로 안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했습니다. 눈으로 보았고 귀로 들었고 손으로 만졌습니다. 인격 속에 예수가 들어왔습니다. 그 후로 그의 인생은 변했습니다. 복음이 그렇게 하게 한 것입니다. 그 다음부터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에 대해 부담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저 사람이 복음을 모르는데....그것은 예수를 믿는 사람에게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도 그런것을 느낍니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정말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과 직업인 경우입니다. 굉장히 유명하고 아주 많이 일하는 사람인데도 그 사람하고 이야기해 보면 정말 저 사람이 주님을 사랑하나 하는 질문을 나도 모르게 하게 됩니다. 굉장히 유명하고 좋은 일 많이 합니다. 그런데도 그런 질문이 나오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을 보면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직업이냐, 주님을 사랑하느냐 것이냐. 자신의 위치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딘가 다릅니다. 말과 눈동자와 마음씀이 다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실연한 사람 같고 짝사랑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에 빚진 마음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복음을 듣지 못한 나라를 생각하면 너무나 살 수 없는 미칠 것만 같은 마음으로 잠을 잘 수 가 없습니다. 그 마음의 충동 때문에, 긴박성 때문에 어쩔 줄을 모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에 빚진 자입니다.


무언가 껌처럼 붙어서 뗄 수 없습니다.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복음의 부채 의식이, 빚진 자의 마음입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이러한 복음이 있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이 복음의 빚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생각이 다르고 태도가 다릅니다. 복음의 빚진 마음이 없는 사람은 굉장히 냉정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굉장히 냉정한 사람이 있습니다. 탁탁 잘라 버립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될까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없습니다. 아주 율법적으로 사람을 정죄하고 칼로 칩니다. 긍휼이 없어서 입니다. 긍휼이 있는 사람은 죄인을 보면 그 죄는 죽어 마땅하지만 그 죄로 말미암아 생기는 비참함 때문에 긍휼이 생겨서 어쩔 줄 모르고 눈물을 흘리고 어떻게 하면 잘해줄 수 있을까 이런 마음을 막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긍휼이 없는 사람들은 그대로 칩니다. 죽어라 하는 것입니다. 쫓아내라 이것입니다. 다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빚진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빚진 마음의 또 하나의 특징은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빚을 갚을 수 있으면 빚쟁이가 아닙니다. 비굴할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다 갚고 이자주고 보상하면 됩니다. 그러나 빚진 자는 갚을 능력이 없는 자 입니다.


그렇게 되면 내 몸을 가져가시오 합니다. 당신, 종이나 되시오. 갚을 능력이 없으니 내 집에 와서 일하시오 합니다. 정말 영적으로 빚진 자는 이것을 내가 다 할 수 없다는 고백을 하는 사람입니다. 주님만이 그것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님 나를 당신의 볼모로 잡으십시오. 나는 노예입니다. 나는 종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도 바울은 복음의 빚진 자로 살았습니다.
갚을 수 없는 빚 때문에 그는 몸으로 로마로 가야 했고
서바나로 가야 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죽이는 사람에게
이 복음의 빚 때문에 그는 가야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그 영광스러운 삶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 ⌜온누리신문⌟ 제공 - http://www.onnur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