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티벳의 성자를 찾아서 제4장 본문
제 4장
잠에서 깨어보니 이른 새벽이었다. 어제 저녁의 음악의 여운이 아직도 나의 몸에서 감돌고 있었다. 린포체 대사가 골라주신 멘델스존의 부드럽게 흐르는 선율은 아직도 안에 살아있어 한층 깊은 해탈감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대사가 이미 일어나 계셨다. 대사의 말씀으로는 아침해가 솟는 모습을 보지 않는 날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이때는 바로 여름철, 너무 이른 새벽이어서 잠시 후에야 만년설에 덮인 겹겹의 산봉우리로부터 어스레한 빛이 번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둘이 다 앉아서 어두운 적색에서부터 차츰 밝은 적색 그리고 황금색......으로 바뀌어가는 현란한 빛의 무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계 어느 곳에서 여기 티벳의 해뜸과 그리고 위대한 히말라야의 백설을 이고 있는 봉우리들 너머로 가라앉는 해짐보다 더 황홀한 광경을 볼 수 있을까!
해가 솟아오르면서 밤이면 영하로 급강하하는 대기로 야무지게 결정이 다져진 백설에서 빛살이 날카롭게 반사된다. 배경의 짙은 남색 하늘에는 무지개의 색색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 태양은 밝은 주황색이 된다. 하늘에서는 이미 남색이 가셨고 반짝이던 별들도 빛이 바래면서 파란 하늘이 나타났다. 그 말 못할 아름다움에 나는 정말 넋을 잃은 것 같았다. 이윽고 린포체 대사가 이 매혹을 끊어버렸다.
「소리에는 색깔이 있지. 만약 우리가 이 색깔이 조화를 이룬 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완전한 교향곡일 것이야. 우주의 음악이라고나 해야겠지.」
「그렇겠군요. 창조주는 그이 자신의 반영으로서 음악의 거장들만을 만드신 것이로군요.」
사실 우주공간을 달리는 천체들은 미묘한 소리를 낸다고 하는데 나는 음악, 곧 소리의 신비에 대해 대사의 말씀을 꼭 듣고 싶었다. 나의 그런 심정을 읽으신 듯 그이는 말씀을 이으셨다.
「그래, 그럼 오늘 아침에는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지. 음악은 자네가 공부해야 할 분야라네. 그러나 그것은 작곡이 아니라 음악이 지니는 창조적인 가치, 특히 병을 다스리는 힘에 대해서야.」
「고맙습니다.」
대사는 생명의 깊은 원리를 말씀하실 때는 언제나 눈을 감으신다. 이때도 그이는 지그시 눈을 감으시고 마치 그이 자신이 음악의 근원, 그것에 닿은 양 부드러우면서도 맑고 아름다운 목소리로 설하기 시작하셨다.
「신의 본성은 무한이니 신 밖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이 지구, 지구 속, 지구 위에 있는 것도 모두 그렇다. 만물의 얼은 빛, 소리, 색, 아름다운 리듬으로 그 창조적 표현을 비춰낸다. 아름다운 음악은 곧 우주의 음악의 반영일 따름이다. 그것은 신 스스로가 스스로의 안에 일체를 창조하신 가없는 지혜의 표현이다.
음악이란 일체의 피조물에서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는 무한자의 영원한 선율의 물결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완전한 틀이 인간인 것이다. 무한자의 빛과 소리와 색의 선율의 물결은 언제나 완전한 조화를 이루면서 흐르고 있다. 조화롭지 않은 소리는 창조의 본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완전한 조화의 소리와 리듬을 완전히 반영하지 못하는데서 나오는 것일 뿐이다.」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온누리의 완전한 리듬과 어우러짐을 느꼈다. 아득히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미묘한 악음(樂音)을 가늘게, 그러나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스승의 옷자락에 닿은 것이다. 대사가 들으시는 것을 나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사는 정말 인간의 마음의 영역을 초월한 빛과 소리와 색이 완전히 하나로 어우러진 파동에 귀를 기울이시는 듯 말을 멈추었다.
사람의 마음은 그에게 동조될 때에만 그것을 반영할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이 그것을 낳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있어 영원히 한결같이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고 말고. 새들의 지저귐, 숲의 나무들, 산들, 강들의 노래에는 모두 완전히 조화된 리듬이 깃들어 있다. 나는 그 영묘한 화음에 젖어 그 속에서 떠나기 어려우면서 동시에 나 스스로의 안에도 그와 똑같은 창조의 리듬이 느껴지는 때가 자주 있지. 그렇게 해서 나는 자연 속에 두루 있는 다양한 힘들이 지니는 리듬에 어우러들고 그것들을 부리는 법을 배운 것이다. 내가 거기에 어울림으로써 그것들이 나의 존재의 일부가 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거대한 뫼들의 가없는 고요 속에서 온갖 자연력의 오묘한 짜임새와 작용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터득했다. 필요하다며 s나는 그대들의 자연과학자가 아직 겨우 한구석밖에 모르는 원자의 짜임새를 거쳐 작용하고 있는 보편력에 대하여 그대들이 한계를 뚫고 보다 큰 발견을 할 수 있는 지식을 말해줄 수도 있다.
내가 이 리듬과 어우려졌을 때 나는 새들과 함께 노래할 수가 있고 사나운 들짐승도 사나움을 거두며 산들도 말을 걸어주게 되었다. 또 내가 좋아하는 바이올린을 켜면 듣는 이들이 모두 황홀감에 젖어 들었다. 그로부터 나는 어떤 일이 닥쳐도 이 자연의 리듬의 흐름을 거스를 수가 없어졌다. 그것은 이미 나의 몸과 마음에 완전히 배어있는 것이다.」
대사께서 바이올린을 켜시다니 그것은 초문이었다. 그렇다면 한번 들려주시도록 청해야겠다. 실지로 그 후 부탁을 드렸는데 일찍이 그와 같은 영묘한 연주를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그것은 사람이 지은 곡일 수가 없었다. 그때 이전에도 그 때 이후에도 결코 들어보지 못한 완전한 선율과 기교의 흐름이었다. 그것은 대사 자신의 작곡이었다.
대사는 다시 말을 멈추셨다. 나의 상념을 느끼신 것이다. 나는 그것을 알 수 있었다. 나의 입은 저절로 미소를 띠었다.
잠시후 그이는 말을 이으셨다.
「어떤 행위가 나오기 전에 먼저 상념이 일듯이 우주의 악음(樂音)도 사람이 어떤 느낌을 갖고 연주를 하기 전에 찾아든다. 사람의 표현을 유발하는 것은 바로 이 우주의 악음이며 그것은 그것에 어우러질 수 있는 넋에게로 작용한다. 넋은 내재의 한얼인 신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악기이다. 그대의 가슴, 곧 그대의 심정의 깊이에 따라 신의 조화가 그대 속에 펼쳐지고 또 그대를 거쳐 표현되어 나오리라. 그대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기에 배워야 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은 모든 것의 전체, 얼의 ‘한얼’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다하여 신을 사랑한다 함은 그대가 이웃을 그대 자신처럼 사랑함이다. 그때 신은 그대 안에서, 또한 그대를 거쳐 말씀하시고 그대에게 불가능이란 없게 된다. 그대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우주가 재빨리 이루어 주리라. 특히 그대의 심신은 조화로 충만되리라.
그대가 조화로와질수록 그대의 감수성은 날카로와지고 그대의 마음도 육신도 항상 안에 계시는 신을 나타나게 되리라. 원만 완전한 일을 하시는 것은 오직 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대는 오랜 세월을 지나도 심신이 모두 굳세고 씩씩하리라. ‘항상 여기에 있으시는 이’는 항상 '지금 그대로'일 뿐이다. 한얼인 신은 나이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 순간 대사의 심신 모두가 그렇게 젊으신 까닭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나는 나의 생각을 전혀 입밖에 내지 않았건만 대사는 내가 소리라도 지른 듯 또 다시 잠시 말을 멈추시고 난 후,
「그렇지. 안에 있는대로 밖은 되어지는 것이다.」
하고 이어나가셨다.
「리듬과 색깔은 음악에서는 중요한 요소이다. 리듬이 없는 연주에는 아무 색깔도 나타나지 않지만 리듬으로 생명이 불어넣어진 화음과 연주에는 온갖 색깔이 완전히 섞여들어 있어 그것은 마치 스펙트럼의 색들이 서로 완전한 배열을 이루고 있는 것과 같다. 듣는 사람의 넋에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이 색깔의 조화이다.」
여기까지 와서 어떤 생각이 대사의 마음을 스친 듯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여기에 대해서는 뒤에 따로 말하기로 하지.」
그리고 다시 주제로 돌아갔다.
「완전한 리듬은 바다의 밀물 썰물과 같아 그 모없고 규칙바른 힘에는 어떤 것도 거역할 수가 없다. 완전한 리듬 속에는 무한한 창조력이 있기 때문이다. 창조주와 그 피조물은 ‘하나’이며 따로따로가 아니다. 우리는 거룩한 슬기, 스스로의 표현인 리듬과 결코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이 완전한 리듬은 지구를 꿰뚫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해와 달 때문에 분극(分極)하며 동에서 떠올라 서로 가라앉는다.
이 힘이 지금 전자력이 되어 있고 지구를 그 축 위에 유지하며 또한 지구 위의 모든 것을 안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만약 이 힘이 없어지면 또 다른 힘의 흐름이 무서운 속도로 끌어당겨 지구는 산산이 부서져 원자의 먼지로 환원될 것이다. 이 힘 속에야말로 모든 비밀이 있다.
완전한 리듬은 사람을 회춘시킨다. 그것은 마음을 민첩하게 몸을 든든하게 한다. 우리가 병을 다스리는데 음악을 쓰는 것은 그 때문이다. 좋은 음악으로 여태까지 팽팽히 켕기고 엉켜있던 미혹과 혼란으로부터 마음이 풀려나며 그러는 사이에 원래의 생명은 육체의 모든 세포를 조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그리하여 마음과 육체는 제대로 어우러진 전자력을 되찾는 것이다.
우주의 악음은 그대로 완전한 음악이고, 그것은 말하자면 신의 영원한 심장의 고동이다. 그것은 피의 흐름처럼 밀려나왔다가는 다시 되돌아들어 육체 속의 모든 세포를 순환하고 심장으로 들어가서는 끊임없이 새로워진다. 한얼인 하나의 대생명의 고동이 모든 살아있는 얼을 거쳐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과 가슴의 모양에 따라 이 한얼의 리듬도 걸맞게 표현되는 것일 뿐이다.
만약 얼, 마음, 몸의 이 유기체가 혼란상태에 있으면 리듬도 혼란을 나타낸다. 그대의 상념과 감정은 육체를 뚫고나와 대기 속으로 멀리멀리 날아간다.」
「마치 방송국의 전파와 같구나.」하고 속으로 생각을 하자,
「그렇고말고. 그 전자파에 의해 에텔 전체가 자장화(磁場化 )되고 온 세계가 거룩한 방송국의 방송을 동시에 듣고 느낄 수 있게도 되는 것이다. 동서남북, 위는 성층권 너머서부터 아래는 지구의 중심에 이르기까지 그 힘이 있지 않은 곳은 없다.
우리는 지금 세계의 지붕, 그대들의 이른바 초점과 같은 위치에 있다. 우리가 신의 심장에서 나오는 우주의 리듬에 어우러지면 우리의 생각은 신의 사랑으로 뜨겁게 세워지고 그 신의 사랑의 생각으로써 있는 자리에서 온 누리를 이롭게 북돋을 수가 있는 것이다.」
「대사는 나에게 음악의 본질을 가르쳐 주시는 것만이 아니고 보다 깊은 예지까지 계시해 주시고 있구나」하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대사는 나의 생각을 역시 느끼신 듯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기의 악기를 마음대로 다루려면 연습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악기에만 한정해서는 안된다. 모처럼 훌륭한 악기인데도 서툰 연주밖에 안나오는가 하면 아주 평범한 악기인데도 훌륭한 표현이 나오는 것을 나는 들은 적이 있다. 이것은 모든 개인에게도 해당된다. 신의 사랑은 영원히 한결같이 있고 누구도 거기서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두 사람의 인간이 똑같은 연주를 하는 법은 없다. 사람마다의 감정에는 여러 색깔이 있기 때문이다. 악보에서 그저 음부와 기호만을 보는 사람도 있고 음악을 얼른 느끼는 사람도 있다.」
잠깐 말을 끊으시더니
「그런데 말일세. 좋지 않은 음악에도 나름대로의 장점이랄까 가치가 있지.......」 하고 짐짓 웃음섞인 어조로 이으시기를,
「그것은 좋지 않은 음악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이라네.」
그이는 다시 잔잔히 계속하였다.
「좋지 않음 음악은 두드러지게 조화로운 리듬이 그것을 본래의 ‘무(無)’로 돌려버리는 것이다. 원래 그것은 실재(實在)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셈을 할 때 합계를 잘못 낸 것이나 같아서, 합계를 바로 잡으면 그 한때의 잘못은 어디로 가겠는가. 그저 사라질 뿐, 잘못에는 그것을 지탱하는 법칙이 없는 것이다. 있는 것은 다만 엄연한 수의 법칙뿐이다. 조화의 법칙 또한 마찬가지이다.
색깔의 혼합, 그것이 조화의 비밀이다. 그대는 지금까지 색깔의 조화롭지 못한 혼합을 자연 속에서 본 일이 있는가? 없을 것이다. 자연에는 그런 것이 없다. 소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소리는 곧 색깔이고 색깔은 곧 소리이며, 자연은 항상 빛과 소리와 색깔 속에서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습을 할 때는 언제나 소리가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무리하게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다. 소리가 어떻게 나와야 옳은지는 자기 자신 ‘안’에 있는 것이 가르쳐준다. 먼저 연주를 정확하게 할 수 있게 될 일이다. 그리고나서 차츰 템포를 빠르게 해 가고 긴장하지 않고도 빠르게 그리고 정확하게 연주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빠르게 연주할 수 있게 되기 위해 리듬과 표현이 희생되어서는 안된다.
지나친 연습, 연습과잉이라는 함정도 있다. 언제나 새로 시작할수록 동작은 좋아지는 법이다. 마음은 해오던 것을 반복하게 마련이며, 그러므로 한번 잘못된 버릇이 붙으면 바로잡기는 매우 어렵다. 알맞게 쉬는 시간, 그것이 그때까지 의식적으로 다듬어 형성시킨 동작을 재조정하는 여유를 마음에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정확성이 자리잡으며 이것은 필요 불가결의 요소이다. 몸이 쉬고 있으면서 연습을 하고 연주 공부를 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그럴 기회만 주면 몸은 움직이고 있지 않더라도 정확한 솜씨를 가꾸는 일을 해내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적당히 쉬고 나자 그렇게도 어렵던 악보가 쉽게 넘어간다는 경험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것은 육체의 메카니즘을 쉬게 한 사이에 마음이 조정을 했기 때문이다. 풀리지 않는 계산문제를 어떻게든 풀어보려고 계속 매달려 애를 쓰는 것과 같다. 그런 때는 한숨 자고나면 문제는 풀려 있기 일쑤이다. 기회를, 여유를 주었기 때문에 마음이 해결해 놓는 것이다.
연주를 할 때는 듣고 느끼면서 동시에 음악 속으로 몰입해야 한다. 자아의식은 육체의 동작을 방해한다. 마음은 한 번에 한 가지 일 밖에는 하지 못하니 ‘나’를 생각하고 또 음악을 생각하고 하면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나의 일에서 다른 일로 갈팡질팡하는 꼴이 되는 것이다.
이런 마음의 버릇을 극복하는 방법은 리듬 속으로 몰입하여 ‘나’를 잊는 것이다. 이런 두 가지 마음의 의식적 움직임 사이의 심리적인 틈을 리듬이 메꾸어주고, 그리하여 마음이 자유롭게 할 일을 제대로 하게 된다는 것을 그대는 곧 깨닫게 될 것이다. 바로 그렇게 된 상태에서만 사람은 바른 연주를 하는 것이다. 이 모두가 안에서의 일이다. 연습을 해나가면서 몸놀림도 악곡도 리듬도 모두 연주 그것에 녹아들어 하나로 어우러진다. 그리하여 ‘나’는 깊은 바다 속처럼 고요속에 머물고, 그 때 그대는 신의 완전한 조화를 저절로 비춰내게 된다.」
대사는 계속 설해 나가셨다.
「‘영원한 이’는 인간을 거쳐 밖으로 눈길을 돌리신다. 그리고 인류를 거쳐 ‘영원자’는 베를 짜신다. 생명의 리듬을 짜 나가시는 것이다. 결코 남의 흉내를 내지 말라. 그대는 자기 자신의 개성을 발휘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언젠가는 놀라운 독창성이 제 것이 될 것이다.
소리(樂音)와 조(調)의 배합이 매우 중요한데, 특히 악구(樂句)의 첫 머리가 중요하며 또 마디(小節)의 첫 소리는 더욱 중요하다. 배음(倍音)들을 주의 깊게 듣고 그것들을 잘 섞어 완전한 악구가 되게 해야 한다.
레가토(Legato, 매끄럽게)의 선율일 경우에는 다음의 소리가 오기 전에 탁 끊기게 해서는 안된다. 배음들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앞으로 나가는 다음 진행의 시점에 이르기까지 음색과 음질이 고르게 유지되며 울려 나가도록 한다. 그렇게 하면서 소리들의 흐름에 단절이 생기지 않도록 하면 어디서 시작되고 어디서 끝나는지 분간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렇게 하여 배음들이 완전히 섞어 나가면 곡 전체가 조화로운 리듬 속에서 시종하게 된다.」
이것이야 말로 말로 표현된 가장 귀한 작곡, 연주법의 가르침이라고 나는 속으로 탄성을 울렸다. 정말 나의 몸 속을 매끄럽게 흐르는 가락이 느껴졌다. 나는 전에 처음에는 바이올린을, 그리고는 백파이프를 몇 해 만진 일이 있다. 1911년 스코틀랜드에서 대관 기념식이 열렸을 때 스텐포드 브릿지에서 뜻밖에도 백파이프 챔피언에 뽑힌 일이 있었으니 어지간한 수준에는 이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린포체 대사의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었다. 대사가 말씀하시는 그 목소리 그것이 이미 음악이었고 세상에 다시없는 아름다운 곡의 연주를 듣는 느낌이었다.
「곡의 진행 상태를 주의하면서 클라이막스에 이르고 나서는 부드럽게 가볍게 다음 악구로 넘어가도록 배합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대가들의 작품에서나 나오는 리듬감이 생겨난다.」
여기서 대사는 눈을 뜨시더니
「좀 더 이야기를 계속할까?」하고 물으셨다. 그때까지 나는 한 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었다. 대사의 물음에 나는 지체없이,
「네, 더 가르쳐 주십시오. 제가 음악 공부를 시작한 이래 이런 가르침을 정말 고대해 왔습니다.」
나는 대사의 말씀을 한마디인들 놓칠세라 상당히 긴장해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대사께서도 그것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그래, 그럼 좀 더 말해보지」하고 말을 이으셨다.
「클라이막스의 시점은 작곡자 또는 연주자의 내적 느낌과 해석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다루는 방법이 달라진다. 예를 들면, 아파시오나토(appassionato, 정열적으로)의 악절(樂節)에서는 차츰 템포를 가속하고 톤을 세게 해가서 그 뒤에 이어지는 엠파시스(emphasis)를 뚜렷이 살리면서 클라이막스로 옮겨가든지, 화음을 차례차례 넓혀가다가 끝으로 세게 강조하여 한순간 숨이 막힐 정도의 긴장감을 주든가 하는 것이다.
베토벤이 연구한 방식은 힘에 힘을 더하여 악센트를 강화하면서 화음의 악절들을 쌓아나가고 그러면서도 최고의 강세가 올 곳에서 청중이 저절로 기대하게 되는 폭발이 나오지 않고 도리어 갑자기 피아니시모(pianissimo)로 연주되는 화음이 나오는 것으로 예기치 못한 아름다움과 짙은 신비감이 듣는 사람의 가슴으로 스며들게 한다.
모차르트는 ‘음악 효과를 올리는데 있어 무엇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음악의 기교를 쓰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예술적 기교를 다한 음악 속에서의 하나의 쉼(休止)의 완전한 침묵, 한 악구의 정점에서의 일순의 고요, 거기에 깊은 속내와 미감(美感)을 담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청중을 분방하게 하늘을 나는 악구들의 나래에 실어 높이 올려놓고는 한순간의 고요속에서 얼의 절대, 무한, 영원성을 열어 보이고, 이어서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가는 악구와 더불어 다시 평범한 현상 세계의 차원으로 돌아오고, 그리하여 이 현상의 차원에서도 빛을 발견하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음악을 하는 사람 그리고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어디 있을까? 최고의 수준에 이른 음악가라도 이 가르침에서 얻는 바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나의 머리를 스치는 사이에도 대사의 말씀은 진행되고 있었고 나는 그 한마디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얼른 다시 주의를 집중해야만 했다.
다행하게도 나는 흥미가 쏠리는 것은 자연스럽게 고스란히 기억이 되는 능력이 있어 대사의 가르침은 별로 놓친 것이 없다. 또 중요한 대목은 얼마간 필기도 해 놓았었다.
잠시 사이를 두시고 대사는 다시 말씀을 이으셨다.
「혹은 또, 레가토의 멜로디를 통하여 살며시 주저하는 듯 수줍은 듯 살랑거리듯 아름다움의 순간을 끌어나가 듣는 사람의 기대가 부풀게 해도 좋다. 그렇게 하면 절정의 소리가 귀를 때리는 순간 미묘한 안도감이 솟아나와 기대하던 미감(美感)이 충족된다.
그리하여 다시 클라이막스에 이르고 애무하듯 그 절정감 속을 거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법칙 곧 리듬의 흐름의 실현, 악구와 악구와의 조화, 전체로서의 완전한 통일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마치 완전한 사랑의 지복(至福) 속에서의 두 얼, 저 완전하고 끝없는 황홀경에서 하나된 두 얼의 어우러짐과도 같은 것이다.
쇼팽은 대기처럼 날렵한 우아함을 갖추고 그 날렵한 우아함을 지니고 그의 손가락은 건반 위를 미끄러지듯 날으듯 오가며 그리하여 우단처럼 보드라운 음색, 살짝 안개가 드리웠지만 그러면서도 그지없이 해맑은 은빛같은 소리를 냈던 것이다. 쇼팽이 지상으로 삼았던 것은 미묘한 터치, 관념의 슬기, 청순한 느낌이었다. 쇼팽에게 있어 최악의 죄는 거칠고 윤기없는 기계적 기교의 숙련이었던 것이다.」
이 끝말을 깊숙이 마음 속에 가라앉혀 뿌리박히게 하려는 듯 대사는 잠시 입을 다무시고 나서 다시 말씀을 이으셨다.
「쇼팽은 그의 연주 전체를 통해 언제나 그 어떤 살랑거림의 순간들을 살려 청중을 극도로 매료하는 효과를 자아냈다. 그것은 밀어덮치는 파도의 안가슴에서 떠도는 날씬한 보트 같은 멜로디의 굽이침이다. 이 독특한 진행이 그의 독창적인 표현법이고, 그래서 그의 작품은 모두가 그의 자필 서명과 같았다. 그에게 있어 곡의 진행의 속도는 그때 그때의 느낌에 따라 늘릴 수도 줄일 수도 있는 유연한 것이다.
얼핏 보기에 이것은 사람을 무시하는 것처럼도 여겨지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매력있는 독창적 수법이며, 신축자재, 변화무쌍한 독특한 운용이고, 그러면서도 리듬의 밸런스와 변화가 곱게 다듬어져 있어 그가 뜻한 바는 동족으로서 직관적으로 파악해주는 그의 나라 사람들에게는 잘 이해되었으며, 작품들을 통해 그 자신의 환상적이고 영적인 변화 과정을 능히 더듬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쇼팽에 대해 그와 같은 평을 언젠가 읽은 적이 있다. 평한 사람은 머시레스였을 것이다. 표현의 순수함은 자기 자신에게 충실할 때에만, 다시 말해 자신의 분명한 생각과 해석에 따라 보다 깊은 속에 들어있는 것을 표현했을 때에 저절로 생겨나온다. 그 때 청중은 연주자가 전달하려는 의미 내용을 느낌으로 받는다. 그리고 그 의미 내용은 안에서 흐르고 있는 무한한 슬기의 흐름에 자기 자신을 개방하는 정도, 곧 우리 모두를 연결하는 한 생명에는 단절도 분리도 없음을 깨달은 정도에 비례하는 것이다.」
이 때 나는 ‘악기를 연주할 때는 그 악기와 하나로 어우러져야 한다. 악기와 더불어 연주할 줄 모르는 사람은 바탕이 연주를 하지 못할 사람’이라는 슈만의 말을 소리쳐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장래를 크게 촉망받고도 실패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 까닭은 창조자와 그 피조물은 일체이며 그 사이에는 어떠한 단절도 없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한 데 있다. 한얼인 신에게만 성음(聲音)은 있으며 신은 성음을 통해, 조화를 통해, 빛과 소리와 색깔과 모양을 통해 신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신다는 사실을 단지 생각 곧 관념으로서만이 아니라 사실로서 체험함으로써 깨달았을 때 여러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신은 조화이며 사랑이며 지혜이며 힘이다. 바로 여기에 사람의 안에 있는 신의 힘이 있는 것이다. 신은 곧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와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하나이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말씀은 곧 하나님이었다. 그리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그러나 육신 그것은 이 사실에 대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때문에 말씀은 불멸하다. 우리는 육신의 의지나 피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고, 사람의 의지에 의해 태어난 것도 아니며 참으로 신의 의지에 의해 태어난 것이다.
대사는 그이의 말씀을 내가 완전히 이해했는지 어떤지를 확인이라도 하시려는지 나를 지그시 응시하시는 것이었다. 고맙게도 나는 대사의 말씀을 완전히 이해한 것 같은 느낌이 우러났다.
「음악으로 자기를 표현하고 싶은 사람은 신이 스스로를 표현하기 위해 완전한 악기를 만드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완전하듯 그대들도 완전하리라.’ 얼이 알고 깨닫는 것이며 마음과 두뇌는 틀을 부려 작용시킨다. 틀에 결함이 있다고 마음에 생각하면 그 생각이 그대로 나타난다. 많은 실패가 되풀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치에서이다.
완전한 리듬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지속하면서 거기에다 소화(消化)를 위한 쉬는 시간이 따르는 부단한 연습-이것만이 천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잊지 말라.
작곡된 것을 완전히 자유롭게 연주하려면 서둘지 말고 고요히 천천히 연습을 쌓아야 한다. 어려운 곳을 대강대강 넘겨서는 안된다. 처음에는 천천히 차근차근 해나가면서 차츰 속도를 올린다. 무엇보다도 정확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일체의 것을 지배하도록 태어났음을 알아야 한다. 만물이 모양을 초월한 실상(實相)에 있어 하나임을 알라. 사람의 겉으로 보이는 개별적 존재성, 분리감에 속지 말라. ‘나’ 이대로가 온 인류의 창조자와 하나라는 자각에 살라.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라.
사랑에 넘치는 마음으로 노래하라. 마음으로 하여금 우아한 가락과 아름다움의 완전한 악기이게 하라. 그때 하늘나라에 있는 이들이 그대가 저들과 하나임을 느껴 기뻐하리라.」
생명의 속내에 대한 대사의 그 이해, 예지, 지식에 나는 매료되었다. 나는 앉은 채로 깊은 명상에 잠겼다. 잠시 후 엄숙하게 명령하는 듯한 어조로 대사께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소리가 들렸다.
「그만 일어나라. 우리들의 고장에 머무는 사이에 그대가 해야 할 일은 많다. 그대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가야 해.」
「네.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조금 더 대사님 곁에 머물고 싶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정하기로 하자. 당장 다른 대사들이 육신을 지닌 채로 그대를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어. 그대가 여기를 떠난다는 것은 오크 계곡에 있는 티벳 요가의 행자나 대사들 사이에 이미 알려져 있는 일인데, 나로서는 그대가 먼저 허츄 계곡을 따라 허존까지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 도중에 여덟 개의 승원들이 아주 가깝게 몰려 있지.
얀탄 승원의 승원장 다추안 대사 앞으로 편지를 써줄 터이니 그것을 가지고 가거라. 그분은 그대를 다른 수행자들 사이에 끼워줄 것이야. 그 분은 몸에서 열이 나게 하여 어떤 혹한에도 견딜 수 있는 투모 술(術)의 대가인데 그 법을 그대가 배울 수 있도록 이미 승낙을 받아 두었다.」
「아, 저도 사대(四大; 地水火風)와 온도를 제어하는 법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 그것은 물론 흥미롭고 훌륭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으로 궁극의 진리를 알 수 있다는 것은 아니야. 그대는 그것을 배워둘 필요가 있을 것이고, 또 거기서 뭔가 터득하는 바도 있을 것이야.」
대사는 미소를 띠며 말씀하셨다.
「건사카 승원에서는 먼 곳을 짧은 시간에 갈 수 있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야. 이것은 말하자면 사마디(三和,삼매)에 든 채로 몸을 떠오르게 함으로써 이뤄지는 것이야. 또 다코우 승원에서는 텔레파시를 견학하게 될 것이야. 이것은 뒤에 그대에게 많은 도움이 될 터이니 잘 배우도록 하라.」
대사의 말씀대로 그 후 텔레파시는 내게 큰 도움이 되었다.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고장 고장의 말을 몰라도 텔레파시로 사람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공부를 하는데는 적어도 한달의 시간이 걸릴 것이야.」
「저의 스승은 어떻게 하시나요, 저와 함께 가 주시는 가요?」
「아니, 그분은 오크 게곡에서 그대가 올 때까지 기다리게 된다네.」
다음날 나는 앞으로의 행로에 대한 문헌을 샅샅이 읽은 다음 린포체 대사와 나의 스승에게 인사를 드리고 길을 떴다. 하인, 통역, 호위역 그리고 조랑말과 노새 한 마리만을 데리고 나머지는 귀로에 다시 들릴 린마톤에 있게 했다.
나는 라사로 가는 무역로를 벗어나 반대의 방향으로 티벳과 부탄을 갈라놓는 히말라야 산맥의 뒷면을 더듬어 가는 것이다. 길은 나 있다고 하지만 겨우 사람이 밟고 갈 수 있을 정도의 소로이고 그나마 흔히 산사태가 나기 때문에 위험한 곳이 많다고 한다.
이 지방에는 설표(雪豹)라는 호랑이와 늑대의 트기 같은 맹수도 출몰한다. 굉장히 빠른 발과 단단한 몸으로 주로 산양을 잡아먹으며 험하고 후미진 곳에서는 사람도 덮친다고 한다. 우리도 실지로 설표 두 마리를 보았지만 아주 먼 거리여서 별 탈은 없었다. 평원을 이동하며 사는 유목인들은 몸집이 큰 개를 많이 길러 양떼를 그 약탈자로부터 지키고 있다.
우리는 이 고장 사람들이 물물교환을 하는 장터가 있는 게린이라는 곳에서 물살이 거센 아모츄 강을 건넜다. 이곳 사람들은 화폐를 쓰는 일이 별로 없고 대개 물건들을 서로 맞바꾸어 생활을 꾸려 나가는 것 같았다. 우리는 장터를 가로질러 챰비 계곡의 하단에 있는 샤리상이라는 곳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야툰은 챰비 계곡 한가운데에 있다. 라사로 가려면 왼쪽으로 꾸부러지지만 우리는 오른쪽으로 꾸부러져들었다. 오뉴월 초여름철에는 챰비 계곡은 야생의 꽃들로 뒤덮인다. 산허리에서 골짜기 끝까지 만개한 진달래가 뒤덮고 빨강, 분홍, 하양, 보라, 온갖 색깔이 그 한 폭의 그림을 펼치고 있다. 진달래나무의 무리가 골짜기 바닥까지 뻗어나온 끝에는 커다란 양귀비꽃이 피어 있었다. 줄기의 키가 다섯자나 되고 꽃은 지름이 적어도 다섯치는 될 것 같다. 화판은 끝에 분홍색이 감도는 노랑이고 시선을 끌어당기는 요염함이 있다. 나는 통역에게 말했다.
「런던이라면 이만큼 있으면 한 밑천 단단히 잡을 터인데 여기서는 이렇게 널려 있는데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는단 말이군.」
계곡의 바닥에는 봉선화, 용담, 참제비고깔 등의 식물들이 깔려 있었다. 제약 원료로 많이 쓰이고 있는 풀들, 특히 여러 가지 염증의 소염제로 쓰이는 귀한 약초들이 얼마든지 자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메오파티(Hmpeopathy, 同種療法)에서 아주 귀하게 쓰이는 아코니틴(Aconitin), 뛰어난 영양제, 건위제인 용담까지 이 외부인은 접근하기 어려운 후미진 곳에 마음만 먹으면 화물차로 몇 차라도 실어갈 수 있을 만큼 널려 있다는 것은 정말 상상도 못할 놀라운 일이었다.
계곡을 빠져 나오자 거기서부터는 길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울퉁불퉁한 벼랑길로 접어들었다. 어떤 곳은 폭이 두 자도 채 못 되는 곳이 있고 그런 길 아닌 길이 허츄 강으로 내리꽂히는 3백미터도 넘는 깎아지른 벼랑 끝을 따라 나 있었다. 한 지점에는 길 위로 튀어나와 있는 바위 밑을 지나는데 바위 크기는 몇천톤이 될 것 같았다. 나는 일부러 그 밑을 몇 번 가고 오고 해보기도 하였지만 그렇게 엄청난 바위 덩이가 가파른 벼랑에서 툭 튀어나와 금방이라도 무너져내릴 것 같은데도 산허리에 그대로 붙어있는 것이 이상했다. 아무래도 언젠가는 천지를 진동시키면서 몇백미터 낭떠러지 아래 강물 속으로 쳐박히는 날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간신히 간신히 기어올라 겨우 고개마루에 올라섰다. 아득히 저멀리 원츄 계곡이 바라보였다. 눈 아래는 허존이 보이고 산허리 여기저기에 승원이 흩어져 있었다.
린포체 대사의 말씀대로 그렇게 여러 승원이 한자리에 바싹바싹 다가서 있는 것이 신기했다. 고개를 내려가기는 오르기보다 더 힘들었다. 고개 아래는 죽 열려서 그대로 원츄 계곡에 이어져 있고 그 한가운데를 허츄 강이 흐르고 있다. 그런데 거기서 우리는 조랑말을 탄 한떼의 티벳인들과 마주치게 된 것이다. 정말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는지 짐작도 못할 일이었다.
「저 작자들은 마적떼 같은데?」
하고 나는 호위역에 물어 보았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인원수가 우리 일행의 다섯곱은 되었다. 그들은 차츰 거리를 좁혀 오면서 은근히 우리를 포위했다. 이쪽에서 먼저 싸움을 걸기나 허둥대기를 기다리는 듯한 눈치였다. 그러나 이쪽에서 쳐들어간다는 것은 곧 자살행위였다. 그래도 나는 뭔가 위기를 넘길 수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있어 그다지 당황하지는 않았다.
그곳의 도적들은 마적행위를 신사적인 직업으로 여기고 있고 다른 ‘직업’을 오히려 경멸한다는 것이다. 바짝 조여든 그들은 그저 얌전히 있는 우리들의 짐을 들추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우리들의 짐과 소지품 그리고 말까지도 몽땅 약탈해버릴 모양이다. 그러나 어찌해볼 방도가 없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나는 나 자신의 의안(義眼) 생각이 났다. 티벳 사람들은 거의가 미신을 철저히 믿으며 괴상한 신들을 두려워한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신들 가운데는 살결이 희고 눈이 하나뿐인 신이 있는데, 그 신의 노여움을 사면 무서운 재앙, 때로는 죽음까지 당하게 된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그 때문에 그들은 그 신들의 노여움을 달래려고 정기적으로 온갖 물건을 제물로 바치고 제사를 지내기도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느닷없이 마적들 사이로 헤집고 들어갔다. 그리고는 일부러 목청을 돋우어 티벳말로 ‘땅이 깨어져 지옥이 열릴지어다.’하고 엄포를 놓으면서 눈에서 의안을 빼어 손바닥 위에 놓고 그들 하나하나의 코끝에 내밀어 보이고는 다시 의안을 눈에 끼웠다.
그때의 그들의 표정은 정말 볼만했다. 갑자기 당한 일에 눈이 뒤집히더니 몸을 와들와들 떨면서 손에 들었던 것을 내팽개치고 말에 오르기가 바쁘게 도망을 쳐버렸던 것이다. 어찌나 급하게 말을 모는지 자욱한 흙먼지에 그들의 뒷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무것도 아닌 유리알 하나로 그렇게 얼이 빠진 꼴을 보고 우리는 한참을 배를 쥐고 웃었다. 한참을 달려가던 그들이 아주 멀리서 잠시 멈추어 서더니 그로부터 두 번 다시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얼마 후에 몸이 하얀 신이 산을 넘어 원츄 계곡에 나타났다는 소문을 티벳 사람들을 통해 들었는데 아마도 그들은 우리를 가장 무서운 외눈박이 신으로 완전히 믿어버렸던 모양이다. 이 의안의 비밀은 우리는 절대로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 그것이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신비로운 힘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하얀 신’의 위력을 한층 더 높여주는 사건이 있었다. 우리가 길을 더듬어가던 도중 한 청년이 산허리에서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지다가 어깨의 뼈가 빠져 신음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그의 어깨뼈를 별로 어렵지 않게 맞추어 줄 수 있었다. 그렇게 신음하고 있는지가 반 시간이나 된다고 했는데, 나의 치료로 그 청년은 당장 기운을 되찾았다. 이 사건으로 ‘하얀 신’의 평판이 한층 높아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뒤에 린마톤으로 돌아갔을 때 린포체 대사가 하시는 말씀이,
「자네는 이 나라에 온지가 얼마 안되는데도 벌써 나보다도 유명해졌더군.」하고 웃기까지 한 것이다. (계속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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