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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받는 수운의 사회적 성격과 두 주문의 완성》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동학, 천도교

《시험받는 수운의 사회적 성격과 두 주문의 완성》

柏道 2021. 9. 7. 20:19

《시험받는 수운의 사회적 성격과 두 주문의 완성》 | 지구문명개벽중심, 한국

조로아스터 2017. 9. 22. 19:05

http://blog.daum.net/mujinbon/3079?category=1086422

 

《시험받는 수운의 사회적 성격과 두 주문의 완성》

《시험받는 수운의 사회적 성격과 두 주문의 완성》 김상일 카톡방-170922 종교적 체험에는 반드시 ‘시험(trial)’이라는 과정이 따른다. 수운의 종교경험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수가 광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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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받는 수운의 사회적 성격과 두 주문의 완성》


김상일 카톡방-170922

 

종교적 체험에는 반드시 ‘시험(trial)’이라는 과정이 따른다. 수운의 종교경험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수가 광야에서 받은 시험 이야기는 공관복음서에 모두 기록될 만큼 그 비중이 크다.

조기주는 수운의 경신년 체험을 ‘대각 1’과 ‘대각 2’로 나누어 ‘대각 2’에서 수운이 받은 시험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나타냈다. 종교경험에서 시험이 따르는 이유는 다름 아닌 앞에서 말한 깨달음의 세 가지 과정 때문이다(조기주, 1979, 30~33).

그리고 부처가 인간에게 세 가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불교의 삼신설도 인간의 근기에 따라 개인이 시험을 받는 과정과 내용이 다르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r, 1892~1971)는 인간이 유혹을 받는 세 가지 교만을, 권력에 대한 교만, 지식에 대한 교만, 거룩함에 대한 교만이라고 했다.

시험과 유혹은 깨달음의 세 과정 가운데 제1차 과정, 제2차 과정, 제3차 과정의 각 과정에서 모두 생길 수도 있으며, 특히 제1차 과정과 제3차 과정을 혼동하는 데서도 생길 수 있다.

득도가 한 과정에서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각 과정에서 생길 수 있기 때문에 각 과정에서 한 과정 자체를 절대시하거나 거기에 집착할 때에 시험은 유혹으로 변해 버린다.

니버가 말하는 ‘거룩함’에 대한 교만은 일종의 종교적 교만에 해당하며, 이것은 권력이나 지식의 교만을 극복했다는 자기 거룩함을 자랑하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의식하기 어려운 교만이다.

칸트는 이러한 교만을 ‘근본악’이라고 까지 했다. 동양 종교가 가장 쉽게 빠질 수 있는 교만이다. 깨달음의 마지막 단계인 제3차 과정에서 더 무서운 시험이 있고 유혹이 따른다는 것을 뜻한다. 오히려 이 마지막 과정이 가장 위험한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가장 이상적인 종교체험이란 세 과정을 조화‧통일시켜 ‘투명(trans-parent)’해지는 데 있다.

세 과정을 과정별로 전자아‧자아‧초자아라고 할 때에 시험은 심지어 초자아(transperson)에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시험을 극복하는 방법으로는 초자아 위에 더 높은 차원의 자아를 설정할 것이냐가 문제시된다. 메타노이아의 메타 같은 것 말이다.

그러나 그 때에는 제4의 시험이 있게 마련이다. 여기서 초인격심리학은 이렇게 무한퇴행을 해서는 해결의 실마리가 없다고 보며 세 자아를 관통시켜 동시에 초월시켜야 한다고 본다.

영어의 ‘trans’는 ‘통하게 한다’ 또는 ‘통일시킨다’ 등의 뜻이 있다. 방법은 세 과정과 세 자아가 상호 감시하는 길밖에 없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가 서로를 투명하게 들여다보도록 만들어야 한다.

감각과 이성과 영성은 상호 감시 작용을 해야 한다. 감각은 영적 자아가 너무 초월하지 못하도록 밑으로 잡아당겨야 하고, 이성은 감각이 너무 말초신경적이 되지 않도록 위로 끌어올려야 한다. 이성이 감정을 감시해야 하지만 감정도 이성을 감시해야 한다. 여기에 ‘투명인간(transparent person)’이 요청되는 이유가 있다.

‘투명인간’이란 다른 차원의 인간이 아니라 ‘감각(sense)’과 ‘영혼(soul)’이 관통해 있는 인간이다. 그래서 ‘전체적(holistic)’ 인간이 되는 것이다(Nitschke, 1995, 9).

매릴린 퍼거슨은 이를 ‘수정궁인간(aquarian man)’이라고 했다. 마치 어항 속을 어느 방향에서 들여다보아도 투명하듯이 세 자아는 관류하면서도 관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우는 일상적인 감각과 감정의 세계에서 책임적 존재이다(무층).
제선은 탈속적인 구름 위에 있는 존재이다(선층).
수운은 일상적인 삶에서 떠나 27년 동안 방황한다. 그러나 다시 일상적인 삶으로 되돌아와 ‘수운’이라 칭한다. 가장 낮은 그러나 가장 높은 자아가 수운의 자아이다. 이를 깨달음의 삼과정이라고 한다.

‘상(常)-비상(非常)-상(常)’의 세 과정을 모두 거쳐 수운은 투명인간이 된다. 이러한 세 과정을 거치는 동안 그의 명호와 자는 복술-제선-제우-수운으로 변한다. 그리고 이것은 알감닥박 층의 층변을 시사한다.

그의 종교경험 속에는 전자아-원시종교적 또는 샤머니즘적 요소도 있고(복술), 사회정의 차원의 예언자적-자아의 요소도 있으며(제우), 초월적인 도가적인 요소(제선)도 있다. 그리고 수운은 이 세 자아를 모두 여과시켜 투명하게 만든다.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받을 때에 악마는 금식 끝에 시장해 있는 예수에게 나타나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라고 했다”.

무층의 복술이 받는 유혹이다. 매슬로우는 다섯 단계의 욕구충족 가운데 식욕‧갈증‧성욕 같은 것을 ‘기본욕구(basic need)’라고 했다. 악마의 유혹은 기본욕구에 대한 유혹이라 할 수 있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이러한 기본욕구의 유혹에서 지고 만다. 기본욕구는 감각차원에서 생기는 시험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대학에서 가장 인기 있는 학과가 돈벌이를 가장 잘 할 수 있는 학과라는 것이 바로 대학이 아직 인간의 기본욕구 충족에 부응하는 차원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가?

그리고 이러한 대학의 현실이 바로 오늘날 대학의 한계이기도 하고 우리 인간의 한계라고도 할 수 있다. 이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인간이 초인격을 향해 가는 길은 험난할 것이다. 그러나 그 단계를 딛고 다음 단계를 지향해야 한다는 사실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수운의 경우에는 악마가 아닌 하날님이 수운을 향해 시험을 건다. 하날님이 제우에게
“네가 지금 세상을 바로잡아 도탄에 빠진 세상을 구제하여 창생들을 건져 너의 뜻을 이루려고 하면 금력과 권력이나 돈이 없으면 불가능할 터이니 너에게 백의제상(白衣帝相)을 주리라”
고 하니,

수운이 대답하기를
“이 세상이 돈과 권력으로 망하게 되어 있는데 어찌 부귀로써 세상을 건지겠습니까? 이것은 사나움으로 사나운 것을 바꾸는 것이라 내 이를 원치 않는다”
라고 했다.

악마는 예수에게 나타나 높은 건물 꼭대기에서 한번 뛰어내리라고 한다. 공명심을 부추기는 시험이다.

하날님은 다시 수운에게 나타나
“네가 부귀를 원치 않는다면 권모술수로써 세상을 건지라”
고 한다. 이에 대하여 수운은
“세상이 권모와 간교로써 망했는데 어찌 다시 작은 꾀로 백성을 속여 일시적 평안을 도모하리요. 내 이를 원치 않는다”
라고 대답했다.

매슬로우의 말을 빌리면 이는 기본욕구 충족에 대한 유혹이다.
매슬로우는 인간의 두 번째 욕구는 어디에 속하려는 ‘소속감(membership)이고, 세 번째 욕구는 남으로부터 ‘인정(recognition)’ 받으려는 욕구라고 했다. 인정을 받고 싶은 데서 공명심이 생긴다.

하날님은 다시 수운에게 나타나
“그럼 내게 조화의 술법이 있으니 네 이것으로 세상을 건지라”
고 한다. 이번 시험은 전과는 다른 종류의 것으로 매우 종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하날님이 직접 주는 선물을 받으라는 시험이다.

복덕방망이 같이 온갖 재주와 사술을 부리는 기술을 주겠다는 요청이다. 이러한 제안에 대해서 수운은
“이것은 천리를 어기는 일이라 천지간 삼라만상이 모두 다 무위이화의 이치로 나고 자라고 살거늘, 어찌 천리에 어기는 술법으로 세상을 건지리요, 내 이를 원치 않노라”
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하날님이 또한 그릇된 도로써 나를 가르치니 내 이제부터는 하날님의 명교와 가르침도 듣지 않겠노라”
고 심지어는 하날님과의 결별도 선언한다.

수운의 이 마지막 시험은 종교적 권력이나 기적에 대한 제안도 거부한 것이었다. 니버의 ‘거룩해짐’의 교만을 버리는 것이다. 이 장면은 야곱이 신과 벌리는 격투의 장면이다.

오늘날 종교가 돈과 권력의 유혹에서 모두 지고 말았다. 한국 교회 아무리 번창해도 이미 이 종교는 일제의 권력 앞에 무릎을 꿇은 시험에 진 종교이다. 그 다음부터 결국의 종착역은 돈과 권력일 수 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여기서 수운이 시험을 이겨내는 논리를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금력으로 타락한 세상을 같은 금력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는 논리이다. 만약에 그렇게 될 때에는 악순환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악순환을 극복하는 방법은 바로 끊음, 즉 ‘단(斷)’의 논리로만 가능하다. 권모술수로 망한 세상은 권모술수로 구할 수 없다는 단의 논리로 수운은 대응한다.

예수가
“칼을 사용하는 자는 칼로 망한다”
고 한 논리와 같다. 칼은 공격의 수단인 동시에 방어수단이기 때문에 주객이 전도되는 데 따라서 얼마든지 그 용도가 뒤집힐 수 있다.

이러한 악순환의 논리를 그대로 사용하는 존재가 하날님이라면 그런 하날님과도 결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운은 ‘하날님’이란 존재에 대해서도 그 권위에 회의를 갖는다. 그러면서 ‘천리(天理)’의 중요함을 말한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재주를 부리는 신은 위험하다고 보았다. 전지전능 무소불위의 인격신에 대한 거부라고 할 수 있다. 인격신은 아브라함에게 본 바와 같이 종자가 하늘의 별같이 바다의 모래 같아 질 것이라는 축복이다. 이런 축복을 향해 수운은 사양했다. 오늘의 동학 정신은 여기서 출발해야 한다.

‘신 죽음의 신학(Death of God Theology)’이 복덕방망이(Deus ex Machina)로서의 신의 죽음을 선포하는 것과도 같다. 절대자로서의 인격신관이 범하는 과오의 일단을 수운이 지적한 것이다.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같이 인격신을 궁극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종교는 여기서 한계가 드러난다. ‘무소불위’의 인격신관은 온갖 폭행과 폭력을 자행해 왔으며, 인간이 이런 인격신의 대행자라고 자처할 경우에 종교적 폭력은 극에 달한다.

수운은 그 무소불위보다 더 궁극적인 것은 ‘무위이화(無爲理化)’의 천리라고 했다. 일단 인격신에 대해 수운이 천리天理와 같은 비인격적인 것으로 이동을 한다. 천리 다음으로의 이동은 ‘지기至氣’이다.

수운은 그의 궁극적인 개념에서 ‘하날님’의 무소불위와 ‘무위이화’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는가. 이 점은 수운의 사상을 논할 때 가장 중요한 논쟁거리로 떠오른다.

수운이 21자 주문에서 비인격적인 ‘지기’와 인격적 ‘천주’를 대비시킨 원인이 여기에 있다.

수운은 을묘천서에서 비롯하여 경신년 천사문답에 이르기까지 인격적 존재인 ‘하날님’과 지속적인 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그러한 하날님마저도 나중에 그가 발전시킨 ‘지기(至氣)’인 무위이화보다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자기에게 시험을 거는 존재를 수운은 회의를 가지기 시작하면서 그런 존재에 대한 초월은 무엇인가 그것을 찾는다. 그는 ‘하날님(天主)’과 ‘지기’ 사이에서 그 우열 그리고 그 선후에 대하여 고민한다.

권력이나 금력에 의한 시험은 불교의 삼신 가운데 화신化身 혹은 응신應身에서 나온다. 붓다의 몸 가운데 바로 화신이 중생들의 기본적인 욕구를 만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날님은 붓다의 보신報身적 존재와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보신적 모습에도 회의를 갖는다. 보신이란 역사 속에서 인격체로 나타나는 존재를 두고 하는 말로서 싯다르타 붓다 그리고 예수라는 이름을 갖는 존재들이 이에 해당한다.

수운은 천주에서 인격적 성격을 제거한 그러한 장소가 있다고 보았으며 이를 ‘지기至氣’라고 했다. 불교의 법신法身 같은 존재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기독교도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할 때에 그 궤도가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예수와 ‘신성Godhead'의 사이 존재이다.

그러나 이단으로 몰린 영지주의가 신성 만을 궁극적이라 주장하다 결국 이단시 되고 만다. 불교에서는 법성을 삼신 가운데 한 분으로 긍정하는 것과는 대비가 된다.

수운은 드디어 두 개의 주문을 동시에 말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즉,

시천주조화정영세불망만사지’(본주문)과
‘지기금지원위대강’(강령주문)이 그것이다.

이에 ‘하날님’ 말씀도 듣지 않겠다고 하고 내놓은 이 두 개의 주문에 대하여 다시 하날님의 음성이 다음과 같이 들려 온다.

아름답다. 너의 뜻이여,
가상하다 너의 절개여,
너의 공부가 이미 지극하고,
너의 수련이 이미 도수에 차고,
너의 행실이 이미 원만하니
내 이제 너에게 보국안민하고
포덕천하하여 광제창생하고
지상천국을 건설할
후천 오만 년의 무극대도를 주노라.

“가련하다 가련하다”
로 시작된 수운의 사회적 성격은
27년의 긴 방황 끝에
“기장하다 기장하다”
로 바뀌고 이 음성을 듣고는 순간적으로 갑자기 온몸에 새 기운이 돌며 마음에 새 생각이 일어나 여태껏 공중에서 들리던 하날님 말씀이 수운의 내면적 가슴속에서 우러나온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밖에 있던 보신적 하날님이 내면적 법신으로 변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내 마음이 네 마음”
인 지경에 이르러 후대에 나누어 논쟁이 되는
‘향벽(向壁)’과 ‘향아(向我)’의 구별이 이 때부터 생기게 된다.

이제부터는 밖에서 그리고 위로부터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자기언급적으로 되어 버린다.

스스로 묻고 스스로 대답하여
무궁을 외우고 무궁을 노래하니
천지일월 금수초목 인물이 한가지로
그 노래에 화답하여
억천만의 공간이 눈앞에 있고
억천만 년의 시간이 눈앞에 있어
먼 데도 없고 가까운 데도 없으니,
지나간 시간도 없고,
오는 시간도 없어
백천억 무궁수의 시간과 공간이
한 조각 마음속에 배회함을 느낀다(조기주, 1979, 32).

수운의 사회적 성격은 궁극적으로 보국안민‧포덕천하‧광제창생‧지상천국을 이룩하자는 데 있다. 그 사이에 수많은 마음의 갈등과 시련, 그리고 유혹과 시험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지나오게 되었다.

그는 그 후로도 1년 2개월 동안 칩거하면서 거듭 하날님으로부터 직접 들은 음성의 진위를 확인하고 자신과의 대화를 계속한다.

2년 전 용담으로 되돌아온 것이 외면적 자기언급적 행위였다면, 이제 내면적 자기언급을 함으로써 사회적 성격이 성숙해졌다. 이렇게 그의 사회적 성격은 종교적 성격을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수운의 사회적 성격이 성숙해지는 과정에서 볼 때에 그의 사상 가운데 주요 부분인 신관도 변화‧발전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처음에 환청과 환시를 기대했을지도 모른다. 그는 을묘천서 이후 이를 넘어서 인격신과의 직접적인 대화를 한다.

그러나 그는 인격신도 넘어선 비인격적 ‘무위이화’ 또는 ‘지기’에 호소한다. 그러면서 다시 하날님을 찾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에게 인격과 비인격의 구별은 무의미하며 양자는 상호 재귀적 관계 속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비인격에서 나와 인격으로, 그리고 다시 비인격이 되고 다시 인격으로 들어간다.

이 말은 하날님(천주)이 지기가 되고 지기가 다시 하날님이 되는 과정이 되먹임한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