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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시원을 밝힌 제임스처치우드의 나아칼의 점토판 해독 본문
한민족의 시원을 밝힌 제임스처치우드의 나아칼의 점토판해독
한겨레의 시원을 밝힐 제임스 처치워드의 나아칼 점토판 해독
영국의 고고학자 제임스 처치워드(James Churchward)1)는 인도, 미얀마, 이집트, 위굴, 중국, 멕시코 등의 나아칼(Naacal)의 점토판(粘土版)을 50년간이나 연구 해독하여 레무리아 대륙이 약 15,000년 전 태평양에 침몰되었으며, 이 대륙에 무(Mu) 제국이 있었다고 했다. 레무리아 대륙이 태평양에 있었느냐 혹은 인도양에 있었느냐 혹은 파미르고원의 마고성(麻姑城)에 있었느냐 하는 문제는 아직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나아칼의 점토판 해독은 인류의 기원, 선사시대의 역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사료(史料)를 전하고 있다. 나아칼의 판에서 해독된 우주의 탄생에 관한 역사를 전해주는 기호는 아래의 그림과 같다.
도표 1-2 나아칼의 점토판에서 발견된 우주 생성
그림 1a. 가늘고 곧은 가로 선은 우주의 공간을 나타내는 기호이다.
그림 1b. 원(圓)으로 표시된 우주 공간 속에 일곱의 머리를 한 뱀이 움직이고 있다.
그림 2. 파도치는 가로 선은 지구상의 물을 상징한다.
그림 3. 원은 해의 그림이다. 해는 신의 상징이며, 하늘의 상징이다.
그림 4. 원은 해의 그림이며, 가느다란 수직선은 땅에서 나오는 빛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해의 힘을 나타낸다. 태양은 회전하면서 지구에 빛을 주고 있다는 뜻이다.
그림 5. 해에서 나오는 수직 파도의 선은 지구의 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태양의 힘을 상징한다. 이들이 서로 화합이 되었을 때, 지구 열의 힘이 활발하게 작동하게 된다.
그림 6a. 해에서 나오는 점선은 지구의 생명력과 관련이 있는 태양의 생명력을 상징한다.
그림 6b. 우주란(宇宙卵)2) 속에 있는 지구의 생명력에 활력을 주는 상관된 태양력을 상징한다. 이 생명력은 물 속에 있으며, 생명을 낳게 한다.
그림 6c. 우주란 속에 있는 지구의 생명력에 활력을 주는 상관된 태양력을 상징한다. 이 생명력은 땅 위에서 나오며, 알을 부화해서 생명을 탄생케 한다.
그림 7. 이 방(方)은 옛 사람들이 무를 나타내는 기하(幾何)의 기호로 사용했다. 이 기호는 “Moo, Ma, 어머니, 땅, 들판, 나라” 또는 “입”을 상징하는 신성문자(神聖文字)3)이다.
그림 8. 이 다우(Tau)는 무에서 부활을 나타내는 기호였다. 그 것은 또한 남십자성(南十字星)의 그림이다. 다우는 “탄생”, 혹은 “출현”을 뜻한다.
그림 9. 연꽃은 무의 국화였다. 전통적으로 연꽃은 지상에 핀 첫 꽃이며, 어머니 나라의 상징적 꽃으로 지정되었다.
그림 10. 이 3개의 원은 좁은 지형으로 3개의 구역으로 나누어진 무를 뜻한다. 3은 무의 상징적 기호이다.
그림 11. 도약하는 사슴 케(Keh)는 나아칼의 판각에 종종 보이는 그림이다. 이 사슴은 첫 인간의 출현을 상징한다. 이 동물은 도약하는 힘 때문에 이 지상에 나타난 첫 인간의 상징성을 갖고 있다. 인간은 자연의 진화로 탄생된 것이 아니고, 도약의 힘을 가지고 이 세상에 나왔다는 것이다. 인간은 특수한 우주의 창조로 이 세상에 나왔다고 한다.
그림 12. 이 그림은 무에 있어서 불의 상징이다. 불꽃의 밑은 두텁고 끝으로 갈수록 가늘어진다.
그림 13. 이 그림은 산이 융기(隆起)되고, 가스 지대가 형성됨을 나타낸다. 우리들은 이집트 사람이 불의 상징물 또는 신성시되는 풍뎅이 모양으로 생긴 투구를 어디에서 인용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나아칼 족은 이 불의 상징물을 인도에서 이집트로 가져왔다. 이집트 사람은 나가(Naga) 위에 손잡이를 놓고 그것으로 칼을 만들었다. 그들은 그들의 상형문자로 두 형태의 불 즉 지하의 불과 타오르는 불꽃을 표현한 것이다. 그들은 어머니 나라가 불에 타 지옥으로 침몰하는 처참한 모습과 불 속에 쌓여서 타는 두 종류의 어머니 나라를 표현한 것이다. 이 기호는 이집트의 <죽음의 책>이라는 성스러운 책의 한 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림 14. 이 그림은 무 제국의 땅에 첫 사람이 출현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부위별로 해독하면, 다음과 같다.
A는 무 제국의 국화인 연꽃이다. B는 무 제국의 숫자를 표시한 셋 잎이다. C는 신성문자 M이며, 무 제국의 알파벳 기호이다. D는 다우 기호이며, 부활을 표현한 것이다. “나타나다, 앞으로 오다” 의 뜻도 있다. E는 물의 기호이다. 나타나는 육지가 물에 쌓여있다는 뜻이다. F는 세상에 나타난 첫 사람을 상징 하는 사슴 케(Keh)이다. 위 기호들은 천부경의 원-天, 방-地, 각-人의 기본 기호둘과 같은 원리이다.
위 점토판의 해독은 인류사의 기원을 추적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료가 된다. 그러나 무 제국이 있었던 레무리아 대륙이 태평양에서 침몰했다고 하는 처치워드의 설에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1961년 여름, 소련의 해양 관측선 비타아즈 호는 인도양의 해저 5,000에서 옅은 바다나 해안에서만 볼 수 있는 모래를 발견했다. 이 발견을 근거로 하여 영국의 동물학자 F. L. 스크레터는 인도양에서 살아진 대륙이 있었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므로 레무리아 대륙은 인도양에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다.
저자의 견해로는 박제상의 <부도지(符都誌)>4)의 내용에 따라, 파미르고원의 마고성이 무 제국이 있었던 곳으로 조심스럽게 제의 하고자 한다. 레무리아 대륙이 약 15,000년 전에 태평양에서 침몰했다고 처치워드는 밝히고 있지만 같은 그의 저서에서 "나는 티벳의 사원에서 추정의 실마리가 되는 나아칼의 점토판을 발견했다. 그것에 따르면, 약 7만 년 전 나아칼이 어머니 나라의 신성한 책 즉 영감의 책의 사본을 위글의 수도로 가져왔다."고 했다.
원동중의 <삼성기>5)에 환인의 역년이 63,182년이라고 하는 기록을 볼 때 파미르고원의 마고성 시대부터 황궁, 유인 환인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약 7만 년 전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미국의 스텐포드 대학의 그린버그 교수는 세계 어족의 연구에 많은 기여를 했으며, 그는 인도-유럽어족, 우랄-알타이어족 등의 조상어로서 유라시아 공통조어 설을 제의한 바 있었다. 백인종, 황인종, 흑색인종의 조상들이 유라시아에 살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과 같다.
또한 <부도지>에 따르면, 마고(麻姑)의 두 딸이 궁희(穹姬), 소희(巢姬)이며, 이들 모두 남편이 없이 자녀를 가진 것으로 보아서 7만 년 전의 파미르고원의 마고성 원시사회는 난혼이 이루어져 모계 중심의 씨족 사회였던 것으로 생각한다. 무가 어머니를 뜻하고, 어머니 나라에서 신성한 영감의 책을 우글의 수도로 가져갔다고 하는 기록을 볼 때 무(Mu)가 파미르고원의 마고성에서 지진으로 침몰한 이야기가 아닌가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 남겨두겠다. 하여간 위치는 어디인지 간에 레셔톱은 1966년 <지구의 자연과 인간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해양학, 고생물학, 고인류학, 영장류학, 지질학의 분야에서 입수한 재료를 근거로 하여, 레무리아 대륙은 태고의 인류 생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왜냐하면 그 곳이 영장류의 발생지이기 때문이다."고 했다.
<부도지>에 따르면, 마고는 남편이 없이 궁희와 소희를 낳았고, 궁희와 소희 역시 남편이 없이 두 궁과 두 소를 낳았다고 하는 것을 볼 때, 마고 원시 사회는 모권적씨족제(母權的氏族制)였다고 생각한다. 구석기시대의 초엽에는, 남녀의 혼인에 있어서도 란혼(亂婚)이 이루어져 자녀들이 아버지는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어머니를 중심으로 같은 혈연(血緣)의 무리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처치워드가 나아칼의 점토판을 해독하여 전하는 약 7만 년 전 나아칼이 영감의 책을 위글의 수도로 가져갔다고 했는데, 마고성에서 나아칼이 영감의 책을 위글의 수도로 가져갔다고 보는 것이 옳은 것 같다. 무(Mu)제국의 /무/와 마고성의 /마/가 “어머니”의 뜻으로 같은 어사라고 생각되며, 지리적으로도 위글의 수도는 그 당시 비옥한 땅이었던 고비사막에 위치하고 있었으니, 그 당시의 교통 사정으로 보아서 무 제국은 태평양에 있었다고 하기보다는 파미르고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사료된다. 그러므로 필자는 마고성이 인류사의 기원지라고 밝혀왔다. <부도지>에, 마고씨족 열두 개 파는 네 파로 나누어 이동을 시작했는데, 청궁씨족은 돈황(敦煌)이 있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중원(中原)문명을 건설했으며, 백소씨족은 사마르칸드를 지나 서쪽으로 이동하여 중, 근동문명, 나아가 서양의 문명을 건설한 주인공들이며, 흑소씨족은 남쪽으로 이동하여 인더스, 간지스강 유역의 인도 문명을 건설했으며, 황궁씨족은 북쪽 천산산맥 방향으로 이동하여 유인,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우리들의 직계 조상이 되었을 것이다.
천부경(天符經)은 마고(麻姑) 시대의 7만년 전부터 환궁(黃穹), 유인(有因), 환인(桓因) 환웅(桓雄), 단군(檀君)으로 이어지는 시대에 말로 전하여 온 경전이다. 그리고 천부인(天符印)은 천권(天權)의 상징으로 후계자에게 전수한다. 환웅께서 신지(神誌) 혁덕(赫德)에게 명하여 녹도문으로 천부경을 썼다고 <소도경전본훈(蘇塗經典本訓)>에 기록하고 있다.
역시 같은 책에 우리 민족의 문자 발달 과정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1) 녹도문(鹿圖文): 환웅시대 B.C. 3,800년 이전
2) 우서(雨書): 자부(紫府) 시대 B.C. 3,800년 경
3) 용서(龍書): 복희(伏羲) 시대 B.C. 3,500년 경
4) 화서(花書): 치우(蚩尤) 시대 B.C. 2,700년 경
5) 신전(神篆, 가림토문자): 3세 단군 가륵(嘉勒) 시대 B.C. 2,200년 경
6) 훈민정음(訓民正音) 세종(世宗) 25년, A.D. 1,443년
이 녹도문은 우리 민족의 이동을 고려해보면 중앙아세아, 인도반도 등에서 발굴되는 유물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추정이 된다. 처치워드가 조사한 나아칼의 점토판에는 사슴 케(keh)가 종종 보이는데, 천지가 창조되는 과정에 사슴은 인간의 출현을 상징하고 있다. 다음의 그림은 이 지구상에 무(Mu)와 인간의 출현을 표현한 그림이다.
도표 5-29 무와 인간의 탄생
도약하려고 하는 사슴 keh는 나아칼의 점토판에서 종종 보 수 있는데, 인류 탄생을 상징한다. 신시시대에 녹서(鹿書)가 있었다는 사실은 나아칼의 점토판과 관련하여 살펴보면,사슴이 인간의 탄생을 알리는 의사전달(communication)의 수단으로 이용되었으며, 신시(神市) 때의 녹서(鹿書)는 나아칼(Naacal)의 점토판 에 쓰인 위의 그림문자임이 분명하다.
1) 제임스 처치워드(James Churchward)는 영국의 고고학자이며, 그는 50년간 인도, 미얀마, 이집트, 위글 등의 사원에 있는 나아칼(Naacal)의 점토판을 발굴하여 해독하고, 무(Mu) 제국에 관한 책으로 , , , 를 출간했다. 이 책들은 선사시대 이전의 인류사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사료를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다.
2) 우주란(宇宙卵, Cosmic Egg)은 왕이 /알,Al/에서 탄생되는 신화(神話)에서 유래된 말이다. 우리들은 그 왕을 일자(日子)라고 하였다. 이 알을 하늘에서 가져 온 말을 천마(天馬)라고 하며, 이러한 말의 그림이 캄보디아의 앙콜 왓(Ankor Wat)과 북 구라파에서 출토된 조각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둥근 일윤(日輪, Sun-Carriage)을 수레에 실고 달리는 말의 그림이다. 한국어의 /al/이 일본어에 /ama/가 되어 “天”을 뜻한다. 일구(日球, 해알)는 세상을 밝게 다스릴 왕이 출생하는 수단으로서 널리 활용되어 고구려의 동명왕(東明王),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金首露), 신라의 박혁거세 등이 이 알에서 탄생되었다.
3) 신성문자(神聖文字, Hieroglyphic Character)는 문자를 신격화(神格化)하여, 문자를 신전(神殿)에 모시고 제를 지내는 의식에서 비롯된 말이다. 보통 이집트의 상형문자를 신성문자라고 했다. 일본의 신대문자(神代文字)인 아히루(阿比留)가 대표적인 예가 된다. 스사노오노미코도(素盞鳴尊)가 쫓겨 나가게 되어 그의 누나 아메데라스오미가미(天照大神)가 있는 다가아마하라(高天原)에 고별인사를 하러 갔다. 동생이 많은 군사를 데리고 오는 광경을 본 누나는 자기 나라에 쳐들어오는 것으로 착각하고, 천의 암호(岩戶)에 숨어 버렸다. 이 신은 태양신이라 온 세상이 암흑과 악령의 천지가 되어 버렸다. 이 때에 아메노꼬야네미코도(天兒尾根命)가 문자를 창제하여 신전에 주문(呪文)을 올리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문자가 쓰시마(對馬島)의 아히루 가문에 지금까지 전하여 오고 있다.
4) <부도지(符都誌)>는 신라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이 보문전 태학사로 재직할 당시 열람할 수 있었던 자료와 영해 박씨 가문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비서들을 정리하여 저술한 책이며, 약 7만 년 전 파미르고원의 마고성(麻姑城) 시대부터 환인, 환웅으로 이어지는 한겨레의 상고사 연구에 유일한 저서이다. 이 책을 고 김은수님이 주, 해설서를 내게 되어 빛을 보게 되었다.
5) <삼성기(三聖紀)>는 상하편이 있는데, 상권은 신라 眞平王 22년, A.D. 600년에 신라 10승 중의 한 분인 고승 암함로(安含老)가 쓰고, 하권은 고려 말엽 원동중(元董仲)이 쓴 책이며, 우리 상고사 연구에 귀중한 사서이다. 한일 합병 다음 해인 1911년 태백교도 계연수(桂延壽)가 三聖紀, 檀君世紀, 北夫餘紀, 太白逸史 이 네 권의 책을 환단고기(桓檀古記)로 합본, 편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해의 우리(太陽界)와 인류의 진화
태양계라고 말하지만 실은 그 전 질량의 99% 이상이 태양에 속하여 있고 나머지 1% 미만이 이 체계 내의 모든 행성(行星)과 기타의 물질에 속하여 있다. 해의 우리를 이루고 있는 별들은 해에서 가까운 것부터 수성(水星), 금성(金星), 화성(火星), 목성(木星), 토성(土星), 천왕성(天王星), 해왕성(海王星), 명왕성(明王星)이다.
이 별들은 다음과 같이 자리 잡고 동서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행성(planet)이라 한다.
도표 1-3 태양계의 행성
우주 내에서 행성, 태양계, 은하계, 성운(星雲)의 순서로 작은 조직체는 큰 조직체 속에 포섭되어 있듯이 우주의 영역 내에서는 전자, 원자, 분자의 순서로 작은 것이 큰 것 속에 포섭되는 계층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물질세계의 신비스러운 원리이다. 태양계 내에서는 태양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중심적 왕좌에 자리 잡고 있다. 그 권능은 가히 신적이라고 할 수 있다.
지구의 모든 에너지는 해에서 나온다. 해가 없으면 어떤 생물도 자랄 수 없다. 해에서 1초에 4백만 톤의 물질이 에너지로 변한다. 아인슈타인의 기본공식 E=MC2 즉 방출되는 에너지 양 E는 변화되는 물질의 질량 M×광속 C(1초당 30만 km)의 제곱과 같다는 말이다.
지구 직경의 1/4밖에 되지 않는 달은 밤하늘에서 가장 큰 것처럼 보이지만, 다른 별들에 비하면 가장 작다. 지구는 해의 주위를 돌고 있는 동안, 달은 지구의 주위를 돌고 있다. 지구와 달의 궤도는 다음과 같다.
도표 1-4 지구와 달의 궤도
달이 지구의 주위를 도는데 29.53058일이 걸린다. 밤하늘에 영롱하게 비치는 달은 스스로 빛을 발하지 못하고, 달은 단지 햇빛을 반사하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 인류가 그 위에서 살고 있는 지구는 태양계 내의 한 구성원이다. 태양계 내에서 지구가 처음 형태 지어진 45억 년 전에는 그 위에 생물은 물론이고 한 줌의 흙도 없는 용암 덩어리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상태로 계속된 약 10억 년간을 지질학상 무생대암시대(無生代岩時代)라 한다. 그러다가 35억 년 전부터 이끼와 같은 하등조류(下等藻類)1)에서 인류에 이르기까지 생물진화의 긴 세월이 계속되었다.
도표 1-5 지질 시대구분
지질시대구분 | 대표적 생물 | 절대연수 | |
신생대 (新生代) |
제4기 | 인류시대(人類時代) | 250만년 전 |
제3기 | 포유류시대(哺乳類時代) | 6천 5백만년 전 | |
중생대 (中生代) |
백아기(白亞紀) | 현화식물(顯花植物) | 1억 4천만년 전 |
주라기 | 파충류시대(爬蟲類時代) | 1억 9천만년 전 | |
트라이아스기 | 과자식물(顆子植物) | 2억 3천만년 전 | |
고생대 (古生代) |
페롬기 | 양서류시대(兩棲類時代) (고사리식물) |
2억 8천만년 전 |
석탄기 | 3억 5천만년 전 | ||
데본기 | 어류시대(魚類時代) | 4억만년 전 | |
사일류리아기 | 삼엽충시대(三葉虫時代) | 4억 3천만년 전 | |
오도비스기 | 5억년 전 | ||
캠브리아기 | 5억 7천만년 전 | ||
원생대 (原生代) |
전캠브리아시대 | 하등조류시대 (下等藻類時代) |
23억년 전 |
시생대 (始生代) |
35억년 전 | ||
지구(地球)의 별시대 | 생물 없음 | 45억년 전 |
신생대 4기로부터 지질학상의 홍적세(洪積世)2)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약 250만 년 전부터 홍수로 인하여 지층이 쌓인 시대를 가리킨다. 약 100마년 간의 홍적세가 그 전기, 중기, 후기로 계속되는 동안 제 1, 제 2, 제 3, 제 4의 빙기가 차례로 등장하고, 빙기와 빙기 사이에 제 1, 제 2, 제 3의 간빙기가 삽입되며, 그런 다음에 약 1만 년 전부터 충적세(冲積世)3)가 시작되었다.
도표 1-6 홍적세(洪績世) 시대구분
유 럽 | 아프리카 | 구석기문화 | 인류 | ||||||
제 4 기 |
충 적 세 |
沖積世 | 후빙기 | 후우기 | 1만 년 전 7만 5천 년 전 15만 년 전 20만 년 전 40만 년 전 50만 년 전 1백만 년 전 2백만 년 전 |
후기 중기 전기 |
석도계문화 박편석기계문화 악부계문화 역석기문화 |
신인 구인 원인 (原人) 원인 (猿人) |
|
홍 적 세 |
洪績世 | 후기 | 뷔름빙기 | 감불우기 | |||||
제3간빙기 | 간우기 | ||||||||
중기 | 리스링빙기 | 카니예라우기 | |||||||
제2간빙기 | 간우기 | ||||||||
민델빙기 | 카마시아우기 | ||||||||
전기 | 제1간빙기 | 간우기 | |||||||
귄츠빙기 | 카게라우기 | ||||||||
조기 | 빌라프랑카기 |
홍적세는 지구 전체가 대홍수의 시대였다.
충적세는 제 4기 최후의 후빙기, 즉 홍적세의 대 빙하가 녹은 다음의 후 빙하 시대를 가리키며, 신석기 시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시기에 해당한다.
빙기와 간빙기가 바뀔 때에 육지의 확대 또는 축소라는 현상이 수반되었을 것이다. 간빙기에는 기온의 상승으로 얼음과 눈이 녹아 바다로 흘러들었으므로 바다의 수면이 높아짐으로써 낮은 육지가 바다 속으로 침몰하는 이른바 해진 현상을 일으켰을 것이고, 빙기에는 이와 반대로 지상의 수분이 눈으로 내려 육지에 쌓임으로써 바다의 수면이 낮아졌으므로 수심이 얕은 대륙붕이 물위로 부상하는 이른바 해퇴현상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럴 적에 베링 해협이나 지부랄터 해협은 육교(陸橋)로 이어져 아시아와 아메리카, 아프리카와 유럽이 뭍으로 이어져 인류가 대륙간을 이동하는 통로가 되었을 것이다.
인류의 발생과 진화 에 관하여 살펴보면,
지질학에서는 지구의 연대를 크게 시생대(始生代), 고생대(古生代), 중생대(中生代), 신생대(新生代) 4기로 구분하는데, 그 마지막 신생대는 약 6천 5백 만 년 전에 시작되었을 것으로 본다. 신생대는 다시 인류의 조상으로 보이는 신인이 등장한 제 3기와 인류의 시대라고 하는 제 4기는 약 2백 만 년 전부터 시작되었다.
인류는 포유류(哺乳類) 중의 영장목(靈長目)에 속하고, 영장목은 각종 원숭이들로 구성되며, 약 1억 년 전의 중생대 말부터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3천만 년 전에는 꼬리가 달린 원숭이가 등장했고, 다시 꼬리가 없는 원숭이로 발전하여 고릴라, 침판지, 오랑우탄 등으로 보이는 드리오피테쿠스(Dryopithecus)로부터 약 1천만 년 전에 인류의 선조라고 생각되는 라마피테쿠스(Ramapithecus)가 나왔다. 라마피테쿠스는 이미 두 다리로 똑바로 서서 걸어 다니는 원인으로 발달했고 치아의 형도 사람의 것과 비슷하게 되었다. 이 원인에서 다시 아우스트랄로피테쿠스가 생겨났고, 이것은 약 250~50만년 사이에 번식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약 백만 년 전부터 다시 인류의 사촌 격인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가 갈라져 나왔다. 자바인, 중국의 북경인은 다 이에 속한다. 참다운 인류(Homo Sapiens)는 약 50만 년 전에 호모에렉투스에서 갈라져 나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첫 인류의 발상지가 어디냐 하는 문제에 대하여 확실한 견해는 없다. 다윈의 아프리카 설, 메슈의 중앙아세아 설, 오스본의 몽고 티벳 설, 그라바우의 히마라야, 티벳 설, 스미스의 히마라야와 아프리카의 중간 지대 설이 주 이론이 되고 있으나 아직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중앙 아세아의 어느 곳이라는 견해는 이문의 여지가 없다. 필자는 인류의 첫 발상지를 파미르고원의 마고성으로 생각한다.
1) 하등조류(下等藻類)는 바위 위에 이끼와 같이 대부분 물 속이나 수분이 많은 곳에서 자라며. 녹초류, 갈조류, 홍조류의 세 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등 민꽃식물의 통칭이다.
3. 아사달(阿斯達)이 시사하는 겨레사의 맥락
인류의 시조 아만(阿蔓)과 나반(那般)이 만난 곳이 아이사타(阿耳斯陀)이고, 단군이 도읍한 곳이 아사달(阿斯達)이며, 같은 어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Aisa(Asa)/“金” + /타(달)/“山” 즉 “금산, 동산, 소산” 등으로 해독된다. /asa/가 음이 변하여 /쇠/로 변했다. /aisa/>/asa/>/sa/>/soe/>/se/ 등으로 음이 변했다.
옛날에는 금, 은, 쇠의 구별이 없었던 모양이다. <계림유사(鷄林類事)>1)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金曰那論歲(누른 쇠)
銀曰漢歲(횐 쇠)
鐵曰歲(쇠)
알타이 자매 언어들과 대응을 시켜보면,
만주어: aisin“금”>asi, asu“이자”, “小金”>aji“小”
몽골어: aisin>alocu>asu“金”
터키어: asa>asi>az“東”, “日出地”
한국어: asa“金”>asi“初”>adi“子”>adal“子”>achim“朝”>sae“東”, “新”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뜻도 여러 가지로 쓰이게 되었다. 이병도 교수는 아사달의 뜻을 “朝山”으로 보았고, 양주동님은 “子山”, “小山”으로 해독했다. /신라, 서라벌/도 같은 어사이며, 동쪽을 /새쪽/이라 하고,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새바람/, 동쪽이 밝아 온다는 뜻으로 /새벽/, 동쪽의 별을 /샛별/이라고 한다.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은 동쪽을 목(木), 서쪽을 금(金), 남쪽을 화(火, 북쪽을 수(水), 가운데를 토(土)라 한다.
5세 환웅 태우의(太虞儀)의 12자녀 가운데 막내 아드님이 태호(太昊) 복희(伏羲)이며, 그의 손자가 소호(小昊) 김천씨(金天氏)이다. 소호씨는 서쪽을 덕(德)으로 삼았다. 서쪽은 가을 금색이므로 호를 김천씨라고 하였으며, 서쪽은 가을이며, 경신(庚申)이므로 소호의 국조 지(摯)가 등극하는 날을 경신일로 잡았다고 한다. B. C. 240년 진(秦) 나라의 재상 여불위(呂不韋)가 쓴 <여씨춘추(呂氏春秋)>는 " 그 날은 경신일이요, 그 임금은 소호였다."고 하였으며, 대만대학교 역사 교수인 서량지(徐亮之)도 경신은 금의 날로 소호씨는 금덕(金德)으로 천하에 군림하였다. 그러므로 김천씨라 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중국의 사학자 당란(唐蘭)은 소호(小昊) 김천씨(金天氏)의 나라가 산동성(山東省) 곡부(曲阜)에 도읍을 하고 있었다고, 대문구문명(大汶口文明)1) 유적지의 발굴성과의 뒤받침으로써 다음과 같이 제의했다. "방사성탄소의 측정에 따르면, 대문구문명은 지금으로부터 약 5,78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했다. 이는 옛 문명으로 오로지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하구에서 시작된 수메르문명이 무역로와 식민지화를 통해 북으로 동으로 옮겨갔다는 기존 학설을 부정하는 것이다.
서양의 역사, 문화, 사상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서구문화의 두 원류로 헬레니즘(Hellenism)과 헤브라이즘(Hebraism)을 든다. 헤브라이즘은 유태교와 그리스도교의 전통을 총괄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 사상은 신 중심적이고, 초월적이며, 영적인 세계를 신봉하는 성향을 지닌다. 이에 비해서 헬레니즘은 인간 중심적이고, 개인주의적이며, 합리적이고 세속적이며, 세계시민주의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이 두 문화의 모태는 유라시아지방으로 생각한다. 뱀을 토템으로 하는 하수농경민인 태호, 소호족의 문화와 소머리(牛頭)를 토템으로 하는 시리아의 옛 우가릿트 왕국의 바아루족의 북방수렵문화가 수메르로 옮겨가서 서양문화를 탄생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영국의 고고학자 크라머(Kramer)의 저서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다>에서 "수메르 사람은 높은 문화를 이룩한 민족이며, 그들은 아마 바다를 통하여 동방에서 왔다."라고 했다.
5세환웅 태우의의 막내 아드님이 태호 복희이며, 그의 후가 모세가 조상신으로 모신 여와(女媧) 즉 여호와이다. 이 부족은 하수농경민으로서 뱀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이었다. 오늘날 중국의 산동성에 얼굴은 사람이고 몸은 뱀으로 된 교미하는 이들의 그림이 많이 남아 있다. 이들이 메소포타미아에 진출하여 수메르 문하를 꽃피운 것으로 생각한다. 영국의 고고학자 우울리경이 우르지방에서 발굴한 상투머리를 한 왕의 시체, 씨름하는 향로, 그들이 사용한 회색 도자기, 태음력의 사용, 순장하는 습속, 수메르어가 한국어와 같이 교착어 언어유형이라는 점, 형질이 한국 사람과 같이 머리털이 검고 체구가 같다는 점, 가림토문자와 같이 진흙판 위에 새겨 쓴 수메르문자의 특성 등을 고려해 볼 때 수메르족은 유라시아어족의 중심 세력인 태호, 소호족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저의 졸서 <수메르, 이스라엘 문화를 탄생시킨 한민족>참조)
B. C. 1004년 다윗이 이스라엘 왕에 즉위하고 시온성에 도읍하였으며, B. C. 965년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으나 실정이 거듭되고, 색에 빠져 들었다. 솔로몬왕은 그가 정복한 각국의 왕여들을 불러들이고, 천하의 미인을 뽑아다가 후궁에 배치하였으니 그 여자들의 수를 <구약>은 "왕은 후와 빈이 700인이요, 빈과 예쁜 시녀가 300명이다."라고 했다. 솔로몬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르호보아가 왕위를 이었다. 반면 여로보암은 야곱의 일곱째 아들 예브라임의 자손인데, 애급에 도망쳐 있다가 돌아와서 르호보아와 대적이되어 치열하게 싸웠다. 이리하여 솔로몬 제국은 그 가 죽은 후에 흐로보암의 유대국과 여로보암의 이스라렐국으로 분열되었다. 이스라엘의 왕이된 여로보암은 신앙문제에 크게 고민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의 높은 신 여호와는 유다왕 흐로보암이 예루살렘궁에 봉안해 있고, 그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은 거의 바알신의 신자였으니, 새로 여호와 신을 내세울 수도 없었기 때문에 "금 송아지 신"을 만들어 제사를 올렸다. 이것은 태호, 소호의 후손으로 알려진 휴도왕(休屠王)이 금 사람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의식과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할 것이다.
B. C. 5-3세기 간에 동북아시아에서는 한족(漢族), 흉노족(匈奴族), 선비족(鮮卑族), 조선족(朝鮮族)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중국은 B. C.5세기의 춘추시대(春秋時代)와 B. C.4-3세기의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져서 한 때 진시왕(秦始王)이 B. C. 246년 통일을 달성하였으나 잠간동안이고 B. C. 206년 다시 한(漢)이 패권을 갖게되었다. 그 간 흉노, 오환, 선비 등 북방 제족이 진을 압박해 오고 있었다. 진의 만리장성은 그 들로 부터 자신을 방위하기 위한 요새였다. 1세 단군 왕검 때에 신지(神誌)라는 어른이 누진(樓振)에 책봉이 되었다. 이 부족들이 읍루(邑累), 물길(勿吉), 말갈(靺鞨), 금(金), 여진(女眞) 등의 부족을 형성하며, 한족과 싸우고 있었다.
진 나라가 망하고 한이 통일을 이룩했는데, 휴도왕의 아들 김일제(金日啼)가 B. C. 120년 농서(籠西) 지방에서 한나라 무제(武帝)에게 사로잡혔다. 그러나 일제는 말먹이 종이되고, 자손들이 성공하여 한날라의 실권을 쥐게돠었다. 마침내 일제의 증손 왕망(王莽)이 한제국을 타도하고 그들의 제국을 세웠다. 그러나 17년 후 한족인 유수(劉秀)가 일어나 왕망 제국을 타도 멸망시켰다. 그러므로 김일제 부족들이 모조리 살해되는 수난을 피해 피난하게 되는데, 그 부족의 한 가래인 김수로 일당이 지금의 김해지방에 유입하여 B. C.42년 낙동강 유역에 6 가야를 건걸하게되는 연유가 된다.
금으로 사람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휴도왕(休屠王)은 태호 복희, 소호 김천씨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 김일제의 먼 자손인 김알지가 서라벌에 나타난 것은 탈해왕 9년, A. D. 65년인데 이 보다 33년 전 유리왕이 6부 촌장들에게 崔, 李, 鄭, 孫, 裵, 薛 의 성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김, 박은 없었다. 신라 문무대왕(文武大王) 법민(法敏)의 비문에 그들이 투후 김일제의 후손임을 밝히고 있으며, 나아가 김유신은 수로왕의 13세 손이라 했으니 이들 모두가 소호 김천씨의 후손임이 명백하다.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의(傅儀)가 모택동의 재판을 받을 때, 판사가 피고의 이름이 무엇인가 물어니 애신각라 부의(愛新覺羅 傅儀)라고 답했다고 <국사문제연구소>의 볼로크에서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긴 성을 순수 한문으로 해독하면 "신라를 사랑하고 신라를 잊지 않는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aisin/은 만주말과 몽골 말에 "金"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애신각라/는 "금의 나라"로 풀이된다. 김수로왕의 /수/, 신라의 /신/,서라벌의 /서/는 아사달의 /아사/에서 유래된 말이며, 환웅시대의 소호 김천씨, 흉노족인 휴도왕, 김수로 왕, 김알지는 같은 혈통의 부족임을 알 수 있다.
<金海金氏璿源大同譜>와 <慶州金氏古書>에 김알지의 세계가 분명하게 들으나 있다.
三國史曰 新羅之祖 小昊金天氏之後 故姓金當 新羅古誌謂金閼智乃金官國道露之後乃小昊 金天氏之故 慶州金氏古書 始祖 閼智 首露王之後裔라 했다. 서양 문명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수메르 문명을 탄생시킨 부족들이 太昊 伏羲, 小昊 金天氏족이며, 신라의 국조 김알지, 가야의 국조 김수로도 동방으로 이동해 온 소호 김천씨족이라고 위 두 문헌이 밝히고 있다.
4. 멕시코 유카탄(Yucatan)반도의 고대 마야문명과 페류의 잉카문명
1. 마야문명
유카탄은 멕시코의 남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본토의 동쪽으로 뻗은 반도이다. 북쪽으로는 멕시코 만과 접하고, 동쪽과 남동쪽은 카리브 해(Caribbean Sea)와 접하고 있다.
유카탄은 니이벤씨가 발굴한 멕시코 시의 유물만큼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고대문명의 유적이 많다. 북미와 유카탄은 “어머니 나라”에서 온 이동군의 정착지이며, 그 곳에 마야(Mayas)라고 하는 제국이 있었다. 마야 제국에는 사원, 무덤, 돌로 지어진 정부 건물이 서 있었던 유적을 발견하게 되고, 돌에 새겨진 글들을 조사한 결과 마야문명의 건설은 15,000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모든 건물에는 15,000년 전에 조각된 쿠쿨 칸(Kukul Khan)이라고 하는 날개를 단 뱀이 조각되어 있다.
고고학자인 러 프론죤(Le Plongeon) 박사와 그의 아내인 에리스 박사가 유카탄 유적지를 12년간 발굴 조사를 했다. 우흐말(Uxmal)에서 그들이 “신성한 신비”라고 불렀던 고대 마야 사원을 발견하게 되고, 벽에 새긴 글, 그리고 그 위에 조각된 성스러운 상징물들은 선사시대 역사를 우리에게 전한다. 그 역사는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역사와 관계가 있다고 했다. 이 사원의 중앙에 있는 방은 그네들의 “어머니 나라”가 있는 서쪽 방향을 보고 있다. 이 장엄한 건물은 감보디아의 앙콜(Angkor) 사원의 건물과 비교가 되는데, 이 앙콜 사원은 반대로, 침몰한 무가 있던 방향인 동쪽 방향을 향하고 있다고 하니, 우연한 현상인지 심히 호기심을 가지게 한다.
러 프론죤은 한 건물에 새겨져 있는 글을 발견하고, 우흐말이 지진에 의하여 세 번 파괴되고, 또 세 번 세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늘 날 중앙아메리카의 갈색 인종이 세 종족의 혼혈 자손들이라고 하고 있다. 세 종족 중 그 비율의 대부분은 황색계통의 몽고로이드라고 한다. 이 종족은 무에서 이동해 간 인종이라는 것은 여러 기록을 통하여 확인 할 수 있다. 날개를 단 뱀이 그려지기나, 새겨져 있는 연유는 칸(Can) 왕조의 친족에서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칸 왕조들은 마야 군주국의 마지막 왕조였다. 마지막 왕은 무(Moo)라고 하는 여왕이었는데, 트로아노(Troano)의 기록에 따르면, 그 여왕이 약 16,000년 전에 이집트에 있는 마야 나일 식민지를 방문한 사실이 있다고 했다.
유카탄의 오늘날의 주민들은 단일 혈통이 아니고, 혼혈된 종족이며, 큰 지진이 일어난 후 살아남은 마야 종족들은 몽골족에 의하여 정복되었다고 한다. 마야 제국은 일곱 다른 종족으로 구성되었으며, 모두가 마야 말을 사용하고, “어머니 나라”에서 이동해 왔다고 한다.
마야의 모든 왕과 여왕은 12왕조가 이어지는 동안 백인종이었다고 하는데, 어머니 나라, 무에서는 여러 종족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의 책 <신사기(神事記)>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있다. 「……다섯 물건들 중에서 빼어난 것이 사람인데, 맨 처음에 한 남자와 여자가 있었으니, 나반(那般)과 아만(阿蔓)이라, 천하(天河)의 동서로 나누어져 있어 처음에는 서로 오가지 못하더니, 오래 뒤에 만나 서로 짝이 되니라, 그 자손이 나뉘어 다섯 빛깔의 종족이 되니, 황인종(黃人種), 백인종(白人種), 흑인종(黑人種), 남색인종(藍色人種), 적인종(赤人種) 이다.」라고 했다. 무에 거주하는 각색의 인종에 관한 기록으로 유일한 것이다.
2. 잉카문명
잉카 문명은 남미 서부에 있는 페루(Peru)를 중심으로 하여 강력한 왕국을 세우고 농경 생활과 석조(石造)의 신전(神殿), 궁전(宮殿)을 세우고, 청동기(靑銅期) 문화를 성립시켰던 잉카(Inca) 문명국이 있었다. 이 잉카 문명은 아메리카 여러 곳에 남아 있는 거석문화(巨石文化)에서 그들의 발전상을 볼 수 있다. 국토는 국왕 잉카의 것, 태양신의 것, 평민의 것으로 3분되어 있었고, 평민은 대부분 농민으로서 산비탈에 큰 돌로 운하를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 관개치수(灌漑治水)의 필요상 이곳에도 중동과 같은 아세아적 사회가 형성되었다. 청동기, 금·은기를 사용하였으나 철기는 알지 못하였다. 그들은 결승문자(結繩文字, Quipu)를 사용했다. 새끼의 종류, 매듭, 빛깔 따위의 배열 상태로 의미를 전달하는 문자였는데, 부여, 진(辰), 오기나와(沖繩), 예(濊) 등에서 이 결승문자를 사용하였다. 잉카 제국은 15세기 이전에 스페인에게 정복당했다.
5. 昔脫解, 朴赫居世왕은 인도의 타밀 출신인가?
불구내왕의 탄생 신화를 보면,
서라벌 넓은 땅에는 그전부터 동쪽에 양산(楊山)마을, 남쪽에는 고허(古墟)마을, 서쪽에 대수(大樹)마을, 동남쪽에 진지(珍支)마을, 동북쪽에 가리(加利)마을, 더 동북쪽으로 치우쳐 있는 고야(高倻)마을에 여섯 씨족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 마을에 촌장이 있었으니, 양산촌의 알평(謁平), 고허촌의 소벌도리(蘇伐都利), 대수촌의 구례마(仇禮馬), 진지촌의 지백호(智伯虎), 가리촌의 지타(只他), 고야촌의 호진(虎珍)이다. 이 촌장들이 서라벌 한 가운데를 흘러가는 알천(閼川)변의 언덕에 모여 회의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6부 촌장을 대표할 왕을 세울 것을 의논하고 있을 때에, 별안간 공중에서 횐 비단을 내려 깐 것 같은 구름이 아래로 내리 박혀 마치 횐 무지개 같은 것이 양산촌의 우물가 수풀사이에 비치었다. 별안간 횐 구름 사이로 횐 말이 꿇어앉은 채 소리를 지르며, 땅 아래로 내려왔다. 소벌도리가 뛰어가 보니, 우물 옆 수풀 속에 하얗게 보이는 큰 알이 있었다. 그 알을 자세히 보니 알이 아니라 어린 아이였다. 정말 큰 아이였다. 소벌도리는 그 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와서 길렀다. 13년의 세월이 지난 후 그 아이는 완전히 어른이 되었다. 키가 크고 도량이 넓으며, 재주가 비상하여 사람을 통솔할 품격을 갖추었다. 알의 크기가 박만 하다하여 성을 박씨라고 하였고, 우리 동방을 빛나게 잘 다스리라는 뜻으로 이름을 불구내라고 하였다. 이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한자로 혁(赫)을 붙이고 거서한이라는 말이 합성되어 박혁거세가 되었다. 후에 그는 서라벌의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박혁거세가 임금이 되었으나 배우자가 없어서 물색할 때 알영정(閼英井)에서 용(龍)의 딸로서 탄생한 알영을 부인으로 맞았다. 위의 신화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그대로 옮겨 보았다.
그러나 <환단고기 태백일사 고구려본기>에는 보다 믿음이 가는 사실을 우리에게 전한다.
사로(斯盧)의 시왕은 선도산(仙桃山) 성모(聖母)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 왕실의 딸 파소(婆蘇)가 있었는데, 남편 없이 아이를 뱄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아 눈강(嫩水)으로부터 도망쳐 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나을촌(奈乙村)에 와 닿았다. 때에 소벌도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가서 데려다 거두어 길렀다. 나이 13세에 이르자 지혜는 빼어나고 숙성하며, 성덕이 있는지라, 진한 6부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존경하여 거세한(居世汗)이 되니 서라벌에 도읍하고 나라를 진한이라고 하고, 또한 사로라고 하였다. 위 <환단고기>의 설화는 박계가 북방에서 이동해 왔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카나다 토론토에 파견된 언론이요, 타밀어 연구를 하고 있는 김정남님은 박혁거세는 인도 남부의 드라비다 반도에 산재해 있는 타밀족이라고 제의 하고, 타밀어와 박혁거세왕의 역사적 기록에 나타나는 여러 단어들을 대응시키고 있다.
김수로왕의 왕비의 고향이라고 하는 아유타(阿喩陀)가 인도의 남부 타밀나두주의 아요디야 쿠빰(Ayodhya Kuppam)이라고 주장한바 있었다.
박혀거세는 당시 타밀어로 /박키야거세(Pakkiyakose)/ 또는 /박키야거사이(Pakkiyakosai)라는 이름과 일치한다고 하고 /pakkiyam/은 “행운” 혹은 “축복”을 뜻한다고 하고, /kose, kosai/는 왕의 의미라고 했다. /거세/는 중세국어에서 “왕”을 뜻하지만 /박/은 “밝‘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연구과제가 되어 있다.
둘째 박혁거세가 탄생지인 우물 /나정(蘿井)/은 타밀어 /nazung/과 대응이 되며, 뜻은 “도랑”이라고 했다. 또한 /서나벌(徐那伐)/은 산스크릿 말로 /sona/ "황금“과 /pol/"벌판”과 일치된다. /so-na/의 /so/는 단군이 도읍한 아사달의 /asa/에서 유래된 말이며, /pol/은 환인의 나라 12 국명 중 비리국(卑離國)의 /pili/에서 유래된 말이니 역사적인 의의가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셋째 박혁거세 왕의 왕비인 알영(閼英)을 타밀 여성의 이름인 Ariyam과 거의 일치한다. Ariyam은 Ariyamala의 줄인 이름으로 “값진 보석”을 의미한다고 했다. 또한 알영부인이 태어났을 때 얼굴이 아름다웠지만 입술이 마치 닭의 부리와 같이 생겼다는 내용도 인도 힌두교 신화에서 지혜와 촘명의 여신(Goddess of learning and wisdom), 사라스와티(Saraswati)가 백조의 부리를 갖고 태어났다는 신화의 내용과 거의 일치한다.
넷째 박혁거세의 다른 이름인 불구내(弗矩內)는 타밀어로 부루구나이(Purugunai)와 거의 일치하는데, 인도 남부 밀나두주의 한 마을 이름이다. 그리하여 박혁거세가 그 마을 출신이 아닌가 호기심을 갖게 한다.
다섯째 서라벌에 흘러들어온 진한 세력의 촌장들의 이름이 타밀 사람들의 이름과 비슷하다.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의 알평(閼平)은 아리야판(Aryappan)과. 돌산(突山)의 소벌도리(蘇伐都利)는 소벌두라이(Sobolthurai)와, 자산(紫山) 진지촌(珍支村)의 지백호(智伯虎)는 씨빠이코(Chippaiko)와,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의 구례마(俱禮馬)는 구레마(Kurema)와 금산(金山) 가리촌(加리村)의 지타(祗陀)는 씨타(Cheetha)와, 명활산(明活山) 고야촌
(高耶村)의 호진(虎珍)은 호친(Hochin)과 각각 특이한 이름이 같다는 것은 역사적 인연의 고리가 있는 것이 아닌 가 심히 우리들의 관심을 갖게 한다.
그러나 박혁거세가 북쪽에서 내려온 진한세력이 아니고 인도의 타밀족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재료가 부족해서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 남아 있다.
석탈해(昔脫解)와의 출신에 관하여 살펴보면,
<삼국사기>에 신라 4대왕 석탈해는 “왜국(倭國)의 동북 천리 어머니 나라 출신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석탈해왕(昔脫解王 재임 A. D. 57-80)은 인도의 남부 드라비다 지역의 다파나국(多婆那國), 또는 용성국(龍城國) 이라는 사실이 타밀 언어와 한국어의 비교분석에 의하여 밝혀지고 있다. 우선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는 설화부터 살펴보자,
불구내가 왕이 된 후 서라벌 6부는 튼튼하게 되고, 서라벌에 금성(金城)을 세웠다. 왕의 재위 39년 어느 날 아진포(阿珍浦) 앞 바다에는 까치 수십만 마리가 소리치며 날고 있었다. 아진포 사람들은 이 광경을 구경하고 있을 때, 의선(義先) 할머니는 서라벌의 벼슬하던 해척(海尺)의 어머니로서 용기를 내어 작은 배를 홀로 저어 포구 앞 바다로 나갔다. 선창을 열고 보니 큰 궤짝이 하나 있었다. 노파가 배에 올라서자 까치의 무리들은 다 날아가고 없었다. 노파가 치성을 드린 다음 궤짝 뚜껑을 열어 보니, 자주 빛 연기 속에 어린아이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사람들은 보물과 그 어린아이를 의선 할머니 집으로 가져갔다.
그 아이는 매일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리고 그는 할머니에게 「나는 바다 건너 용성국(龍城國) 왕자예요. 아버지는 함달파(含達婆)왕이고, 어머니는 적여국(積女國) 공주였어요. 아버지가 나를 칠보단장으로 싸서 동해에 떠내려가게 했다.」고 했다. 이름은 바다에서 튀어나왔다고 해서 토해(吐海)이던 것이 탈해가 되었고, 성은 까치 작(鵲)자에서 새가 날아갔다고 해서 석(昔)이 되었다고 했다. 왕은 탈해의 출중함과 용모가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운제(雲帝)부인과 의논하여 아니공주(阿尼公主)를 탈해에게 하가(下嫁)하였다. 남해왕(南解王)이 재위한지 21년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떠나니, 왕자 유리(琉璃)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그러나 유리왕은 재위 34년 후에 세상을 떠나고 대보 탈해가 임금이 되었다고 <삼국유사>는 전하고 있다. 탈해는 배를 타고 아진포 즉 오늘의 감포에 온 후래 민으로 이해된다.
인도반도에는 무수한 언어, 종교, 인종 등이 뒤섞여 존재하고, 인도문명의 창시자는 문자를 지녔고, 그 언어는 타밀 언어와 기타 드라비다 언어였다. 인도 반도 문명의 창시자들이 최고로 숭배한 신은 시바(Siva)였다. 인도 힌두이즘의 3대신 비스흐누(Vishunu), 시바(Siva), 부라흐마(Brahma) 가운데, 시바는 춤추는 여신으로 통한다. 샤머니즘(shamanism)1) 용어 가운데 샤먼을 지칭하여 사파(師婆)라고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종합하면, 그 당시 인도의 최고층은 시바 신을 모시는 샤먼, 즉 신인이었고, 종교는 신교(神敎)였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언어를 중심으로 살펴보자.
남부 인도반도에 타밀(Tamils)라고 불려진 흑인종이 토착민이었다. 또한 인류학자들은 그들을 힌두 반도 남부의 이름을 따서 드라비디언(Dravidians)라고 불렀다. 이 인종들이 언제 어디에서 왔는지 또는 나가(Naga)족들 보다 인도에 먼저 왔는지 혹은 뒤에 왔는지 이 문제에 관한 아무런 기록들도 없다. 막연히 그들은 중앙 아세아의 어느 곳에서 왔다고 사학자들은 가정할 뿐이다. 그러나 저자는 파미르고원의 흑소(黑巢)씨족으로 생각한다. 드라비다 언어는 타밀어(Tamil), 델그어(Telague), 카나라스어(Canarasse), 마라야람어(Malayalam)로 구성되어 있다. 인도에 산재하고 있는 어족의 분포 상황은
다음과 같다.
도표 2-8 현대 인도의 언어 분포 지도
한국어와 드라비다 어족과의 친연성을 주장한 사람은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였다. 그는 1905년에 <한국어와 인도 드라비다 방언의 비교문법(A Comparative Grammar Of the Korean Language and the Dravidian Dialects of India)>을 출간했다. 헐버트는 이 두 언어의 어휘 형태, 유형의 유사성을 주장하고, 다음과 같이 한국어와 타밀어 어휘를 대응시켰다.
한국어 타밀어
n, ni ni “너”
na na “나”
tol tiru “돌다”
pi pey “비”
meuk meyk “먹다”, “음식”
khal kadi “칼”
tat satt “닫다”
oo wo “오다”
kwi kevi “귀”
cuk chak “죽다”
namu namu “나무”
한국어와 타밀어는 문장 어순도 같고, 토씨가 있는 것도 같으며, 또 기초 어휘가 무려 1천여 개 이상이 같거나 유사하다.
인도의 구자라타 주의 간판에 새겨진 글자가 우리 한글과 같고, 서낭당 곁 돌무더기, 여인들이 냇가에 모여 정겹게 빨래 방망이질하는 모습, 우리 선조들이 타고 다녔던 과하마(果下馬)를 보면 인도는 우리 조상들의 흔적이 세계 어느 지역보다 많이 남아있다.
위 설화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석탈해는 야장(冶匠)이라는 사살을 추론케 한다. 석탈해는 /석/ “쇠‘ 와 /탈해/ ”다루다“ 두 형태소로 되어 있는데 그 이름 자체가 야장이라는 것을 알리고 있다. 김정남님은 석탈해의 성 /석,Sok/은 타밀 말로 /석갈린감, Sokalingam/의 줄인 말로 ” 대장장이“를 뜻한다고 했다. 이름 /탈해/는 타밀어 /탈해, Talhe/ 또는 /Talhai/와 대응이 되며. 뜻은 저의 의견과는 다르게 ”머리, 꼭대기, 우두머리“를 뜻한다고 했다. 아울러 석탈해의 다른 이름 토해(吐解)는 타밀어 토헤(Tohe) 또는 토하이(Tohai)와 일치하며, 뜻은 ”새의 날개, 보호자, 후견인“이라고 했다.
더구나 석탈해가 대장간 도구를 단야구(鍛冶具)라고 불렀는데, 타밀어의 단야구(Dhanyaku)와 그 음과 뜻이 일치한다. 당시 타밀인이 세운 촐라왕국(Chola Kingdom) 등 인도의 남부지역은 당대 세계 초고 품질인 우즈(Wootz) 강철의 원산지인 철의 선진국으로서 동서양에 철을 수출한 중심지이라고 생각한다. 석탈해는 사로의 백성들이 서라벌에 일찍 터전을 잡고 있을 때 비록 후래민이지만 한반도에 칼이나 농기구 등 인도 남부의 강력한 선진 철기문화를 갗고 들어와 이미 와서 정착한 토착세력과 맞서 왕권을 장악한 것으로 사료 된다. 탈해라는 이름이 몽골어 /타르한/“야장왕”, / 달하치/ “軍主”와 일치한다. 또한 덴마크의 언어학자 피더슨은 아래와 같이 인도의 드라비드 언어를 노스트라트 공통조어에 포함시킨 것을 볼 때 석탈해가 남방계냐, 북방계를 두고 보다 많은 연구 과제가 되고 있다.
덴마크의 언어학자 페데르센(Pedersen)도 노스트라트(Nostratian)공통조어 설을 오래 전에 제의한바 있었다.
노스트라트 공통조어 설
이와 같이 세계의 공통언어권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지금 까지 언어학계에서는 노스트라트 제어라고 하였다. 페데르센에 따르면, 고대 소아세아의 비인구어가 한때는 인구어족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가정하고 함, 셈어족, 우랄어족, 인구어족, 알타이어족 인도의 드라비다어족의 조어로서 노스트라트어족을 주장한 바 있었다. 이와 같은 여러 어족설이 그린버그의 유라시아공통조어설이 결론을 맺게 했다. 미국 스텐포드대학의 그린버그(Greenberg) 교수는 세계 언어족의 분류작업을 하던 가운데 인도-유럽어족, 우랄-알타이어족, 축치-길략어족, 에스키모-에릇어족 등의 조상어로서 유라시아공통조어가 있었다고 발표했다. 이 언어족은 세계의 거의 모든 언어들이 포괄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영어와 한국말을 사용하는 언어족의 조상들이 유라시아에서 문화권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유라시아는 가장 오랜 문명의 발상지요, 또한 이곳이 마고, 환인, 환웅, 단군으로 이어지는 우리 상고사의 무대라고 생각할 때 민족사 연구에 밝은 서광을 비쳐준 성과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타밀어와 한국어의 유사성에 대하여 유라시아의 어느 곳에 한국어와 타밀어의 공통조상들이 존재 하였느냐, 아니면 인도의 드라비다 어족들이 한반도에 항해하여 이동했느냐 하는 문제들이 쉽사리 결론을 낼 수 없는 어려움이다.
제 2대왕 남헤(南解) 차차웅(次次雄)의 후임 자리를 놓고 노례(努禮) 왕자가 장자 상속의 기득권을 포기 하고 매부인 석탈해에게 왕위를 양보할 정도로 석탈해가 지닌 인도 남부 철기분화의 힘이 가공 헸던 것으로 생각된다.
석탈해의 제안에 의하여 석씨가 왕권을 이은 유리왕(儒理王)부터 왕의 호칭을 니사금(尼師今)이라고 했는데, /니사, 이사/는 “최고”의 뜻이고, /금/은 일본말에 가미“神”이라하고 한국말에도 신을 검 혹은 거무라고 한다. 이 니사금(Nisagum)은 타밀어로 “대왕” 또는 “황제”를 뜻한다고 하니 음과 뜻이 일치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니사금을 “치질금(齒叱今)으로 표현되어 있어 /이,니/를 이빨로 김정남 님은 해독하고 있는데, 결론을 미루어 두고 앞으로 검토와 연구를 해야 하겠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석씨계의 마지막 왕인 제 16대 흘해왕(訖解王, 재위 310-356년) 까지 니사금(尼師今)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제 17대 김씨 가문의 왕 내물왕(乃勿王)왕부터 왕은 마립간(麻立干)으로 불려진다. 니사금은 타밀어와 관계가 있으며, 마립간은 /마립/ “머리” + /간, 한/ “왕”이 합성된 말이다. 부리앗(Buriat) 사람들의 신화에 “해를 활로 쏘아 떨어뜨리고 하나만 남아 이 땅에 빛을 알맞게 주게 하였다“는 장군의 이름을 Erkhe-Mergen이라고 했다. 멜겐은 ”우두머리 왕“의 뜻이다. 몽골의 비사(秘史)에 기록된 /멸이간(蔑爾干)/도 신라의 왕명, 마립간과 같은 어사이다. 니사금은 석씨계의 몰락과 함께 신라왕의 명칭에서도 완전히 살아지게 된다.
그리고 석탈해가 다파나국의 함달파(含達婆)왕의 왕자라고 했는데, 함달은 함달파가 줄여진 말로 /함달/은 타밀인들이 숭배하는 신 한다파(Handappa)를 말한다. 줄여서 한단(Handan)이라고 한다. 한다파는 힌두교 삼대 신의 하나인 시바(Shiva)의 둘째 아들 이름으로 타밀 사람들이 으뜸으로 섬기는 신인지라 남성의 이름으로 쓰이고 있다.
A. D. 8년 신라 2대 남해(南解)의 사위가 된 석탈해는 2년뒤 국무총리격인 대보(大輔)라는 중책을 맡게 되는데, /대보/는 남자 신 데반(Devan) 및 여자 신 데비(Devi)에서 온 말이다. 타밀어에서 “신의 다음 자리, 막강한 사람”이라는 뜻도 있다. 석탈해가 신라 역사상 처음으로 대보라는 자리에 오른 것은 그가 타밀 출신이라는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고 하겠다. 아울러 한다파는 타밀어로 “아버지”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석탈해가 자신의 아버지를 타밀 사람들이 존경하는 신 ‘함달왕’이라고 창했던 것이다.
제 3대 유리왕(儒理王)이 죽어 서기 57년 석탈해가 왕위에 오르자 표주박을 허리에 찬 호공(瓠公)이라고 알려진 사람이 대보로 발탁이 되었는데, 박은 아프리카나 인도 등 열대 지방에서만 자라는 식물이며, 타밀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뜨거운 날씨에 목을 추기기 위하여 허리에 표주박을 차고 다니는 습관이 있었다. 그러므로 같은 종족인 타밀인을 대보로 임명한 것으로 생각한다.
다음으로 석탈해가 한반도에 처음으로 도입한 동물의 뼈로 만든 술잔인 각배(角杯)가 고구려나 백제에는 발견되지 않고 오직 신라와 가야지역에서만 발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타밀 출신의 석탈해와 허황옥 후가 신라와 가야 에 각배를 소개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된다.
그러면 <삼국사기>에 나오는 석탈해의 출신국인 다파나국(多婆那國), 또는 용성국(龍城國)이 어디인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다파나/는 타밀어와 산스크릿 말로 다파나(Tapana)와 일치한다. /다파/는 “태양“ 을 뜻하고 /나/는 ”나라“를 뜻한다. 촐라왕국의 별명이 다파나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용성국은 촐라왕국 도시들 가운데 대장과 철기 제작으로 잘 알려진 옛 도시 나가파티남(Nagappattinam)을 가르킨다고 볼 수 있다. /나가/는 “어
머니”의 뜻이고 /파티남/은 “國 ”의 뜻이니 모국을 뜻하는 말로 생각하는데,
김정남님은 /나가/를 “코부라”라로 해석을 하니 연구과제로 남는다. 뱀은 하수농경민의 토탬 이라고 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용은 뱀을 신격화 하여 부루는 것이며, 옛부터 인도에는 학문과 종교를 가르치는 ‘일곱 성스러운 도
시’를 가르켜 리쉬(Rishi)라고 하였다. 이 7개의 리쉬를 7개의 뱀의 머리로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리쉬를 용성국이라고 칭한 것이 아닌가 보다 더 많은 검토를 해보야 할 것이다.
위와 같은 여러 역사적 자료를 근거로 신라 제 4대왕 석탈해는 인도의 남방 타밀 지역에서 오늘날의 감포 즉 옛 아진포로 항해하여 서라벌에 이주하여 선진 철기문화의 위력을 갖고 왕위에 까지 오른 것으로 생각 하지만 탈해의 어휘가 몽골계와 음이나 뜻이 일치하고 있으니 결론을 유보하고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출처 : 정연규교수님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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