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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하느님, 한얼님)은 어떤 분이신가? 본문
福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하느님, 한얼님)은 어떤 분이신가?
하나님(하느님, 한얼님)은 어떤 분이신가?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야 하나님의 복을 누릴 수 있고 그 복을 흘려보낼 수 있지 않을까?
‘초인생활’에서 예수께서는 하나님은 누구신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이 겪어 본 그 어느 사람보다도 더 위대한 사랑으로
당신들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 자신인 생명이며,
당신이 걸어 다니고 있는 이 땅이고, 당신이 숨 쉬는 공기이기 때문이다.
내 사랑하는 형제여, 오랫동안 많은 이들이 하나님이라고 하는 그 근본은 어둠침침하고, 두렵고, 심판하는 이라고 배워 왔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않다. 따지고, 심판하며, 벌을 내리는 하나님은 단지 인간의 마음과 생각 속에서만 존재해 왔다. 어떤 이에게는 심판을 내리고, 또 다른 이는 추켜세우는 그러한 하나님을 창조한 이는 인간이다. 이것은 인간이 창조한 하나님이고, 인간의 피조물이며, 인간 의지의 산물일 따름이다.
내가 알고 있고,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 나와 내 왕국에서 흘러나오는 힘이기도 한 하나님은, 완전하며 심판하지 않는 사랑의 하나님이다. 아무 것도 아니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겪어 본 그 어느 사랑보다도 더 위대한 사랑으로 당신들을 사랑한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인 생명이며, 당신이 걸어 다니고 있는 이 땅이고, 당신이 숨 쉬는 공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피부색이고, 아름다운 눈이며, 부드러운 감촉이다. 당신이 존재하는 모든 순간, 당신이 하는 모든 생각, 당신의 모든 행동, 심지어는 당신 영혼의 그림자에서조차도, 하나님이 바로 당신이다.
하나님은 전부이면서 삼라만상을 관장하는 힘이다. 물 위를 스쳐 가는 바람이고, 색깔이 달라지는 잎사귀이며, 그윽한 색조를 띤 한 송이 장미의 청순함이다. 부둥켜안은 연인이고, 깔깔대는 어린 아이들이며, 머리카락의 빛나는 윤기이다.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이고, 밤에 반짝이는 별이며, 밤사이 뜨고 지는 달이다. 하나님은 아름다운 곤충이고, 날아다니는 조그만 새이며, 못생긴 고약한 벌레이다.
하나님은 움직임이자, 색깔이며, 소리이자, 빛이다. 하나님은 정열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하나님은 기쁨이다. 하나님은 슬픔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이며, 당신이 하나님 아버지라고 일컫는, 생명 전체이며,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이이다.
하나님은 왕좌에 앉아 전체 생명을 심판하는 특이한 인물이 아니다. 하나님은 매순간 맥동하는 전체 생명이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지속성이자, 영원성이다.
당신은 자신이 그에 의해 심판을 받아 왔다고 생각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만약 당신 자신인 하나님이 당신 또는 다른 누구를 심판한다면, 그것은 명백히 그 자신을 심판하는 셈이 된다! 그리고 무엇 때문에 지고의 지성이 그렇게 하겠는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생명력은 당신을 심판할 능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생명은 자신을 선과 악, 옳고 그름, 완전함과 불완전함으로 나누어 버리는 에고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에게는, 원래부터, 선이나 악이라고는 전혀 없다. 긍정이나 부정도 전혀 없다. 하나님은 완전하지도 않다. 왜냐하면 완전이라는 것은, 지속적이고 늘 변화하며 왕성한 생명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저 존재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하나님이 할 줄 아는 단 한 가지는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만물로 하여금 하나님 자신인 생명을 표현할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은 그릇됨을 모른다. 그는 자신만을 알 따름이다. 하나님은 실패를 모른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영원히 지속됨을 볼 따름이다. 당신은 생명을 꽃 피우기도 하고 심지어 생명을 가치 없게 만들기도 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되는 것이지만 결코 이 둘에서 낫고 못함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존재할 따름이다. 그가 그렇게 해주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그가 정말 인간이 창조한 그러한 신이라면, '진주의 문'(역주 : 천국)이라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아무도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창조한 그러한 신의 기대에 부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하나님은 한량없고 지고한 존재이며, 있음의 나누어지지 않는 전체이다.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러한 있음은 항상 당신이었고, 당신이 신성하고 탐구적인 당신 자신의 자아를 실현하는 생명의 무대였다. 그가 당신들 모두에게 독자적인 에고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자유의지를 주었기 때문에, 당신이 인지하고 싶은 대로 하나님 자신인 생명을 인지할 수 있는 것이다. 당신이 했던 일이 무엇이든지, 생각했던 것이 무엇이든지, 당신이 그것을 아무리 가치 없거나 비천하거나 훌륭하다고 인지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존재 이외의 그 어떤 것으로도 간주한 적이 없다.
오직 당신만이, 당신의 태도에 따라 그리고 남의 태도를 받아들임으로써, 당신 자신을 심판해 왔다. 당신만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또 무엇이 좋고 무엇이 나쁜지 결정해 왔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이러한 면이 전혀 없다. 삼라만상은 그저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있음의 일부분일 뿐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이제까지 상상해 본 그 어떤 사랑보다도 더 크고 더 깊이 당신을 사랑한다. 왜냐하면 당신이 원하는 그대로 삶을 창조할 수 있도록 허용해 왔기 때문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을 사랑해 왔다. 그는 당신들을 인지하는 방법을 모른다. 당신이 바로 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가장 고상한 형태로서의 하나님은 무엇인가? 생각이다. 하나님은 크게 본다면 생각이다. 왜냐하면 생각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모든 것, 존재했던 모든 것, 존재할 모든 것의 궁극적 창조자이기 때문이다. 생각은 모든 것이 창조되는 바탕이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모두 맨 처음 생각에서 나왔고, 생각은 하나님 마음이라고 하는 지고의 지성이다.
만물을 결속하여 일정한 형태와 틀을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인지 숙고해 보았는가? 그것은 생각이자, 사랑이라고 하는 '우주의 끈끈이'이다. 생각은 모든 물질을 결속하는 것이다. 가장 큰 규모로 볼 때 그것은 사랑이다. 왜냐하면 삼라만상은 생각 - 바로 하나님 - 에 의해 상상되어졌고, 만물을 제자리에 있도록 만드는 것은 하나님 자신인 생각에 대한 그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만물은, 당신 몸조차도, 하나님에 의해서 결속되어 있다. 몸을 구성하는 모든 분자와 세포 구조를 다같이 엮어 어울리게 하는 것은 위대하고 장엄한 생각 - 진정한 하나님 - 의 사랑이다. 생각이 없다면, 당신의 몸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물질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이 전체 생명의 창조자이자 그것을 지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모든 것을 결속하는 생각, 즉 하나님을 음울하고 두려운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완전한 기쁨이다. 그는 달리 존재하는 법을 모른다. 그는 모든 생명체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진동하는 생명형태이다. 그 진동에 의해 커다란 웃음소리 같은 음향이 퍼져 나오게 된다. 당신이 귀기울여 듣는다면, 하나님의 음악 소리, 그 웃음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그것은 지극히 즐거운 일이다. 나는 그가 흐느끼는 것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당신이라는 소중한 존재의 근원이자, 당신들 사이를 넘나들고, 당신들을 하나로 이어 주며, 이후의 삶과 앞으로 다가올 영원에 대한 약속이기도 한 경이로운 생명력인 하나님은 무엇인가? 이러한 하나님을 어떻게 말할 것인가? 생각이라는 있음이다. 영속되는 생명의 있음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있음이고, 생명이 사랑으로 엮어져 나갈 수 있도록 허용하는 있음이다. 그것은 또 완전한 기쁨인 있음이다. 그것은 당신의 유산이자 - 당신의 운명이다.”
람타에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다. 당신을 그 자신으로부터 창조하지 않았다면 무엇으로부터 창조했겠는가? 당신이 하나님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가 자기 자신을 가두어 놓고 소위 잘못을 저질렀다고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잘못'이라는 것도 생명의 일부일진대…
중요한 사실 하나를 말하겠다. 인간은 형제들을 다스리는 데 이용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모습을 만들었다. 군대가 인간과 국가를 다스리는 데 실패하자 종교가 만들어졌다. 사람을 속박하기 위해서 두려움이라는 도구를 사용했다. 사람에게서 신성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로부터 하나님을 뺏을 수 있다면, 그를 다스리고 지배하는 것은 쉽다.
하나님은 지옥이나 악마를 만들지 않았다. 이것은 형제를 고문하기 위해서 인간이 창조한 창조물이다. 대중을 협박해서 통제 가능한 집단으로 만들 목적으로 종교적인 교리를 통하여 창조된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하나님은 삼라만상이다. 해별의 모래알 하나하나도, 봄볕에 날아오르는 아름다운 나비들도, 밤하늘에 보이는 크고 작은 별들도, 모두가 다 하나님인 것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이다. 지옥과 같은 장소가 있다는 것은 그에게 마치 몸에 암이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그 암은 종국에 그를 다 삼켜 버릴 것이다.
천국에서 당신을 끌어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보다 생명보다 더 위대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당신을 사랑한다. 그는 당신이 향하는 모든 방향이고 당신이 포용하는 그 모든 생각이기 때문이다.
여성 :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사랑한다. - 그렇다는 것을 나는 안다.”
도올 김용옥교수는 동경대전에서
수운이 만난 하느님, 하느님이란 무엇인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나의 몸 전체가 바로 하느님! 이다.
우리가 하느님이다.
천지대자연의 신령스러움을 느껴보자!
하느님은 서양에서 건너온 것이 아니다.
수만 년 동안 조선인의 심성 속에 내재해있었던 의미덩어리이자 상징체계였다. 수운은 서학에서 말하는 “천주”라는 말에 자극을 받아 하느님을 추구하게 된다. 하느님이 지시하는 그 모든 존재성과 의미성을 찾아 나선 것이다. 그것이 그의 구도의 길이었다. 그 구도의 길에서 하느님을 만났고, 대화를 하였고, 계시를 얻었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의 실존적 행위방침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
수운이 말하는 하느님(하늘님)은 우리의 전통 속에서 신관을 빌려온 것이다. 그것은 조선의 민중에게 생활화되어 있는 “님”이었다. 그러나 그 “님”은 철저히 수평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대자연의 생명이며, 음양의 조화였다. 모든 귀신도 이 음양의 조화이치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인간을 위압하는 존재일 수는 없다. 하느님은 나에게서 초월적으로 따로 있는 존재자가 아니다. 나의 몸 전체가 바로 하느님인 것이다.
이것이 시천주의 인간이다. 우리는 천주(하느님)를 모시게 되었고, 모시고 살아야 한다. 하늘을 모신 인간끼리의 관계가 평등적임은 당연한 것이다.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천지대자연을 신령스럽게 바라볼 수 있으면, 우주만물의 신령스러움이 우리 자신 속의 영성을 불러일으키게 된다는 것이다. 전 인류는 이제 의식의 일대 전환이 요구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와 기후위기의 21세기 지금에 와서 보면 절실해진 문제이다.
다석 유영모 선생은 하느님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사람의 마음은 언제나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리는 궁신(窮神)하는 자리에 있어야 한다. 하느님을 알려는 것이 궁신(窮神)이다. 하느님이란 딴 게 아니다. 우리들이 바로 신(神)인 것이다. 지금에는 신(神)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할망정 이 다음에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만은 사실이다. 궁극에는 내가 하느님과 하나되겠다는 것이 아닌가. 하느님의 자리에 돌아간다는 말이다 거짓나인 제나(自我)로는 죽고 참나인 하느님으로 솟나자는 것이다. (1956)
사람이 다른 동물과는 달리 곧게 일어서는 것은 우(하느님)로부터 온 까닭이라고 생각된다. 마치 모든 초목(草木)이 태양에서 왔기 때문에 언제나 태양이 그리워 태양을 머리에 이고 태양을 찾아 하늘 높이 곧이 곧장 뻗어가며 높이 서 있듯이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왔기 때문에 언제나 우(하늘)로 머리를 두고 언제나 하느님을 사모하며 곧이 곧장 일어서서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사람이 하느님을 찾아가는 (窮神)은 식물의 향일성(向日性)과 같이 사람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사람의 본성(本性)이라고 생각된다.
초목(草木)의 향일성과 같은 궁신하려는 본성 때문에 사람은 풀이 땅을 뚫고 돋아나듯이 만물을 초월하여 무한한 발전을 가능케 할 수 있으며 나무가 높이 자라 땅을 덮듯이 사람은 만물을 이기고 다스리며 살아갈 수 있다. (1956)
하느님을 우리 머리에 이는 것이 이 세상에 나선 목적이요 이길 내용이다. 하느님의 참빛과 거룩한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하느님을 더욱 빛나고 뚜렷하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을 우리 머리 위에 받들고 이기 위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1956)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요한 14:6) 길이 되고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되는 나가 참나인 하나의 님 (主)이다. 님이 되는 나는 이해(利害)에 밝고 기분을 따지고 짜증과 성을 잘 내고 오만한가 하면 좌절하는 이 제나(自我)와는 다르다. 그 참나인 님은 하나이고 하나가 님이다. 주일(主一)이다. 이러한 느낌조차도 님이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 같다. 님(主)되는 나는 참나(眞我)요 얼나(靈我)인 하느님이다. 그 님 되는 나가 내 속에 있다. 각자(各者)의 나 속에 있다. 이 님의 나가 과거 현재 미래 속을 제 주장을 하면서 나가는 것이다. 이 님(主)의 나를 예수도 찾았고 석가도 찾았다. 우리가 예수와 석가를 배우고자 하는 것은 예수 석가처럼 님(主)의 나를 주일무적(主一無適)하자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안 될지 모르나 마침내 그 자리에 갈 것이다. 무적(無適)이란 달리 갈 데가 없다는 뜻이다. 적(適)은 입에 맞는 음식을 배불리 먹었다는 뜻으로 무적(無適)은 입에 맞는 것이 없어서 안 간다는 뜻이다. 안 간다는 뜻은 가서 묵지 않겠다. 는 뜻이다. (應無所住而) 주일(主一)하자는 것이다. (1956)
어제는 공자(孔子)가 온 세상을 구원할 사랑을 인(仁)이라고 했는데 오늘 나는 온 우주의 임자이신 하느님의 사랑을 인(仁)이라고 해본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사랑의 화신(化身)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예수를 안다고 하지만 참으로 사랑은 알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다만 화산(火山)이 터져서 용암(마그마)이 나오듯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어머니가 되면 젖이 나오고 사랑이 터져 나오는 것이지 젖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터져 나온 것이 하늘과 땅이다. 말할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이 밑에 깔려서 이 우주가 생겨났다. 이 사랑은 부부사이, 형제사이, 친구사이의 그런 사랑이 아니다. 말로나 생각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사람은 어떻게 이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가? 사람이 얼나로는 하느님의 긋(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인 하느님을 찾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모른다. 세상을 미워하는 사람에게만 하느님이 다가오신다. 하느님이 우리들에게 하느님을 알고 싶은 생각을 일으켜 준다(1956)
성공회 수동교회 윤정현 신부의 논문 중 "하느님 이해"(18)
다석은 태극(太極)이 하느님이라고 단언한다. 태극(太極)이 하느님이라고 다석은 재해석함으로서 그리스도교의 하느님 개념과 유교의 태극(太極)의 개념을 조화시키고 일치시키려고 하였다. 이러한 다석의 태극(太極) 해석은 궁극적 존재에 대한 타종교의 이해와 그리스도교의 하느님의 개념이 교류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고 할 수 있다.
“형이하(形而下)의 물건을 고유(固有)한 것과 같이 확실하다고 느끼는 것과 허공(하늘)은 허무하다고 느끼는 것과를 하나로 합하면 신이다. 그대로 신통하다. 우리가 고유하다고 또 허무 하다고 느끼는 그 자체가 신통(神通)하다. 그러면 지상은 상대(相對)로, 절대(絶對)는 하나로 느끼는 것이 왜 그러냐 하겠으나 신은 합해서 된 것이지 둘은 아니다. 절대가 상대화한 것으로 절대 따로 상대 따로 있는 것뿐이다. 우리 몸의 감각기관이 상대세계를 고유한 것으로 절대세계를 허무하게 착 각(錯覺)한 것뿐이다. ”
유영모는 유무(有無)를 초월하는 궁극적 존재가 유무(有無) 그 자체라고 본다. 또한 그 반대의 논리로도 설명할 수 있다. 궁극적 존재는 무(無)도 아니고 유(有)도 아니다. 그런데 유(有)이면서 무(無) 그 자체이다. 현상계의 궁극적 존재는 유(有)로서는 태극(太極)으로 나타나는 반면, 무(無)로서는 형상화되지 않는 궁극적 존재로, 즉 무극(無極)으로 나타난다.그러므로 다석 유영모의 태극(太極)은 형이상학적인 차원에서 ‘신성’(Godhead)이고, 태공(太空) 안에서 관념적인 최고원리이다. 이와 같은 유영모의 궁극적 존재 이해는 음양(陰陽) 원리에서 기인하는 동양사고의 상호의존과 상호보완의 원리에서 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다석 유영모에 있어 하느님, 그 자체는 정의될 수 없다. 신비주의자들의 절대자 체험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역설로서 하느님을 설명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다석 유영모는 태극, 무극에까지 가면 유교도 불교나 노자와 다른 게 없다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 개념이나 진리는 결국에 가서는 서로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념론적인 이해에 기초하여 초기 유교의 천지(天地)로서의 하느님에 근거한 천주(天主), 즉 인격적인 신(神)의 개념과 절대적인 관점에서 우주(宇宙)와 상통하는 무(無)로서 우주적 실재인 궁극적 존재의 개념을 유영모는 조화시킨다. 존재이면서 비존재이며, 초월적이면서 동시에 내재적 존재로서 하느님은 ‘하나’라는 다석의 해석은 유(有)로서 태극(太極)과 무(無)로서 무극(無極) 사이의 상호 의존과 상호보완에 근거하여 해석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다석의 절대자 이해와 ‘하나’에 대한 해석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허무(虛無)는 무극이요, 고유(固有)는 태극이다. 태극, 무극은 하나다. 하나는 신이다. 유(有)의 태극을 생각하면 무(無)의 무극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는 다석 유영모의 하느님 이해는 존재(存在)와 비존재(非存在)로서 하느님, 무(無)와 유(有)로서 하느님의 개념을 상호보완하고 조화하려고 하였다. 절대자에 대한 다석의 이러한 해석은 불교와 유교, 도교와 그리스도교 간의 대화의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본다.
柏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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