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나는 누군가육바라밀론(六波羅蜜論) - 깨어 있음이 곧 깨달음이다 본문
그리스도 의식, 붓다 의식 그리고 하나
나는 누군가
육바라밀론(六波羅蜜論) - 깨어 있음이 곧 깨달음이다
프로필
온전
2020. 5. 19. 18:42
깨달음이 아니라 깨어 있음이라, 보면서 판단하고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봄만이 있는
육바라밀론(六波羅蜜論) - 깨어 있음이 곧 깨달음이다
http://cafe.daum.net/daman1203/SYKS/85
깨달음은 빛이고, 마음은 어둠이다 깨달음은 지혜이고, 마음은 무명인 것이다 만일 그대의 마음이 청정하다면 모든 불국토 또한 청정하다 그대가 무심이 된다면 그것은 곧 부처이다 무심은 청정함과 불순함을 모두 초월한다
그대가 닦은 수행은 그대의 마음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그대는 깨달아야 한다. 만일 그대의 마음이 청정하다면 모든 불국토 또한 청정하다. 경에 이르기를 "그들의 마음이 불순하면 존재 역시 불순하고, 그들의 마음이 순수하면 존재 또한 순수하다."고 했다. 이리하여 삼독심에 물든 마음을 깨끗하게 다스림으로 해서 계, 정, 혜, 삼학이 저절로 들어서게 된다. "그러나 경전에는 여섯 가지 바라밀이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반야(般若)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 당신께서는 그 바라밀이 감각을 청정하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리고 왜 그것들을 뗏목이라고 부릅니까?" 바라밀을 닦고 여섯 가지 감각을 정화하는 것은 여섯 가지 도둑을 제압한다는 뜻이다. 안목의 세계를 포기함으로써 시각의 도둑을 몰아내는 것이 곧 보시이다. 소리의 세계에 이끌리지 않음으로써 청각의 도둑을 제압하는 것은 지계이다. 냄새의 세계에 중용을 지킴으로써 후각의 도둑을 다스리는 것이 인욕이다. 맛의 욕망에 이끌리지 않음으로써 촉각의 도둑을 다스리는 것이 선정이다. 미혹에 빠지지 않고 깨어 있음으로써 마음의 도둑을 조복시키는 것이 지혜이다. 이 육바라밀은 그대를 피안으로 건너가게 하는 나룻배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뗏목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석가모니께서 보살이셨을 때, 그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먼저 세 그릇의 우유와 여섯 국자의 죽을 마셨습니다. 만약 그가 불성의 열매를 맛볼 수 있기 전에 먼저 우유죽을 마셔야 했다면 어떻게 마음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해탈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방법이다. 그는 부처가 되기 전에 먼저 우유죽을 마셔야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우유죽이 있다. 석가모니 부처가 마신 우유죽은 보통의 불순한 우유죽이 아니라 다르마의 우유죽을 마신 것이다. 이 세 그릇의 우유란 삼학을 말하는 것이며, 여섯 국자의 죽이란 육바라밀을 뜻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것은 불성의 열매를 맛보게 한 순수한 다르마의 우유죽을 마셨기 때문이다. 여래께서 불순한 세속의 암소젖을 마셨다고 말하는 것은 그를 중상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는 세속의 어떤 집착에서도 영원히 자유로운, 썩지 않고 정욕도 없는 다르마 자체를 마신 것이다. 그러니 배고픔이나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불순한 우유죽을 마실 필요가 있겠는가? 경에 일렀으되 "이 황소는 고원이나 들판에 살지 않는다. 그것은 곡식이나 여물을 먹지 않는다. 그것은 암소와 함께 살지도 않는다. 그 황소의 몸빛은 타오르는 황금빛이다."라고 했다. 그 황소는 비로자나불이다. 모든 존재를 향한 그의 대 자비심으로 인해서, 그의 몸에서 삼학(삼학은 계, 정, 혜이다. 계는 계율을 지키는 것이고, 정은 선정에 들어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고, 혜는 일체가 상호의존으로 일어나 이루어졌고 항구불변의 실체라는 것은 없다는 지혜를 닦아나가는)과 육바라밀의 순수한 우유를 만들어내고 그것은 해탈을 추구하는 모든 이를 양육한다. 그런 순수한 법신에서 나오는 젖은 여래를 낳게 하고 불성을 성취하게 한다. 그것을 마시는 자는 영원하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달마의 제자들이 곤경에 빠진 것을 보면서 나의 마음은 너무나 안타깝다. 그들이 곤경에 빠진 것은 불교의 한 종파인 대승, 즉 마하야나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전통, 어떤 종파에 속해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들과 같은 곤경에 처하게 된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속한 전통을 거슬리는 어떤 말도 할 수 없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계속 자가당착의 논리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달마는 불교를 확고하게 심기 위해서 중국 땅으로 보내졌다. 그것은 그의 스승의 특별한 명령이었다. 그의 스승은 바로 깨달은 여자 프라기야타라였는데 그를 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그대를 중국에 보내는 것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드넓은 중국 땅에 대승의 가르침을 굳게 세우려는 것이다. 그곳은 나라 전체가 불교로 개종했고, 세계 인구의 2할이나 되는 사람들이 불교도가 되었다." 세계 인구의 2할, 곧 중국 인구의 숫자이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느 날 한 사내가 신문을 읽다가 이렇게 소리쳤다. "야! 세계 인구의 5분의 1이 같은 민족이야.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고. 나머지 5분의 4가 각기 다른 민족과 다른 문화와 언어를 사용하고 있네. 그런데 그 5분의 1이 바로 중국이야." 그러자 그 말을 들은 그의 아내가 말했다. "맙소사.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아이를 그만 낳아야겠군요. 우리는 아이들이 이미 네 명이나 있는데, 다섯 번째가 나오면 중국 아이가 나오겠군요." 중국은 언제나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였다. 하지만 금세기가 끝나갈 무렵이면 인도가 중국을 따라잡을 것이다. 인도는 무서운 속도로 인구가 늘어가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중국이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였다. 그리고 만약 불교가 등불처럼 퍼져 나갔다면, 그것이 확고한 뿌리를 내리는 데는 시간이 좀 걸린다. 불교가 중국에 전해진 지 600년이 지난 후에야 달마는 특별한 임무를 띠고 그곳에 보내졌다. 수천 명의 불교학자들이 이미 황제의 초청으로 중국에 갔고, 그곳에서 불경을 중국어로 번역하는 사업을 하고 있었지만 깨달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달마는 깨달음이 무슨 맛인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 특별히 보내진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불교에 대해서 말은 많이 들었다. 그들은 풍부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깨달음에 대한 열망은 수백만 명이나 되는 그곳 승려들에게 일어났다. 그들은 깨달은 사람에 대해서 말만 들었지 실제로 보지는 못했던 것이다. 깨달은 사람은 현존, 그의 침묵, 그의 자비심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명의 상태였다. 프라기야타라는 달마를 중국에 보내면서 마음속에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그를 중국 불교사에서 최초의 깨달은 사람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곤란한 일이 일어났다. 그것은 달마가 가르친 제자들이 대승에 대해 묻는 말에 한마디도 제대로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새롭게 입문하는 그의 제자들에게 여러 가지 방해가 되었다. 그때는 이미 200만 명이나 되는 불교 승려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승려라기보다는 오히려 속인에 가까웠다. 그들의 출가는 인생에 어떤 새로운 경험도 가져다주지 못했다. 달마가 중국으로 건너갔을 때, 그의 앞에는 엄청난 변혁의 시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가 그처럼 무거운 사명감을 지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제자들은 문제였다. 달마는 자신이 어떻게 중국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분명 제자들에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대승불교에 속한 사람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스승처럼 혁명적인 사람은 될 수 없었다. 그들의 사상은 비록 혁명적이지만 그들이 단체를 만든 이상 혁명을 계속 일으킬 수는 없다. 단체와 진정한 혁명은 상극 관계이기 때문이다. 피상적인 질문에 관한 한 그들은 완전히 옳은 답을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는 궁극적인 질문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인 과정이다. 만약 그들이 최초의 궁극적인 질문에 대해서 '나는 모른다'고 선언했다면, 그들은 무명이 어디서부터 생기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나는 무명이 어디서부터 생기는지 모른다. 아마 무명은 본래부터 있었을 것이다." 무명(無明)이란 말은 무지를 가리키는 불교 용어이다. 무명은 결코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어둠과 똑같은 것이다. 그대는 어둠이 어디로부터 나오는지 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빛이 나오면 어둠은 사라지는 것만 항상 보아 왔다. 어둠은 본래 거기에 있었다. 그것은 어디로부터 온다든지 어디를 향해 가는 것이 아니다. 오고 가는 것은 빛이다. 어둠은 단순히 빛의 부재 상태이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완벽한 대답이 될 것이다. 어둠은 항상 그곳에 있었다. 어둠은 근원이 없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라도 존재하는 한 그것은 근원이 있다. 빛도 근원을 갖고 있고, 깨어 있음도 근원을 갖고 있으며, 의식도 근원이 있다. 그러나 무의식은 어둠과 똑같은 것이다. 만약 그들이 거기에서 자신을 방어하려는 시도를 멈추었다면 그들은 더 이상 모든 난센스를 연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나는 모른다.'라고 말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제 새로운 명상 운동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황제를 포함해서 나라 전체가 그들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 그들은 중국에 들어온 최초의 깨달은 사람인 달마의 제자들이란 말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에 대한 기대가 굉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든 질문에 대해 대답해야 했다. 그리고 그들의 대답은 경전에서 나온 것이 아니어야 했다. 그들의 대답은 스승이신 달마의 말에서 나온 것이어야 했다. 그래서 그들은 '나는 모른다.'라고 기록하기를 주저했다. 그들은 이렇게 기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모른다. 나는 그것에 대해서 전혀 아는 것이 없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어둠은 항상 거기에 있었고, 무명도 항상 거기에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어떤 근원도 갖고 있지 않다. 그것은 원인도 없다. 비존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나의 대답이다. 그들은 구도자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렇게 기록할 수 있었다. "나는 그대들에게 어떻게 무지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 가르치러 이곳에 왔다. 그대들이 어떻게 무지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지도 나는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보다는 경전을 인용해서 장황한 교리를 늘어놓았다. 그것은 구도자들에게 또 다른 의문을 계속 일으키는 결과를 빚어냈다. 물론 그들은 스승의 방식대로 완벽한 대답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는 것은 마하야나에 대해서 반대하는 것이며,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조차 모순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매우 어려운 함정에 빠졌다. 그들은 무엇이 옳은 대답인지 알았지만 또한 무엇이 전통적인 대답인지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은 내가 항상 달마를 생각하는 대로 스승만큼 강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진정한 혁명가임을 증명할 수 없었다. 그들은 마하야나라는 전통에 반대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이 얼마나 무의미한 대답을 하기 시작하는지를 그대에게 보여 줄 참이다. 그들은 정통 교리의 선을 넘지 말아야 했고,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을 위로해야 했다. 결국 그들은 바보 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정말로 진부한 것이었다. 단 한번 그들은 옳은 대답을 했고, 나머지 그들의 대답은 내가 절대적으로 찬성할 수 없는 것이었다. 어록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대가 닦은 수행은 그대의 마음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음을 그대는 깨달아야 한다. 이 말은 사실이다. 그대가 무슨 수행을 닦든지 그대는 항상 마음을 통해서 닦아야 한다. 그래서 깨달음은 수행을 통해서 얻어질 수 없는 것이다. 만약 깨달음이 수행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마음의 부산물이 된다. 그것은 꿈이나 환상과 같은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사념이 사라지듯이 어느 순간 그대의 깨달음 역시 사라질 것이다. 나에게는 독일인 산야신이 한 명 있었다. 그의 이름은 구나카르(Gunakar)였다. 그는 여러 번 깨달음을 얻었다고 말했었고, 이제 그런 행동은 완전히 그만두었다. 깨달음에 대한 그의 모든 미련들을 떨어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가 처음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는 수상과 대통령과 유엔의 모든 대사들에게 자신이 깨달았다고 선언했다―그는 독일에 매우 아름다운 성을 갖고 있었다―그는 나에게도 편지를 보내왔다. 그래서 나는 회신을 보냈다. "구나카르여! 빨리 돌아오라. 그대는 먼저 나를 만나야 한다." 그는 당시 일 주일 전쯤에 이곳을 떠났고, 나는 그에게서 어떤 깨달음의 징조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돌아왔고 점점 뿌나에 가까워질수록 깨달음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이것이 엉터리였음을 알았다. 결국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완벽했다. 그곳에서는 깨달음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독일에서 "나는 깨달았다."라고 선언했을 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아무도 이 깨달음이 무엇이지 들은 적이 없다. 아마 그는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자연히 아무도 그에게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나를 만나려고 생각하니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내 앞에 와서 이렇게 말했다. "용서하십시오. 나는 절대적으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그대가 수상이나 세계의 모든 정부에게 깨달았다는 말을 하고 싶다면 먼저 나를 만나러 오라. 이 점을 명심하라." 그 후 2년 동안 그는 침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또다시 편지를 받았다. 그는 그 편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는 그것이 진짜로 일어났습니다. 곧 그리로 가겠습니다." 나는 회답했다. "좋다, 즉시 오라." 그가 나에게 도착했을 때,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용서하십시오. 정말 이상합니다. 나는 이곳에만 오면 깨닫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그리고 독일에만 돌아가면 깨달았다는 선언을 하고 싶은 욕망이 일어납니다. 내가 깨닫지 못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나는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일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마지막에 그는 이곳 구내 식당에서 접시를 닦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떤 사람이 구나카르에게 물었다.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나는 깨달은 사람이 식당에서 접시를 닦는다는 말은 한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깨달음에 대해서는 모두 잊어버려라. 내가 접시를 닦도록 나를 그냥 내버려 두라. 만약 당신이 오쇼께 갈 일이 있다면 그에게 전해 달라. 나는 이제 깨닫지 않기로 했다고, 적어도 독일에서는 말일세. 내가 깨달아야 한다면 오쇼와 가까이 있는 이곳에서 깨달을 것이다. 나는 접시를 닦는 것이 훨씬 즐겁다. 깨달음이란 …… 그런 고통이 없다." 그는 나를 흉내내기 시작했다. 그는 산 속에 있는 그의 성에서 자신을 가둬 두고 있었다. 그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자신을 괴롭히게 되었다. 그에게는 비서가 한 사람 있었고, 그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 않으면 그의 깨달음을 잊어버리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람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의 비서조차도 말이다. 그의 비서가 사람들에게 "그는 삼매 속에 들어있습니다."라고 알렸기 때문이다. 비서는 또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는 아무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를 방해하지 마십시오." 그 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깨달음 때문에 충분히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제 나는 구내 식당에서 접시를 닦기만 해도 인생이 무척 즐겁습니다. 적어도 나는 밖으로 나갈 수 있고, 극장에도 갈 수 있으며, 디스코 테크에도 달 수 있습니다. 나는 노래도 할 수 있고, 춤도 출 수 있습니다. 하지만 깨달음은 매우 어렵습니다. 답답한 방안에서 혼자 갇혀 있어야만 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은 마음에서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마음이 사라질 때만이 나올 수 있다. 사실 깨달음은 빛이고, 마음은 어둠이다. 깨달음은 지혜이고, 마음은 무명인 것이다. 만일 그대의 마음이 청정하다면 모든 불국토 또한 청정하다. 나는 이 말을 바로잡고 싶다. 이렇게 말이다. "그대가 무심이 된다면 그것은 곧 부처이다. 무심은 청정함과 불순함을 모두 초월한다." 불국토, 혹은 부처의 경지는 청정한 마음이 아니다. 가장 청정한 마음이라고 할지라도 역시 그것은 마음이다. 그리고 청정함과 불순함은 이중성이다. 부처의 경지는 모든 이중성을 초월해 있다. 그것은 이중성의 한쪽 부분이 될 수 없다. 수르다스(Surdas)라는 인도의 시인이 있었다. 그는 힌두교의 성자로 숭배를 받았다. 어느 날 그는 한 어여쁜 여자를 보았다. 그는 구걸을 하러 다니다가 집안에 누가 있는지 모르고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아름다운 여인이 문을 열어 주었다. 그때 그녀에 대한 욕망이 일어났다. 그것은 자연스런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만약 그대가 아름다운 꽃을 보고 즐길 수 있다면, 왜 아름다운 여자는 즐길 수 없는가? 그러나 모든 종교에서 그런 즐거움을 반대한다. 모든 종교는 매저키스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대 자신을 학대하라. 자신을 학대하는 순간 그대는 더욱 영적으로 될 것이다. 수르다스는 죄의식을 크게 느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얼굴은 너무 아름다워서, 그는 그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종교적인 견해로서는 그런 것은 절대 금물이다. 결국 그는 두 눈을 모두 장님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는 수세기 동안 위대한 성자로 추앙 받았다. 그러나 그대의 눈을 못 쓰게 만든다고, 그대의 꿈마저 생각마저 멈추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장님이 되는 순간 그 얼굴은 더 아름다워진다. 그리고 그대의 꿈에 나타날 것이다. 이것이 보시의 의미란 말인가? 보시란 무조건적으로 베푸는 것이다. 그것은 눈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시각의 세계를 포기하는 것과는 더군다나 관련이 없다. 그것은 단지 그대가 어떤 것을 갖고 있고, 그것을 기쁘게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아까워하지 말라. 그것에 집착하지 말라. 언젠가 그대의 삶은 끝날 것이고, 그대는 아무것도 갖고 갈 수 없게 된다. 그대가 살아 있는 동안 그대의 소유를 나누어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베푸는 기술을 배운 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다. 그는 아마 가난한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너무나 풍요로워서 황제도 시기할 정도이다. 나는 한 수피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매우 가난한 사람이었다. 그의 직업은 나무꾼이었고 숲 속의 작은 오두막에 살았다. 그의 오두막은 너무 작아서 그와 아내가 겨우 잘 수 있을 정도였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느 날 밤에 한 사람이 그의 오두막 문을 두드렸다. 마침 그의 아내가 문 곁에서 자고 있었다. 나무꾼이 아내에게 말했다. "문을 열어 주게.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길을 잃었나본데, 지금은 어두운 밤이고 숲 속에서 맹수들이 많아서 매우 위험하다. 그러니 즉시 문을 열어 주게." 그녀가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잘 곳이 없어요." 그 말을 들은 나무꾼은 웃으면서 말했다. "여기는 궁전이 아니야. 여기는 가난한 나무꾼의 오두막이야. 두 사람은 누워서 잘 수가 있지만, 세 사람이면 앉아 있을 수는 있어. 그러니 빨리 문을 열어 주게." 그래서 문이 열렸다. 그 남자는 매우 고마워했다. 그들은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들은 잠을 잘 수가 없었기에 이야기로 밤을 지새워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또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새로운 손님이 왔던 것이다. 마침 먼저 왔던 손님이 문가에 앉아 있었다. 나무꾼이 말했다. "친구여, 문을 열어 주게. 아마 그도 길을 잃었나본데." 그가 말했다. "당신은 정말 이상한 사람처럼 보이는군요. 여기는 앉을 자리가 없습니다." 나무꾼이 말했다. "우리가 문을 안 열어 주었으면 당신은 밖에 있어야 했다네. 그러면 맹수에게 먹힐 수도 있어. 우리가 지금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은 누워서 잘 수가 없기 때문이라네. 나는 나무꾼이라네. 하루 종일 일을 해서 매우 지쳐있단 말일세. 그 날 한 나무는 저녁에 시장에 내다 팔아야 다음날 먹을 음식을 겨우 살 수 있을 정도이지. 하지만 여기는 당신의 집이 아니네. 그러니 문을 열어 주게. 세 사람이 편안히 앉을 수 있다면, 네 사람도 앉을 수는 있지. 좀 불편하겠지만 말일세." 그래서 먼저 온 손님은 억지로 문을 열었다. 그러자 두 번째 손님이 매우 고마워하면서 들어왔다. 이제 그들은 꼭 붙어 앉아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문 두드리는 소리였다. 갑자기 아내와 두 손님은 입을 다물었다. 창 밖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나무꾼이 말했다. "문을 열어 주게. 나의 당나귀일세. 그는 세상에서 유일한 내 친구란 말일세. 그는 매일 나의 나무를 시장까지 옮겨다 준다네. 지금 밖엔 비가 너무 많이 내려. 그를 밖에 세워둘 순 없지." 그러자 그들이 말했다. "이건 너무한데. 당나귀는 어디에 서 있는단 말인가?" 나무꾼이 말했다. "자네들은 모르네. 여기는 가난한 나무꾼의 집이야. 지금은 우리가 앉아 있지만, 당나귀가 돌아오면 우리 모두 서 있으면 되지 않은가? 당나귀가 가운데 서고 우리는 그 주위로 서 있다면 따뜻하고 아늑할 걸세." 그러자 그들이 말했다. "차라리 당신의 오두막에 이렇게 갇히느니 숲 속에서 길을 잃는 편이 더 나았을 뻔했소." 하지만 집 주인이 문을 열어 준 이상 그들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문이 열려졌고 당나귀가 들어왔다. 당나귀는 온몸이 젖어 있었다. 나무꾼은 당나귀를 가운데로 데리고 왔고 사람들은 가장자리에 둘러섰다. 나무꾼이 말했다. "당신들은 모르겠지만, 이 당나귀는 매우 철학적인 마음을 갖고 있지. 당신들이 무슨 이야기를 해도 그는 결코 귀찮아하지 않을 걸세. 그는 항상 침묵하면서 듣고 있거든." 나는 이 이야기를 사랑한다. 이 이야기는 황제의 궁전은 항상 비좁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비록 그것은 엄청나게 큰집이지만 말이다. 인도 대통령의 집은 화장실이 딸린 방이 백 개나 된다. 그리고 정원도 백 에이커나 된다. 그곳은 옛날에 왕자가 살던 집이었다. 그리고 손님들을 위한 별채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나머지 99개의 방은 어디에다 쓰겠는가? 이전에 나는 그 대통령의 집에 간 적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자키르 후세인(Zakir Hussein)이었는데 나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는 한때 알리가르(Aligarh) 대학교의 부총장이었다. 그가 부총장이었던 시절에 나는 거기에서 연설을 했다. 그는 그때 회의에서 의장을 맡았는데 내가 하는 말을 듣기 좋아했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는 내가 델리(Delhi)에 있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를 초청했다. 나는 그의 집에 갔을 때 그에게 물어 보았다. "이 백 개의 방은 무슨 목적으로 사용되는가요?" "그것들은 아무데도 사용되지 않습니다. 사실 그것들을 관리하기 위해서 백 명이나 되는 하인들이 필요하지요. 당신 앞에 있는 저 커다란 두 개의 건물이 바로 손님용 숙소이지요. 그것은 한 건물에 적어도 방이 25개나 된답니다." 내가 말했다. "이것은 절대적인 낭비입니다. 이 많은 방에서 어떻게 당신은 잠을 잡니까?" "이 많은 방에서? 나는 내 침실에서 잠을 잡니다. 나는 괴물이 아닙니다. 어떻게 한꺼번에 이 많은 방에서 잘 수가 있단 말인가요?" 내가 말했다. "하지만 이 방들은 비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각 방마다는 모든 가구가 구비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어떤 식으로든지 사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황제들은 커다란 궁전에서 산다. 하지만 거기에는 다른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은 전혀 없다. 그러나 그들은 계속 새로운 궁전을 또 짓는다. 그 가난한 나무꾼의 집은 공간이 모자랐다. 하지만 그들은 공간을 어떻게든 만들었다. 비록 그들은 서서 밤을 보냈지만, 그 밤은 정말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대가 갖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누어 가지는 것이 좋다. 그대가 재산을 갖고 있지 않더라도, 그대는 거기에서 나누어줄 만한 것을 찾을 수 있다. 보시란 베푸는 것이다. 달마의 제자들은 괜히 어렵게 적어 놓았다. 소리의 세계에 이끌리지 않음으로써 청각의 도둑을 제압하는 것은 지계이다. 그대는 지계에 대한 이런 정의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음악을 듣지 않는 것이 계율을 지키는 것이라니! 사람을 죽인다든지 여자를 폭행한다든지 하는 것이 계율을 어기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듣는 것이, 아침에 일어나서 나무 위에 앉은 새가 노래하는 소리를 듣는 것이 계율을 어기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지금 완전히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 이 어록들은 후세에 추종자들이 첨가한 주석임에 분명하다. 달마가 이렇게 말하리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냄새의 세계에 중용을 지킴으로써 후각의 도둑을 다스리는 것이 인욕이다. 나는 계율과 인욕의 덕에 대해서 수백 권의 책을 읽어보았지만,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나는 코에 대해서 이런 식으로 말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대가 모든 냄새를 똑같은 것으로 중화시킬 수 있다면 그대는 참을성이 있다니! 장미꽃과 소똥 냄새가 같은 것으로 느낄 수 있다면 그대는 인욕을 잘하는 것인가? 그런 인내심이 있다면 지옥에 가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인내심이 아니라 무감각이다. 지성적인 사람은 더욱 예민한 감각을 지녔을 것이다. 시인들은 나무를 보아도 그대와 다르게 본다. 그들은 그것들을 더 푸르게 본다. 그들이 보는 녹색은 단순한 녹색이 아니다. 그들의 색채에 대한 감각은 매우 예리하다. 음악가들의 귀는 침묵 속에서도 소리를 찾아낸다. 그들은 보통 사람이 따라올 수 없는 예민한 청각을 갖고 있다. 그러나 달마의 제자들은 달마를 계속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다. 맛의 욕망에 이끌리지 않음으로써 미각의 도둑을 평정하는 것이 정진이다. 만약 그대가 가장 맛있는 음식과 소똥을 아무런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정진이다. 나는 전 생애를 통틀어 이 정진에 대해 정의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달마는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감촉의 세계에 이끌리지 않음으로써 촉각의 도둑을 다스리는 것이 선정이다. 만약 누군가가 그대를 만져도 그대는 그것을 느낄 수 없다. 그대가 선정에 들어 있기 때문인가? 만약 어떤 사람이 그대를 고문한다 해도 그대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 그대는 그저 죽은 몸이다. 그것은 명상이 아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위대한 공헌을 했다. 그들이 써 놓은 어록을 읽은 사람들은 아마 방황했을 것이다. "인도에서 깨달은 사람이 왔다. 우리는 또한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이 말은 진짜다." 중국 사람들은 이미 명상에 관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노자와 장자와 열자가 있다. 그들은 석가모니 부처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이었다. 그들 역시 명상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명상을 정의하려고 노력했다. 거의 믿을 수 없지만 그들이 말하는 명상은 완전히 감각을 잃어버리는 상태였다. 궁극적인 질문이 던졌을 때 그들은 바로 거기에서 추락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렸다. 이제 그들은 어떤 식으로라도 체면을 세우려고 한다. 미혹에 빠지지 않고 깨어 있음으로써 마음의 도둑을 조복시키는 것이 지혜이다. 오직 이것만이 약간 일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약간만 있을 뿐이다. 왜냐하면 깨어 있음은 훈련을 통해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미 그전에 깨어 있음이란 자발적인 현상임을 스승에게 들었고, 또 자기들 스스로 이 어록에 적어 놓았다. 그대는 그것을 훈련할 수 없다. 훈련할 수 있는 것은 마음에 관한 것뿐이다. 마음을 벗어난 것을 누가 훈련하겠는가? 그대는 육체를 갖고 있다. 그대는 요가를 수행할 수 있다. 그대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대는 명상이나 깨어 있음을 훈련할 수 있다. 하지만 몸에서 나온 것은 몸에만 해당되는 것이고, 마음에서 나온 것은 마음에만 해당된다. 그것들은 죽음이 오면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 것들이다. 그대 속에서 몸이나 마음에 해당하지 않는 어떤 것이 일어나야 한다. 그것은 몸과 마음의 구조물에 뿌리박고 있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깨어 있음은 곧 깨달음이다. 그것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활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죽음에 의해서 없어지더라도 깨어 있음은 사라지지 않는다. 깨어 있음은 어떤 누구에 의해서도 빼앗길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이 약간 일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육바라밀은 그대를 피안으로 건너가게 하는 나룻배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뗏목이라고 부른다. 육바라밀은 그대를 초월로 인도한다. 그러자 구도자는 또 묻는다. "그러나 석가모니께서 보살이셨을 때 그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먼저 세 그릇의 우유와 여섯 국자의 죽을 마셨습니다. 만약 그가 불성의 열매를 맛볼 수 있기 전에 먼저 우유죽을 마셔야 했다면 어떻게 마음을 지켜보는 것으로만 해탈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달마의 제자들은 보통 사람들이 묻지 않는 질문을 계속 묻는 괴짜를 만났다. 하지만 이것은 좋은 일이다. 부처가 세 그릇의 우유죽을 마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세 그릇의 우유죽 때문에 깨달은 것은 아니다. 그것은 깨닫기 전에 먹었던 것이며 그것이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었다. 그러나 구도자가 묻고 있는 것은 바로 이 점이다. 만약 그가 불성의 열매를 맛볼 수 있기 전에 먼저 우유죽을 마셔야 했다면 어떻게 마음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해탈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은 이런 뜻이다. "먼저 사람은 하루에 세 그릇의 우유죽을 마셔야 합니다. 그런데 당신은 우리가 마음을 지켜보는 것만으로 해탈할 수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이 세 그릇의 우유죽은 무엇에 관한 것입니까?" 이 물음은 달마의 어록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의 경전과 주석에도 자주 나타나는 문제이다 그들이 하는 말을 들으면 그대는 아마 몰랄 것이다. 그들은 지금 매우 간단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 단지 일상적인 일을 마치 대단한 우연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는 배가 고팠고 누군가가 그에게 우유죽을 대접해 주었다. 그러나 구도자가 묻는 물음은 그것이 아무리 이상한 것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 그들은 구도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대답은 진짜로 놀랍다. 그 구도자는 그런 대답을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 그 대답은 이러했다. 그대가 말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방법이다. 그는 부처가 되기 전에 먼저 우유죽을 마셔야 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우유죽이 있다. 이것이 바로 그대가 초월할 수 없는 어떤 것이다. 나는 거기에 어리석은 사람들의 한계가 있다고 종종 생각해 왔다. 그러나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두 가지 종류의 우유죽이 있다. 석가모니 부처가 마신 우유죽은 보통의 불순한 우유죽이 아니라 다르마의 우유죽을 마신 것이다. 보통의 우유죽이 아니다. 종교적인 우유죽이다! 다르마의 우유죽이 무엇인가? 아무도 그런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사람들은 분유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그리고 다른 여러 가지 우유죽에 대해서도 알고 있다. 하지만 다르마 우유죽이란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어떻게 우유죽이 종교적으로 될 수 있는가? 이 세 그릇의 우유란 삼학을 말하는 것이며, 여섯 국자의 죽이란 육바라밀을 뜻하는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가 깨달음을 얻은 것은 불성의 열매를 맛보게 한 순수한 다르마의 우유죽을 마셨기 때문이다. 여래께서 불순한 세속의 암소 젖을 마셨다고 말하는 것은 그를 중상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진실을 말하자면 그는 세속의 어떤 집착에서도 영원히 자유로운, 썩지 않고 정욕도 없는 다르마 자체를 마신 것이다. 그러니 배고픔이나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불순한 우유죽을 마실 필요가 있겠는가? 우리는 앞에서 여러 차례 달마가 "그대의 내면은 항상 순수하며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도 오염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을 보아 왔다. 그리고 이제 그의 제자들은 사람이 자신의 불성을 알기 위해서는 특별한 우유죽을 마셔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궁지에 몰린 나머지 다르마 우유죽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완전히 자가당착이다. 경에 일렀으되 "이 황소는 고원이나 들판에 살지 않는다." 첫째 그대가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이 암소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직 암소만이 젖을 만들어낼 수 있다. 그러나 다르마 우유죽은 오직 황소에게서만 나온다. 이 어록은 모라르지 데사이(Morarji Desai)에게 보내졌어야 한다. 이 말은 그의 사상을 뒷받침해 줄 것이다. 그는 매일 다르마 우유죽을 마시고 있다. 그는 매일 자신의 젖을 마시고, 다시 자신의 몸에서 젖을 짜내어 그 젖을 마신다. 그는 아마 어떤 부처보다도 더 위대한 깨달음을 얻을 것이다. 이 황소는 실수로 나온 말이 아니다. 그들은 앞에서 이렇게 적어 놓았다. 여래께서 불순한 세속의 암소 젖을 마셨다고 말하는 것은… 그들은 암소와 황소의 차이점을 분명히 알고 있다. 경에 일렀으되 "이 황소는 고원이나 들판에 살지 않는다. 그것은 곡식이나 여물을 먹지 않는다. 그것은 암소와 함께 살지도 않는다." 만약 암소와 함께 산다면 불순해질 가능성이 거기에 있다. "그 황소의 몸빛은 타오르는 황금빛이다."라고 했다. 그 황소는 비로자나불이다. 모든 존재를 향한 그의 대 자비심으로 인해서 그의 몸에서 삼학과 육바라밀의 순수한 우유를 만들어내고 그것은 해탈을 추구하는 모든 이를 양육한다. 그런 순수한 법신에서 나오는 젖은 여래를 낳게 하고 불성을 성취하게 한다. 그것을 마시는 자는 영원하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 말을 들으면 그대는 매우 의기소침해질 것이다. 어디서 다르마 황소를 찾을 수 있겠는가? 이 말을 들으니 한 유명한 힌두교 승려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나는 힌두교 종교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 그와 함께 여행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우리는 같은 집에 묵었는데 그는 오직 우유만 마셨다. 그것은 그만의 자랑이었다. 나는 그와 사흘을 함께 있었는데, 그가 다른 음식을 먹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 우유는 반드시 흰 젖소에게만 나온 것이어야 했다. 절대적으로 흰 젖소 말이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물었다. "나는 그대의 수행을 방해할 뜻은 전혀 없다. 그러나 나는 왜 당신이 검은 젖소에게서 나오는 우유는 먹지 않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우유는 항상 백색이다. 그런데 뭘 그리 걱정하는가? 그리고 검은 점이 하나만 있어도 그 소에게서 나온 젖은 거절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침에 많은 젖소들이 그 성자에게 검사를 받았다. 절대적으로 흰 젖소인가 아닌가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가 젖소를 선택하고 나면 목동은 젖은 수건으로 젖소를 목욕시켜야 했다. 어떤 오물이나 먼지도 젖에 들어가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사흘 동안 그의 바보 같은 행동을 보고 있던 나는 지쳤다. 나는 그때 달마 어록에 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당신이 하는 일은 절대적으로 옳다. 하지만 오직 한 가지 잘못된 것이 있다. 그대는 흰 젖소에게서 나오는 젖만 먹는데, 흰 젖소가 아니라 흰 황소에게서 나오는 젖이어야 한다." 그러나 흰 황소의 젖은 흰색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노란색일 것이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어려움도 극복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위대한 수행이 되는 것이리라. 달마의 제자들은 스승을 위한답시고, 스승을 완전히 바보로 만들었다. 사실 그것은 간단히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비단 불교의 문제뿐만 아니다. 모든 종교에서 같은 문제가 계속 일어나고 있다. 자이나교의 성자인 마하비라는 앉은 자세로 깨달음을 얻었다. 그런데 그 앉은 자세가 좀 별스럽다. 그것은 요가에서 '소젖 짜기 자세'라고 불리는 자세였다. 인도에서는 젖을 짜는 데 기계를 사용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세발이 의자에 앉아서 손으로 젖을 짠다. 그러나 마하비라는 무엇을 했던가? 그는 결코 소젖 같은 것은 마시지도 짜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 자세로 앉아 있어야만 했을까? 거기에는 오직 한 가지 이유만 있다. 그리고 나는 그대에게 그 이유를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는 모라르지 데사이에게 물어 보라. 그리고 이렇게 말해 주라. "그대는 완벽하게 할 수 있다. 잘 들어라. 먼저 소젖 짜기 자세로 앉아서 젖을 짜 모아라. 그리고 그것을 마셔라. 그러면 깨달음은 따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마하비라 이후에 자이나 승려들은 그 자세로 앉아 있는 것이 매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대는 충분히 오랫동안 그 자세로 앉아 있을 수 없다. 그 자세는 매우 이상한 자세이다. 명상을 하려면 먼저 충분히 이완될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마하비라의 자세는 매우 긴장된 자세이다. 그러나 우연하게도 사람들은 마치 그 자세 때문에 그가 깨달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깨달음을 얻는 데는 어떤 자세도 필요 없다. 깨달음은 그대가 할 수 있는 어떤 행위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깨달음은 오직 그대가 사라질 때만이 생겨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완전한 침묵 속에서 말이다. 그대는 이렇게 말할 수 없다. "이것이 나의 깨달음이다. 나는 드디어 그것을 성취해냈다." 깨달음이 일어날 때 그대는 그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나는 없다. 나는 없기 때문에 거기에 침묵이 흘렀고, 오직 수용성만이 남아 있었다. 그때 깨달음이 일어났다." 그것은 햇살이 꽃에 비추어지면 꽃잎이 열리는 것 이상으로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대를 초월한 어떤 것이 그대 속으로 들어와, 그대의 연꽃잎이 열리면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향기가 나오는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원인도 있을 수 없다. 원인과 결과는 과학적인 용어이다. 그것들은 내면의 신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내면의 신비에는 어떤 원인이나 결과도 없기 때문이다. 불성, 깨달음, 깨어 있음, 해탈, 그것은 이미 거기에 있다. 그것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어떤 원인도 필요 없다. 그것은 그저 보일 뿐이다. 그대는 시선을 돌려 내면으로 향하라. 그것은 하나의 발견이다. 황금시대를 열기 위해서 그것은 언제나 있어 왔고, 그래서 그대는 어느 순간엔가 그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는 어떤 미세한 인과의 법칙도 개입되지 않는다. 단지 내면을 향하여 눈을 뜨라. 나는 그것을 명상이라고 부른다. 마음은 항상 외부로만 열려져 있다. 명상은 내부로 그 문을 연다. 마음은 하나의 문이고 그것을 통해 그대는 세상으로 나간다. 명상 또한 문이고 그대는 그것을 통해 내면으로 들어온다. 그대 존재의 핵심으로 말이다. 그리고 갑자기 그대는 깨닫는다. 깨달음은 갑작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결코 천천히 진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달마도 그 사실을 알았다. 그 자신의 깨달음은 갑작스러운 경험이었다. 그러나 그의 제자들은 전통에 반대할 수 없었다. 사람들을 괴롭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을 적으로 만들어서는 어떤 운동도 전개할 수 없었다. 그들은 중국을 떠나기 전에 달마가 그의 스승과 약속한 사실을 상기했다. 하지만 나는 그 약속이 못마땅하다. 진리의 말은 어떤 환경에서도 왜곡되어서는 안 된다. 중국에 모든 불교가 사라진다 해도 말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잃을 것은 없다. 그러나 달마의 제자들은 서로의 규약을 굳게 지켰다. 아마 그것 때문에 나중에 불교가 핍박을 받았을 때도 중국에 선불교만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모른다. 알겠는가?
공유하기
온전
온전
좋은글·이미지
나는 나의 하나님과 하나 됨을 선택하며, 따라서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 됨의 현존이다! 앎과 자각의 성장 ( 진실과 관용, 진지함, 자비, 충만, 온전함 ) 사랑이 정점에 다다랐을 때 형상은 사라진다.
'배움과 깨달음 > 숨터일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리 안에서 잠자는 용(龍)을 깨워야 진리를 만납니다. (0) | 2021.07.07 |
---|---|
황폐하게 보이던 그 황폐한 땅이 장차 경작이 될지라 (0) | 2021.07.06 |
●초인생활 탐사록 10일 (0) | 2021.07.04 |
떡과 포도주이신 그리스도 (0) | 2021.07.03 |
나의 느낌이 지금 무엇을 창조하고 있는지 관조해야 한다 (0) | 2021.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