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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사회적 욕망이 작동하는 원리에 대해 본문
인간 사회적 욕망이 작동하는 원리에 대해
푸른달빛 방인상 l 기사입력 2014-03-01
그리스 철학자 포르피리오스(Porphyrios 232 ~ 305)는 마르셀라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다. "진실하게 철학을 사랑하는 자는 동요를 일으키는 고통스러운 욕망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다. 인간적 정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철학자의 이야기는 공허할 뿐이다. 의약이 육체의 병을 쫓아내지 못하면 아무 쓸모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도 영혼으로부터 정념을 쫓아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아테네 철학을 접할 때마다 그들이 사용했던 philosophy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philosophy와 뭔가 다른 것이었다는 점을 느낀다. 그들에게는 철학이 학문이 아니라 종교와 비슷한 무엇이었다. 그들은 무지로부터, 거짓으로부터, 정념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할 무엇을 지향했고, 지상의 것이 아니라 천상을 목적으로 하는 그것을 진리로 삼았다. 그렇기 때문에 먼저 세상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알아야 했고, 인간이 무엇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했다. 하여 수(數)를 신의 제단에 바친 피타고라스와 영원한 원소인 물, 불, 공기, 흙이 사랑에 모이고 미움에 흩어진다고 하는 엠페도클레스, 플라톤의 이데아, 에피쿠로스의 아타락시아 모두 철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그들에게 philosophy는 일종의 성사(聖事)였다. 그런 그들에게 미셀 푸코나 비트겐슈타인, 하버마스, 마이클 샌델의 철학을 들려준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영혼을 구원하는 철학에서 분석하거나 비판하거나 혹은 자랑하는 철학을 그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심정이 될까?
▲그림은 앙리 마티스의 탬버린과 함께 있는 오달리스크이다.
에피쿠로스는 세상이야 어찌 돌아가든 개인적 쾌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홍차에 마들렌을 적셔 입으로 가져가는 바를 삶의 접근으로 삼았다. 에피쿠로스뿐 아니라 검약한 삶을 추구했던 디오게네스나 키프로스 출신 제논의 스토아 철학이나 모두 이런 경향의 산물이며, 이는 일종의 시니시즘의 변형이었다. 명문 귀족의 딸이었던 히파르키아(Hipparkhia)는 누더기 옷을 걸치고 무소유의 철학을 논하는 크라테스(Kratēs BC 336 ~ BC 286)를 흠모하여 모든 지위를 내던지고 그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크라테스와 함께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움막에 쭈그리고 앉아 이를 잡거나 행인에게 구걸하며 평생 거지처럼 살았다. 이러한 시니컬한 사조에 비판의 소리도 높았다. 시피옹 에밀리언(Scipion Emilien)이라는 학자는 "사람들은 이제 희생정신이나 애국심, 행복을 추구하려는 진지한 노력 대신 이기주의와 개인주의에 만연되어 있으며, 이는 로마의 파국을 야기하는 위태로운 문제"라고 주장하였다. 그에게 개인 용도로만 사용하는 philosophy는 사회와 영혼의 파멸을 불러오는 이단이나 아편과 같은 것이었다.
견유학파에 속한 유닛들은 현실의 비루한 몰골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자긍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적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성욕을 포함하여 먹고 마시고 자는 삶의 욕구를 문명이 아니라 자연에 맞춰 배열했다. 그래서 소유를 내려놓고 가난해야 했고, 불결해야 했고, 대낮 공공연한 거리에서 개처럼 성행위를 나누기도 하였다. 크라테스와 히파르키아는 그런 삶을 추구했고 그렇게 살았다. 그들은 삶을 사는데 필요한 문명적 형식과 내적 위선을 죄악으로 삼았다. 크라테스와 히파르키아는 거리에서 사람들과 담론을 나누었으며, 아들이 사춘기에 이르자 홍등가에 데리고 가 성교육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일체의 어떤 문헌도 남기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풍문은 있으나 그들이 어떤 사상을 말하고 어떻게 말년을 보냈는지 나와 있지 않다. 가난하고 병든 노년에 이르러 그런 삶을 후회하였을까? 아마 죽을 때까지 그 노선을 고집스럽게 유지하였을 것이다. 크라테스나 히파르키아는 둘 다 명문가 귀족 출신이었다.
에피쿠로스도 자신의 철학이 오역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를 걱정하여 몇 편의 편지를 남겼는데, 에피쿠로스의 저술로 전해져 오는 것은 이러한 몇 통의 편지와 부분적인 문헌이 전부다. 에피쿠로스가 메네세에게 보낸 편지에 그는 자신의 철학을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모든 질펀한 감각적 기쁨을 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상위의 기쁨이 하위의 기쁨을 결정하고, 이는 선(善)의 차별을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의미 없는 것으로 여겨져서 그냥 지나쳐 버리게 되는 감각적 쾌락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또한 오랫동안 견뎌 온 고통이 쾌감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모든 기쁨은 그 고유한 본성으로 파악한다면 선(善)한 것이나, 모든 쾌락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괴로움은 악(惡)한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모든 괴로움을 무턱대고 피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찌되었던 간에, 유용한 것과 해로운 것을 비교해 보고 주의 깊게 관찰하여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때때로 선한 것을 마치 악한 것처럼 대하고 악한 것을 선한 것처럼 여기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어떤 문학이나 철학도 그 시대와 무관한 상태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역사적으로 오역되는 사상과 철학은 에피쿠로스뿐 아니라 마키아벨리, 홉스, 버클리, 포이어바흐 등 많지만, 그 진의를 해독하는 일은 바뀐 시대의 언어로 번역된 문헌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우리는 어떤 이의 사상과 철학을 우리 시대의 표지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으며, 이것은 그들이 그 시대에 체험한 내용이나 깊이, 오늘의 시대로는 헤아릴 수 없는 어떤 부분을 감추고 있는 것과 같다. 오역된 철학은 담론을 남겨줄 뿐이고, 어떤 진실도 책임지지 않는다.
기다려주지 않는 나날이다. 책장에서 Travels with a donkey라는 책을 꺼내 읽는다. 조용한 시간 아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수필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다. 35년 전 구입하여 누렇다 못해 타버린 듯, 한 쪽에는 영문이 다른 쪽에는 한글이 변색된 문고판을 넘길 때마다 조심스럽다. 그곳에 아직 세상을 모르던 내 청춘의 냄새가 입자처럼 피어난다. 남프랑스의 고원지대를 모데스틴이라는 암당나귀와 함께 여행한 기행수필인 이 작품은 스티븐슨의 자유로운, 마치 유목민이 저녁식사 시간에 모닥불을 다루는 듯한 문체를 느낄 수 있다. 인습적인 것, 당연한 것, 진부한 것들을 지겨워했던 작가적 성향이 드러나는 그의 수필은 쌉싸름한 흐린 날과 잘 어울리는 것이기도 하다.
호모 사피엔스의 욕망이란 본질적으로 자연 질서의 원리에 기초한 것이다. 따라서 선악과 무관하며, 다만 존재의 현상으로 드러날 뿐이다. 어느 사회나 선악은 비슷한 확률로 발생하며, 조건에 따라 감도(感度)가 다르게 나타난다. 역사를 통하여 인류학자와 사회학자, 생태학자, 그리고 정신분석학자들은 세계를 하나의 도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론을 모색하여 왔다. 그들 중 일부는 사회를 이루는 많은 동인(動因)과 작용에 주목하면서, 그것이 심리적인 필요를 만들어내고, 그에 의해 응집된 내적인 생산력이 복잡한 변화를 의도하였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그 반면 환경과 조건에 따라 사회현상이 결정되며, 그에 따라 인간이 구조되는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었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상반된 해석을 내놓는 견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富)와 지위, 그리고 권력과 성(性)에 의해 인간의 욕망, 혹은 사회 시스템이 움직여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으며, 이것이 인간사를 이해하는 도식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있다.
대개 삶의 부조리를 이루는 부분은 사회학자들의 설명만큼 정밀하지 않다. 그리고 정신분석학자의 노트에 그려진 특이한 삽화는 다수의 심리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오이디푸스콤플렉스를 분석한다고 하여 남자아이들이 모두 아버지와 경쟁적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경제구조에 따라 유닛의 성격과 내용이 달라진다고 하는 분석으로는 가난하지만 품격을 잃지 않는 예인(藝人)의 정서를 온전히 설명하지 못한다. 초인적 권력의지에 밑줄을 긋다보면 소시민의 삶이 하찮게 그려지고, 사랑을 세상의 진실로 그려놓으면 선악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정확한 판단을 요구하는 권력의 법칙이 무색해진다. 유닛 개개인이 체험하는 부조리는 학자에 따라 이러저러한 학문적 카테고리에 분류되지만 경험 당사자의 욕망과는 별다른 관련이 없다.
우리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지만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이 있다. 그 가운데 인간이 말이나 문자의 해독법을 배운 다음 선택의 자유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항이 있다. 해독이 가능한 소리와 글자가 등장하는 경우 유닛은 무조건 읽을 수밖에 없다. 그 내용에 동의하는가 하지 않은가 하는 문제는 이후의 문제다.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하는 시민은 운전기사가 틀어놓은 방송이나 눈에 보이는 간판이나 광고, 노조에서 붙여놓은 파업 관련 선전물 등을 그것이 필요하든 그렇지 않든, 진짜든 가짜든 듣게 되고 읽게 된다. 색이나 향이 인간의 정서를 내밀하게 건드리는 것과 같이 그것들이 얼마나 크게 작용하는지 사람들은 신경 쓰지 않는다. 언어를 사용하는 의식은 두뇌의 기능 가운데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의 두뇌는 인체가 소모하는 에너지의 ½~⅓을 혼자 단독으로 사용한다. 그만큼 하는 일이 많다는 뜻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일생동안 그가 경험하는 감각의 모든 자료를 두뇌에 일단 저장한다. 언제 어디에 필요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떠한 자료든 감각에 스친 것이라면 모두 기록되고 분류된다. 무심히 방영되는 드라마 대사나 순식간에 지나가는 장면, 어두운 복도에서 마주친 누군가의 복장이나 표정, 장거리 여행에서 읽은 주간지, 골목에 붙어 있는 구인광고와 전화번호, 때마다 바뀌는 영화 포스터, 놀이터 한쪽에 나뒹구는 포장지, 어린 날 어머니 손을 잡고 걸었던 길가 저편 모르는 사람들, 한 밤중 깨어난 후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꿈이나 시장에 흩어지는 잡담에 이르기까지, 심지어 감각에 그려지지 않는 영역이나 전쟁터 총알의 눈에 보이지 않는 궤적까지 이와 같은 모든 사항이 우리 두뇌에 저장된다. 믿지 못하겠지만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전장에서 경험 많은 노병이 엘리트 신참보다 더 오래 살아남는 것이고, 서양인이 아무리 한국의 창을 익힌다 해도 결코 그 맛을 넘어설 수 없는 것이며, 한국인이 아무리 재즈를 공부한다고 해도 흑인의 재즈보다 더 자연스러울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생의 모든 정보와 자료가 각기 다른 서랍에 기억된다. 다만 누가 어떻게 정리하는지 모르는 것뿐이다.
사람들은 특정한 유닛이 최면에 빠진 상태에서 전생의 기억을 진술하는 장면을 지켜보면 신기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그 진술의 대부분은 유닛 자신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 삶의 어디에서 경험한 자료를 가져와 그를 근거로 이러저러하게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그 유닛의 이쪽저쪽 서랍에 보관되어 있는 거의 무한대의 자료를 꺼내 어떤 스토리를 조합해내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그냥 마구잡이로 아무렇게나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모종의 작업이 제작되고, 알게 모르게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욕구, 특정한 사연에 붙잡혀 있는 유닛은 그에 해당하는 자료를 통하여 전생의 일을 마치 진짜인 것처럼, 윤회를 증거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얽어놓는다. 중요한 점은 우리가 그런 일이 왜 어디에서 만들어지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무엇이 매순간 우리 안에 쌓이고, 그것들이 어느 지점에 어떻게 작용할지 모른다. 대부분의 사람은 현실에서 선택과 행위를 내놓을 때 그것을 자신의 이성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이미 결정된 사항을 이성이 언어를 가져와 합리화하고 변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의 두뇌가 어떤 성능과 메커니즘으로 돌아가고, 어떤 일을 만들어내는지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 그러면서 자신의 행위와 의지는 진짜라고 생각한다.
체험이란 유닛에게 일관된 선택과 의지를 강요한다. 크라테스와 히파르키아가 명문가 귀족으로 자라지 않았다면 그 노선을 끝까지 지켜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 내면에 물질적 풍요가 인간을 얼마나 타락하게 하고, 어떤 이유를 만들어낸다고 하는 자생적 체험이 그들의 신념을 지탱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굶주림이 무엇이라는 것과 가난한 삶이 얼마나 처절한 것인가를 체험한 유닛이었다면 디오게네스 철학은 오히려 비웃음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좋은 집에서 물질의 풍요가 가져오는 이기(利己)와 문명의 부조리를 그 삶으로 체득하였고, 그렇게 형성된 어떤 욕구가 물질로는 채워질 수 없는 부분을 인간의 자연성과 원시적 순수성으로 채워지기를 원하였으며, 그 행위에 내적 자긍을 지니게 되었다. 그들은 스스로의 체험을 통해 스스로 진실을 만들어낸 것이다.
어느 사회나 그 사회의 관습과 전통, 문화와 의식은 엄존한다. 단위에 따라 단순하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한 이 패턴에 의해 여러 역학이 만들어지며, 세상의 다양한 페르시아 양탄자 무늬가 생성된다. 이 무늬는 집단표상과 같고 이를 중심으로 그 시대의 사상과 가치와 신념과 계급적 특권이 생산된다. “여성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시몬느 보봐르는 이야기하였다. 이 논제는 잘못된 논제다. 여성뿐 아니라 남자도 그렇게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19세기 여성이 오늘의 여성과 다른 것처럼 그때의 남성과 오늘의 남성은 다르다. 세상 모든 인간은 사회의 유행하는 모듈에 의해 유닛으로 제작되고 만들어진다. 집단표상과 구조가 의지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대개의 낮은 단위 유닛들은 자신을 뛰어난 유닛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의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며, 그런 조건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낮은 신분의 여자는 높은 신분의 남자 유닛의 성적 요구에 보다 친절하게 반응한다. 낮은 계급의 원숭이는 높은 계급의 원숭이에게 털고르기를 해주는 횟수가 더 많다. 털고르기는 원숭이 사회에서 의무가 아니라 감정이며 자유이다. 인사 잘하는 호모 사피엔스는 그 조직에서 그렇지 않은 유닛에 비해 사랑을 많이 받는다. 자연적 감정과 자유로운 행위에도 분명한 역학이 존재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배경을 갖는다.
인간의 사회 계층화(social stratification)는 많은 일을 만들어낸다. 이 현상은 인간이 사회적 단위를 이루고 있는 한 어떻게 할 수 없는 역학이고, 질서 대부분을 양산한다. 세상을 바꾸거나 뒤엎는 의지가 일어나도, 수백 번 허물고 다시 지어도, 강물이 수백 번 흘러도 구성원 이름표만 바뀔 뿐 마찬가지 비율과 메커니즘으로 조직되고 운영된다. 이 계층화는 인간의 질서 어디에나 있고, 모든 유닛을 대상으로 기립한다. 자크 라캉이 말하는 타자의 욕망은 구성원들이 조합하는 퍼즐의 역학에서 만들어진다. 각각의 타블라라사들이 시대의 퍼즐을 조합하는 현장에서 여기저기 사적 체험이 떠돌아다니고, 그것들이 비슷한 색조와 문향으로 물들 때 저절로 타자의 욕망이 조합된다. 그런 타자의 욕망과 함께 다른 유닛에게 복종을 강요하거나 질서에 편입시키는, 같은 편이 되거나 적으로 돌려놓고 무시하거나 함부로 할 수 있는 권리 또한 생산된다. 이 특권은 대단히 강력하다. 우리는 이러한 질서가 우리의 삶에 어떠한 영향력을 조직하고 행사하는지 정확히 설명하지 못하지만 누구나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털고르기나 인사하기와 같은 생체적 감정과 자유가 사회적 의무와 정확하게 맞물려 돌아가게 되고, 누구는 존중되고 누구는 무시할 수 있다고 하는 힘의 크기가 행위로 정교하게 변환되는 것이다. 웃기는 이야기이지만 높은 지위의 사람이 유치한 개그를 내놓을 때 일반 사람이 내놓을 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더 크게 웃는다. 암당나귀 모데스틴까지 스티븐슨을 우습게 생각하였다. 도시에서 생활한 그가 말을 듣지 않는 당나귀와 씨름하며 쩔쩔매고 있을 때 지나던 농부가 보다 못해 막대기 끝에 뾰족한 송곳을 달아 스티븐슨에게 건네주었다. 농부의 말대로 그 막대기로 모데스틴의 엉덩이를 푹 찌르자 그때서야 가엾은 모데스틴은 스티븐슨의 말에 순종하게 되었다. 유닛의 심리를 분석해보면 현재의 위상에 해당하는 역할이 어느 틈엔가 유닛 삶에 작용했음을 발견하게 된다.
자연의 모든 사물과 존재는 보다 나은 상태로 흐르는 경향을 갖는다. 이 경향은 운동이 있고 변화가 있는 한 모든 존재에게 동일하게 작용한다. 대부분의 유닛은 자신의 삶이 유용하기를 희망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자랑스러움을 느끼고자 하는 욕망은 유닛에게 고유의 식별 코드가 주어지면서 시작되었다. 남들이 불러주는 몇 글자 안 되는 이름에 자신의 정체성이 들어있다는 것을 이해하면서부터 남과 나를 구분하고, 자아의식을 지니며, 생물학적 욕망보다 사회적 욕망을 더욱 중요하게 다루게 된 것이다. 이름이 없다면 대부분의 유닛은 정어리 떼와 같이 집단정서로 행동한다. 그렇기 때문에 군중에 편입된 익명의 의지는 정체성을 잃고, 수마트라 섬에 사는 오랑우탄이나 검은 산양은 그 본능만으로 충분하게 된다. 내가 무리에 섞여 있어도 누군가 나를 구분하고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은 특별한 정서를 갖게 한다. 호모 사피엔스에게 생물학적 욕망과 사회적 욕망은 다르다. 생물학적 욕망은 다른 유닛의 기쁨에 관심이 없다. 오직 자신의 기쁨에만 관계하고 그에 집착하고 반응한다. 그러므로 생존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이름을 버리면 되고, 이름을 버린 유닛은 다른 유닛과 아무 것도 거래할 수 없게 된다.
기형도의 마음에 절그럭거리는 목소리는 이름을 가진 유닛의 사회적 욕망이 그에게 울부짖는 소리다. ‘너도 무엇이 되어야 하지 않겠니?’라고 묻는 소리다. 이름을 지닌 유닛은 대부분 이러한 소리를 듣는다. 이 소리를 듣고 욕망은 자신의 존재에 납득할 수 있는,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항을 찾아 이리저리 기웃거린다. 그리고 어느 부분에 어떤 기여가 되었다고 느낄 수 있는, 그것이 중요하든 그렇지 않든, 일단의 항목들에 달라붙고, 그것으로 내적 자긍을 동그랗게 도려낸다. 주연이든 조연이든 주어진 역할이 있고, 그것이 유용한 것이라면 스스로의 존재의미를 동그랗게 도려낸 답으로 대신한다. 기대했던 것보다 작게 도려낼 때도 있고,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 또한 현상이고 체험이다. 생물학적 욕망과 사회적 욕망은 접경지대에서 체험과 현상을 두고 충돌하고 갈등한다. 그러므로 이 욕망은 강한 위상을 지향하는 니체적 권력의지나 성(性)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리비도나 유전자를 전하려는 생존기계의 의지와는 다르며 그것들에 별다른 관심이 없다. 굳이 되지도 않을 슈퍼맨을 흉내 낼 필요가 없고, 아무에게나 무작정 달라붙어 상처 입을 이유도 없다. 현실에서 마주해야 하는 문제는 그보다 훨씬 난해하며 리얼하다. 호모 사피엔스는 대부분 우리 생각보다 영악하며 슬기롭다.
사람들은 유닛마다 모두 무한에 가까운 무분별한 욕망을 지닌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오는 유닛에게 그가 표시한 만큼의 땅 소유권을 준다고 하는 문학에서는 인간이 지닌 극복할 수 없는 욕심 때문에 심장이 터져 죽는다고 표현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유닛은 극히 드물다. 대개의 유닛은 해가 지기 전까지 돌아올 수 있을 만큼의 땅을 지혜를 동원해 가늠하고 정교하게 고려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유닛은 해가 지기 전에 분명히 돌아와 적정한 땅을 수령한다. 뒤늦게 도착하여 아슬아슬하게 소유권을 얻지 못한 몇몇 유닛이 있고, 그 뒤에 심장이 터져 죽는 극히 드문 유닛이 있다. 문학이나 언론에서는 심장이 터져 죽은 유닛이 그럴 듯 하고 더 자극적이며, 더 많이 팔리기 때문에 그렇게 조명되고 기사화되는 것뿐이다. 자신의 능력이 어디까지 오를 수 있고, 어느 부분에 끌리며,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다고 하는 지혜는 성장하는 동안 사회를 통해 배우고 익힌다. 그 과정에 자신이 유용한 소용이고 나름의 기여가 된다고 하는 만족감은 훌륭한 감정이 된다. 그러므로 남들이 보기에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열정을 지니고 최선을 다할 수 있고, 터무니없는 일에 매달려 일생을 낭비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모든 행위의 수원(水源)은 스스로의 삶이 유의미한 것이기를 희망하는 노력에서 나온다. 이름을 가진 자의 숙명이고, 사회적 욕망을 더 중요하게 다루어야 하는 유닛의 소임이다.
세상은 브라흐마가 모종의 의지와 함께 반죽하는 커다란 덩어리이다. 이 커다란 덩어리에 수만 가지 요인들이 서로 뒤엉켜 반죽되는 것이다. 그 가운데 여러 항목이 배합되고, 선악이 만들어지고, 자유와 강제가 엉켜지며, 우연과 필연이 달라붙어 의지가 구조를 만들고, 구조가 의지를 규정하며, 그렇게 규정된 의지가 구조를 만들어내는 원리가 된다. 자유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기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행위하는 것이 아니다. 호모 사피엔스는 유닛 마음대로 아무렇게나 행위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다. 인간이 만들어진 이유는 생존이 아니라 그것을 뛰어넘는 유용한 무엇을 위한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본능 위에 의식을 만들어 호모 사피엔스 내면에 넣어둔 것이다. 아무렇게나 마음대로 행위하라고 넣어둔 것이 아니다.
어느 단위나 조건이 있다. 그 단위에 좌표로 떨어진 무엇이 있다. 생존의 좌표만 던져진 단위에는 처연하고 참혹한 질서가 있고, 권력이 좌표로 떨어진 무대에는 비정이 있으며, 부와 명예가 좌표로 떨어진 지대에는 위선과 거짓이 있고, 재능과 예술이, 또는 지혜와 학문이, 그리고 전쟁과 배신과 거짓말이 그 삶의 좌표로 떨어진 곳에는 거칠고 험한 힘겨운 노력이 있다. 모든 단위에는 해당 단위에 필요한 좌표가 떨어지고, 유닛은 그 좌표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고 노력한다. 그리스 철학이 지상이 아니라 천상을 목적으로 무지로부터, 거짓으로부터, 정념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자 노력한 것은 그렇게 하는 유닛이 그 단위의 사회적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러한 활동이 사회적 특권을 획득할 수 있는 유의미한 좌표로 인식되었다는 뜻이다. 그런 행위를 많이 보유하고 깊이 터득한 유닛이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그것이 사회적 특권을 보증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그 단위에서 그쪽으로 걸어간 것이다.
에피쿠로스나 크라테스가 그들의 철학을 사회에 내놓은 것은 그 단위에 해당 목록이 가치라고 하는 좌표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며, 그런 좌표가 사람들의 존경을 얻어내리라는 기대가 있기에 그렇게 행위하는 것에 불과하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면 그런 철학이 만들어졌을 리 없고, 판매되었을 리 없다. 사회구성원으로부터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내 행위가 유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도장을 찍어줘’라고 요청하는 것과 같고, 그런 도장을 많이 획득하면 할수록 내적 자긍을 체험하게 되며, 스스로 자랑스러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적 자긍이란 자신의 존재이유에 대한 만족감을 뜻하지만, 뒤집어 살펴보면 그 뒷면에 그렇지 못한 유닛을 경멸할 수 있고, 무시할 수 있으며, 모욕할 수 있는 라이센스를 포함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회적 특권인 것이다. 사회적 특권이란 타인으로부터 존중받을 수 있는 권리를 뜻하며, 이것은 다른 유닛을 하찮게 여기며 비웃거나 무시할 수 있는 권리와 동일한 것이다. 동전의 양면이다. 유닛에 따라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 하더라도 내면에는 그런 역학이 얼마든지 그려질 수 있고, 온화한 얼굴로 사랑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힘의 크기에 따라 달라진 위상을 눈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도움을 주는 유닛은 도움을 받는 유닛보다 상위에 위치하게 되고, 다른 정서적 서열을 지니게 된다. 위상이 권리를 만들고 권리가 정서를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특권에는 루소의 주장처럼 사회적 불평등이 달라붙어 있다. 이 불평등은 인간의 삶에 본질적으로 관계한다. 루소는 “인간의 동의에 의해 정해지거나 정당화되거나 관습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도덕적, 정치적 불평등은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손해를 입힘으로써 향유할 수 있는 특권을 이루고 있는데, 예를 들어 부자라든가, 존경을 받는다든가, 권력을 가지고 있다든가, 혹은 복종을 받을 수 있는 지위에 있다든가 하는 특권에 기초한 불공정”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특권은 생물학적으로 발생하는 불공정과는 다른 양상의 질서를 생산하는 사회적 율법이 된다.
견유학파의 자긍심은 이 특권에 의해 지탱되었다. 무소유를 실천하려는 유닛의 욕망은 그들이 죄악으로 여겨 배척하는 문명적 혜택과 부와 영예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유닛의 이기적 상술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그들의 욕망도 역시 사회적 특권을 향한 욕망과 동일한 성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즉 부와 권력과 영예를 획득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취급당하지 않는 방편이 되는 동시에 사회적 위상을 높여주고, 낮은 유닛을 내 기조에 따라 무시하거나 다르게 취급할 수 있는 특권을 소유하게 됨과 아울러 특별한 만족감을 얻어내는 것과 같이 견유학파의 철학과 의지 그와 똑같은 특권을 얻는 방편으로 사용하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본질은 같은 것이다. 겉 포장지는 다를지 모르지만 그 내용은 동일한 성분이고, 동일한 제품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예술이나 문학을 사랑한 모든 유닛의 노력도 마찬가지이며, 권력을 욕망하는 행위와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찾아가는 노력 또한 모두 같은 것이다. 진실과 정의와 선(善)의 깃발을 휘두르는 모든 유닛과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예인과 진리를 내걸고 순교한 유닛의 신념 모두, 이익을 추구하거나 금광을 찾아다니는, 한 명의 관객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큰 북을 등에 짊어지고 거리를 행진하는 서커스 단원의 욕망과 똑같이, 이 모든 욕망은 하나의 원리 한 통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일체의 문명적 형식과 내적 위선을 내던진 디오게네스와 크라테스 역시 마찬가지이며, 크라테스를 사랑한 히파르키아 역시 마찬가지이다. 좌표가 의지를 만들고, 의지가 좌표를 만드는 법이다. 고급 욕망이라고 다르지 않고 저급 욕망이라고 다르지 않다. 사회와 시대에 따라 종목은 다르지만 인간의 사회적 욕망은 같은 원리에 의해 작동한다. ‘내가 유용한 것이라면 도장을 찍어줘’의 원리와 ‘너도 무엇이 되어야 하지 않겠니?’의 질문이 그것이다. 이러한 원리가 욕망을, 타인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고, 그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는 동시에 그들을 무시할 수 있고 경멸할 수 있는, 삶의 소용에 만족하는 훌륭한 정서를 만들어내는 통로에 밀어 넣는 것이다. 내적 자긍과 함께 다른 유닛보다 높은 평가를 받음을 기뻐하고, 낮은 단위의 유닛을 바라보며 그 삶을 경멸하거나 연민하는, 즉 그들을 함부로 할 수 있는 사회적 특권이 하나의 욕망으로 뭉뚱그려지는 것이다. 사회적 욕망은 복잡해보여도 결국 사회적 특권을 얻기 위한 노력으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유닛의 입장에서 정상적인 통로가 막혀있다면 비정상적인 통로라도 찾아내야 하며, 정상보다 비정상이 더 빠르거나 손쉬운 것이라면 그 확률에 베팅하게 되는 것이다. 비정상에 베팅하는 유닛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그 권역은 험한 곳이고, 적나라한 불행이 생산되는 잘못된 세상인 것이다. 사회적 특권은 복합적이며 중의적(重義的)이다. 화가란 자신의 그림을 돈을 받고 파는 유닛을 뜻하며, 가수란 돈을 받고 노래하는 유닛을 뜻한다. 그 가운데 관절염 통증을 견디며 가죽 끈으로 손을 묶어 무슨 소명처럼 그림을 그리는 이가 있는가 하면, 말초적 자극 외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그런 그림도 있고, 진심으로 노래하는 이도 있으며, 재능으로 노래하는 이도 있고, 돈으로 노래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모두 원리는 같은 것이다.
유닛이 지니고 있는 기쁨의 종류는 평균분포도 안에 분포한다. 그것들은 오래 전 어느 마법사에 의해 기쁨으로 기표되었다. 그리고 어느 때부터 유닛마다 고유의 이름을 갖게 되자 게임의 양상은 마법사가 의도한 것과는 달리 굉장히 난해해졌다. 생존만을 고려해 기표해둔 기쁨이 지혜로운 행위를 낳았고, 옳고 그름과 가치와 의미, 예술과 철학과 자본주의와 물리학과 우주망원경과 인공지능까지 제작해내었다. 마법사가 처음부터 이러한 그림을 의도했는지 그것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유닛 고유의 식별 코드가 주어졌기 때문에 해당 유닛이 더욱 최선을 다해 노력하게 된 것은 분명하며, 더욱 세차게 채찍을 휘둘러 대담하고 거대한 역사를 만들어낸 것 또한 확연하다. 이 노력이 네트워크 전체를 역동적으로 조직하고 운동하게 하였으며, 활발하게 거래하게 하였고, 인간의 정신적 유전자를 기념하게 하였다. 다소의 잡음과 갈등이 있을 수 있으나 이러한 시스템은 전체적으로 진화의 연대기에 성공적으로 적응한 호모 사피엔스의 창조적 작품에 이르게 하였으며, 대부분의 유닛으로 하여금 삶을 긍정하게 하고, 비교적 높은 확률에 존재이유를 걸고 베팅에 참여하게 하였다.
거스를 수 없는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이나 예술가들이 그들의 작업에 몰두하는 이유는 그들이 국가와 역사에 특별한 사명감을 지니고 있어서가 아니라 해당 시대의 유닛으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사회적 특권을 얻기 위한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노력이 만인을 위한 소용으로 확장된 것이다. 플라톤이나 예수나 주원장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회적 욕망이 이와 같다. 특정한 항목에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생물학적 욕망과 달리 사회적 특권을 얻기 위한 욕망은 부와 지위, 권력과 성(性)을 비롯한 허다한 것으로 자신의 사적 욕망을 충족하고, 사회적 위상을 높임과 아울러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양탄자 아래 무늬와 결부되어 시스템이 잘 돌아가도록 기여하는 작용이 되는 것이다. 문학을 비롯한 모든 예술적 노력 마찬가지이며, 엘리트로 선발되어 경제를 다루고, 수학을 다루며, 과학과 스포츠를 다루는 각자의 재능을 발휘하는 모든 유닛의 집념과 의지 역시 마찬가지이다. 개인의 사적 욕망을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가 모여 결국 사회의 자기조직화를 구축하고, 브라흐마의 세상 만들기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영광이 되며, 그로 하여 자신의 존재이유에 훌륭한 답을 제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나만 행복하면 되고, 나만 만족하면 그만이라는 냉소적 욕망은 스스로 내민 문서에 자기 도장을 찍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니시즘이나 은둔주의는 스스로 고립을 자초할 뿐이며, 이러한 사조가 팽배한 단위는 거의 모두 조용히 사멸하거나 외침으로 몰락하였다. 부(富)와 지위, 그리고 권력과 성(性)은 보기에 거칠고 흉해 보일지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모든 분야에 유닛의 유의미한 행위를 촉발하고, 단위와 단위를 네트워크하여 만인의 욕망과 노력을 거대한 시장으로 끌어당기는 동인이 되는 것이다. 이 모든 거대하고 정교한 사회 질서는 유닛 개인에게 고유 식별 코드 하나가 주어진 때로부터 시작되었다. 유닛에게 이름이 없다면 이러한 메커니즘은 한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어느 시대나 그 시대, 그 분야의 유닛으로부터 어떻게 해야 존경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중심 좌표가 있고, 그 좌표에 반(反)하는 새로운 좌표와 몇몇의 좌표들이 장르별로 떠돌아다닌다. 호모 사피엔스는 자신의 고유코드를 지니고 있는 한 그 내면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에서 가장 추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편도체 기능이 잘못된 극히 일부 유닛을 제외하고 자신의 삶이 유용하기를 희망하는 본원을 어쩌지 못한다. 바둑에는 승패와 무관하게 필연의 수순이라는 것이 있다. 그 수순이 아니면 안 되는 수순이 있고, 그것이 최선이기 때문에 양쪽 대국자 모두 그 수순을 필연으로 따르게 된다. 나는 진화의 역사를 돌아볼 때마다 필연의 수순을 떠올리게 된다. 자기복제가 가능한 어느 물질이 우연의 바다에 우연한 확률로 생겨나고, 어떤 무한의 노력이 오랜 시간 보다 복잡한 기관으로 진화한 다음, 바다에서 땅으로, 생태사슬이 만들어지고, 파충류가 나오고 포유류가 나오고, 호모 사피엔스가 나오고, 언어가 나오고, 서로의 이름을 부르게 되고, 이름을 부르자 이전과 다른 세상이 펼쳐지는, 이러한 과정은 나에게 필연의 수순 외에는 달리 설명되지 않는다. 생물학자들은 우연을 이야기한다. 어떤 설계도 없다는 것이다. 필연의 수순은 다른 말로 하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을 뜻한다. 저절로 그런 수순이 생겨나 어느 하나도 생략될 수 없는 필연의 진행이 생겨나는 것이다. 기적도 없고 마법도 없다. 우리가 아직 알지 못하는, 세상이 열리는 그때 방향을 세우고 확률을 세워둔 모종의 뜻에 따라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그러한 필연의 수순의 결과이며, 그 수순을 밟고 있는 진화유기체에 불과하다. 우리는 그러한 성능을 지니고 각각 부(富)와 지위, 권력과 성(性), 학문과 예술, 신(神)과 조국, 사랑과 비즈니스 등과 같은 항목이 떠다니는 일생의 긴 통로를 생존을 짊어지고 걸어가는 것이다. 그 여정 여기저기에 이것이야말로 너의 생존에 유용한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어느 체험이 카탈로그를 흔들어대면, 그 카탈로그에서 그림과 문자들이 파동처럼 퍼져 나와 그것들이 사회적 욕망과 행위의 등을 떠밀게 되는 것이다. 사회 계층화는 그 아래 유의미한 삶을 비원(悲願)하는 유닛의 노력과 행위를 무한히, 인류의 역사가 끝나는 날까지 쉬지 않고 만들어낸다.
무엇이 옳은가에 대해 나는 결론을 내릴 수 없다. 세상은 브라흐마의 작업대 위에서 네 개의 얼굴과 네 개의 손으로 만들어진다. 이 시대에 옳은 일이 있고, 저 지평에 마땅한 일이 있다. 내 나름의 생각을 지니게 되었지만 이 생각 또한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만들어진 것인지 모르는 일이고,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체험이라고 모두 진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거짓된 체험도 부지기수다. 젊은 피에 생명이 들어있다고 믿었던 어느 백작부인(Erzsebet Bathory 1560 ~ 1614)은 잘못된 체험 하나 때문에 수백 명의 어린 처녀를 살해하기도 하였다. 칸트는 찬 공기로 호흡하면 죽을 병에나 걸리는 것처럼 야외에서 절대 입으로 호흡하지 않았다. 어려서 어느 의사가 찬 공기는 몸에 좋지 않다고 충고해준 탓이다. 배우나 가수는 과거에 천시되었던 직업이었다. 무대나 스크린에 펼쳐지는 모습은 그럴듯할지 모르지만 그 뒤의 삶은 적나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가수란 돈을 받고 노래하는 사람을 뜻한다. 과거에 그런 재능을 지닌 유닛은 거들먹거리는 박수를 받고 부자들이 쓰고 남은 재물을 얻어 그것으로 생활하였다. 예쁘장한 여배우나 가수는 때로 모르는 사내의 술잔에 술을 따르기도 하였다. 고흐의 그림은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이 되었다. 그 ⅛에 해당하는 값만 있었더라도 그는 사랑하는 동생에게 생활비를 부탁하며 힘겹게 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무엇이 비정한 것인가는 내가 말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나는 그런 자격이 없다.
앙리 마티스의 그림에는 삶의 쾌감이 묻어 있다. 나체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여인의 얼굴에서, 한쪽으로 기운 붉은 색과 마티스 특유의 푸른색에서 삶에 대한 기쁨이 느껴진다. 마티스를 비롯한 당시의 진보적 인사들은 살롱에 모여 야수적 축배를 들었다. 앙드레 드랭, 앙리 마티스, 키스 반 동겐 등의 술잔에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기쁨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삶을 억압하는 사회적인 모든 것에 저항한다는 의미에서 원색을 선호하였으며, 그것은 인간의 영혼과 진실, 인격과 존재를 싸구려 취급하는 자본주의에 대한 항의의 뜻을 담은 것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가난한 이의 정서가 순수하다는 것을 믿었고, 그 염원이 그들로 하여금 왜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 설명할 수 있게 하였다. 어느 시대나 지식인은 사회적 정당성을 문제 삼지 않을 수 없고, 올바른 질서를 요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아름다운 가치와 진실을 그려낼 수밖에 없다. 이것이 그들의 존재이유를 설명하기 때문에 그렇고, 그렇게 해야 자신의 행위로부터 유용한 기여가 되었다고 하는 답을 동그랗게 도려낼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들이나 우리나 삶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회의 필요한 모듈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며, 이것은 한 시대의 유행이 끝나고, 불이 켜진 뒤에도 여하한 진실로 남는다.
누군가 나에게 세상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제시해야 하지 않겠냐고 하였다. 그에 대해 나는, 내가 코멘트할 내용이 아니라고 답해주었다. 알렉산드로스가 열 세 살이던 때 철학과목을 가르친 스승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당시 식탁에서 비싼 향신료인 후추를 함부로 낭비하는 것을 보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를 불러 혼낸 적이 있다. 나중에 알렉산드로스는 후추를 생산하는 나라를 정복한 후 그 만찬장에서 그때의 일을 신하들에게 들려주며 유쾌하게 웃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를 더 어린 나이부터 자신이 교육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다. 요즘과 같은 시대에 나와 같이 아직도 철학을 붙잡고 있는 유닛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sang1475@naver.com
*필자/푸른달빛 방인상.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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