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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善若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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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4. 18. 8:15
老子(노자)님의 道德經(도덕경) 第八章(제
8장) 上善若水(상선약수) 草書體(초서체)
1.上善若水(상선약수)
가장 착한 것은 물과 같다
2.水善利萬物而不爭(수선리만물이부쟁)
물은 착하여 우주만유의 모든 생명을 이롭
게 하면서도 다투질 않는다.
3.處衆人之所惡(처중인지소오)
뭇 사람들이 다들 싫어하는 곳에서도 지낸
다.
4.故幾於道矣(고기어도의)
그러므로 거의 참 그 자체라 할 수있다.
5.居善地(거선지)
머물기는 착하도록 땅에 살며
6.心善淵(심선연)
마음 씀은 착하도록 연못 같이 깊고
7.與善仁(여선인)
주기는 착하도록 널리 어짐으로 주고
8.言善信(언선신)
말은 착하도록 믿음으로 하고
9.政善治(정선치)
다스림은 착함으로 올곧게 다스리고
10.事善能(사선능)
일은 착함으로 다 이룸에 능하고
11.動善時(동선시)
움직임은 착함으로 때에 맞춰 움직이어
12.不唯不爭(부유부쟁)
그저 오로지 다투질 않으니
13.故無尤(고무우)
그래서 허물이 없음이라.
(살핌글)
老子(노자)님이 물을 擬人化(의인화)하여
宇宙萬有(우주만유) 物質生命(물질생명)의 絶對的(절대적) 生命水(생명수)인 물의 德
性(덕성)과 效用性(효용성)을 밝히신 말씀
으로 사람도 물처럼 살아야함을 일깨우시
는 말씀이다.
물은 造物主(조물주)로부터 받은 자신에게
주어진 일만 誠心(성심)으로 하는 使命感(
사명감)에만 衷心(충심)을 다하여 낮고 낮
은 곳인 아래로만 흘러가는 것으로서 宇宙
萬有(우주만유)의 모든 物質生命(물질생명
)들을 살리는 生命水(생명수)가 되고 모든
더러운 것들을 말끔히 씻어주고 닦아주면서
도 한없이 낮고 낮은 곳으로만 낮아진다는
것만 사람들이 본받는다면야 누가 저 잘났
다고 뻐기고 꺼떡거리며 모가지 힘줄이 불
거지도록 곧추세우고 나댈 것인가 말이다.
물의 六德(육덕)이 있기를
하나가, 언제나 낮은 곳인 아래로만 흘러가
는 謙遜之德(겸손지덕)이고
둘이,막히면 군말없이 돌아가는 슬기로움의
智慧之德(지혜지덕)이고
셋이,구정물도 똥물도 다 받아 품어 흐르는
抱容之德(포용지덕)이고
넷이,네모든 세모든 원형이든 어떤 그릇이
던 투덜대는 까탈없이 그릇모양에 맞춰서
그데로 다 담기는融通之德(융통지덕)이고
다섯이,돌도 깎고 바위도 뚫어내고 쇳덩이
도 부식케 하는 忍耐之德(인내지덕)이고
여섯이,끝내는 흐르고 흘러 마지막終着處
(종착처)인 바다에 이르는 大義之德(대의지
덕)이 그 것이다.
사람들은 날마다 물을 마셔야만 살 수가 있
지만 물의 소중함도 고마움도 모르고 물을
먹으면서도 감사할줄 모르고 무덤덤한게 일
상적이다.
사람 몸이 地水火風(지수화풍)의 四大(사
대)로 구성 성분의 70% 이상이 물인데도
물의 고마움을 모른체 사는 것이다.
물의 고마움을 안다면 물처럼 남을 이롭게
하고 물처럼 낮아지고 물처럼 다투질 않아
야 그나마 물의 고마운 은혜에報答(보답)이
아니겠는가
貴族出身(귀족출신)의 白爵(백작)으로 傲
慢(오만)하기로 불려졌던 레흐 톨스토이가
56세때 老子(노자)님의道德經(도덕경)을
읽고 老子(노자)81장중 그중에서도 8장의
上善若水(상선약수)를 가장 좋아하여 자신
의 일기장에 옮겨 써놓고서 덧붙인 글에 있
기를
★본보기로 삼아야할 것은 노자가 말한 물
이다.막히지 않았으면 물은 흐르고 둑이 있
어 막히면 물은 멈출줄 알고 둑이 뚫리면 물
은 다시 새어 흐른다. 물은 네모 그릇에 담
기면 네모가 되고 둥근 그릇에 담기면 둥글
어진다. 그래서 물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
우면서도 가장 강하고 귀한것이다.★
톨스토이가 살던 러시아는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교를 正敎(정교)라고 하여 귀족들
만의 체면치레의 종교였기에 톨스토이도 好
色放宕(호색방탕)하고傲慢不遜(오만불손)한 빈쭉정이 가라지믿음이었
다가 老子(노자)님의道德經(도덕경) 말씀
에 감화되고 大悟覺省(대오각성)하는 인연
을 맞았고 그런 후로 著述(저술)에 심혈을 기울여 쓴 著書(저서)들이 *인생론* *나의 신앙의 요체* *復活(부활)* *錄悔錄(참회
록)* 같은 不朽(불후)의 名作(명작)들을 執筆(집필)하여 人類(인류)의 永遠(영원)한
追仰(추앙)을 받는 大文豪(대문호)가 된 것
이 아니겠는가
老子(노자) 道德經(도덕경)을 읽기 전까지
의 톨스토이는 貴族(귀족) 白爵(백작)이란
허울을 핑계삼아 오로지 몸뚱이 짐승성질의
貪瞋癡(탐진치) 三毒(삼독)에 종질로 사는
맛에취해 갖은 罪業(죄업)을 저질르며 술과
享樂(향락)에 쪄들어 살던放宕兒(방탕아)
였지만 上善若水(상선약수)를 만남으로 悔
心(회심)의 轉機(전기)가 되어 舊習(구습)
을 말끔히 벗고 하나님의 성령을 참나로 거
듭나는人子(인자)로의 復活(부활)을 體得
(체득)하여 짐승사람에서 참으로 사람의 자
식인 人子(인자)로 하나님 아들의 본자리를
돌이키신 것이라 할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老子(노자)님의 말씀을 읽고
보지만 톨스토이처럼 다 거듭나는 것은 아
닐터이니 톨스토이야말로 높이 우러를만 하
다할 것이다.
皇室(황실) 貴族白爵(귀족백작)이란 허울
인 겉옷을 벗어던지고 루바시카란 農民服
(농민복)으로 갈아입고 賤民(천민)인 農夫
(농부)로 나섰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老子(노자)님 보다 수백여년 뒤에 오신 예
수님은 물을 하나님의 永生生命(영생생명)
이신 聖靈(성령)에 比喩(비유)하여 말씀 하
시기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아버지 나 라에 든다고 하셨으니 물이 곧 영생생명의
씨인 사람의 심령성전에 臨在(임재)해 계시
는 성령을 참나로 거듭나는 人子復活(인자
부활)을 가르치신 말씀이 아닌가
물은 곧 形而下(형이하)의 몸뚱이 肉身生命
(육신생명)의 絶對的(절대적)인 生命水(생
명수) 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의 形而上(형이
상)의 말씀으로는 하나님이 사람 심령 속에
넣어주신 하나님 생명 씨인 靈生命(영생명)
이 되는 것이다.
老子(노자)님의 모든 말씀도 하나 같이 形
而下(형이하)의 짐승인 獸子(수자)에서 人
子(인자)로 기필코 거듭나야 할 것을 譬喩
(비유)로 예수님보다 앞서서 다 말씀을 하신
가르침이신 것이다.
인도의 聖子(성자)로 불리는 간디의 날마다
의 冥想(명상)이란 글에 물에대한 말씀이 있기를*Ganga 강은 사람들 마음 속에 흐
르고 있는 것인데 사람들은 그물에 몸과 마
음을 씻지도 않고 멀리 있는 Ganga 강까지
가서 흙탕물에서 沐浴(목욕)을 하며 죄씻김
받기를 所望(소망) 하고 죽어서는火葬(화장
)한 재까지 강가강에 뿌리는헛된 迷信(미신
)인 巫俗信仰(무속신앙)인 샤머니즘에 종질
하는 寒心(한심)한 헛짓거리라 하였다.
이런 짓거리의 샤머니즘엔 오늘 날의 信仰人(신앙인)들도 믿음의 根幹(근간)이 몸뚱
이 肉身所慾(육신소욕)에 보탬이 되길 바라
는 바램이 터럭 끝 만큼 이라도 있다면 다를
바가 없이 다 샤머니즘의 헛된 가라지로 빈
쭉정이의 가증한 믿음일뿐인 것이다.
예수님이 十字架(십자가) 刑(형)틀에 못박
혀 처참하게 死刑(사형)에 처하신 것이 人
類(인류)의 罪(죄)를 贖罪代贖(속죄대속)
키 위한 代贖救援(대속구원)의 犧牲祭物(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려졌다며 유대교의
贖罪代贖救援(속죄대속구원)이란 祭祀宗
敎(제사종교)의 犧牲祭物(희생제물)로 쓰
였던 짐승을 예수님을犧牲祭物(희생제물)
로 遁甲(둔갑) 시킨 자들이 바로 하나님을
잘 믿는다던 제사장과 서기관과 율법학자 였던 종교최고지도자 그룹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레위인들이 아니었던가!
예수님께선 각각의 사람이 저마다 스스로 몸맘의 나를 자신의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 십자가를 짊어지고 자신의 心靈聖殿(심
령성전)에 臨在(임재)해 계신 성령을 참나
로 깨어 거듭나서 人子(인자)가 되어야만이
예수 자기를 따를 수가 있고 아버지 나라에 든 다고 말씀하셨건만 예수님 말씀은 못알 아 듣고 십자가 대속 구원이란 유대교의 제 사종교로 도로아미타불이 된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의 민낯이요 駭怪(해괴)하고도 寒心
(한심)한 實像(실상)이 아닌가
믿음을 빌미 로 몸살림의 잇속 챙기느라 하나님을 팔아 쳐먹는데 이골이난 것들이 성전 문턱을 뻔 질나게 드나든들 무슨 소용 이랴.
나라고 거들먹이고 꺼떡대며 내세우길 좋아
하는 我執(아집)의 그 잘난 我(나아)자를 破
字(파자)해보면 手(손수))+戈(창과)로 合
成(합성)된 會意文字(회의문자)로서 사람
이 날카롭게 잘 벼루어진 槍(창창)을 손에
꽉 움켜 잡고 뭔가를 찔러 죽이려고 攻擊準備(공격준비)를 完壁(완벽)하게 갖추고 잔뜩 緊張(긴장)한체로 앞을 뚫어지게 凝視(응시) 하고있는 그런 뜻을 담고있는契字(글자)로 사람들이 나라고 내세우고 固執(고 집)하는 나가 바로 이런 나인 것이니 이런 나란 自我(자아)가 시퍼렇게 날이선 칼날처 럼 꼬누고 天方地軸(천방지축)으로 설치고 나대서는 온전한 사람 행세도 못할 뿐 아니 라 올곧은 참믿음도 焉敢生心(언감 생심)의 허튼 假飾(가식)이 아니런가
맘이 몸뚱이의 심부름만 하는 머슴질로 산
다면 이건 겉모습만 사람이지 실은 짐승새
끼보다도 더 못한 醜惡(추악)하고 惡辣殘
忍(악랄잔인)하고 뱀처럼 狡滑(교활)한 貪慾(탐욕)에 미쳐 發狂(발광)하고 날뛰는 最惡(최악)의 인두껍을 뒤집어쓴 下等(하등) 의 짐승일뿐이라 할 것이다.
붓다님.예수님.老子(노자)님.莊子(장자)님
孔孟(공맹)등의 모든 聖賢(성현)들의 말씀
가르침의 核心(핵심) 속고갱이는 하나 같이
짐승성질의 몸뚱이 貪慾心(탐욕심)에 종질
하며 我執(아집)에 끄달려 살아가는 몸맘의
나인 自我(자아)를 말끔히 죽이고 심령 밭
에 臨在(임재)해 계신 하나님 씨인 성령을
참나로 깨쳐 聖靈復活(성령부활)로 人子(
인자)로 거듭나 짐승에서 사람이 되라는 한
말씀을 서로 다른 표현으로 가르치신 말씀
으로는 한 점 다름없이 똑 같은 말씀이다.
물은 여여히 쉼없이 흐르고 흐르며 자기의
받은 소명을 한 마디 말도 없이 묵묵히 흘러
가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사명을 남김없이
다 하는 默言說法(묵언설법)의 가르침을 행
함으로 認識(인식)한다면 어떨까도싶다.
붓다님이 어느날 영산 법회에서 꽃 한송이
를 사부대중들에게 들어 보이시곤 한 말씀
도 않으시고 默言法會(묵언법회)를 하시고
說法(설법)을 마치신 일이 있었기로 그때 大衆(대중)들은 모두가 부처님이 꽃 한 송 이만 들어 보여 주시고 법회를 끝내신 默言
說法(묵언설법)에서 손에 들어 보여 주셨던
그 꽃의 의미를 알아채질 못하여 다들 疑訝(
의아)해 했는데 다만 맨 뒤에 서있던 제자 가섭은 알아 들었는지 환한 微笑(미소)로서 붓다님과 눈빛을 마주하며 和答(화답)을 했
다 하여서 拈華微笑(염화미소)란 佛家(불
가)의禪宗用語(선종용어)가 되었다고 전해 져 오는데
그러면 弟子(제자) 迦葉(가섭)이 알아 들었
다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붓다님이 꽃송이를 높이 들어 보이신 것은
꽃을 보라는 것이 아니고 그 꽃을 들어 보여
줄 수 있는 虛空(허공)의 텅빈 빔을 보라는
默言(묵언)의 가르치심임을 迦葉(가섭)만
알아 들었고 대중들은 아무도 알아 듣질 못
한 것이다.
無限宇宙(무한우주)의 시작도 끝도 없이 텅
텅 비어있는 빔을 보는 것으로 사람에게도 무한우주도 넉끈히 담고도 남을 그런 무한 한 빔의 마음이란 그릇이 있는데도 그게 五欲七情(오욕칠정)의 感覺(감각)과 感情(감
정)에 종노릇으로 살아가는 自我(자아)를 참나로 잘못 알아서 바늘 하나도 꽂을수 없
을만큼 비좁아 터질 지경이 되었으니 이젠 말끔히 몽땅 다 내다 버리고 텅텅 비워서 본
래의 무한한 빔을 돌이켜야 한다는默言(묵
언)의 가르침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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