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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끝까지 깨부수어 비우고 새로운 나를 시작하는 일[글로벌생명학] 9 : 사람의 주인은 얼이다 본문
나를 끝까지 깨부수어 비우고 새로운 나를 시작하는 일
[글로벌생명학] 9 : 사람의 주인은 얼이다
2020-09-21
이기상 edit@catholicpres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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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간 하루 한 끼만 먹고, 자동차를 타지 않으며 두 다리로 생활한 사람이 있다. ‘칠성판’이라고 하는 죽음의 널판자에서 자고, 먹고, 읽고, 사색하고 사람들을 맞으며 생활하다가 밤이 되면 다시 칠성판에 누우면서 “이제 나는 우주와 하나가 된다” 라며 죽음을 맞이한 사람. 그가 바로 “식사(食事)는 장사(葬事)다”라고 설파하면서 인류의 모든 문제는 식(食)과 색(色)에 달려 있다고 외친 다석(多夕) 류영모(柳永模)(1890~1981)이다. 다석은 지구 위의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더불어 살 수 있는 삶의 원칙을 찾는 데 일생을 바친 사상가다. 그의 주장대로 산다면 21세기 인류가 안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다. 그의 삶처럼 하루 한 끼니만 먹고 걸어 다니면서 살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정신과 가르침에서 암울한 이 시대를 헤쳐 나갈 삶의 지표를 발견할 수 있다.
생명(生命)에 관한 두 가지 시선
보통 생명을 이야기할 때 학자들이 필수적인 요소로 들고 있는 것이 영양섭취[신진대사]와 자기복제[생식작용]이다. 먹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생명체란 없다. 개체생명보존을 위해서 영양섭취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생명이 ‘낱생명’일 뿐이라면 생명의 사건은 진작 끝났을 것이다. 낱생명은 태어남과 죽음으로 테두리 쳐진 유한한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낱생명은 살아 있는 동안 자기와 비슷한 후손들을 생산해내서 생명의 줄이 이어질 수 있도록 힘쓴다. 종족생명보존을 위해서 짝짓기를 통한 생식작용은 필수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영양섭취[식(食)]와 생식활동[색(色)]을 배제하고 생명을 이야기할 수 없다.
그런데 이것은 생물학적 차원에서 다루어지는 생명이야기다. ‘생명(生命)’은 본래 그 낱말의 뜻이 ‘살라는 웋일름[하늘의 뜻]’으로서 그 말 속에는 다른 차원이 함축되어 있다. 다른 외국말과는 달리 우리말 ‘생명’에는 생물학적 차원 외에 형이상학적 차원이 담겨 있다. 그것은 명(命)의 차원으로서 천명(天命)과 성명(性命)을 가리킨다. 다석은 생명의 신비를 몸과 얼[정신]로 느꼈다. 겉사람[몸]은 흙 한 줌이요, 재 한 줌이다. 그러나 얼로서의 참나는 지구를 통째로 싸고 있는 호연지기(浩然之氣)의 나다. 다석은 생명이라는 현상을 ‘몸을 살라 하늘의 명[뜻]을 성취하는 사건’으로 보고 있다. 다시 말해 생물학적 차원의 식과 색을 버려야만 하늘의 뜻을 따르는 참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낳아서 죽는 것은 몸이요, 죽어서 사는 것은 얼이다. 몸으로서의 내가 죽고 얼로서의 내가 한얼과 하나가 되는 것이 나의 삶의 본디 의미인 것이다.
삶이란 끊임없이 나를 사르는 것
우리말 ‘사람’이라는 말은 ‘삶’에서부터 나왔다. ‘삶’은 ‘살다’에서 나왔다. 그리고 ‘살다’는 ‘사르다’에서부터 나왔다. ‘사르다’, ‘살다’, ‘삶’, ‘사람’으로 이어진다. ‘사르다’는 일종의 기운을 사르다, 그리하여 열을 내다, 에너지를 사르다, 열을 돌려서 힘을 만든다 등을 뜻한다. 열돌이와 힘돌이가 사르는 것이다. 인간만이 사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다 사르는 삶을 이어간다.
▲ Antoni Tapies < Untitled (Flame and Mirror) >
이렇듯 ‘산다’는 것은 따지고 보면 ‘불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을 사르기 위해서는 바람이 필요하다. 이 바람을 다석은 얼김 또는 숨김[숨님]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보통 호흡을 통해서 숨을 들이마시고 내쉰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호흡의 주체는 우리가 아니다. 잘 살펴보면 숨김이 우리의 몸 속으로 들어왔다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들숨날숨’이라고 말한다. 보이지 않는 생명의 숨김이 낱생명 안으로 들고나지 않는다면 모든 생명체는 숨이 막혀 죽을 수밖에 없다. 사람은 숨쉬면서[호흡(呼吸)하면서] 산화(酸化)작용을 하며 생명의 불꽃을 일으킨다. 이러한 얼김과 숨김이 일으키는 사름 속에서는 숨만 통하는 것이 아니라 말[말숨]도 통하고 생각[뜻숨]도 통하고 신[얼숨]도 통한다.
낱생명이 사는 살림이란 물질을 번제(燔祭)드려(불살라서) 그 피어오르는 불꽃으로 우주의 생명사건에 참여하는 것이다. 사람이 섭취한 식물도 결국은 피로 피고야말 꽃이요, 불꽃이다. 한 사람이 가진 적혈구가 24조 개로 피어 돌아간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은 꽃바다며 불꽃바다다. 만물의 끝으로 된 이 피(에너지)가 불꽃 곧 번제다. 그 불꽃을 반드시 위로 올라가는 꽃내(향기)로 씌워서 살라야, 사람이 사름, 말씀을 사름, 불을 사름이 된다.
몸살이와 말숨살이
사람은 일생동안 9억 번 호흡한다. 그런데 숨은 코로만 쉬는 것이 아니다. 정신으로도 숨을 쉰다. 정신의 숨이 생각이다. 사람의 숨 쉼은 동물의 숨 쉼과는 다르다. 거기에는 하느님의 숨쉼이 겹쳐 있다. 다석은 “생명이란 하느님의 숨어 쉼”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사람의 살림살이는 단순히 먹고 자식을 낳는 몸살이로서 끝나서는 안 된다. 몸을 사르며 위로 올라가는 생명의 향기를 피우는 참생명의 꿈틀거림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깊은 생각 속에 말 건네오는 하느님의 마루뜻[宗旨]을 귀 기울여 듣고, 그것을 사람의 말로 잡아서 세우고[=말슴], 그 말을 써서[=말씀] 하느님의 뜻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사명을 다하는 말씀[말숨]의 살림살이를 해야 한다.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말씀이 곧 하느님이다. 우리 생명은 목숨인데 목숨은 말씀하고 바꾸어 놓을 수 있다. 공자를 『논어』와 바꾸어 놓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에게 생각이 끊이지 않고 말씀이 끊이지 않는 것은 누에가 실을 뽑는 것이다. 그리하여 목숨이 말씀 속에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인생이다. 누에는 죽어야 고치가 된다. 죽지 않으려는 생각은 어리석은 일이다. 실을 뽑았으면 죽어야 한다. 죽지 않으려는 억지 마음은 버려야 한다. 죽지 않으려고 하지 말고 실을 뽑아라. 집을 지어라. 생각의 집, 말씀의 집, 사상의 집을 지어라.” (류영모, 『씨알의 메아리. 다석어록.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박영호 편, 홍익재, 1993, 177/8.)
‘말씀을 산다’ 또는 ‘말숨을 쉰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계속 이어나가는 문화를 창조한다는 뜻이다. 목숨의 차원에서 인간은 자연적인 삶을 이어나가지만, 말숨의 차원에서는 문화창조를 이어나간다. 다석은 목숨을 가지고 나를 사는 것을 탐하면 그것은 얼빠진 사람이며 거짓 삶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삶을 가지고 천명을 완성한 사람은 참사람이요 진실이다. 그러기에 우리의 목숨은 말숨으로 바뀌어야 된다. ‘공자’가 ‘논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목숨으로서의 공자는 죽고 말숨으로서의 논어가 살아남아야 한다.
‘말숨살이’는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늘의 뜻을 찾아 세워서 그 뜻과 일치해 살기 위해 몸살이 차원의 삶을 끝내고 뜻살이(얼살이)의 삶을 시작함을 말한다. 이것이 새로운 삶의 기본이다. 깨끗이 끝내고 새로 시작하는 것이다. 나를 끝까지 깨부수어 비우고 새로운 나를 시작하는 것이다. 몸으로서의 나를 끝낼 수 있을 때 비로소 얼로서, 뜻으로서 나를 채울 수 있다. 공자가 논어가 될 때 목숨이 말숨을 쉬고 말씀 속에 들어가게 된다. 공자는 논어를 지음으로 인해 하느님의 말(마루)을 씀 속에서 사라져간 것이다.
식사는 장사(葬事)다
다석은 얼나로서 얼살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다. 탐욕과 성냄 그리고 음욕이라는 세 가지 못된 욕망의 뿌리를 근원부터 뽑아버리고 하루 한 끼만 먹으며 25년간의 결혼(結婚)을 해혼(解婚)으로 풀고, 40여 년간 금욕생활을 한다.
다석은 “우리의 입이란 열린 무덤이다. 식물, 동물의 시체가 들어가는 문이다. 식사(食事)는 장사(葬事)다”라는 충격적인 말을 남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 그것이 동물이냐 식물이냐의 차이는 있지만 ― 모두 생명체다. 우리 자신이 살기 위해서 먹는 식사라는 것이 다른 생명체들의 죽음이라는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매 끼니가 장례식인 것이다. 내가 살기 위해서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죽이고 있다. 그렇기에 다석은 “식사는 장사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모든 생명체가 지구 위에서 평화롭게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와 같은 장례식을 될수록 적게 치러야 한다. 그것을 실천하기 위해서 다석은 하루 한 끼니만[一日一食] 들었다. 그러면서도 다석(1890~1981)은 91세까지 장수하였다.
하루 한 끼니만 먹을 경우 나머지 두 끼니 때 나는 내 몸과 내 살을 먹는 셈이 된다. 그것은 내 몸을 제물로 바치는 산 제사나 다를 바 없다. 그래서 다석은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께 예배드리는 극치는 하루에 한 끼씩 먹는 일이다. 그것은 정신이 육체를 먹는 일이며 내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 Eugene Delacroix < Monk at Prayer >
다석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밥을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는 십자가에 자기를 바쳤는데, 이때 ‘바쳤다’는 말은 밥이 되었다는 말이다. 밥이 되었다는 말은 밥을 지을 수 있는 쌀이 되었다는 의미다. 쌀이 되었다는 말은 다 익었다는 뜻이다. 성숙하여 무르익은 열매가 된 것이다. 인생은 무엇인가? 무르익는 것이다. 제물이 되는 것이다. 밥이 되는 것이다. 밥이 될 수 있는 사람만이 밥을 먹을 자격이 있다.
“밥 먹고 자지 말고, 밥 먹고 깨어나도록 밥을 먹어야 한다. 밥은 제물(祭物)이다. 바울은 너희 몸은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한다. 우리 몸이 하느님의 성전일 줄 아는 사람만이 능히 밥을 먹을 수 있다. 밥은 하느님께 드리는 제사이기 때문이다. 내가 먹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 내 속에 계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밥을 먹는다는 것은 예배요, 미사다. 내가 먹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제물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다석에 의하면 인생의 목적은 제물이 되는 것이다. 인생이 밥을 먹는 것은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 내 힘으로 먹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수많은 사람의 덕으로, 대자연의 공로로 주어져서 먹는 것이다. 밥이 되기까지에는 태양빛과 바다의 물과 그 밖의 온갖 신비가 총동원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밥은 우리가 거저 받는 하느님의 선물인 줄로 알아야 한다. 인생뿐만 아니라 일체가 하느님에게 바쳐지기 위한 제물이다. 일체가 밥이다. 다석은 인생이란 밥을 통해 우주와 세상이 얻는 영양은 무엇일까 묻는다. 그것은 곧 말씀이라고 답한다. 인생이란 밥에는 말씀이 있다. 성령의 말씀이 있다. 온 인류를 살리는 우주의 힘이 되는 성령의 말씀이 있다.
인생은 밥을 먹고 육체를 기르고, 이 육체 속에 다시 성령의 말씀이 영글어 정신적인 밥인 말씀을 내놓을 수 있는 그런 존재다. ‘식사는 장사며 제사’의 정신으로 이 세상을 산다면 76억 인류의 더불어 삶은 큰 문제가 될 게 없다. 너무 먹어 키운 몸집 빼느라 치르는 ‘살과의 전쟁’이 아니라 욕망의 끈을 조이며 먹을 것을 나누는 나눔과 섬김의 살림살이만이 우리의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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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사람의 주인은 얼이다: 다석 류영모의 생명사상>, 『경향잡지』 2012년 9월호에 실린 칼럼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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