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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본성적으로 녹색 자연 속에서 안정을 찾는다[글로벌생명학] 7 : 생명사랑으로 지구와 연대하자 본문
인간은 본성적으로 녹색 자연 속에서 안정을 찾는다
[글로벌생명학] 7 : 생명사랑으로 지구와 연대하자
2020-09-07
이기상 edit@catholicpres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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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에 빼앗긴 동심
요즘 아이들은 온종일 디지털 기기에 둘러싸여 살아간다. 직장생활과 집안 살림에 바쁜 어른들은 아이들이 조용히 혼자 노는 것을 그냥 내버려둔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이 텔레비전, 컴퓨터, 인터넷, 게임 등과 보내는 시간은 점점 늘어만 간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에 따르면, 2018년을 기준으로 우리나라 만 6세 이상 국민의 90.9%가 스마트폰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디지털 기기는 우리 삶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2017년 기준, 중·고등학생의 스마트폰 보유율은 93% 정도이며 이 청소년들이 하루 평균 7시간 20분 동안 스마트 기기를 이용한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발표한 '2019년 스마트폰 과의존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청소년 3명 중 1명이 스마트폰 중독상태라고 한다. 특히 유·아동과 청소년은 부모가 스마트폰 과의존 위험군이거나 맞벌이 가정일 때 과의존 위험군일 확률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 Pawel Kuczynski < Good Morning >
현대는 디지털 미디어를 기반으로 하는 초연결 사회(hyper-connected)다. 누구나 온라인 접속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한 정보 접근이 가능하다. 모든 생각과 경험을 SNS를 통해 타인과 곧바로 나눌 수도 있다. 덕분에 멀리 있고, 얼굴도 잘 모르는 디지털 대중과 친구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정작 살을 맞대고 몸을 부대끼며 서로를 알아가고, 자연과 교감하는 생물학적 소통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20년 전만 해도 많은 청소년들이 동네 공터에서 공을 차며 놀거나 공원에서 자전거를 타거나 들로 소풍을 가거나 물놀이를 하는 등 야외에서 다른 아이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들을 보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식으로 야외에서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은 전체의 10퍼센트도 안 된다고 한다.
나에게는 열살 손자가 있다. 손자는 두 돌도 되기 전부터 스마트폰을 놀잇감으로 삼았다. 어린 손자가 가장 좋아하는 건 뽀로로 애니메이션이었는데 어디선가 주제가나 동영상이 나오면 몸을 흔들고 응얼거리면서 가사를 따라하려고 노력했다. 며느리는 손자가 보채거나 짜증을 내면 스마트폰으로 뽀로로를 틀어주었다. 그러면 손자는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은 다 잊고 영상에 몰두했다. 그러다 아예 스마트폰을 자기가 챙겨 들고 다니면서 엉덩춤을 추며 좋아하곤 했다. 이렇게 우리의 아이들은 세상을 알기 전에 먼저 전자 미디어와 더불어 시간 보내는 법을 배운다. 자연과 교감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기 전에 전자기기와 더 친해진다.
부모들은 자기 아이들에게 야외가 위험한 장소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고 일러준다. 낯선 사람들과 이야기해서는 안 되고, 개나 고양이로부터는 나쁜 병이 옮아올 수 있으니 만지거나 가까이 가서는 안 되고, 흙이나 풀 속에는 알지 못할 병원균들이 많으니 그런 것들 갖고는 놀지 말라고 당부한다. 이렇게 되어 자연과 자연 속에 있는 생명체는 어린이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질 수밖에 없다.
학자들은 이렇게 자연에서 멀어진 아이들은 커가면서 ‘자연결핍장애(nature-deficit disorder)’를 겪게 된다고 우려한다. 자연결핍장애란, 디지털 스크린에 매달려 엄청난 시간을 보내면서 3차원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실제 세계에서 멀어져 가는 현상을 말한다. 전문가들은 아이들의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가 이것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많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아이들이 점점 자연과 멀어지면서 ‘경험의 멸종’에 이르게 되는 것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높아가고 있다. 자연세계와 접촉하는 시간이 계속 줄어들면서 아이들이 자연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되고 그래서 결국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기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런 아이들은 자연의 생명체들과 교감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과 소통하지 못하는 차갑고 메마른 도시인으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자연과 사람 사이에 놓인 ‘생명의 길’
2020년 우리나라 5천백만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도시인들에게 그들의 꿈과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그 대답은 대체로 비슷하다. 공기 좋고 물 맑은 시골에 조그만 집을 지어 뒤뜰에는 채소를 심고 마당에는 개와 고양이, 닭을 키우며 풀벌레 소리와 벗하며 살고 싶다고.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 백년 살고 싶어. 봄이면 씨앗 뿌려 여름이면 꽃이 피네. 가을이면 풍년 되어 겨울이면 행복하네.” 요즘 트로트 열풍으로 다시 인기를 얻고 있는 남진의 <님과 함께>는 시골을 등지고 떠난 도시인들의 꿈을 노래하고 있다.
내가 시골 괴산에 살았을 때 주말이면 손자가 놀러왔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어 주뼛주뼛 뒤로 빼더니 조금 지나자 처음 보는 모든 것이 신기한지 눈이 초롱초롱해지며 그 특유의 ‘우와’라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마당에 앉아 돌을 하나둘 정성들여 바구니에 담기도 하고, 할머니와 함께 마당에 자란 잡초를 열심히 같이 뽑기도 하고, 수돗가에 가서 물을 손으로 받으며 거품이 이는 것을 신기한 듯 바라보기도 한다. 산책길에 꽃에 앉은 나비를 보고도 ‘우와’하며 감탄한다. 발밑으로 지나가는 개미를 발견하곤 잡아보고 싶어 고사리같은 손을 오물거린다. 괴산호의 유람선 위에서는 배 밑에 희게 뻗어가는 물살을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에 잠기기도 한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시원한 공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진한 녹색으로 단장한 주변 풍경을 감상하며 함께 심호흡을 하곤 했다.
손자는 낮잠도 자지 않고 긴 하루를 자연 속에서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괴산의 옛길을 걸으며 보이지 않는 생명의 연대 속에서 생명을 충전하며 즐겁게 지냈다. 저녁나절이면 차가 밀릴 것에 대비해 아들이 서울로 올라갈 채비를 서둘렀다. 짐을 다 챙겨 싣고 며느리가 손자를 뒷좌석에 앉히고 문을 닫자 손자 녀석은 갑자기 놀란 표정으로 울음을 터뜨렸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자기랑 같이 차를 타지 않은 것을 눈치 채고는 ‘같이, 같이’하며 운다. 고 조그만 눈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손자 녀석은 발버둥을 치며 ‘같이, 같이’를 연신 외친다. 도착했을 때의 서먹함은 간 데 없고 이제는 같이 가자고 울며 매달린다. 자연 속 생명의 기운과 더불어 다섯 식구가 모처럼 하나가 된 듯했다. 아이를 달래던 애 엄마가 부지런히 스마트폰을 꺼내 뽀로로 영상을 틀어준다. 손자는 언제 그랬더냐 싶게 배시시 웃으며 뽀로로 노래와 영상에 빠져들었다. 자연인에서 도시인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인류의 역사는 ‘어머니 대지’와의 교감
인간은 지구에 살기 시작한 이래 90퍼센트 이상의 기간을 수렵과 채집을 하며 자연을 삶의 터전으로 삼으며 살아왔다. 나름대로 자연을 알고 자연을 다스리며 살기 시작한 농경과 목축의 시대는 고작해야 1만 년이 넘지 않는다. 그러다가 근대를 거치면서 자연을 완전 정복하기에 이르렀고 지금은 지구를 벗어나 다른 녹색항성을 찾아 우주를 개척하러 나섰다. 21세기 인류는 시골에 사는 사람보다 도시에 사는 사람이 더 많은 ‘도시인’으로 진화했다.
그런데 진화론적 관점에서 좀 더 깊이 살펴보자면 현대의 도시인은 인류의 총체적 진화과정 중 한 부분에 불과하다. 모든 개체 발생은 종족 발생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인간 개개인의 발생적 전개과정이 종으로서의 인간 진화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그 과정을 반복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정자와 난자가 만나 수정란이 되어 엄마 뱃속에서 아홉 달 있다가 세상에 태어나 기어 다니며 지내다 일 년 지난 뒤쯤 걷기 시작하고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말을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낸다. 유치원에 들어가면 남들과 어울려 함께 사는 법을 배우기 시작하고,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조금 더 큰 사회 속에서 법과 질서를 지키며 공동 생활하는 법을 익힌다. 사춘기를 겪으면서 기존의 체제와 질서에 의문을 던지고 반항하면서 세상을 배워간다. 성인이 되면 나름대로 확고한 자아관을 확립해가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사는 방식을 터득한다. 자신의 일 속에서 보람을 찾고 새로운 가족을 이루면서 책임감을 키워나간다. 그렇게 장년과 중년을 거쳐 인생의 노년에 접어들며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고 삶의 의미를 되새기며 죽음 뒤의 일을 걱정한다. 이렇듯 70~80년의 삶의 과정에는 2백만 년에 걸친 인류의 모든 역사가 녹아 있다. 그 긴 시간 동안 인간의 삶을 유지 보존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토대는 자연과의 공존이었다.
2백만 년 간 인류는 자연을 삶의 텃밭으로 삼아 자연에 의지하며 살았다. 자연의 주기와 계절 변화에 맞춰 매일의 삶을 조정하며 살아 왔다. 지구 위의 다른 생물들은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수렵과 채집을 하던 시절과 농사를 주로 하던 시절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어머니 대지’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인간은 어머니 대지에 경외감을 가졌고 사랑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자연존중과 생명사랑은 이렇게 긴 세월을 거치며 인간의 본성으로 각인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녹색 자연 속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는 성향을 지녔고 자연과 교류하려는 선천적 욕구를 지녔다.
생명사랑과 지속가능한 지구촌
세계적인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자연과 교류하려는 선천적 욕구가 있다. 윌슨은 그것을 ‘생명사랑(biophilia, 生命愛)’이라고 이름한다. 그는 녹색 자연에서 느끼는 인간의 공통적 안정감과 평안함은 우리의 생물학적 존재 안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우리 몸이 생명 친화적인 연결감을 유전적으로 기억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근의 연구결과를 보면 창밖으로 나무, 초록이 짙고 탁 트인 풍경, 연못 등을 보는 환자는 그렇지 못한 환자보다 더 빨리 건강을 회복한다고 한다. 나 역시 대장암 수술을 받고는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 살면서 빨리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다.
윌슨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생명체의 존재를 우리 자신의 존재처럼 느낄 정도로 그들과 감정적으로 동질감을 느낀다고 한다. 살아오면서 다른 생물에게 공감의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겠는가? 땅바닥을 기어 다니는 개미를 보고 쓰다듬어 보려고 하고 꽃들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를 보며 신기한 듯 좇아가 잡아보려는 손자의 행동은 이러한 생명사랑의 발동인 셈이다. 우리는 날개를 다쳐 퍼득이는 참새를 보며, 피나는 다리를 핥고 있는 고양이를 보며 연민의 정을 느낀다. 우리는 이들 생명체에서 같은 지구 위에서 살아가는 동료임을 공감하는 생명의 신비로움을 느낀다. 우리는 이들 생명체 속에 담긴 생명의 본질적이고 고유한 가치를 마치 우리 자신의 것인 양 인식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교감과 공감을 통해 우리는 동료 생명체들에 대한 연대감을 표현한다.
5월 22일은 유엔이 정한 ‘생물다양성의 날’이다. 환경오염으로 인한 생태계 파괴,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로 인한 생물서식지의 파괴 등으로 해마다 150종의 생물들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인간중심의 경제[살림살이]가 자연과 생물들에게 미치는 돌이킬 수 없는 훼손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다. 생산성 증가와 이윤창출만 있으면 그것으로 국민총생산이 늘어나고 경제가 성장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렇게 자연을 파괴하고 생물들을 멸종시키는 것이 결국에 가서는 우리의 살 자리를 파괴하고 우리의 숨길을 죄는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1993년 유엔은 생물다양성이 우리의 살길임을 천명하며 생물다양성의 날을 만들었다. 이제 인간중심의 경제가 아닌 지구중심의 경제를 펼쳐야 한다는 데 어느 정도의 공감대가 형성된 셈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연존중과 생명사랑이 우리 동아시아인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우리 한국인 삶의 길라잡이였던 불전은 오래 전부터 생명사랑을 이렇게 가르쳐 왔다.
“모든 흙과 물은 다 나의 옛 몸이고 모든 불과 바람은 다 나의 진실한 본체이다. 그러므로 항상 방생을 하고 세세생생 생명을 받아 항상 머무르는 법으로 다른 사람도 방생하게 해야 한다. 만일 세상 사람이 축생을 죽이고자 하는 것을 보았을 때는 마땅히 방편을 써서 구호해 괴로움을 풀어주어야 한다.” (『大正藏』 제24책)
우리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모든 존재를 돌보고 보살펴야 할 자연과 생명의 살림지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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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생명 사랑과 지구와의 연대 >, 『경향잡지』 2012년 7월호에 실린 칼럼을 수정 보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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