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20세기 성자’로 불리는 인도철학자 라마나 마하리쉬 ‘참나’의 의미와 실체 본문
‘20세기 성자’로 불리는 인도철학자 라마나 마하리쉬 ‘참나’의 의미와 실체
인문학의 모든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로 귀결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책과 강의로 유명한 인도 철학자 라마나 마하리쉬(Ramana Maharshi, 1879~1950)는 ‘20세기의 성자’로 추앙받고 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진 오쇼 라즈니쉬(Osho Rajneesh, 1931~1990)나 지두 크리슈나무르티(Jiddu Krishnamurti, 1885~1986)와는 결이 다르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큰스승'(大師), '바가반', '아루나찰라의 현인'이라고 불리며 비이원론(非二元論, Advaita, Non-Dualism)과 마야(Maya, 無明: 인도 경전 『우파니샤드』에서는 세상이 연극 무대처럼 진짜 집이 아니고, 잠시 머무는 곳이기 때문에 환영幻影과도 같은 것이라 하고 이를 마야라고 하는데, 우주의 본체이며 창조의 근원인 브라흐만이 만들어놓은 그물망이라고도 하고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도 함)에 대하여 샹카라(Śaukara, 788~820: 8세기 인도 철학자로서 남부 인도에서 출생하여 베다를 학습하고 유행자로서 여러 지방을 편력하면서 다양한 기적을 행하였음. 불이이원론不二二元論을 주창)와 같은 견해를 가졌는데, 이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 침묵으로 영향을 주었으며 진리를 찾는 방법으로 '비차라(Vichara, Self-enquiry: 진아 탐구)를 권하였다.
인도 남부 마드라스 마두라이의 중류층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나 신비주의와 종교에 관한 서적, 특히 인도 남부의 시바파 성자들의 전기와 중세의 신비주의 시인 카비르의 전기를 읽었다. 그는 세계가 창조될 때 시바 신이 오늘날 순례자들의 성지가 되어 있는 아루나찰라 산의 불기둥 속에서 솟아나왔다는 전설을 듣고, 아루나찰라 산에 마음을 빼앗겼다. 17세 때 갑자기 죽음의 공포를 심하게 느끼고, 가만히 드러누운 채 몸이 딱딱하고 차가운 시체로 변해가고 있다고 상상했다.
그는 처음에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다"(neti-neti)라는 전통적 수행법에 따라 자아탐구를 시작했다. 그는 ‘나는 누구냐?’라고 스스로 묻고 ‘나는 육체가 아니다. 육체는 결국은 썩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정신도 아니다. 두뇌는 육체와 함께 썩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인격도 아니고 감정도 아니다. 인격과 감정도 역시 죽음과 함께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도대체 ’나는 누구인가?’라고 깊은 의문을 가졌다. 그 깊은 자아에의 탐구는 그를 초월하는 의식상태로 이끌었는데, 희열을 느끼는 이 상태를 힌두철학에서는 '사마디'(samādhi) 즉 삼매(三昧)라고 부른다. 그는 이후 고향 마을을 떠나 아루나찰라 산으로 가서 수행자가 되었으며, 그 후 인도에서 가장 젊은 구루의 한 사람이 되었다.
라마나 마하리쉬에게 크게 감명 받은 영국 철학자 폴 브런턴이 『인도의 신비를 찾아서(My Search in Secret India)』라는 책을 발간하자, 동서양의 많은 사람들이 라마나 마하리쉬의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방문하였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죽음과 악은 '비차라'로 쫓아 버릴 수 있는 환상일 뿐이며, '비차라'를 실천하면 참된 자아인 진아(眞我, Atman, True Self)를 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삶과 죽음이 되풀이되는 윤회에서 벗어나려면 '비차라'를 실천하거나 박티(헌신과 신애)를 실천하면 된다고 하였으며 이 두 가지가 같은 결과로 이끄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설하였다. 라마나 마하리쉬의 저서들은 『나는 누구인가』외에 『있는 그대로』, 『라마나 마하르쉬와 대담』 『라마나 마하리쉬 전집』 등 다수가 있다.
또 다른 인도 철학자 오쇼 라즈니쉬의 본명은 라즈니쉬 찬드라 모한으로, '축복받은 스승'을 뜻하는 '바그완 시리' 라즈니쉬로 불렸다. 말년에는 이름을 '오쇼'로 바꾸었다. 철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자발푸르대학에서 9년간 철학교수로 재직하다 본격적인 영적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삶의 허구와 진리의 세계, 존재의 본질을 꿰뚫는 깊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한 명강의로 전세계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의식혁명과 깨달음의 세계를 열어 보였다.
미국에서도 가르침을 폈으며, 1990년 인도로 돌아와 세상을 떠났다. 1960년대부터 행해진 강의는 400권이 넘는 책으로 출판되어 나왔으며 30여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국내에서는 『배꼽』의 저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밖에 『깨달음으로 가는 일곱 단계』, 『달마』, 『마하무드라의 노래』 등 많은 책들이 출판된 바 있다.
인도 바라문 가문 출신인 지두 크리슈나무르티는 명상가. 철학자, 강연가로서 활동하면서 신지학 협회에서 '세계의 교사'로 발탁되었다. 별들의 교단이라는 유럽의 식자층으로 이루어진 단체에서 세계의 교사로 선출되지만, 스스로 이를 거부하고, 이후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이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강연했다. ‘관찰자는 관찰대상이다’라는 방식으로 명상을 지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는 새롭고 날카로운 표현 방식으로 명상을 지도한 것이기에 그 가치를 인정할만하다. 그러나 그가 신랄하게 기존 명상계의 가르침들을 비판하고 부정한 것에 비해 내용적으로 그는 기존 명상가들과 다를 바 없는 가르침에 머물렀다.
먼저 불교와의 연관성을 고려해볼 수 있다. 관찰자는 관찰대상이라는 말을 통해 그가 전하고자 한 바는 결국 '순수한 관찰'인데, 이는 위빠사나에서 MBSR(Mindful Based Stress Reduction: 알아차림 명상에 기반해 스트레스를 감소시키는 프로그램)로 이어지는 가장 대표적인 명상법들(바라보기, 관조, 마음챙김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어짐)과 맥락이 같다. 위빠사나의 핵심이 바로 분별없는 ‘순수한 관찰’이기 때문이다. 물론 명상지도의 표현방법에 있어서는 크리슈나무르티가 훨씬 세련되게 진화한 것이 사실이다.
또 힌두교의 불이원론 전통과의 연관성도 고려할 수 있다. 이는 라마나 마하리쉬의 자아탐구법, 니사르가닷따 마하라지의 명상법과 같은 맥락이다. 오히려 불교보다 힌두교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는 관점도 있다. 왜냐하면, 불교는 관찰 대상(관찰자 포함)을 개념이 아닌 법(고유성질을 지닌 것)으로 해체해서 보는 것이 핵심이지만, 여타 명상법은 대상으로 삼은 개념에 집중하는 데 그치기 때문이다. 어떤 명상법도 불교처럼 무상, 고, 무아를 꿰뚫어 아는 통찰지를 강조하지 않는다. 사실 불교 명상법도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 기존 명상법과 같아져서 '마음의 여여함'에 빠져버린다. 즉, 대아니 진아니 하는 삿된 견해에 빠지는 것이다.
라마나 마하리쉬의 명저 『나는 누구인가』의 주요 내용
라마나 마하리쉬의 명저(名著) 『나는 누구인가』는 영성인들이라면 공부해야 할 필독서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에 대한 가차 없는 혹평을 즐겨하던 오쇼 라즈니쉬조차도 "몇천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분", "붓다나 예수와 같은 존재"라든지 "내 평생에 마하리쉬를 직접 만나뵙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로 인도 현자(賢者)들 사이에서도 궁극의 스승으로 존숭되고 있다.
마하리쉬의 말씀을 기록한 여러 저서들이 있지만, 그 중에 대표적으로 『나는 누구인가』가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제자들이나 방문객들과의 대화를 받아 적어 만든 기록문이다. 책의 내용은 대체로 이렇다.
영적 수행의 진정한 목표는 ‘나’의 소멸에 있다. 아무리 자신을 분리시키려 해도 이 ‘나’는 언제나 끊임없이 다시 나타나곤 한다. 따라서 이 ‘나’를 도저히 없애 버릴 수 없다고 판단되거든 ‘나’로 하여금 ‘종’으로서 남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 마음의 세계를 벗어나야만 참나(眞我)를 깨달을 수 있는데 그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아탐구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헌신의 길이다. 헌신의 길은 자기의 모든 것을 절대자, 즉 신에게 완전히 맡겨 버리고, 마음 즉 에고와는 전혀 타협하지 않음으로써 마음이 사라지도록 하는 길이다. 마하리쉬는 내가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자아탐구'와 '헌신의 길'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자아탐구를 통해 '내가 누구인지' 알려고 노력해봤지만 역부족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면 '헌신의 길'이 남았다. 헌신이란 바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다. 절대적인 헌신과 지혜는 본질적으로 하나다. 복종과 탐구는 다른 이름을 가진 똑같은 과정이다.
‘나라는 생각’이 모든 생각의 뿌리이기 때문에, 마음은 결국 ‘나라는 생각’일 뿐이다. ‘나라는 생각’의 탄생이 곧 한 개인의 탄생이며, ‘나라는 생각’의 죽음이 그 개인의 죽음이다. 그릇된 자아를 버리는 것이 진정한 출가다.
진정한 출가란 욕망과 애증과 집착을 버리는 것이다. 그릇된 자아를 버리는 것이 진정한 출가라고 한다면 과연 출가한 사람은 몇 명이니 될까? 자기 일생을 온전하게 신에게 맡길 수 있는 사람은 또 몇 명이나 될까?
완전한 복종을 하기 위해서는 그대 자신의 욕망이 전혀 없어야 한다. 그대는 신이 주는 것이면 무엇이나 만족해야 하는데, 이 말은 곧 그대 자신의 욕망이 전혀 없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완전한 복종은 지혜, 또는 자유의 다른 이름이다. 그대가 복종한 다음에 그대에게는 좋아함도 싫어함도 있어서는 안된다. 그대의 의지는 전혀 없어야 하며, 신의 의지가 그 자리를 대신해야 한다.
●마음의 본질
마음의 본질은 무엇일까? 마음이란 참나(眞我)안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힘이다. 그것은 모든 생각을 일으킨다. 생각과는 별개의 독립된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생각이 바로 마음의 본질이다. 또 생각과는 별개의 독립된 현상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꿈이 없는 깊은 잠을 잘 때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다. 따라서 현상계도 없다. 그러나 깨어 있을 때나 꿈꿀 때에는 생각이 있으며 따라서 현상계도 있다. 거미가 몸 밖으로 거미줄을 뽑아냈다가 다시 거둬들이듯이 마음도 바깥으로 현상계를 투사했다가 다시 안으로 거둬들인다.
마음이 진아(眞我) 밖으로 나올 때 현상계가 나타난다. 따라서 현상계가 나타날 때 진아는 나타나지 않으며 진아가 나타날 때 현상계는 나타나지 않는다. 마음의 본질을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마음은 진아를 떠나서 사라져 버린다. 마음은 항상 무엇엔가 의존하고 있으며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흔히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도 역시 마음이다.
마음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탐구해 들어가야 할까?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생각은 ‘나(我)’라는 생각이다. 이 생각이 일어난 다음에 다른 생각들이 일어난다. 이는 마치 l인칭이 있고 난 연후에 2인칭과 3인칭이 있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마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마음이 사라지게 될까?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가지고 계속 탐구해 들어감으로써 가능하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계속하면 다른 생각들은 모두 사라진다. 그리고 맨 마지막으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이 마치 다른 장작들을 다 태운 뒤에 스스로도 타버리는 불쏘시개 장작처럼 사라지는 때가 온다. 그러면 그때 깨달음이 드러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계속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나도 마찬가지다. 한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놓치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그것에 대한 대답은 ‘나에게’가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이렇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하면 마음은 점점 그 근원으로 향하게 되고 생각은 점점 사라지게 될 것이다.
●참나와 에고
참나(眞我)를 찾는 공부는 인간들의 의식은 에고(ego)라는 집착덩어리로 인한 주변에서 감정이입과 체면 등 내가 인정받기 위한 방법으로 가면을 쓰고 자기 방어기전에서 나오는 반응으로 참나가 정착되지 않고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행위가 아니다. 그래서 참나를 찾는 작업이 깊이 내재화되면 에고들의 장난이 줄어들고 본래의 참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여 고민과 끄달림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되며 정신적 안정과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된다.
그러면 마음이란 무엇인가? 만약 마음을 알기 위해서 찾는다면 마음이라고 할 수 있는 분리된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은 생각의 꾸러미에 불과하다. 마음은 '나'라는 생각에 좌우된다. '나'라는 생각이 바로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마음이라는 이름의 실체는 없다. 생각이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생각이 시작된 그 무엇을 추측할 뿐이다. 우리는 그것을 마음이라고 한다.
마음이 내부를 향하면 참나이고 마음이 외부로 향하면 에고와 삼라만상이 된다. 마음은 참나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독립적인 마음의 존재는 없다. 참나는 마음 없이도 존재하지만 마음은 참나없이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은 오직 생각의 집합체일 뿐이다. 생각은 에고, '나'라는 생각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생각은 에고에 의하여 채워진다. 마음의 동요는 생각의 상(象)으로 인한 에너지의 소실로부터 일어나는 허약함이다. 마음이 하나의 생각에 집중될 때 에너지는 보존되고 마음은 더 강해진다. 방이 어두워지면 방을 밝힐 램프가 필요하다. 그러나 태양이 떠오르면 램프가 없어도 보이기 때문에 그것이 필요 없어진다. 태양을 보기 위해서는 그 자체가 빛을 내고 있기에 어떠한 램프도 필요치 않다. 마음에 있어서도 그와 같다. 마음의 반사된 빛은 사물을 인지하는데 필요하다. 그러나 심장을 보기 위해서는 마음이 그것을 향해 돌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마음은 그 속에서 사라지고 심장만이 밝게 빛난다.
아함브리티(Aham Vriti: 나라는 생각)의 근원을 탐색하는 것은 에고의 여러 형태 중 하나에 대한 뿌리를 찾는 것만이 아니고 '나는 존재한다'는 생각이 일어나는 바로 그 근원을 찾는 것이다. 기능적 관점에서 보면 에고는 오직 한가지의 성격을 가진다. 에고는 순수의식인 참나와 수동적인 육체 사이에서 매듭과 같은 기능을 한다. 그러므로 '의식과 수동적 몸 사이의 매듭'으로 불린다. 에고의 근원에 대해서 탐색하면 에고의 본질인 의식의 측면을 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참나탐구는 참나의 순수의식에 대한 깨달음으로 끌어져야만 한다.
'나는 누구인가?'의 탐구에서 '나'는 에고이다. 그 질문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이 에고의 근원이며 시초인가?’이다.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지 이렇게 저렇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자아탐구의 방법은 한마디로 요약해서 '고요히 존재하라'이다. 고요는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내가 '이러 이러한 사람이다'라는 관념을 버리는 것을 뜻한다.
●참나 탐구(SELF ENQUIRY)
그대는 마음이며 자신을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은 단지 생각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특별한 생각들의 이면에는 그대 자신인 '나'라고 하는 일반적인 생각이 있다. '나'라는 생각을 최초의 생각이라 하자. 그래서 이 '나'라는 생각을 붙잡아라.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기 위해서 물어 보라. 그대가 모든 생각을 계속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대가 '나'라는 생각에 매달린다면, 그대의 관심이 단 하나의 생각에 집중되어 다른 생각을 물리치게 되어 자동적으로 모든 생각들이 사라진다.
지속적이지 못하더라도 자주 질문하라. 그리고 내적으로 탐구하라. 만약 그대가 생각의 길을 간다면 생각에 휩쓸려서 끝없는 미궁에 빠져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혼란 속에 있는 자가 누구인지 탐구하라. 조금만 수련을 해보면 그리 힘들지 않을 것이다. 만약 한번 시도를 해보면 그게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의심하는 자와 그 근원이 밝혀진다면 모든 의심은 사라질 것이다. 의심 자체를 없애는 것은 소용이 없다. 하나의 의심을 제거하면 또 다른 의심이 일어날 것이고 그렇게 의심은 끝없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이 밝혀진다면 모든 의심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대는 '나'를 말하면서 여전히 '나'를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어느 누가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할 수 있는가? 그것은 어리석지 않은가? 늘 존재하고, 결코 달아날 수 없는 '나'에 대해서 그대가 어떻게 알지 못할 수 있는가?
●'WHO AM I(나는 누구인가)?'와 'WHENCE AM I(나는 어디서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탐구에 앞서 호흡을 지켜봐야 될 지에 대해서는 사람의 재능과 습성에 따라 달라진다. 탐구를 하면서 그것을 조절하고 집중할 수 있는 정신적 힘을 가지지 않은 자는 호흡을 지켜보도록 조언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호흡을 지켜봄으로써 마음을 통제하에 두기 때문이다. 사실상 탐구의 방법 면에서 '나는 누구인가?'만이 아니고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를 더 적절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의 내면에서 '나'라는 생각(에고, 마음)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알기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방법은 아무 목적이 없이 호흡을 지켜보는 것을 포함한다. '나'라는 생각과 호흡은 같은 근원으로부터 일어나므로 우리가 생각의 근원을 지켜볼 때 필연적으로 호흡의 근원도 지켜보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를 탐색하는 것은 실제로 '나'라는 생각의 근원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대는 그 외 딴 생각, 예컨대 '나는 몸이 아니다' 등과 같은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나'라는 생각의 근원을 찾는 것은 모든 다른 생각들을 끝내는 수단이 된다. 우리는 '나'라는 생각에 모든 주의를 집중시키는 외에 다른 생각이 들어설 틈을 주어서는 안된다. 생각들이 일어나면 그 생각이 누구로부터 일어나는지에 대해 물어서 만약 그 대답이 '나'라면 이 '나'가 누구인가? 그것의 근원은 어디에 있는가?를 계속 탐구함으로써 생각은 사라진다.
지각, 기억 또는 그 외 다른 모든 경험들은 결국은 '나'에게로 이른다. 그대가 잠자는 동안에는 경험하지 않는다. 하지만 자는 동안에도 그대는 여전히 존재했었다. 그리고 그대는 지금도 존재한다. 그것은 다른 모든 것이 가고 올 동안에도 '나'는 계속됨을 보여준다.
'나는 누구인가?'는 '나'라는 생각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집중해서 찾아야만 함을 뜻한다. 바깥에서 그것을 찾는 대신 그대 내면에서 찾아라. 그리고 나라는 생각이 어디에서 일어나는지를 보라. 모습, 소리, 어떤 물건이 있든지 아니면 텅빔이 있든지 간에 결코 마음을 두지 말라. 이 모든 순간에 그대는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은가? 텅빔의 순간조차도 그대는 그 텅빔을 말할 수 있도록 거기 존재해야만 한다. '그대'속에서 찾아지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에 대한 탐색이다.
‘자신을 아는 것'인 '비차라'(Vichara: 참나탐구)는 '시보함'(나는 시바다)이나 '소함'(나는 그것-신이다)의 방법과는 다르다. 나는 자아의 인식에 대해서 강조하고 싶다. 왜냐하면, 그대가 삼라만상과 그것의 신을 알려고 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소함' 명상이나 '내가 브라만이다' 명상은 많든 적든 정신적 생각이다. 그러나 내가 말하는 탐구는 실로 다른 어떤 명상법보다 더 우수하고 직접적인 방법이다. 자아를 위한 탐구의 흐름에 빠져들고 더욱 더 깊어져 가는 순간에 참나는 그대를 데려가기 위해 거기 기다리고 있다. 그 다음은 당신이 손을 대지 않더라도 그 어떤 것에 의해 이루어져야 할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지게 된다.
●헌신(BHAKTHI)
헌신은 '당신이 모든 것입니다', '당신 뜻대로 이루어지소서'라는 상태에 도달했을 때만이 완전해진다. 헌신은 매우 쉽게 보이는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기 입으로 '나는 헌신한다'라고 말한다면 자유로워 질 수 있고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대가 헌신한 후에는 더 이상 싫거나 좋아함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대의 의지는 완전히 존재하지 않아야 될것이다. 그 자리에 신의 의지가 차지할 것이다.
무엇이 운명인가? 운명은 없다. 헌신하라, 모든 뜻이 이루어질 것이다. 신에게 책임을 지워라. 그대 스스로 짐을 지지 마라. 그렇다면 운명이 그대에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은총이 탐색적 능력을 더 빨리 성취 시켜주지 않는지를 묻는다. 그것은 신에게 맡겨라. 무조건 헌신하라. 신은 헌신하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는다. 두 가지 중 한 가지를 택해야 한다. 그대가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여 보다 강력한 힘에게 도와 달라고 해야 할 필요를 느끼고 헌신하는 것 또는 불행의 원인을 탐구하여 그 근원에 들어가서 참나에 몰입하는 것 두 가지이다. 어느 길을 가든 그대는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워질 것이다.
헌신은 신의 자비에 자기 자신과 자신의 모든 소유를 포기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면 그 자에게 무엇이 남아 있는가? 아무 것도 없다. 그 자신도, 그의 소유물도 없다. 몸은 태어나고 죽는데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지만 마음을 신에게 맡기면 더 이상 그것에 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탄생과 죽음은 공포의 충격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놀라움을 일으키는 그 개인성이 어디에 있는가? 신의 뜻은 모든 시간과 상황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개인은 그 자신의 뜻대로 행동할 수 없다. 강력한 신의 뜻을 인지하라. 그리고 침묵하라.
만약 더 높은 힘에게 책임을 맡겨버리면 모든 일이 저절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땅위로 걷는다. 그렇게 하는 동안에 우리가 한발을 올린 후 다른 발을 올려야 하는지 어떤 지점에서 멈추어야 하는지를 발을 딛을 때에 고려하는가? 걷는 것은 저절로 되어지지 않는가? 숨을 들이쉬고 숨을 내어 쉬는 경우도 같은 경우이다. 숨을 들이쉬고 내어 쉬는데는 아무 특별한 노력이 필요 없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꽤 많은 일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저절로 이루어진다. 만약 마음과 말과 몸으로 짓는 행위들이 신에 몰입되어진다면 우리 생의 모든 짐은 신이 떠맡게 된다.
라마나 마하르쉬와의 대담
책 『라마나 마하르쉬와의 대담』은 인도의 위대한 영적 스승 라마나 마하리쉬가 그의 아쉬람을 찾아온 세계 각지의 구도자들과 문답한 내용을 4년에 걸쳐 기록한 마하리쉬의 가장 대표적인 어록이다. 마하리쉬가 가르친 ‘나는 누구인가?’의 자기탐구(self-enquiry)를 중심으로, 요가·헌신(bhakti)·염송(japa) 등 수행법들과, 비이원적 베단타철학에 기초한 참나(眞我) 깨달음(Self-Realization)의 원리를 다각도로 설파한다.
『바가바드 기타』, 『우파니샤드』 등 인도의 전통적 경전들에 대한 설명과 함께, 현상계가 실재하는지, 탄생과 죽음이 무엇인지, 세간적 삶 속에서는 어떻게 수행을 해야 하는지 등에 관한 핵심 가르침들이 이 책 한 권에 집결되어 있다. 2003년에 처음 나온 한국어판을 14년 만에 전면적으로 수정·보완하여 텍스트의 정확도를 높이고, 인용문들의 출처와 배경정보 등을 밝히는 상세한 각주(역주)들을 한층 업데이트한 ‘개정 2판’이다. 핵심 내용을 발췌, 정리했다.
- 나는 누구인가?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이 몸은 내가 아니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등 다섯 가지 감각기관은 내가 아니다. 말하고 움직이고 붙잡고 배설하고 생식하는 다섯 가지 운동기관은 내가 아니다. 호흡 등의 다섯 가지 기능을 수행하는 프라나 등의 다섯 가지는 내가 아니다. 생각하는 마음도 내가 아니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도 내가 아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인가?
이 모든 것들을 ‘내가 아니다’라고 부정하고 나면 그것들을 지켜보는 순수한 앎만이 남는다. 그것이 바로 ‘나’다.
-그 각성의 본질은 무엇인가?
그것의 본질은 실재, 의식, 지복이다.
-어느 때에 참나를 깨달을 수 있는가?
현상계가 실재한다는 인식이 사라질 때 참나를 깨달을 수 있다.
-현상계가 실재한다고 인식하는 한, 참나를 깨달을 수 없는가?
그렇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현상계가 실재한다는 인식과 참나에 대한 깨달음과의 관계는 뱀과 밧줄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다. 그 뱀이라는 그릇된 인식이 사라지지 않는 한 밧줄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 생길 수 없다. 마찬가지로 현상계가 실재한다는 그릇된 믿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참나를 깨달을 수 없다.
-어느 때에 현상계가 사라지는가?
현상계에 대한 모든 인식과 행위의 원인은 마음이다. 따라서 마음이 사라지면 현상계도 사라진다.
-마음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마음이란 참나 안에서 나타나는 미묘한 힘이다. 그것은 모든 생각을 일으킨다. 생각과는 별개의 독립된 마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생각이 바로 마음의 본질이다. 생각과는 별개의 독립된 현상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꿈이 없는 깊은 잠을 잘 때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다. 따라서 현상계도 없다. 그러나 깨어 있을 때나 꿈꿀 때에는 생각이 있으며 따라서 현상계도 있다.
거미가 몸 밖으로 거미줄을 뽑아냈다가 다시 거둬들이듯이 마음도 바깥으로 현상계를 투사했다가 다시 안으로 거둬들인다.
마음이 참나 밖으로 나올 때 현상계가 나타난다. 따라서 현상계가 나타날 때 참나는 나타나지 않으며 참나가 나타날 때 현상계는 나타나지 않는다. 마음의 본질을 끝까지 파고 들어가면 마음은 참나를 떠나서 사라져 버린다. 참나가 바로 무아이다. 마음은 항상 무엇인가 의존하고 있으며 홀로 존재 할 수 없다. 흔히 영혼이라 부르는 것도 역시 마음이다.
-마음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마음에서 일어나는 모든 생각 중에서 가장 먼저 일어나는 생각은 ‘나’라는 생각이다. 이 생각이 일어난 다음에 다른 생각들이 일어난다. 이는 마치 1인칭이 있고 난 연후에 2인칭과 2인칭이 있을 수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마음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이 ‘나’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을 계속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다른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을 따라가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게 일어났는가? 라고 물어야 한다. 아무리 많은 생각이 일어나도 마찬가지다. 한 생각이 일어날 때 마다 놓치지 말고 이 생각이 ‘누구에서 일어났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나에게 가 될 것이다. 그러면 다시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다. 이렇게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하면 마음은 점점 그 근원을 향하게 되어 생각은 점점 사라지며 몰입될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 마음을 사라지게 할 수 없는가?
이 방법 외에는 마땅한 방법이 없다. 다른 방법을 통해 마음을 조절 할 수는 있으나 그것은 일시적일 뿐이다. 호흡 조절을 통해 마음을 가라앉힐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호흡이 조절되는 동안만이며 호흡이 흐트러지면 마음이 다시 작용하기 시작한다. 사실 마음과 호흡의 근원은 같다. 마음의 본질은 생각이고 최초의 생각은 ‘나’라는 생각이며 이것이 바로 에고인데 바로 이 에고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호흡도 시작된다. 따라서 마음이 가라앉으면 호흡이 조절되고 호흡이 조절되면 마음이 가라앉는다. 그러나 깊은 잠을 잘 때에는 마음이 사라져도 호흡은 멈추지 않는다. 이것은 참나의 뜻이다. 그럼으로써 육체가 유지 될수 있고 다른 사람들도 그 육체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깨어 있는 상태와 삼매(三昧) 상태에서는 마음이 가라앉으면 호흡이 조절된다. 호흡은 거친 형태의 마음이다. 마음은 죽기 전까지 육체 안에서 호흡을 유지하며, 죽음과 동시에 호흡을 가지고 가버린다. 따라서 호흡조절 훈련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마음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호흡조절과 마찬가지로 참나의 형상에 대한 명상을 한다든가 만트라를 외운다든가, 음식을 절제한다든가, 하는 것들은 모두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도움이 될 뿐이다. 참나의 형상에 대해 명상하거나 만트라를 외우는 것은 마음을 한 곳에 모으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마음에 여러 가지 생각이 잡다하게 있으면 생각 하나하나의 힘은 약해지지만 한 생각만 있으면 마음이 집중되어 그 힘이 강해진다. 이러한 마음 상태에서는 자아탐구가 쉬워진다. 또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것 중에는 과일, 야채 등 채식 위주로 하는 적당한 식사법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도 자아탐구에 도움이 된다.
-생각은 마치 바다의 파도처럼 끊임없이 일어난다. 그 모든 생각들은 언제 없어지는가?
참나에 대한 명상이 깊어짐에 따라 그 생각들은 사라져 간다.
-시작 없는 과거로부터 계속 되어 온 이 대상에 대한 생각들이 모두 없어지고 순수한 참나로서만 있을 수 있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가?
가능하냐, 가능하지 않느냐를 따지지 말고 참나에 대한 명상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설사 큰 죄를 지은 죄인일지라도 나 같은 죄인이 어떻게 구원 될 수 있겠느냐 라고 생각하여 괴로워 해서는 안된다. 우선 ‘나는 죄인이다’라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고 진아에 대한 명상에 모든 힘을 기울여 집중해야 한다. 그러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 선한 마음이 따로 있고 악한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오직 하나 뿐이다. 그러나 그 마음을 세속적인 대상이나 세속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것들에 쏠리게 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에게 나쁘게 대해도 그들에게 증오심을 품어서는 안된다. 욕망과 증오는 둘 다 피해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주는 모든 것은 사실은 모두 자기 자신에게 주는 것이다. 이 진리를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가 남에게 베풀지 않겠는가? 자신의 자아가 나타나면 모든 것이 나타나고 자아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자신을 낮추면 낯 출수록 그만큼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다. 또한 마음이 사라지게 되면 어디에서든 살 수 있게 된다.
-자아탐구는 언제까지 계속 되어야 하는가?
마음속에 대상에 대한 생각이 남아 있는 한, ‘나는 누구인가’라는 탐구가 필요하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그 즉시 이 탐구를 통하여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 어떤 생각이 일어나면 그 즉시 ‘나는 누구인가’라는 수행을 통하여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 참나를 깨달을 때 까지 완전히 진아에 몰입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 요새(要塞)안에 적이 남아 있는 한 그들은 언제이고 다시 공격해 오겠지만, 나타나는 족족 없애버리면 요새는 결국 우리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참나의 본질은 무엇인가?
오직 참나 만이 실재하며, 현상계, 개아, 신 등은 참나 안에 나타난 현상에 불과하다. 이 셋은 동시에 나타났다가 동시에 사라진다. 참나는 나라는 생각이 전혀 없는 바로 그곳이며 침묵이라고도 한다. 참나가 곧 현상계이고 참나가 곧 현상계이고 참나가 곧 개아이며, 참나가 곧 신이다. 참나는 모든 것이다.
-어떤 사람이 가장 훌륭한 수행자인가?
자기 자신을 참나, 즉 붓다에게 완전히 던져버리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수행자다. 자기 자신을 붓다에게 던진다는 말은 참나에 대한 생각 외에는 어떤 다른 생각도 일어나지 못하도록 참나 안에 몰입 한다는 뜻이다. 짐이 되는 것은 모두 붓다에게 맡겨라. 그가 모든 것을 책임 질것이다. 지고한 붓다의 힘이 모든 것을 관장고 있는데, 왜 우리들은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고 무엇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끊임없이 망설이고 있는가? 기차를 타면 기차가 모든 짐을 다 운반해 준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계속 짐을 머리에 이고서 불편을 감수해야 한단 말인가? 왜 짐을 기차에 내려놓고 편히 쉬지 못하는가?
-무집착이란 무엇인가?
생각이 일어날 때 아무런 찌꺼기도 없이 그 생각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무집착이다. 진주를 캐는 사람이 허리에 돌을 달고 바다 밑바닥에 내려가서 진주를 캐오듯이 우리는 무집착을 달고 우리의 내면으로 들어가 ‘참나’라는 진주를 캐내야한다.
-신은 스승이 인간으로 하여금 구속에서 벗어나도록 해 줄 수는 없는가?
신과 스승(라마나 마하리쉬)은 벗어나는 길을 가르쳐 줄 뿐이지 벗어난 상태를 주지 않는다. 사실 신과 스승은 다르지 않다. 일단 호랑이의 입 속으로 들어온 먹이는 다시 빠져 나갈 수 없듯이, 일단 스승의 자애로운 은총 속으로 들어온 제자는 스승에 의해 구원받게 되어 있다. 물론 신이나 스승이 제시한 길을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따라와야 한다. 자신의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자신을 알 수 있으며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깨어있는 상태와 꿈꾸는 상태 사이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깨어있는 상태는 길고 꿈꾸는 상태는 짧다. 그것 말고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깨어있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일들이 그 상태에서는 실재하는 것처럼 보이듯이 꿈꾸는 상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꿈꾸는 상태에서 마음은 다른 체(body)를 가진다. 또 어느 상태에서나 생각과 이름과 형상들이 동시에 나타난다.
-해탈을 구하는 사람이 책을 읽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모든 경전에서는 해탈을 얻으려면 마음을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결론은 마음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며 이 사실을 이해하고 나면 더 이상 책에 매달릴 필요가 없다. 참나를 알기위해서는 자신의 내면으로 탐구해 들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이것이 책을 통해서 가능하겠는가? 누구나 자기 자신의 지혜의 눈으로 자기 자신의 참나를 알아야 한다. 참나는 다섯 가지 감각의 내부에 있으며 책은 그들의 밖에 있다 따라서 책 안에서 참나를 찾아봐야 소용이 없다. 자신이 배운 것을 다 잊어버려야 할 때가 올 것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은 바로 참나의 본질이다. 행복과 참나는 다르지 않다. 현상계의 어디에도 행복은 없다. 우리는 무지로 인하여 어떤 대상으로부터 행복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이 밖으로 향할 때 그것이 경험하는 것은 불행할 뿐이다. 어쩌다가 마음이 바라는 바가 완전히 달성되면 그 마음은 제자리로 돌아와 행복을 즐기지만 그것 역시 참나의 행복이다. 즉 깊은 잠을 잘 때 삼매에 들었을 때 기절했을 때 마음이 바라는 바가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 마음은 내면으로 향하면서 순수한 참나의 행복을 즐기게 된다. 그러나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마음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행복과 불행을 번갈아 경험한다. 뜨거운 태양아래 있다가 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오면 시원함을 느낀다. 그런데 나무 그늘 밑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현명한 사람은 언제나 그늘 아래에서 안주한다. 마찬가지로 진리를 아는 사람은 참나를 떠나지 않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현상계를 해매며 불행을 느끼고 어쩌다가 한번 씩 참나로 돌아와서 행복을 경험한다. 사실 현상계란 생각의 집합체에 불과하다. 현상계가 사라질 때 즉 아무런 생각이 없을 때 우리는 행복을 경험하며 현상계가 나타날 때 불행을 경험한다.
-무욕과 지혜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무욕이 지혜이다. 둘은 다르지 않다. 무욕이란 마음이 어떠한 대상으로도 향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지혜란 마음속에 아무런 대상도 나타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참나가 아닌 것을 구하지 않음이 무욕이고 참나를 벗어나지 않음이 지혜이다.
-자아탐구와 명상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자아탐구는 마음을 참나 안에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명상은 자기 자신이 참나, 즉 실재-의식-지복이라고 생각 하는 것이다.
-해탈이란 무엇인가? 구속되어 있는 자기 자신의 본질을 탐구해 들어가서 자신의 진정한 본질을 깨닫는 것이 해탈이다. 수암(守岩) 문 윤 홍<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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