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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儒敎) · 유가(儒家) 또는 유학(儒學) 본문
유교(儒敎) · 유가(儒家) 또는 유학(儒學)
양명학(陽明學)은 중국 명나라의 철학자 왕수인(王守仁)의 호인 양명(陽明)에서 이름을 따서 붙인 유가철학(儒家哲學)의 한 학파로 주관적 실천 철학에 속한다.양명학이라는 명칭은 메이지 유신 이후에 퍼진 것으로, 그 이전에는 육왕학(陸王學) 또는 왕학(王學)이라 불렸다.
육왕학(陸王學)은 육구연(陸九淵)의 학풍을 이어 왕수인이 대성한 유학(儒學)을 뜻하고, 왕학(王學)은 왕수인의 유학을 뜻한다. 심즉리(心卽理) · 치양지(致良知) ·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양명학의 3강령이다.
송나라 시대를 거쳐 오면서 학자들은 유교의 역사를 되돌아 보면 수나라나 당나라 이전에는 경서의 음독이나 훈고(단어의 의미)를 중시한 훈고학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유교가 거쳐오면서 송나라 시대의 학자들는 유교 경전에 담겨진 공자나 맹자등의 본래 의미와 달리 왜곡되었고, 그런 성인들의 본래의 의미를 이해 하려는 시도가 필요하다는 인식에 이르렀다.
수,당나라 이전의 훈고학을 가르치면서도, 훈고학 중심의 사회를 고치는 데 의견을 모았다. 그 결과, 송나라 시대 이후의 유교 사상은 훈고학에서 주자학으로 새로운 학파가 생겨났다.
주자학이 중요시한 건 성인들의 말이나 경전을 제멋대로 해석하는 사상이 아니라는 데 의견을 맞추어서 새 경전을 만들었다. 새 경전들은 「사서」라고 불리는 네 개의 경전이었다. 이 책은 「예기」로부터 분리된 「대학」과 「중용」, 그리고 이 책들보다는 하위 취급을 받고 있던 「논어」와 「순자」, 중간 정도인 「맹자」 이 네 개의 경전이었다.
이 경전들은 내용이 짧고 잘못된 해석을 고치는 데 적당했기 때문에 이용되었다.
특히 주자학이 맹자의 「성선설」을 중요시하는 등 이 주자학은 중국 여러 지역에 점차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주자학이 중국의 여러 지역에 퍼진 까닭은 주자학이 왕이 집권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주자학은 중국 전역뿐만이 아니라 조선, 일본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주자학도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자학이 중국 전역으로 퍼지긴 했지만, 이 주자학을 바탕으로 왕들은 왕권을 다졌고, 오히려 훈고학의 상황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성인들의 본래 의미가 전혀 다른 왕의 집권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주자학의 본래 의미는 퇴색되었다.
양명학의 등장
주자학은 왕들의 왕권이 대한 이유로 전락했다. 그래서 주자학은 도덕적인 측면이 없어져 갔다.
그 도덕윤리를 다시 되살리려는 노력을 한 학자가 바로 왕수인이다. 그는 당초 도덕적인 측면을 되살리려는 노력을 하려는 작은 시도였다.
그래서 왕수인도 주자학을 믿었지만 사회가 변화를 보이지 않자 결국 그는 주자학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양명학을 주장해 드디어 양명학은 생겨난 것이다.
주자학은 정치학, 존재론[3], 주석학[4], 윤리학[5], 방법론[6]등을 모두 포괄하는 종합적인 학파였다.
그러나 양명학은 그 중의 윤리학 및 방법론 등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유교에서는 윤리학적 측면이 가장 중요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사회가 크게 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양명학은 여러 유명한 학자들을 배출시켰다.
중국
중국에서는 왕수인의 제자들이 양명학을 많이 발전 시켰다. 그렇지만 양명은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칠 때, 하나의 방법을 고집하지 않고, 각자의 재질이나 습성에 따라 가르쳤다.
누구에게는 본체를 강조하는가 하면, 누구에게는 정반대로 공부를 강조하기도 하는 식이었다.
그래서 양명이 죽은 이후 제자들이 받아들인 학설의 차이에 따라 크게 귀적파(歸寂派), 수증파(修證派), 현성파(現成派)로 나뉘었다.[7] 그 뒤 양명학은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며 발전해 나갔다.
양명학 우파
양명학 유파 중 정통파(正統派)로 간주되었다. 귀적파와 수증파가 우파에 속한다. 양명의 ‘심즉리(心卽理)’는 선악을 포함한 마음이 이(理)가 아니고 마음이 발동할 때 이미 그 마음은 이(理)라야 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마음의 악폐(惡弊), 즉 사욕(私欲)을 극복하여서 마음을 양지(良知) 그것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유파는 양명의 〈4구결(四句訣)〉에서 선(善)도 없고 악(惡)도 없는 것은 심(心)의 체(體)라 한 것을 심(心)의 본체는 지선무악(至善無惡)이라고 하여 전통적인 성선설(性善說)과 타협하고, 심(心)의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양명 심학(陽明心學)으로부터 떠나서 점차로 주자학적 이(理)를 문제로 하여 실제적·현실적 연구를 중시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양명의 문인 전서산(錢緖山, 1496~1574)이 왕용계(王龍溪, 1498~1583)와 〈4구결〉을 둘러싸고 대립하여 분파한 이후, 우파에는 추수익(鄒守益, 1491~1562), 나홍선(羅洪先, 1504~1564), 유종주(劉宗周, 1578~1645) 등이 있었다.
양명학 좌파
양명학 유파의 하나이다. 현성파가 여기 속한다. 이 파의 왕용계는 선(善)도 없고 악(惡)도 없는 것은 심(心)의 체(體)요, 선(善)도 있고 악(惡)도 있는 것은 의(意)의 움직임이며, 선(善)을 지(知)하고 악(惡)을 지(知)하는 것은 양지(良知)요,
선(善)을 하고 악(惡)을 버리는 것은 격물(格物)이라 한다는 왕양명의 〈4구결〉에 대하여, 이것은 일반 사인(士人)에게 설명하기 위하여 설치한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는 심즉리(心卽理)·치양지(致良知)의 실천적 주체의 입장, 즉 실천을 주로 하는 도(道)·이(理)에의 오입(悟入) 내지는 그것의 체득이라고 하는 입장에서 보면 의(意)·지(知)·물(物)에 선악의 대립이 있을 리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학문은 오득(悟得)만을 존귀하게 여긴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고방식에서 왕용계는 마음이 본래 무선무악(無善無惡)하면 그때 발하는 행위는 양지(良知) 그것이며, 따라서 양지는 배우지 않고 사려하지 않아도 사람이 본래 완전하게 구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 사고방식은 이 파의 이탁오에게 전해지면서 한 걸음 나아가 적극적인 인욕(人欲)의 긍정으로 발전하였다. 이 파의 특색은 유(儒)·불(佛)·도(道) 3교의 혼융, 선학적(禪學的)경향, 소농(小農)·도장(陶匠)·나무꾼·염정 등의 낮은 신분의 사람들을 포함하는 서민 교육에의 실천, 전통의 부정이나 반체제적(反體制的)·신비적인 점 등에 있었다.
이 파는 특색있는 사조를 형성하면서도 새로운 시대를 형성하는 구체적인 사상 내용을 갖지 못하고 공론적·신비적 경향만을 강조하다 오래지 않아 소멸하였다. 왕용계, 이탁오 외에 왕간, 왕벽(王檗-東崖, 1510-1587), 안균(顔鈞-山農, 생몰년 미상), 양여원(梁汝元), 나여방(羅汝芳-近溪, 1515-1588) 등이 이 파에 속하였다.[8]
그러나 청나라 시대부터 양명학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고증학에 밀려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양명학은 성리학을 약간 보완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갈수록 쇠퇴해 갔다. 이후의 옹정제, 건륭제의 시대를 지나면서 청나라의 황제들은 성리학을 더욱 확립해 양명학은 중국에서 완전히 사라지는듯 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메이지 유신으로 양명학의 영향이 중국에도 다시 부활했다. 1840년을 주기로 아편 전쟁 이후 중국인들은 개혁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고, 일본에서 양명학이 메이지 유신을 정당화 할 수 있었던 것처럼 이번에는 일본에서 양명학이 역수입되었다. 양명학은 중국 국민들에게 개혁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조선
박상(1474~1530)의 《눌재집(訥齋集)》연보 48세 조에
“왕양명 수인의 《전습록》을 변(辨)하다. 명의 학설이 동래(東來)하였는데 동유(東儒)들은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몰랐으나 선생이 그것을 보고 선학(禪學)이라 변척하여 김십청(金十淸)과 더불어 수창(酬唱)한 삼절시(三絶詩)가 있었다.”
는 내용을 볼 때 양명학 전래 시기는 중종 16년(1521년) 이전이다.
이후 16세기∼18세기에 조선 유학계에서 양명학의 찬·반 논쟁이 전개되었다.
양명학 배척론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여 그 도입을 억제하고, 양명학 찬성론을 ‘사문난적(斯文亂賊)’, ‘이단(異端)’이라고 규탄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먼저 이황은 〈전습록변(傳習錄辨)〉을 지어 지행합일설을 비판하였는데, 양명학을 불교의 선학(禪學)과 동일한 것으로 보아 비판했다. 양명의 《대학》 친민설, 심즉리설도 여러 논변에서 비판했다.
그러나 이황의 비판 중에 양명학의 가장 핵심 논지인 치량지에 관한 내용이 없는 것에서 그가 양명의 모든 전적을 충분히 보지 못하고 비판한 것임을 알 수 있다.또, 유성룡은 왕양명의 주자학 비판을 조목별로 반박했다.
그 뒤로 퇴계의 문하 뿐 아니라 조선 성리학 전체가 양명학을 배척하여 양명학은 조선에 발 딛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양명학을 받아들인 학자로는 남언경(1528~1594)과 이요가 있다.
그들을 이어 장유(1587~1638), 최명길이 미미하나마 연구했으며, 특히 장유는 조선 유학계의 주자학 일변도를 개탄하였다. 또한 이익(李瀷)도 주자학의 주지주의(主知主義)적 경향의 공리공론(空理空論)을 비판하고 행(行)을 강조하였다.
이후 정제두(1649~1736)에 이르러 크게 발전했다. 근대 초 정인보·박은식까지 그 학풍이 이어진다.
일본
교토에서 도쿄로 가는 메이지 천황(1868년 말)
일본에서는 양명학이 반체제적인 성격을 가져 혁명가들이 주로 양명학을 연구하기도 했으며, 또는 양명학을 연구하게 되면 혁명적인 지향이 되기 쉽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양명학 역시 일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나카에 도주나 구마자와 반잔이 대표적인 학자였다.
에도 시대 이후 메이지 유신에 사상적 영향력을 끼쳐서 양명학은 이후 더 발전했다. 양명학과 관련한 책이나 잡지는 수없이 만들어졌으며, 양명학 주요 책은 쇠퇴하고 있던 중국에 역수입 되었다.
양명학의 근본 사상
양명학의 사상은 《전습록》, 《주자만년정록》, 《대학문》등에 자세히 나와 있다.
심즉리
심즉리(心卽理)는 양명학의 윤리학적인 측면을 나타내는 말로 성(태어날 때 생겨난 순수한 선성)과 정(감정으로서 나타나는 마음의 움직임)을 대면시킨 마음 그 자체가 리와 다름없다고 하는 사상이다.[11]
치양지
치양지(致良知)는 양명학의 방법론적 측면을 나타내는 말로 왕수인이 독자적으로 만든 사상이다. 치량지란 양지를 전면적으로 발휘하는 것을 의미하며, 양지에 따르는 한 그 행동은 선이 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것으로, 양지에 근거하는 행동은 외적인 규범에 속박 되지 않는 말이다.
마음은 선악을 넘은 것이지만, 뜻에서 선악이 태어난다. 그 선악을 아는 것이 양지 말고는 안 되며, 그러므로 선을 바로 잡기 위해서 양지를 키우라는 것이다.
맹자의 성선설의 영향을 받았다. 양지를 누구나 갖고 태어나는 것이므로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주장과 양지를 가리고 있는 선악을 제거하기 위해 공부가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나뉘어 양지는 양명 사후 제자들의 분파의 이유가 된다.
지행합일
지행합일(知行合一)은 양지의 상태 중의 하나로 말과 실천은 같아야 한다는 사상이다. 말은 지, 실천은 행이란 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본다는 것은 지(知)에,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은 행(行)에 속한다.
모든 물체의 인과 양지의 결합
이것 역시 양지의 상태 중의 하나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은 하나의 육체이며, 다른 사람의 괴로움은 스스로의 괴로움이며, 그것을 달래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며, 모든 물체의 인은 양지를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에서 양명학은 사회 구제의 근거를 찾아낸 것이다.
사상마련
사상마련(事上磨鍊)은 수양처를 말하는 것으로, 주자학에서는 독서와 거경궁리를 통해서 수양을 한다고 하지만 왕수인은 이런 의견에 반대하여서 일상에서 양지를 닦아야 한다고 했다. 개념을 통해서가 아니고, 실제로 일을 하면서 정신을 단련한다는 뜻이다
격물(格物)
주자는 격물을 사물에 임하여 그 이치를 궁구하는 즉물궁리(卽物窮理)라 하였으나, 양명은 격(格)을 정(正)으로, 물(物)을 사(事)로 보아 일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 해석했다.[12] 전습록에 나오는 격물하고자 며칠 동안 대나무를 바라보았더니 정신만 혼미해지더라는 일화[13]에서 주자의 격물을 비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양명학이 연 지평
사람의 욕구
양명학은 사람의 욕구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해서 사람의 욕구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을 했다. 사람의 욕구를 없애려고 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욕구를 잘 다스리려고 하는 노력을 했다.
붕우 관계의 중시
붕우, 즉 인간 관계를 중요시 여겼다. 유교에서는 남존여비 사상과 아이가 어른을 받드는 '상하 관계' 사상을 버리고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다는 사상이었다. 이 사상은 유교 이념이 지배적인 중국에 큰 혼란을 일으켰다.
양명학 주요 학자
중국
• 왕양명 전덕홍 추수익 나홍선 왕기 이지 왕간 양여원
조선
• 정제두 이광사
일본
• 나카에 도주 구마자와 반잔
같이 보기
• 유교
• 한국의 유교
• 송·명 시대의 사상
• 성리학
• 선종
양명학(陽明學)
본문
중국 송나라 때 주자(朱子)에 의해 확립된 성리학(性理學)의 사상에 반대하여 명나라 때 왕양명(王陽明)이 주창한 학문이다. 성리학과는 대립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육상산(陸象山)의 철학과 함께 심학(心學)으로도 불린다.
왕양명은 초기에 성리학(性理學)을 공부하다가 주자의 성즉리(性卽理)와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에 회의를 느끼고 육상산의 설을 이어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주창하고 나왔다.
즉 효는 배우고 익혀서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공경하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원리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효심과 효행은 구분되지 않는 하나로 인식하여 이를 지행합일설로 표현한 것이다.
마음은 기(氣)이고 마음이 갖춘 도덕성 등의 이치는 이(理)라고 한 주자의 견해에 대하여, 만물일체와 불교의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입장에서 마음이 곧 이(理)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객관세계에 실재하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지식을 이룩하는 이론적 방법으로도 대학의 격물치지를 해석한 주자의 입장에 반대하고, 외재사물(外在事物)을 문제삼으려면 이미 마음이 발동해야 하므로 물(物)을 마음이 발동하여 이룩한 사(事)로 해석하고, 밖에 있는 이치의 파악 이전에 파악하는 주체로서 마음의 선천적인 앎의 능력인 양지(良知)를 이룩하여 사물을 바르게 하는 방법으로 양명은 확정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인식과 실천이 둘이 아니라 하나일 수밖에 없었으며 《전습록(傳習錄)》 권2에 의하면 “앎의 진정한 독실처(篤實處)가 곧 행(行)이요, 행함의 명각정찰처(明覺精察處)가 곧 앎이니, 앎과 행함의 공부는 분리할 수 없다”는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이 제출된 것이다.
양명학은 중국에서는 귀적파(歸寂派) ·수정파(修正派) ·현성파(現成派)로 삼분(三分)되어 발전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정주학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계곡(谿谷) 장유(張維),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등이 연구하였으며 특히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어 나카에 도쥬[中江藤樹]가 이를 연구 발전시켰다.
양명학은 맹자의 선천적인 도덕심과 마음의 발양을 통해 타인을, 나아가 인간세계와 우주를 성실하고 바르게 하자는 이상을 형이상학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가적(禪家的)인 색채 때문에 청대 실학자(實學者)들에 의해 비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연구 ·계승되는 유가철학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출처] 양명학 [陽明學 ] | 네이버 백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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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과 양명학의 차이점 철학연구 정리
성리학과 양명학의 차이점
성리학(性理學)은 본성을 중시하고, 지식은 후천적으로 얻어진다 믿으며, 학습을 중시하고, 지식과 행동은 분리 되어있다고 여기는 즉 性卽理가 사물세계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성품을 이(理또는 天理)라고 주장하는 성리학의 명제이고, 반면 양명학(陽明學)은 마음을 중시하고, 선천적인 지식을 믿으며 학습을 중시하지 않고, 지식과 행동은 합일되어야 한다는 지행합일설을 주장한 즉 心卽理는 性과 情을 분리하여 性을 주로 삼았던 성리학에 대해 반기를 들고, 왕양명(왕수인)이 주장하는 바 情이 속하는 마음(心)이 주체적인 자각의 중심이고 이것이 바로 理(天理)라 주장했던 명제입니다 .
성리학(性理學)
자연과 사회의 발생·운동을 이(理)와 기(氣)의 개념에 의해 설명한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되며, 그런 점에서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그런데 기는 맑음과 흐림, 무거움과 가벼움 등에 따른 차이가 있으며, 따라서 기에 의해 구성되는 우주 만물은 차별성·등급성을 갖는다. 결국 자연·인간·사회가 모두 위계적 질서를 갖는 것이다.
한편 태극(太極), 즉 천리(天理)·이의 개념은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실재로서 기의 존재 근거이며, 동시에 만물에 내재하는 원리로서 기의 운동법칙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만물의 존재 근거가 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만물에는 모두 이가 내재한다는 점에서 이의 개념은 인간과 사물의 원리적 보편성을 설명하는 범주이다. 이기론에 바탕을 둔 인간 이해는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인성론으로 체계화되었다.
본연지성은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본래 존재하고 있는 이로서, 도덕적 본성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기질지성은 인간 형성에 관여하는 기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육체와 감각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인간 본능을 의미한다.
이 가운데 본연지성에 따른 행위는 선한 것이며, 기질지성에 따른 행위는 인욕에 의해 악으로 흐르는 경향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인욕을 없애고 천리를 보존하는 도덕 실천을 통해 본연지성에 따르는 생활방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방식을 가지기 위해서 사물에 존재하는 천리를 인식하는 궁리(窮理)와 인욕의 발동을 억제하는 내면적 수양으로서의 거경(居敬)이라는 수양 방법이 제시되었다a>(→ 색인 : 거경궁리). 그런데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이의 구체적 내용은 삼강오상을 비롯한 유교적 윤리도덕이었으며, 나아가 관료제적 통치질서, 신분계급적 사회질서, 가부장제적·종법제적 가족질서를 포함하는 명분론적 질서였다.
따라서 성리학은 이의 보편성을 통해 유교적 윤리도덕과 명분론적 질서의 보편성을 교설하며, 인간은 명분론적 질서 속에서 각각의 계층적 지위에 합당한 일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하는 존재로 설명했다. 결국 성리학은 명분론적 질서를 합리화하는 사상체계였으며, 명분론적 질서에 맞는 생활을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도덕적 의무라고 했다.
양명학(陽明學)
심즉리로부터 출발하여 지행합일설에 도달하고 마지막으로 치양지설에 의하여 완성된다는 원리이다.
새로운 격물치지설을 주장하게 된 원리는 심즉리이다. 이는 육상산(陸象山)에서 발견된 심학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심학은 왕수인에 의해 대성되었다. 그는 "심은 곧 이이다. 천하에 심외(心外)의 일이 있고, 심외의 이가 있겠는가"라는 주체적인 자각에서 심즉리가 정립되었다고 했다. 심외에 사물이 없고, 심외에 일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객관적인 외계(外界)의 사물은 마음을 떠나면 소멸해 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가 남진(南鎭) 땅에서 바위 위에 핀 꽃을 보고,
"저 꽃은 스스로 피고 스스로 떨어지니 우리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하고 질문했을 때, 왕수인은
"당신이 이 꽃을 보지 못했을 때는 이 꽃은 당신의 마음과 함께 고요했다.
그러나 당신이 와서 이 꽃을 보았을 때 이 꽃은 빛깔이 분명하게 되었다.
이 꽃은 당신의 마음 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 했다.
사람에게 의식되지 않을 때 그 꽃은 고요히 그대로 있었지만, 사람이 의식했을 때 비로소 아름답다·분홍이다·빨갛다 등의 평가와 판단으로 인하여 꽃은 꽃노릇을 하게 된다.
사물은 인간의 의식과의 관계에서 그 가치가 주어지고 세계질서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마음 외에 사물은 없다'는 근본 뜻이다.
그러나 치양지설을 주장한 후부터 이보다 심에 중심이 옮겨졌다.
즉 심의 외화(外化)가 곧 자연적인 사물이라는 것으로 사물현상은 심의 현상물이라 했다.
아름다운 꽃을 보는 것은 지(知)에 속하고 아름다운 꽃을 좋아하는 것은 행(行)에 속한다.
그런데 아름다운 꽃을 보았을 때는 이미 좋아하는 것이지 먼저 보고 난 뒤에 또다른 마음이 있어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왕수인이 지는 행의 시작이요, 행은 지의 완성이라고 했던 까닭이다. 즉 우리의 지식과 실천은 본래 합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린(賀麟)은 지행합일신론(知行合一新論)에서 대략
"지는 의식활동이며, 행은 생리적인 활동이다. 지행이 비록 성질이 다른 활동이라고 하더라도 활동이라는 점에서는 합치한다. 우리의 의식활동은 생리적 조건과 물질적인 변화가 있게 된다.
이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므로 지행합일이라고 한 것이다. 의식활동과 생리적인 활동은 동시에 발동되며, 시간적인 선후가 없다"
고 했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지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양지이다. 왕수인은 49세 때에 치양지설을 주장했다.
치양지설이 창안된 뒤부터는 인욕을 버리고 천리를 보존한다는 등의 수양방법보다 오히려 양지의 실현이 중시된다.
양지를 실현한다면 모든 사사로운 폐단이 스스로 소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정을 바룬다', '사욕을 버린다'고 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치양지 그것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왕수인은 양지의 두 글자가 참으로 성인되는 학문의 바른 법이요 안장(眼藏)이라고 했다.
치양지설 이후부터 사상마련설(事上磨鍊說)이 분명하게 드러났고 그것이 치양지하는 수단이 되었다.
치양지는 일상생활에서 때와 곳을 따라 정당한 실천이 요구된다. 고정되어 있지 않은 일들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양지에 따른 판단과 처리가 있어야 하고, 이러한 요구들은 즉결(卽決)을 요하는 것이니, 정좌하여 명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왕수인은 천군만마(千軍萬馬)의 전쟁터에서 즉결이 요구되는 실지체험을 했기 때문에 사상마련이라고 하는 양지발현의 수단방법이 발상되었다. 치양지의 수단으로, 그의 만년부터 정좌에 의존하거나 독서에 의존하는 수양법을 버렸던 까닭에 사상마련법이 발견되었다.
또 대동(大同)의 인(仁)을 실현하기 위해 천지만물 일체의 인인 본체가 내 본연이요,
양치인 것을 철저히 깨우쳐서, 공리(空理)와 기능적 지식이 그것을 막고 어둡게 하는 줄을 알아서 이를 근본·근원부터 뽑아버리며 막자는 발본색원론(拔本塞源論)을 주장했다.
천하를 보되 한 집처럼 하고, 중국 보기를 한 사람과 같이 한다는 대동주의(大同主義)는 왕수인의 가장 만년 저술인 〈대학문 大學問〉의 간절한 주장이다.
답변 2 .마이지식 확인하기 사실 이 둘은 중국 사상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양대산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리학은 주자가 집대성하여 그 체계를 확립한 사상입니다.
성리학은 격물치지(格物致知)라고 하여 외부의 사물을 탐구하여 지식을 얻고, 자신의 관점을 넓혀서 수양을 하자고 합니다. 즉 수양의 방법이 외부 사물에 존재하는 것이죠...
구체적으로는 성현이 남긴 말씀이나 경전을 탐구하거나, 스승의 가르침을 구하는 것등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반면, 양명학은 이러한 성리학이 너무 이론적으로 치우쳤다고 보고 아는 것과 행동의 일치(지행합일; 知行合一)을 추구합니다.
양명학의 창시자인 왕양명은 인간이 본래 태어나면서부터 양지(良知;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고 실천하는 능력)를 가진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부모님께 효도해야 한다'는 사실도 남으로부터 배워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속에 이미 그것을 갖추고 있다고 보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외부의 유혹이나 자신의 욕망에 가려지거나, 아니면 자신의 의지가 부족하여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고 봅니다. 즉, 수양 방법이 자신의 내면의 세계에 존재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성리학에서는 성즉리(性卽理)라고 하고, 양명학에서는 심즉리(心卽理)라고 합니다.
앞의 性은 하늘이 인간에게 부여해 준 도덕적인 성품이지만, 끊임없이 외부로부터 수양을 하여 그것을 닦아나가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뒤의 心은 性과 비슷하지만 도덕적인 마음으로서 그 자체가 실천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은 제가 이해하는 내용을 글로 옮긴 것이라 다소 내용의 부정확한 면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참고문헌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 성리학과 양명학
(1) 성리학; 객관적 유심론
신유가(新儒家)의 정식 성립은 북송시대이다. 신유가는 고대 유가사상(공자와 맹자)을 근본으로 하여, 노장사상과 불교사상을 융합하여 만들어진 것이며, 새로운 체계를 수립했다.
그들은 유가 경전에 새로운 해설을 했다. - 주희의 사서집주(四書集註) - ... (중략) 주희(朱喜)는 일생 동안 연구에 몰두하여, 각종 학문 영역에서 매우 깊은 조예를 지녔다. 그는 문화의 위대한 정리자이다.
중국 문화사에서 공자에 다음 가는 문화의 위대한 정리자가 바로 주희이다.
그의 철학사상은 방대하고 엄밀하며, 그 이전의 사상가들의 많은 단편적 주장을 모아 하나의 정연한 체계를 이루었다. 그러나 주희 자신의 창의성은 적었다. (주희의 저작은 매우 많고, 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사서집주이다)
주희가 계승한 '정이'(이천선생이라 불림)는 사물의 그렇게 존재하게 되는 이치(소이연지리所以然之理; 근본원리)를 가장 중시했고, 형이상학적(理)인 것과 형이하학적(氣)인 것을 나누어 형이상학적 이치가 우주의 근본이라고 했다.
인생의 도(道)는 거경궁리(居敬窮理; 경에 거처하여 함양하고 이치를 탐구함)에 있으며, 한편으로는 경(敬)을 함양하는 수양공부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격물치지(格物致知; 구체적인 사물을 탐구하고 지식을 이룸)를 하여 생활의 최고 경지가 이치(理)와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도 했다.(이하 생략)...
(2) 양명학; 주관적 유심론
(전략)... 주관적 유심적 유심론의 최고 발전인 육구연의 학문은 이후 왕수인(왕양명)에게서 완성된다. 왕수인(王守仁; 양명선생이라 불림)은 인식론적으로 마음과 외부 사물이 둘이 아니라고 주장하여, 마음을 떠나서는 사물도 없다는 것을 증명해서 주관적 유심론의 우주론을 수립하고, 일체가 모두 마음 속에 있으며, 마음이 없으면 세계도 없다고 했다.
그는 주관적 유심론의 관점에서 인생을 논의하고, 인생의 최고 준칙을 치양지(致良知; 양지를 극진히 발휘함)라고 했다. 사람은 모두 본래 원만한 양지를 지니며 이것이 도덕의 근원이고 선악의 기준이 되며, 본래의 양지를 온전히 발휘하는 것을 지극한 선(善) 통달이라고 했다.
지식과 실천이 하나이며 실천을 떠나서는 지식도 없고 지식은 실천을 포함하며, 하나의 생각이 발동하면 이것이 곧 실천이라고 했다. 왕수인의 철학은 중국의 주관적 유심론의 가장 원숙한 발전이다.(왕수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문인이 편찬한 [전습록]이 있다) [중국철학대강] 上 까치 1998 참고 + 인터넷
성리학과 양명학의 차이점 철학연구 정리
성리학과 양명학의 차이점
(마음(心)을 바라보는 관점에대한 차이)
성리학이나 양명학이 맹자의 성선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계시죠.
맹자의 성선설은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보죠...
그 근거로 맹자가 이야기 하는 것이 사단(四端- 4가지 단서, 실마리)입니다.
그러므로 사회 혼란의 원인을 인간의 본성이 타락 한 것이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이 본성을 되찾기 위해 '집의'를 통해 '호연지기'를 기를 것을 주장하는게 맹자죠.
문제는 성리학이나 양명학이나 맹자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거죠..
즉 인간의 본성은 선한데..
성리학의 입장에서는 세상 만물은 다 '이'와 이것의 실체인'기'로 이루어져 있죠.
여기서 '이'라는 것이 '본연지성-즉 하늘의 이치로서 순수하고 지극하게 선한 본성'에 해당 합니다.
이러한 만물 생성의 근본 원리인 '이'가 형이하의 형체로서 나타나는 것이 '기'해당하는데 만물의 근본원리인 '이'는 선하지만 이것이 형체로 드러난 '기'는 기질에 따라 선, 악의 성품이 나타난다고 보는거죠.
그래서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것이 '존양성찰(양심을 보존하고 본성을 함양하여 나쁜 마음이 스며들지 않게 잘 살펴 단호하게 물리치는 것)' 과 '격물치지(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참모습에 대해 밝게 아는 것)', 그리고 존천리 거인욕(천리(순수하고 지극한 선한 본성)를 보존하고 인욕을 제거하는 것)' 입니다.
결국..눈에 보이는 세상 만물(형체니까 '기'에 해당하겠죠)을 끊임없이 탐구하고 공부하며 스스로 수양을 통해 선한 본성(마음)을 회복하려 하는게 성리학이죠.
반면 양명학의 입장은..'심즉리'. 즉 인간의 타고난 마음 자체가 이치('양지'라고도 하죠)이기때문에 수양과 공부를 통해 이치를 깨닫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이 타고난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는 게 중요하다고 보는 거죠. 그래서 강조가 되는것이 지행 합일이 되는 것입니다. 마음 자체가 이치를 알고 있으므로 이를 실천만 하면 된다는 거죠...
간략하게 다시 요약을 해서 비교하자면...
성리학에서는 순수한 마음을 되찾는것을 추구하는 반면..
양명학은 원래부터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라고 이야기 할 수도 있겠네요..
(참고로 어떤 참고서에서는 성리학은 격물 → 치지의 순이지만 양명학은 치지 → 격물의 순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양명학(陽明學)
▶ 요약 : 중국 명나라 중기에 태어난 양명(陽明) 왕수인(王守仁)이 이룩한 신유가철학(新儒家哲學).
본문: 중국 송나라 때 주자(朱子)에 의해 확립된 성리학(性理學)의 사상에 반대하여 명나라 때 왕양명(王陽明)이 주창한 학문이다. 성리학과는 대립된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육상산(陸象山)의 철학과 함께 심학(心學)으로도 불린다.
왕양명은 초기에 성리학(性理學)을 공부하다가 주자의 성즉리(性卽理)와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에 회의를 느끼고 육상산의 설을 이어 심즉리(心卽理) ·치양지(致良知)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주창하고 나왔다.
즉 효는 배우고 익혀서 원리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공경하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원리를 실현하는 것으로 보았으며 효심과 효행은 구분되지 않는 하나로 인식하여 이를 지행합일설로 표현한 것이다.
마음은 기(氣)이고 마음이 갖춘 도덕성 등의 이치는 이(理)라고 한 주자의 견해에 대하여, 만물일체와 불교의 삼계유심(三界唯心)의 입장에서 마음이 곧 이(理)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 이에 따라서 객관세계에 실재하는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지식을 이룩하는 이론적 방법으로도 대학의 격물치지를 해석한 주자의 입장에 반대하고, 외재사물(外在事物)을 문제삼으려면 이미 마음이 발동해야 하므로 물(物)을 마음이 발동하여 이룩한 사(事)로 해석하고, 밖에 있는 이치의 파악 이전에 파악하는 주체로서 마음의 선천적인 앎의 능력인 양지(良知)를 이룩하여 사물을 바르게 하는 방법으로 양명은 확정했다.
▶ 따라서 그에게는 인식과 실천이 둘이 아니라 하나일 수밖에 없었으며 《전습록(傳習錄)》 권2에 의하면 “앎의 진정한 독실처(篤實處)가 곧 행(行)이요, 행함의 명각정찰처(明覺精察處)가 곧 앎이니, 앎과 행함의 공부는 분리할 수 없다”는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이 제출된 것이다.
▶ 양명학은 중국에서는 귀적파(歸寂派) ·수정파(修正派) ·현성파(現成派)로 삼분(三分)되어 발전되었으며, 한국에서는 정주학파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조선시대의 계곡(谿谷) 장유(張維), 지천(遲川) 최명길(崔鳴吉), 하곡(霞谷) 정제두(鄭齊斗) 등이 연구하였으며 특히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어 나카에 도쥬[中江藤樹]가 이를 연구 발전시켰다.
▶ 양명학은 맹자의 선천적인 도덕심과 마음의 발양을 통해 타인을, 나아가 인간세계와 우주를 성실하고 바르게 하자는 이상을 형이상학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선가적(禪家的)인 색채 때문에 청대 실학자(實學者)들에 의해 비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연구 ·계승되는 유가철학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 성리학(性理學)
▶ 요약 : 중국 송(宋) ·명(明)나라 때 학자들에 의하여 성립된 학설.
▶ 본문 : 도학(道學)·이학(理學)·성명학(性命學) 또는 이것을 대성시킨 이의 이름을 따서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한다. 유학(儒學)은 중국 사상의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그것이 성립되던 상대(上代)에는 종교나 철학 등으로 분리되지 않은 단순한 도덕사상이었으며, 그 대표적 인물에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있다.
공자는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어지러운 사회를 바로잡으려고 천하를 주유(周遊)하면서 인(仁)과 예(禮)를 설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아 고향에 돌아와 육경(六經:詩·書·禮·樂·易·春秋)을 제자에게 가르치며 도리(道理)를 후세에 전하였다.
▶ 선진시대(先秦時代)에 이르러 유학은 도덕 실천의 학으로서 크게 일어났으나, 시황제(始皇帝)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큰 시련을 겪은 다음 한·당대(漢唐代)에는 경전(經典)을 수집·정리하고, 그 자구(字句)에 대한 주(注)와 해석을 주로 하는 소위 훈고학(訓學)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송·명 시대에 이르러 유학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 사회체제의 변화에 따라 노불(老佛) 사상을 가미하면서 이론적으로 심화되고 철학적인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 즉, 북송(北宋)의 정호(程顥)는 천리(天理)를 논하였고 그 아우 정이(程)는 ‘성즉리(性卽理)’의 학설을 폈으며, 그 밖에 주돈이(周敦)·장재(張載)·소옹(邵雍) 등이 여러 학설을 편 것을 남송(南宋)의 주희(朱熹:朱子)가 집성(集成)·정리하여 철학의 체계를 세운 것이 성리학으로, 일명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한다.
한편, 이와는 달리 육상산(陸象山)은 ‘심즉리(心卽理)’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을 왕양명(王陽明)이 계승하여 육왕학(陸王學)을 정립, 이것 역시 성리학이라 하나 대개의 경우는 성리학이라 하면 주자학을 가리킨다.
▶ 성리학은 이(理)·기(氣)의 개념을 구사하면서 우주(宇宙)의 생성(生成)과 구조(構造), 인간 심성(心性)의 구조, 사회에서의 인간의 자세(姿勢) 등에 관하여 깊이 사색함으로써 한·당의 훈고학이 다루지 못하였던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내성적(內省的)·실천철학적인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유학사상을 수립하였다.
그 내용은 크게 나누어 태극설(太極說)·이기설(理氣說)·심성론(心性論)·성경론(誠敬論)으로 구별할 수 있다.
하곡학
하곡학은 퇴계·율곡학과 함께 조선 3대 학파
정제두 아호 딴 하곡학 연구원초대 원장 맡은 정인재 교수강화도서 9월 13일 개원, 무료 강독
한국 양명학(주자학을 비판하며 지행합일의 실천을 강조한 유학의 한 흐름)의 개창자로 알려진 하곡 정제두(1649∼1736). 그의 아호를 딴 ‘하곡학(霞谷學) 연구원’이 13일 강화도(인천 강화읍 남산리 숭조회관)에서 문을 연다.
‘하곡학파’의 끊어진 명맥을 새로 잇는 자리다. 실학사상의 원류로서 하곡 사상을 새롭게 자리매김할 예정이다.강화도 곳곳에는 하곡의 유적이 있다. 올해는 하곡이 강화로 터를 옮겨 하곡학의 기틀을 마련한지 300년이 된다.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하곡의 계보는 이어졌다. 그의 학맥을 이은 위당 정인보는 ‘하곡계’라는 표현을 쓰며 하곡학파의 존재를 알렸다. 위당이 6·25전쟁 때 납북되면서 맥이 끊겼다.초대 연구원장을 맡은 정인재(69) 서강대 명예교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정 원장은
“‘강화학파’라는 오해의 소지가 많은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제 하곡학파로 제대로 부르면서 조선 사상사를 재조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강화학파 대신 하곡학파로 명명하는 이유는.“퇴계학을 안동학(도산서원이 있는 안동)이라고 하지 않는다.
하곡학 역시 강화학이라 해선 안 된다. 강화학이라 하면 강화지방의 역사·문물을 연구하는 지방학으로 오해된다.
하곡학은 학맥이 분명했던 철학사상이다. 퇴계학파·율곡학파와 함께 조선의 3대 학파로서 재정립돼야 한다.
”-하곡학의 특징을 요약하면.“
조선 후기 실학의 실질적인 발상지였다. 하곡의 직계 제자들은 ‘실심실학(實心實學)’이란 용어를 사용했다.
실심실학이 바로 하곡학의 핵심이다. 해방 이후 우리 학계에서 ‘실학’은 경세치용·이용후생의 실리적 측면만 주목 받았다.
하곡학으로 실학의 실체를 다시 파악해야 한다. 실학에서 학파로서 실제 존재했던 것은 하곡학파였다.
”-‘실심실학’이란 표현이 새롭다.“
‘실심’이란 자기를 속이지 않는 참된 마음을 가리킨다. 실학이란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부단히 변화하는 현실에서 실천하는 학문을 말한다. 실심실학은 자기의 사적인 실리만을 챙기면서 도덕을 빠트린 ‘실용실학’과 차별성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맹목적 명분에 빠진 이상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철학이다. 하곡학은 대의명분을 중시하던 조선시대에 실심을 강조하여 우리의 역사와 한글을 연구하는 실학의 원류가 되었다.”
-학맥은 어떻게 되나.
“하곡 이전에 양명학을 연구한 남언경·장유·최명길·이유 등을 하곡학의 연원으로 꼽을 수 있다. 하곡학파를 형성한 초기 인물로는 이광명·이광사·이광신·심육 등이 있다. 그 다음 세대로는 이영익·이충익·신대우·정동유·이면백 등이며, 또 그 다음 세대의 이시원·이지원·이건창·이건승·이건방을 거쳐 정인보에 이르렀다.”
-연구원을 강화에 세운 이유는.
“강화는 하곡의 실심실학의 고향이다. 하곡의 제자들은 강화에 하곡서원을 세워 줄 것을 영조에게 건의하였으나 두 번 모두 거절당했다. 그 후 하곡의 정신을 이어갈 서원이 없어, 신대우의 경우 한 평 남짓한 방 시렁에 책을 두고 어른 세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경전을 읽으면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어렵게 계승된 하곡학의 정신을 이어 갈 현대판 서원으로 하곡 기념관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연구원은 13일 개원식 직후 오후 7시부터 하곡이 즐겨 읽던 왕양명의 『전습록』 강독을 시작한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무료. 02-2168-4466.
9월 13일 개원하는 하곡학 연구원의 초대 원장을 맡은 정인재 서강대 명예교수.
조선 후기 실학 사상의 실질적 원류로서 ‘하곡학’을 재정립 하겠다고 했다. [김경빈 기자]
[중앙일보] 기사 입력시간 : 2010-09-10 오전 12:01:45글=배영대 기자 / 사진=김경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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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과 양명학의 비교와 분석
성리학과 양명학을 가장 극명하게 구분하는 것이 바로 '性卽理'와 '心卽理'입니다.
전자(性卽理)가 사물세계가 가지고 있는 본연의 성품을 理(또는 天理)라고 주장하는 주자학(성리학)의 명제이고, 후자(心卽理)는 性과 情을 분리하여 性을 주로 삼았던 성리학에 대해 반기를 들고, 왕양명(왕수인)이 주장하는 바 情이 속하는 마음(心)이 주체적인 자각의 중심이고 이것이 바로 理(天理)라 주장했던 명제입니다. 즉 성리학과 양명학은 간단하게 본다면, 性學과 心學으로 구분되어 설명할 수 있는 것이죠.
<성리학>
성립과 의미
중국에서는 이미 당대부터 종래의 훈고학(訓學)과는 다른 유교학풍을 세우려는 노력이 있었으며, 그 노력은 북송대에 이르러 성리학이라는 사상체계와 학문방법을 갖추기 시작했다. 그후 남송의 주희(朱熹 : 1130~1200)에 의해 성리학의 집대성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리학을 주자학(朱子學)이라 부르기도 한다.
명대의 왕수인(王守仁 : 1472~1528)의 학문·사상, 즉 양명학까지 성리학에 포함시킬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주자학만을 성리학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송대 성리학의 성립에는 불교 철학이 많은 영향을 미쳤으나, 성리학의 세계관과 불교의 세계관은 근본적인 성격이 달랐다.
불교의 세계관에서 현실의 자연과 사회는 궁극적으로 부정되어야 할 가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의 세계관은 자연과 사회를 도덕적인 본성을 갖는 것으로 인식하고 그 속에 존재하는 사물들의 개별성을 긍정했다.
주희에 의해 집대성된 성리학은 자연과 사회의 발생·운동을 이(理)와 기(氣)의 개념에 의해 설명한다.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것에 의해 우주 만물이 생성되며, 그런 점에서 기는 만물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그런데 기는 맑음과 흐림, 무거움과 가벼움 등에 따른 차이가 있으며, 따라서 기에 의해 구성되는 우주 만물은 차별성·등급성을 갖는다. 결국 자연·인간·사회가 모두 위계적 질서를 갖는 것이다.
한편 태극(太極), 즉 천리(天理)·이의 개념은 만물 생성의 근원이 되는 정신적 실재로서 기의 존재 근거이며, 동시에 만물에 내재하는 원리로서 기의 운동법칙이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만물의 존재 근거가 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만물에는 모두 이가 내재한다는 점에서 이의 개념은 인간과 사물의 원리적 보편성을 설명하는 범주이다.
이기론에 바탕을 둔 인간 이해는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개념을 중심으로 하는 인성론으로 체계화되었다. 본연지성은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본래 존재하고 있는 이로서, 도덕적 본성을 의미한다.
이에 반해 기질지성은 인간 형성에 관여하는 기에 의해 형성되는 것으로 육체와 감각의 작용으로 나타나는 인간 본능을 의미한다.
이 가운데 본연지성에 따른 행위는 선한 것이며, 기질지성에 따른 행위는 인욕에 의해 악으로 흐르는 경향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인욕을 없애고 천리를 보존하는 도덕 실천을 통해 본연지성에 따르는 생활방식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생활방식을 가지기 위해서 사물에 존재하는 천리를 인식하는 궁리(窮理)와 인욕의 발동을 억제하는 내면적 수양으로서의 거경(居敬)이라는 수양 방법이 제시되었다a>(→ 색인 : 거경궁리).
그런데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이의 구체적 내용은 삼강오상을 비롯한 유교적 윤리도덕이었으며, 나아가 관료제적 통치질서, 신분계급적 사회질서, 가부장제적·종법제적 가족질서를 포함하는 명분론적 질서였다.
따라서 성리학은 이의 보편성을 통해 유교적 윤리도덕과 명분론적 질서의 보편성을 교설하며, 인간은 명분론적 질서 속에서 각각의 계층적 지위에 합당한 일을 성실하게 수행해야 하는 존재로 설명했다.
결국 성리학은 명분론적 질서를 합리화하는 사상체계였으며, 명분론적 질서에 맞는 생활을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도덕적 의무라고 했다.
<양명학>
양명학의 형성
주자학은 그 체계가 완비되어 있어 원나라 때부터 수양과 실천을 위주로 할 뿐 이론적인 독창성이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 초기 진헌장(陳獻章)은 독서에 의한 자기수련방법에 대하여 의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하여 독서를 버리고 정좌(靜坐)를 통하여 사색한 끝에 '곳을 따라서 천리를 체인(體認)하는 방법'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의 문인 임광(林光)은 진헌장에 대해서
"선생께서 교육할 시초에 반드시 정좌케 하여 그 착한 실마리를 기르게 했다. 일찍이 말하기를, '사람이 학문하는 까닭은 도리를 듣고자 하는 것이다. 도(道)를 서적에서 찾으나 얻지 못하니 도리를 내 마음에서 찾는 것이 옳겠다'라고 했다."
이로써 진헌장의 심학(心學)은 양명학의 선구가 되었다. 왕수인은 저장 성[浙江省] 위야오 현[餘姚縣]에서 태어났으며, 젊어서는 많은 정신적 편력이 있었다. 그는 용장(龍場)으로 귀양가서
"성인의 도는 나의 본성만으로 스스로 넉넉하다. 따라서 밖으로 찾을 것이 아니다"
라고 자각하게 되었다.
또 주자의 즉물궁리(卽物窮理)는 심(心)과 이(理)의 간격을 좁힐 수가 없으므로 격물(格物)의 격(格)을 주자처럼 '이르다'[至]로 해석하지 않고, 바로잡는다[正]로 했으며, 물(物)을 주자처럼 사물의 이라 하지 않고, 심의(心意)가 있는 인간사(人間事)라고 해석했다.
즉 심의 발동의 부정(不正)을 바루는 것[正]을 격물이라고 했으며, 치지(致知)의 지는 지식이 아니라 양지(良知)이니 양지를 수렴하여 확충하고 실현하는 것을 치지라고 했다.
그리하여 심즉리(心卽理)에 귀착하게 되었다. 뒷날 왕수인이 성인의 학문은 심학(心學)이라고 했듯이, 심학이 체계화되는 기초가 여기서 마련되었다. 한편 구이양[貴陽]에 있을 때, 처음으로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주장하고, 저양(檍陽) 이후 정좌를 가르쳤으며, 강우(江右) 이래로 비로소 치양지(致良知) 세 글자를 제시하여 본체를 바로 지적했다.
흔히 왕수인의 교(敎)가 삼변(三變)했다고 하는데, 이는 지행합일설 - 정좌 - 치양지설로의 변화를 말한다. 지행의 본체는 심이며, 더욱 구체적으로는 양지(良知)이기 때문에 지식과 실천이 심에 의하여 합일된다고 했지만 실천과 지식의 합일을 위하여 정좌공부를 주장했다.
이로 인해 한때는 배우는 자가 깨우치는 듯했으나 오래됨에 따라 점차 고요한 것을 즐기고 움직이는 것을 싫어하는 폐단이 발생해 치양지공부(致良知工夫)로서 그 폐단을 타파했다. 이처럼 양명학은 치양지설에서 체계가 완성되었다.
원리
심즉리로부터 출발하여 지행합일설에 도달하고 마지막으로 치양지설에 의하여 완성된다.
심즉리
새로운 격물치지설을 주장하게 된 원리는 심즉리이다. 이는 육상산(陸象山)에서 발견된 심학의 원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심학은 왕수인에 의해 대성되었다. 그는
"심은 곧 이이다. 천하에 심외(心外)의 일이 있고, 심외의 이가 있겠는가"
라는 주체적인 자각에서 심즉리가 정립되었다고 했다.
심외에 사물이 없고, 심외에 일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객관적인 외계(外界)의 사물은 마음을 떠나면 소멸해 버린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가 남진(南鎭) 땅에서 바위 위에 핀 꽃을 보고,
"저 꽃은 스스로 피고 스스로 떨어지니 우리 마음과 무슨 상관이 있다는 것인가"
하고 질문했을 때, 왕수인은
"당신이 이 꽃을 보지 못했을 때는 이 꽃은 당신의 마음과 함께 고요했다.
그러나 당신이 와서 이 꽃을 보았을 때 이 꽃은 빛깔이 분명하게 되었다.
이 꽃은 당신의 마음 외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고 했다.
사람에게 의식되지 않을 때 그 꽃은 고요히 그대로 있었지만, 사람이 의식했을 때 비로소 아름답다·분홍이다·빨갛다 등의 평가와 판단으로 인하여 꽃은 꽃노릇을 하게 된다. 사물은 인간의 의식과의 관계에서 그 가치가 주어지고 세계질서에 참여하게 된다. 이것이 '마음 외에 사물은 없다'는 근본 뜻이다.
그러나 치양지설을 주장한 후부터 이보다 심에 중심이 옮겨졌다.
즉 심의 외화(外化)가 곧 자연적인 사물이라는 것으로 사물현상은 심의 현상물이라 했다.
지행합일
아름다운 꽃을 보는 것은 지(知)에 속하고 아름다운 꽃을 좋아하는 것은 행(行)에 속한다.
그런데 아름다운 꽃을 보았을 때는 이미 좋아하는 것이지 먼저 보고 난 뒤에 또다른 마음이 있어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왕수인이 지는 행의 시작이요, 행은 지의 완성이라고 했던 까닭이다.
즉 우리의 지식과 실천은 본래 합치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린(賀麟)은 지행합일신론(知行合一新論)에서 대략 "지는 의식활동이며, 행은 생리적인 활동이다. 지행이 비록 성질이 다른 활동이라고 하더라도 활동이라는 점에서는 합치한다. 우리의 의식활동은 생리적 조건과 물질적인 변화가 있게 된다. 이것을 인정해야 할 것이므로 지행합일이라고 한 것이다. 의식활동과 생리적인 활동은 동시에 발동되며, 시간적인 선후가 없다"
고 했다.
치양지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지는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양지이다. 왕수인은 49세 때에 치양지설을 주장했다. 치양지설이 창안된 뒤부터는 인욕을 버리고 천리를 보존한다는 등의 수양방법보다 오히려 양지의 실현이 중시된다.
양지를 실현한다면 모든 사사로운 폐단이 스스로 소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정을 바룬다', '사욕을 버린다'고 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치양지 그것으로 충분하다. 따라서 왕수인은 양지의 두 글자가 참으로 성인되는 학문의 바른 법이요 안장(眼藏)이라고 했다. 치양지설 이후부터 사상마련설(事上磨鍊說)이 분명하게 드러났고 그것이 치양지하는 수단이 되었다.
치양지는 일상생활에서 때와 곳을 따라 정당한 실천이 요구된다. 고정되어 있지 않은 일들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양지에 따른 판단과 처리가 있어야 하고, 이러한 요구들은 즉결(卽決)을 요하는 것이니, 정좌하여 명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왕수인은 천군만마(千軍萬馬)의 전쟁터에서 즉결이 요구되는 실지체험을 했기 때문에 사상마련이라고 하는 양지발현의 수단방법이 발상되었다. 치양지의 수단으로, 그의 만년부터 정좌에 의존하거나 독서에 의존하는 수양법을 버렸던 까닭에 사상마련법이 발견되었다.
또 대동(大同)의 인(仁)을 실현하기 위해 천지만물 일체의 인인 본체가 내 본연이요, 양치인 것을 철저히 깨우쳐서, 공리(空理)와 기능적 지식이 그것을 막고 어둡게 하는 줄을 알아서 이를 근본·근원부터 뽑아버리며 막자는 발본색원론(拔本塞源論)을 주장했다. 천하를 보되 한 집처럼 하고, 중국 보기를 한 사람과 같이 한다는 대동주의(大同主義)는 왕수인의 가장 만년 저술인 〈대학문 大學問〉의 간절한 주장이다 용지니요
훈고학(訓詁學)
훈고학(訓詁學)은 한나라(BC 206-AD 220) 시대부터 당나라(618-907) 시대까지 성행한 유학으로 경전의 자구 해석에 치중하였다. 후한(25-220)의 정현(鄭玄: 127-200)이 훈고학의 대표적인 학자이다.
당나라 시대에 편찬된 《5경정의(五經正義)》는 한나라 시대 이래의 훈고학(訓誥學)의 총결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송나라 시대의 성리학에서는 종래의 훈고학을 물리치고 4서(四書)를 존중하였고, 이에 따라 5경(五經) 중심의 훈고학(訓誥學) 또는 경학(經學)과는 그 성격이 다른 4서(四書) 중심의 경학(經學)이 일어났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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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나라의 훈고학
• 2 당나라의 훈고학
• 3 송나라의 성리학과 훈고학
• 4 주석
• 5 참고 문헌
한나라의 훈고학
한나라 시대에는 금문파(今文派: 한나라 시대의 문자로 쓰여진 경전을 텍스트로 한다)와 고문파(古文派: 한나라 시대 이전의 옛 자체(字體)로 쓰여진 경전을 텍스트로 한다)의 두 학파가 경전의 해석을 둘러싸고 대립 논쟁했는데, 그 논의(論議)를 통하여 훈고학은 발달했다.
정현(鄭玄)은 고문파(古文派)에 속하면서도 금문파의 학설을 받아들여 《논어(論語)》를 비롯하여 많은 경전에 주석(註釋)을 달았다. 그의 주석은 후세까지 경전 연구상의 기초가 되었다.
당나라의 훈고학
당나라 시대에는 유교의 근본적 경서인 《역경(易經)》·《시경(詩經)》·《서경(書經)》 · 《예기(禮記)》 · 《춘추(春秋)》 등 5경의 해석을 중심으로 해서 한(漢) 이래의 고전 해석학을 집대성한 《5경정의(五經正義)》가 편찬되었다.
《5경정의(五經正義)》는 5경의 주(注)나 해석의 혼란을 피하고, 표준적인 것을 만들기 위해서 공영달(孔潁達: 574-648) 등이 칙명에 의하여 종래의 주석을 취사선택한 것이다.
이것은 한나라 시대 이래의 훈고학(訓誥學)의 총결산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하지만 5경의 해석은 통일되었으나, 학문적인 고정화를 초래했다.
송나라의 성리학과 훈고학
북송(北宋: 960-1126)의 주돈이(周敦頤: 1017-1073) · 장재(張載: 1020-1077) · 정호(程顥: 1032-1085)·정이(程頤: 1033-1107)의 2정자(程子) 등의 새로운 학풍을 받아 남송(南宋: 1127-1279)의 주자(朱子: 1130-1200)에 의하여 집대성된 주자학 또는 성리학에서는 종래의 훈고학을 물리치고 새로운 주석(註釋)을 만들어 이것을 신주(新注)라 하였다.
주자는 유교의 근본 정신을 가장 잘 나타내는 것으로서 4서(四書)를 존중하여 《사서집주(四書集注)》를 저술하였고, 이에 따라 5경(五經) 중심에서 4서 중심의 경학(經學)이 일어났다.
성리학(性理學)은 12세기에 남송의 주희(朱熹)가 집대성한 유교의 주류 학파이다. 성리학의 어원은 주희가 주창한 성즉리(性卽理)를 축약한 명칭이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주희)의 이름을 따서 주자학(朱子學)이라고도 하고, 송나라 시대의 유학이라는 뜻에서 송학(宋學)이라고도 하며, 송나라 시대 이전의 유학의 가르침을 집대성한 새로운 기풍의 유학이라는 뜻에서 신유학(新儒學)이라고도 한다.
정호(程顥)와 정이(程頥)에서 주희(朱熹)로 이어지는 학통이라는 뜻에서 정주학(程朱學), 정주 성리학(程朱性理學), 또는 정주 이학(程朱理學)으로도 불린다. 이학(理學) 또는 도학(道學)이라고도 한다.
학문의 목적은 위기지학(爲己之學, 자기(수양, 수기)를 위한 학문)이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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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주자 이전
• 2 주자의 집대성
• 2.1 이기론(理氣論)
• 2.2 도덕론(道德論)
• 2.3 수양론(修養論)
• 3 후대에 미친 영향
• 4 성리학자
• 4.1 여성 학자
• 5 함께 보기
• 6 주석
• 7 참고 문헌
주자 이전
대략 진종조(眞宗朝)로부터 인종조(仁宗朝, 998-1063)에 걸친 시기에 송나라의 학문 문화가 새로운 경향을 가지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범중엄(范仲淹)이나 정학(正學)의 4선생으로 호칭된 호원(胡瑗), 손복(孫復), 석개(石介), 진양(陳襄) 등은 각기 특색있는 학풍이나 주장을 가지고 서로 잇따라 나와 성리학의 선하(先河)를 이루었다.
범중엄은 그 명절(名節)과 고매한 식견으로 시대의 선구자로서 계몽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특히 서하(西夏) 경영에 정치적 수완을 보여 중앙정부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였다. 학문적으로는 6경(六經)에 통하였으며 더욱이 역(易)에 정통하였고 장횡거(張橫渠)에게 《중용》을 주어 유학의 문에 들어가게 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호원(胡瑗, 933-1059)은 안정 선생(安定 先生)이라고 호칭되며 교육가로서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는데, 정이천(程伊川)도 그 문하에서 배운 준재(俊才)이다. 그의 <주역구의(周易口義)>는 역(易)을 이론적으로 해명하고 한대 유가(儒家)와 같이 상수론(象數論)을 혼합하지 않았다. 이천(伊川)의 역전(易傳)에 그 영향이 보인다.
손복(孫復, 992-1057)은 태산선생(泰山先生)으로 호칭되었다. 진사 시험에 합격하지 못해 태산(泰山)에 은퇴하여 강학(講學)에 힘을 쏟았으며 <춘추존왕발미(春秋尊王發微)>를 저술하였다.
그는 이 저술에서 종래의 주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스러운 자기의 해석을 전개하고 있지만 그중에도 다시 <춘추(春秋)>의 본지(本旨)를 정명정분(正名定分)에 있다고 하고 또 <춘추>에 실린 사실을 전부 도의에 위배된 것뿐이라고 하였다.
손복 및 그 제자인 석개(石介, 1005-1045)는 춘추론을 통하여 중국(宋王朝)의 정통성과 고전사상의 정통적 부활 및 양(楊)·묵(墨)·불(佛)·노(老) 사상의 배격을 주장하여 송조 국가체제의 정신적 지주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진양(陳襄)은 <대학(大學)> <중용(中庸)>에 의거 실천도덕론을 전개하여 <성명기(誠明記)>와 함께 송대 도덕의 궁리진성(窮理盡性)·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의 방향을 잡아 놓았다. 그의 지방정치에 있어서의 권농정책(勸農政策)이나 향촌민(鄕村民)의 교도에 이용한 <고령선생권유문(古靈先生勸誘文)>은 남송(南宋)의 주자(朱子)에 이르러서 크게 채택되어 그 모범이 되었다.[1]
주자의 집대성
주자(朱子)의 학문은 북송(北宋)에서 일어난 신경향의 학술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여 이것을 절충하고 또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것이다. 또 4서(<大學>·<中庸>·<論語>·<孟子>)를 특별히 중요시 하여 주석을 하였고, 《대학》의 <성의(誠意)>장의 주해는 죽기 3일 전까지 계속해서 수정했다.
이기론(理氣論)
이기론에서는 정이천(程伊川)의 2원론(二元論)을 계승하여 다시 더욱 상세·엄밀하게 체계화하였다. 형이상적(形而上的), 형이하적(形而下的) 논리 구별을 분명하게 하였다. 또 주돈이의 태극론(太極論)도 받아서 태극(太極)은 오직 1개의 이(理)의 자(字)라고 규정하여, 이(理)=태극(太極)=도(道:形而上的)와 기(氣)=음양5행(陰陽五行:形而下的)인 것은 형이하(形而下)의 음양2기(陰陽二氣)의 교감에 의해 생성되는 개체(個體)와 상즉불리(相卽不離)인 것이라고 말하였다.
도덕론(道德論)
도덕론에서 이천이 명(命)·성(性)·이(理)·심(心)을 동일하게 보았기 때문에 <성즉리(性卽理)>, <심즉리(心卽理)>라고 한 데 대하여, 주자는 <성즉리(性卽理)>만을 취하고 심(心)은 형이하적(形而下的)인 것,
즉 음양2기(陰陽二氣)의 작용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사람의 성(性)은 이(理)이고 지선(至善)한 것이며 사람의 본연의 것이라고 하였다. 심(心)은 이(理)가 있는 곳, 이가 작용하는 장소이다.
또한 심(心)의 발동은 이(理)에 의하여 있게 되는데, 그 이야말로 사람에게 본래의 성(性)이라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사람의 본연의 성(性)이 지선(至善)하지만 현실에는 악도 존재하고 악인도 있다.
그것은 기품(사람도 氣의 집합에 의하여 이루어져 있다.
그 氣가 모이는 방법, 氣를 받는 방식은 개별적인 것이라고 朱子는 생각하였다)에 과불급(過不及)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理)=태극(太極)이라고 하는 형이상적인 것은 항상 사사물물(事事物物) 속에 있다. 사사물물이 없으면 다라서 이(理)는 없다. 즉 1물(一物)에 1리(一理)=1태극(一太極)이 있는 것이다. 논리적 과정을 말하면 이(理)가 있어야 물(物)이 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물(物)이 없는 이(理)는 없다.
이런 까닭으로 이기(理氣)에 선후는 없다고 한다. 또 주자에 의하면 1물(一物)에 1태극(一太極)이 있는데, 이 이(理)는 즉 만물의 이(理)이다. 달이 호수나 냇물에 비쳐도 달은 원래 하나의 것이다. 일반자(一般者)·형이상자(形而上者)는 항상 개체(個體)에 내재하여 개체(個體)를 통하여 일반자(一般者)는 실현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가 도덕론에 적용되면 사람은 자기의 본연(本然)의 성(性)(理)을 회복하는 것이 인간으로서의 덕을 완성하는 것이며, 개별적 인간은 실천에 의하여서만 일반자(一般者)로서의 도(道)∼이(理)-성(性)을 구현할 수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수양론(修養論)
수양론은 우선 격물치지(格物致知)이며 궁리진성(窮理盡性)인 것이다. 주자에 의하면 사사물물의 이를 궁구한다고 하는 것은 결과적으로는 나를 궁구하는 것이며 나를 다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물(物)의 이(理)와 심(心)의 이(理)와 심(心)의 이(理)와의 통일적인 파악에는 아직 불충분한 점이 있었다. 육상산(陸象山)이나 명(明)의 왕양명(王陽明)이 그 정곡을 찔러 비판했다.
후대에 미친 영향
주자사상(朱子思想)이 송대 이후 끼친 영향은 지극히 크다. 주자학은 주자의 생전에 있어 지방관적, 재야적(在野的) 입장에서의 사상을 구축했음에도 불구하고 원(元)·명(明)을 거쳐 청조에 이르기까지 관학적(官學的)인 아카데미즘의 주류를 형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주자학은 조선이나 일본(日本)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늘날 주자의 사상이 봉건사회에 있어서 지배계급의 상하적 신분의 확립을 지향하는 논리라고도 하지만, 그 학식·논리 구성·학문적 태도는 의연히 중국사상 내지 동양사상의 해명에 있어 중요한 지위를 점거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기도 하다.[2]
다만 진로의 방향을 과거제도 한가지에만 집착하게 해 엔터테인먼트나 레크레이션 등의 중요성을 경시하고 인위적으로 글공부만 강제하는, 지나치게 일방적인 방향으로 기울게 했으며, (정치 등에서) 특정 대상에 대한 음해 공작, 사물을 극단적으로 보는 인습 등은 그 근원이 성리학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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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
《순자(筍子)》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BC 403~221) 말기의 유가 사상가 순자(荀子: BC 298?~238?)의 말과 글을 모은 것이다.[1] 《순경신서(荀卿新書)》·《손경자(孫卿子)》라고도 불린다.[1]
이 책의 〈성악(性惡)〉 편에서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반대하여 성악설(性惡說)이 주장되어 있다.이 책의 저자인 순자는 한나라에서는 유가의 정통적 인물로 보았으나, 송나라 시대의 성리학의 학풍 속에서 성악설이 비난받으면서부터 유가의 이단자로 간주되어 왔다. 그에 대한 재평가는 청나라 말기에서야 다시 이루어졌다.
이 책은 순자의 사상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진 시대(先秦時代)의 유가(儒家) 사상의 총괄서로서 큰 의의를 가진다.
개요
전부 3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래는 322편이었던 것을 전한(前漢: BC 206~8) 시대에 유향(劉向)이 중복되는 290편을 제거하여 32편으로 정착시켰다. 《순자(荀子)》에 처음으로 주석을 한 것은 당나라(唐)의 양량(楊凉)인데 32편을 20권으로 나누었고 순서도 조금 변경하였다.
내용은 철학 · 심리 · 도덕 · 논리 · 교육 · 정치 · 경제 · 전략 · 사상가 비판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운문(韻文) · 설화에 대한 내용도 들어있다. 다루는 주제가 다양하고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문체도 각 부분에 걸쳐 상당한 차이가 있어 동일인의 저술이라고 볼 수는 없다.
특히 〈성악(性惡)〉 편에서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반대하여 인간은 악을 좋아하고 이익(利)를 좇기 쉬우므로 유가의 경전을 배우고 예(禮)를 지켜서 이러한 성품을 변화시키고 극복하여야
"인격이 완성"(僞 = 人爲)된다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였다.
양량(楊凉) 이후 송학(宋學)의 발흥과 함께 4서의 도통이 중시되어 《순자》는 유교에서 이단의 서적으로서 오랫동안 배척되었다.
내용
]최초의 '권학(勸學)', '수신(修身)' 편은 개인의 수양을 논하였는데, 좋은 환경 속에서 양사(良師)를 따라서 유가의 경전을 배우고 예를 지키는 일에 의하여 인격이 완성된다고 한다.
'성악' 편에서는 맹자의 성선설에 반대하여 인간은 악을 좋아하고 이(利)를 좇기 쉬우므로 예를 배워서 '위(僞) → 인위(人爲)'로 변경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구체적인 방법에 관해서는 앞서 말한 '권학' 편에 기술하고 있다.
'천론(天論)', '비상(非相)', '정론(正論)'편은 전통적 사고, 미신, 숙명론의 타파를 기도해 본 것이다. 특히 천론은 천(天)에 대한 종교적 이해에서 벗어나 천(天)을 인간생활과는 무관계한 자연 존재라고 인정하였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인간성의 참된 이해가 가능토록 한 점에서 유가사상사에 있어서 특필해야 할 의의를 갖는다.
'정명(正名)' 편은 논리와 인식의 문제에 대하여, '해폐(解蔽)'편은 방법론의 문제에 대하여, '악론(樂論)'편은 음악 이론에 대하여, '왕제(王制)' '부국(富國)'편은 사회에 있어서의 정치적 원칙을, '의병'편은 군사 이론에 대하여 각각 기술하고 있다.
'비12자(非十二子)' 편은 공자, 자공에 대해 존경하는 태도를 보인 외에 자사, 맹자 등을 포함한 12명의 사상가를 비판한 것인데 선진 제자(先秦諸子)의 사상을 알게 하는 점에서 귀중한 기록이다.
'성상(成相)'편은 민가의 체재를 취하여 순자의 정치사상을 서술한 것이며, '부(賦)'는 그의 문학작품이다.
그러나 양량(楊凉)이 19권과 20권에 수록한 각편('大略'에서 '堯問'까지의 6편)은 순자의 후학의 기록으로 여겨진다.
순자 (荀子)
순자(荀子, 기원전 298년? ~ 기원전 238년?)는 고대 중국의 전국시대(戰國時代,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1년) 말기의 유가 사상가이자 학자이다. 이름은 황(況)이다. 전한 선제의 이름이 비슷하였고, 이를 피하기를 위해서 손황(孫況)이라고도 불렀다. 경칭으로 순경(荀卿) 또는 손경자(孫卿子)로도 불린다.
공자의 사상 중 예(禮)를 강조하여 발전시켰는데, 사람의 본성은 착하다는 맹자의 성선설(性善說)에 반대하여, 악한 본성을 예(禮)를 통해 변화시켜 선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하였다.
그의 성악설은 자신의 저서 《순자》의 〈성악(性惡)〉편에 나타난 화성기위(化性起僞: 본성을 변화시켜 인위를 일으킨다)라는 명제로 대표된다. 즉, 사람의 본성은 악하여, 날 때부터 이익을 구하고 서로 질투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그대로 놔두면 싸움이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고치기 위해서는 예의를 배우고 정신을 수련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순자는 한나라에서는 정통적인 유가의 인물로 여겨졌으나, 송나라 시대 성리학의 학풍 속에서 성악설이 비난받으면서부터 그 이래로 오랫동안 유가의 이단자로 간주되어 왔다.
그에 대한 재평가는 청나라 말기에서야 다시 이루어졌다.
그의 책 《순자》 전 20권은 오늘날 유교 연구의 귀중한 문헌이다.
생애
50세(혹은 15세) 때 처음으로 제나라에서 삼도좨주라는 벼슬을 했으나, 모함을 받고 물러나 초나라로 가서 여생을 보냈다. 진(秦)에 의한 전국통일(기원전 221년) 전야(前夜)의 사상계에서 활약했으며, 초(楚)나라에서 정치 실무를 담당한 일도 있다고 한다.
사상적으로는 천(天)의 사상을 발전시킨 자사(子思)나 맹자와는 다른 예(禮)에 뛰어났던 유교 계통에 속한다. 맹자 등의 유교사상뿐만 아니라 제자백가(諸子百家)로 불리는 전국시대의 다른 학파의 사상까지 비판·섭취하여 유교로서는 상당히 특이한 사상체계를 수립했다.
순자(荀子)는 그의 저술이라고 하며, '천론(天論)'·'예론(禮論)'·'성악(性惡)' 등의 여러 편 외에 그의 제자나 그 밖의 관계되는 것이 들어 있다.
사상
순자의 사상
순자의 사상에서 바탕이 된 것은 예를 지상(至上)의 것으로 한다는 태도이다. 공자는 있는 그대로의 종교의례·제도·관습을 예로 삼아 성인(聖人) 주공(周公)에 의해서 집대성된 중국인의 전통적 문화유산으로서 신뢰하고 존중했다.
예는 공자의 경우 아직 덕목(德目)은 되지 못했었다. 순자는 기본적으로는 공자의 이러한 태도를 지지한다.
그도 예는 성인(聖人)의 작위(作爲)에 의한 것으로 영원히, 즉 시대의 제약을 초월하여 무한하게 타당성을 갖는다고 한다.
그러나 상고(上古)의 성왕(聖王) 업적은 시대가 오래되므로 전승(傳承)이 완전하지 못하여 후세 사람으로는 그 전모를 알 수 없다. 때문에 상고의 성왕, 즉 '선왕(先王)'이 만든 예는 후세의 왕, 즉 '후왕(後王)'의 업적을 보고 추정해야 한다고 하여 예를 생각하는 기준을 동시대로 옮겨버린다.
그리고 공자처럼 예를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순자는 후왕이 예의 내용에 새로 추가하는 요소인 법률에도 성왕의 예와 같은 권위를 인정하고 그것을 정당한 것으로 인정했던 것이다. 그 결과 정치사상에서 그는 공자 이후의 덕치주의(德治主義) 전통에 새로 법치주의의 요소를 추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맹자의 성선설에 비판
맹자는 공자가 예를 실천하는 인간의 주체성에서 발견한 덕성(德性), 즉 인(仁)을 인간에게 구비되어 있는 하늘(天)의 목적을 가진 법칙성, 하늘의 의지로 생각하고, 이것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은 선이라고 했다.
순자는 욕망을 지니고 있는 그대로의 인간에 눈을 돌린다. 그도 또한 인간의 덕성(德性)을 부정하지 않는다.
체내에서 5관(五官)을 통제하는 자율심(自律心)을 '천관(天官)'이라 부르고 이것이 선을 이루는 주체라 하여 중시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즉 인간에게 선이 되려는 자율심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은 악이라고 순자는 맹자를 비판한다. 근대철학의 아버지라는 데카르트는 명저 <방법서설(方法序說)>의 첫머리에서
"이성(理性)만큼 세상에 널리 퍼진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에게 없는 것이라면 무엇이건 모두 탐내지만 이성은 아무도 탐내지 않기 때문"
이라고 역설(逆說)을 전개하고 있다. 순자도 그 초점은 데카르트와 다르나 논법은 같다고 하겠다.
"원래 덕이 박한 자는 후덕해지기를 원하고 추한 자는 아름다워지기를 원하며 가난한 자는 부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만약 자기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이 있다면 반드시 그것을 외부에서 구하게 마련이다" 순자는 맹자의 성선설을 이해하면서 이를 야유하고 있다.
맹자의 인간론에 비판
맹자의 인간론에 대한 순자의 비판에서 그 초점은 인간의 덕, 즉 인간의 마음에 구비되어 있는 자율성을 하늘의 목적을 지닌 것 내지 하늘의 의지를 담당하는 것으로 하는 맹자의 사고방식에 대한 부정에 있다.
순자도 인간의 마음에는 법칙성에 지배되는 측면이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하늘의 기능이라고도 말한다. 그러나 순자는 자연성·법칙성으로서의 하늘을 시인하는 것으로서, 하늘이 목적이나 의지를 갖는 것은 승인하지 않는다.
초목의 생성, 4계(季)의 추이(推移)와 같이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 하늘의 작업이며 하늘의 기능은 완성된 '구체적인 결과는 알 수 있지만, 그 원인이 된 무형(無形)의 곳은 알 수 없다'는, 즉 신비성이 하늘의 기능에는 있다는 것이 순자의 하늘사상이다.
이것은 도가(道家)의 '도(道)' 내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사고방식과 같으며 거기에 일종의 불가지론적(不可知論的) 태도, 즉 인간의 감각을 초월한 하늘·신·부처와 같은 절대자에 관해서는 인간이 알 수 없다고 하는 태도가 있다.
그리고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서는 천지(天地) 등의 자연현상에 관한 지식은 현상이 뚜렷해진 것에만 한하고 그 이상은 추구하지 않을 것, 마음을 청명하게 하여 5관(五官)의 기능을 정상적으로 갖춰 자연이 명하는 대로 순응하며 자연스러운 본래의 감정을 도야할 것이라고 도가(道家)의 가르침과 똑같은 경험주의적인 신중한 인생 태도를 취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순자는 유가로서 도가가 아니다. 그리고 인간의 사회생활에서 가장 분명한 것은 성왕이 만든 문화, 즉 예(禮)라고 하여 예를 절대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이 바로 순자의 성악설의 초점이라고 하겠다.
사상의 영향
순자가 생각하는 예의 내용에는 새로운 요소인 법률이 들어 있다. 순자는 맹자가 생각했던 왕자의 덕의 감화력에 의한 정치방식, '왕도(王道)'에 준하는 것으로서 공자나 맹자가 엄격하게 배격했던 권력에 의한 신상필벌식(信賞必罰式)의, 즉 법치주의 정치 본연의 자세로서 '패도(覇道)'의 존재가치를 시인했다.
맹자는 군주는 하늘의 의지인 '천명(天命)'과 '백성의 소리'로 정당화된다고 했다.
하늘의 의지를 부정하는 순자는 '백성의 소리'만은 그 정당성의 근거로서 남겨 놓았다.
그러나 그의 문하에서 배출된 법가사상(法家思想)의 대성자(大成者)인 한비자(韓非子, ?∼BC 233)는 '백성의 소리'마저 부정하여 당시의 권력자가 제정하는 법령에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했다.
이러한 점에서 순자는 유가와 법가를 결부하는 구실을 다한 사상가라고 하겠다. 또한 덕치주의와 법치주의를 포함하는 정치사상은 한제국(漢帝國)의 국교적 존재가 되는 유교의 사상적 준비라고 할 수 있겠다.
저서
순자와 그 제자들의 저작은 전한 말에 정리되어 《손경신서》(荀卿新書) 32편으로 정리되었다. 당의 유향은 이것을 정리하고 책 이름을 《순자》로 고치고 주석을 더하여 20권으로 펴 냈다. 나중에 《손경신서》는 사라지고 현존하는 것은 모두 양주본의 계통이다.
사서오경(四書五經) 또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유교의 경전으로, 경전 중에 가장 핵심적인 책이다.
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말하고, 삼경은 "시경", "서경", "역경"을 말한다. 삼경에 "춘추"와 "예기"를 합해 오경이라 부르고, 합해서 사서오경이라 부른다.
[편집] 사서
송나라에 이르러 성리학 체계가 성립하면서 주희가 《예기》에서 일부를 〈대학〉과 〈중용〉의 두 편으로 발췌하면서, 논어·맹자와 함께 사서 체계를 확립했다.
• 논어 (論語)
• 맹자 (孟子)
• 대학 (大學)
• 중용 (中庸)
[편집] 오경
• 시경 (詩經)
• 서경 (書經)
• 역경 (易經)
• 춘추 (春秋)
• 예기 (禮記)
악경(樂經)을 포함하여 육경이라고도 하는데, 악경은 전해지지 않는다.
유교(儒敎)
유교(儒敎)는 중국 춘추시대(기원전 770~403) 말기에 공자(孔子)가 체계화한 사상인 유학(儒學)을 종교적 관점에서 이르는 말이다. 시조 공자의 이름을 따서 공교(孔敎)라고도 한다. 지켜야 할 인륜의 명분(名分)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하여 명교(名敎)라고도 한다.[2]
유교의 특징 또는 핵심 사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유교는 수기치인의 학이라 할 수 있다. 즉, 유교는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 학문이며 또한 그것을 향한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유교는 전국시대(기원전 403~221)에는 제자백가의 하나인 유가(儒家)로 등장했지만, 전한의 무제(재위 기원전 141~87) 때 국가 정통의 학문이 된 후로는 중국의 학문과 사상계를 대표하게 되어 현대의 중국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정치와 국민생활에 영향을 주었다.
유교의 주류는 전국시대에는 맹자로 대표되는 내성파의 학문과 순자로 대표되는 숭례파의 학문,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의 훈고학과 경학, 송나라 시대의 주자학, 명나라 시대의 양명학, 청나라 시대의 고증학 등으로 발전 또는 변천되었다.
역사
개요
공자의 사후, 공자의 제자들은 증자(曾子) · 자사(子思)의 계통에 속하는 내성파(內省派)와 자하(子夏) · 자유(子遊)의 계통에 이어지는 숭례파(崇禮派)의 2파로 나뉘었다.그 후 내성파의 전통은 맹자에게로 이어졌고 숭례파의 전통은 순자에게로 이어졌다. ] 그리고 순자의 사상은 제자백가의 법가가 사상의 한 유파로서 성립될 수 있는 근거를 주어 한비자 등에 의해 법가가 성립되었다.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에 훈고학과 경학이 성립 · 발달하였다. 한나라 시대에서 《시》와 《서》 외에 《역》·《예》·《춘추》가 경서에 추가돼서 오경이 성립되었다.
송나라(960~1279) 시대에 성리학이 성립되었다. 성리학에서는 선진시대(先秦時代: 기원전 221년 이전) 유학의 도통(道通: 유학의 도가 전해져 이어온 계통)이 강조됨으로써 공자 · 증자 · 자사 · 맹자의 내성파의 계보가 중시되어 공자의 《논어》, 증자의 《대학》, 자사의 《중용》, 맹자의 《맹자》의 4서가 성립되었다.[4]
명나라 시대에서는 양명학이 성립되었고, 청나라 시대에서는 고증학이 크게 흥기하였다.
성립[편집]
유교는 시조 공자의 이름을 따서 공교(孔敎)라고도 하는데, 그 내용은 신분의 존비와 인애(仁愛)를 근본으로 하면서 수신(修身) · 제가(齊家) · 치국(治國) · 평천하(平天下)의 길을 가르치는 일종의 정치학 · 윤리학이다.[1] 따라서 유학이라고도 한다.[1]
공자는 자기의 교학(敎學)이 정교일치(政敎一致)의 성덕(聖德)을 갖춘 옛 성왕(聖王, 선왕)들의 도(道)에 합치하는 것으로 생각했다.[1] 또한 이 "선왕의 도"는 주공(周公)을 비롯하여 주 왕조의 창설자들에 의해 밝혀져서 《시(詩)》나 《서(書)》 등의 경전(經典, 경서)에 수록되어 있다고 생각했다.[1]
공자의 사상은 전국 시대에는 맹자(孟子) · 순자(筍子) 등에 의해서 계승되어 진(秦) · 한(漢)에 미쳤는데, 이 시기에 이르러서 《시》와 《서》 외에 《역(易)》·《예(禮)》·《춘추(春秋)》가 경서에 추가돼서 오경(五經)이 성립되었다. 오경의 성립은 중국인 공통의 규범이나 신앙이 유가 사상을 핵으로 하여 집대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나라의 무제는 전 중국의 지배자로서의 한왕조의 권위를 이데올로기 면에서 정당화하기 위하여 동중서(董仲舒) 등의 협력을 얻어 유교를 한제국 공허(公許)의 학문으로 채용하였다.[1]
이것으로 유교는 강대한 전제 권력에 의해서 전면적으로 지지를 얻게 되고 관료와 그 후보자적 존재에게 있어서는 필수적인 교양이 되었다.[1] 따라서 이전에 유교가 재야 여러 학문의 하나였던 때에 비해서 유교는 차차 그 사상적 내용의 긴장성을 잃어갔다.[1]
발전
유교는 춘추전국시대 이후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송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등 고대 및 중세를 거쳐 변함 없이 중국의 대표적 이데올로기였다. 일시적으로 도교나 불교가 국가 핵심 이념이 될 때도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근본은 유교였다.
유교는 고대의 훈고학적 유교를 거쳐 송나라 때 신유학과 도교의 형이상학적 개념을 받아들여 주자와 정자에 의해 성리학으로 발전하였다. 성리학은 한국으로 건너와 조선왕조의 국가 이데올로기로서 자리잡는 등 한국에 큰 영향을 주었다.
명나라 때는 사변적인 성리학에 대한 반발로 왕양명에 의해 양명학이 등장하였다. 양명학은 사물의 이치를 파악 이전에 마음의 선천적인 앎의 능력인 양지(良知)를 강조하였다. 조선 후기 북학파, 실학에 큰 영향을 주었으며, 강화도를 중심으로한 강화학파의 학문이기도 하였다.
청나라에 이르러 객관적인 증거에 의한 실증적이고 귀납적인 연구를 강조하는 고증학이 크게 흥기하였다.
유교는 동북 아시아, 즉 한국과 일본 등 중국의 인접 국가를 비롯한 나라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쳐 특히 한국의 경우 삼국시대 이후 고려를 거쳐 조선 왕조 때에는 국가 지배 이념이 되었다.
변천
본래 공자의 유교라는 것은 인류 보편적 질서, 인간 내면의 심미적인 부분을 중점을 두는 내용이었다. 또한 고대 사회의 야만스러운 풍속을 정리 하기를 원했으므로 사회 본편적 질서, 계급 간의 상호 존중, 등을 이론화하였다.
한나라 시대 초기에는 순장도 존재하였고, 왕족 간의 근친혼도 존재하였다. 이것은 유교가 통치 이념이었지만 당시에는 교리화되지 않았으므로 세부적 제반 사항이 존재하지 않았던 이유이다. 한나라 시대는 유교 이론은 자연스러웠고 성리학의 획일성, 계급성을 내포하지는 않았다.
한나라 중기를 거쳐 후대에 이르면 유교가 어느 정도 자리 잡고 순장, 근친혼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 시대와 같이 여성의 평생 순결을 강조하거나, 지나친 계급 체제의 합리화는 유교에 존재하지 않았다.
성리학은 유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으나, 본질적으로 다른 요소가 포함된다. 유교 추종자들은 공자의 이상을 교리화하고 강제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졌던 것으로 이해되며, 성리학으로 발전 시킨다. 또한 명나라 시대에는 권력자에게 충성을 다하고, 지배 체제를 강화화기 위하여 성리학 이론을 이용하게 되었다.
명나라는 성리학을 이용하여 사회를 통제하기를 원했다. 이런 현상은 조선도 마찬가지였다. 성리학이 고려 후기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나, 후기로 갈수록 지나치게 계급화되고 교리화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또한 여성에게 가혹한 법칙들이 생겨났다. 성리학의 이와같은 문제들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고, 성리학이 유교 이론에서 파생되었다는 근거 때문에 유교도 비난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러나 성리학에 제기된 문제 때문에 유교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이론 또한 문제가 있다. 공자가 유교를 창시하였으나, 그 후 맹자, 순자 등을 거쳐 변형이 되었고, 명나라 때의 성리학은 공자가 창제한 유교와 같다고 하기에는 도그마적인 요소가 너무 많았다.
따라서 공자가 창시한 유교, 맹자와 순자가 개량한 유교, 교리화된 성리학은 분리되어 다루어져야 한다. 실제로 그 이론들도 철학적 요소가 다르며, 그것이 적용되는 양상도 시대에 따라 모두 달랐다. 한나라 시대 유교가 국가 이념이었으나, 명나라 시대와 같이 억압적인 규칙이 없었던 것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사상
유교(儒敎) · 유가(儒家) 또는 유학(儒學)은 본래 춘추시대 말부터 전국시대에 걸쳐서 배출된 제자백가(諸子百家) 중의 한 학파에 불과했으나 한나라(漢) 왕조의 권력 안정과 함께 그 통치를 정당화하는 이론으로서 중시되어 중국의 정치사상 중에서 정통적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중국에 왕조 정치 체제가 존속한 2천년 동안 유학은 국가의 질서를 뒷받침하는 교학(敎學, 즉 儒敎)으로서 정통사상의 지위를 계속 차지하였다. 그 오랜 기간 동안에 유학은 각 시대의 정치 상황이나 다른 사상과의 관계에 대응하여 그 내용을 변화시켜 전개하였다.
"유(儒)"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서는 유약(柔弱)을 의미한다든가 "수(須=鬚, 턱수염)"와 통하여 노인(老人)을 의미한다든가의 말이 있어 일정하지 않으나, 대체로 묵가(墨家)나 법가(法家)와 같은 타학파의 사람들이 아래에 서술된 바의 특징 또는 성격을 가진 학파를 가리켜서 붙인 명칭인 것으로 보인다.
핵심 사상
유교사상의 특징 또는 핵심 사상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學), 즉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삼는 학문이며 그것을 향한 실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수기
수기(修己), 즉 자기(己)를 닦는다(修)는 것은 개개인의 선천적인 도덕성을 신뢰하여 그것을 정직하게 신장(伸長)하려고 노력하는 일이다. 맹자(孟子)의 성선설(性善說)은 그것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유교에서는 자기의 도덕성의 완성을 목표로 하는 사람을 군자라 하여 존중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소인이라 하여 배척했다.
덕(德)의 양성을 위해서 유교는 배우는 일과 아는 일을 중시한다. 그 학습 대상은 궁정(宮廷)같은데 보존되어 있는 옛 예악의 관례나 고사(故事)를 전한 《시경(詩經)》·《서경(書經)》 등의 고전이다. 그것들의 전통을 배움으로써 그 형식에 포함된 옛 성현들의 정신을 획득하려 한다. 따라서 전통을 지켜가면서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가해 나가려고 한다.
이러한 점은 천(天)이나 귀신(鬼神: 사후의 영혼)에 대한 태도에도 일관(一貫)되어 나타나 있다. 인간의 선천적인 도덕성을 중시하는 입장에서는 인력(人力)을 초월한 천(天)의 위력이나 귀신(鬼神)의 재앙 등은 무시해야 할 것이나 유교는 전대로부터 내려온 그것들에 대한 신앙을 완전히 버리지 않는다. 천(天)은 역시 운명을 지배하는 것이요, 귀신은 공경하나 멀리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치인
유교의 이상은 "나를 닦는다(수기(修己))"는 일만으로는 안 된다. 《대학(大學)》에 있는 것과 같이 몸을 닦는 일(수신(修身))로부터 시작하여 집을 가지런히 하고(제가(齊家)), 나라를 다스리고(치국(治國)), 천하를 평(平)하게 하는 데(평천하(平天下)) 도달해야 한다. 반드시 치인(治人), 즉 사람을 다스리는 일이 학문의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유학은 어디까지나 치자(治者)를 위한 학(學)이다.
치자(治者)는 위로는 황제로부터 아래로는 일반 관료를 포함한다. 그러한 치자(治者)의 자격을 갖는 계층에 대하여 어떻게 백성을 다스릴 것인가, 어떻게 하면 백성이 다스려질까를 말하는 학문이 유학이다.
그 경우 중시된 것이 법률에 의하여 백성을 엄하게 통치하는 것보다는 교화에 의하여 저절로 백성을 치자가 의욕(意慾)하는 방향으로 인도한다고 하는 방식이었다. 맹자의 덕치주의(德治主義) 또는 왕도정치(王道政治)는 이를 대표한다.
그러한 교화의 측면을 구비한 학설을 자칭할 때 대체로 유학(儒學)이라는 말보다는 유교(儒敎)라는 말을 쓴다.
교화(敎化)의 학(學)으로서의 유교는 결코 개인의 정신적 구제를 목적으로 삼는 종교와는 다르다.
사람을 다스리는 일(치인(治人))을 구극(究極)의 목표로 삼기 때문에 유교는 현실에 존재하는 국가권력을 처음부터 무시한다거나 그로부터 도피한다거나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치자(治者) 계급의 일원이 되려고 한다.
그렇지만 그 때에도 정치가 유교 계통의 교화의 사상과 일치하여 행하여지는 것을 기대한다. 그런 점에서 너무 무도한 정치에 대하여는 용감하게 비판을 가하는 일도 있으며 왕조의 교체를 혁명(革命) 이론에 의하여 정당화하는 역할도 과감히 한다.
능동적 변화
이상과 같은 성격을 갖는 유교사상은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있어서는 당연히 타학파의 맹렬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예컨대 혈연관계를 중시하고 예악 등의 의례를 존중하는 학설은 겸애(兼愛) · 상현(尙賢) · 비악(非樂) · 절장(節葬) 등을 주장하는 묵가(墨家)에 의하여 비판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선천적인 도덕성에 신뢰의 기초를 두는 학설은 권력이 군주를 중심으로 일원적(一元的)으로 강화(强化)되는 상태를 지향하는 법가(法家)에 의하여 배격되었다. 또 치자(治者)의 일원이 되어 이상적 정치 실현에 광분하는 태도는 인위적인 노력의 한계나 허무함을 깨달은 도가로부터 조소를 받았다.
그러한 비판이나 조소 속에서 전통(傳統)과 중용(中庸)을 지키려고 노력한 것이 유교였다고 할 수 있다. 유교사상은 또한 타학파의 비판과 공격에 견디기 위하여 타학파의 학설 중 그 장점을 섭취하는 일을 서슴치 않았다.
예컨대 전국시대 말기의 순자(荀子)는 법가나 도가의 이론을 교묘하게 유교의 체계 속에 받아들였으며, 한나라(漢) 시대의 동중서(董仲舒)는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이나 천인상관설(天人相關說)을 대폭적으로 채택하여 시대의 요청에 순응하는 이론을 만들어냈다.
정정(政情)의 불안정이 계속된 위진남북조시대(魏晋南北朝時代)에서는 유교사상은 불교나 노장사상(老莊思想)의 공격을 받았지만 후에 불교와 도교에 대한 유교의 도통(道統)에 대한 자각이 당나라(唐) 시대 중기에 일어나 송나라(宋) 시대에 이르러서는 불교와 도교의 장점을 취하여 신유학(新儒學)인 성리학(性理學)을 성립시켰다.
청나라(淸) 말기에 중국이 위기에 빠졌을 무렵에, 서양의 입헌군주제(入憲君主制) 등을 공양학(公羊學)의 체계에 포괄해 설명한 캉유웨이(康有爲)의 학설이 출현한 것도 이상과 같은 유교사상의 특질이 나타난 한 양상이다.
유교의 경전
• 사서: 논어, 맹자, 대학, 중용
• 오경: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유학자
중국의 유학자
• 공자
• 맹자
• 증자
• 주자
• 왕양명
한국의 유학자
• 조광조
• 이황
• 이이
• 송익필
• 서경덕
• 조식
• 김성일
• 김장생
• 김집
• 이익
유교와 종교
유교가 종교인가 하는 문제에 대한 논란이 있다.
현대적 의미에서 유교는 원론적으로 유학(儒學)·유학사상(儒學思想)이라 함과 대차 없는 것으로 종교는 아니다. 곧 인(仁)으로써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 이념을 삼아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를 이룩함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정치학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교주, 교리, 교단, 내세 관념 등의 가변적이거나 매우 희박하므로 종교가 갖춰야 할 것을 가지지 못한 하나의 통치 사상(이념)에 불과하다고 보는 주장, 본질적으로는 종교라고 할 수 없으나 다른 사상과 종교를 억압하면서 스스로 종교적 성격을 자초한 측면이 크다는 주장, 그리고 근대의 서구적 학문이나 분류 개념을 대입할 때 종교적 색채가 강하게 드러난다는 주장 등이 그것이다. 종교가 아니라고 할 때에는 유학(儒學)이라고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도통
도통(道統)이란 "유학의 참 정신이 전해 내려온 큰 흐름", 즉 유교에서 그 사상이 전해지는 정통적인 계보를 뜻한다.
《맹자》에서는 도통을 요(堯) · 순(舜) · 우(禹) · 탕(湯) · 문왕(文王) · 공자 순으로 제시하고 있다. 한유(韓愈)는 《원도(原道)》에서 맹자의 도통에 대하여 공자 앞에 무왕(武王)과 주공(周公)을 더하고, 공자의 도가 맹자로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했다. 여기에 주자(朱子)가 공자 뒤에 증자(曾子)와 자사(子思)를 추가하고, 이것이 맹자를 거쳐 자신의 스승인 정호(程顥) · 정이(程頤)에게 이어진다고 하여 도통을 확립하였다.
그리하여, 주자(朱子) 시대의 유교계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학문 계통을 의식적으로 구성하고 있었으며, 당신의 유학을 도통(道統)의 학(學)이라는 뜻에서 도학(道學)이라 불렀다. 도학은 정주학(程朱學) · 주자학(朱子學) · 이학(理學) · 이기학(理氣學) · 성리학(性理學) · 성명의 학(性命의 學) 등으로 호칭되면서 송나라 시대의 대표적 학자와 사상가를 포괄하고 있었다.
주자의 도통
• 요(堯: 기원전 2356?~2255?[7])
• 순(舜: 기원전 23~22세기?)
• 우(禹: 기원전 2070?)
• 탕(湯: 기원전 1600?)
• 문왕(文王: 기원전 12~11세기?)
• 무왕(武王: 기원전 ?~기원전 1043?)
• 주공(周公: 기원전 1046?)
• 공자(孔子: 기원전 551~479)
• 증자(曾子: 기원전 505~435) · 안자(顔子, 안회: 기원전 521?~491?)
• 자사(子思: 기원전 483?~402?)
• 맹자(孟子: 기원전 372?~289?)
• 주자(周子, 주돈이: 1017~1073)
• 장자(張子, 장재: 1020~1077) · 정자(程子: 정호(程顥: 1032~1085)와 정이(程頤: 1033~1107))
• 주자(朱子: 1130~1200)
형이상학
[형상형이상학의 한계와 새로운 (질료)형이상학이 가능성]
여기서부터 칸트(Kant, 1724-1804)에 의해 행해진 형이상학의 비판에 대한 특별한 언급이 있어야겠다. 형이상학은 이성의 세 가지 주요한 이념(Ideés, 관념)을, 즉 영혼, 세계, 신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그 형이상학은 이 시도에서 좌초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물자체(chose en soi)는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상들을, 즉 현상들이 경험에 드러나는 대로의 사물들을 인식할 수 있을 뿐이다.
[베르그송은 물자체를 인식 가능하게 하는 인식방법이 있음을 인정하고, 또한 인식가능한 물자체의 단위(통일성 있는 존재)를 인격(자아)으로 규정하였다. 그래서 존재론도 인식론도 베르그송의 질료형이상학에서 성립한다.
존재는 자아라는 지속하는 단위이며, 인식방법은 내재적으로 직관(공감)과 외적 이마쥬들과 관련하여 지성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자아자체의 이마쥬에 대한 인식, 즉 공감과 대상과 관계에 있는 이마쥬들 사이의 인식, 즉 지성 사이를 구별하고 있다.
형이상학적 환상(즉 칸트가 이름 붙인 "초월적 환상(l'illusion transcendantale)"은 이성의 관념들(Ideés)을 인식의 대상으로 변형하는 변증법에서 이루어 진다.
[우리는 정신분석학(Freud)과 관련하여, 이성의 관념들을 대상으로 변형하는 것을 환상(fantasme)이라 부를 수 있다. 그리고 라깡(Lacan, 1901-1981)의 견해를 빌어서 상징(symbole)이라 부를 수 있다. 이 관념과 현실과의 차이뿐만 아니라, 관념과 내재적 실재성의 차이에는 이미 분열(schizo)현상이 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환상은 필연적이다. 그래서 이 환상은 통일성(unité, 단일성)을 염려하고 또한 통일성을 기초하는 무조건적 원리[우리가 보기에 절재적 완전자]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고 여기는 인식의 자연적 경향에 응답한다.
[베르그송의 경우에 이런 인식의 자연적 경향은 지성이 물질성에 대한 자연적 경사이며, 질료의 내재성에 대한 자연적 경사와 방향이 반대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플라톤 이래로 칸트의 인식에 이르기까지 전도된 심리학이라 부른다.]
영혼은 내재적 생(삶 vie)을 즉 사유하는 주체의 현상들에 대한 무조건적 통일성(unité)을 표상한다. 세계는 원인들에 대한 무조건적 총체성(totalité)이며, 신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대상들의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단일성(unité)이다.
이리하여, 형이상학적 인식에 대한 기획(projet)은 항상 좌초한다 하더라도, 형이상학은 흄이나 실증주의자가 말했던 것처럼, 착오, 결함, 또는 인간 정신과 언어사용의 유치함이 아니다.
반대로 형이상학의 경향성이란 이성의 가장 높은 이론적 관심들에 대한 만족할 만한 탐구라고 말할 수 있다. 칸트도 형이상학으로 가능한 과학 또는 모든 과학에서 가장 높은 과학을 만든다는 것을 전혀 부정하지 않았다.
형이상학은 물론 환상적인 무조건적 인식을 거부할 것이고, 『순수이성비판(Critique de la raison pure, 1781)』이 일반적 도식으로 그리려했던 인간 인식에 대한 조건을 완전하게 하는 학문으로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 핵심 저술 : 데카르트의 『형이상학적 성찰(Méditation métaphysique, 1641)』, 칸트의 『순수이성비판(Critique de la raison pure, 1781)』, 『미래 형이상학 서설(Prolégomène à toute métaphysique future qui pourra se présenter comme science)』, 하이데거 『질문 I(Questions I)』의「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Qu'est-ce que la métaphysique?)」
* 인접용어 : 존재론, 제일철학; * 대립용어: 경험, 실증주의; * 상관용어: 절대, 인식, 본질, 존재, 환상, 무(비조건, inconditioné), 과학,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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