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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속의 충서(忠恕)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공자

논어 속의 충서(忠恕)

柏道 2020. 2. 10. 09:51


논어 속의 충서(忠恕)


 

子曰, “參乎! 吾道一以貫之.“ 曾子曰 ”唯.“ 子出, 門人間曰 ”何謂也?“ 曾子曰 ”夫子之道, 忠恕而已矣“ (공자왈, "삼아, 나의 도는 결국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증자가 "예"라고 답했다. 공자가 나가시자 다른 제자들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증자가 답했다. "선생님의 도는 충서일 뿐입니다.")

 

논어의 이 제4장(里仁편)15절은 공자의 의중이 실제 그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증자가 공자의 도를 한 마디로 요약해서 ‘충서(忠恕)’라고 정리한 것이다. 여기서 忠이란 가운에 있는(中) 깊은 마음(心)이란 의미이며, 恕란 바깥을 향하여 같은(如) 마음(心)을 품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공자의 사상을 이렇게 한 마디로 꿰뚫는다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위령공편 제2절에서도 일이관지(一以貫之)라는 표현이 나오며 공자의 도는 박학다식이 아니라 하나로 통합하는 능력이라고 묘사하기도 했다.

 

또 위령공편 제23절에서는 공자 스스로 恕를 ‘己所不欲 勿施於人‘, 즉 자기가 원치 않는 걸 남에게 베풀지 않는다는 해설을 제시하기도 했다. 충서를 강조하는 이런 대목에서 원래 공자 말씀의 핵심은 어질 ’仁’에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이에 대해 조선시대 정약용은 홀로 신령하고 어진 마음을 가지는 것, 즉 忠에 가까운 개념만으로 仁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그보다는 보편적 도덕 원리로서 헤아려 베푸는 '恕'를 더욱 강조하면서, 관계에서 노력하는 ‘관계의 철학’을 강조했던 것이다.

 

당시 성리학에서는 인을 세상만물을 만들어 내는 이치로 태극과 같은 의미로 끌어올리려 했지만 다산에게 인이란 관계적, 실천적 덕목이었던 셈이다. 불교의 관점에서 보자면, 仁을 소승 불교적 관점에서 대승 불교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개념이 바로 충서가 아닌가 싶다.

 

즉, 나 자신의 마음만 열심히 닦는 體에 머무르지 않으며 사해동포주의(四海同胞主義), 여민동락(與民同樂)의 정신으로 세상살이에 나아가며 여기에서 깨치는 삶으로서의 用에도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 유가철학의 참 정신은 논어에 전반적으로 잘 나타나듯이 함께 대등하게 잘 사는 大同社會, 즉 仁으로 충만한 사회를 꿈꾸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위정자의 도덕성을 매우 중시하면서 만민평등과 더불어 소외계층에 대한 與民同樂의 정신이 매우 강조된다.

 

이 대목에서 20세기 미국 철학자 존 롤스(John Rawls)의 정의론이 떠오른다. 평생 ‘정의’를 연구했던 그의 대표작 『정의론』에서는 공공적 사회정의의 우선성을 주장하면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 사상을 대신하는 몇 가지의 정의 원칙들을 제시했다.

 

우선 그는 근대의 공리주의는 평등 문제나 약자, 패자에 대한 배려 개념이 빠져있다고 보았다. 정의란 사회적 합의 개념이 들어가야 하는데, 그러기위해서는 현재의 개인적 입장을 잊고 무지의 베일을 쓴 원초적 상태로 돌아가서 생각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나온 원칙이 첫째는 자유(언론, 사상, 신체)의 평등한 권리이며, 둘째는 사회의 최소 수혜자(극빈층)의 상황을 우선적으로 개선하는 것 (차등의 원칙), 셋째는 사회적 직위, 직책에 대한 기회의 균등이다.

 

예를 들어, 어느 8명이 고장 난 엘리베이터에 갇혀 구출되지 못한 채 배고픈 상태에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 이 속에서 마침 누가 케익을 가지고 있다. 그럼 이를 여러 명이 함께 분배하려 할 때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을까?

 

그 케익의 주인이 조금 더 가지는 것이 좋을까? 그냥 8등분으로 균등하게 나누는 것이 가장 좋을까? 혹 그 중 허기로 쓰러질 것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에게 조금 더 나누어 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런 원초적인 고민에 대한 답을 생각해보면 사회 정의에서 고려해야 할 가치관들이 도출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후기 저작에서는 정의에 늘 누구나 공감하는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며 지난 유사한 상황에서의 반복성이 높은 관례와 공감대가 정의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는 빅데이터를 정의론에도 적용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20세기 영미 분석철학에서는 윤리학은 철학의 대상이 아닌 것으로 간주되던 시대도 있었다. 논리적 정합성(justification)이나 경험적 검증성(verification)이 결여된 것은 과학적인 학문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사회적 윤리 문제는 늘 우리의 뿌리깊은 관심사인 바, 윤리학은 동양이든 서양이든 철학의 핵심 영역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