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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에 관한 역사적기록말살과정(1985년 조선일보기사) -5- 본문

천지인 공부/단군과 한민족

단군조선에 관한 역사적기록말살과정(1985년 조선일보기사) -5-

柏道 2020. 8. 28. 18:19

단군조선에 관한 역사적기록말살과정(1985년 조선일보기사) -5-

운영자

9.《규원사화》도 탈취, 소각

 

우리 나라의 고사서를 분류하면 유가(儒家)사서, 불가(佛家)사서, 도가(道家)사서로 나눌 수 있다. 이들 사서 가운데 '도가(道家)사서'는 민족정기를 키우는데 크게 이바지하였으나 고려 때 김부식이《삼국사기》를 편찬한 이후 유학자들로부터 배척당하기 시작했다. 황당무계한 비사(秘史), 비기(秘記), 참서(讖書)라고 하여 이단시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도가(道家)사서'들은 고가(古家)나 암혈(岩穴) 등에 묻혀서 그 잔질(殘帙)이 연면히 계승되어 왔다. 적어도 '단군조선사'에 관하여는 '도가사서'만큼 풍부한 기록을 남기는 사서들도 없다. 역사의식에 있어서도 '도가'만큼 고유의 전통문화를 자부하고 존중하며 존화사대주의 사상을 통렬하게 비판한 사가들도 없다.

 

이들 '도가사서' 중 현존하는 사서 가운데 단군조선사에 관하여 가장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며 가장 방대한 고사기류와 문헌을 바탕으로 하여 비교적 상세하고 합리적으로 저술한 단군실사(檀君實史)가 바로《규원사화》라고 할 수 있다.

 

《규원사화》는 지금으로부터 310년 전인 근세조선 제19세 숙종 2년 을묘(단기 4008, AD 1675) 3월 상순에 저술된 사서이다. '단군실사'라고도 하는 이 책의 저자는 불행하게도 이름(실명)을 밝히지 않고 오직 '북애'(北崖老人 또는 北崖仙人, 혹은 北崖子)라는 아호만 서문에 쓰고 있다.

 

이《규원사화》는 일제가 소위 '조선사편찬사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조선총독부가 이 나라 사서를 탈취, 소각할 때에 거의 전부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양주동이 감추어 두었던 소장본을 일제 치하인 1940년(단기 4273년) 9월 손진태가 극비리에 필사하여 두었다가 광복 후 고려대학교 도서관과 서울대학교 도서관 및 국립중앙도서관에 각각 1부씩 기증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존하는 것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필사본뿐이다.

 

《규원사화》는 그 내용이 ①서문 ②조판기 ③태시기 ④단군기 ⑤만설 등 5개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사화(史話)'는 '유가사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까다로운 범례나 주석 따위는 없으며 문장의 체제도 편년체나 강목체가 아니고 설화체로 되어 있다. 오히려 현대사서에 가까운 자유로운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다. 북애노인이《규원사화》에 쓴 서문(신학균 역 참조)은 다음과 같다.

 

북애자는 이미 과거를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했다. 한숨을 쉬며 붓을 던지고 강호에 떠돌아다니기 여러 해가 되었다. 내 발길은 이 나라 구석구석 닿지 않은 곳이 없다. 이 생각 저 생각 끝에 물에 빠져 죽을까 하는 슬픈 생각도 했다. 때는 양난(병자호란, 임진왜란)을 겪은 뒤라 삼천리 방방곡곡은 슬픔에 잠겼고 국론은 물끓듯하며 관리들과 백성들은 울분에 가득 차 있었다. ......<중략>......

동해에 솟아오르는 해를 바라보니 눈물이 흘렀다. 티끌 같은 세상을 떠나고 싶은 생각이 나서 다시 서쪽으로 떠났다. 구월산에 이르러 당장평에 머물며 삼성사(三聖祠)에서는 감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평양을 거쳐 압록강 하구의 용만에 이르렀다. 통군정에 올라 북쪽 요동반도를 바라보니 나무와 구름이 손짓하듯 부르면 대답할 것 같이 가까이서 머뭇거리고 있다.

한 줄기의 압록강을 넘어서면 벌써 우리 땅이 아니다. 슬프다! 우리 조상이 살던 옛 강토가 남의 손에 들어간 지 얼마요, 이제 그 해독이 날로 심하니 옛날이 그립고 오늘이 슬퍼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다. ......<중략>......

내가 보건대 조선은 국사(國史)가 없다는 것이 무엇보다 큰 걱정이다. 우리 나라의 옛 경사(經史)는 여러 번의 병화를 입어 없어지고 흩어졌다. 그런 중 후세에 고루한 이들이 중국의 책에 빠져 주(周)나라를 높이는 사대주의만이 옳다고 했지 먼저 그 근본을 세워 내 나라를 빛낼 줄 몰랐다. 이는 등이나 칡덩굴이 곧게 뻗어갈 줄은 모르고 얽히고 맺히기만 하는 것과 같다. 어찌 천하지 아니한가. ......<중략>......

내가 일찍이 국사를 써보고자 하는 뜻은 있었지만 본디 그 재주가 없고 또 명산(名山) 석실(石室)에도 진장(珍藏)이 없고, 나 또한 씻은 듯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인간이니 어쩌랴.

그러나 다행히도 산골짜기에서 청평(淸平)이 저술한《진역유기》중 삼국 이전의 고사(故史)를 얻었다. 비록 그것이 간략하고 자세하지는 못하나 항간의 선비들이 구구하게 떠드는데 비하면 오히려 씩씩한 기운이 더 높다. 이에 한사제전(漢史諸傳)에서 글을 빼내 사화를 만들며 자주 밥맛을 잊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어떤 사람이 있어 이 뜻에 동감하랴.

슬프다. 후세에 만일 이 책을 잡고 우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넋이라도 한없이 기뻐하리라.

 

숙종 원년 을묘 삼월 상순, 북애노인이 규원초당에서 서문을 쓴다.

 

북애노인의《규원사화》서문은 읽는 이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오늘의 우리는 국사(國史)를 가지고 있는가? 북애노인의 시대와 무엇이 다른가?

아! 역시 슬프다.

 

10. 북애자가 눈물로 쓴 한민족사

 

북애(北崖)가 눈물로 쓴 한민족의 역사 <규원사화>는 개벽(開闢) 신화로 시작된다. <규원사화>의 개벽신화인「조판기」는 지금까지 알려진 다른 설화들과 달리, 천지의 개창과정을 언급한 것이 특이하다. 천지가 개창되어 환웅이 하강할 때까지의 기간은 수십 만년으로 되어 있다.

 

「태시기」는 환웅이 동방을 다스리던 궐년(闕年 : 수만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른 바 신시시대다. 이 시대에 치우씨(蚩尤氏), 고시씨(高矢氏). 신지씨(神誌氏), 주인씨(朱因氏) 등의 씨명(氏名)이 등장한다. 물론 이 시대에는 한자가 없었으므로 일부에서 주장하는 약속의 기호인 고유 문자나 구전되어 온 것을 후대에 한자를 빌어 기록했을 것이다.

 

신시시대의 영토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하여 서남방, 즉 중국 동북방에는 치우씨의 족이 거주하고 북동지방에는 신지씨, 그리고 동남지방(한반도 북부)에는 고시씨가 거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고시씨의 후예는 후에 계속 한반도의 남쪽으로 뻗어 내려왔다. 치우씨는 계속 서남쪽으로 진출하여 중국 제족을 정복하면서 영토를 확장했다.

 

신시의 천왕 환웅은 말년에 태백 산정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놓고 신선이 되어 승천하였다고 하며 다음은 단군의 시대로 이어진다.

 

《규원사화》의「단군기」는 환웅의 아들 환검(桓儉)이 백산(白山) 단목(檀木) 아래에서 즉위한 후로부터 마지막 왕인 제47세 고열가(古列加) 단군이 아사달의 당장경(唐莊京)에 들어간 1195년 동안의 기록이다. 때문에「단군조선 실사(實史)」라고 한다. 이 부분이 바로《규원사화》의 본론에 해당한다.

 

◇ 단군조선역대세계(世系) (재위년수)

 

1세 시조단군 (壬儉 또는 桓儉, 93) 2세 부루(夫婁, 34)

3세 가륵(嘉勒 , 51) 4세 오사구(烏斯丘, 49)

5세 구을(丘乙, 35) 6세 달문(達門, 32)

7세 한율(翰栗, 25) 8세 서한(西翰, 일명 烏斯含, 57)

9세 아술(阿述, 28) 10세 노을(魯乙, 23)

11세 도해(道奚, 36) 12세 아한(阿漢, 27)

13세 흘달(屹達, 43) 14세 고불(古弗, 29)

15세 벌음(伐音, 33) 16세 위나(尉那, 18)

17세 여을(餘乙, 63) 18세 동엄(冬奄, 20)

19세 구모소(구牟蘇, 25) 20세 고홀(固忽, 11)

21세 소태(蘇台, 33) 22세 색불루(索弗婁, 17)

23세 아물(阿勿, 19) 24세 연나(延那, 13)

25세 솔나(率那, 16) 26세 추노(鄒魯, 9)

27세 두밀(豆密, 45) 28세 해모(奚牟, 22)

29세 마휴(摩休, 9) 30세 내휴(奈休, 53)

31세 등올(登올, 6) 32세 추밀(鄒密, 8)

33세 감물(甘勿, 9) 34세 오루문(奧婁門, 20)

35세 사벌(沙伐, 11) 36세 매륵(買勒, 18)

37세 마물(麻勿, 8) 38세 다물(多勿, 19)

39세 두홀(豆忽, 28) 40세 달음(達音, 14)

41세 음차(音次, 19) 42세 을우지(乙于支, 9)

43세 물리(勿理, 15) 44세 구홀(丘忽, 7)

45세 여루(餘婁, 5) 46세 보을(普乙, 11)

47세 고열가(古列加, 20)

 

여기에 한가지 특기할 사실은「단군기」에 나오는 47세 단군 1,195년 동안에 조선이 중국의 하(夏), 상(商 ; 殷) 왕조와 전쟁을 한 회수가 대략 8, 9회가 된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제24세 연라(延那) 2년 경인년(庚寅 ; 단기 803, BC 1531)에 은(殷)이 조선의 남계를 먼저 침범하다가 격퇴당한 사실이 한번 있었던 것 이외에는 언제나 조선 측에서 하, 상 왕조를 먼저 공격했고 대개의 경우 국경을 넘어서 중국 본토에 진격하여 승첩을 거두고 돌아왔다고 한다.

 

단군조선의 소위 극성(極盛)시대라고 볼 수 있는 제13세 흘달(屹達) 단군 때부터 제15세 벌음(伐音) 단군 때까지 약 100여 년간(단기 491~595, BC 1843~1739)은 조선의 군대가 하나라의 산서(山西) 지방까지 깊숙이 진격하여 공략하여 마침내 하왕조가 화해를 청해 이를 수락했다는 것이다.

 

《진역유기》를 바탕으로 당시 조선에 있던 제사서(諸史書)와 중국 고서에서 사실(史實)을 확인하여 단군조선의 왕대와 중국과의 접전 화해 상황까지 밝힌 북애자는 '한(漢)나라는 한(漢)나라요. 우리 나라는 우리 나라이니 어찌 당당한 진역(震域)을 견주어야만 만족하겠느냐'고 반문하고 있다. 북애는 이같은 역사가 선가(仙家)에 살아 있다면서 또 다른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은 북애가 중국 사서에서 찾아 고조선과 중국의 전쟁기록을 삽입하여 고조선의 실체를 규명하고 있는 것이다. 300여 년 전의 사화이기 때문에 현대인들이 읽기는 어색한 경우도 없지 않으나 사실(史實)을 대비한 것은 괄목할 사료(史料)의 발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