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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조선에 관한 역사적기록말살과정(1985년 조선일보기사) -4- 본문

천지인 공부/단군과 한민족

단군조선에 관한 역사적기록말살과정(1985년 조선일보기사) -4-

柏道 2020. 8. 28. 18:18

단군조선에 관한 역사적기록말살과정(1985년 조선일보기사) -4-

운영자

7. 비전돼 온 마곡사 古書도 방화

 

충남 공주군 사곡면 마곡사(麻谷寺) 상원암(上院庵)에는 전래되는 비전(秘傳)의 고서 수백 권이 있었다. 일제 치하인 1928년(소화 13년), 20세의 망국 청년이 산천을 주요하다가 이 암자에 들렀다. 그는 이 암자에 비전되어 오던 수백 권의 고서들을 열람하다가 깜짝 놀랐다. 신라의 대문호였던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의 저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청년은 그 내용을 보고 크게 깨달아 귀중한 서적을 어떻게 보관할까 걱정했다. 최치원이 쓴 고서의 사실이 누설되면 일제가 압수할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그는 이 고서 속에 있는 주요 사실을 필사(筆寫)하고 원본은 상원암에 그대로 두었다. 언젠가는 국보가 될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한 그는 깊은 산사에 비장해 두는 것이 그 책의 보존에 오히려 좋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 암자는 알 수 없는 화재로 불타, 비장했던 고서들도 회진(灰塵)되고 말았다.

 

뒤늦게 상원암의 화재 소식을 들은 그 청년은 또 다른 최치원의 저서가 남아 있을까 하여 전국을 누비면서 수소문했으나 수포였다. 그 청년이 바로 홍종국씨로 그가 젊었을 때 마곡사에서 본 책은 최치원의 <제왕연대력(帝王年代歷)>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홍씨가 환갑을 막 지난 15년 전 자신이 필사했던 <제왕연대력>을 복간하며 그 서문에 고백함으로써 밝혀졌다.

 

일제는 패망 직전 수집해 두었던 조선의 사서들을 모두 태우려 했으나 실패했고 그 일부가 한국인들에 의해 구출되었다. 이들을 종합하여 우선 우리 나라에 어떤 사서들이 있었으며 일제가 '조선사'를 편찬할 때 어떻게 선별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잃어버린 역사를 이해하는 첩경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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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저년대상으로 본 단군관계 사서의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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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거사서 : 47世 단군 또는 그 일부 史實을 인정하고 있는 사서

(소위 도가사서 또는 민족고유사서)

 

1) 상고․ 신지비사(神誌秘史) : 단군조, 신지(神誌)찬

삼국시대 해동비록(海東秘錄) : 저자미상

신지비사역술(神誌秘史譯述) : 고구려 대영홍(大英弘)저

---→ A.D.1412년경(조선태종12년경)소각

 

2) 발해 단기고사(檀奇古史) : A.D. 707~719 대야발(大野勃)찬

1959. 복간본 현존 ---→ 삼국유사보다 약 560년전

 

3) 통일신라 제왕년대력(帝王年代歷) : A.D.890년경. 진성여왕20년경 최치원저

1929. 필사본 현존, 홍종국씨 소장 ---→ 삼국유사보다 약 390년전

 

4) 고려시대 조대기(朝代記) : A.D. 926. 발해멸망시 君子 대광현(大光顯) 등

유민들이 고려에 망명 귀화할 때 가지고 온 고조선역대실기.

---→ 삼국유사보다 약 350년전

---→ 일제 때 압수, 소각

표훈천사(表訓天詞), 도증기(道證記), 대변경(大辯經), 동천록(動天錄),

지화록(地華錄), 고조선비기(古朝鮮秘記), 삼성밀기(三聖密記),

지공기(誌公記), 삼한습유기(三韓拾遺記), 신선전(神仙傳),

삼성기(三聖記 상편, 안함로저), 삼성기(三聖記 하편, 원동중저)

---→ 일제 때 압수, 소각

진역유기(震域遺記) 3권 : 고려말엽 청평도사 이명(李茗) 저술

---→ 삼국유사와 거의 같은 시기

단군세기(檀君世紀) A.D. 1283년경 이암(李巖)저

---→ 일제 때 압수, 소각

 

5) 조선시대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실사(檀君實史)) : A.D. 1675. 북애자(北崖子)저.

故 양주동(梁柱東) 소장 필사본 현존. 도가사서 중 最高의 것

 

6) 일제시대 환단고기(桓檀古記) : 1911. 계연수 편찬

신단실기(神壇實記) : 1914. 김교헌 저

동사년표(東史年表) : 1915. 어윤적 찬

조선사략(朝鮮史略) : 1924. 김종한 저

대동사강(大東史綱) : 1928. 김 광 저

조선역사(朝鮮歷史) : 1934. 이창환 저

조선세가보(朝鮮世家譜) : 1938. 윤재구,서계수 공편

 

7) 광복후 해동춘추(海東春秋) : 1957. 박장현 찬

민족정사(民族正史) : 1968. 윤치도 저

 

◆ 비근거사서 : 근거사서 이외의 사서. 소위 불가사서, 어용사서, 유가사서 등

 

1) 고려시대 삼국유사(三國遺事) : 1280년경. 일연 저. 1512. 正德本 현존

제왕운기(帝王韻紀) : 1287. 이승휴 찬

 

2) 조선시대 동국사략(東國史略) : 1403. 권 근 등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 1454. 정인지

응제시주(應制詩註) : 1462.

동국통감(東國通鑑) : 1485. 서거정 등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 : 1486. 노사신 등

동국역대총목(東國歷代總目) : 1705. 홍만종 등

동사강목(東史綱目) : 1758경.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 : 1770. 홍봉한

해동역사(海東繹史) : 1814년경 한치윤

동사보감(東史寶鑑) : 저자미상

동국역대사략(東國歷代史略) : 1899. 대한제국학부

 

8. 개국 기록한 正史는 모두 인멸

 

우리 민족의 기원을 밝힌 개국사(開國史)는 어찌하여 한 권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인가? 고려시대의 사서가 몇 종류 있다. 하지만 왜 이들 사서는 삼국 이전의 상고사를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고 있을까? 개국 설화를 담은 고문헌마저 5천년 역사를 가졌다는 이 민족은 어찌하여 갖고 있지 못한 것일까? 우리 나라의 역사 서적을 뒤질 때마다 누구나 느끼는 의문일 것이다.

 

개국설화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은 바로 인위적으로 없앴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자료가 될 것이다. 민족 기원과 관련되는 사서들을 모조리 탈취, 소각, 인멸했던 일제는 다음과 같은 문헌만을 남겨 둠으로써 오히려 그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고려시대의 사서《삼국사기》와《삼국유사》, 그리고 7언 한시로 된《제왕운기》가 그것이다.

 

정사(正史)로 분류되는《삼국사기》와 야사(野史)라고 한때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삼국유사》는 우리 나라 상고사에 관해 판이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삼국사기》는 삼국이전의 상고사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고 있으며《삼국유사》는 '단군'을 불교신화로 각색한 것이다. 결국 이들 두 사서는 '단군'을 부정하는데 활용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 주는 결과를 초래한 셈이다.

 

현재 우리가 거론하는 '단군'은《삼국유사》를 전거로 하고 있다. 하지만《삼국유사》는 昔有桓國<謂帝釋也> 庶子桓雄......이라고 기록, 단군을 제석(帝釋)의 아들로 만들어 놓았다.《삼국유사》는 단군을 불교신화처럼 각색한 것이다.

 

일제가 조선의 사료를 불태워 모두 없애려고 했지만 한편에서는 우리의 선대들이 새로운 자료를 찾고 다시 저술하여 광복 후 조선의 정사를 쓰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하지만 광복 후에도 이들의 노력은 빛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일제가 편찬한 《조선사》는 사료로 활용하면서도 목숨을 내걸고 이 나라의 역사를 지키기 위해 선대들이 만들어 놓은 사서들은 기피하고 있다.

 

'단군'은 1천 8백 살이나 살았다는 신령이라더라.

 

고등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지식인들까지도 '단군'을 설화적인 존재로 격하시키는 태도를 알게 모르게 내보이고 있다. 한국의 상고사는 이야기처럼 흘려보내야만 실증적인 근대 사학을 배운 지식인처럼 오해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많은 사서의 저본이 된《규원사화》를 비롯《조선세가보》,《동사연표》등은 단군조선의 왕대(王代)까지 밝히고 있으니 이는 어인 일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