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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의 시원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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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9.
[한글의 시원을 찾아서]
한글의 시원에 대한 현재의 일반적 시각
약 500년 전, 조선 세종25년(1443년)에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세종28년(1446년) 반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세종실록)
그리고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자들이 실질적으로 어명을 받아 그 일을 완수했을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 현재 학계의 입장일 것입니다.
그리고 한글의 모양은 발성기관을 본뜬 것이며(훈민정음해례) 뜻글자가 아닌 소리글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의문점
1-한글창제 시점이 현재 인지되고 있는 시기보다 무려 최소 8년 이상 앞당겨진다는 것.
즉, 최초의 한글간행물이 용비어천가나 월인천강지곡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용비어천가는 세종 27년에 편찬되어서 28년에 간행, 원각선종석보는 세종 20년(명나라 연호로는 정통3년)에 발행되었음. 원각선종석보는 총 5권으로 된 불서(佛書)로서 원래 해인사의 일타선사가 중국의 고서점에서 구하였던 것으로 돌아가신 후 그 분의 상좌에게 전해졌음. 그 중 제 1권은 경상대 명예교수인 려증동 교수가 소장.
*나머지 네 권을 찾아내어 그 내용을 세상에 밝히는 것이 중요한 사안임. 원각선종석보 5권은 훈민정음해례본이나 용비어천가 못지않은 국보적 가치가 있다고 사료됨.
2-집현전은 한글창제를 반대했었다는 것.
근거; 세종실록에 집현전 부제학(그 당시의 집현전 최고위치) 최만리의 상소문 참고.
당시 사대부의 핵심세력이었던 집현전은 문자적 지식을 모든 사람과 공유하는 것을 원치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그들 사대부지식층의 권위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고 느꼈을 것입니다.
3-훈민정음창제 공로자가 [신미] 라는 예상 밖의 존재라는 것.
근거; [복천선원연력]이라는 속리산 복천사의 연력서에 그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 되어 있습니다.
“1446년까지 4년에 걸쳐 논의 한 끝에 신미선사는 모음, 자음, 소리글을 범서에서 착안, 범서가 모음과 자음으로 구성되었음을 참고하여 18개의 자음(子音)과 10개의 모음(母音)을 기본으로 한글을 편찬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한글을 마무리 짓고 시험할 때 해인사에서 장경을 간행하여(법화경, 지장경, 금강경, 반야심경 등) 토(吐)도 달아보고 번역도 하여 시험을 끝내고 우리글이 완성되었다고 세종대왕께 보고하니, 임금님은 너무 기뻐하며 1446년 9월 상달에 우리글을 훈민정음이라 공포하였다. 대왕께서 우리글이 만들어 졌으니 우리글로 노래도 한 번 지어 보라 하여 월인천강지곡과 용비어천가, 석보상절 등의 노래를 지었다.”(신미에 관한 기록 중 일부)
또한 영산 김씨의 족보에 신미가 집현전 학사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한글 간행서인 수릉엄경 10권에 세조와 신미의 발문을 보면 신미가 한글서 간행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때 신미대사가 집현전 학사였으며(영산 김씨 족보 참조) 한글창제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사실이 왜 당시부터 지금까지 은폐되었을까요?
당시는 엄청난 숭유억불의 시대였으며 승려로써 왕의 촉망을 받으며 문자창제를 하는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사대부는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왕 또 한 그 현실을 잘 파악하고 있었기에 자신이 한글을 창제하였노라고 직접 언명함으로써 신미대사를 보호하고 한글을 만천하에 유포하려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세종대왕이 마지막으로 아들 문종에게 남긴 유촉이 신미대사에 대한 시호를 하사할 것이었음을 보면 왕이 얼마나 신미대사를 귀히 여겼는지 알 수 있습니다. 문종은 아버지 세종의 사후, 왕에 올라 맨 먼저 신미대사에게 시호를 내리는 일부터 시행하지만 예상대로 집현전 학사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닥칩니다. 그런 시대였습니다. 자, 그렇다면 한글은 신미대사가 최초로 고안하여 만들어낸 것일까요?
비밀에 가려진 문자-가림토
한편 한단고기 -단군세기 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단군조선 제3대 갸륵단군 경자2년(B.C, 2181년)
" .......아직 풍속은 하나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나타내는 진서(眞書)가 있다 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백리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만들어 이를 가림토(加臨多)라 하니 그 글은 다음과 같다........ "
《한단고기》의 저자 또는 전수자인 이유립은 《한단고기》를 공개하기 3년 전인 1976년 월간 《자유》 5월호에 가림토에 관한 글을 발표했습니다.
“《태백유사(太白遺史)》에는 「흉노의 조상에 모수람이라는 자가 있어 천신을 섬겼으며 (중략) 그 풍속이 사납고 맹렬하여 수렵을 좋아하고 흙을 굽고 밧줄을 꿰어 신표로 삼으니 이를 가림토라 하였다 (후략)”[1] 이에 따르면 이유립은 가림토를 흙을 굽고 밧줄을 꿰어(煉土貫索) 신표로 쓰는 문자, 즉 결승문자(結繩文字)라고 적고 있습니다.
《한단고기》에 실린 가림토의 생김새는 한글, 특히 훈민정음 창제 때 판본체의 한글과 매우 비슷합니다.
또 훈민정음 창제기록에도 예 전자를 모방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최만리 상소문에도 옛 전자를 본땄다는 구절이 나오지요.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諺文) 28자(字)를 지었는데,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 초성(初聲)·중성(中聲)·종성(終聲)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文字)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속어)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마는 전환(轉換)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 일렀다.
이제 한글은 조선조가 아닌 단군조선까지 그, 시원에 대한 연구가 깊어져야 할 것입니다.
한편 가림토 문자에는 X O M P H I 등 영어의 알파벳 자모도 여러 개 보입니다. 가림토 문자는 4177년 전에 만들어졌는데 반해, 알파벳의 역사는 길게 잡아야 3000년을 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혹 알파벳도 가림토 문자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은 아닐까요? 차후에 연구해야 할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왜 세종대왕은 지금으로부터 5000여년 전인 단군조선 시대에 이미 한글의 원형인 가림토 문자가 있었으며, 훈민정음은 가림토 문자를 활용하여 재창제 되었다는 진실을 왜 당당하게 밝히지 못 했을까요?
조선조 초기는 이미 중국(명나라)의 눈치를 보던 정신적 속국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선이라는 나라이름도 명나라 황제의 낙점으로 결정되었고, 새 임금이 등극하거나 세자의 임명 등도 명나라에 보고를 했어야 했지요. ("고조선秘史", "대변설", "도징기", "삼성밀기", "옥추경", "조대기", "지공기", "천부경" "통천록", "표훈천사"등 한민족의 역사와 사상을 기록하고있는 책들은 이씨조선의 금서(禁書)로 지정되어 마음대로 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공자를 사모하던 유학자들이 우글거리던 이조시대에, 중국에게 문화. 문명을 전수해주었던 단군조선의 역사를 전달하기는 아마 몹시 힘들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한글 재창제 이후 세종대왕 재위시 전국에 집서령이 내려져 수거된 책들이 불태워졌고, 그 과정에서 가림토문자와 관련된 책들이 소멸되어 훈민정음의 뿌리는 알 수 없게 되었지요.
(참고서적- 한글은 단군이 만들었다-정연종 )
한단고기, 단군세기가 진실이라면 한글창제는 약 5000년 전으로 확정지어도 좋은 것일까요? 아직 의문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발해의 대야발이 AD 727에 쓴 단기고사란 책이 있는데 이 책에서도 가림토 문자이야기가 나옵니다.
3세 단군 가륵 제위 3년에 단군이 고설에게 명하여 국사를 편찬하게 하고, 산수가림다(刪修加臨多)라 이름지었다고 합니다. 그 일년전 기록도 나옵니다.
「갸륵왕 재위 2년 봄에 을보륵 박사에게 국문정음(國文正音)을 정선(精選)토록 하였다.」
정선(精選)이라는 말은 자세하게 가려 뽑는다-는 말입니다.
가림토 이전에도 국문은 있었다는 뜻입니다. 단군세기에 나오듯이 진서(眞書)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것이 한글의 원형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문자는 어려웠다고 하여 간추린 끝에 가림토문자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한글의 시원은 어디까지 넘어가야 그 뿌리가 시원하게 밝혀지는 것일까요?
배달국 신시 때에 이미 문자가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태백일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문자는 옛부터 있었다. 지금 남해현 낭하리의 암벽에 신시神市의고각古刻이있다]
배달국 신시 때부터 있던 문자를 3대 단군 때 수정 보완하여 만든것이 바로 가림토 문자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 가림토 문자를 신전神篆이라고도 하였는데, 조선조 세종대왕 때 이 가림토 문자를 수정보완하여 신미대사가 주축이 되어 훗날의 문종, 수양대군 안평대군, 정의공주 등과 함께 한글을 창제했던 것입니다.
(신숙주 성삼문 김수온 한계희 등은 창제 이후 원활한 반포와 자료보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창제에 직접적인 공을 새운 이들은 신미대사와 왕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증거들이 이미 어느 정도 모아졌으며 앞으로 좀 더 확충하여 발표할 예정입니다.)
단기고사의 또 다른 우리 글 기록
◐ 第一篇(제1편) 前檀君朝鮮(전단군조선)
第12世 阿漢(아한) 檀帝(단제=檀君)와 유위자가 나눈 대화중에서-
유위자; 폐하께서는 백성을 선하게 다스리시어 덕이 만방에 넘치니
나라의 문명 정도가 하나라를 훨씬 초월합니다
그러나 하나라는 다음 조에 이르러서는 禮樂法度(예악법도)가 찬연히 구비될 것이며
聖賢(성현)이 배출되어 經典(경전)을 저술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또 여러 학자들이 각각 그 理想(이상)을 말하리니
문화의 향상이 전무후무하여 천하를 휩쓸 것이므로
만국이 그 문화를 仰慕(앙모)하여 다투어 그 나라에 와서 배우고 익혀
학문의 전성시대가 될 것입니다
중략-
이 후손(우리 민족)들이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여 상대를 침략하는 전쟁만 일삼고
문화는 점점 퇴보하여 祖國文字(조국문자)는 돌보지 않고
남을 흠모하는 사상이 날로 높아져 수천년 후에는 그 나라 문물을 사모하여
이에 미친 사람이 나라 안에 가득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문자는 다 없애고 그들의 문자만 專用(전용)할 것이며
그 문자로 우리나라 國名(국명)과 王號(왕호)와 官名(관명)과 地名(지명)과 모든 물건의
이름을 번역할 것이며 이름까지 그들의 이름과 같아 우리를 그 나라 사람으로 알게 되고
마지막에는 자손들이 그 先祖(선조)를 잃는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장래를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하고 심히 원통한 일입니다
엎드려 비옵나니
오직 폐하께서는 깊이 생각하시고 염려하시어 뒷일을 미리 준비 하시옵소서 하였다.
임금께서 -선생은 참으로 천고의 神人(신인)이로다
능히 반만년 후의 일을 추측 하도다 하시고
천하에 조서를 내려 비석을 나라의 사방 경계에 세우고
그 碑面(비면)에 우리나라문자로 帝王(제왕)의 이름을 새겨
영원히 國文(국문)을 보전하라 하셨다.
이 글은 뒷날 읽어보는 우리의 가슴을 채찍질하는 것입니다. 과연 그 비석을 찾을 수 있을까요?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이러한 옛시가 있습니다.
「 九月山(구월산) 馬韓村(마한촌)에 옛 글자로 된 비석이 하나 있어
梵文(범문)과 비슷한데 후세사람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村名稱馬韓(촌명칭마한): 마을 이름은 마한이라 하는데
別有殊常石(별유수상석): 특별히 구별되는 범상한 돌이 있네
臺荒躑躅紅(대황척촉홍): 누각은 황폐하고 철쭉은 붉게 피었는데
字沒苺苔碧(자몰매태벽): 글자는 파묻히고 산딸기와 이끼만 푸르구나
生於剖判初(생어부판초): 천지가 처음 열릴 때 만들어서
立了興亡夕(입요흥망석): 나라가 흥하고 망하고 기우는 것을 세우기를 다 하였네
文獻俱無徵(문헌구무징): 문헌으로 다 고증할 수는 없으나
徜非奇氏跡(상비기씨적): 이것이 기씨의 즉 기자조선의 발자취가 아니겠는가
[상자가 없어서 같은 글자인 徜(상)자를 씀]
*長白山(장백산) 安興嶺(안흥령)에도 비석이 있다고 합니다.
우리 한글의 기원은 세종조 때가 아닙니다. 그때는 한글을 중창한 것이지요. 훨씬 뒤로 단군가륵시대에 을보륵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것도 아닙니다. 그때 역시 자세히 가려 뽑은, 정선(精選)한 것입니다. 그 이전에 이미 우리글은 있었습니다. 가장 오래 된 한글에 대한 기록은 딱 잡아서 무엇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단은 추정이 가능한 것을 찾아보자면 부도지입니다.
부도지는 가장 오래 된 한민족 역사서입니다. 거기에 보면 천부의 음(音)을 말합니다. 천부 8음이라고도 하지요. 천부란 무엇일까요?
天符-하늘 천, 부호 부입니다. 부는 부호 기호 수결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천부라 함은 하늘의 부호, 하늘의 기호라는 뜻입니다. 천부3인을 이어받아 단군은 세상을 교화했다고 나오는데 천부삼인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그것은 원(圓),방(方),각(角)을 가리키는 것이 맞다고 추정됩니다. 즉 형상으로 보면 ㅇ ㅁ ㅿ입니다. 무엇의 형상인가요? 바로 한글입니다.
3대단군가륵은 물론 2대단군 부루도, 1대단군 임검도, 그 위로 환웅도, 그 위의 환인도, 그 위의 유인씨도, 그 위의 황궁씨도, 그 위의 마고에 이르기까지 모두 천부의 법을 이어받아...라고 나옵니다.(부도지 참조)
마고에 이르기까지의 연도는 현재로서는 측량불가입니다. 즉 한글의 최초연도 역시 측정이 불가한 상태입니다. 다만 후학의 가슴과 머리를 태고와 미래를 향해 크게 열어놓고자 할 뿐입니다.
[출처] 한글원리세미나의 첫꼭지-한글의 시원 (한글명상예터) |작성자 을보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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