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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천왕(蚩尤天王), 뛰어난 풍채와 힘차고 당당한 위엄지녀
하늘에 제사 지낼 때 반드시 높은 산 아래에 있는 작은 산 위에서 지내<26>
송부웅 역사전문 칼럼니스트 | 입력 : 2016/10/12 [11:04]
진(晋)나라의 천문지(天文志)는, 치우의 기(旗)는 꼬리별 혜성과 비슷하여 뒤쪽은 그 모양이 꼬부라졌다.「깃발이 보이는 곳 바로 아래에는 병사가 있었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치우천왕이 승천하여 별이 된 때문이라고 한다. 또, 통지(通志) 씨족략(氏族略)에, 치씨(蚩氏)는 치우씨(蚩尤氏)의 후손이다.?고 하였으며, 혹 말하기를,「창힐(蒼頡)과 더불어 고신(高辛)도 역시 모두 치우씨의 후예(後裔)이다. 대극성(大棘城)에 태어나 이리 저리 옮겨 다니다가 산동(山東)의 회북(淮北)으로 이사하여 살았다.」라고 한다.
대저 치우천왕(蚩尤天王)의 뛰어난 풍채와 힘차고 당당한 위엄이 먼 나라 깊숙한 곳까지 전파되었음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옛날 사마상여(司馬相如)는 한(漢)나라의 왕 유철(劉澈) 무제(武帝)에게 말하기를,「폐하께서 겸양하사 방탕하지 않으시면 삼신(三神)의 즐거움을 얻으실 것인 즉, 이라고 했는데, 위소(韋昭)는 삼신상제(三神上帝)에 주(注)를 달아, 삼신(三神)의 설(說)은 일찍이 저들의 땅에도 전파되었음이 명백하다.」라고 하였다.
진역유기(震域留記)에 이르기를, 제(齊)나라의 풍속에 팔신제(八神祭)가 있었으니, 팔신(八神)이란 ①천주(天主), ②지주(地主), ③병주(兵主), ④양주(陽主), ⑤음주(陰主), ⑥월주(月主), ⑦일주(日主), ⑧사시주(四時主)를 말한다.
“하늘(天)은 음(陰)을 좋아 한다”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반드시 높은 산의 아래에 있는 작은 산 위에서 지냈다. 그래서 태백산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던 것이 전해온 천제(天祭)의 예법인 것이다. 땅(地)은 양(陽)을 귀하게 여긴다 하여, 땅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반드시 못 가운데의 네모진 언덕에서 지냈다.
이것 역시 참성단(塹城壇)에서 제천(祭天)하던 풍속의 영향이다. 병주(兵主)란 치우(蚩尤天王)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삼신(三神)은 천지만물의 조상이요, 치우(蚩尤)는 오랜 옛적부터 무신(武神)으로 존경받는 용맹스럽고 강한 무인(武人)의 조상으로, 큰 안개를 만들어 일으키며, 물과 불을 마음대로 사용하며 또, 만대(萬代) 도술(道術)의 조종(祖宗)으로 만 가지 신(神)을 부르고, 비와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이로써 오랜 옛날부터 항상 천하의 전쟁무기를 만드는 일에 있어서 주장이 되었다.
해대(海岱)의 땅은 이미 엄(奄) 람(藍) 양(陽) 개(介) 우(隅) 래(萊) 서(徐) 회(淮)의 팔족(八族)이 자리 잡고 사는 곳이 되었으니 곧, 팔신(八神)의 설(說)은 팔족(八族)으로부터 싹터서 당시에 성행하였다. 유방(劉邦)은 비록 동이(東夷) 계통의 인물이 아니지만, 풍패(豊沛)에서 병사를 일으켰는데, 풍패의 풍습은 치우(蚩尤)에게 제사를 지냈으므로, 유방(劉邦) 또한 그 풍속으로 인하여 치우(蚩尤)에게 제사 지내고, 희생의 피를 북에 바르고, 북을 치며 깃발을 날렸다.
마침내 10월에 이르러 파강(灞江)의 상류에서 제후(諸候)와 더불어 함양(咸陽)을 평정하고 한왕(漢王)이 되었으므로, 이로 인하여 10월을 한해의 시작으로 정하였다.
이것은 비록 진(秦)나라의 정월 초하루를 한해의 시작으로 삼던 것을 이어 받은 것이긴 하지만, 역시 동쪽 태초의 황제인 환웅천왕(桓雄天王)을 받들어 공경하고, 치우천왕(蚩尤天王)을 공경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에서 기인한 것이다.
그 후 4년이 지나 진(秦)나라 전역이 평정되자 축관(祝官)에게 명하여, 치우(蚩尤)의 사당(祠堂)을 장안(長安)에 세우도록 하였다.
그가 치우천왕(蚩尤天王)를 공경하는 마음이 이와 같이 독실하였다.?라고 하였다.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의 선비들은, 불가사의하게 꾸며 낸 속임수의 이야기에 깊이 빠졌으며, 또한 이를 높이 여기고 있었다. 이리하여 제(齊)나라의 위(威)왕과 연(燕)나라의 소(昭)왕 때부터 사신을 파견하여 삼신산(三神山)을 찾았으니, 진한(秦漢) 때의 송무기(宋無忌) 정백교(正伯僑) 극상(克尙) 이문자고(羡門子高)는 최후의 사신들로서 연(燕)나라 사람들이었다.
문성오리공(文成伍利公)과 손경(孫卿) 신공(申公)의 무리들은 모두 제(齊)나라 사람들이다. 옛날 여상(呂尙)도 역시 치우씨의 후손이다. 그러므로 역시 성은 강(姜)씨이다. 대저 치우(蚩尤)는 강수(姜水)에 살면서 아들을 두어 다 강(姜)씨가 되었다. 강태공은 제(齊)나라 다스리기에 앞서 도술(道術)을 수련하였고, 천제지(天齊池)에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 그리하여 역시 제(齊)나라에서 책봉을 받았으니, 이 땅에 팔신(八神)의 풍속은 더욱 성하였다. 후세에 그 땅에서 도술(道術)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이 배출되었으며, 신선사상(神仙思想)과 황노사상(黃老思想)이 혼합되어 널리 퍼졌고, 도통할 수 있다고 번지러하게 장식되니, 이 또한 강태공(姜太公)이 그 풍속을 도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찍이 음부경(陰符經)에 주(注)를 만들고, 자부(紫府)선생이 지은 삼황내문경(三皇內文經)의 뜻을 선인(先人)의 말을 본받아 그 뜻을 펴서 서술(書術)하였다.
그런즉 연(燕)나라와 제(齊)나라의 선비들이 어찌 괴상하고 신비스런 말들을 싫어 할 수 있었겠는가. 대저 학문의 근본은 신시(神市)의 구정(邱井)과 균전(均田)으로부터 전해진 법이다.
-읽어두기
중국역사의 삼황오제설(三皇五帝說)
현 중국의 역사는 반고(盤固) 개천(開天)으로부터 시작하여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를 거쳐 하(夏)나라, 은(殷,또는 상(商)나라, 서주(西周) 동주(東周)로 내려와서,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진(秦)의 6국통일시대로 이어지고, 진(秦)나라 영정(嬴政)은 비로소 황제를 칭하기 시작하여 역사적으로 진시황(秦始皇)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현 중국의 역사는 진(秦)나라 때부터(우리의 북부여시대) 기록이 시작되었다.
그전까지는 우리민족인 배달민족이 중원을 지배하였기 때문이었다. 진(秦)나라를 넘어뜨리고 유방(劉邦)이 한(漢)나라를 세우면서 사마천이 중원의 역사를, 진(秦)나라의 역사기록을 기초로 하여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사마천이 중국의 옛 역사를 만드는 과정에서 환웅천왕의 배달국 역사를 빼고, 반고(盤固)를 자기들의 조상으로 삼았다. 반고(盤固)는 환국의 우루국에서 대인 환웅을 따라 태백으로 오던 삼천무리중의 부장이었다. 태백산에 도착하기 전에 환웅에게 길을 나누어 갈 것을 요청하여 환웅의 허락을 받고, 현 감숙성 란저우 쪽의 삼위산 납림이라는 곳으로 따르는 무리들과 같이 가서, 그곳 주민들을 회유하여 왕이 된 분이다.(중국사(신승하저). 한단고기의 신시본기 참조)
그리고 삼황오제설(三皇五帝說)은 우리민족의 삼신오제(三神五帝)신앙을 본떠서 사마천이 그들의 역사를 조작하면서 삼황오제(三皇五帝)를 만든 것이다. 따라서 현 중국인들이 조상으로 받드는 삼황(三皇)도 환웅천왕의 배달국 시대의 우리조상들을 자기들의 조상으로 만든 것이다. 그래서 삼황(三皇)도 일정하지 않다. 수인(燧人)씨, 복희(伏羲)씨, 신농(神農)씨라고도 하고, 복희(伏羲)씨, 여와(女煱)씨, 신농(神農)씨라고도 하는 것이다. 그분들은 모두 배달국시대의 우리조상들로서 신시본기(神市本紀)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분들이다.
오제(五帝)도 치우천왕과 세력싸움을 70회나 한 공손(公孫) 헌원(軒轅)을 별칭으로 부른 황제(黃帝)와 전욱고양(顓頊高陽)과 제곡고신(帝嚳高辛)을, 그리고 옛 조선의 제후였던 제요도당(帝堯陶唐)과 제순유우(帝舜有虞)를 오제(五帝)라고 하였으며, 그리고 하(夏)나라부터 중국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baedalung@hanmail.net
*필자/송부웅. 한민족상고역사연구회 연수원장. 역사전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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