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知者不言(지자불언)안다고 하는 것을 말로는 다 할 수가 없다 본문
1.知者不言(지자불언) 2.言者不知(언자부지) 3.塞其兌閉其門(색기태폐기문) 4.挫其銳解其紛(좌기예해기분) 5.和其光同其塵(화기광동기진) 6.是謂玄同(시위현동) 7.故不可得而親(고불가득이친) 8.不可得而疎(불가득이소) 9.不可得而利(불가득이리) 10.不可得而害(불가득이해) 11.不可得而貴(불가득이귀) 12.不可得而賤(불가득이천) 13.故爲天下貴(고위천하귀) (풀어쓰기편) 이 글은 老子(노자)님의 道德經(도덕경) 56章(장)에 나오는 글로써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 참나인 얼나로 하나님 아들이 된 眞人(진인=참나의 사람))과 그 眞人(진인)이 하는 말을 세상 사람들이 제대로 알아 듣질 못한다는 것과 그 眞人(진인)이 깨친 絶對眞理(절대진리)를 또 말로써 다 설명 할 수도 없고 설혹 말로 다 설명 할 수가 있다면 그것은 또 참으로 깨친 形而上(형이상)의 絶對眞理(절대진리)도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신 글이다. 道德經(도덕경) 1章(장)에 나오는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이라 하여 말로 할 수 있는 진리라면 그건 절대진리가 아니고 이름 붙일 수 있는 존재라면 그건 절대존재가 아니다 라고 한 말과 같은 脈絡(맥락)의 말씀이다. 莊周(장주)님의 莊子(장자) 齋物論(재물론)에 있는 道昭而不道(도소이부도) 言辯而不及(언변이불급)이라 하여 道(도=진리인 참.하나님)는 나타나 보이면 이미 道(도)가 아니고 말로 판단해서는 도를 다 드러냄에 미칠수가 없고 孰知不言之辯(숙지불언지변) 不道之道(부도지도)라 하여 누가 아는가 말로 할 수 없는 판별을.. 말로 설명 할 수 없는 道(도=참)를... 若有能知(약유능지) 此之謂天府(차지위천부)라 하여 만일 능히 아는 존재가 있다면 이를 일러 말하길 天府(천부=하나님나라)라 한다 하였다는 이 말씀도 老子(노자)님의 이 말씀과 같은 脈絡(맥락)의 똑같은 뜻의 말씀이다. 성경 마태복음 13장 44절에 예수님의 말씀이 있기를 『天國(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寶貨(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發見(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自己(자기)의 所有(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하였다. 이 말씀은 天國(천국)을 寶貨(보화)가 감추어진 밭에 譬喩(비유)하신 말씀으로 여기서 밭이란 사고 팔 수 있는 세상의 땅밭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心靈(심령)을 밭에 빗대어 하신 말씀이다. 해서 사람의 心靈(심령) 밭에는 하나님의 永生生命(영생생명)의 씨앗 種子(종자)인 하나님 聖靈(성령)의 씨가 播種(파종)되어 숨기워 있다는 말씀을 이렇게 비유로 말씀을 하신 것이다. 밭에 감추인 寶貨(보화)란 것이 바로 사람의 心靈(심령) 밭에 하나님이 播種(파종)해주신 하나님의 核(핵=씨)인 永生生命(영생생명)의 聖靈(성령) 씨앗 種子靈(종자영)을 말씀 하시는 것이다. 自己(자기) 마음 속 心靈(심령) 밭에 永遠(영원)한 생명인 하나님 성령 씨앗의 얼나를 두고도 이를 모르고 物質(물질)인 헛껍데기 몸뚱이가 自身(자신)의 참나요 全部(전부)인 줄 알고 몸뚱이 짐승 성질의 貪慾心(탐욕심)의 수렁인 진창늪에 스스로 빠져 허우적이며 살다가 끝내는 몸도 죽고 靈(영)도 滅亡(멸망)하는 永遠(영원)한 滅亡(멸망)의 삶으로 끝내고마는 無明(무명)과 迷惑(미혹)에 덮인 어리석은 사람들을 일깨우고자 하신 말씀이 예수님의 이 말씀인 것이다. 이 한 말씀만 바로 알아 들어도 예수님 말씀 가르침의 精髓骨子(정수골자)가 確然(확연)히 깨쳐지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 가르침의 核心(핵심) 알맹이는 靈性回復(영성회복=성령 거듭남)의 가르침으로써 하나님이 사람의 心靈(심령) 밭에 하나님 자신의 永生生命(영생생명) 씨인 生命根源(생명근원)의 種子(종자) 씨앗인 聖靈(성령)의 씨를 播種(파종)해 주신 것이니 몸뚱이를 살리시는 동안 성령 씨앗의 靈(영)인 靈我(영아)로 얼 생명의 참나를 찾아 땅에 속한 物質(물질)로된 몸뚱이 중심의 自我(자아)인 거짓 나의 삶의 헛된 迷夢(미몽)에서 속히 깨어나 하나님의 참아들로 거듭나 모두 예수님 자신처럼 하나님의 아들로 살라는 것이 예수님이 十字架處刑(십자가처형)으로 죽기까지 一貫(일관)되게 가르치신 예수님의 말씀이신 것이다. 發見(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간다는 말은 참나인 얼나를 알아보는 靈眼(영안)이 열렸다면 그 기쁨이야 말해 무엇을 할 것인가 釋迦(석가) 붓다님은 見性大悟(견성대오)한 法悅(법열)의 기쁨으로삼칠일간을 法悅(법열)에 잠겼다질 않던가. 돌아가서 자기의 所有(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다는 것은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를 참나로 속아 살던 몸뚱이 貪慾心(탐욕심) 덩어리의 삶을 단칼에 끊어내고 180도로 다른 참나인 얼나로 하나님 아들의 삶으로 삶의 目的(목적)과 方向(방향)과 價値(가치)를 바꾸었다는 말인 것이다. 성경 요한복음 8장 12절 예수님이 말씀 하시길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生命(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하였고 마태복음 5장 14절서 16절로 말씀 하시길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山(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燈檠(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榮光(영광)을 돌리게 하라 』하였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에서의 (나)는 죽고 썩어질 몸뚱이로써의 예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신 靈我(영아)인 얼나의 예수를 말하는 것이고 또 우리도 성령으로 거듭나기만 하면 우리의 얼나도 이 나에 들어간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聖靈(성령)이 빛이시니 예수님 心靈(심령) 밭에 하나님이 播種(파종)해 숨겨두신 하나님 성령 씨앗이 빛의 種子(종자) 씨로 예수님의 참나임을 스스로 깨쳐 아시고 그 하나님의 씨로 거듭나셨으니 예수님의 靈我(영아)인 얼나는 當然(당연)히 하나님 성령 빛의 한 줄기 빛이신 것이다.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란 말은 통채로 無明(무명)과 貪慾(탐욕)으로 어둠과 暗黑(암흑)의 세상인 物質界(물질계)인 상대세상에 貪着(탐착)해 살던 肉身物慾(육신물욕)의 삶에서 超越(초월)을 한다는 말이다. 生命(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는 말은 누구든지 예수님 자신처럼 자신의 心靈(심령) 밭에 播種(파종)된 하나님 聖靈(성령) 씨앗의 靈我(영아)로 거듭나기만 하면 어둠의 세상인 物慾(물욕)의 세계가 헛것임을 꿰뚫어 알게되어 영원한 생명의 빛으로 영생하는 永生生命(영생생명)의 빛이 본디의 참나로 내 心靈(심령) 밭에 있었음을 깨달아 빛의 아들로 回復(회복)이 되어 거듭난다는 말인 것이다. 이 본디의 根源的(근원적)인 生命根源(생명근원)의 永生生命(영생생명) 씨앗의 참나를 예수님은 성령으로 거듭난 靈我(영아)로 프뉴마(얼나)라 하였고 붓다님은 本來面木(본래면목)이라 하여 dharma(다르마)라 하였고 孔子(공자)님은 天生<德>於予(천생덕어여)라 하여 德(덕)이라 하였고 老子(노자).莊子(장자)님은 道(도)라 하였고 孟子(맹자)님은 存其心 養其<性>(존기심양기성)이라 하여 그 마음을 보존하고 그 성을 기른다 하여서 性(성)이라 하였다. 또 人之所以異禽獸者幾希(인지소이이금수자기희) 庶民去之君子存之(서민거지군자존지)라 하여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이 거의 稀薄(희박)하리만큼 적으나 그 짐승과 다른 점을 여늬 일반 사람은 다 버리고 짐승처럼 살지만 군자인 참사람은 그 다른 점을 간직하고 보존하며 君子(군자)로 산다고 하여 君子(군자=참나요 얼나의 사람) 라고 하기도 했다. 여기서 盟子(맹자)님이 말씀한 짐승과 다른 점이란 것이 바로 性(성)을 말한 것이고 君子(군자)란 그 性(성)으로 거듭나 個體意識(개체의식)의 몸뚱이 사람의 小我(소아)에서 全體意識(전체의식)의 精神人(정신인)인 大我(대아)의 참나로 의식화가 되었다는 말을 君子(군자)라고 한 것이다. 몸뚱이가 살아 있는 동안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내 몸 생명을 살리시는 동안 내 몸 생명을 다 불태워서라도 반드시 이루고 찾아야 할 일이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나 본디부터 내 속에 하나님이 넣어주신 永生生命(영생생명)의 참나인 성령 씨앗의 靈我(영아)요 하나님 아들인 얼나를 찾는 것이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참뜻이고 사람이 따라야 할 삶의 全目的(전목적)과 價値(가치)와 理由(이유)라는 말인 것이다. 莊子(장자)님은 이 것을 두고 말씀 하시길 道通爲一(도통위일)이라 하여 몸이 사는 동안 하나님과 통하여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하면 하나님 나라에는 몸뚱이가 죽은 死後(사후)에 들어 가는 나라가 아니고 몸뚱이가 살아 있을때 이미 내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도 그 것을 이루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가야한다는 말이고 몸을 살려주실 동안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하나님 아들이 되고 하나님 뜻을 實踐(실천)하는 行(행)함의 바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천국의 礎石(초석)이 되는 하나님의 일꾼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말인 것이다. 성경 요한복음 5장 24절서 25절로 말씀 하시길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永生(영생)을 얻었고 審判(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死亡(사망)에서 生命(생명)으로 옮겼느니라. 25절: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내가). (내말). (나)란 勿論(물론) 當時(당시)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 자신을 나타내는 지시대명사이긴 하지만 이것은 몸사람으로써의 예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난 씨앗 성령의 靈我(영아)인 얼나로 하나님 성령과 하나로 이어진 하나님 아들로써의 靈性(영성)으로 거듭난 예수를 말하는 것이고 또한 사람이면 누구나 너나 없이 다 그 심령 속에 하나님의 씨인 씨앗 성령의 영이 內在(내재)되어 있으니 그 하나님의 영을 참나로 깨쳐 거듭나기만 하면 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나가 된다는 말씀인 것이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 숨겨진 含意(함의)의 말씀인 것이다. 나를 보내신 이에서의 (나)도 靈我(영아)를 말하는 것이고 보내신 이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주신 성령의 씨앗 영으로 거듭나기만 하면 바로 그것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고 이미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審判(심판)자체가 당치도 않는다는 말이고 몸뚱이로 살다가 하나님이 내 속에 숨겨두신 하나님 성령 씨앗영의 참나를 모르고 죽고 썩으면 靈(영)도 함께 영원히 滅亡(멸망) 될 것이었는데 성령 거듭남으로 하나님의 참 아들이 되어 영생생명에 들었으니 영원한 생명이 되었다는 말이다. 25절에서 죽은 자들이 하나님 아들의 音聲(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에서 죽은 자들이란 實際(실제)로 몸 생명이 죽어 火葬(화장) 했거나 땅에 묻혀 다 썩어진 亡者(망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만을 참나로 알고 固執(고집)하며 하나님은 무슨 鬼神(귀신) 풀빵 씹는 소릴 하냐며 自我(자아)로 저 잘났다고 꺼떡거리며 기고만장하게 驕慢(교만)을 떨며 살던 몸뚱이 중심의 삶을 삶의 全目的(전목적)과 價値(가치)와 理由(이유)로 알고 살던 靈(영)이 죽은 자들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에서 하나님 아들이란 예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의 心靈(심령)에 하나님이 播種(파종)해주신 하나님의 靈(영)인 聖靈(성령)의 씨앗 靈(영)을 말하는 것이고 音聲(음성)을 들을 때가 온다는 것은 아무리 짐승같이 사는 사람이라 해도 그 마음 心靈(심령)에 심기운 하나님 성령 씨앗의 바른 良心(양심)에 때론 문득 문득 찔림을 받을 때가 온다는 말인 것이다. 찔림을 받을 때가 돌이켜야 한다는 말이다. 듣는 자는 살아 나리라 한 것이 바로 찔림을 받을 때에 가차없이 돌이키면 성령으로 거듭나 영생으로 살아날 수가 있다는 말인 것이다.. 요한복음 8장 23절 말씀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屬(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였다. 이 말씀은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다는 말에서 너희는 아래(몸)에서 났다는 말은 相對世上(상대세상)인 땅이란 物質(물질)에 붙어 사는 肉身 (육신)으로 된 썩어질 物質(물질)인 어미 몸의 下門(하문)에서 난 몸뚱이를 참나로 알고 사는 짐승들로 形而下(형이하)의 物質存在(물질존재)라는 말이고 나는 위(하나님)에서 났다는 말은 예수님은 자기도 物質(물질)인 몸은 亦是(역시) 몸의 어미에게서 났지만 몸뚱이 예수가 자기의 참나가 아니고 잠시 살다가 죽고 썩어질 물질로 된 相對世上(상대세상)의 거짓의 나임을 알고 자기 心靈(심령) 속에 하나님이 넣어주신 하나님 성령 씨앗의 靈(영)이 참나임을 알아 靈我(영아)인 얼나로 거듭나 하나님의 神格(신격)을 回復(회복)한 것이니 形而上(형이상)의 세계인 精神人(정신인)으로 하나님에게서 났다는 말인 것이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란 하나님이 사람의 心靈(심령)에 넣어주신 하나님의 神格(신격)인 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하고 오로지 죽으면 썩어질 몸뚱이를 참나로 알고 사는 너희 육신이란 물질들은 역시 똑같은 세상의 물질에 휘감겨 속아서 살고 있다는 말로 孵化(부화) 하질 못한 죽은 알과 같다는 말이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성령 씨앗의 聖靈(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 神格(신격)의 靈我(영아)인 얼나의 참나는 形而上(형이상)의 세계인 靈界靈生(영계영생)의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이지 이 썩고 없어질 物質世上(물질세상)인 相對世界(상대세계)에 속하지 않았다는 말씀이고 나는 孵化(부화=부활)한 살아있는 알이라는 말이다. 유대인들인 히브리민족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들을 救援(구원)해줄 救援者(구원자)로 믿고 기다리던 그리스도(메시야=히브리어임) 救世主(구세주)란 메시야의 次元(차원)이 靈的救援(영적구원)이 아닌 物質的(물질적)이고 世上的救援(세상적구원)인 메시야를 기다렸던 것이란 것이 그들 祭祀長(제사장)과 書記官(서기관)들이 예수를 異端者(이단자)로 몰아 十字架處刑(십자가처형)으로 죽이게한 주인공들이 었음으로써 證明(증명)된 것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들이 바라고 기다리던 메시야는 이스라엘 나라를 다시 굳건히 일으켜 다윗이나 솔로몬때 보다도 더 優越(우월)하고 힘있고 權能(권능)이 있는 나라로 지금껏 逼迫(핍박)과 苦痛(고통)과 서러움과 恨(한)으로 시달림을 주었던 周邊(주변) 國家(국가)들을 모조리 다 쓸어버리고 滅亡(멸망)시켜 屈伏(굴복)시켜 줄 국가와 民族的(민족적)인 政治的英雄(정치적영웅)이 그들이 목메어 舊約時代(구약시대) 내내 日久月深(일구월심)으로 기다려온 메시야 였던 것이다. 하나님의 選擇(선택)을 받아 自稱(자칭) 選民(선민=선택받은 민족)이라는 優越感(우월감)을 갖고 있던 히브리민족인 유대인들이 믿던 야훼 하나님의 信仰(신앙)이란 것이 이토록 形而下的(형이하적)인 幼稚(유치)한 水準(수준)의神觀(신관)에 지나질 않았던 것을 예수님은 꿰뚫어 아신지라 只今(지금)까지 유대인들이 審判(심판)과 懲罰(징벌)의 하나님으로 알아 두려움에 떨며 祭祀宗敎(제사종교)와 儀式宗敎(의식종교)와 律法(율법)의 종교로 一貫(일관)해 왔던 祈福信仰(기복신앙)에 빠져 하나님을 雜神水準(잡신수준)인 샤머니즘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形而下(형이하)의 유대교 舊習(구습)에 젖은 신앙관을 깨트려 부수고자 오로지 사랑이신 하나님을 證擧(증거)하기 위해 성령으로 거듭나야만이 오직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는 靈性信仰(영성신앙)의 가르침을 몸이 죽기까지 公生涯期間(공생애기간) 내내 한결같이 說破(설파)하셨던 것이다. 이 걸 못알아 듣기로는 예수님 當時(당시)때나 只今(지금)이나 달라진 것은 털끝만큼도 없는 것이 오늘날의 基督敎(기독교=캐톨릭.개신교) 실태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예수님의 靈性信仰(영성신앙)이 붓다님의 佛性信仰(불성신앙)인 見性成佛(견성성불)의 信仰(신앙)과 한치도 틀림이 없이 똑같은 것이다. 마태복음 4장 17절에 예수님께서 맨 처음으로 說破(설파)하신 福音(복음)의 말씀이 있기를 『悔改(회개)하라 天國(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였다. 여시서 悔改(회개)하란 말의 뜻은 罪(죄=원죄와 자범죄)를 뉘우치라는 말이 아니고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를 참나로 알고 살아온 몸뚱이 중심으로 살아오던 삶의 생각에서 생각 머리를 돌이켜 몸나에 종질하며 살던 내 마음을 확 바꾸라는 말인 것이다. 바꾸면 어디로 어떻게 바꾸느냐 하는 것이 바로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에 그 答(답)이 들어 있다 할 것이다. 누가복음 17장 20절서 21절에서 말씀하시길 『하나님 나라는 볼 수 있게 臨(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신 말씀이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씀의 설명이라 할 것이다. 이게 무슨 말씀인가 하면 천국이 바로 사람의 心靈(심령) 가운데 마음 속의 意識(의식)에 있다는 말인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의 心靈(심령) 가운데 하나님의 永生生命(영생생명)의 神格(신격)인 聖靈(성령)의 씨를 심어 두셨다는 말이고 바로 하나님의 씨가 심어진 사람의 속 심령이 하나님의 神格(신격)이 살아 活動役事(활동역사)하시는 하나님의 聖殿(성전)이요 하나님의 나라란 말인 것이다. 해서 천국이 가까웠다는 말은 멀리 있던 것이 지금 가까워져 末世(말세)가 가깝다는 審判(심판)을 象徵(상징)하는 말이 아니고 마음만 돌이키면 바로 마음 속 그 자리가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靈性信仰(영성신앙)의 聖靈(성령)가르침의 一聲(일성)이 바로 이 말씀인데 사람들은 이 것을 人類(인류) 마지막날 다가올 審判(심판)을 豫告(예고)하는 象徵性(상징성)의 말로 잘못 알아 듣는 것이다. 요한복음 2장 13절서 19절로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淨化(정화)하는 聖殿廓淸(성전확청) 사건이 나오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솔로몬이 7년의歲月(세월) 동안 온갖 정성을 기울여 建築(건축)한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 民族(민족)이 凝集(응집) 할 수 있는唯一(유일)한 求心點 (구심점)으로써 유대민족이 民族的(민족적) 大試鍊(대시련)을 이겨낸 출애굽을 잊지않기 위해 기념하는 성전의 祭祀宗敎儀式(제사종교의식)이 民族(민족)의 名節(명절)로 刻印(각인)된 踰越節(유월절) 五旬節(오순절). 草幕節(초막절). 秋收感謝節(추수감사절) 때마다 節期(절기) 내내 몰려드는 사람들로 북적거려 人山人海(인산인해)를 이루었고 巡禮者(순례자)들은 最小限(최소한) 한차례 이상 짐승을 잡은 그 피로 자신의 罪(죄)를 代贖(대속)받는다는 贖罪代贖(속죄대속)의 敎儀(교의)에 따라 犧牲祭儀(희생제의)를 드리느라 성전마당에서 犧牲(희생)되는 짐승의 數(수)가 명절 동안 장사꾼 한 사람이 소와 양과 염소와 비둘기를 3.000마리가 넘게 팔았다고 하니 그 많은 장사꾼이 다 팔고자 죽인 짐승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또 외국 돈을 이스라엘 돈 세겔로 바꾸어주는 換錢商(환전상)들이 성전 마당에 櫛比(즐비)하게 늘어서 있어 거두어 들이는 換錢手數料(환전수수료)며 이들 장사꾼들의 자릿세만도 엄청났으니 명절 때마다 치뤄지는 이 성전 祭祀儀式(제사의식)으로 제사의식을 管掌(관장)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이 거둬 들이는 收入金(수입금)은 가히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 할만 하였다고 한다. 열세살 이상인 남자는 國內(국내), 國外居住者(국외거주자=디아스포라)를 莫論(막론)하고 義務的(의무적)으로 반드시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 祭儀(제의)를 치러야 할 의무가 법적으로 율법에 명기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해서 예루살렘 성전의 내부 비밀 창고에는 堪當(감당) 할 수 없을만큼의 금덩이로 메워져 나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팔아 장사를 하는 저잣거리로 滿身瘡痍(만신창이)가 된 예루살렘 성전을 예수님은 그냥 默過(묵과) 할 수가 없어서 성전을 惡(악)의 根源(근원)으로 여겨 聖殿擴淸(성전확청)의 淨化作業(정화작업)에 몸소 뛰어드신 것이다.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시어 그 노끈으로 양이나 소.염소나 비둘기를 성전에서 다 쫓아내시고 환전상들의 돈바꾸는 환전상을 엎어 뒤집어 버리시고 너희가 이 성전을 헐어버려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하시며 一喝大聲(일갈대성)의 獅子吼(사자후)를 吐(토)해내신 것이다. 예수님 當時(당시) 예수님이 이처럼 유대교 예루살렘 성전을 擴淸(확청)하신 聖殿淨化(성전정화)의 挑戰(도전)은 어쩌면 사마귀가 수레바퀴에 대드는 螳螂拒轍(당랑거철)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勿論(물론)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희생제의를 단 한번도 드린적이 없는 것은 말할 價値(가치)조차 없는 것이다. 썩어빠진 祭祀儀式(제사의식)의 샤머니즘으로 병이 깊어질대로 깊어진 잘못된 信仰(신앙)을 靈性信仰(영성신앙)으로 오로지 일깨우고자 하신 것이 예수님의 참뜻이신 것인데 이들에겐 결국 예수를 성전 冒瀆(모독)과 하나님 모독죄인 神聖冒瀆罪(신성모독죄)로 예수님을 로마 관청에 告發(고발)을 하게하는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佛敎(불교)도 붓다님이 45년간 說破(설파)하신 根本佛敎(근본불교)인 小乘佛敎(소승불교)의 見性成佛(견성성불)의 佛性(불성)가르침인 宗旨(종지)가 붓다님이 涅槃(열반)하신이후 지금까지 變質(변질)이 되어 見性成佛(견성성불)로 니르바나(열반=하나님나라)에 든다는 그 니르바나는 없어지고 니르바나의 자리에 붓다님을 올려놓고 붓다님을 니르바나님으로 遁甲(둔갑)시켜 붓다의 진리 가르침이 佛像崇拜(불상숭배)의 偶像宗敎(우상종교)로 轉落(전락)이 된것처럼 예수님의 영성가르침의 靈性信仰(영성신앙)도 예수님 死後(사후) 기존 유대교도들에 의해 靈智主義(영지주의)의 그노시스파인 異端(이단)의 한 宗派(종파)로 몰려 排斥(배척)당하고 地下(지하)로 숨어들어 名脈(명맥)이 거의 消滅(소멸)되어 갈즈음 유대교 근본주의자인 바울이 예수의 靈性信仰(영성신앙)을 바울 자신의 교의로 再脚色(재각색)하여 예수를 看板(간판)으로 包裝(포장)하여 내건 그리스도교란 새로운 宗派(종파)를 만들어 旣存(기존) 근본 유대교의 名稱(명칭)만 改名(개명)한 것뿐이지 짐승을 죽이고 그 피에 사람의 죄를 대신 씌워서 贖罪(속죄)를 받는다는 贖罪代贖(속죄대속)의祭祀(제사)와 儀式(의식)과 禮式(예식)의 샤머니즘적 祈福宗敎(기복종교)인 유대교 가르침의 뼈대는 그데로 固守(고수)했던 것이다. 문제는 바울에 의해서 예수님의 참 가르침인 靈性信仰(영성신앙)의 알맹이가 빠져버리고 原罪(원죄)니. 再臨(재림)이니. 聖靈孕胎說(성령잉태설)이니. 肉身復活說(육신부활설)이니. 贖罪代贖救援說(속죄대속구원설)이니. 휴거니. 千年王國(천년왕국)이니肉身變化說(육신변화설)이니하는 예수님이 말씀하시지도 않은 駭怪罔測(해괴망측)한 敎義信仰(교의신앙)으로 탈바꿈을 해버림으로써 예수님 死後(사후) 只今(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가르쳐지고 있는 기독교는 한마디로 예수 이름을 내건 바울의 교의가 판을치는 바울기독교지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샤머니즘의 종교라 해도 전혀 틀린말이 아닐 것이다. 한마디로 羊頭狗肉(양두구육)으로 羊(양)의 머리를 내걸고 개고기를 파는 精肉店(정육점)과 같은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교회의 가르침이라고 보면 될것이다. 바울은 살아 있는 예수님을 보지도 못한 사람이고 예수님 말씀 가르침을 직접 들은 일도 없는 사람인데 自稱(자칭) 使徒(사도)라 한 猥濫(외람)된 인물이 아닌가?......... 예수님이 十字架處刑(십자가처형)을 당하신 후에야 예루살렘으로 율법공부를 하러 유학을 와서 당시 유명한 律法學者(율법학자)였던 가믈리엘에게서 유대교의 율법을 배웠고 당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을 나자레언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을 바울이 주동이 되어 殘酷(잔혹)하게 迫害(박해)를 하고 닥치는대로 잡아 죽이는 바람에 이들 나자레언들은 독수리에 쫓기는 꿩병아리들처럼 사마리아로 팔레스타인으로 다메섹으로 안디옥으로 逃避(도피)하여 흩어지고 地下(지하)로 숨어들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울이 나자레언들을 逮捕(체포)하러 다메섹 성밖까지 왔다가 갑자기 성밖 길에 쓰러지면서 猝地(졸지)에 視力(시력)을 喪失(상실)한 것이 契機(계기)가 되어 하나님이 자기편이 아니고 예수편이란 자신의 샤머니즘적 判斷(판단)으로 하나님의 嗔怒(진노)를 풀고자 예수에대한 敵意(적의)를 버리고 善意(선의)로 마음을 바꾸어 예수를 追從(추종)하는 쪽으로 돌이키는 것 까지는 좋았는데 예수의 靈性(영성)가르침의 核心宗旨(핵심종지)를 뒤엎어버리고 유대교 근본교리에 짜맞추다보니 예수님의 영성 가르침이 샤머니즘인 祈福信仰(기복신앙=몸뚱이의 복을 비는 믿음)의 祭祀宗敎(제사종교)와 儀式(의식)과 形式(형식)의 종교로 變質(변질)을 시켜버린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는 기독교가 예수님의 正敎(정교)인 그리스도교가 아니고 바울의 기독교로 遁甲(둔갑)이 되었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바울의 敎理(교리)는 유대교에서 傳承(전승)되어 오던 짐승을 잡아 그 짐승의 피를 燔祭壇(번제단)에 祭物(제물)로 올리던 것을 예수를 십자가 처형의 祭物(제물)로 드려졌다는 것을 합리화 함으로써 過去(과거). 現在(현재). 未來(미래)의 모든 人類(인류)의 罪(죄)를 예수님이 十字架(십자가)에 제물로 드려짐으로써 代贖(대속) 하였으므로 이를 믿음으로 받아 들이고 입으로 是認(시인) 하는 자는 다 救援(구원)을 받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유대교교리의 遁甲(둔갑)일뿐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아무런 相關(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바울은 죽을 때까지 겉은 예수를 가장 잘 쫓는척하는 그리스도교인 이었는지는 몰라도 속은 예수의 가르침을 根本的(근본적)으로 排斥(배척)한 徹底(철저)한 유대교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바울 書信(서신)인 로마서 10장 9절서 10절로 바울의 말이 있기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主任(주님)으로 是認(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救援(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義(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救援(구원)에 이르느니라 』하였다. 이 말이 얼핏 보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사실 이 말은 웃겨도 너무 웃기는 駭怪罔惻(해괴망측)한 말인 것이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시인하고 또 십자가에서 죽었던 예수를 살리신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데 여기서 주님이란 말이 하나님을 일컫는 指示代名詞(지시대명사)인데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하나님이고 다시 살아 나신 이도 하나님이라는 말이니 이런 詭辯(궤변)이 어디있으며 하나님은 나고 죽는 상대적존재가 아니고 영원하신 絶對存在(절대존재)가 아닌가 예수님이 말씀하신 성령 거듭남으로 영생생명을 얻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에서의 復活(부활)이란 하나님이 사람의 心靈(심령)에 넣어주신 하나님 성령의 씨앗 靈(영)이 回復(회복)되어 永生(영생)의 하나님 나라에 든다는 것이지 죽은 육신이 다시 살아난다는 肉身復活(육신부활)이 아닌 것이란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바울은 이것을 못알아 들은 것이 아닌가 宇宙萬有(우주만유)의 모든 生命物質(생명물질)은 나면 반드시 죽는 것이 無限宇宙(무한우주)의 生滅循環攝理秩序(생멸순환섭리질서)의 絶對眞理(절대진리)인 것이 하나님의 진리인 것이다. 바울의 말처럼 마음으로 믿어 義(의)에 이르고 입으로 是認(시인)하여 救援(구원)에 이르는게 아니라 오로지 聖靈(성령)으로 거듭나야만이 救援(구원)에 이르는 것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인 것이다. 바울서신인 고린도전서 15장 50절서 55절로 바울의 말이 있기를 『50절:형제들아 내가 이 것을 말하노니 血(혈)과 肉(육)은 하나님 나라를 遺業(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을 것은 썩지 아니할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秘密(비밀)을 말하노니 51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瞬息間(순식간)에 忽然(홀연)히 다 變化(변화) 하리니 52절:나팔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變化(변화) 하리라 53절:이 썩을 것이 不可不(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절: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死亡(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應(응)하리라. 55절: 死亡(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死亡(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하였다. 50절은예수님 말씀과 거의 비슷한 脈絡(맥락)의 말인데 51절서 55절은 駭怪(해괴)한 論理(논리)의 橫說竪說(횡설수설)한 말로 죽고 썩어질 몸이 죽고 썩질 않고 또 죽어 썩은 것들이 무슨 나팔소리에 다시 忽然(홀연)히 죽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變化(변화)한다는 말을 하면서 50절에서 바울 자기가 말한 血(혈)과 肉(육)은 하나님 나라를 遺業(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했던 자신의 말을 자기가 완전히 뒤집고 있는 것이다. 기록된 말슴이란 사망이 이김의 삼킨바 되리란 말은 몸뚱이가 죽는 사망이 진정한 사망이 아니고 하나님이 넣어주신 靈(영)이 죽는 것이 진정한 사망이란 말이고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 아들이 되어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생명이 되니 몸뚱이가 暫時(잠시) 받아나온 생명시간을 살다가 죽고 썩는 거짓 사망에 속아 살던 생각을 이기고 넘어섰다는 말인 것이다. 바울은 뼛속까지 徹底(철저)하게 유대교의 律法(율법)과 祭祀宗敎(제사종교)로 죽으면 썩어 문드러질 몸뚱이가 살 동안 몸살림에 복받기만을 빌고 바라는 祈福信仰(기복신앙)에서 뿌리가 자라난 샤머니즘의 신앙이라 몸뚱이가 復活(부활) 하여 몸뚱이로 永生(영생) 하기를 바라는 虛妄(허망)한 執着(집착)의 未練(미련)에 붙잡힌 迷夢(미몽)에서 깨어나질 못하고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審判(심판)과 終末(종말)로 人類(인류)를 懲罰(징벌) 하시는 두려움과 恐怖(공포)의 하나님으로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靈性信仰(영성신앙)을 巧妙(교묘)한 자신의 논리로 까 뒤집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引用(인용)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하는척 하면서 자신의 獨特(독특)한 贖罪代贖救援(속죄대속구원)이란 敎義(교의)를 만들어 냈을뿐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던 靈性派信仰人(영성파신앙인)들인 나자레언 그리스도인들을 異端(이단)으로 몰아 쥐를 잡듯이 酷毒(혹독)한 迫害(박해)와 逼迫(핍박)을 가하며 잡히는데로 죽이기를 서슴치 않았던 장본인이 바로 自稱(자칭) 使徒(사도)를 自認(자인)하고 주장했던 바울인 것이다. 只今(지금) 이 세상에서 正統基督敎(정통기독교)라고 主張(주장)하는 正統(정통)이라는 기독교가 바로 기원후 325년에 이탈리아의 로마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통기독교로 認定(인정)되는 正經決定(정경결정)에서 이김으로써 바울을 追從(추종)하는 아리우스파가 靈性派(영성파)인 아타나시우스파를 그노시스(영지주의)파라며 異端(이단)으로 烙印(낙인)찍고 正統基督敎(정통기독교=정통그리스도교)라며 기독교 인류 역사에 登場(등장)을 한 것이 오늘날의 기독교인 것이다. 사실상 예수님의 가르침인 영성신앙은 예수를 간판으로 내세운 지금의 기독교에선 예수님의 참가르침이 바울의 敎理(교리)로 歪曲(왜곡)되고 둔갑된 것이지 예수님의 靈性信仰(영성신앙)은 예수님이 죽으신 그때 이후로 脈(맥)이 끊겨버린 것이라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라 한신 것은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예수님 자신의 心靈(심령) 속에 하나님이 넣어주신 하나님 성령의 씨앗이 참생명의 참나이며 뜌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고 이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님의 얼나가 意識化(의식화)되어 個體(개체)인 낱동의 몸뚱이 예수에서 全體意識(전채의식)인 하나님의 아들 의식으로 바뀐 것임을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마태복음 23장 9절에서 예수님이 말씀 하시길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 한분뿐이시니라 』하였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참나와 거짓의 나에 대한 極明(극명)한 가르침의 말씀으로 地.水.火風(지.수.화.풍)의 四大(사대)인 物質(물질)로된 내 몸뚱이를 낳아주신 이 땅의 물질인 몸의 아버지가 아버지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고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물질인 껍데기로된 거짓 模造(모조)의 아버지로 내 속에 넣어주신 하나님 성령의 참 아버지를 일깨워 주시고자 잠시 있는 模形(모형)의 아버지라는 말이다. 우리 사람의 精神(정신)이 몸의 주인이고 몸은 정신에 從屬(종속)된 것이 맞다면 예수님의 이 말씀에 토를 달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몸뚱이가 나의 참 주인이고 나의 참나요 정신이 몸뚱이에 종질하는 것이 맞느냐 아니면 내 정신이 내 몸뚱이의 콘트롤 타워의 司令搭(사령탑)으로 주인이고 몸뚱이가 내 정신을 따라야 하는 것이 맞느냐에 따라서 짐승이냐 사람이냐로 갈라진다는 것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요한복음 10장 17절서 18절로 예수님 말씀이 있기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權勢(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하였다.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세상 모든 사람을 다 예수님 자신처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성령으로 거듭난 靈我(영아)인 얼나로 참나가 되고 하나님 아들이 된 예수님 자신같은 사람만을 사랑하신다는 말이 그 전제이고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에서 얻기 위한 목숨이란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난 永生生命(영생생명)을 말함이고 버린다는 목숨이란 어버이로부터 받아 나온 물질로된 몸뚱이 목숨을 말하는 것이다. 버릴 수도 있고 다시 얻을 수도 있는 권세가 바로 각사람 자신의 選擇意志(선택의지)의 自由(자유)에 있는 권세라는 말인데 이 자유선택의지를 하나님이 유독 사람 각자에게 일임한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말을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꼬물거리며 땅을 기어다니는 한마리 하잘것없는 버러지처럼 살든지 暴惡(포악)하고 殘惡無道(잔악무도)하고 卑劣(비열)한 짐승으로 짐승의 욕망과 貪慾(탐욕)으로 살다 永遠(영원)한 滅亡(멸망)의 삶으로 끝내든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성령으로 거듭나 얼나의 참나로 하나님 아들이 되어 하나님 뜻을 쫓으며 살다가 영원한 영생생명의 하나님 품속에서 영생하든지 이 것은 다 사람 저마다 각 개인의 選擇(선택)에 맡겨진 일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選擇(선택)해서 하나님이 사람을 골라 들이는 것이 아니고 사람인 우리가 몸 목숨울 다 불태워서라도 성령으로 거듭나 반드시 하나님 아들인 참나가 되고자 자신과의 생명을 건 피튀기는 처절하고 극렬한 싸움끝에 하늘나라를 쳐들어가 爭取(쟁취)하는 자가 결국은 克己復禮(극기복례)로 성령 거듭남을 이루어 자기 자신의 心靈(심령) 속의 속에 숨겨놓으셨던 하나님 성령의 씨앗 영으로 하나님과 하나로 이어진 성령 줄을 잡은 자가 들어가는 것이라는 말인 것이다. 몸나에 貪着(탐착)한 自我(자아)를 자신의 十字架(십자가)로 짊어지라는 예수님 말씀과 같은 脈絡(맥락)의 말로 마하트마 간디 문집에 있는 간디의 글을 올겨보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버리기 전에는 우리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는 罪惡(죄악)의 뿌리인 貪慾心(탐욕심)의 痕迹(흔적)을 넘어 설 수가 없다. 하나님은 價値(가치)있는 하나의 選擇(선택) 할 수 있는 自由(자유)를 사람에게 주는 대가로서 우리에게 自我(자아)의 완전한 抛棄(포기=던져서 버림)를 要求(요구) 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自我(자아)를 포기하고 버리는 바로 그 瞬間(순간) 우리는 살아있는 모든 것에게 利他的(이타적)인 자신이 된것을 알게되고 그것은 곧 얼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證擧(증거)인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삶의 가치로 나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 중심의 삶으로 創造(창조)와 奉事(봉사)의 삶을 살게되는 것이다.」하였다. 요한복음 3장 3절서 10절에 있는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말씀 나눔을 보면 『3절: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4절:니고데모가 가로되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다시 날수 있습니까? 두번째 母胎(모태)에 들어갔다가 날수 있습니까? 5절:예수님이 대답하시길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절: 肉(육)으로 난 것은 肉(육)이요 聖靈(성령)으로 난 것은 靈(영)이니 7절: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奇異(기이)히 여기지 말라 8절: 바람이 任意(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9절: 니고데모가 가로되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10절:예수께서 말슴 하시길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일을 알지 못하느냐 』하였다. 니고데모는 당시 유대교 종교 최고회의 기관인 산헤드린에 속한 종교의사 결정을 하는 최고 결정기관으로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의 지도급 원로 70명으로 구성된 종교의사 결정기관 회원의 한사람이었다고 한다. 세상적 富(부)와 名譽(명예)와 學識(학식)을 남부럽지않게 다 갖춘 니고데모가 그것도 유대교도들이 다 異端(이단)이라고 蔑視(멸시)하고 손가락질하는 無命靑年(무명청년)인 예수를 밤에 찾아와서 말씀을 들었다는 것이다. 이 말씀의 核心(핵심) 알맹이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이고 몸뚱이가 다 큰 사람이 어찌 다시 어머니 태속으로 들어가 날수가 있느냐는 것이 니고데모의 말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사람의 心靈(심령) 속에 하나님 자신의 성령 씨를 넣어 주셨는데 그 씨로 영적인 새로남인 성령으로 精神復活(정신부활) 함을 말씀 하셨는데 니고데모는 몸뚱이를 전목적으로 알고 사는 사람이라 이걸 몸뚱이가 다시 어미 태 속에 들어갔다가 어찌 나는거냐고 반문하는 몸뚱이 소리를 하고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肉(육)으로 난것은 肉(육)이요 聖靈(성령)으로 난것은 靈(영)이라고 하신다. 肉(육)으로 난것은 죽고 썩어질 고깃덩이의 物質(물질)이라는 말이고 聖靈(성령)으로 난것은 죽지않고 썩지않는 나고 죽음이 다시는 없는 하나님의 永遠(영원)한 생명인 성령의 정신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바람 소리를 들어도 그 바람이 눈에 보이질 않으므로 어디서 와서 어디로 불어 가는질 모르지만 분명히 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성령도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사람의 심령 속에 다 마음이 있는 것처럼 분명히 있는 것이고 그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任意(임의)로 부는 바람처럼 몸뚱이의 잣대를 超越(초월)하여 自由(자유)하다는 말을 이렇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聖靈(성령) 씨로 거듭난 참나인 靈我(영아)의 얼나를 예수님은 진짜 사람의 아들이라며 人子(인자)라고 하셨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한 사람은 사람모양을 한 獸子(짐승수와 새끼자)로 짐승의 새끼라고 하신 말씀의 뜻이 含意(함의)된 말씀인 것이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이것을 두고 말하길 獨生子(독생자)라 하셨고 마태복음 11장 25절에서는 어린아이라고도 하셨다. 붓다님은 見性成佛(견성성불)한 佛性(불성)의 나를 如來(여래)라 하였고 孔子(공자)님은 君子(군자)라 하였고 孟子(맹자)님은 仁子(인자)라고 하였다 人子(인자)나 獨生子(독생자)나 如來(여래)나 君子(군자)나 仁子(인자)나 다들 서로 말만 다르게 하신 것이지 하나님의 성령 씨로 깨달아거듭난 靈我(영아)를 말하는 뜻으로는 똑같은 말인 것이다. 하나님의 聖靈(성령)이 내 마음 생각에 感應感化(감응감화)를 일으켜 意識化(의식화)된 것이 하나님의 성령이 내게 와서 사람의 아들인 人子(인자)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얼은 宇宙虛空(우주허공) 어디에도 없는 곳이 없으니 사실은 오고 가는 것이 아니지만 사람이 성령으로 거듭나는 순간을 그렇게 오는 것으로 느끼는 것일뿐인 것이다. 盟子(맹자) 盡心下篇(진심하편)에 仁也者人也(인야자인야) 合而言之道也(합이언지도야)라 하여 어진이라야 사람이다. 총합적으로 말하면 그것이 참이다. 하였다. 사람 貌樣(모양=꼴=모습)을 가졌다고해서 내가 사람이거니 하고 錯覺(착각)하고 살질 말라는 말이다. 사람은 다 人子(인자)가 아니면 다 獸子(수자)라 하여 짐승의 새끼라는 말이 이 말씀 속에 內包(내포)된 含意(함의=숨은 뜻)인 것이다. 성경 요한복음 3장 16절서 17절 말씀을 보면 『16절: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滅亡(멸망)치 않고 永生(영생)을 얻게하려 하심이니라. 17절: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審判(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救援(구원)을 받게하려 하심이니라 』하였다. 여기서 獨生子(독생자)는 물론 그 당시 성령으로 거듭난 靈我(영아)의 예수님을 말한 것도 되지만 사람 各各(각각)의心靈(심령) 속에 심기워 숨겨져있는 하나님 성령 씨로 거듭나기만하면 누구든 다 독생자가 될 獨生子(독생자)의 씨가 자신들 속에 들어있다는 말을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저를 믿는 자마다 滅亡(멸망)치 않고에서 저를 믿는 자마다란 말은 예수를 믿는자라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獨生子(독생자)가 될 수 있는 하나님 성령의 씨가 내 心靈(심령) 속에 나의 참나로 있다는 것을 깨쳐 알고 그 성령의 씨로 거듭나 하나님의 참아들이 되는 것을 말함이고 세상을 審判(심판)하려 하심이 아니고 세상을 救援(구원)받게 하려 함이란 것은 세상 어둠을 밝히는 하나님의 참아들이 되면 세상의 빛의 役割(역할)을 堪當(감당) 할 수가 있게되고 소금 역할을 해내는 하나님의 일꾼들로 하나님의 뜻을행하는 삶을 살수가 있다는 말을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믿던 무엇을 믿던 믿음을 빌미로 무슨 장사가 잘되고 肉身(육신)의 病(병)이 낫고 내가 복을 받고 子孫(자손)이 복받을 걸로 알고 믿는 몸뚱이 욕심의 믿음이라면 이건 차라리 믿음 없는 것만 못한 것인 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슨 巫堂(무당)이 섬기는 수준의 雜神(잡신) 程度(정도)로 아는 것이 바로 샤머니즘에 빠진 욕심에서 자라난 허황된 믿음이기 때문이다. 몸하나 성하면 된것이지 그 성한 몸으로 땀흘려 일한 땀의 열매로 足(족)하고 感謝(감사)하면 그만이지 입으로는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뭘 빌고 바라고 허황된 마음에 놀아난단 말인가. 빌질 않아도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분이 아니신가 문제는 내가 먼저 하나님 앞에 합한 아들의 자격을 갖추는 것이 急先務(급선무)가 아니겠는가. 빌고 바랄 것이 있다면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克己復禮(극기복례) 할 수 있는 切磋琢磨(절차탁마=마음을 갈고 닦음)의 마음을 살려달라고 빌어야 할것이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하나님을 믿는 信仰心(신앙심)이 어느누구보다도 徹底(철저)하고 篤實(독실)했던 歷史的(역사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는분이지만 그는 生前(생전)에 敎會(교회)를 나간 일이 한번도 없다고한다. 그 理由(이유)인즉 교회엔 예수님의 참가르침인 네 마음을 다 하고 목숨을 다 하고 뜻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네 이웃을 네 몸과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이 두 계명의 행함은 없고 교회의 敎理(교리)와 敎義(교의)만 있어서 자기는 껍질뿐인 제도권의 교회를 나가질 않는다고 떳떳하게 말했다고 한다. 無限宇宙(무한우주)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運行攝理(운행섭리)로 全自動(전자동)으로 秩序正然(질서정연)하게 사람의 들숨 날숨이 전자동으로 이뤄지듯이 하나님의 絶對權能(절대권능)가운데 運爲(운위)가 되고있는데 하나님이 이 無限宇宙虛空(무한우주허공)에 겨우 콩알 하나만할 程度(정도)의 이 흙구슬이란 地球(지구)란 존재에 달리 무슨 特別(특별)한 사랑을 왜 주신 것인지는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알길이 없는 神秘(신비) 그 자체일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한 몸뚱이 사람의 머리로 아는척하는 알량한 限界知識(한계지식)의 傲慢(오만)과 無知(무지)와 驕慢(교만)과 我執(아집)이 하나님의 절대진리를 어지럽히는 것일 것이다. 붓다님이 이 세상을 두고 말씀 하시길 苦海(고해)다 火宅(화택)이다 하신 것이 무슨 말이겠는가?...... 몸뚱이 나와 마음 나가 일으키는 五欲七情(오욕칠정)의 感覺(감각)과 感情(감정)의 波高(파고)로 쉼없이 넘실대는 물결이 이 세상이라는 貪.瞋.癡(탐.진.치) 貪慾心(탐욕심)의 慾亡(욕망)이라는 마음의 바다에 빠져 그 욕망늬 바다에서 허우적이며 스스로 만든 고통과 괴로움으로 살아가는 것을 이렇게 苦海(고해=고통의바다)에 譬喩(비유) 하신 것이고 火宅(화택)이란 몸뚱이 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를 참나로 알고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간다는 것이 곧 耽.瞋.癡(탐.진.치) 三毒(삼독)의 利己心(이기심)의 마음이 끊임없이 타오르는 마음 속의 貪慾心(탐욕심) 불길이 마치 불난집과 같이 내 인생을 송두리채 집어삼키며 캐우고 있는데도 이걸 모르고 붕난집을 뛰쳐나올 생각을 하질 못하고 그래도 거기가 좋다며 집착하고있는 어리석음을 火宅(화택)에 비유하신 것이다. 성경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 가셨다고 적은 것도 실제로 바다 위를 걸어 갔다기 보다는 세상이란 貪慾心(탐욕심)의 苦海(고해)에 예수님은 한발도 빠지질 않고 그 고해 위를 如如(여여)히 밟고 지나갔다는 비유를 한 것임이 그 含意(함의)일 것이다. 성경 복음서에 예수님의 말씀이라며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그것이 絶對的(절대적)으로 一劃一點(일획일점)도 無誤謬(무오류)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이것만큼 盲目的絶對誤謬(맹목적절대오류)에 빠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그 즉시 현장에서 받아 쓴 것도 아니고 예수님이 돌아가신지 수십년이나 지나서야 口傳(구전)되어 오던 것을 마치 直弟子(직제자)가 쓴 것처럼 이름을 내세웠으나 거의가 직제자가 직접 썼다는 證明(증명)되고 確認(확인)된 根據(근거)가 없는 것이다. 거기에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오던 말씀들을 各樣各色(각양각색)으로 적어놓은 筆寫物(필사물)들을 이사람 저사람이 베끼는 過程(과정)에서 실수로 잘못 베껴진 것도 있고 고의로 개인적인 再解釋(재해석)을 끼워넣은 改作(개작)된 異文(이문)이 놀랍게도 수천 수만군데나 되는가하면 특히 신약에는 예수님의 말씀을 過張(과장)하고 歪曲(왜곡)하여 군더더기로 敎義敎理(교의교리)의 군살이 붙어 엉뚱한 말로 遁甲(둔갑)하고 變質(변질)된 가라지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할 것이다. 예수님이 公生涯(공생애)의 맨처음으로 하신 말씀이 마태복음 4장 17절에 나오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다. 이 말씀이 바로 그 당시 유대교도들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이다. 여호와 야훼 하나님을 唯一神(유일신)이라는 진리의 겉모습을 표방하고 하나님이란 간판을 내걸긴 했으나 이스라엘 민족인 유대인들이 믿는 유대교란 것이 일개 유대민족의 민족신 수준의 한계를 벗어나질 못하여 저들만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며 타민족인 이방인들을 버러지 취급하며 排斥(배척)하고 멸시하는 優越感(우월감)에 도취되어 썩어문드러질 몸뚱이의 安逸(안일)과 平康(평강)과 福(복) 받기만을 바라고 비는 기복의 종교로 헛된 제사의식과 虛禮虛飾(허례허식)의 가증한 정신이 썩어빠진 종교로 墮落(타락)된 것을 直視(직시) 하신지라 이미 유대교엔 하나님을 믿는 참믿음은 없고 하나님을 팔아 당시 유대교의 旣得權者(기득권자)들인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라고 하는 가증스런 僞善者(위선자)들의 뱃속만 불려주는 것으로 극단적으로 타락되고 腐敗(부패)된 샤머니즘의 종교로 變質(변질)된 것을 두고 하신 말씀이 바로 悔改(회개)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신 것이다. 하나님이 무슨 夜叉(야차)나 羅刹(나찰=두억시니귀신)도 아닐진대 어찌 사람의 罪(죄)때문에 짐승의 피로 드리는 祭祀(제사) 받기를 원하실 것이며 사람의 죄때문에 審判(심판)과 懲罰(징벌을 내리시는 분이겠는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시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이 주신 성령으로 거듭나서 하나같이 다 예수님 자신같이 하나님의 獨生子(독생자) 아들 되기만을 바라신다는 것이 예수님이 悔改(회개) 하라는 말씀의 참뜻인 것이다. 이스라엘의 유대교 祭祀儀式(제사의식)은 아벨과 카인에서 출발하여 모세가 더욱 制度化(제도화)시켜 강화 하였고 솔로몬에 의해 성전 건축과 더불어 정착화와 儀式化(의식화)가 深化(심화)된 것인데 이런 제사의식은 의식을 집단 최면에 빠지게하는 헛된 종교의식일뿐인 것이다. 예수님이 깨달아 證得(증득)하신 하나님 아들의 성령 정신에서 보면 그당시 유대교는 완전한 샤머니즘 종교로서 종교를 빌미로 하나님을 팔아 종교지도자 그룹들의 몸뚱이 잇속만 챙기게하는 가증스럽고 위선된 썩어빠진 종교였다는 것이다. 해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9장 16절서 17절로 기록된 말씀에 서 볼 수 있듯이 유대교도들을 두고 말씀하시길 낡은 옷이다 낡은 가죽부대다 毒蛇(독사)의 자식들이다 灰(회)칠한 무덤이다 하시며 호되게 叱責(질책)을 하셨지만 이걸 바로 알아들은 사람이 없었고 그것은 지금이라고 더 달라진 것이 없기는 마찬가지라 할 것이다. 새 천 조각이다. 새 포도주다.새 가죽부대다 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거듭나신 참나인 하나님 아들을 이렇게 빗대어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제 本文(본문)을 살펴보면 1.知者不言(지자불언)이라 하여 안다고 하는 것을 말로는 다 할 수가 없다 하였다. 여기서의 知(지)는 絶對知(절대지)인 道(도=하나님)를 말하는 것이다. 形而上(형이상)의 道(도=진리.참. 하나님)는 사람의 言語(언어)나 글로 설명이 되어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억지로 말이나 글로 설명을 할려고 하다보니까 붓다님이나 예수님이나 老子(노자)님이나 莊子(장자)님처럼 譬喩(비유)로밖에 달리 말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말만으로는 진리를 다 들어낼 수가 없으니까 붓다님과 예수님은 자신들의 삶에서 진리를 몸소 몸으로 實踐躬行(실천궁행)하는 삶으로 드러낸 것이 아니겠는가 2.言者不知(언자부지)라 하여 말하는 이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하였다. 사람이 기껏 안다는 것이란 것이 自身(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최고의 앎이라 했다. 저가 뭘 안답시고 엄청 난체를 하고 甘言利說(감언이설)의 나팔을 불어대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으며 또 이말에 솔깃해하다 속아서 재산을 다 蕩盡(탕진)하고 亡身殺(망신살)이 뻗쳐 나자빠지는 어리석은 자들이 또 얼마나 많은가 내가 뭘 압네 하는 이런 자들은 다 아는체를 하는 僞善者(위선자)들이지 자신이 모른다는 것조차도 모르는 자들인 것이다. 大槪(대개) 이런 자들로는 易術人(역술인)이라는 자들이나 巫俗人(무속인)들. 風水地理(풍수지리)에 밝다는 자들이나 作名(작명)에 밝다는 命理學人(명리학인)이나 預言(예언)을 한다는 卜術人(복술인)등 이런 자들이 다 그런자들로 뭔가 神通(신통)한 異跡奇事(이적기사)를 믿고싶어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바람처럼 파고드는 毒蟲(독충)같은 似而非(사이비)들인 것이다. 全知全能(전지전능)하시고 無所不在(무소부재)하신 絶對眞理(절대진리)의 主權者(주권자)이신 하나님의 廣大無邊(광대무변)한 無限 宇宙運行攝理(무한우주운행섭리)의 진리를 한갖 被造物(피조물)인 사람이 어찌 다 알 수가 있겠는가 붓다님과 예수님이 깨달아 아신 진리는 하나님이 사람을 이 땅에 살게 하시는 目的(목적)과 價値(가치)와 理由(이유)인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아셨다는 것이고 사람이 왜 하나님을 참의 아버지로 섬기고 목숨바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그 까닭과 목적과 가치를 아셨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農夫(농부)가 秋收(추수)하여 거둬들인 농작물에서 알곡으로 잘 익은 열매인 씨를 收穫善別(수확선별)하여 곳간에 들이는 것이지 열매가 아닌 모든 거푸집 껍데기인 볏짚이나 콩대나 콩깍지 같은 것은 다 거름이나 불때는 아궁이의 불깜으로 쓰질 않던가 사람이 농사를 짓듯이 하나님이 그렇게 사람 농사를 직접 지으시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의 自由意志選擇(자유의지선택)에 맡겨서 알곡으로 잘 익은 예수님이나 붓다님 같은 人子(인자)들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서 자동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心靈(심령) 마음 밭에 하나님의 씨인 성령의 씨를 播種(파종)해 주신 것까지가 하나님의 일이시고 그 씨를 싹을 틔우고 못틔우고는 사람에게 맡기신 것이 하나님의 사람 농사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하나님은 사람 각자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실만큼 만물 가운데 사람을 특별히 사랑하신다는 증표가 아니겠는가 성경 요한 일서 3장 9절 말씀에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罪(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씨가 그의 속에 居(살거)함이요 저도 犯罪(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이라 』하였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란 바로 내 속에 있는 하나님 성령의 씨영을 참나로 깨쳐 알고 성령으로 거듭났다는 말이고 성령으러 거듭났다는 말은 이제것 참나로 알고 속아 살아왔던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가 참나가 아니고 콩이란 콩알 씨를 감싸고 있는 콩깍지의 껍데기처럼 자아란 것은 참나를 담고 있는 한갖 거푸집인 껍질의 나임을 알았다는 말이고 해서 거짓 껍데기 나인 자아에 종질하며 살던 삶의 머리를 성령으로 거듭난 참나인 靈我(영아)로 삶의 목적과 가치를 하나님 뜻 행하며 사는 삶으로 바꾸었다는 말인 것이다. 3.塞其兌閉其門(색기태폐기문)이라 하여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았다 하였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몸뚱이에 종질하던 몸뚱이 살림을 끝장을 냈다는 말이다. 사람의 몸뚱이엔 눈으로 볼 수 있는 구멍이 남자는 9개 여자는 10개가 있다. 그중에서 여섯 구멍을 佛家(불가)에선 六根(육근)이다 六門(육문)이라 한다. 相對性物質世界(상대성물질세계)를 보고.듣고. 맛보고. 냄새맡고. 촉감으로 느끼고. 생각으로 헤아리고 할 수 있는 感覺認知情報(감각인지정보)를 받아들이는 窓門(창문) 役割(역할)을 하는 感覺器官(감각기관)인 眼(눈안).耳(귀이).鼻(코비).舌(혀설).身(몸신).意(뜻의)를 六根(육근)이니 六門(육문)이니 한 것이다. 육근과 육문이 바로 사람의 몸뚱이인 것이다. 이 육근과 육문으로 받아들이는 色(빛색).受(받을수).想(생각상).行(행할행).識(알식)으로 사는 것이 곧 몸뚱이를 참나로 알고 사는 몸뚱이인 自我(자아)의 삶인 것이다. 佛經(불경) 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260字를 여섯 글자로 딱 줄인 것이 老子(노자)님의 塞其兌閉其門(색기태폐기문) 이 여섯字(자)라 해도 좋을 것이다. 無眼耳鼻舌身意(무안이비설신의)라 하여 눈.귀,코.혀.몸.뜻이 없다 한 것은 몸뚱이의 감각을 헤아려 전적으로 의지하고 살질 않는다는 말이고 無色聲香味觸法(무색성향미촉법)이라 하여 빛깔.소리.냄새. 맛깔.촉감.모든 물질이 없다한 것도 몸뚱이로 認知(인지)되는 感情(감정)에 휘둘려 살질 않는다는 말이다. 無色受想行識(무색수상행식)이라 하여 색이란 물질을 받아들일 생각도 행함도 앎도 없다 한 것도 끊임없는 변화의 연속선상에서 生滅循環(생멸순환)을 하고있는 물질이란 것에 휘둘려 속아 살질 않는다는 말이다. 無眼界乃至無意識界(무안계내지무의식계)라 하여 눈으로 보는 세계도 없고 뜻과 생각으로 아는 세계도 없다 하였다. 被造物(피조물)의 몸뚱이 感覺器官情報(감각기관정보)와 마음 마의 생각과 뜻으로 헤아린는 모든 앎이 믿을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無無明亦無無明盡乃至(무무명역무무명진내지) 無老死亦無老死盡(무노사역무노사진)이라 하여 無明(무명=진리에어둠)도 없고 진리의 어둠이 다함도 없고 늙어 죽음도 없고 늙어 죽어 다함도 없다 하였다. 뭐가 다 없고 없다는 것인가 하면 佛性(불성)인 본래면목의 성품의 참나인 靈我(영아)로 見性成佛(견성성불)한 精神人(정신인)으로 보면 몸뚱이의 모든 感覺認知(감각인지)의 앎과 感情(감정)이란 것이 다 참이 아니고 虛妄(허망)한 삔 쭉정이같은 것이고 그림자같은 것이라는 말이다. 붓다님의 이것이 老子(노자)님의 塞其兌閉其門(색기태폐기문) 이 여섯 글자를 이렇게 풀어놓은 것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눈구멍이 번쩍 띄고 귓구멍이 간질거리고 콧구멍이 씰룩거리고 입구멍이 맛에 취해 벌름거리고 이 구멍 맛으로 군침 삼키며 살던 食色富貴(식색부귀)의 썩어빠진 物慾(물욕)과 愛慾(애욕)과 愛憎(애증)의 淫慾(음욕)과 온갖 貪慾(탐욕)의 執着(집착)으로 질척거리며 살던 煩惱(번뇌)와 苦惱(고뇌)의 몸뚱이 삶을 十字架(십자가)에 못박아서 던져버리고 문에 대못을 꽝꽝박아 닫아버렸다는 말이다. 누가? 정신인이 된사람이 그렇다는 말이다. 몸뚱이로서의 사람의 삶이란게 한마디로 食色(식색)과 富貴(부귀)와 權力(권력)과 名譽(명예)를 餘恨(여한)없이 누리며 長壽(장수)하고 康健(강건)한 삶을 살길 바라는 것이 普遍的(보편적)인 삶의 目的(목적)일 것이다. 이 보편적인 본능적 欲求(욕구)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고 自己分數(자기분수)에 그쳐 安分知足(안분지족)하여 하늘 우러러 한점 양심에 부끄럼없이 떳떳하게 살 줄을 모르고 끝없는 貪慾心(탐욕심)의 奴隸(노예)가 되어 똥버러지만도 못한 개망나니로 墮落(타락)한 삶을 산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몸뚱이 나와 마음 나인 자아의 밑모르는 食色(식색)의 貪慾心(탐욕심)은 어떤 짐승보다도 더 지저분하고 醜惡(추악)한 짐승성질이 潛在(잠재)되어 있는 것이 우리 사람 짐승인 것을 너나 없이 사람이면 다 아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짐승 노릇을 딱 그만 두자는 것이 老子(노자)님의 이 말씀인 것이다. 4.挫其銳解其紛(좌기예해기분)이라 하여 그 날카로움이 꺾이고 그 어수선한 얽힘이 풀리고 하였다. 其銳(기예)라한 그 날카로움과 其紛(기분)이라한 그 어질러짐이란 것이 무엇인가?.... 그 날카로움이란 것은 바로 짐승성질인 貪.瞋.癡(탐.진.치) 三毒(삼독)의 貪慾心(탐욕심)의 질긴 뿌리를 말하는 것이다. 足(족)할 줄을 모르고 貪(탐)하기만 하는 탐냄이 貪(탐할탐)이요 自我(자아)의 성깔과 血氣(혈기)로인해 자기 성질을 못이겨 스스로 까무러칠 程度(정도)로 瞋性(진성)으로 憤氣撑天(분기탱천)하는 화를 일으키는 마음이 瞋(성낼진)이요 女人(여인)의 다리만 보아도 淫蕩(음탕)한 는지름이 발동하는 淫慾心(음욕심)에 흐물거리는 마음이 癡(어리석을 치)이다. 이 貪.瞋.癡(탐.진.치)가 시퍼렇게 날이 잘 선 칼날처럼 항상 攻擊的(공격적)으로 꿈틀대고있는 몸뚱이 나와 마음 나인 자아의 마음이 꺾였다는 것은 몸뚱이의 感覺(감각)과 感情(감정)에 종질하며 살던 자아의 삶을 꺾어버렸다는 말이고 그 어수선한 얽힘이란 것은 마음 속에서 늘 활활 불타오르는 본능적인 짐승성질의 욕구와 그 欲求充足(욕구충족)에 副應(부응)하지 못하는 현실 삶과의 乖理(괴리)에서 발생하는 마음의 葛藤(갈등)과 憤怒(분노)로 인한 煩惱(번뇌)와 苦惱(고뇌)의 얽힘을 말하는 것이다. 이 얽힘이 풀렸다는 것은 몸나와 마음 나인 자아가 일으키는 본능적인 짐승성질인 탐진치의 욕구를 超越(초월)하여 넘어섰다는 말이다. 그 구멍을 막고 그 문을 닫은 결과가 곧 그 날카로움이 꺾이고 그 얽힘이 풀렸다는 말인 것이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냄새 맡아지는 것.맛으로 분별이 되는 것. 생각으로 느껴지는 것인 자기 중심적인 感覺(감각)과 感情(감정)만으로 삶의 촛점이 맞춰졌던 物神崇拜(물신숭배)의 物質的(물질적)인 形而下(형이하)의 삶에서 보이질 않으면서도 分明(분명)히 있는 내 자신 속의 靈(영)으로 삶의 촛점이 옮겨져 靈的(영적)인 삶으로 돌아섰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無限宇宙(무한우주)가 全自動(전자동)으로 運行(운행)이 되는 것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絶對神秘(절대신비)에 의해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보이는 것은 다 보이지 않는 것에의해 존재가 되고 있는 것임을 否認(부인) 할 수가 없다는 것은 지금의 尖端科學(첨단과학)이 입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일시적인 현상으로 물화가 된 것인데 이는 잠시 보였다가 消滅(소멸)되어 없어질 虛像(허상)의 그림자나 껍질 같은 것이라면 보이지 않는 것은 그 껍질을 있게하는 根源的(근원적)인 實存生命(실존생명)의 속 고갱인 것이다. 보이는 것이 참이 아니고 虛像(허상)임을 看破(간파)하신 고타마 싯달타가 참을 찾고자 王宮(왕궁)을 出家(출가)하여 보드가야의 한 숲속에서 몸생명을 걸고 한참 精眞修行(정진수행)을 하고 있는데 브라만의 한부자 바라문의 고명딸이 싯달타에게 마음이 홀딱 빠져 짝사랑으로 相思病(상사병)에 걸려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싯달타를 보게 해달라고 아버지에게 졸라대니 아버지가 옥이야 금이야 하는 그 딸의 懇請(간청)을 못이겨 딸과 함께 정진중인 싯달타를 찾아가서 우리 딸과 婚姻(혼인)을 해 주질 않으면 내 딸이 곧 죽게 되었으니 慈悲心(자비심)을 베풀어 혼인을 해달라고 간청을 했더니 싯달타가 하는 말이 나는 하늘 여자라도 所用(소용)없는 사람이요 그런데 오줌. 똥. 피고름 으로 가득찬 저 가죽자루가 내게 무슨 소용이겠소 하였다고 한다. 인도 最高美人(최고미인)으로 명성이 자자할만큼 美色(미색)이 뛰어난 姚艶(요염)한 處女(처녀)를 눈앞에 두고도 이런 말을 하셨다는 붓다님이 바로 塞其兌閉其門(색기태폐기문)이요 挫其銳解其紛(좌기예해기분)으로 몸뚱이란 겉옷을 벗어던지신 聖子(성자)로 거듭나신 분이 아니신가 5.和其光同其塵(화기광동기진)이라 하여 그 빛과 어울어져 함께하고 그 티끌먼지와 하나가 된다 하였다. 빛과 함께 한다는 것에서 빛은 하나님을 빛에 비유한 것인데 마음 속에 하나님의 성령 씨로 거듭나서 하나님 아들이 되면 빛인 하나님이 내 속을 비추어 나와 하나님이 한빛으로 어울어진다는 말이고 빛의 아들이 된 나는 세상 어둠을 밝히는 빛의 소임을 할 수가 있다는 말이고 그 티끌 먼지와 함께 한다는 것은 땀흘리는 勞苦(노고) 로 온몸이 티끌 먼지를 뒤집어쓰는 것을 마다않고 열심히 일을 한다는 말도 되지만 티끌이나 먼지처럼 사람들로부터 하찮고 성가신 없신여김의 존재로 認識(인식)되어 無視(무시) 당하고 푸대접을 당하는 가난하고 疎外(소외)된 불쌍한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한다 할 것이다. 백장 스님의 말에 一日不作一日不食(일일부작일일불식)이라하여 하루 일을 하질 않았으면 하루를 먹질 않는다 한 말이 同其塵(동기진)을 말란 것이 아니겠는가 일하는 자는 謙遜(겸손) 할 줄을 아는 자이고 勤勉誠實(근면성실)한 자이고 일하지 않는 자는 驕慢(교만)한 자이고 게으른 자이며 남들의 땀흘려 얻은 땀방울의 열매를 喝取(갈취)하여 살려는 자들이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여러 소리 할 것 없이 只今(지금)의 우리나라 국회가 그것을 生生(생생)하게 라이브로 잘 보여주고 있질 않은가 말이다. 거룩한 하나님과도 하나로 어울어져 한 빛을 맘에 품은 사람은 티끌 먼지처럼 하잘 것 없어 보이는 새상에서 疎外(소외)되고 외롭고 힘든 삶을 이어가는 鰥寡孤獨(환과고독)의 鰥(홀아비환)인 홀아비나 寡(과부과)인 과부나 孤(고아고)인 고아나 獨(홀로독)인 독신자들의 가난한 사람들과도 貴賤(귀천)의 差別意識(차별의식)이 없이 하나가되는 행함의 삶을 實踐(실천)하는 사람이란 말인 것이다.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를 참낭=로 알고 사는 사람은 오로지 貪瞋癡(탐진치) 짐승성질의 貪慾心(탐욕심)으로 자기 잣대의 感覺(감각)과 感情(감정)만으로 極端的(극단적)인 利己心(이기심)으로 殺生(살생)의 血氣(혈기)까지 부리며 我慢(아만)과 我執(아집)에 붙잡혀 排他的(배타적)이고 攻擊的(공격적)이며 破壞的(파괴적)으로 오직 자기 자신만을 아는 唯我獨存(유아독존)식의 妄想(망상)에 사로잡혀 몸뚱이의 血氣(혈기)로 사는 사람들인 것이다. 6.是謂玄同(시위현동)이라 하여 이를 일러 玄同(현동)이라 하여 玄(현=검님)과 같다 하였다. 여기서 玄(현)은 노자님씩 하나님의 표현이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다는 말을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다. 예로부터 우리의 始源民族(시원민족)인 檀軍時代(단군시대)에는 하나님을 일컬어 검님이라 하였다. 집에 아기가 태어나면 빨간 고추와 까만 숯을 새끼줄 사이 사이 넣어서 썩어 꼰새끼줄을 검줄이라 하여 그 검줄을 사립문짝에 걸어두고 부정이 틈타지 않게 했던 것이다. 하나님과 하나로 같다는 말은 하나님이 주신 내 심령 속의 하나님 씨인 하나님 성령의 나가 나의 참나임을 알아 그 하나님 씨로 싹을 틔워 새로 났다는 말인 것이다. 새로 났다는 말은 내 몸뚱이의 五欲七情(오욕칠정)의 感覺(감각)과 感情(감정)만을 참으로 알고 몸뚱이 욕심에 종질로 살던 삶이 참이 아니고 헛껍데기의 거짓 삶임을 알고 하나님 성령의 씨영인 靈我(영아)의 精神的(정신적)인 靈的(영적) 삶으로 몸뚱이를 부리며 사는 정신인으로 하나님 뜻만 섬기고 행하는 삶으로 삶의 座標(좌표)가 바뀌었다는 말인 것이다. 7.故不可得而親(고불가득이친)이라 하여 그러므로 깨닫질 못하면 親狎(친압)하고라 하였다. 여기서 得(득)은 깨닫다이다. 親(친)은 친압으로 親狎(친압)은 버릇없이 군다는 뜻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人子(인자)와 쉽게 親熟(친숙)해지기가 쉽질 않다는 말이다. 이게 무슨 말인가하면 성인들의 말씀을 바로 알아 듣는 것이 쉽질 않다는 말인 것이다. 예수님 말씀을 바로 알아듣질 못했으니까 예수믿고 天堂(천당) 갑시다 하는 것이고 붓다님 말씀을 못알아 들으니까 부처님 믿고 極樂(극락) 가자는 駭怪(해괴)한 소리들을 하는 것이지 天國(천국)이나 極樂(극락)은 예수나 붓다를 믿어서 가는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니르바나님) 성령으로 내가 거듭나야 가는 나라인 것이다. 예수나 붓다는 달을 가리키는 한 손가락이지 예수나 붓다가 신앙해야 할 절대주체의 하나님이 아님을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닌가 우리가 목숨 불을 다 태워서라도 반드시 닮고 본받아야 할 삶을 사신분들이 예수고 붓다님이신 것이지 예수 붓다가 우리가 믿어야 할 하나님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하는 것이다. 예수가 다윗의 血統(혈통)이란 말을 예수님 자신이 한말도 아니고 하나님 성령으로 육신의 어머니인 마리아의 탯집에 孕胎(잉태)되어 자기가 태어났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도 아니다. 성령 잉태 예수 出産說(출산설)은 바울의 말인 것이다.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의 心靈(심령) 밭에 播種(파종)된 하나님의 성령 씨로 거듭나시어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의 거짓나를 던져버리고 靈我(영아)인 얼나의 하나님 아들로 새로 나시어 하나님 아들이 되신 것이지 성령 잉태 출산으로 하나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면 너나 없이 누구나 예수님처럼 성령으로 거듭나기만 하면 예수님 자기처럼 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의 骨子(골자)인 것이다. 8.不可得而疎(불가득이소)라 하여 깨닫질 못하면 疎遠(소원)하고라 하였다. 몸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를 참나로 알고 사는 사람 짐승들은 하나님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 아들의 말이 도무지 쉬 알아 들을 수가 없으니까 소원해지고 시큰둥해 한다는 말이다. 얼핏 들어보면 그럴듯한 말인 것 같기는 한데 쉬 알아 들을 수가 없는 것은 物質(물질)인 몸뚱이 慾心充足(욕심충족)을 삶의 全目的(전목적)으로 알고 사는 짐승 次元(차원)의 사람들이라서 하나님 성령의 靈的(영적)인 人子(인자)의 靈次元(영차원)의 말씀을 알아 들을 영적 귀가 열리질 않아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내 心靈(심령) 속의 하나님 씨인 성령으로 거듭나 靈復活(영부활)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예수님 말씀을 못알아 들었으니까 죽어 썩어 문드러진 몸뚱이가 다시 살아나 變化(변화)된 肉身(육신)을 입어 들림 받고 휴거되어 하늘나라에 든다는 둥 千年王國(천녀왕국)에서 王(왕)노릇 한다는 둥 奇怪妄測(기괴망측)한 甘言異說(감언이설)의 妖說(요설)로 惑世誣民(혹세무민) 하는 것이 아닌가 9.不可得而利(불가득이리)라 하여 깨닫질 못하면 날카롭다 하였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질 못하고 몸뚱이 나와 마음 나인 自我(자아)의 利己的貪慾心(이기적탐욕심)만으로 貪瞋癡三毒(탐진치삼독)의 짐승 성질을 부리며 사는 사람들은 시퍼렇게 날이 잘선 칼날같이 날카롭고 攻擊的(공격적)인 嗔性(진성)을 마음 속에 잔뜩 품은채 나 이외의 모든 것은 내가 다 짓밟아 뭉개고 이겨야 하고 죽여야 할 競爭對象(경쟁대상)이고 敵(적)이란 생각에 사로잡혀 敵對感(적대감)으로 膨湃(팽배)해진 날카로움으로 늘 쉼없이 싸울 血氣(혈기)로 緊張(긴장)이 되어있다는 말인 것이다. 10.不可得而害(불가득이해)라 하여 깨닫질 못하면 해롭다 하였다. 요한복음 3장 6절 말씀에 肉(육)으로 난 것은 肉(육)이요 聖靈(성령)으로 난 것은 靈(영)이니 하신 말씀이 그것이다. 肉(육)우로 난 것은 許諾(허락)한 시간 동안 살다가 죽고 썩어 없어질 物質(물질)이고 하나님 성령의 영생생명의 씨를 참나로 깨쳐 알고 거듭난 靈(영)은 하나님과 더불어 永生(영새) 한다는 말씀이니 이걸 깨닫질 못하면 영생생명을 내가 스스로 버리는 것이되니 해롭다 한 것이다. 11.不可得而貴(불가득이귀)라 하여 깨닫질 못해서 귀하다 하였다. 아무나 함부로 다 깨닫고 거듭날 수가 있다면 귀할 것이 없다는 말이다. 해서 붓다님은 강가강(갠지스강) 모래알처럼 사람이 많지만 깨달음을 이룬 사람은 자기 엄지 손톱위에 얹힐 흙만큼도 되질 않는다 하였다. 地球村(지구촌)인 이 흙덩이 구슬에 宗敎(종교)가 얼마며 또 거기에 속한 宗敎人(종교인)들이 얼마인가?........ 모든 종교의 각 종교인인 성도들은 다들 나름데로 저마다 정통진리의 길을 생명바쳐 떳떳하게 信仰(신앙)하며 걸어가고 있다고 自負(자부)할 것이다. 現實(현실) 삶인 지금이란 瞬間(순간)의 자리에서 진리의 꽃인 우담바라 꽃을 활짝 피워 낼 수가 없다면 다 물거품인 것이다. 성령 거듭남이 곧 見性成佛(견성성불)이고 覺道(각도)이고 得道(득도)이고 頓悟(돈오)이고 遷命(천명)인 것이다. 12. 不可得而賤(불가득이천)이라 하여 깨닫질 못하면 천하다 하였다. 孟子(맹자)에 循理而公於天下者(순리이공어천하자) 聖賢之所以盡其性也(성현지소이진기성야)라 하여 天理(천리=하나님의 섭리이치)를 따라 세상에서 공적으로 하는 것은 성현들이 그 받은바 본성을 다하는 까닭이고 縱欲而私於一己者(종욕이사어일기자) 衆人之所以滅其天也(중인지소이멸기천야)라 하여 인욕을 방탕하게 좇아 자기 자신에게만 사사롭게 하는 것은 바로 뭇사람들이 天理(천리)를 消滅(소멸)시키는 까닭이라 하였다. 天理(천리)에 순응하며 받은바 성품을 다하여 사사로움이 없이 공평무사하게 사는 사람이 천리를 깨친 성인과 성현의 삶으로 大我大同(대아대동)으로 산다는 말이고 自己一身(자기일신)의 貪慾(탐욕)과 利益(이익)만을 貪(탐)하고 固執(고집)하며 極端的利己心(극단적이기심)으로 物神崇拜(물신숭배)의 物質的(물질적) 삶을 全目的(전목적)으로 사는 뭇 사람들의 삶이 그 天理(천리)를 抹殺(말살)시키고 세상을 어지럽히고 混濁(혼탁)하게 한다는 말이다. 二者之間不能以髮而(이자지간불능이발이) 其是非得失之歸相去遠矣(기시비득실지귀상거원의)라 하여 이 둘 사이의 差異(차이)는 비록 터럭끝만도 못하나 그 옳고 그름과 얻고 잃음에 이르는 歸結(귀결)에 있어서는 서로가 하늘 땅만큼이나 멀다 하였다. 毫釐之差千里之謬(호리지차천리지류)란 말이다. 털꿑만한 차이가 서로 천리나 어그러진다는 말이다. 몸나를 나로 알고 사는 것과 얼나를 나로 알고 사는 것의 差異(차이)가 이렇다는 말인 것이다. 13.故爲天下貴(고위천하귀)라 하여 그러므로 천하가 귀하게 여긴다 하였다. 見性成佛(견성성불= 니르바나님이 주신 本來面目(본래면목)의 性品(성품)을 보시고 깨침을 이루심)하신 붓다님 聖靈(성령=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신(하나님 아들) 예수님 두 聖子聖人(성자성인)님들이 歲歲無窮(세세무궁)토록 追仰(추앙)을 받는 것이 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나시어 하나님의 아들들인 人子(인자)가 되신 形而上(형이상)의 精神的存在(정신적존재)들이라서 그런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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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보다 더 큰 허물은 없다” - 咎莫大於欲得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46 (0) | 2020.02.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