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할 때 유지하기 쉽고, 조짐이 나타나기 전에 도모하기 쉽고, 연할 때 녹이기 쉽고, 작을 때 흩뜨리기 쉬우니, 아직 일어나지 않았을 때 미리 하고, 혼란스럽지 않을 때 다스려라. 한 아름의 나무도 털끝만큼 작은 것에서 생겨나고, 구층의 돈대도 흙을 여러 겹 쌓음으로 비롯되고, 천릿길도 발밑에서 시작된다. (인위적으로, 억지로) 하려는 자는 패하고, 잡으려는 자도 잃으니, 이럼으로써 성인은 억지로 하려 하지 않으므로 패하지 않고, 잡으려 하지 않으므로 잃지 않는다. 백성이 일을 할 때에 항상 거의 다 이루어서 실패하니, 끝까지 처음처럼 삼가면 곧 실패하는 일이 없다. 이럼으로써 성인은 욕심 없기를 바라니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배우지 않기를 배우니 많은 사람이 지나친 곳에 돌아가고, 만물이 스스로 그러함을 도우니 구태여 (억지로) 하지 않는다.” - 노자, 『도덕경』, 64장 其安易持, 其未兆易謀, 其脆易泮, 其微易散, 爲之於未有, 治之於未亂, 合抱之木, 生於毫末, 九層之臺, 起於累土, 千里之行, 始於足下, 爲者敗之, 執者失之, 是以聖人無爲故無敗, 無執故無失, 民之從事, 常於幾成而敗之, 愼終如始, 則無敗事, 是以聖人欲不欲, 不貴難得之貨, 學不學, 復衆人之所過, 以輔萬物之自然 而不敢爲 |
노자는 무위의 정치가 현실의 혼란을 다스리는 근본적인 길이라고 한다. 무위의 덕을 실천하는 것이 모순이 잇달아 일어나는 혼란을 막는 길이다. 성인은 인위적인 다스림을 오히려 어렵게 여긴다. 처음부터 욕망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무위의 다스림이 욕망을 일으킨 다음에 고치려 하는 것보다 쉽다. 처음부터 인위적인 정치를 하지 않는 것이 쉬운 정치이다.
그러면 무위와 인위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또한 지금 노자를 읽는 우리는 이미 인위의 정치에 길들여져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노자를 읽으면서 현실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를 계속해서 고민하게 된다.
노자의 시대에는 나라와 정치가 시작되는 때였는데, 지금은 온 세상에 이미 나라와 정치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때이니, 그 둘 사이의 시대적 간격을 어떻게 메울 수 있는가? 이러한 고민은 무위와 인위를 이해하면서 풀릴 것이다.
▲ 도덕경 64장의 나타나는 무위(無爲)를 형상화한 작품 ⓒGetty Image |
인위는 어떠한 의도나 욕심을 가지고 억지로 하는 것이다. 집착하면 잃게 되고 삼가지 않으면 실패하게 된다. 성인은 억지로 하지 않으니 패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니 잃지 않고, 욕심이 없기를 바라고, 얻기 어려운 재화를 귀하게 여기지 않고, 잔기술을 배우려 하지 않는다. 만물이 스스로 그러한 것처럼 구태여 억지로 하지 않는 것이 무위이다.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소름끼치도록 심각하게는 하지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에는 혁명에 가담하지 마라
그저 원수들의 눈에 침이라도 한 번 뱉기 위해서 하라
돈을 좇는 혁명은 하지 말고 돈을 깡그리 비웃는 혁명을 하라
획일을 추구하는 혁명은 하지 마라
혁명은 우리의 산술적 평균을 깨는 결단이어야 한다
사과 실린 수레를 뒤집고 사과가 어느 방향으로
굴러가는가를 보는 짓이란 얼마나 가소로운가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도 하지 마라
우리 모두가 자력으로 괜찮은 귀족이 되는 그런 혁명을 하라
즐겁게 도망치는 당나귀들처럼 뒷발질이나 한번 하라
어쨌든 세계 노동자를 위한 혁명은 하지 마라
노동은 이제껏 우리가 너무 많이 해온 것이 아닌가?
우리 노동을 폐지하라.
우리 일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자!
일은 재미일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일을 즐길 수 있다.
그러면 일은 노동이 아니다.
우리 노동을 그렇게 하자! 우리 재미를 위한 혁명을 하자!
- D.H.로렌스, “제대로 된 혁명”
인위와 무위의 차이는 겉모습으로는 구별하기 어렵다. 스스로 돌아보아도 구별하기 쉽지 않다. 그 차이는 억지로 하느냐 기꺼이 하느냐? 욕심과 의도를 가지고 하느냐 자연스럽게 하느냐? 하는 데에 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면면히 헤아리고 성찰할 때에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뜻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하는 일이 예수님의 종말적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냐 아니냐를 구별하는 것도 인위로 하느냐 무위로 하느냐의 차이와 같다.
예수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지금도 문을 두드리고 있다. 이 두드림은 낡은 체제에 의해서 마음을 빼앗겨 버린 사람을 흔들어 깨워 일으키는 부름이다. 엄연한 현실의 사건들 속에서도 자기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일어나서 깨어 있으라는 심판의 두드림이다.
차지도 덮지도 않은 상태에서 대충 안주하려는 사람들, 그래도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으로서 적당히 끌려가는 사람들, 하느님과 예수님을 부인하지는 않지만 애매모호하게 관념의 줄타기를 하는 사람들을 일깨우는 두드림이다.
“묵시문학은 강렬한 민중신앙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눈앞에 강하고 악한 세력이 난무하나 그러면 그럴수록 하느님의 심판이 임박하리라는 것을 의미하며, 마침내는 하느님이 직접 다스리는 새 하늘 새 땅이 오리라는 강렬한 신앙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신앙이 우리(민중)를 절망에서 체념하지 않게 할 뿐 아니라 부활의(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용기)을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앙을 바탕으로 메시아적 공동체의 지향점은 이렇습니다. 첫째는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고 너무도 자명한 사실을 증언하되 몸으로 하라는 것입니다. ‘고난은 네가 받고 영화는 내가 누리겠다. 십자가는 예수가 지고 나는 구원만 받겠다.’ 이런 종교적 이기주의는 이루어질 수 없을 뿐 아니라 메시아적 공동체의 모습과 전혀 다른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의 사건이 지금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의 증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사건은 지금 교회 안에서가 아니라 성문 밖에서, 그것도 하느님도 예수의 이름도 부르지 않는 현장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거기에 바로 현존한 예수 사건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증언해야 합니다. 증언한다는 것은 그 사건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일입니다. 일치시키면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 속에 또한 그리스도(메시아)가 현존할 것입니다. 셋째는 바로 이런 행위를 통해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즉 그의 죽음에 참여한다는 것은 그를 나누어 먹는 일입니다. 그 의미가 이른바 성례전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나누어 먹는다는 것은 그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것이요, 식구가 된다는 말입니다. 식구, 그것이 바로 공동체입니다. 공동체는 밥을 나누어 먹는 것이 가장 기초적인 바탕입니다. 수고와 고통도 나누며, 사랑의 구체적인 행위로써의 나눔이 바로 그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종말 신앙, 메시아를 기다리는 것은 바로 지금 여기에서 내가 누군가의 메시아가 되겠다는 신앙입니다. 내가 어느 생명의 예수(해방자)가 되겠다는 신앙입니다. 메시아적 공동체를 희망하는 것은 지금 내가 속해 있는 공동체를 하느님 나라로 만들겠다는 결단입니다. 그 신앙과 결단을 통해서 우리는 바로 여기에서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 중에서 |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dotorikey@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