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상선약수(上善若水)”도덕경과 마가복음 묵상을 마치며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노장

“상선약수(上善若水)”도덕경과 마가복음 묵상을 마치며

柏道 2020. 2. 21. 11:44


“상선약수(上善若水)”도덕경과 마가복음 묵상을 마치며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 승인 2019.07.29 17:37


그동안 도덕경과 마가복음의 내용을 묵상하면서 노자와 예수가 제시한 길을 찾고 따라가려는 애씀에 함께 하시고 읽고 격려하신 모든 생명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제가 두 성인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한 것도 아니고 완벽하게 잘 살지도 못하지만, 도덕경과 마가복음을 묵상하면서 더 열심히 더 치열하게 때로는 더 여유롭게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특히 도덕경을 먼저 해석한 글들을 읽으면 많은 배움과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노자와 도덕경』(김광하, 너울북, 2006),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이야기』(이현주, 삼인, 2003), 『노자 왈 예수 가라사대』(이명권, 열린서원, 2017) 등, 참 소중한 만남으로 몸과 마음의 도약과 침잠의 경험을 하게 됩니다. 미더운 글이 아니지만 읽으면서 함께 할 수 있었던 모든 이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노자의 도덕경은 혼란과 모순이 극대화된 춘추전국시대에 그 당시 현실의 문제를 진단하고, 인간과 자연의 실상을 규명하여 그 대안을 제시한 책입니다. 춘추전국시대와 마찬가지로, 아니 인간의 역사가 시작된 이후로 거의 모든 시대는 길을 잃었습니다. 그 말은 어느 시대에나 길을 찾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기도 합니다. 길을 잃었으니 찾아야 하고, 길이 희미하니 바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그 길은 각자의 시대마다 생명과 정의와 평화를 위해 살았던 선조들이 걸어가신 길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인 저에게 그 길은 예수님이 먼저 가신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길은 우리에게 복음으로 다가와서 우리를 해방하였고, 사명으로 다가와서 우리를 결단하게 합니다. 어떤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를.

오늘 우리에게 모두가 함께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은 공의와 정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통한 상생을 위해서는 지배와 착취가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공평의 정의가 펼쳐지는 세상을 향한 길이 필요합니다.

“너희는, 다만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여라.”(아모스 5:24)

공의(righteousness)는 ‘째대크’라는 말입니다. 째대크는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자비로움을 뜻합니다. 공동체의 온전함을 위해서 문중 안에서 서로 돕고 고엘의 책임이 있는 미쉬파트가 이루어져도 공동체 안에는 약한 자들이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가난한 자들, 고아들, 과부들, 나그네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의로운 행동을 통해서 공동체가 평화와 온전함을 추구하게 됩니다. 비천하고 약한 자들을 동정(compassion)하고 자비를 베풀어주므로 그들도 공동체 안에서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공의가 물처럼 흐르게 하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들이 공의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기꺼이 행동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도덕경 8장에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하면서 물에 대하여 말합니다. 물은 자신을 고집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과도 같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잃지 않습니다. 물은 어디에 담아도 물이기 때문입니다. 물은 개인적으로도 삶의 모범으로 삼아 실천하기에도 좋습니다. 물은 남에게 이로움도 주지만, 남과 다투지 않고 부딪히면 돌아갑니다. 항상 낮은 곳을 향하여 가면서 낮은 곳에 있으니 겸손합니다.

물이 최상의 선인 것은 항상 흐른다는 것에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이러한 막힘과 단절을 어쩔 수 없이 경험하게 되기도 하고, 나 자신이 그 막힘과 단절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서 했던 가장 많은 일은 막힘과 관계의 단절을 회복시키는 치유행위였습니다. 물처럼 사람사이의 관계에서 막힘과 단절을 뚫고 사랑을 흐르게 하는 일이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 최상의 선입니다. 이처럼 정의가 어느 특정한 사람이나 집단에만 통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생명에게 정의가 당연한 상식이 되게 하라는 말입니다.

정의(judgment, justice)는 ‘미쉬파트’라는 말입니다. 미쉬파트는 사법적 정의를 뜻합니다. 심판과 판단을 치우침이 없이 공평((公平)하고 공명정대(公明正大)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불법과 억울함이 없이 사람을 사람답게 대하는 공정한 사회가 되어 사람들을 무자비하고 포학하게 학대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나 공평하고 공정하게 잘 살 수 있도록 죄악 된 장애물을 제거하여 회복의 은총을 베푸는 것입니다.

정의를 마르지 않는 강처럼 흐르게 하라는 말씀은 물을 담아두는 강이 마르지 않게 지속적으로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와 함께 수유칠덕(水有七德)을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개인의 수양에도 도움이 되지만, 이 사회를 인도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낮은 곳을 찾아 흐르는 謙遜(겸손), 막히면 돌아갈 줄 아는 智慧(지혜), 구정물도 받아주는 包容力(포용력), 어떤 그릇에나 담기는 融通性(융통성), 바위도 뚫는 끈기와 忍耐(인내), 장엄한 폭포처럼 투신하는 勇氣(용기), 유유히 흘러 바다를 이루는 大義(대의)입니다.

저의 필명은 도토리입니다. 도토리는 한자 道(길 도), 討(궁구할 토), 唎(가는 소리 리)를 써서 “길을 찾는 작은 소리”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가 가야할 길을 찾으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제대로 된 길인지를 성찰하기도 하고, 그 길을 속삭이듯이 작은 소리로 함께 갈 사람들을 모으고 있습니다. 저도 평생을 그 길을 찾으며 걸어갈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 중에서 마가복음은 “빈 무덤”을 말합니다. 안식일이 지난 날, 이른 새벽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버린 때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지켜보았던 여인들이 예수님이 묻힌 무덤을 찾습니다. 그들이 무덤에 도착하였을 때 무덤 입구를 막아 놓았던 큰 돌이 굴려져 무덤이 열려 있었습니다. 그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갔을 때, 예수님의 시체는 없고 한 젊은이가 흰 옷을 입고 있습니다. 이 젊은이는 예수님이 부활하였다는 것과 예수님이 이미 말했던 것처럼(14:28), “갈릴리로 너희들보다 먼저 가리라”는 말을 전해줍니다.
마가복음이 열린 마무리로 되어 있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열린 마무리는 마가에 의한 복음,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 구원의 길이 아직도 완성되거나 성취되지 않은 “열려진 끝”임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생 자체가 하나의 종지부가 찍혀진 것이 아니라 앞으로 계속될 새로운 삶을 건설하는 앞선 자의 길임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그 날과 시간을 정하여 과거의 사건으로 기념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은 참여의 영역이며, 따라가야 할 길이 될 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감정을 새로운 힘으로 승화시켜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고리로 삼는 사람은 갈릴리에서 새로운 시대를 준비합니다. 예수님의 삶이 민중들과 함께 하였던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그를 잊지 못하고 삶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큰 용기와 힘을 줍니다. 그들은 이제 갈릴리에서 새로운 출발을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 나라를 향한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 바로 갈릴리입니다.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면서 역사 속에서 실현하려는 사람들, 비록 억울한 죽음을 당했으나 살아 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그 죽음이 헛되지 않았음을 증언하는 사람들, 뒤따르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무쳐서 그들의 길잡이가 되는 사람들, 예수님의 활동 본거지였던 갈릴리와 같은 현장을 찾아서 다가가는 사람들, 그들의 행동 속에서 예수님은 지배자들의 정치적 음모를 깨뜨리고 부활하십니다.
믿음은 하느님이 존재함을 가르치며 사랑은 하느님이 선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지만, 희망은 하느님의 섭리를 보여줍니다. 아무 희망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섭리를 보는 사람은 자기의 삶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절망의 끝에서 갈릴리로 돌아온 여인들을 통해서, 예수님의 꿈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다시 펼쳐질 수 있었습니다. 절망과 희망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삶의 현장인 갈릴리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하고 희망을 선택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의 미래를 하느님께 걸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우리는 희망을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
- 이병일, 『미친 예수』(서울: 도서출판 밥북, 2017), “거기서 그를 볼 것이라!” 중에서

이병일 목사(광주무등교회)  dotorikey@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