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똥오줌으로 가득 찬 이 세상 더러운 땅 예토(穢土)를 넘어서야 깨끗한 나라 정토(淨土)에 이른다. 정토가 하늘나라요 니르바나 나라이다. 하늘나라에는 가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覺) 것이다. 깨달으면 ‘있다시 온이’ 여래(如來)가 된다. 여래란 있어서 있는(있게 해서 있는것이 아닌) 하느님 나라(얼나)가 왔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얼나(靈我)를 깨달았다는 말이다. 얼의 나라(얼나)에는 늙음도, 앓음도, 죽음도, 괴롬도 없다. 영원한 생명(얼나)의 사랑이 있을 뿐이다. 몸나가 없는 곳에 하느님이 계시고 하느님 앞에는 얼나가 있다. 하느님이 계시는 곳이 제계(彼岸)다. ‘제계 가온(歸一)’ 이것이 사람이 나아가야 할 길이요 이루어야 할 참이다. 제계 가온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요 얼나를 깨달음이다. 하늘나라는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자각(自覺)과 천국(天國)이 둘이 아니다. 얼나와 하느님은 하나이다. 사람은 식색(食色)의 수성(獸性)을 지닌 제나(自我)를 넘어서야 한다. 식색의 제나를 넘어서지 못한 사람은 아직 얼나가 다스리는 의식인 정신(情神)이 없다. 정신은 얼나가 제나의 수성(獸性)을 다스릴 때 정신이 나타난다. 땅에 하늘나라가 임한 것이다. 정신의 세계만 자성존지(自性尊持)하는 나라이다. - 1957
●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나는 참나가 아니다. 하느님이 보낸 얼나가 참나(無我)이다. 어버이가 낳은 제나(自我)는 죽으면 흙 한 줌이요 재 한 줌이다. 그러나 참나인 얼나는 하느님 나라를 세운다. 그래서 예수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요한 18: 36)”라고 했다. 얼나는 하느님의 생명인 얼로 우주 안팎으로 충만한 호연지기(浩然之氣)의 나이다. 그러므로 지강지대(至剛至大)하여 아무도 헤아릴 수 없고 무엇에도 견줄 수 없다. - 1957
● 몸이 죽어야 얼이 산다. 몸나는 노병사(老病死)이지 진선미(眞善美)가 아니다. 얼나가 진 · 선 · 미이다. 몸은 죽어 썩지만 얼은 살아 빛난다. 그러므로 몸으로는 죽어야 한다.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태 6: 10)”하고 죽는 거다. 그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밀알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러 온 것이다. 몸나는 죽으러 온 줄 알아야 한다. 안 죽는 것은 하느님뿐이다. 하느님은 얼이시다. 하느님의 얼이 내 맘에서 말씀으로 샘 솟았다. 얼나가 제나의 뜻없이 하느님의 뜻으로 보는 것이 정견(正見)이다. 제나의 뜻 없이(無意) 볼 때 진리의 뜻을 이루게 되는 것이 성의(誠意)다. 얼나의 뜻을 이루는 것을 진성(盡性)이라고 한다. 이것은 제나의 뜻이 없어지고(無意) 반드시가 없어진(無必) 세계다. 진리와 나가 하나가 되는(無我) 세계다. 하느님의 뜻인 진리가 참나(얼나)가 되는 세계다. 이것을 존심양성(存心養性)이라 한다. 공자(孔子)는 진리에 대한 사랑이 밥 먹는 것보다 강하다(君子憂道 不憂貧-논어 위령공편)고 했다. - 1957
● 우리 몸뚱이는 요망한 것이라 스스로가 체신을 갖추어야 참나인 얼나에 이른다. 몸나를 체신(體身)하여 희생함으로 몸나의 어둠이 가시고 얼나의 아침이 온다. 이것이 궁극의 믿음으로 가는 길이다. 우주 안팎의 전체인 하나의 절대자(絶對者)가 하느님이다. 얼로 충만한 허공인 이 우주가 그대로 하느님이시다. 내 맘속에 온 얼나는 절대허공인 하느님의 아들이다. 이 절대의 아들이 참나인 것을 깨닫고 요망한 몸나에 눈이 멀어서 애착함이 가시어지는가가 문제이다. 그래서 다시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면서 위로 올라간다. 그때가 되면 하나(절대)인 허공이 나를 차지할 것이고 허공을 차지한 얼나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얼나의 아침은 분명히 밝아올 것이다. - 1957
●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다(요한 12: 46).” 빛은 얼이다. 얼나의 자각 그것이 ‘나는 빛’이라는 말이다. 얼나가 있다는 것은 얼나를 깨었다는 것이다. 깨었다는 것은 생각이다. 밝은 것이 빛이 되듯이 깬 것이 빛이다. 그 사람이 얼나를 깨었는지 안 깨었는지는 그 사람의 말로 심판한다. 하느님도 예수도 우리를 심판하지 않는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심판한다. 예수는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사람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느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요한 7: 16~17)”고 했다. 예수는 자기가 하는 말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뜻(명령)이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이었다. - 1957
● 이 몸은 참나가 아니다. 이 몸은 참나를 실은 수레라고나 할까? 참나인 얼나는 보이지 않지만 영원히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의 얼나도 보이지 않지만 있다. 하느님이 보이지 않지만 하느님은 계신다. 얼나는 보이지 않지만 얼나는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얼나는 예수의 얼나나, 나의 얼나나 한 가지로 하느님이 주신 영원한 생명이다. 눈은 눈 자신을 보지 못하지만 다른 것을 보므로 눈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듯이 얼나는 얼을 볼 수 없지만 참된 생각이 솟아나오니까 얼나가 있는 줄 안다. 참인 하느님을 생각하는 것이 얼나가 있다는 증거이다.얼나가 없다는 말은 자기무시요 자기모독이다. 얼나가 있으면 하느님도 계시는 것이다. - 1957
● 공자(孔子)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았다는(天生德於予-논어 술이 편) 덕(德)을 나는 ‘속알’이라고 한다. 속알(德)이란 의식화(意識化)된 얼나이다. 이 속알은 제나(自我)에서 지혜, 정신, 인격으로 나타난다. 속알이 충만한 사람은 무엇을 생각 없이 가까이 하든가 멀리 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친절히 하는 것도 잘못이고 지나치게 무시하는 것도 잘못이다. 친압(親押)이나 모멸(侮蔑)은 속알이 모자라는 데서 일어난다. 친압처럼 간사한 것은 없고 모멸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사람은 인격이 중심이 되어야지 재간이나 외모가 중심이 되면 친압과 모멸을 막을 길 없다. 자라는 사람은 장차 무엇이 될지 모른다. 모두 예수나 석가처럼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달은 성인이 될 수 있는데 어떻게 업신여긴단 말인가? 생각하면 성인(聖人)을 존경하는 것은 쉽다. 그렇다고 소인들을 업신여기면 말을 안듣고 일을 안 해준다. - 1957
● 몸나에서 얼나로 솟나야 한다. 뼈와 골과 피로 이뤄진 머리를 머리로 삼아서는 안 된다. 심장과 이어진 머리는 잘라 버려야 한다. 이것이 주역(周易)에서 머리가 없으면 좋다(無首卽吉)는 것이다. 머리에는 피가 한 방울도 없이 해 오직 정(精)과 신(神)만 통하여 금강석처럼 빛나는 머리를 가져야 한다. 이럴 때의 머리를 말씀이라고 한다. 피 없는 머리는 차디차서 말씀뿐이다. 말씀만으로 살아야 한다. 생각하려고 할 것 없다. 다만 말씀을 머리 위로 빛나게 해야 한다. - 1957
● 깊이 느끼고 깊이 생각하여 마음을 비게 하고 마음을 밝게 하면 우리 마음 속에 깨닫게 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우리의 얼목숨을 키우고 얼생명을 키워가는 것이다. 그래서 깊이 느끼고 높게 살게 하는 것, 깊이 생각하고 고귀하게 실천하는 그것이 얼생명의 핵심임을 알게 된다. 우리가 밥을 먹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이 우주의 기운이 올라가고 빛이 내려옴도 다 우리의 얼목숨을 키우기 위해서 있다. 우주와 세계와 인생이 모두 얼목숨 키우기 위해 있다. - 1957
● 부흥회를 해서 병을 고치고 돈이 쏟아지는 것이 성령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인 얼나를 깨달아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느님 아들로 거룩하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성령이다. 요새 교회가 성령을 팔아서 사람들을 미혹케 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사람들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고 싶어서 성령의 권능(엑수시아)이라 하는데 요한복음 17장 2절에서 예수가 말한 성령의 권능(에스쿠시아)이란 사람이 지닌 수성(獸性)을 다스리는 권능을 말한 것이다. 이적 기사를 일으키겠다는 권능 생각은 아주 없어져야 한다. 요새 어떤 이들이 성령의 권능을 받아 병을 고친다고 야단들이고 여인들이 그 뒤를 따라 다닌다는데 그것은 모두 마귀(제나)의 짓이다. - 1957
● 인생문제는 정신적으로 자라서 성숙해질 때 풀린다. 성숙이란 익었다는 말이다. 내가 나를 이겨 다른 나가 되는 것이 성숙해지는 것이다. 나가 아닌 나가 곧 얼나가 된다는 것이다. 이는 제나(自我)가 부정(否定)되고 초아(超我)가 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제나(自我)에서 얼나로 솟난다는 말이다. 부분인 제나로 죽고 전체인 얼나로 시작도 없고 마침도 없이 영생하는 것이다. - 1957
● 제나(自我)란 참나인 얼나가 신을 신발이다. 발에 맞도록 아름답게 지어서 흙 떼고 먼지 털고 약칠하고 솔질하여 빛나게 닦아 힘있게 바로 살고 조심조심 길 찾아 마음놓고 걷다가 갈 길 다 간 뒤에는 아낌없이 주리라. 남(어버이) 지은 신이니 뜻 있게 신다가 갈 길 다 간 뒤에는 아낌없이 주리라. 이 제나(自我)란 참나(얼나)가 신을 신발이다. 이 신발은 일생 동안 신는다. 신이 낡아진다는 것은 참나를 찾았다(眞我發見, Self realization)는 뜻이다. 참나를 찾았으면 거짓나인 제나(自我)는 아무 때나 죽어도 좋다. 얼나로는 하느님 아들인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느님 아들인 얼나는 나지 않고 죽지 않는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을 가졌으니 멸망할 제나는 언제 죽어도 좋은 것이다. 그야말로 헌 신발처럼 버려도 아쉬울 것이 없다. - 1957
● 우리나라의 푸닥거리를 일본에서는 미소기(미소기, 목욕재계)라고 해서 집을 가셔내는 것이다. 이것도 일종의 세례라고 할 수 있다. 더러운 것은 계속 물로 씻어내야 한다. 오늘 물로 씻었다고 거듭난 것은 아니다. 우리 몸은 흙이지만 자꾸 씻으면 마음이 깨끗해진다. 문제는 성령인데 성령은 공자(孔子)가 말한 명덕(明德)이다. 명덕은 밝혀야 한다. 거울 같은 명덕은 자꾸 씻어 닦아야 한다. 내 몸은 흙 덩어리인 줄 알고 명덕을 밝히면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인 줄을 알게 된다. 또 예수는 바람을 갖다가 영원한 생명의 운동으로 비유하고 있다. 성령의 바람은 범신(汎神)이다. 범신이야말로 진정한 생명운동이다. - 1957
●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했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저희 안에 있고 나도 저희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 이다(요한 17: 26). ‘내가 아버지 존재를 저희에게 알게 했고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에서 이때의 나는 영원한 생명인 나, 영원한 진리인 나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아들인 얼나다. 사랑과 진리인 얼나를 저희(제자) 안에 있게 하려 한다는 뜻이다. ‘저희 안에’라는 것은 알기 쉽게 얘기한 것이고, 진리인 얼나에는 안과 밖이 원래 없다. 그러므로 안에 들어가는 것도 나오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 아버지가 오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 아들이 가는 것도 아니다. 성령이 가득 찬 전체가 하나인데 안과 밖이 있는 것도 오고 가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우리의 몸은 상대(相對)에 사니까 관념이 상대적이라 그렇게 말해야 알기 쉽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석가붓다에겐 본래 붓다(얼나)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석가도 얼나를 깨닫기 전에는 여느 사람과 다름없는 범인(凡人)이었다. 그렇다고 붓다(얼나)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붓다(얼나)는 없는 곳이 없다. 유일무이(唯-無二)의 절대존재(하느님)를 상대세계에서 깨달으면 그이(석가붓다)와 비슷하게 갈 수 있는 것이다. - 1957
● 석가는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다르마(Dharma, 法我)라고 했다. 다르마(法)는 참(진리)이란 뜻이다. 금강경에는 참(法)에도 마음이 살면 안 된다고 했다. 이것은 참으로 생각해야 할 문제이다. 구도(求道)란 참을 찾겠다고 마음을 내는 것인데 참에도 마음을 살리지 (生心)말라니 괴상한 말이라 아니할 수 없다. 거짓나인 제나(自我)가 참나(法我)를 찾으려고 해서는 참나를 찾지 못한다. 거짓나인 제나(自我)가 죽으면 참나는 저절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마음(自我)이 죽어야 한다. 생심(生心)하면 미혹하고 사심(死心)에 본성인 참나(法我, 불성)가 나타난다. - 1957
● 얼나는 큰나(大我)이다. 우리 말로는 ‘한아’ ‘한나’라면 큰나(大我) 를 뜻한다. 이 큰나는 얼나로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이다. 큰나(大我)에 는 제나(自我)란 없다. 제나(自我)란 나의 성질인데 나의 성미가 다르다고 해서 나를 매기게 된다. 그 성미라는 것이 무엇인가? 맛에 들러붙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떡을 좋아하느니, 술을 좋아하느니, 짜게 먹느니, 싱겁게 먹느니 이것을 가지고 개성(個性)이라고 해서 한이 있겠는가?오늘 다르고 내일 다른 그런 것이 참나가 아니다. 큰나(大我)에는 그런 제나(自我)가 없어 무아(無我)다. 공자(孔子)도 내 뜻을 꼭 이루어야 하겠다는 의필고(意必固)의 제나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내 의견, 내 기필(期必), 내 고집의 제나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와 같이 온전한 나, 곧 하느님의 얼이 주관하는 나가 큰나(大我)요, 얼나(靈我)요, 참나(眞我)다. - 1957
● 몸은 만나지만 마음은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고독한 세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선생도 깊이 생각하고 학생도 깊이 생각해서 서로 아무 말도 없지만 서로 마음속에 깊이 통한 곳에서 얼(靈)이라는 한 점 나 곧 얼나에서 만난다. 이 가온찍기(「.」)의 한 점만이 참된 점이다. - 1957
● 예수만 들려야 할 게 아니다. 모든 사람이 다 얼로 솟나 들려야 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구리뱀을 높이 들어 독사에 물린 이들이 쳐다보고 낫듯이 얼나인 인자(人子)도 들려야 한다. 물질의 제나에서 정신의 얼나로 솟난다는 뜻이다. 짐승으로 태어난 몸나가 얼나로 솟나 얼나라로 들리지 않으면 그 인생은 실패인 것이다. 짐승인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솟나게 해주었으니 이게 참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 아닌가! 우리가 여기서 몇 십 년 동안 짐승살이 하는 것으로 그치라는 게 아니다. 하느님께서 정죄(定罪)하여 너는 죽을 것이라 심판하고 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 몸이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우(하느님)로부터 난 얼생명을 믿어야 한다. 몸나가 죽는다고 멸망이 아니다. 멸망할 것은 멸망하고 우(하느님)로부터 난 얼생명은 영원하다. 내 맘 속에 온 하느님의 아들인 얼나를 믿지 않으면 이미 멸망한 것이다. 죽을 몸나를 참나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얼나로 거듭날 생각을 몰라서 못하고 알아도 안하니 이미 죽은 거다. 몸나의 숨은 붙어 있지만 벌써 멸망한 거다. 몸나는 살아 있어도 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녀가 만나 혼인하는 것은 얼나로 오르자는 게 아니라 떨어지는 일이다. 그게 바로 바울이 말한 멸망이요 정죄다. 비관 · 낙관, 적극 · 소극이 우리가 느끼는 감각으로는 엄연히 다르다. 그러나 상대세계를 뚫고 지나가 밑에 밑의 절대에 이르면 생사유무(生死有無)가 둘이 아닌 하나가 된다. 절대 앞에는 상대가 없어지고 절대 하나만이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뿐인 하나, 절대 하나(一)가 영원무한한 생명인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이 우리의 참나이다. 제나(自我)는 거짓나요 참나가 있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참나인 얼나를 깨닫도록 가르치는 것이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사는 동안 삶을 실현하자는 것이다. 삶의 실현은 소유를 늘리자는 것이 아니라 제 마음속에 있는 얼나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 1960
● 우리의 숨은 목숨인데 이렇게 할닥할닥 숨을 쉬어야 사는 몸생명은 참 생명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을 숨쉬는 얼생명이 참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인 얼생명에 들어가면 숨쉬지 않아도 끊기지 않는 얼목숨이 있을 것이다. 내가 어쩌구저찌구 하는 그런 제나(自我)는 멸망의 생명이라 쓸데없다. 석가의 참나(法我), 예수의 얼나(靈我)는 같은 하느님 아들인 영원한 생명이다. - 1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