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노자 - <道可道 非常道>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노장

노자 - <道可道 非常道>

柏道 2020. 2. 1. 11:09



노자 -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


어진재

2019. 8. 28. 22:30

 

노자 <도덕경> 제1장의 의 첫 문장 <도가도 비상도 道可道 非常道>를 우리말로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도올의 해석과 <노자를 웃긴 남자>의 해석을 비교하여 참고할 필요가 있다.

 

 

먼저, 도올은 기존의 일반화된 해석을 준용하여 이렇게 번역하였다.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

 

 

이경숙은 도올과 달리 이렇게 번역하였다. <도를 도라고 해도 좋겠지만 꼭 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도올은 위 문장을 조건문으로 보았다. 그리고 종속절에서 두 번 사용된 <도> 가운데 후자를 <말할 言 도>로 훈독하였다. 또한 주절의 <상>을 <늘 그러한>으로 풀었다. 그러면 이 문장의 의미는 <누군가 도를 도라고 말하면 이미 그것은 늘 그가 말하려는 도가 아니다>가 된다. 그것은 노자의 도를 선불교에서처럼 언표 불능의 대상으로 인식하는 불립문자적 사고의 표현이다.

 

그와 달리 이경숙은 위 문장을 인용문 認容文으로 보았다. 그런데 <비상도>에 <꼭 그럴 필요는 없다>는 의미를 집어넣었다. 따라서 이 문장은 <비단 도가 아닌 것도 얼마든지 도가 될 수 있다>는 폭넓은 인용의 의미로 읽혀진다.

 

 

 

두 해석의 공통된 결함은 <도가도 비상도>와 이후 문장들의 의미맥락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도가도 비상도>는 <도는 도이지만 상도가 아니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부연하면 <도는 한 때의 도 一時之道일 수 있으나 고정불변의 도 恒常之道가 아니다>이다. 그것은 세상의 이치 道가 유일 절대적 상태로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어지는 문장들은 왜 <도가도 비상도>인가에 대한 이유를 상론 詳論한다. 따라서 <명가명 비상명 名可名 非常名>은 <명은 명이지만 상명이 아니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부연하면 <이름은 한 때의 이름일 수 있으나 고정불변의 이름이 아니다>이다.

 

 

<무>란 천지의 시원을 가리키는 이름 無 名天地之始이며, <유>란 만물의 모태를 가리키는 이름 有 名萬物之母이다. 그처럼 태초의 무를 가리키던 이름이 현재 지상의 유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변화하였다.

 

 

도와 명은 천지자연 속 인간세계의 존재가치이다. 무와 유는 인간세계를 포함한 천지자연의 존재상태 그 자체를 지칭한다. 따라서 무와 유에는 전자와 달리 상무 常無와 상유 常有의 경계가 현존한다. 가령, 인간의 죽음은 상유에서 상무로의 극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물론 그것들도 살아있는 인간의 언어로 인식하는 지각의 대상이지만, 특히 상무는 인간의 이성적 판단력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신비의 영역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상무의 상태에 대하여 그 길이와 깊이를 알 수 없는 현묘함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常無 欲以觀其妙. 상유의 상태에 대하여 상무의 둘레를 맴돌며 徼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常有 欲以觀其徼.

 

인간의 도와 명은 <나 吾>의 상유의 상태에서만 존재 가능하다. 그러한 인간의 눈으로 살펴볼 수 있는 상무는 죽은 <나>의 추체험적 타자화로서의 천지자연의 허무한 상태이다.

 

그런데 상무와 상유는 자연의 시차에 의해 생겨난 같은 뿌리의 서로 다른 이름이다 同出而異名. 결국 그 둘의 본질적인 상태는 다함께 현묘하고 또 현묘하다 할 것이다 玄之又玄.

 

 

세상의 올바른 이치인 <도>를 깨닫는 일은, 그를 통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영역을 넓혀나가는 일은, 무에서 생겨나와 다시 무로 돌아가는 유의 현묘함을 세심히 관찰하는 일에서 비롯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