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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제1장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고대 비밀 가르침(密敎)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제1장

柏道 2020. 1. 29. 13:44


에크하르트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제1장

        

엮은이 : 우술라 플레밍 ◆ 옮긴이 : 안소근

그에게는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제1장
1. 하느님

하느님의 본성은 인간이 파악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선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에 대해 말하면서 '모든 말은 헛되다'고 했다.
에카르트는 하느님을 '스스로 빛나는 빛'이라고 말한다.
그분은 시간이나 장소 안에 나타나지 않으신다.
그분은 발설되지 않은 말씀이시다.
그분께는 원인도 선후도 없으며, 존재도 선함도 영도 아니시다.
이성으로 이를 이해하려는 것은 소용이 없다.
역설이 무슨 합리적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발설되지 않은 말씀'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원인이 없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느님은 '사물'이 아니고 '육신'도 없으시다.
그분은 형상도 질료도 아니시다.
이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추론하려고 애쓰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시도이다.
우리는 그저 에카르트가 다른 성인들과 함께 말하는 것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한다. 추론하려고 애쓸 것이 아니라 진리가 스스로 드러나도록 해야한다.
하느님의 이름을 짓는 것은 그분에게 '형상'을 부여하려는 시도가 될 뿐이다.
하느님을 분명하게 나타내 보이려고 하는 것은 그분을 인간의 개념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셈이다.
하느님께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분을 끌어내리는 짓'이다.
"인간은 자기가 하느님을 떠난 곳에서 하느님을 가장 잘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그가 무엇을 하고 있든, 또 아무리 빗나간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실제로는 하느님을 찾고 있다.


2. 하느님의 본성
하느님은 고요한 침묵 속에서 스스로 빛나는 빛이시다.
하느님은 어느 곳에도 계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여기에도 저기에도 계시지 않으며, 시간이나 공간 안에 계시지 않는다.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능가하신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 나는 정말 알지 못한다.
그분은 비존재라기보다는 존재이고, 실존하지 않는다기보다는 실존하신다. 우리가 최고로 열망하는 것조차 하느님께는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
그분은 마음의 갈망을 초월하신다. 하느님은 시간 안에서 보지 않으며,
그분의 시각은 변함이 없다. 하느님은 말씀, 발설되지 않은 말씀이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모든 말은 헛되다'고 했다.
우리는 하느님이 발설되지 않은 말씀이라고 하지만 그분은 형언할 수 없는 분이다. 가령 그분이 어떤 분이라고 하자. 누가 그 말을 발설할 수 있겠는가?
그것을 발설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말씀 뿐이시다.
하느님은 자신을 발설하는 말씀이다.
하느님이 계신 곳에서 그분은 이 말씀을 발설하신다.
그분이 계시지 않는 곳에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은 발설되시고 또 발설되지 않으신다.
성부께서는 발설하는 힘이며, 성자는 힘을 주는 말씀이시다.
내 안에 있는 것이 내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내가 생각만 하면 내 말이 밖으로 나가고 동시에 내 안에 머문다.
그렇게 성부께서는 당신 성자를 발설하시고, 동시에 성자는 발설되지 않은 채 그분 안에 머무신다.
여러 번 말했듯이 하느님이 나가는 출구는 그분이 들어오시는 입구다.
이 본성은 원인이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원인이 없는 이해만 파악할 수 있다. 창조된 지성은 유한하며 원인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원인이 없는 정신을 파악할 수 없다. 그리스도와 그의 인성도 마찬가지다.
하느님께서 원인이 없는 당신 자신의 본성을 바라보실 때, 그것은 원인이 없는 이해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바로 하느님의 본성 자체이다. 하느님 고유의 본성 안에 있는 하느님만이 하느님을 파악할 수 있다.
이는 스스로를 계시하시는 하느님이 아무도 가까이 갈 수 없는 빛 속에서
현현하심을 이해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 있는 모든 선이며, 그분은 모든 것 안에서 당신 자신을 소유하신다. 하느님은 모든 것 안에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사랑과 지혜와 의지와 선함을 가지고 있다면, 그 이유는 (그 안에 계신) 하느님께서 그러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무(없음)가 아니다.
하느님은 무 이전에 계셨다.
하느님께서는 선후가 없다. 무에는 유가 뒤따른다.
하느님은 무보다 앞서 계시기 때문에 무 이전에 하느님이 계시고 무 다음에 유가 있다. 아무것도 하느님을 앞서 가지 않으며 아무것도 그뒤를 따라가지 않는다. 아, 모든 것의 원인인 하느님은 바로 하느님 자신인 볼 수 없는 빛
안에서 본래부터 자리잡고 계신다!
하느님은 절대 고요 안에 스스로 자리잡은 빛이시다.
하느님은 존재도 선함도 아니시다.
선함은 존재에 따르는 것이며 존재를 넘어서지 않는다.
존재가 없다면 선함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이 영이시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느님이 참으로 영이라면 그분에 대해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성 그레고리오는, 우리는 하느님에 대해 올바르게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가 그분에 대해 하는 말은 모두 그저 더듬거리는 말일 수밖에 없다.
하느님께서 진리와 무관한 분이시라면 나는 진리를 택하고 하느님을 잊을 것이다.


3. 하느님의 이름
하느님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다만 하느님이 무엇이 아니라는 사실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태양이 검다거나 희다고 말하는 것처럼 하느님을 존재라고 말한다면
이는 그릇되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은 이것도 저것도 아니시다.
하느님 안에는 좋은 것도, 더 좋은 것도, 가장 좋은 것도 없다.
하느님이 선한 분이라고 말한다면 그분에게 잘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태양이 검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떤 착한 사람이 기도 중에 하느님의 이름을 알려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자 한 형제가 말했다.
"평화를 빕니다! 당신은 하느님을 끌어내리고 있군요."
이름 중에서 '그는 있는 자'라는 것보다 더 적합한 이름은 없다.
어떤 물건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그저 '그것이 있다'라고만 하면 말이 되지 않는다. 그것을 돌이라든가 나무 도막이라고 해야 비로소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러나 모든 것을 다 빼버리고 남는 것은 오직 '있다'는 것뿐이라고
생각해 보라. 이것이 그분 이름의 특성이다.
철학자들은 영혼의 절정에서 두 가지 능력이 흘러 나온다고 말한다.
그 능력은 의지와 지성이다. 그리고 영혼의 능력 가운데 지성의 능력이
가장 높다. 지성은 결코 쉬지 않는다.
지성은 하느님을 성령으로서도, 심지어 성자로서도 원하지 않는다.
지성은 성자를 피해 달아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하느님이 이름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수천의 하느님이 있다 하더라도 지성은 그분이 이름을  갖지 않는 데까지
이르려는 열망으로 그 모든 것을 뚫고 나갈 것이다.
지성은 이름을 가진 하느님보다 더 고귀하고 더 나은 것을 원한다.

4. 하느님을 찾음
모든 피조물은 본성상 하느님을 닮고자 한다.
하늘이 하느님이나 하느님 모상의 자취를 따르지 않았더라면 회전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느님이 모든 사물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자연은 죽은 채 멈추어 있을 것이며, 활동을 하지도 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모든 피조물은 인간에게 큰소리로 이렇게 외친다.
"당신은 진리와 선함을 찾습니다. 우리는 그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찾으십시오. 하느님이야말로 진리요 선하심입니다."
인간은 언제나 거룩함과 행복을 추구한다.
당신이 자고 있을 때나 깨어 있을 때나 하느님은 활동을 계속하신다.
우리가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의 혀에 피조물의 악취가 묻었고 우리가 하느님 사랑의 소금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느님 안에 머물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분은 세 가지를 요구하신다. 우선 자기 자신과 모든 것을 버리고 감각이
파악할 수 있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으며, 시간과 영원 안에 존재하는
어떤 피조물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저러한 선한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 되며, 선 자체를 위해 선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그 안에 계시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선하거나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에 이 말을 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참으로 그렇다.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찾으려고 또는 하느님께 도달하려고 자신 밖으로 나간다면 그것은 잘못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 밖에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없고, 내 안에서가 아니면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때때로 덕행에 나아고자 하는 사람들은 원을 그리는 것처럼 행한다고 말한다. 중심을 정하고 그 중심을 잘 잡아야 원을 잘 그릴 수 있다.
다시 말해 먼저 하느님께, 그리고 선과 선행에 마음을 두는 것을 배워야 한다는 뜻이다.
액체가 흘러내리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낮은 데서 높은 데로가 아니라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른다. 하느님은 영혼보다 높으므로 계속해서 영혼
안으로 흘러 들어가며 영혼을 그냥 지나가지 않으신다.
영혼은 하느님을 놓칠 수도 있지만, 영혼을 하느님 바로 아래에만 둔다면
하느님께로부터 직접 흘러나오는 영향을 즉시 받게 된다.
그 영혼은 다른 어떤 것에도 종속 되지 않는다.
두려움에도 고통에도 쾌락에도 하느님이 아닌 그 어떤 것에도 말이다.
하느님께서 그대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대가 피조물인 자신에게서 벗어나
하느님을 그대 안에 계신 하느님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보기 위해서는 높은 열망이 필요하다.
뜨거운 갈망과 자기를 낮추는 겸손은 기적을 이룬다.
맹세하거니와 하느님은 전능하지만 간절한 염원을 가진 겸손한 영혼을 물리치지 못하신다. ...목숨을 걸고라도 말하고 싶은 것은, 인간은 자기 의지로
철벽이라도 뚫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을 본 베드로는 그분을 만나려는 열망으로 물 위를 걸어갔다.
인간은 하느님을 떠난 곳에서 하느님을 가장 잘 발견할 수 있다.
그대가 최근 하느님과 함께 있었다면 지금 그분을 잃어버렸다 해도 그대로 내버려 두어라. 그러면 그분을 찾게 될 것이다.
선한 의지는 하느님을 결코 잃거나 놓치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의지는 하느님의 의지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뜻대로 하려고 하고 하느님께 이래라 저래라 지시한다.
그것은 선한 의지가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의지가 무엇인지 하느님에게서 찾아내야 한다.
대체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의지를 포기하길 원하신다.
아무도 자기 약함이나 잘못이나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하느님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만일 어떤 큰 결함이 그대를
방황하게 만들고 그 때문에 하느님께 가까이 있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어떤 경우라도 하느님이 그대 가까이 계시다고 여겨야 한다.
자기 집에서나 장터에서보다 사색과 기도, 신심행위들을 통해 더 많이
하느님께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머리를 덮개로 가리고
탁자 아래 하느님을 숨기려는 것과 같다.
일정한 형식 속에서 하느님을 찾으려는 사람은 형식을 고수하느라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하느님을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특별한 형식 없이 하느님을 찾는 사람은 자신 안에 계신 하느님,
'아들과 함께 사시는' 하느님, 생명 자체이신 하느님을 발견한다.
사람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두려움에는 해로운 것도 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하느님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6. 하느님의 사랑
누군가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분은 너무나 사랑스러우시므로 모든 피조물들을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기쁨 중에서나 슬픔 중에서나 한 목소리로
그분의 사랑스러움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그 사랑은 어느 정도인가?
하느님은 당신의 사랑으로 사랑할 수 있는 모든 것,
사랑하는 모든 것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신다.
둘째, 창조된 것들은 모두 그 사랑 때문에 하느님이 그들을 어쩔 수 없이
사랑하게 만든다.
셋째,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다수성에서 끌어낸다. 다수성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은, 다수성에서 벗어나 그분의 일치로 들어가게 하는 그런 사랑을 추구한다.
넷째,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피조물에게 그 생명과 존재를 주고 그들을
하느님 사랑 안에서 보존한다. 옷의 색깔이 옷 안에서 유지되듯이 피조물은 사랑이신 하느님 안에서 그 존재가 보존 된다. 색깔을 옷에서 떼어내면 색깔의 실체는 사라진다. 마찬가지로 피조물을 사랑에서, 곧 하느님께로부터
떼어낸다면 그것은 없어지고 만다.
하느님은 사랑이며,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이들이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운 분이시다. 어떤 피조물도 악한 것을 사랑할 만큼 타락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선 아니면 선처럼 보이는 것들이다.
그러나 피조물의 선함은 하느님에 비하면 악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묵상 중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사랑은 영혼을 충족시킵니다."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사랑 안에 사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살고, 하느님은 그 사람 안에서 사신다."

영적인 것과 육적인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영적인 것은 다른 것 안에 있을 수 있지만 육적인 것은 그럴 수 없다.
물은 통 안에 있을 수 있지만 통은 물을 둘러싸고 있다.
나무가 있는 것에는 물이 있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물질은 다른 물질 안에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영적인 것들은 서로 '안에' 살 수 있다.
기쁘고 행복한 천사들은 자신 안에 살고 다른 천사들 안에 살며 또 내 안에서 산다.
그리고 비록 내가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지극히 복되신 하느님이 내 안에
계신다.
하느님은 그대가 피조물적 기질에서 벗어나기를 마치 그분의 행복이 온전히 여기 달려있는 것처럼 간절히 바라신다. 나는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에 대해 결코 감사드리지 않는다. 그분은 그럴수밖에 없으시기 때문이다.

...내가 정말로 감사드리는 것은 그칠 줄 모르고 사랑하시는 그분의 선하심이다.
하느님은 그분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당신의 생명과 존재가 마치 나를 사랑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처럼 내 영혼을 너무나 사랑하신다. 나를 더이상 사랑하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그분에게서 신성을 빼앗는 셈이 될 것이다.
하느님이 진리이듯이 하느님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선하듯이 하느님은 사랑하신다.
하느님께 두는 활기찬 희망과 신뢰는 참되고 완전한 사랑을 보여준다.
신뢰는 사랑한다는 최고의 증거다.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신뢰를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우리가 하느님께 바라는 것이 실제로 실현 된다. 그것은 천배나 더 이루어진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만큼 그분을 믿게 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 중에 하느님을 신뢰하는 것보다 더 마땅한 일은 없다. 하느님은 당신을 깊?신뢰한 이들을 아무도 실망시키지 않으셨다. 그분은 이 신뢰가 사랑에서 온다는 사실을 아시기 때문이다.
사랑은 신뢰만이 아니라 참된 지식과 절대적 확신도 가지고 있다.
사랑은 어떤 식으로도 하나가 되지 않는다. 만족이나 충만함은 하나로 묶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행위에 있어서는 하나로 묶어 주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지식도 사랑도 결코 어떤 것을 한데 묶지 않는다.
사랑은 하느님을 단지 선한분으로만 여기므로 하느님은 이름을 갖지 않으신다. 선과 사랑은 그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
사랑은 하느님을 배일 속에, 장막 안에 둔다.

6. 하느님의 용서
죄가 있는 곳에는  완전한 신뢰나 사랑이 없다.
그러나 사랑은 죄를 완전히 덮는다. 사랑은 죄를 알지 못한다.
인간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마치 죄가 없었던 것처럼 즉시 씻겨지고 없어진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갑자기 그리고 넘치도록 이루어진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보이는 신뢰보다도 더 많이 전부 다 완전히 용서하신다. 

7. 하느님께서우리 모두를 사랑하시듯이 우리 이웃 모두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 주님은 세가지 사랑을 지니셨는데, 우리는 이 점에서 그분을 닮아야
한다. 그 사랑은 본성적 사랑, 은혜로운 사랑, 신적 사랑이다.
하느님 안에는 하느님 아닌 것이 없다.
우리 안에서는 이 사랑이 점차 상승하는 단계적 사랑으로, 곧 좋은 것,
그보다 더 좋은 것, 완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는 더한 것도 덜한 것도 없으며,
그분은 그저 단순하고 순수하고 본질적 진리이시다.

하느님의 첫번째 사랑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선함이 그분으로 하여금
모든 피조물을 창조하게 했음을 알 수 있다. 하느님은 그 크신 섭리로 피조물이 당신과 함께 당신의 선함을 누리도록 하셨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사랑하시기 때문에 각각의 피조물은 하느님이 부어주는 사랑을 받을 수가 있다. 내 영혼이 자기 안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은 세라핌의 영혼처럼 크고 넓다면 하느님은 그 천사에게 부어주는 만큼 나에게도 사랑을
부어주실 것이다. 원을 그리면 원 위에 있는 모든 점들은 중심에서 일정한
거리에 있다. 중심은 고정되어 있는데 원 위의 한 점이 다른 점보다 중심에
가까이 놓여 있다면 그것은 잘못 놓여 있는 것이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이다.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않고 그 자체 안에 온전히 머무신다.
피조물이 하느님께로 받기 위해서는 자신을 벗어나야 한다.

우리가 인간에 대해 말할 때는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도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권고하셨다. 왜냐하면 피조물의 절정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각자 받을 수 있는 만큼 당신을 부어주신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그 사랑으로 모든 피조물을(어떤 것들은 혈연관계나 우정 때문에 더 가깝다 하더라도) 동등하게 사랑해야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은혜로운 하느님의 사랑으로 똑같은 사랑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어떤 사람을 다른 사람보다 더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나는 내가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나에게 더 많은 것을 청한다면
나는 그에게 나 자신을 더 많이 줄 수 있다.
하느님은 모든 피조물을 똑같이 사랑하시며 그들을 당신 존재로 채우신다. 우리 역시 사랑으로 우리 자신을 모든 피조물에게 부어주어야 한다.
우리는 자주 비그리스도인들이 타고난 이해력으로 이와 같은 친절의 단계에 이르는 것을 본다.
이교 철학자가 관찰한 바와 같이 인간은 본래 친절한 동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