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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어록-유교도 계시 다 받아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다석

다석어록-유교도 계시 다 받아

柏道 2020. 1. 2. 12:31

 

다석어록-유교도 계시 다 받아

 

▶정성 성(誠)은 말씀(言)이 이루어지(成)다는 글자이다. 말씀이 이루

어지고 예언이 이루어진 것이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느님에게 도달한 것이 기독교이지만 유교에서는 말씀을 이룬 지행일

치 (知行-致)의 사람을 성인(聖人)이라고 한다. (1956)

 

▶유교(儒敎)에는 주일무적 (主一無適)이라는 말이 있다. 하나(절대)를

님으로 정했으면 딴 데로 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나만을 꼭 가지고

있으라는 말이다. 유교하는 사람들은 응무소주이생기심(應無所住以生

其心)은 배척하나 주일무적은 반대하지 않는다. 주역(周易)의 정신에

서는 '응무소주소주이생기심'을 '주일무적'이라 한다. (1956)

 

▶이 사람은 자꾸 따져보는 버릇이 있다. 이 해가 저무는데 실상 한

일이라고는 없고 그저 경전을 들여다본 것밖에 없다 『대학(大學)』을

보면서 생각을 해보았다. 주역(周易)은 고도의 천문학이라면 『대학은

지리학과 같다. 주역은 '내 생명 내가 산다'는 것이라고 한 마디로 말

할 수 있다. 이처럼 내게는 주역이라면 무엇인가 잡히는 것이 있는 것

같은데 『대학은 지금 생각해도 이해는 하나 어려운 것이 있고 모르는

것이 있다. 「대학의 가르침이 사람이 사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어떤 점에서 참고가 되는가를 생각할 때 참으로 어렵다.

 

▶대학에 좋아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지지지지(知至至之)이다. 이

를 데를 알면 거기에 이르도록 노력하는 것을 뜻한다. 지 (至)자는 우리

말 '이르다'로는 뜻이 잘 표현되지 않는다. 일본말에 이다루( )에

는 노력의 뜻이 있는 것 같다. '이르다'보다는 '이룩하다'라고 하면 지

지(至之)의 뜻에 가깝다

   『대학에 지어지선(止於至善)의 지(止)와 지지이후유정(知止而後有

定)의 지(止)는 다르게 생각된다. 지극한 선에 멈춘다(止於至善)의 지

(止)는 목적이다. 궁극에는 그 지(止)에 가야 한다. 그런데 그칠 줄 안

뒤에 정함이 있다는 지(止)는 그 자리에 가는 것을 알려고 하는 지지

(知止)이다. 거기에는 소극적으로 지저분한 번뇌를 내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본래의 뜻인 목적을 찾아가면 그냥 절로

지저분한 번뇌를 버릴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지지이후유정'의 지(止)

는 아주 높게도 낮게도 정 (定)할 수가 있다. 따라서 지지 (知止)는 대단

히 어려운 자리이다. 대단히 어려운 줄을 알 때 그칠지(止)를 할 수 있

는 것이다. (1956)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는 세상에서 직업을 갖는 데 쓰자는 것이

아니다. 이르러야 할 데를 알면 이룩하자는 것이고 마쳐야 할 것을 알

면 끝마치도록 애써 나갈 뿐이다. (知至致之 知終終之) 만일 나라 다

스리는 자리를 직업으로 안다면 『대학이 요새 대학과 비슷한 것이 된

다. (1956)

 

▶『대학에 삼강(三綱)이 있는데 명명덕(明明德), 친민(親民), 지어지

선(止於至善)이다. 이 삼강에는 앞뒤를 따지는 것은 안 된다. 이 세 가

지가 따로 있는 것도 아니요, 앞뒤가 있는 것도 아니다. 『대학에서는

천하의 명덕(明德) 인류의 명덕(明德)을 죄다 밝히자는 것이다. 친민

(親民)의 친(親)은 신(新)으로 풀어야 한다. 새롭게 사는 것이 하느님

과 친하는 것이다. 새롭지 않는 것을 버리지 않으면 친할 수가 없다.

천하라는 것은 한 물건인데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옳게 이룩해야 할

것이 지어지선(止於至善)이다. 그리하여 완전에 이르렀을 때는 움직이

지 말라는 것이다. (1956)

 

▶공자(孔子)는 옛 임금들 가운데서 명덕(明德)을 밝힌 분으로 요

순, 우, 탕, 문. 무, 주공 등을 표준으로 생각한 것 같다. 이런 분을 본

받아 자기 속의 명덕을 밝히자는 것이다. 천하의 백성을 제 몸과 같이

알아야 한다는 것이 친민(親民)이다. 이 명덕(明德)과 친민(親民)이

지선(至善)에 가서 멈춘다. 이것이 궁극의 목적이다. 적어도 옛 사람들

은 이렇게 하려고 했다. (1956)

 

▶무본(務本)이란 밑둥(하느님)에 힘쓰는 것을 뜻한다. 유교의 정신은

온통 무본이다. 위에서 아래까지 백성 전체가 이 밑둥(하느님)에 힘써

나가면 가야할 곳(하느님 나라)에 거의 다다른다. 이것을 말한 것이

『대학이다. (1956)

 

▶우리가 지혜를 가지고 명덕 (明德)을 하면 하느님께서 그만름 완전한

가치를 맞추어 준다. 그런 대로 이 세상에서 정(情)을 뗄 수 있어 종

(終)이 된다. 딸이 시집을 가는데 섭섭해서 가지만 그것은 또 시작이라

종시(終始)이다. 모든 것을 시종(始終)으로 보려고 하지만 종시(終始)

라야 능득(能得)을 한다. 그래서 하느님 섬김에는 겉(몸)나로 끝내고

속(얼)나로 비롯하는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세상 일을 끝내

고 비롯하는 것이다. (事天終始) 우리의 앎이 지극한 선에 멈추는 것은

또 하나의 시작이다. (1956)

 

▶믿음(信)도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과 사람 사이에 믿는다는 말과는

다르다. 믿음(信)이라는 말은 밀(推)다는 말이 믿음(信)이 되었다. 믿

어 간다는 것은 밀어 올린다는 뜻으로 추리(推理)라는 말이 있다. 믿

음(信)이라는 것은 생각을 밀어 우(하느님)로 들어간다는 말이다. 밀어

서 터치고 깨치도록 하라는 것이 믿음(信)이다. 하느님 나라는 들이치

는 이가 차지한다는 것은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진행하지

않고는 못 견딘다. 특히 생명은 진행하지 않고는 되는 것이 없다. (1956)

 

▶독경(篤敬)이란 두둑이 공경하라는 뜻이다. 얄팍한 것은 좋지 않다.

두둑이 공경하라는 것은 남을 어려워할 줄 알고 조심스럽게 하라는 뜻

이다. 지저분하게 조심성 없이 하지 말고 두툼하게 조심스럽게 남을 대

하는 행실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공경이 된다. 공경이란 순

우리말이 없는 것이 답답하다. 한문자로 독(篤)은 대죽(竹)밑에 말마

(馬)를 했는데 죽마고우(竹馬故友)에게는 그 사이가 둘도 없이 두둑한

사이라 해서 이 글자를 쓰는 것인지 모르겠다. (1956)

 

▶논어 첫머리에 역삼과(亦三果: 不亦說乎, 不亦樂乎, 不亦君子乎

가 있고 논어 맨 끝에는 수삼지(須三知: 不知命, 不知禮, 不知言)가

있어 대조가 된다. 논어 마지막 끝에 있는 공자(孔子)의 말에 하느님

의 명령(얼나)을 모르면 그이(君子)가 될 수 없다고 했다. (不知命 無

以爲君子也) 예수는 말하기를 "나는 그(하느님)의 명령이 영생인줄 아

노라"(요한 12:50)고 했다. 하느님의 명령이라 해도 좋고 하느님의 생

명이라고 해도 좋다. 그것은 하느님의 얼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하느님

이 주시는 얼나를 모르고는 하느님 아들(君子)이 못 된다. (1956)

 

▶공자(孔子) 같은 이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잘 말하지 않았다.

인(仁)은 더구나 말하지 않았다. 신언(辛言)으로 여간하여 사랑이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것은 오직 일념(一念) 속에서 이글이글

피어오르고 있을 따름이다. 차마 말하지 않다가도 말을 하게 된

다. (1956)

 

▶군자(君子)를 그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님(하느님)을 그리워

하는 이라는 뜻이다. 성경에는 독생자(獨生子)라는 말이 있다. 군자(君

子)란 임금의 아들이란 뜻인데 독생자와 같이 하느님의 아들로 볼 수

있다. 공자(孔子)의 자(子)도 아들이다. 공자가 누구의 아들이겠는가?

하느님의 아들일 것이다. 누가 나더러 묻기를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고

한다면 그이(君子)가 되고 싶다고 할 수 있다. 기왕에 생명을 타고 나

온 이상은 나라는 사람을 아는 이들이 나를 두고 "어떻게든지 바로 살

겠다고 하던 그이(君子)가"라고 하는 소리를 듣고 싶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의 그이가 있는데 두어 사람이라도 나라는

사람에게 그이는 지금 생각해도 참 좋은 사람이었어라고 하면서 나를

그이(君子)라고 하여 준다면 나는 여부가 없다. 그 원은 받겠다. 공자

나 예수님도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이(君子)가 되겠다는 사람들이

다. (1956)

 

▶몇 해 전까지도 내가 편견을 가졌는데 그 편견이란 무엇인가?성경

의 핵심은 유신(唯神)이라고 할 수 있고, 유교의 대의(大意)는 유신(唯

神)인지 유물(唯物)인지 참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 말하기도 곤란

하다. 근본적으로 따져 보면 유신이라는 말 자체와 유물이라는 말 자체

의 구분도 어디다가 두어야 할지 말하기 어려운 것이 있다.

   유교에서 유학(儒學)하는 사람도 분명한 점은 늘 하느님을 찾았다는

것이다. 증자(曾子)시대만 하여도 천(天)이라는 말로 하느님을 찾았다.

귀신(鬼神)을 찾지 않았다. 그런데 뒤에 와서 하느님을 버리고 귀신을

찾게 되었다. 하늘에 계시는 귀신을 생각했던 것이 차차로 혼돈을 가져

와서 귀신의 존재를 말하는 것은 이치(理致)를 말하는 것으로 곧 천리

(天理)를 찾는 것이라 하여 유교가 유리론(唯理論)으로 추리되는 이치

시대가 되었다.

   주역(周易)에서 말하기는 귀신의 덕(德)이 왕성하다 하여, 이것을

숭덕(崇德)하고자 정성스런 제사를 올리게 되어 그 끝이 오늘까지 내

려온 것이다. 그래서 부모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부모의 영혼이 귀신이

되어 제사를 지내는데 오느냐? 안 오느냐? 이 문제를 가지고 논한 것

이 있다.

   증자는 말하기를 따로 무슨 귀신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사람

맘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성으로 제사를 지내면 사람을 통해

서 돌아간 분이 다시 나와 본다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이 말은 귀신

을 객관적 존재로 있는 것을 말하느냐 하면 객관적으로 있다는 것은

아니다. 귀신(혼)이 있느냐 하면 주역에서는 있다는 것을 강조하여 말

하고 이것을 설명하는데 무진 애를 쓰고 있다. 그것은 공연히 애를 쓴

것이다.

   유신론(有神論)을 무신론으로 만들어서 유리론(唯理論)으로 옮긴 것

으로 풀면 된다. 원래 유교에서 따지는 귀신은 신(神)을 말하는 것이

다. 미신의 신이 아니다. 이러한 것이 나중에는 귀신이라는 것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말았다. 유교에서 해석하는 것같이 하면 유

물론이 나오기 때문에 또 유리론(唯理論) 이치뿐이라는 결과가 된다.

사람은 결코 이치만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감정의 대부분이 생명

의 내부에 존재하고 있다. 유리(唯理)만 가지고 안 된다. 이러한 것에

서 유교는 생명을 잃고 있다. 그런데 요새 가만히 성경을 보면 유신론

이라고 하나 역시 하느님께서 직접 말씀한 것이라고는 한 마디도 없

다. (1956)

 

▶주역(周易)이라는 것은 변화의 역(易)을 말하는 것이다. 역(易)이라

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부역 개물성무(夫易 開物成務)이다. 우리가 완

전히 되도록 수년 간을 두고 연구해서 점점 잘 살게 된다. 물건이 점점

열리(開物)게 하려는 이 세상이라는 것을 생각하자는 것이 개물성무

 (開物成務)이다. 이것을 말하여 모천하지도(冒天下之道)라 한다.

   역(易)의 천하에 불역(不易)이라는 말이 있다. 변치 않는다는 뜻이

다. 변치 않는다는 것은 진리(眞理)를 말한다. 여기에 대하여 교역(交

易)이라는 말이 있다. 교역(交易)은 서로 바꾼다는 뜻이 아니라 자꾸

변하는 것을 말한다. 신학(神學)이니 철학(哲學)이니 하는 것은 역

(易)이 아니라 불역 (不易)을 찾는 것이다.

   불역(不易)의 반대말이 교역(交易)이다. 여기에 무엇이 있는데 이것

을 더 알아보려고 개물성무(開物成務)에 힘쓰자는 것이다. 이 '개물성

무'의 규명이 오늘날 물리학의 기초이다. 천하의 모든 현상과 물건의

이치와 그 뜻이 변하는 것을 규명하는 것이 '개물성무'를 가지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보다도 반드시 밝혀야 할 것은 불역(不易)이다. 바뀌

지 않는 영원절대를 밝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날아가

고 변하는 천하의 일은 하지 않는다. 오직 바뀌지 않는 얼나(道)에 뜻

을 둔다. (成人以道 天下之志).

   그러나 세상에서는 개물성무(開物成務)를 업(業)이라 한다. 이정천

하지업(以定天下之業)이다. 그러나 '개물성무'가 자꾸 끊어지면 끊어

지는 대로 의심이 생긴다. 의심이 생기면 이것을 풀어보게 된다. 의심

을 풀면 또 달라진다. 이 역(易)이 주역(周易)이다. 주역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과학(科學)하자는 것이다. 요새 말로 일종의 물리학

이 아니겠는가?(1956)

 

▶이 세상에는 길흥(吉幽)이 있다. 천하의 길흉을 만 백성과 더불어

 걱정을 같이 한다. (吉幽興民同患) 길흉을 백성과 같이 걱정하면 하느

 님(神)과 관계가 된다. 하느님하고 관계가 되면 말하지 않아도 생각하

 면 알게 된다. (神以知來) 앞으로 나갔으면 하는 제 긋(얼나)으로 하느

님과 같이 의논하고 생각하면 어느 만큼 은근한 중에 인도하는 것이

있어 깨닫게 된다. 그쯤 하는 것이 신이지래(神以知來)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실상 오늘 알고내일 가서 모르는,다시 말

하면 언제나 알고 모르고, 모르고 아는 것이 아니라 지식의 영역을 넓

혀 가는 것이 참으로 아는 것이다. 그 밖에 것을 안다는 것은 우스운

얘기로 다 거짓말이다. (1956)

 

▶태극이 하나인데 태극이 음양(陰陽)인 양의(兩儀)를 낳았다고 하여

하나(절대)가 둘로 나눠졌다고 하면 이것을 무조건 인정해서는 안 된

다. 태극이라고 하면 하나(전체)인데 음양이 하나라고 하면 어떻게 되

는가?하나(一)에 음양이 나왔다고 하면 모르겠으나 하나인 태극이 음

양인 둘로 나누어졌다면 말이 달라진다. 허공의 혼돈(우주)은 언제나

하나(절대)인 태극인데 음양이 둘이다 하고 나온 데서부터 유교가 아

주 병에 걸려 버렸다. 이것을 말하자면 이것은 태극의 머리와 몸을 잘

라버린 것이 된다. 이래서야 어떻게 태극이 살 수 있는가7(1956)

 

▶유교에서는 어버이에게 신종추원(愼終追遠)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

러나 먼저 하느님에게 신종추원을 해야 한다. 하느님으로부터 가지고

온 것을 온전히 가지고 있다가 삶을 마칠 때까지 조심조심 삼가는 것

이 참으로 신종(愼終)이다. 오늘 이 세상을 마치는데 곱게 삼갔으면

그 다음은 추원(追遠)이다. 시집가는 처녀가 친정 부모에게 끝까지 잘

대접하는 것이 신종이다. 또 시집을 멀리 간다면 추원이 된다. 모르는

남의 집에 멀리 시집가는 것이 추원이다. 멀리 계시는 하느님에게로 돌

아가는 것이 참 추원이다.

   보본반시(報本返始)라는 말이 있다. 사람은 누구나 근본을 잘 해서

시작에 돌아가야 한다. 시작한 데로 도로 돌아와야 한다. 곱게 갔다가

본 곳으로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 나뭇잎이 떨어지면 나못잎이 뿌리를

덮어 준다. 나무뿌리의 거름이 되어 뿌리로 간다. 좋으나 나쁘나 보본

반시 (報本返始)의 이치가 있다.

   한 가지 우리가 생각하는 바는 자식이 자라서 장가를 보내면 이것이

또 '보본반시'가 아니겠는가? 아이들이 다 커서 장가가고 시집간 연후

에야 그 밑둥을 볼 것이다. 혼인을 해야 밑둥을 보는 것인데 요즘 세상

은 문명이 발달되어서 그런지 시집, 장가 가기 전에 그것을 다 안다.

그러나 예전에는 그러하지 않았다. 신비스러운 것은 덮어 두어야 되지

않겠는가? 아이가 자라서 시집 장가를 갈 때까지 뚜껑을 덮어두는 것

이 좋지 않겠는가? 밑둥에 보고를 하고 싶어서 장가를 간다. 철없을

때 몰랐던 것을 혼인하여 아이를 낳게 된다. 이렇게 나온 데로 돌아가

는 것이 '보본반시' 가 아니겠는가?

   신종추원 보본반시(愼終追遠 報本返始)는 참으로 유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항상 이것을 생각한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하느님께로 돌아간

다. 보천반원(報天返元)의 길로 간다. 영원무한(하느님)의 길로 간다.

그러나 유교에서 하느님께로 간다는 이것이 없다. 보본반시(報平返始)

에서 그친다. 머리가 잘려진 것이다. 대동정의 보천반원(大同正義 報

天返元)이라는 것은 대단히 필요한 것이다. 여기에 이르지 못하면 삶

이 헛되고 만다. (1956)

 

▶철학에서도 생명철학은 말이 철학이지 이것은 종교이다. 생명철학은

철학이라는 이름이 분명한 것이지만, 말씀이 신앙이고 철학이라면 말

씀이 신앙의 기원(起源)을 이루는 것이라고 할 수 있듯이 생명철학도

이 지경으로 들어가면 신앙이 된다. (1956)

 

▶정성 성(誠)자를 참이라면 정성으로 사는 것이 우리가 사는 것이다.

하느님의 계명을 그대로 받아 가지고 살아야 참 사는 것이다. 하느님의

계명을 받아 가지고 가는 것은 모든 것을 하느님에게 바쳐야 한다. 이

것을 어지간히 알면 꼭 이룩해야 한다. 또 정성은 마칠 지경에 다다른

것을 알면 마칠 줄을 알아야 한다. 하느님에게 모든 것을 바친다는 것

곧 지성으로 섬긴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마침을 알고 마치는(知

終終之) 것이다. 날마다 이렇게 하는 것이다.

   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룩할 것을 알면

서로 완전히 이루도록 하고 서로 만나서 이룩할 것 같으면 그 일을 끝

까지 완전히 마치도록 노력하면 이것이 이웃사랑을 내 몸과 같이 사랑

하는 것이 된다. 주역 건괘에 마칠 것을 알면 마치도록, 이룩할 것을

알면 거기에 이르러야 한다. (知終終之 知至至之) 그렇게 하면 어지간

히 가깝다(可興幾也)는 것이다. 이 말은 그렇게 되도록 힘쓰자는 말

이다.

   길을 알면 기회를 다해야 한다. 어지간히 기회가 가까워진 것을 알면

다시 이룩하도록 해서 마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기회가 남의 기회

인지 제 기회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더불어 하자는 것이다. 이 사람

은 이 말을 대단히 좋아한다. 마쳐야 할 것을 마치도록 하면 옳다고 하

는 일을 가질 수 있다. (至終終之, 可與存義) 이 정신이 온전히 나타난

것이 어짐(仁)이다. 옳음(義)은 어짐(仁)을 조금도 떠날 수 없다. 어짐

에서 떠나면 살 수 없다. 어짐(仁)을 자기 것으로 가지고 가야 한

다. (1956)

 

▶정정안(定靜安)이 세 가지로 나뉘어 있지만 '안전하다' '조용하다'

 ·정(定)하다'는 것이 나눠질 리 없다. 몸이 정(定)해야 고요해지고, 고

요해지면 마음이 평안하고, 맘이 평안하면 비로소 생각이 난다는 뜻이

다. 이것이 다 상관이 있지 나누어 생각할 까닭이 없다. (1956)

 

▶유교에서 성(誠)은 하느님을 뜻한다. 이 참을 하려는 것이 사람의

길이다. (誠者 天之道也 思誠者 人之道也-『중용 맹자』)사람은 참

(誠)을 그리워해야 한다. 참은 하느님의 길이고 참을 그리워하는 것 사

람의 길이다. 이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사람이 가려면 곧이 곧장 가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살아가는 데 곧이 곧장으로 살아야 한다. 무엇

을 하는데 곧장 쉽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그러한 뜻이 아니고 하느님께

로 가는 길은 곧이 곧장이다. (1956)

 

▶사람은 왜 하느님을 알려고 하는가?하느님을 알 때는 하느님의 뜻

을 받아서 그대로 사람 노릇을 한번 해보겠다는 그 뜻이다. 그 뜻을 알

려고 『대학(大學)』을 공부하는 것이다. 어른 노릇을 어떻게 하는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 대학공부이다. 인생의 나아갈 길을 배우는 것이

다. (1956)

 

▶그치는 것을 알고서 정함이 있다. (知止以後 有定)' 이 말을 바로 알

면 요긴하게 쓸 말이다. 정(定)하는 것은 자기의 지향(志向)을 정하는

것이다. 고요하면 맘이 흔들리지 않는다 맘이 흔들리지 않으면 맘이

평안해진다. 맘이 평안해지면 목적을 정한다. 목적이 정해지면 앉아서

라도 무엇을 연구할 수 있다. 이것이 능려(能慮)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반드시 무엇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1956)

 

▶대축(大畜: 三)이라는 괘(卦)는 세 줄 가운데 맨 윗줄이 이어진

괘를 간상련(艮上連)이라 하여 산(山)을 뜻한다. 산은 위로 올라갈수

록 딴딴하고 밑으로 내려올수록 무른 곳이 많다. 그래서 산은 강약약

( )으로 나타내었다. 건삼련(乾三連)은 강강강(三)으로 하늘을 나타

내었다. 산( )이 위에 있고 하늘(三)이 밑에 있어 하늘의 산 속에 있

다. (天在山中)고 한다. 이를 정신적으로 풀이하여 우리의 몸속에 성령

이 충만함을 생각했다. 예수도 "하느님 나라가 너희 속에 있다"(루가

17:21)고 했다. 이를 대축(大畜)의 괘라 하여 먹을 것이 풍부해 남는

곡식을 저축해 두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이 괘에 이정 불가식길(利貞

不家食吉)이라는 말이 붙어 있다. 이정(利貞)은 곧으면 이롭다는 뜻이

다. 불가식(不家食)은 집에서 밥을 먹지 않는다는 뜻이다. 집을 떠나

여행을 하면서 사람들의 어려움을 많이 보게 되는 것을 말한다. 타향살

이를 하면서 고생해본 사람이라야 생각을 해보려고 한다. 이것이 길

(吉)하다는 것이다. (1956)

 

▶상(嘗)도 제사를 지낸다는 뜻이다. 일본사람이 신상제(神嘗祭)라 해

서 하느님 제단에 햇곡식을 올린다. 한 해 동안 하느님의 은덕으로 된

곡식을 이 죄 많은 사람이 먹는데 탈나지 말라고 미리 하느님께 올리

고 나서 먹는 추수감사제인 것이다. 하느님께 제물(祭物)을 올리는 것

은 어디까지나 자기 몸을 대신하여 곡식을 바치는 것이다. 내 몸을 제

물로 삼아 제(祭)를 지내는 마음으로 머리를 하늘에 두고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사람은 제(祭)라는 것은 기도라고 생각한

다. 하느님을 추원(追遠)하는 것이 기도다. (1956)

 

▶마음에 없는 제사를 음사(淫祀)라고 했고 복을 바라서 지내는 제도

음사라 했다. 그래서 무엇을 바라고 하는 제(祭)를 미(媚)라고 했다.

제사를 잘하면 복이 많이 오고 집안이 평안해진다는 것은 전부가 아첨

이다. 이것은 공자(孔子)가 말한 것이다. 예수는 하느님께 무엇을 달라

고 기도하지 말라고 했다. 무당도 온전한 무당이면 모른다. 선무당들이

들끓으면 백성이 못살게 된다. (1956)

 

▶주역(周易)에 나오는 팔괘(八卦)를 기억하는데 이어진 것을 연(連)

이라 하고 끊어진 것을 절(絶)이라 한다. 팔괘 가운데 건(乾)은 선(線)

이 다 이어져 있어(三) 건삼련(乾三連)이라고 한다. 태(兌)는 맨 위가

끊어져 있어(그) 태상절(兌上絶)이라 한다. 이(離)는 가운데가 끊어졌

는데(三) 이중절(離中絶)이라 하지 않고 이허중(離虛中)이라 한다. 진

(震)은 아래만 이어져 (그) 진하련(震下連)이라 한다. 손(巽)은 아래만

끊어져(근) 손하절(巽下絶)이라 한다. 감(坎)은 가운데만 이어져(근)

감중련(坎中連)이라 한다. 간(艮)은 맨 위만 이어져() 간상련(艮上

連)이라 한다. 곤(坤)은 다 끊어졌으므로(11) 곤삼절(坤三絶)이라 한

다. (1956)

 

▶건(乾)은 하늘이다. 하늘은 어쩐지 강한 것 같아 힘 있는 줄을 셋을

그렸다. (三) 반대로 곤(坤)은 땅인데 땅은 약한 것 같아 세 줄을 다

끊었다(11) .이렇게 보면 그 이유가 그럴듯하다. 태(兌)는 바다인데 바

다는 밑은 강하고 중간도 강한데 위는 물이 찰랑거리는 것이 약하게

보여 밑에 두 줄은 긋고 맨 윗줄만 끊었다. (그) 이(離)는 불인데 불은

가장자리는 강하나 가운데는 약하다. (근) 진(震)은 우뢰(번개)를 말한

다. 번개는 한 번 번쩍 할 때 강하나 그 뒤가 없다. 그래서 맨 아래만

강하고 위에 둘은 약하다. (근) 손(巽)은 바람인데 맨 아래만 약이고

위 둘은 강이다. (근) 감(坎)은 물인데 물은 가장자리는 약한 듯하나

가운데는 무섭다. 그래서 가운데만 강하고 위 아래는 약하다. (근) 이

를 세로로 세우면 물수(水)자이다. 간(艮)은 산인데 산은 맨 위는 굳은

바위가 많아 강하나 밑이나 속은 무르다. 그래서 위만 강하고 아래 둘

은 약하다. () 그 뜻을 잠깐 우리가 보아도 참 재미있다. 복희씨라는

분이 이렇게 늘여 놓았다고 전하다. 우리 동양에서는 아주 유치시대에

이러한 글을 만들어 가지고 이리저리 맞춰 본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유치원 장난감을 가지고 맞춰 보는 격으로 맞춰도 보고 궁리를

해보는 것도 무의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1956)

 

▶맘(乾)은 울(震) 물(坤) ·임(艮)이다. 정신은 참(하느님 얼나)에

이르기까지는 울어야 한다. 회개하고 또 회개하고서 지선(至善 ·얼나)

의 자리에 도달하기까지는 계속 후회하고 울어야 한다. 또 정신은 언제

나 물어야 한다. 계속 진리를 밝혀 내기까지 물어야 한다. 또 정신은

책임을 지고 이마에 이어야 한다. 거짓 세상을 울고 참의 세계를 물으

면서 세상의 님으로 일 임이다. 얼굴 윗부분을 '이마'라고 하는데 내

이마 하면 머리의 이마라는 말도 있지만 내가 이마는 내가 책임지마,

내가 짐을 지마 하는 것 같다. 세상의 죄를 지고 가는 큰아들의 모습

같기도 하다.

   몸(坤)은 발(巽) 불(離) ·눈(兌)이다. 몸은 땅이다. 땅을 딛고서는

것이 발이다. 그러나 그저 나가는 것이 아니다. 눈으로 시원하게 살필

것을 살피면서 나가야 한다. 몸은 밟을 것 밟고, 밝힐 것 밝히며 부리

나케 나가야 한다. 그러면서 언제나 영원(하느님)을 눈으로 똑똑히 보

면서 나가는 문화이다.

   몸은 눈을 가져야 한다. 맘은 이마를 가져야 한다. 사물을 꿰뚫어 보

는 눈과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는 이마를 가져야 한다.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만이 떳떳한 사람이다. 책임지는 정신이 자유요 꿰뚫어

보는 눈이 평등이다. 하늘은 자유의 상징이고 땅은 평등의 상징이다.

 

자유는 울 ·물 임이요 평등은 발 ·불 ·눈이다 정신은 아버지(天)의

내용이요, 육체는 어머니(地)의 내용이다. 끝까지 책임지는 것이 아버

지요, 끝까지 보살피는 것이 어머니다. 아버지 계신 동안은 자유가 있

고 어머니가 계신 동안은 평등이 있다. 아버지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자유롭고 어머니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 아버지의 지혜는 이

마를 가지고 있고 어머니의 사랑은 눈을 가지고 있다. 이마는 책임진다

는 말이요 눈(目 雪)은 같이 덮어 준다는 말이다. 책임지는 이마와

덮어지는 눈이 있는데 너희들은 무슨 걱정이냐? 하늘을 쳐다보라. 책

임지는 이마가 있고, 땅을 굽어보라. 덮는 눈이 있지 않는가? 하늘을

뚫고 치솟는 산의 이마를 보라. 땅이 싣고 있는 시원한 바다의 눈동자

를 보라! 이마의 산과 바다의 눈을 가진 하늘 땅은 오늘도 영원하고

무한하다. (1957)

 

▶역경(易經)에서는 三을 건(乾)이라고 하는데 하늘 천(天)자의 뜻이

다. 이를 건이라고 하는 까닭은 건강하다는 건(健)자와 같기 때문이다.

8괘와 같은 글자가 쓰여진 것은 한문 글자가 나오기 전, 문자 이전의

세계에 속한다고 하겠다. 이것은 글자의 뜻을 이해하는 것보다는 직관

적으로 힘찬 것을 느끼게 하는 하나의 상징적이고 예술적인 표현이다.

  8괘는 태극이 쪼개져 음양이 생기고 음양이 쪼개져 사상(事象)이 생

기고 사상이 쪼개져 8괘(卦)가 생기는 것으로 생각해 냈다. 8괘를

겹쳐서 여섯 금씩 그려 64괘를 생각해 내었다. 여섯 금의 6이 이들의

깊은 관심사였다. 일 년 중 여섯 달은 해가 길어지고 여섯 달은 해가

짧아진다. 여섯 달은 더워지고 여섯 달은 추워지는 동안 언제나 건강하

게 머무는 것이 건(乾)이다. 하늘을 생각할 때 여섯 금을 생각해야 한

다. 일생도 60으로 잡아 전 30은 건설, 후 30은 귀환을 생각했다. 30에

입지 (立志)하고 60에 이순(耳順)한 것이다.

 

▶생각은 생각 념(念)을 쓰는데 그것은 20이라는 글자이다. 무슨 사물

이든 20년은 생각해야 한다. 사람도 20이 되어야 성인(成人)이 되고

성인이 되어서도 한 20년은 자라야 불혹(不惑)이 된다. 40세에 세상

일을 하게 되고 50이 되어야 천명(天命)을 안다. 쉰에는 좀 쉬면서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60이 되어야 더 깊이 생각하여 진리(하느

님)에 순(順)하는 이순(耳順)이 된다. 60이 되어야 삶에 있어서 무엇

이 길(吉)한지 흉(幽)한지를 알게 된다. (1957)

 

▶사람이 하느님의 생명인 얼을 받은 것이 바탈이다. (天命之謂性) 하

느님의 생명은 얼을 좇음이 삶의 길이다. (率性之謂道) 사람은 하느님

께서 주신 하느님의 생명인 바탈(얼나, 性)을 살려 낼 때 참나를 느끼

게 된다. 자기의 개성이 자랄수록 사람은 오늘보다 내일에 더 깊은 바

탈(얼나)을 느끼게 된다. 자기를 더 깊이 느끼게 될수록 더 깊이 자기

바탈을 찾아 내어 타고 가게 된다. 땅을 파들어가듯이 자기의 바탈을

파고들어 가는데 인생은 한없이 발전해 가는 것이다. 이 바탈(얼나)을

타고 우리는 하느님에게까지 이른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듯이 우

리는 바탈을 타고 하느님에게 이른다. 이것이 인생의 가장 즐거운 일이

다. 나는 바탈(얼나) 타기를 가장 감사하게 생각한다.

   바탈(性 ·얼나)을 타면 마음이 놓이게 되고 마음이 놓이면 바탈(얼

나)을 더 잘 타게 된다. 바탈을 타 마음 놓이는 것처럼 좋은 게 없다.

마음에 괴름이 없고 평안하면 심심하지 않겠는가 하고 걱정하는 사람

이 있지만 그것은 몰라서 하는 말이다. 마음이 놓이면 그때는 바탈(性)

을 타고 나가게 된다. 마치 바람이 자면 배를 타고 나가는 것과 같다.

마음이 놓이면(해탈) 자기의 바탈(얼나)이 뚜렷이 살아난다. (1957)

 

▶군자(君子)를 나는 '그이'라고 한다. 군자는 임금의 아들이란 뜻인

데 하느님의 아들을 가리킨다. 그이라는 그는 저 그리운 하느님을 뜻한

다. 하느님의 생명을 이어받아 하느님을 아버지로 그리는 아들이 그이

(君子)다. (1957)

 

▶사람은 제 집을 떠나서 나그네가 되어 애쓰고 고생하며 생각하는 데

서 철이 나고 속알이 영근다. 성인(聖人)으로 추앙되는 공자(孔子)도

살아서는 섬길 임금을 찾아 이 나라 저 나라로 돌아다니느라고 앉은

자리가 더워질 겨를이 없었다(孔席不暖)고 한다. 공자는 집에서 밥 먹

을 때가 없었다. 밤낮 집을 떠나 고생하면서 얻은 인간지(人間智)가

유교의 가르침이다. 유교가 오늘에도 우리에게 소용이 있다면 고난의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교가 고난을 떠나 안일(安逸)을 찾으면

유교는 죽고 만다. 사람은 안일에 죽고 부귀에 썩는다. (1956)

 

▶앞에 간 사람의 말이요, 앞서 간 사람의 길이라는 뜻으로 전언왕행

(前言往行)이란 말이 있다. 앞서간 사람들의 언행(言行)은 어마어마한

저 하늘을 생각하여 무궁무한한 우주의 창조자 하느님을 공경했다. 역

사와 과학조차도 전언왕행이다. 모든 경전이 전언왕행임은 말할 것 없

다. 그래서 많이 아는 다식(多識)이 천재산중(天在山中)의 한 예이다.

지식이 많은 사람은 대축(大畜)이다. 모든 경전도 대축(大畜)이다. 거

기서 사는 것이 지어지선(止於至善)인 지건(止健)이다. 하느님 나라에

머무름이 다. (1957)

 

▶땅이 위에 있고 산이 아래에 있는 지산겸(地山謙)괘인데 자기가 가

진 것이 산처럼 많아도 그것을 땅속에 감추어둔 것이 겸(謙)이다. 산을

땅속에 숨겨두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이다. 큰 분(하느님)의 눈으로 보

면 지구에서 가장 높다는 히말라야 산맥도 귤껍질의 울툭불툭한 정도

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산을 가지고 높다고 야단하는 것은 자기가

작다는 증거이다. 산은 지구 끄트머리인 지단(地端)이다. 산은 발톱 끝

같은 것이다. 그것을 높다고 놀랄 것이 없다. 땅속에 푹 파묻어 두는

것이 겸손이다.

 

   인류가 대단한 것 같아도 우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래서 인

류는 겸손해야 한다. 피타고라스는 하늘을 쳐다보고는 곧 지구는 둥글

다고 했다는 것이다. 땅은 하늘 속에 있으니 겸손해야 한다는 뜻이다.

산은 땅속에 있고 땅은 하늘 속에 있어 다 미미한 존재이다. 그래서 겸

손해야 한다. 하느님은 나보다 한없이 크다. (요한 14:28-개역성

경)(1957)

 

▶공자의 말씀에 백성을 다 알게 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그리하여

공자(孔子)는 전제주의적인 사상이라 했다. 깨지 못한 백성이 많은 곳

에서는 공자의 입장을 꼭 전제(專制)라고만 볼 수 없지 않을까?그 옛

날에 언제 그 많은 백성을 모두 가르친단 말인가?오늘에는 국민이 주

권자인 만큼 국민이 알건 알아야 한다. 전 국민이 모든 것을 알게 된다

면 정부는 필요 없게 된다. 다 아는 국민이라면 자치적으로 처리할 것

이다. 몰라도 좋은 것은 가르치지 않아도 좋을 것이다. 정말 알아야 할

것은 꼭 가르쳐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이 세상의 일이다. (1957)

 

▶우리 사람의 사상이나 신념이라는 것은 마침내 '참' 하나를 좇아가

는 것이다. 성(誠)이 참이다. 동양에서는 진리를 참이라고 한다. 성

(誠)은 성경에서 아멘과 같은 뜻이다. '아멘'이란 '아무렴, 그렇지'라

는 뜻이다. (1957)

 

▶사람들이 무극(無極) 태극(太極)을 다 집어 내버리고 음양으로만 얘

기를 한다. 음양오행(陰陽五行)이 도대체 어떻게 됐다는 말인가. 우리

동양 민족은 음양을 찾다가 망할지 모른다. 음양을 찾는 것도 음양의

근원인 무극 태극을 찾아 가지라는 것이다.

   무극이요 태극인 태초(太初)의 지고선(至高善 하느님)에 당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다. 이를 궁고고(窮古高)라 한다. 궁(窮)은 궁신(窮神)한

다는 말이다. 맘과 뜻과 힘을 다해 하느님을 찾는 것이다. 이 우주현상

을 보면서 하느님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다. 궁신지화(窮神知化)로

하느님의 사랑을 더듬어 보면 일체가 변화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일체

가 변화하는 것이 하느님이 지니신 능력의 조화(造化)이며 사랑이

다. (1957)

 

▶유정유일(唯精唯一) 윤집궐중(允執厥中)은 중국사상의 핵심이다.

요(堯)가 순(舜)에게 전하고, 순이 우(禹)에게 전하고 우가 탕(湯)에

탕이 문왕에게 문왕이 주공(周公)에게, 주공이 공자(孔子)에게, 공자가

맹자(孟子)에게, 맹자가 주자(周子. 주렴계)에게, 주자가 왕자(왕양명)

에게 전해 준 것이 중(中)이라는 것이다. 정신을 통일해 가지고 사물의

핵심을 잡는 것이 '유정유일 윤집궐중 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으

로부터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인 성령을 받아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

의 말씀으로 내 속에 불살라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식색(食色)을

초월해야 한다. (1957)

 

▶요순(堯舜)이 자연(自然)처럼 순리로 다스리는 것을 성지(性之)하

는 도치(道治)라 한다. 탕무(湯武)가 자연적이 못되고 사회적 인의(仁

義)로 정성을 다해 몸소 실천해 다스리는 것을 신지(身之)의 덕치(德

治)라 한다. 관 환(管桓)이 억지 수단을 써서 다스리는 것을 가지(假

之)하는 법치(法治)라 한다. 요·순·탕·무·관 환은 모두 어진 신

하를 가지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이 바짝 정신을 차려 무슨 일

이든지 빈틈없이 정치를 해 나갔다. 그런데 요새는 왜 그렇게 거짓말이

많고 꾸민 말이 많고 선전이 많은가?(1957)

 

▶사람들이 하느님에 대한 효(孝)는 잊어버린 지 오래이고 아버지를

하느님처럼 아는 것이 효(孝)라 한다. 천자(天子)는 하느님 아들이지

땅에 있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다. 땅의 부모보다 하느님 아버지가 먼

저라야 한다. 천명(天命)에 매달린 유교가 망천(忘天: 하느님을 잊어

버림)을 하여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래서 유교가 맥을 쓰지 못하고

있다.

   효도를 곧잘 하다가도 장가가서 자식 낳으면 그 효도가 쇠한다(孝衰

於妻子)고 유교에서 말했다. 나는 천도(天道)가 처자(妻子) 때문에 쇠

한다고 말한다. 효(孝)뿐 아니라 천도(天道)가 처자(妻子) 때문에 쇠

한다.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근본 영혼(얼나)을 추원(追遠)하고 사모

해야 하는데 전향(轉向)하여 제 여편네와 자식들을 거둬 먹이겠다는

욕심을 좇느라 그렇게 된 것이다. (1957)

 

▶유교에서는 효를 부모에게 하는 것을 말하는데 마침내는 하느님에게

바치는 마음이 참으로 효(孝)가 된다. 하느님 아버지께 효할 줄을 알아

야 땅의 어버이에게도 효를 할 수 있다. 효도의 실상은 하느님 아버지

에게 하라는 것이다. 하느님을 바로 아는 사람은 땅의 어버이에게도 최

선의 효를 할 수 있다. 하느님에 대한 정성이 어버이에 대한 정성이 되

고 만다. 이 근본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오늘날 설움 받는 어버이들이

많다. (1957)

 

▶서경(書經)에 여오(旅獒)라는 글이 있다. 임금 노릇을 잘하도록 임

금을 잘 가르친 말이다. 그렇다고 이 글이 꼭 임금에게만 한 것은 아니

다. 지금은 교육공통론으로 사람의 이상은 모두가 임금을 표준해서 교

육하려고 애를 쓰지 않으면 안 된다. 특별히 누가 임금될 자격이 있어

서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전 인류가 이러한 교육을 공유할 자

격이 있다. 지금의 대통령 자리가 옛날 임금의 자리라면 그 자리를 밟

아 올라가는 모두가 이 글을 알아야 하고 배워야 한다. 더구나 성경을

보는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 자리에 이르러야 한다. 아직 그만한 속알은

부족할지 모르나 우리는 기어이 그 자리에 이르러야 한다. 대통령이나

임금의 씨를 따로 묘목을 심은 것이 아니듯이 하느님의 아들 자리도

마찬가지다. 누구라도 제나(自我)를 뛰어넘는 이라야 그 자리에 이를

것이다. (1957)

 

▶백도유정(百度惟貞)이라는 말에 백도(百度)는 백 번이라는 뜻도 되

지만 척도(尺度), 법도(法度)와 같은 뜻이다. 온갖 법도는 곧아야 한

다. 여자가 정조를 지키듯 법도 지키기를 곧이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이것을 떠나서는 되는 일이라고는 없다. 그러려면 불역이목(不役耳目)

한눈을 팔지 말아야 하고 귀를 딴 곳에 쏠리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덕

성 (德盛)이다. (1957)

 

▶완인상덕 (玩人喪德)은 사람을 잘 생겼다고 노리개로 삼으면 덕 (德)

을 잃는다는 뜻이다. 미인뿐만 아니라 소인, 친구, 어린이들도 장난감

처럼 놀리면 무엄(無嚴)이 나오게 된다. 그래서 사람의 인격을 무시하

게 되면 덕을 잃는다.

   완물상지(玩物喪志)는 어떤 물건이 신기하다고 물건을 구경하고 싶

어하고 가지고 싶어하여 물건을 장난거리로 좋아하면 여간 먹었던 마

음도 잊어버린다. 자기가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하는데 완물(玩物)

을 하는 바람에 일이 안 되게 된다. 이 말은 우리가 명심하여 인생을

살아나가야 한다. 뜻은 도(道)로서 평안해야 한다. (志以道率寧) 말은 도

로서 만나야 한다(言以道接) 쓸데없는 짓을 하면 반드시 해로움이 따

른다.

   이물(異物)을 귀하게 여기면 아주 요긴한 물건을 못 산다. 또 백성이

필요한 물건을 천(賤)히 알다가는 백성이 족(足)할 수 없다. 경제학은

이런 것을 아주 밝혀 주어야 한다. 개나 말일지라도 그 나라 토산(土

産)이 아니면 기르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동차도 국산품이 아니

면 타지 말아야 한다. (1957)

 

▶하나 둘이라는 것은 태극과 태극 속에 음양이 들어 있어 태극이 음

양으로 쪼개진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말이 안 된다. 하느님(허공)이

둘로 쪼개졌다는 것은 망발이다. 하나와 둘은 우주의 근본을 말한다.

여기서 사람의 생각이 거기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나와 둘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공자(孔子)도 이 분수를 가지고만 나왔지 알지는

못했다. 그냥 하느님이라 맡겨 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와 둘은 하

느님의 일이지 우리가 알 일은 아니다. 하나가 무엇인지 모르나 '참'이

다. 하나이기에 참이다. 우리가 참인 하나를 알지 못하면서 하나를 꼭

하자는 것은 참된 길을 가자는 것이다. 하나는 참이요, 길이요, 진리이

다. (1957)

 

▶맹자(孟子)의 사나이 (大丈夫)라는 소리는 참으로 시원한 말씀이다.

사나이는 어디서 사는가?누리 넓은데 산다(居天下之廣居). 판잣집에

살아도 천하 넓은데 산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면 천하 넓은

데가 어디인가? "큰 덩어리(大塊: 지구)를 타고 우주를 소요하니 하늘

가가 호호탕탕(浩浩湯湯)이라' 이것은 내가 한 50년 전에 느꼈다. 그

러면 하늘을 나는 비행기가 파리처럼 보여 우습다. 이 우주에 내가 자

리잡고 않았다고 생각하면 이 지구가 우스운 것이다. 하느님 아들 노릇

하려면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 "왜 무엇을 그리 떠드느냐?" 이 우주가

어찌 됐더냐?"하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여기는 합승이니

까 내가 설 자리는 꼭 제자리에 바로 서야 한다. 군자대로행(君子大路

行)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과 저촉되지 않는다. 지름길로 가는

것은 협잡꾼이다. '살기는 너른 데서, 가기는 환히 넓은 길로, 뜻대로

되면 씨알과 함께 가고 뜻대로 안 되면 나 혼자서 가련다' 맹자의 이

말씀은 훌륭한 바이블이다. 성경말씀 안 될 게 없다. (1960)

 

▶중국의 공맹(孔孟)은 사람들의 살림(政治)을 바로잡아 보자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 시대에는 이에 열을 띤 활동이 있었다. 그 뒤 1천 년

동안은 열이 식었는데 송대(宋代)에 와서 사상으로 바로 잡아 보자는

생각이 있었다. 그게 성리학(性理學)이다. 주렴계가 태극에 관한 그림

을 그리고 태극에 대한 글을 쓴 것이 태극도설(太極圖說)이다. 장횡

거 ·정명도 ·정이천 같은 이들이 주렴계에게서 배웠다. 오늘날 유교철

학을 볼 때는 어쩔 수 없이 이걸 보아야 한다. 후기 유교의 시작은 이

것이다. (1960)

 

▶유교에서 생명(生命)이라면 이 혈육(血肉)의 생명을 가리키는 것 같

다. 성명(性命)이 정신생명을 가리킨다. 예수는 영원한 생명(얼나)을

생명이라고 했다. 유교철학인 유학(儒學)은 성리학(性理學)이라 하는

데 사람의 성품을 연구하는 학문이며 종교이다. 유교는 훌륭한 생명철

학이다. (1960)

 

▶유교에서는 심령심 (心靈心)을 도심 (道心)이라 하고 그 밑에 걱정하

는 마음을 인심(人心)이라고 한다. 유심(唯心)이라면 도심(道心)이란

말이다. 곧 진리심(眞理心)이다. 맘의 스승 노릇을 해야지 맘에 끌려가

면 못쓴다. 맘을 스승으로 해서는 안 된다. 맘의 고배를 잘 잡아야 한

다 (1960)

 

▶마음이 바로 되려면 성(誠)의 뜻이 나온다. 성(誠)을 하려면 격물치

지(格物致知)를 해야 한다. 곧 우주만상(宇宙萬象)의 모든 일을 잘 알

아야 한다. 자연(自然)에 대해서 사람의 처지를 바로 해야 한다. 내가

이 천리(天理)에 합하고 대자연에 순응해야 하느님 아들의 뜻이 나온

다. 이것이 성(誠)이다.

   장횡거(張橫渠)의 서명(西銘)을 안 본 이는 꼭 봐야 할 것이다. 이

는 복음말씀과 꼭 같다. 모든 것은 친구요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

이라 사람은 서로 형제다. 하느님 아버지를 천효(天孝)로 섬겨야 한다.

모든 사람의 아버지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의 일을 함이 효도다. 하느님

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인 얼나를 깨닫고 좇는 것이 하느님의 일이다.

모든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으로 되는 것이니 걱정말고 하라고 했

다. (1960)

 

▶바탈(性)이 문제이다. 곧 성명(性命, 얼나)이 문제다. 바탈이란 하느

님으로부터 받아서 할 것이라 하여 바탈(性)이라고 한다. 성(性)이란

글자는 요새 사람들이 쓰듯 남성 여성에만 붙일 글자가 아니다. 우리가

배우는 것은 여러 사물(事物)의 이치를 뚫어지게 잘 알아서 그걸 잘

쓰자는 거다. 과학이란 더욱이 그런 것이다. 우리가 잘 알아야 할 것은

바탈(性)이다. 수양하는 이는 제 바탈을 좀더 잘 보자는 것이다. 강아

지는 잃어버리면 찾으면서 왜 제 바탈을 잃고서 찾지 않는가라고 맹자

가 말했다.

   맹자(孟子)는 존심양성 (存心養性)이라 했다. 바탈(性)은 놓쳐서는

안 되니까 잘 간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맘에 지저분한 것을 집

아넣고서 이 바탈을 내버렸다. 그래서 실성(失性)했다는 것이다. (1960)

 

▶맹자(孟子)는 바탈목숨(性命)을 드물게 말했다. 그런데 노자·예

수 · 석가는 언제나 영원한 생명 (얼나)을 말했다. 공자(孔子)는 사람들

이 바탈(性)을 생각해야 하는데 굶으면서까지 하느님만 생각할 수 없

으니까 우선 이 어린이(赤子)와 같은 백성들에게 먼저 밥을 먹여야 겠

다고 생각했기에 정치에 관심이 컸다. 유교가 세상 일만 가르치는 도덕

종교라고 하면 못쓴다. 유교는 성명(性命, 얼나)을 말했다.

   성명(性命)은 하느님의 생명이라 하느님의 아들인 원자(元子)다. 우

리의 바탈은 소금 같은 바탈이다. 못된 것들이 활동을 해도 이 바탈이

꿈적 못하게 한다. 철학이나 종교라 하는 것은 성명(性命)의 문제다.

바탈(얼나)을 자세히 보자는 게 그 일이다.

   화학자(化學者)가 물질의 바탈을 잘 알아서 그 바탈을 그대로 잘 끌

고 나가자는 게 그 일이듯이 주어진 바탈(얼나)을 그대로 잘 끌고 나

간 이 가 노자·예수 ·석가다. 나는 장자 ·맹자도 다 하느님의 성령을

통했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의 성령이 통하지 않고는 그렇게 사람의 바

탈(얼나)을 잘 알 수가 없다.

   내가 맹자(孟子)를 다 알았다고는 할 수 없다. 어림없는 말이다. 맹

자도 성령을 통한 이요, 뚫어 본 이요, 다 본 이다. 어느 날 『맹자』를

쑥 들치니까 이게 나오길래 한 번 보았더니 이렇게도 맹자가 깊었나

하고 섬짓했다. 이걸 지금 다 깨달은 것 같아도 내일 또 여기서 더 좋

은 게 나올지 모른다. (1960)

 

[주]『맹자』 진심하편 口之於味의 문단.

 

▶공자(孔子)는 예수와는 반대로 바람이 시작하는 데를 알지 못하면

덕(德)에 들 수 없다고 했다. 이 말은 쉽게 하자면 먼 것의 원인은 가

까운 데 있다. 곧 모든 게 자기 속에서 나온다고 하는 말이다. 공자는

책임을 중시하니까 이렇게 말했다. 바람이 내게서 나옴을 알라는 말이

다. (1960)

 

▶우리가 숨쉬는데 시키는 이가 있다. 이것을 앎이 명(命)이다. 이걸

누가 시켰든 하느님, 니르바나님, 자연(自然)님, 허공님인지 모르지만

누가 했던 상관없이 어쨌거나 시켰다고 생각된다. 시킬명(命)이 목숨

명 (命)이다. (1960)

 

▶유교에서는 바탈(性) 따름이 인심(人心)인데 이를 바탈(性)이라 아

니하고,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도심(道心)인데 이를 바탈이라 했다.

짐승에게 준 바탈을 따르지 않음이 바탈(性)이라고 했다.

   하늘 길(天道)이란 맘을 씻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이에게 필요하지

짐승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겐 소용없다. 천도(天道)란 시킴 (命)이다.그

러나 그이(君子)는 시킴(命)이라고 하지 않는다. 타율(他律)이 아니라

자율(自律)이란 말이다. 얼나(性命)를 깨달아 삶의 본궤도에 오른 사

람은 제 바탈(性)이지 누구의 시킴(命)이라 하지 않는다. 하느님 아들

(얼나, 성명)은 얼나로 자유한다. 시켜서 되는 게 아니라 제 속에서 우

러나와야 한다. 시켜서 되는 것 같았으면 벌써 다 되었을 것이다. 5천

년을 해도 안 된 것은 제 속에서 우러나온 게 아니고 시켰기 때문이다.

   우리의 바탈(얼나)은 위로 올라갈 바탈이다. 언(仁), 옳(義), 차림

(禮), 슬기(智)의 궤도에 오를 바탈이다. 맹자는 이를 깨달은 사람이

다. 세력(勢力)을 좇아서는 못쓴다. '예'할 때 '예'하고 '아니오' 할 때

는 '아니오'라고 해야 한다. 낯을 봐서는 못쓴다. 세력을 따라서는 안

된다. (1960)

 

▶불교에서는 반야심경을 생각하듯 유교에서는 장횡거의 서명(西銘)

을 알아야 한다. 이 서명을 알아야 유교를 잘 아는 것이다. 서명(西銘)

은 유교의 진수다. 공맹(孔孟)의 마음을 가장 완전히 나타낸 것이다.

내가 50살 이전에 장횡거를 만났는데 어떻게 내 성미와 똑같다. 그는

토지개혁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맹자도 토지개혁을 해야 한다

고 말했는데 1천 년이 지난 뒤 장횡거가 같은 말을 했다. 나도 같은 생

각이다. 토지개혁을 하여 백성들의 먹을 걸 잘 해결하자는 것이

다. (1960)

 

▶사람의 뜻을 잇는 게 효(孝)가 아니다. 얼나의 아버지 곧 영원하신

하느님의 뜻을 잇는 게 우리의 일이다. 그게 독생자이다. 하느님을 찾

는 이는 단군 이전의 뜻을 잇는 거다. 장횡거도 훌륭한 독생자다. 유교

는 부끄럼 없고 게으르지 않아야 한다. 내가 왜 여기 있나 하고 물으면

아버지의 집이니까 내가 여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 있든지 어디

가든지 부끄럽지 않다. 우리는 마음속에 하느님의 아들을 맡아 있다.

이 하느님의 씨를 꼭 지켜서(存心養性) 키우자는 게 우리의 일이다.

그러면 게을러지지 않는다. 독생자(얼나)를 키우는 재미에 피로를 모른

다. (1960)

 

▶독생자인 얼나(靈我)를 기르려는 이는 맛있는 술을 미워한다. 순임

금은 술맛을 보고 천 년 후에 이것 때문에 나라가 망하겠다고 하면서

술을 미워했다. 보사부의 고문은 순 임금이다. (1960)

 

▶태극(太極)에서 무극(無極)까지 가면 유교도 불교나 노자와 다를 게

없다. 없이 계시는 하느님에 이른 것이다. (1960)

 

▶효경(孝經)에 나오는 말인데 공자 보고 "효(孝)란 아버지께 순종하

는 것입니까?"라고 묻자 공자가 반문하기를 "순종이라니? 순종이라니?

임금과 싸우는 신하 다섯 사람만 있어도 나라가 잘된다" 했다. 저 우

(하느님)에만 절대 순종해야 한다. 십자가를 져라 해도 져야지 별 수

없다. 하늘 땅의 인(仁)이나 나의 인(仁)이나 나란히 가는 인(仁)이

다. (1960)

 

▶중국은 가족주의인데 가족주의로 중국이 망했다. 공자(孔子)나 주자

(朱子)도 다 이 잘못이 있다. 그런데 장횡거의 서명(西銘)은 대동(大

同)주의다. 처음에는 이 대동주의를 위험시했다. 요새 감투쓰려고 애쓰

는 것도 유교사상의 영향이다. (1960)

 

▶동양에서는 한자가 생기기 전에는 강(─) 약(- -)을 가지고 글을

시작했다.─,- -은 모두 세 점이다. 세 점이 있어야 생각하게끔 된

것이 인간이란 존재다. 셋(參)은 참례한다는 뜻이다. 한일(一)자도 시

중종(始中終)의 삼자(三者)다. 셋부터 셈친다. (19do)

 

▶자기 스스로 걸어보지 못했다면 남의 풀이를 가지고는 도무지 미치

지 못한다. 이것이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 솔성지위도(率性之謂道)

수도지위교(修道之謂敎)이다. 곧 제 스스로 할 수 있다면 인생의 길을

걸어갈 게 작정된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인생의 길을 못 가 본 거다.

이 길을 남에게 이야기해 준다는 것은 자기가 지닌(얼은) 보물을 내어

보이는 것이다.

   하느님의 얼생명이 내게 와서 바탈(性)이고 그 바탈(얼나)의 뜻을 좇

는 것이 영원한 생명의 길이다. 그 길이 뚫린 것을 막히지 않게 환한

그대로 두는 게 닦(修)는 것이다. 새삼스레 새 것을 닦을 것 없다. 길

은 환한 것이다. 그 길 환한 그대로 가는 게 수도(修道)이다. '환한 길

대로 같이 갑시다'라고 하는 게 교(敎)이다. (1961)

 

▶진리 그 자체로 말하면 하느님(天)이다. 품수(稟受)한 걸로 말하면

성품(性品)이다. 모든 사람 속에 실존(實存) 하는 걸로 하면 존심(存

心)이라고 한다.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다. 또 이 다음에 더 받을 수도 있다. 한 번만 주는 게 아니라 줄곧

주신다. 지금 품수해도 좋다. 이것이 심성(心性)이라는 성(性)이다. 성

품은 지금도 하느님하고 통해 있다.

   유교의 성(性)은 예수가 말한 하느님이 보내신 이(얼나)다. "하느님

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요한

6:29)라고 했다. 이 성(性: 얼나)을 찾아야 원혁명(元革命)을 할 수 있

다. (1961)

 

▶장횡거(張橫거)는 태허(太虛)로부터 하느님의 이름이 있다(由太虛

有 天之名)고 했다. 사람이 허공(虛空)을 아는 까닭에 허공으로 말미

암아 하느님이라는 이름이 있다. 허 (虛)를 알고 기 (氣)를 알고 하는 게

내 것이다. 그 내 것인 허기(虛氣)가 합해서 성(性)이라는 이름이 있

다. 받을 수 있는 성(性)은 지각(知覺)과 더부는데 이를 합하여 심(心)

이란 이름이 생겼다. 성(性)은 만유근원야(萬有根源也)이다. 심신(心

神)의 본체요 만유의 근원인 성(性)을 잊어버렀다. 성(性)을 찾아야 한

다. 성명 (性命)이란 예수가 말한 영원한 생명 (얼나)과 똑같은 뜻이다.

맘은 궁리(窮理)하자는 것이다. 궁리한 이치(理致)를 찾는 것이다. 용

심 (用心)하면 궁리가 되고 궁리를 자꾸하면 품부(稟付)함을 더 받아서

그 바탈을 다하면 천명에 이를 수 있다. (窮理盡性 以至於命)

   맘을 다하면 바탈을 알고 하느님을 안다. 맘을 꼭꼭 잡아서 그 바탈

을 기름이 하느님 섬김이다. (盡心知性 而知天, 存心養性 以事天-

『맹자』 진심편)이건 하느님의 곡간을 송두리째 이어받는 것이다. 맘을

다해서 성(性)을 알면 성품을 더욱더욱 알아 태허(太虛) 기화(氣化)의

곡간을 알아 하느님을 안다. 이렇게 되면 하느님의 곡간이 내 것이 된

다. 하느님의 곡간에서 영생한다. 아주 온전히 앎이 하느님 아들인 거

다. 하느님의 곡간까지 완전히 알아야 한다. 이 학교(세상)에 있는 동

안에는 다 알지 못한다. (19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