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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다석어록- 평화를 이루자면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다석

다석어록- 평화를 이루자면

柏道 2020. 1. 2. 12:13

 

다석어록- 평화를 이루자면

 

▶ 인생의 평안을 생평(生平)이라 한다. 사람들은 생평을 보자고 평생

을 떠든다. 이 사람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 죄다가 이 말을 한다. 인

생의 생평, 인류의 평화는 전 인류가 두고두고 말하며 내려왔다. 꼭 무

슨 권력이나 재물을 얻어서 생평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깨닫지 못

한 것을 누가 와서 아까까지 못 깨달은 것을 크게 깨달아서 생평(生

平)하게 하여 주지 않나 하고 수십 세기 동안 기다려 온 것이다.

   몇 천 년 동안 무슨 능력을 얻겠다는 것이고 전보다 더 깨닫겠다는

그 소리가 오늘날까지 내려온다. 이것을 연결한 것이 인류의 역사이다.

생평(生平)의 옳은 이치와 그른 이치를 연결해 보여주는 것이 역사라

고 할 수 있다. 얻을 것 얻자고 해서 얻을 지경에 갔다면 문안(文安)이

라고 한다. 안식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1957)

 

▶ 견물생심(見物生心)을 하지 말아야 한다. 좋은 것이나 맘에 드는 것

이 있으면 그냥 그런 것이 있나보다 하고 지나갈 것이지 거기에 맘을

살리거나 달라붙으면 안 된다. 정신을 가진 사람은 항상 마음을 비워

둔다. 사람은 감정이 있어 혹간 생심(生心)하다가도 그러려니 하고 자

꾸 되(升)넘겨야 한다. 참 보기 좋다고 해서 한 번 보고 그만두어야지

두 번 세 번 건너보고 맘에 남겨 두면 못쓴다. 맘이 살면 잠을 이루지

못하고 혼인할 생각만 한다. 혼(婚)자에는 어리석다는 뜻이 들어 있다.

사람은 감정을 남겨 두어서는 안 된다. 속의 감정은 웬만큼 제한을 하

여서 중절(中節 중용으로 절제함)해야 한다. (1957)

 

▶ 우리는 분명히 노여움(anger, 瞋)을 타고났기에 삼독(三毒)이 내 속

에 들어 있다. 이 삼독을 이겨나가는 일은 올라감이지만 삼독에 지면

떨어지는 것이다. 분명히 노여움을 타고난 것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그 짓을 해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짐승 노릇을 해서 짐승의 성질을 타

고 난 것이다. 삼독은 짐승의 성질(獸性)이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가

그 짓을 하지 않았다면 나라는 것은 이 세상에 나오지도 않고 이런 일

을 당할 리도 없다. 죽은 뒤와 같이 영원한 생명인 얼나로 허공에 있을

우리가 아닌가?세상에 나왔다는 것은 거짓나인 제나(自我)로 떨어져

나온 것이다. 없음(無)에서 노여움을 타고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삼독

(三毒)이 잔뜩 뱃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나와서는 어머니를 못살게

탐욕을 부린다. 커서는 어리석기 짝없는 치(痴)를 저지른다. 그 짓을

해 어리석은 껍데기 자식 하나 낳는다. 이 짓을 되풀이해 가면서 인류

가 살아간다.

   그래도 삼독의 요소가 싫기 때문에 정신수양이니 도의 교육이니 한

다. 이는 우리 마음 깊이에 줄기차게 올라가려는 '신격(神格)'의 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름지기 이 신격의 나(얼나)를 깨달아 힘껏 솟

아나야 한다. 그래서 불교, 예수교에 다같이 십계명이 있다. 삼독을 쫓

아 버리고 솟아나게 하려는 계율이다. 사람에게는 남을 해치려는 수성

(獸性)에서 나오는 마음과 남을 도우려는 영성(靈性)에서 나오는 두

마음이 있다. 옳은 길에 와서는 자기를 죽이면서까지 남을 살리겠다는

마음이 생긴다. 이것이 예수의 정신이요 석가의 정신이다. 이 영성(얼

나)에서 나오는 사랑의 마음을 길러야 한다. (1957)

 

▶ 사람들은 평안한 것을 구한다. 철없이 평안한 것을 구할 때는 무생

물인 돌멩이나 흙덩이로 있어 아무 일 없는 것을 좋게 생각한다. 꼼짝

하기가 싫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안하다는 것도 구하는 일이 없어져

야지 구할 까닭이 없지 않는가?평안하느니 평안치 않으니 할 일도 없

을 것이 아닌가?

   사람이라는 것은 언제나 평안한 것을 구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평

안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만이 평안치 않는 것이 아니라 이 우주도 불

평(不平)이 있어서 나온 것인지도 모른다. 불평(不平)하면 맞대거리를

하는 것같이 소리가 난다. 평안케 해달라는 소리다. 이것이 기도이다.

우주도 불평하여 평화를 구하느라고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철없을

때는 몸뚱이 하나 평안하기를 구한다. 좀 자라서는 마음이 평안하기를

구한다. 사람은 평안하게 해달라는 부르짖음이 있어야 한다. 종교, 사

상, 문화란 다 무엇인가?다 우는 소리다. 불안한 걸 울어서 평안케 해

달라는 것이다. 각기(各己)의 철학신조라는 것은 이렇게 구하면, 이렇

게 울면 평안이 오리라는 것을 그 사람의 소견으로 믿는 그것이다. 불

평을 받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그 소리가 그럴듯하면 여기에 찬동하

거나 그 기도에 참여하고 싶어한다. 이렇게 따지면 모든 것이 다른 것

은 없다. 영원한 생명인 참나(얼나)를 발견할 때 불안이 사라지고 구원

받은 느낌을 얻게 된다. (1957)

 

▶ 나에게는 내 몸이 태어난 것이 사변(事變)이다. 이 사변이 없었으면

인생의 우주는 없었을 것이다. 사변 가운데 가장 큰 변이 인생이 태어

난 것이다. 평안하게 부모의 품안에서 자라 따뜻한 이부자리에서 평생

편안히 지내고 모두가 환영을 하고 모두가 즐거운 것이 인생으로만 알

면 틀린 것이다. 사변통에 정신 빠진 사람일 것이다. 이 사변이 없었으

면 배고프다는 것이 없을 것이고 자식이고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들이 끓임없이 불안한 것을 느끼기 때문에 절대 평안한 것을 구

하려고 한다. 절대 평안한 것은 우리의 본 바탈인 본성(얼나)이다. 우

리가 잊었던 본성(얼나)을 회복해야 한다. 우리 아버지(하느님)와 같은

영원한 자리를 일생을 두고 광복(光復)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신앙일

것이다. (1957)

 

▶ 남녀 유별하니 남녀의 교제를 황망히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성

별(聖別)이다. 성별을 해야 구속(救贖)이 온다. 외물(外物)에서 구하는

것부터 구별하면 위로 올라가는 올바른 정신이다. 당길심 있게 시간적

으로 띄우고 공간적으로 멀리하여 성별을 한다. 결코 급하게 쉽게 사귀

는 따위의 경솔을 저지르지 않는다. 곱게 보인다고 곧 바로 가까이하지

않는다. 곱고 좋다고 가까이 하면 위태하며 성별해야 구속이 온다. 짝

사랑을 하면 상대는 좀더 배를 탁 튀기고 내쳐 비싸게 군다. 그래서 이

쪽은 바탈에 아픔을 받는다.

   혼자 사는 독생자(獨生子)가 아주 편하며 죄에 들어갈 염려도 없다.

자기 혼자 독립해 사니 인애(仁愛)로 마침내 마치게 된다. 구하는 것

도 없고 맛보는 것도 없다. 호기심도 나지 않는다. 인애로 독생(獨生)

을 해야 한다. 성별을 자꾸 하면 절로 혼자 살게 된다. 당치않은 값으

로 소용된 물건을 무리해서 살 필요가 없다. 이는 안 사면 못 사는 것

이 아니라 그만두는 것이다. 호기심에 이끌려서 재미가 있을 듯 해도

그런 것도 이 세상에 있나 하고 그냥 지나간다. 미인의 코에서는 콧물

이 안 나오고 미인의 눈에서는 눈물이 안 나는가? 그 창자에는 똥이

없는가? 그 살가죽에서 떨어지는 때는 때가 아닌가? 석가는 미인도 똥

자루 핏자루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진.선.미가 이 세상에 어디 있는가?그렇다고 혼자서 제 콧속에는

코도 없고 제 창자에는 똥이 없는 것처럼 해도 안 된다. 그것은 사회에

대한 모독이다. 우리는 오로지 인애(仁愛)에서 독생(獨生)하기를 바라

야 한다. 자기의 꿈을 독생에 두고 성별(聖別, consecration)해서 구속

받아야 한다. (1957)

 

▶ 나에게는 손자라고는 없는데 68살에 딸의 딸인 손녀를 보았다. 그

손녀가 이제 8개월이 된다. 잘 때가 되면 응석을 부린다. 이것을 애써

재우는데 잠투정을 끝내고 막 잠들려는 어린애 얼굴에 파리가 덤벼 기

어이 아이를 깨운다. 오늘은 여러분을 만나는 날이라 아침부터 조용히

있으려고 하는데 나에게 아이가 덜컥 맡겨진 것이다. 아이를 재우려고

무진 애를 쓰다가 마침 잠이 들었는데 파리가 달려들어 아이를 깨우려

하기에 파리채가 없는 것도 아니고, 무슨 살생을 싫어해서도 아니고 손

한번 씻어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파리를 손으로 잡아 창가 밝은

데 내노니 그냥 좋다고 달아났다. 그런 놈 죽이지 않고 놓아 주었다고

시비가 될지 모르나 그냥 파리는 좋다고 갔다. 물론 고맙다는 소리 한

마디하지 않는다. 무슨 잔치 때 비둘기를 일부러 사서 방조(放烏)를

해서 새를 살려준다는 표시를 하기도 한다. 생명과 생명, 존재와 존재

의 그 관계는 무척 많은 문제가 있다. (1957)

 

▶ 악(惡)이라는 것은 많은 것도 큰 것도 아니다. 크고 많은 것은 아직

선(善)이다. 악이 크고 많아 보이는 것은 우리가 악을 대단히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이 좀 성가시면 극형인 사형을 쓰고, 좀 여유가

생기면 사형 폐지론이 나온다. 늘 선이 이기고 악이 지는 것은 아니니

사형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불살생(不殺生)의 사상이 그러한데

이 사상을 가진 사람도 일이 자기에게 닥치면 그렇지 않게 된다. 자기

집에 도둑이 들어왔다면 금방 죽여 없애버리고 싶은 생각이 든다. 정말

죽이려고 덤벼드는 사람도 있다. 강도도 아니고 도둑질을 했는데 죽이

려고 까지 하느냐고 말하면 '이런 놈을 살려 둬'라고 하는 이들이 많

이 있다. (1957)

 

▶ 유명한 얘기로 성 프랜치스코가 나간 사이에 수도원에 도둑이 들어

왔다. 한 제자가 그 도둑을 잡아서 프랜치스코가 돌아왔을 때 그 사실

을 보고했다. 프랜치스코는 도둑을 잡은 제자를 칭찬하기는커념 그 도

둑을 잘 대접한 다음 얼마 보테어 주기까지 하여 보냈다. 이 세상 사람

들은 성 프랜치스코의 이러한 행동을 보면 도둑을 기른다(養賊)고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도둑맞고 도난신고를 하지 않으면 경찰에서는

양적(養賊)을 했다고 한다. 인생관이 다르기 때문에 시비도 이렇게 다

르다. (1957)

 

▶ 마하트마 간디의 진리파지 (眞理把持)는 비타협이다. 비타협은 참 어

렵다. 의(義)를 위해서는 싸움을 해야 한다. 다만 미워하여 대적하지

않으나 아첨은 하지 않는다. 악인이 형통하여 오만한 것을 보고 미워하

게 되면 원칙을 따지게 된다. 속된 사람은 자꾸 무엇을 원망한다. 그러

다가 비타협을 지나서 아첨을 하게 된다. 강도놈이 들어와서 달라는 것

을 다 주고는 목숨만 살려 달라고 악에게 아첨을 한다. 비타협은 악에

게 아첨을 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가는 것은 무엇이며 예수

가 십자가를 지고 당한 일은 무엇인가? 악인을 미워하지 아니하되 악

과 타험하지 아니하고 겨루는 의(義)의 싸움이다. 거기서 오는 핍박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를 위해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이다. (1957)

 

▶ 이 지구가 우리 인류를 얼마 동안 더 실어줄지 모르겠다. 인류 자체

가 분열한다면 얼마 못 갈 것이다. 무한이라고 하면 무한일 것이고 유

한이라면 얼마 안 된다. 그런 동안에 인류가 꿈을 꾼다. 이왕이면 좋은

꿈을 꾸어야 좋지 않겠는가? 인간(人間)이란 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사랑으로 친교(親交)해야 하듯 나라와 나

라사이도 서로 도우며 인교(隣交)해야 한다. 서로가 배를 앓고 해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국제(國際)는 인교(隣交)해야 한다. 나라 사이는 조금만 하면 배가

아프고 조금만 하면 해를 입힌다. 밤낮 그 짓에 나라 사이에 공평과 자

유는 찾아 볼 수 없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공평 자유하듯 나라 사이도

공평자유 해야 한다. 그런데 어느 때나 중국 전국시대에 소진 장의 같

은 이가 지나간 뒤에는 번거롭고 시끄럽기는 예나 이제나 같다. 올림픽

경기에 세계 제일이면 어떻다는 것인가? 운동경기를 그렇게 굉장하게

하여도 이 지구 위에 전쟁은 그칠 날이 없다. 체육은 향상될지 모르나

전쟁은 언제나 그 타령이다. (1957)

 

▶ 상대세계에서 못쓸 삼독(三毒)을 우리에게서부터 뽑아내야 한다. 삼

독은 우리의 원수이다. 이 삼독이 없으면 이 세상은 없다. 어리석은 치

정(痴情)이 없으면 분명히 이 세상은 계속하지 못한다. 이 세상이 계

속하는 것은 그 어리석은 치정이 발동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를 버

릴만한 곳이 없어서 걱정이 아니다. 이러한 세상은 없어져도 조금도 아

까울 것이 하나도 없다. (1957)

 

▶ 이 세상에서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자꾸 주어서 좋은 게 없다. 좋

다 싫다 하는 건 이 몸에서 못 떠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좋다는 것은

감각을 간질이는 것이다. 웃으면서도 죽을 지경이다. 간질이는 게 싫으

면서도 웃지 않을 수 없는 게 이 세상이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인생이

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런데 감각이 가려워 견딜 수 없어 긁지 않을

수 없는 것을 꾹 참아야 한다. 아니할 수 없는 것을 아니하고 꾹 참고

지내는 게 필요하다. 이 세상의 이 인생은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가

지나가는 길은 죽도록 참아야 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이 세상을 사바

(Sabha)세계라 한다. 참아야 되는 인계(忍界)란 뜻이다. 이 세상에서

참지 못하면 멸망인 것이다. (1960)

 

▶ 말씀 설법을 들을 때 이론으로는 이 세상은 죄(罪)요 고(苦)라고 한

다. 그러나 그 곳을 떠나면 또 재미있는 것을 찾게 된다. 이건 바로 알

아들은 것이 아니다. 이론적으로는 내가 죄인인 것을 알게 되어 기도할

때는 자신을 사도 바울처럼 죄악의 괴수라며 그래서 눈물로 회개를 하

기도 한다. 그러나 누가 그를 보고 너는 죄인이요 음탕한 자라고 하면

성을 낸다. 그리고는 버젓이 산다. 참으로 세상이 죄악의 고해(苦海)라

고 느낀다면 세상 사람들이 하고 싶어도 말 못하는 것을 대신해 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예수.석가의 말씀을 그대로 바로 알아들었다면

이 죄고(罪苦)의 세상을 건너가려고 언제든지 애쓸 것이다. 바로 알아

듣지 못했으니 이 세상에서 재미를 찾는다. (19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