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터학당(學堂)-진리를 깨달아 자유를....나는 나다.
다석어록- 가르침(교육) 본문
다석어록- 가르침(교육)
▶좋은 것이라고 반드시 좋은 것이 아니고 싫은 것이라고 끝까지 싫은
것이 아니다. 싫은 것 중에도 좋아지는 조건이 있고 좋은 것 중에도 싫
어지는 조건이 있다. 좋고 싫고는 상대적이다. 좋은 것을 만났다가도
이것을 실컷 취하면 곧 싫어지게 된다. 그러니 좋은 것이라고 얼마나
취하겠는가? 좋은 일이라도 실컷 지내보면 나빠진다. 좋은 것일수록
싫어지는 도가 빨라진다.
아무리 귀여운 자식이라도 '너 좋으면 좋지'라고 하여 자식이 원하
는 대로 허락하면 그에게는 무서운 것이 없어지게 된다. 너 좋으면 좋
다하여 맛있는 것을 달라는 대로 다 먹이면 결국 배탈이 나고 만다. 좋
은 것이 좋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가르치고 배
우고 하는 것이다. '너 좋으면 좋다'는 말이 만일 절대자에게 쓰여진다
면 그것은 좋다. 이때는 '하느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절대신앙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절대자에게나 할 수 있는 말을 이 세상에다 썼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도적하는 짓이 될 것이며 하느님을 대수롭지 않게 여
기는 것이 된다. (1956)
▶교육정신을 찾는다는데 기껏해서 학생을 국가의 대들보감이 되라고
동량지재(棟梁之材)란 말만 자꾸 하는데 대들보감만 기르다가는 서까
래 감이 없어서 국가가 무얼로 지붕을 덮나? 대들보를 쪼개서 쓰는 어
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윗자리에 앉아 깡패 노릇만 하고서 민족의 광명
이 된단 말인가?(1956)
▶날개 우(羽) 아래에 스스로 자(自)를 한 글자가 익힐 습(習)자이다.
새 새끼가 어미새를 본받아서 자꾸 나르는 것을 날마다 자꾸 배운다.
병아리는 아마 이것을 참고 배우지 못하여 날지를 못하는 것 같다. 날
개가 있어도 날기를 배워 날려고 하지 않으면 날지 못한다. 닭은 날개
를 지니고도 날지를 잘못하는 못난 새이다. 우리들도 익힌다는 것이 사
는 것이 되니까 자꾸 익혀야 한다. 새 새끼처럼 자꾸 익혀서 위로 날아
오르도록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1956)
▶알긴 무엇을 아는가? 우리는 아는 것이 없다. 예수교 믿는 사람은
유교를 이단시하고 불교를 우상숭배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예수를 비
난하며 유교를 나쁘다고 한다. 유교에서는 기독교도를 예수쟁이라 천
시하고 불교를 욕지거리하고서 무엇을 안다고들 하는지 모르겠다. 남
을 모르면 자기도 모른다. 자기도 그이(君子)가 되려면 다른 그이(君
子)도 알아야 한다. 지금은 참 멍텅구리시대이다. (1956)
▶자기 자식이 인격자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자기 자식을 장난감으로
취급하는 어른도 있다. 어린이에게 할 짓 못할 짓 다해 못된 버릇을 가
르친다. 가만히 보면 젖 먹일 때부터 거짓말을 가르쳐 준다. 어린아이
야말로 참다운 인격자이지 노리개가 아니다. 어린이에게 진리가 깃들
면 그들에게서 이 다음에 무엇이 나올지 모른다. 하느님에게 가장 가까
운 사람이나 하느님의 거룩한 일꾼이 그들에게서 나올지 누가 알겠는
가? 그러한 어린이를 어떻게 노리개로 할 수 있는가?(1956)
▶세상에서 알 것은 다 알고 가야 하는데 무엇인지 모르고 가게 되면
그믐에 들어가듯 캄캄해진다. 진리되시는 하느님을 모르는 채 세상을
떠나는 것도 이와 같다. (1956)
▶어릴 때 하는 노릇은 짐승의 버릇이라고 한다. 사람이 어릴 때 노는
일은 모두 좋은지 나쁜지를 분간하지 못한다. 이것을 분간하면 어리다
고 하지 않는다. 짐승은 먹고(feeding), 싸우고(fighting), 새끼치는 일
(sex)밖에 모른다. 어린 짐승은 먹는 것밖에 모른다. 먹자판이다. 아직
몸만 기르는 존재로 되어 있다. 어쨋든 미성년시대는 온전히 짐승시대
이다. (1956)
▶우리가 익힌다는 말은 이 세상을 온당히 살아간다는 말이요 우리가
산다는 것은 인생이 살아가는 길에서 무엇을 하나 익히는 이것일 것이
다. 그러므로 애쓰며 열심히 익혀야 한다. 그러면 인생이 익게 된다.
내려오는 것을 잇기(承)가 익히는 것의 속알맹이다. 참으로 마음을 비
운 이는 마음에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다. 지저분한 것이 도무지 없는
가운데의 가운데 곧 속의 속을 충(忠)이라고 한다. 속이 비어 있고 곧
은 것을 말한다. 아직도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을 충(忠)으로 알고 있으
면 이 시대를 밤중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임금 없는 세상에는 충(忠)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이는
아직 충(忠)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다. 충(忠)은 곧이 곧은
마음이라 모든 이에게 충(忠)으로 대해야 한다. 아버지와 자식 사이에
충(忠)하지 않고, 형과 아우 사이에 충(忠)하지 않고, 이웃과 이웃 사
이에 충하지 않고 무슨 일이 되어 가겠는가?
오색(五色) 색동옷처럼 알록달록하게 서(恕), 신(信), 습(習), 인
(仁), 예(禮)로 나누어 있지만 이것은 다 하나이다. 다른 이름을 하나
더 붙인 것뿐이다. 원래가 하나이다. 도대체가 하나(하느님)밖에 없는
것이다. (1956)
▶저 좋으면 좋다는 말은 악마에게 복종하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실컷 하자' '좋으면 좋다'는 말은 틀림없이 심판을 받을 말들이다. 자
식에 대해서라도 그러한 말을 무한한 사랑이나 큰 아량으로 쓰는 것은
틀린 일이다. 우리들이 쓰던 말이 우리를 심판하게 된다. (1956)
▶이 세상에서 양심 있게 사는 사람이 자기의 삶을 누리는데 진.선.
미(眞善美)를 땅에서 찾으려고 할 때 조히라고 한다. 조히라는 말은
꾀라는 말로 들 수 있고 좋게라는 뜻으로 쓸 수 있다. 조히라는 말은
욕심이 많지 않고 조급하게 구는 것이 아니다. 급해도 조히 조히 하게
되는 것이다. 그 만큼으로 그저 감사하는 것이나, 이쯤 되면 좋게 한다
는 꾀라는 말과는 구별이 된다. (1956)
▶어릴 때 하는 노릇은 짐승의 버릇이라고 한다. 사람이 어릴 때 노는
일은 모두 좋은지 나쁜지를 분간하지 못한다. 이것을 분간하면 어리다
고 하지 않는다. 짐승은 먹는 것 밖에 모르는 먹자판이다. 아직 몸만을
기르는 존재가 되어 있다. 키 자라기만 기다리는 존재가 되어 있다. 어
쨌든 미성년시대는 짐승시대이다. 생존권만 있지 시민권은 없다. 아직
한 사람으로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 (1956)
▶안다면 나는 다 알았으니까 그 안 것을 우려먹고 팔아먹고 그렇게들
한다. 요전에 어디서 강의를 하니까 한 시간에 3천 원을 주었다. 그 만
큼 받으면 생활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에게 나아갈 맘속
에 지닌 긋(얼나)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 얼나를 팔아먹을 수 있겠는
가? 팔아먹지 못한다. 더구나 지금 안다는 것은 벌써 지나간 것이다.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알았다는 것인가? 상대지를 알면 무엇
하고 배우면 무엇하나? 하느님께로 나아갈 말씀을 배워야 하고 배웠으
면 한 걸음이라도 하느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1956)
▶글이라는 것은 절대자 그이에게로 통한다. 그이 (하느님)를 그리워하
여 그리는 글이라야 한다. 제나의 바탈(獸性)을 태워 버리고 아버지의
뜻에 잇대어 놓고 자꾸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무엇으로 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하느님 아버지의 아들이 되고자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나아갈 때 그 글은 하느님 아버지가 그리울 수
밖에 없다. 이것을 배워야 한다. 나로서는 오늘날의 이런 학교에 다니
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이다. 기독교 학교조차 학교 구실을 제대로 못하
고 있다. 그러나 하느님 아버지를 그리는 글은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공자(孔子)도 가르치는 데는 게으를 수 없다고 했고 예수는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목숨까지 바쳤다. 오늘날 학교에서 가르치는 글은 글이라
고 할 수 없다. 하느님 아들인 얼나를 깨우치는 온전한 글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 (1956)
▶무슨 제도가 있을 때 이것을 지키지 못하면 실수를 한다. 요즘 악수
하는 예(禮)가 있다. 이것이 예가 되는지는 모르지만 나이 많은 이가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이 원칙이다. 그렇게 알고 있는데 나이 많은 사람
에게 제가 먼저 손을 쪽 내밀고 '선생님 안녕하십니까?'라고 한다. 아
무리 세상이 평등 자유를 부르짓는 때라 해도 이것을 알아야지 이것
을 알지 못하고서는 무엇이 평등이고 자유인가? 초상집에 가서 일을
마치고 나오면서 '안념히 계십시오' 하고 나온다. 우리에게는 '안녕히
계십시오'라는 인사밖에 없다. 그래서 안녕히 계시라고 하는데 이것은
말이 안 된다. 정해주는 것이 없으면 안 된다. (1956)
▶이 세계는 단연코 참은 아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참을 찾으려고
했고 참을 나타내려고 했다. 그러므로 말이나 글은 한 가지로 참을 나
타내자는 것이다. 글(말) 가운데 사람들이 가까이하고 외우려 한 것이
동서고금의 경전이다. 경전의 원줄기는 분명히 천년 만년 이어져 없어
지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몇 사람은 참(얼)을 받아 이어 가고 있
다. 이것이 참인 얼의 줄기이다. 성경이라는 글경(經)자는 줄기경(徑)
자와 뜻이 같다. (1956)
▶배울 학(學)은 아이가 캄캄한 속에서 나와 두 손을 들어서 손을 놀
리는 것을 나타낸 뜻모음 글자다. 사람들은 평생 거짓 학생 노릇을 하
다가 죽어 무덤에 들어갈 때도 버젓이 학생 아무개라고 쓰는 거짓말을
하게 된다. 철학자, 신학자도 학자면 자꾸 배운 것을 익혀야 하는데 버
릇 없이 감투를 좋아한다. 바람 감투를 얻어 쓰는 맛에 이 세상에 나온
보람을 느끼는 모양이다. 또 감투를 쓴 사람에게 옳은 제자도 없겠지만
은사라고 좇아다닌다. 이러니 저러니 말 많고 유혹 많은 세상에 학자는
배운 것을 익혀야 하는 것이 그 본분이 아니겠는가?과거를 더듬고 영
원을 찾는 것을 익히는 이 맛 이 재미는 즐거운 것이 아니겠는
가?(1956)
▶내가 기독청년회관(YMCA)에서 얘기를 해야 한다는 것은 내 생각이
아니다. 하느님의 정신이 이 나의 정신 보고 꼭 가라고 해서 나온 것인
지 그것은 모르겠다.
사람은 무슨 목적에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이 있다. 우리
가 있어 이렇게 모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무슨 학교 공부를 해야
하고 무슨 지위를 바라는 것은 한낱 꿈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금방금
방 낳은 것을 자꾸 새로 낳아 가는 나가 아닌가? 이러한 말을 해서 어
떨지 모르지만 아버지 앞에서 좀 이런 말을 해도 무관할 것이다. (1956)
▶나는 어려서 공부를 많이 못해서 한글 받침법이 어떻게 쓰이는지 모
르겠다. 영원(하느님)의 공부만 했기 때문에 글 쓰는 데 무엇을 어떻게
쓰는지 잘 모르는 일이 있다. (1956)
▶나는 70평생 동안 늘 성경을 보아 왔다. 학교 공부를 많이 하지 않
았다. 50년 동안 성경 공부를 하는데 20대에 전도를 했다. 지금 생각하
면 멀쩡한 일이다. 나는 가르치는 사람(교사)이 전도를 한다고 해서 듣
고 배운 것을 그대로 옮기는 녹음기 노릇을 했다. 정말 내 생각으로는
소학교 선생도 40살 이상 된 사람이 지도해야 될 줄로 안다. 30세 전
에 무슨 인생을 알겠는가? 인생은 인생을 알고 지도해야 한다. (1956)
▶사람에게 매이려 하고 재물을 모으려 하는 매임과 모음은 그만두어
야 한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죄다 잔뜩 모아서 앉아 있으려고 해도 그
렇게 앉아 있을 수가 없다. 사람이 매이는 것과 모으는 것을 전제로 공
부를 한다면 아예 공부를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공부를 하고서 세상에 나와 무슨 짓을 하겠는가? 매이고 모으려고만
한다면 영원(하느님)과는 하나가 될 수 없다. 꿈 같은 이 세상에 꿈꾸
듯 지나가는 것밖에 안 된다. 매이고 모으는 것은 집어치워야 한다. 자
꾸 매임과 모음만 찾다가는 마귀 생각에 빠질 수밖에 없다. (1956)
▶내가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은 내가 아는 것이 많기 때문이라는 생각
을 한다. 세상 사람이 인정한 바이니까 모을 것을 모아도 관계없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무엇이 되면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따위
생각은 다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것이 어리석은 생각이 아니라면 이 사
람이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것일 것이다. 상당한 사람이 있으면 내 아
들딸과 혼인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자식을 많
이 낳아서 그들을 기른 대가로 뒤에 효(孝)를 받겠다는 것은 부질없는
생각이다.
세계의 장래를 위해서 자식을 낳아 잘 기르고 가르쳐 큰 인물을 만
들어야 겠다는 생각도 보잘것없는 어리석은 생각이다. 남달리 해보겠
다고 죄다가 똑똑한 척한다. 맹자(孟子)시대에도 그러했다. 인(仁)을
알고도 차마 말하지 않았던 시대에도 그러했는데 지금은 더 말할 것이
없다. (1956)
▶이 달 10일에 간디옹을 기념하는 행사가 있다고 들었다. 구태여 기
념까지 해서 무엇 하는가? 급기야 당국의 허가까지 나왔다고 하는데
문제는 간디옹의 행사를 해서 무엇하자는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어떻
게 하는 것이 기념인지 무엇을 기념하자는 것인지 나로서는 모르겠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 왜 간디를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인가?간디를 기념
하려는 것은 그의 살과 피를 좀 먹고 마시자는 것이다. 간디는 1869년
10월 2일에 출생하여 1948년 1월 30일에 인생을 즐업했다. 올해
(1957)로 9주년을 맞는다. 그가 산 그림자(生) 28,608일 동안을 지냈
다. 4,087주 966일 나이로는 78년이다. (1957)
▶문제는 궁극으로 인생에 무슨 뜻이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은 인
생의 의미를 모르고 사는 경우가 많다. '뜻은 무슨 뜻인가?사람이 뜻
먹고사느냐 쌀 먹고사는 거지' 라고 한다. 뜻은 싫어하고 맛은 좋아한
다. 그리하여 인생을 왜 사느냐고 하면 먹는 맛 때문이라고 한다.
요새 신문을 보면 학비가 없어서 자살하는 사람이 있는데 대단히 고
상한 것 같으나 실제로 배움의 맛 때문에 그랬는지 의심스럽다. 오늘의
맛보다는 내일의 맛이 더 좋을 것으로 여기고 대학교까지 나와 더 좋
은 맛을 보려고 하는데 그만 그 길이 막히니까 목숨을 끊는 사람도 생
겨남직하다. 맛의 길이 막히니까 정녕 그럴 수도 있지 않겠는가?모르
기는 해도 오늘날 교육한다는 사람 중에 공부를 잘해야 이 다음에 잘
먹고 잘 살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옛날에도 좋은 의.식.주(衣食住)와 높은 벼슬과 고운 여인을 얻게
되는 것이 권학(勸學)의 조건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
은 이 세상은 맛보고 사는 줄로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인생은 맛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다. 삶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우리는 인생관을 승화시켜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사회는 볼 일 다 보게 될 것이다. (1957)
▶지금 사업한다는 것은 결국 돈 벌자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 업 가운
데 하나가 학업이 되었다. 그래서 사업이고 학업이고 밥줄 떨어지지 않
도록 밥줄을 더 잘 잡으려고 하는 업이 되고 만 것 같다. 이것이 일반
적인 추세다. 물욕주의가 일반적인 인생관이 된 것이다. (1957)
▶세상에 노력하지 않고 거저 되는 게 없다. 예수라고 해서 저절로 된
것이 아니다. 잠 안자는 독서, 잠 못자는 고뇌, 밥 잊은 명상 속에서
이루어진 인격이다. 우리가 밤잠 제대로 못 자고 온 정력을 다 쏟아야
예술 작품 하나라도 내놓을 수가 있다. (1957)
▶서둘러서는 안 된다. 참을 수 없으면 급히 서둘게 된다. 천천히 찾으
면서 가는 사람이 바른 것을 찾는다. 급하게 서둘러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려니까 결국에는 피까지 흘리게 된다. 참으로 세상을 바로 되도록 해
야 한다. 이것이 또한 사람의 길이고 하느님의 길이다. 즘 더디더라도
급하게 서둘면 안 된다. 그 때문에 신앙하는 사람은 급하게 서두르지
않는다. 불가능한 것을 급하게 가능케 하려면 그것은 사견(邪見)이라
도적놈밖에 되지 않는다. (1957)
▶사람의 생평(生平)을 언론(言論)한 것이 사상이다. 그래서 오늘날까
지 무슨 철학, 무슨 주의(主義), 무슨 종교따위가 완결(完結)을 보았다
고 하는데 아직도 완결을 못 보았다는 것이 옳은 말이다. 무슨 사상
무슨 신조(信條)를 좇아가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기
정론(旣定論)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미정론(未定論)을 주장한다.인
생의 역사가 끝날 때까지 미정일 것이다. 과학조차도 증명할 수 없는
일이 허다한데 더구나 구름을 잡는 것 같은 형이상(形而上)에 완결을
보았다고 하는 것은 당치않은 소리다.
무슨 논(論), 무슨 설(說)은 다 생평(生平)을 염두에 두고 항상 무엇
을 얻었다고 하다가 나온 한 이론이다. 이 이론을 끝까지 하려고 하다
가 그만 붓을 놓고 죽으면 세상 사람은 그 사람의 논(論)을 완결된 것
으로 보고 떠들지만, 하다가 죽은 것이지 다 끝맺은 것은 아니다. 완전
한 결론이란 없다. 톨스토이의 사상도 도중에 미결된 것이지 완결한 것
은 아니다. 이같이 모든 것이 미정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 가
지 뚜렷한 것이 있다. 그것은 모든 기존 이론에 묶이거나 매달리지 말
고 내 생각을 맘대로 하는 것이다. 맘에 따라서 미정고(未定槁)를 이
어받아 완결을 짓도록 노력을 하는 것이다. (1957)
▶물욕에 정신이 팔리면 자기 목을 자기가 잘라 버리는 것이 된다.만
일 사람의 혓바닥과 생식기를 돼지나 개에게 바꾸어 붙여 준다면 돼지
나 개가 우리 사람이 저지르는 일같이는 저지르지 않을 것이다. 사람이
란 참으로 불행하다. 짐승이 할 수 없는 일을 잔인하게도 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이다. (1957)
▶인도사상에는 축생(畜生), 아귀(餓鬼), 지옥(地獄) 3층으로 나누어
맨 아래가 지옥이고 다음이 아귀이고 맨 위가 축생이 있다고 한다. 구
원이란 자신이 깨닫고 눈뜨는 것인데 그러지 못하고 몸의 감각을 좇아
맛으로 살게 되면 먹고 즐겨야 겠다는 아귀 축생이 되고 만다.
요즘 보면 너도나도 모두 대학에 가겠다고 야단을 하고 있는데 이는
제 자식을 아귀로 만들겠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자식을 아귀
로 기르는 세상이다. 아귀하나 더 나오게 하면 무엇 하는가. 잡아먹으
면 누구를 잡아먹겠는가? 저희들끼리 잡아먹히는 꼴이 된다. 이 세상
은 서로 잡아먹는 아귀다툼의 난장판이다. 이 악몽(惡夢)에서 반드시
깨어나야 한다. 그리하여 아귀(餓鬼) 노릇을 그만두어야 한다. (1957)
▶마하트마 간디가 세상에 다녀간 뒤로는 참(얼)을 꼭 잡아야 한다는
진리파지가 보다 확실하게 되었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참(얼)을 놓을
수 없다고 꽉 붙잡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다. 재물은 꽉 쥐
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여기에 비해 진리(얼나)를 곽 잡고 있는 사람
은 도대체 얼마나 될까?(1957)
▶이 YMCA 연경회에서는 성경을 연구해야 할 것이지만 이런 말을 하
는 것은 이 모든 것이 다 내가 본 성경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본 성
경으로 먹고사는 데 남보다 더 잘 먹었는지 못 먹었는지는 모르나 나
는 나만큼 먹고 내 맘 가지고 살아간다. 이 점을 일러두고 싶다.
내가 성경만 먹고사느냐 하면 그렇지 않다. 유교 경전도 불교의 경전
도 먹는다. 살림이 구차하니까 제대로 먹지 못해서 여기저기에서 빌어
먹고 있다. 그래서 희랍의 것이나 인도의 것이나 다 먹고 다니는데 그
렇게 했다고 해서 내 뱃감량(飽和量)으로는 소화가 안 되는 것도 아니
어서 내 건강이 상한 적은 거의 없다. 여러분이 내 말을 감당할는지는
모르나 참고삼아 말하는데 기독교의 성경을 보나 희랍의 철학을 보나
내가 하는 말이 거기에 벗어나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이 말의 옳
고 그름의 판단은 하느님이 해주실 것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이 말을
하는 것이 여러분에게 결코 헛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1957)
▶친구를 공경하거나 임금을 공경함에는 면절(面折)을 해야 한다. 잘
못하면 야단을 쳐야 한다. 야단을 치지 못하고 술만 얻어먹고 감투만
얻어 쓰면 참으로 바른 정사(政事)는 해 나갈 수 없을 것이다. (1957)
▶요즘에는 스승의 덕(德)을 본받겠다는 택덕사(擇德師)가 어렵다. 그
것은 스승다운 스승이 없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스승을 하늘같이 모셨
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스승의 덕을 좇아서 제자들이 모였다. 제자는
스승의 뒤를 따라야 한다. 그러는 가운데 인(仁, 얼사랑)을 당해서는
스승이 이를 처리하지 못하면 제자가 사양하지 않고 이를 맡는다. 인
(仁)을 이루어야 할 즈음에 당해서는 남에게 떠맡기지 않고 주저 없이
이를 당해 내야 한다. (1957)
▶이 세상에는 책임 없는 것이 없다. 짊어진 것 아닌 것이 없다. 책임
의 책(責)자는 출(出)과 패(貝)를 합친 글자이다. 곧 돈을 내놓으라는
뜻이다. 빚지고 안 갚으면 안 되는 것과 같이 이것이 책망을 대표한다.
책임 소재는 일의 사정을 자세히 살피게 한다. 자기로서는 자신 있게
잘 하노라는 일도 책임이 없으면 잘하지 않고 책임이 있으면 자세히
살피게 된다. 일하고 나하고는 어떠한 책임과 관련 없는 것이 없다. 다
책임이 있다. 일(事)은 다 책임이다. 죄다가 내게 책임이 있다. 오늘만
하고 내일은 그만두는데 없어질 것이 무슨 책임이냐 하지만 그것이 아
니다. 이전에 지나간 일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하며 오늘 이 시간이
라는 것도 지난 책임의 연결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앞에 나타
난 세상에는 연결성을지닌 책임이 예전부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같이 제각기 책임이 있다. 이 세상이 없어지면 모르겠지만 세상이 있
는 이상은 나의 책임은 엄연히 있다. (1點7)
▶배운다는 것은 배워서 알린다는 것이다. 배울 것을 배워서 주위 사
람들에게 알리라는 말이다. '보아 이름이' 준 말이 되어 배운다가 되었
다고 생각된다. 깨어 배운다가 철학(哲學)의 뜻이다. 과학(科學)의 과
(科)에 말 두(斗)가 붙어 있는 것은 두량(斗量)한다는 뜻으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관찰 실험이 된 것은 되(斗)어서 된 것이다. (1957)
▶이 사람이 오늘 이렇게 나오는데 무슨 열심이 없었다. 그래도
YMCA(연경반 모임)에 나가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걸어 나와
보니 지금 일곱 분이 나오고 그리고 어린 학생이 다섯 분이 나왔다. 한
분도 안 나왔으면 내가 열심이 없었던 맘 메꿈을 할 수 있었을 것인데
이같이 일곱 분이나 나오고 어린 학생도 나왔으니 그저 안 나가선 안
되지라는 느낌을 가졌던 자신을 딱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단식 중이라 나올지 말지 했는데 내가 단식 중이라는 것을 알려 두
자 해서 실상 오늘 나온 것이다. 그리고 나온다 한 날에 안 나오면 죄
많은 사람인데 또 죄가 더 할까 해서 나온 것이다. 지난 한 달 못 만났
으니 시원하게 만나 보자는 것이 이렇게 기력도 못 차린 이 사람의 꼴
을 보고 여러분은 좋지 않게 생각할지 모르나 우리는 좋은 결모양으로
만나자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간디옹에 대한 말이 나왔을 때 그에 다
해서 알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고 했는데 간디옹을 배척하자는 것은 아
니다. 단지 어지러운 세상에서 그를 알아서 무엇 하느냐 하는 것이다.
간디면 간디, 이승만이면 이승만 이렇게 나타났다가 사라지면 그만이
지 기념이 무슨 기념인가?((1957)
▶까막눈에는 삼층(三層)이 있다. 눈을 뜨고도 글을 못 보는 이, 글을
보면서 사물을 판단치 못하는 이, 그리고 판단하고 알긴 하는데 그렇게
실천하며 살지 못하는 이가 다 까막눈이라고 할 수 있다. 까막눈을 한
자로 쓰면 오목(烏目)이라고 쓴다. 옛날부터 한자를 배우는데 새 조
(鳥)자와 까마귀 오(烏)자를 어떻게 쓰느냐 하는 말생이 있었다. 한자
는 사물의 그림(形象)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알고 있다. 까마귀 오(烏)
자는 까마귀가 까만 깃털에다 까만 눈이 있으니 눈이 있는 것 같지 않
아서 눈 하나와 깃 하나를 없애 까마귀 오(烏)자로 한다. 까마귀 눈이
애매하듯 까막눈도 애매한 것을 말한다. 눈은 있는데 행세를 다하지 못
하는 까막눈이다. (1957)
▶이름이란 만물을 분간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된다. 만물의 분간은 이
름으로써 가능하다. 이름에는 반드시 거기에 '이루움'이 이름이 되어
이루었다(成)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하느님 나라를 '이루움(成)'에 들
어가야 이름(名)은 이름대로 살고 이를 것 이룬다. 무작정 이름을 부르
는 것은 그 이름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1957)
▶사람에게는 천직(天職)이 있다. 타고난 매인 곳이 있다. 여기에 매
여 있으면 그는 천직을 살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어수선한 것은 타고
난 천직을 업신여기고 좀 편리하고 쉽게 살아보자는 생각 때문이다.돈
을 좀 벌어 보겠다고 천직을 버리고 딴 길로 간 사람이 많다. 그것은
정말 자기 스스로 자기를 묶는 일이다. 참 맘으로 천직에 매어 달린 이
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그리스도는 천직(天職)
에 매달린 사람으로 우리에게 많은 모범을 보였다. 그는 죽기를 다하여
천직을 지켰다. 예수는 천직에 순직했다. (1957)
▶자기를 반성하여 깊이 숨으면 숨을수록 더욱 빨리 고치가 될 것이
다. 세상에 나타나려고 하지 말고 숨으려고 하라. 숨으면 숨을수록
기쁨이 충만하게 된다. 그것은 더 높이 올라갈 수 있기 때문이다. 오르
려는 사람은 깊이 숨어야 한다. 숨는다는 것은 더 깊이 준비하고 훈련
한다는 것이다. 훈련에 훈련을 통하여 사람은 도(道, 얼나)에 이르는
것이다. (1957)
[주] 고치 ' 실 쁩는 누에고치로 사상(思想)을 상징함.
▶잠자는 어린이는 영원과 짝해 있는 듯 평안히 잔다. 우주라는 것도
마치 잠든 채 자라는 아기와 같다. 우리 몸뚱이도 그렇지 않을지 모르
겠다. 세포 하나하나가 따로 생명이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생명이
느끼는 게 있다면 우리를 그처럼 느낄 것이다. 우리를 우주의 세포로
본다면 우리에게서 우주생명의 을동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1957)
▶아기의 상(像)이나, 성모(聖母)의 상이나, 붓다의 상이나, 그리스도
의 상은 다같이 늘 보아 좋은 상이다. 이 상(像)을 한참 안 보면 우리
의 꼴은 못돼 간다. 우리는 그 상들 속에서 영원한 생명의 율동을 못
느끼면 헛된 일이다. 상(像) 가운데 상은 하느님 아버지 상이다. 하느
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기에 마침내 찾는 상(像)은 하느님 아
버지의 상이다. 아마 아버지의 형상을 찾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형상
(얼나)과 같지 않는 불초 자식이 될까봐 걱정이 되어서 그렇다. 아바디
(아버지)의 '아'는 감탄사요 '바'는 밝는다는 것이요, '디'는 딛고 실
천한다는 뜻이다. (1957)
▶이 세상에는 붙어도 안 되고 떨어져도 안 된다. 붙었다 떨어졌다 붙
었다 하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다. 마음이 빈 사람은 굴러가는 수레바퀴
처럼 붙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는다. 사물에 집착하여 화를 잘 내는
사람은 몸에 병을 가져온다. 마음이 빈 사람은 병이 오지 않는다. 화를
풀고 분을 넘겨야지 노여움을 옮기면 안 된다. 내게 대한 화를 다른 이
에게 옮기는 것은 큰 잘못이다.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람을 미워하
지 않고 부모를 존경하는 사람은 사람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부모님에
애경 (愛敬)을 다한 뒤에야 천명 (天命)을 알게 된다. (1957)
▶요새처럼 외제를 좋아하기 시작하면 나라는 망한다. 국가란 언제나
국산품으로 살아야 흥하게 된다. 이것은 쉬운 이치인데 속알머리 없는
사람들은 이것을 모른다. 예수는 솔로몬의 영화보다도 한 송이의 백합
이 더 좋다고 했다. 외제보다도 국산으로 살아야 한다. 인위(人爲)보다
도 자연으로 살아야 한다. (1957)
▶요새 탐관오리(貪官汚吏)들이 서로 백성을 등쳐먹으려는 것은 마귀
의 짓들이다. 하물며 교회에서 재물을 탐내면 그것은 큰 마귀의 짓이
다. 사람들은 함정을 파놓고 동물을 잡으려고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가
판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 성령이란 하늘에서 내려온 사
다리와 같다. 우리는 성령의 사다리를 타고 하느님께로 올라가야 한다.
인생은 고달픈 삶을 겪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갈 길은 하느님과 얼로
통하는 길뿐이다. 얼나의 천명(天命)을 받들어 느낄 줄 알면 성령을
받아 권능을 얻게 된다. 그것은 하느님 아들(얼나)이라는 권능을 가지
게 되는 것이다. 성령은 진리인 얼나다. 진리를 빼고서 교육이 어디 있
나? 종교(진리) 없는 교육은 지식의 매매는 될지언정 인간의 구원은
되지 않는다. 구원 안 된 사람을 가지고는 아무리 애써도 그것은 지옥
이지 천국은 아니다. (1957)
▶이 시간은 성경을 보자고 해서 연경회(硏經會)라 이름지어 모이는
데 이 사람은 성경 얘기는 많이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영원한 생명(얼
나)을 생각해 보는 데는 같은 뜻이 있다. 우리의 생명이 몸나로 이 땅
위에 한정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자연히 보이지 않는 영원
한 하늘나라(얼나라)를 바라보게 된다. 이 영원무한(하느님)에 대한 생
각은 어느 경전이나 같은 것이며 영원한 생명(얼나)에 대한 얘기는 어
느 경전이나 같은 것임을 알 수 있다. (1957)
▶꽃은 우리에게 절실한 무엇을 가르친다. 꽃은 한마디로 우리에게 아
름다움(美)을 가르쳐 준다. 그 꽃이 우리에게 일러주기를 '이 땅 위에
서 느끼는 아름다움(美)이라는 것은 순간이다. '이것을 해마다 우리에
게 보여주고 있다. 하루 아침에 피어서 하루 저녁에 지는 꽃이, 이 세
상의 모든 아름다움(美)은 꽃과 같이 잠깐이라는 것은 가르쳐 주고 있
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는 영원한 아름다움(美)이란 없다는 것이다.
이 땅 위에는 없는 참 아름다움(美)을 저 위 하늘에는 있을까 하고 하
늘을 바라보고 느껴보는 데서 영원한 생명(하느님)을 생각하게 된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우리가 땅으로 기어 들어가려는 정신보다는
하늘을 우러러보려는 정신이 더 강하다. 우리의 머리를 하늘로 두고 있
다는 이 사실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 사람은 영원한 하늘(하느
님)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1957)
▶화생어해태 (禍生於懈怠)라는 말은 내가 소학(小學)을 읽을 때 가장
인상 깊게 남는 글이다. 모든 화근은 게으른 데서 나온다. 부지런한 데
는 복이 온다. 이런 것을 보더라도 신종여시(愼終如始)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1957)
▶철학에서 선악을 규정짓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어려울 것이 없다.
늘 위(하느님)로 올라가는 것이 선(善)이고 떨어지는 것이 악(惡)이다.
영원한 생명(하느님)과 연결해서 자꾸 나아가는 것이 선이다. 하느님을
추원(追遠)하면 하느님의 아들이고 세상을 추세(追勢)하면 세상의 아
들이다. (1957)
▶재주 부리는 인형을 괴뢰(傀儡)라고 하는데 소위 지도자들의 괴뢰
노릇을 낙제생들은 하지 못하는데 이른바 똑똑하다는 총준(聰俊)들이
한다. 꼭 돈 한 가지가 없어서 그 짓을 한다. 돈 받고 힘 있는 사람의
괴뢰 노릇을 한다. 돈이 있어야 공부를 하고 공부를 해야 사람답게 권
세를 가지고 지낼 수 있는데, 이것을 돈 하나 없어서 못하니까 자기 목
적을 달하지 못할 바에야, 애저녁에 죽어 버리는 것이 좋다고 결심을
하게 된다. 국가를 위한 결사권(決死權)도 있지만 개인의 이상을 위한
결사도 총준은 곧 잘 한다. (1957)
▶이같이 꿈틀거리고 사는 이 세상에서 지각 있는 인사(人士)는 서울
같은 도시에서는 살지를 않는다. 이 사람은 거의 70년을 서울에서 사
는데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지 모르겠다. 산다고 하되 류영모가 무엇인
가?또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싱겁기 한량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는 아주 진저리가 처질 지경이다. (1957)
▶교육의 열은 대단한데 좋은 재목이 나오지 않고 있다. 그뿐만 아니
라 교육이라는 것도 어떤 것인가 하면 그냥 몸뚱이만 늘리는 일만 하
니 아무리 세월이 가도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지 별 수 없다. (1957)
▶덕(德)을 택하여 스승을 얻자니 그런 스승도 없다. 제자도 스승이
하지 못한 일을 스승도 못했는데 내가 어떻게 해 하고 꽁무니를 빼서
는 안 된다. 스승은 못하더라도 스승이 가르친 대로 할 만한 제자가 있
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제자가 없다. 그런 제자야말로 재목인데 요
새는 그런 재목이 없다. 선생도 덕(德)을 따라서 선생을 택하는데 선생
역시 덕이 없다 그래서 무사무제(無師無弟)이다. 여기서 배우니 무엇
이 되겠는가?몸뚱이만 키워 가지고 나오는 것뿐이다. (1957)
▶나는 여러 말을 시조형으로 글자를 묶어보았는데 누가 보면 시조(時
調)가 아니라 할지 모르나 나는 나대로 시조가 될 수 있다. 내 몸을 갖
다가 운(韻)으로 하고 좋은 느낌을 통하게 하여 이러한 시(詩)가 되었
다. (1957)
▶내가 한문자를 많이 적어서 알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지 모르지만 한
문자라고 어렵게 생각할 것 없다. 생각한 것을 담아놓기 좋아서 이렇게
한문으로 써 놓은 것이다. (1957)
▶명심보감(明心寶鑑)이라는 책은 여러 가지 잡탕을 집어넣은 일종의
잡지인데 지방에서 많이 본다. 서울에서는 명심보감을 즐겨보는 것을
못 보았다. 소설의 삼국지, 수호지를 모두가 보는 것만큼 명심보감을
퍽들 본다. 그렇게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참으로 이상한 일이
다. 명심보감에는 좋은 말이 많은데 소극적인 말이 많다. 그나마 많이
본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시골에서 글을 아주 모르
는 이라도 명심보감에 있는 말을 꺼내서 말하는 이가 많다. (1957)
▶진리에 밝아서 물리(物理)를 밝혀야 하고 밝힌 만물의 물리를 논리
(論理)로 서로 통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사람의 할 바이다. 이래야 우리
사람이 서로가 잘 살 수 있다. 서로가 살아가는데 지켜야 하고 사양해
야 한다는 것이 정해진다. 우리는 물건을 주고받고 하는 이치와 물리를
같이 서로가 밝혀주므로 바로 되야 할 일이 바로 될 수 있다. 할 수 있
는 대로 그 시대에 밝힌 물리는 그 이치에 따라서 온전히 알아야 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를 논리로 밝혀 이치에 맞도록 정하는 것이 소위
윤리(倫理)이다. 윤리로 도덕이라는 제도가 정해진다. 그래서 학문은
이것밖에 없다고 이 사람은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고금(古今)을 통해
서 같은 것이다. 어느 민족, 어느 나라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류는 영원한 시간을 통해서 논리로 물리를 밝혀서 윤리를 정해 가지
고 살아간다. 그리하여 논리와 윤리를 유도할 때 상대방의 옷깃을 꼭
잡아 쥐듯 우주의 진리를 그렇게 바로 쥐면 중정(中正) 윤리안(倫理
安)이 됨으로 그 가운데 내가 평안해진다. 윤리를 위해서 하는 것이 아
니라 나를 위해서 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회에 도덕이 바로 선다. 요새
말로 하면 도의교육이 바로 되어 평안하다는 말이다. (1957)
▶중학생은 국민학생을, 고등학생은 중학생을, 대학생은 고등학생을
대학원생은 대학생을, 박사는 박사 못된 사람을 하시(下視)한다. 이러
므로 사람들이 하느님 아들이 못된다. 그들이 하느님 아들이 된다면 큰
일이다. 세상 사람 모두를 하시(下視)하여 버릴 것이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러구 암만 올라가려 해도 소용없다. 감투라 하는 감투는 없어
져야 한다. 아주 옛날에는 없었는데 이 밝은 세상에도 있으니 이 나라
가 언제 밝아지려는가?(1957)
▶금새(가치)는 값을 매기는 것이다. 싸다 비싸다 비판하는 것이다.비
판을 해야 금새가 또 나온다. 믿음은 전체를 보는 것이다. 늘 새롭게
새롭게 금새를 매기는 것이 믿음이다. (1957)
▶교육이란 것은 진리되시는 하느님을 찾아 가르치자는 것이다. 그런
데 얼토당토 하지 않게 입신출세를 위한 교육 아닌 교육(敎育)을 시키
고 있다. 그래서 학교를 많이 다니면 다닐수록 교만만 늘어나고 도둑질
만 잘하게 된다. 이러한 교육이라면 차라리 교육을 그만두자는 교육폐
지론이 나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957)
▶불필요한 물건을 자꾸 사게 되면 꼭 필요한 필수품을 사야할 때 돈
이 모자라거나 없어서 사지 못하게 된다. 무익(無益)한 데 지나치게
되면 유익(有益)한 데 해(害)가 된다. (1957)
▶대학에 들어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지금 대학가는 이들은 무슨
짓을 하려고 들어가는 사람들이다. 이런 말을 하면 들으려고도 않겠지
만 숫제 시골에서 부모가 대학교 가라고 권해도 무슨 말씀이세요 우
리 집 경제사정이 이런데 땅을 팔고 갈 수 있습니까? 땅이나 파면서
농사짓고 부모님 모시고 있으면 그만이지요'라고 하는 사람이 우리나
라 주인이 될 사람들이다. 지금 대학 들어간 사람은 별볼일없는 사람들
이다. 그 많은 대학이 정말 대학이라면 이렇게 죄다가 들어가서 공부하
고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대학이 소소학(小小學)도 되지 못하여 도
장만 찍고 돈만 내면 졸업장을 가질 수가 있어 그런 것이다. 대용품 시
대니까 대학(代學)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1957)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아니하는 날이 없다. 세상사(世上事)가 남녀관
계에서나 시험에 들지 않으면 좋겠는데 우리는 항시 시험에 빠지고 있
다. 좀 잘 살아 보겠다느니, 자식을 길러서 출세시켜 보겠다느니, 혼인
을 잘해야 한다느니 하는 것은 죄다가 시험에 드는 것이다. 악에서 구
해주시어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1957)
▶상의 (相議)란 말에는 서로 상(相)자를 쓰나 상의(商議)라는 말이 온
갖 일을 의논하는 본 목적을 나타낸 것 같아서 좋다. 이때 상(商)자는
헤아린다는 뜻이다. 지금 보다시피 서로 의논한다는 것은 모두가 장사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장사하기 이전에는 헤아린다는 뜻이었을 것이
다. 서로 만나서 헤아려 가지고 어떻게 할까 하는 그런 뜻의 상(商)자
이다. 이 글자가 뒤에 장사가 발달되어서 서로 만나서 하는 일이 모두
가 헤아리는 일이고, 따지는 일이고 해서 장사 상(商)자로 쓰게 된 것
이다. (1957)
▶득의(得意)란 무슨 일에 성공을 했다든지 또는 돈을 많이 얻어서 잘
살게 되었다든지 하는 그런 것이 아니다. 가지고 있던 이상(理想)을
실현시키는 일이다. 정의에 입각한 이상을 이를 때에 득의했다고 한다.
이 땅 위에서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는가? 예수는 모든 사람이 하느님
이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깨달아 하느님께 돌아가는 것을 이상으로 생
각했다. 이 땅 위에서의 수천 년의 인류역사가 흘러갔으나 성경은 하나
(하느님)에서 나와서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요한복음을 하나로 돌
아가자는 것을 외친 것이다. 예수는 늘 내 안에 아버지께서 계시고 아
버지 안에 내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따
르지 않았다. (1960)
▶일 없이 일하는 게 참으로 일을 잘하는 것이다. 수레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붙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는 수레바퀴에서 무위이위(無
爲而爲)를 배웠다. 일을 하다가 앉으면 일어설 때 아주 힘이 든다. 멈
추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수레가 일 없이 일하는 것이다. 불경이나 노
자도 일 안 한다는 게 아니라 이치대로 하면 일이 없다는 말이다. (1960)
▶이 세상에서 교육하려는 것은 좋은 버릇이 버릇 들고 나쁜 버릇이
버릇 들지 말게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진선미의 버릇은 없다. 아무리
해도 더 진.선.미(眞善美)한 게 있다. 예수도 선(善)은 하느님께로
돌렸다. 영원한 진리는 습관된 게 아니다. 선(善)도 습관이 되면 좋지
않다. 익숙해져 재주부리는 것 보자는 하느님이 아니다. 제 뜻과 정성
을 다하는 게 도덕의 원칙이다. 집회는 습관적인 모임이 되면 안 된다.
성당 불당에는 촛불을 켜야 한다는 버릇 그 무슨 놈의 버릇인가?(1960)
▶이 세상에서 힘든 게 사(事)와 물(物)의 시비(是非)를 가린 것이다.
중국 제(齋)나라 환공(桓公)에게 제 자식의 살(肉)을 먹인 자를 제환
공은 충신이라 하고 관중은 제 자식 죽인 이가 무얼 못할 거냐며 결코
충신이 아니라고 했다. 젊은이가 공부하면서 제일 어려운 게 시비를 분
간할 수 없는 때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한 얘기는 신앙
을 위주로 하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늙은 어머니를 위해 자
식을 바치는 이야기는 효(孝)를 위주로 하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것
이다. (1960)
▶흔히 몸을 위해서는 다부지게 사는 사람이 많다. 그 대표적인 예는
소매치기, 깡패, 그리고 브로커를 비롯한 이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나를 가지고 참으로 다부지게 살아 보자. 사
람이 나로서 다부지게 살려면 자기 생각을 분명히 가져야 한다. 생각에
서 떠나지 말고 생각으로서 싸워 나가야 한다. 이 세상에서 다부지게
살려고 하지 않으면 정말 아무것도 못 된다. 나로서 다부지게 살아 보
자는 것이야말로 올바른 실존철학일 것이다. (1960)
▶헤아리지만 득의하기가 어렵다. 이스라엘 민족은 메시아가 와서 유
대민족을 영광되게 하는 지상천국을 수천 년 동안 그려왔으나 아직도
이루어지지 아니했다. 예수교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新天地)이 팔레
스타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위에 있다고 했다. (1957)
▶이 사람이 사는 곳 아래에는 맑은 물이 항상 흐르고 있다. 요새
(1957 9. 6)는 비 온 뒤라 더구나 깨끗한 물이 흐르고 있다. 어디 갔
다가 돌아오는 길이면 횐 고무신을 닦게 되는데 웬일인지 자꾸 닦고
싶다. 얼을 담을 몸을 깨끗하게 하고 싶은 것과 같이 신도 자꾸 닦고
싶다. 새로 닦은신발은 어떻게 귀여운지 먼지나 흙을 묻힐까봐 돌만을
딯게 된다. (1957)
▶의분(義憤)이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의분이 도무지 없다. 자기
발등에 떨어지지 않으면 오불관언 가만히 있다. 어떤 뜻으로는 예수,
석가, 공자 같은 성인들은 그 시대에 의분을 대단히 낸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못된 세상을 그냥 두고 불 수 없었던 것이다. 세상을 바로
잡기 위해 불의를 불사르고자 한 얘기가 경전으로 되어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과거의 철학과 종교가 다 무엇인가?의분의 발로(發露),
그것이 아닌가. 옛 성인이 했듯이 우리들도 의분을 느끼라고 하는 것이
그들 성인들의 뜻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지금은 어떻게 된 일인지 도
무지 의분을 낼 줄 모르고 있다. 학교에서 교육한다는 것이 무엇을 가
르치는지 모르겠다. 불의를 보고도 노여워할 줄 모르면 참이 아니
다. (1957)
▶참선과 기도를 안 하면서 하는 척하면 안 된다. 좋은 시나 글을 조
용히 씹으며 명상하는 것이 훌릉한 기도나 참선이 된다. (1960)
▶불교에서는 아라한(Arhan) 이상이 되면 이 세상에 다시 안 온다는데
우리는 낙제생이라 온 것인지도 모른다. 나를 낳아주지 않은 부모 은혜
가 더 중(重)하다. 더 많이 낳아 놓았다면 우리가 이렇게 활개치고 살
수도 없지 않을까.그게 큰 은혜다. 우리를 낳을 때에 받은 고통보다도
더 큰 은혜인지도 모른다. 한 여인이 일생 동안 4백 개의 난자가 나온
다는데 그것을 다 아기로 날아 놓았다면 어떻게 한단 말인가?(1957)
[주] 아라한(阿羅漢) : 깨달음의 깊이를 4등급으로 나누었는데, 가장 으뜸가는 깨달음
을 얻은 사람을 아라한(arhan)이라고 부른다
▶나는 성경에 실려 있는 기적을 믿지도 부인도 않는다. 그런 게 없다
고도 안하고 있다고도 안 한다. 가만히 내버려둔다. 예수가 동정녀 마
리아에서 나왔다는 것은 내버려두어야 한다. 괜히 할 일이 없으니까 그
런 걸 문제삼아 따지고 있다. (1960)
▶우리는 전체에서 나온 부분이다. 부분은 전체를 밝혀야 한다. 부분
은 전체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부분은 전체를 잊어서는 안 된다. 전체
를 아버지라면 부분이 아들이다. (1960)
▶자식을 못 낳는 게 불효하는 게 아니다. 이걸 내가 대담하게 선언한
다. 이 말은 요새처럼 절박한(인구폭발) 시기가 아니면 말 못한다. 싸
갈기는 것보다 더 심한 부자(不慈)는 없다는 것은 옳은 말이다. (19fo)
▶시간을 아껴야 한다. 시간을 저축하는 법이 있는데 그것은 식사를
기다리는 시간, 마중을 나가는 시간, 차를 기다리는 시간 같은 부스러
기 시간을 잘 이용하는 것이다. 그 부스러기 시간 동안에 자기의 사상
을 영글게 하는 데 써야 한다. (1960)
▶편리한 걸 생각하면 전체를 생각할 수가 없다. 개인의 편리한 것을
취하면서 나라를 생각한다는 것은 거짓이다. 지식을 취하려 대학에 가
는 것은 편해 보자, 대우받자는 생각에서다. 이는 관존민비(官尊民卑)
의 앙반사상인 것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대통령이나 총리가 되면 무
엇하나? 그런 사람이 무슨 나라를 생각하고 백성을 생각하겠는가? 요
새 대학이란 수지가 안 맞는다고 한다. 수지 안 맞으니 도둑질하는 것
이나 같다(1960)
▶마음에 잔뜩 하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은 안 된다. 마음이 빈 마음이
돼야 한다. 빈 마음은 곧 거기 하느님 아버지 계신 데 간 것이다. 거기
와 여기는 떨어진 게 아니다. 극락(極樂)이란 마음이 빈 지경이다. 마
음이 빈 지경에서 손바닥을 한 번 치면 이 사바세계가 곧 극락세계로
변한다고 화엄경에 적혀 있다. (1960)
▶하느님에게 괴임(사랑)받아야 참 괴임이지 남(사람)에게 괴임받는
것은 꾀임(유혹)받는 것이다. 그러다가 뒤집히면 그게 치욕이 된
다. (1960)
▶천연두는 우두를 맞으면 면역성이 생긴다. 자기는 면역성이 있다고
생각하다가 병에 걸리면 참 분통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기는 일체 세
속적인 것에 대해서 면역성이 없는데도 면역성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
하면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공자(孔子), 맹자(孟子)는 40에 불혹(不惑)이라 했지만 그것은 큰
이의 일이고 보통은 오히려 더욱 혹한다. 2, 30대에 정욕이 가장 성한
데 그 정욕이 쇠하면 마음이 풀어져 버린다. 기운이 풀어져서 오래 사
는 것보다 젊어서 죽는 게 차라리 낫다. 예수가 젊어서 죽은 데는 그
뜻이 있을 것이다. 젊을 때는 단순해서 진리에, 종교에, 운동에, 학문에
열중하게 된다. 그러나 40이 지나면 긴장이 풀어져 버려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게 된다. 정욕이 강할 때는 냉정하다가 그때 가서 엉뚱하게
여색에 빠져 버리게 된다. (1960)
▶몸뚱이를 위해서는 지식을 찾지 말아야 한다. 먹기 위해서는 땅을
파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 (1960)
▶나는 젊어서는 모범을 하면 다 따라오고 잘 될 줄 알았지만 그게 안
된다. 누가 모범에 따라가는가? 예수.석가를 본받으려는 이가 어디
있나? 예수.석가를 본받았다면 세상이 요 모양 요 꼴이 되었을 리가
없을 것이다. (1960)
▶그릇(器)이 있어야 살아가지만 그릇이 너무 많으면 그릇(잘못)된다.
맘은 말라는 것이다. 맘이 빈 이가 복된 이다. 감정은 담아두어서는 못
된다. 기쁘면 껄껄 웃고 말지 담아 두면 안 된다. 노여우면 한 번 책상
을 치고 그 다음은 잊어버려야 한다. 잘못이란 것을 깰(覺) 때, 거짓을
깰 때 영원(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 (1960)
▶우리가 이렇게 사는 건 잠이다. 이렇게 오느니 가느니, 성공이니 실
패니, 가르치느니 배우느니 하는 게 다 잠꼬대이다. 잠꼬대도 심하게
하는 것이다. 사상가 철학자란 꿈꾸는 것이다. 꿈을 단단히 꾸면 깬다.
잠 잘 못자고 꿈 잘 못꿔서 저도 힘들고 남도 괴롭힌다. (1960)
▶식자우환(識字憂患)이라 하지만 참으로 알면 괜찮은데 반쯤 아니까
우환인 것이다. 이 세상이 괴롭고 혼란된 것은 반쯤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 반쯤깨게 하다가 그만두려면 애초에 깨우지 않는 것이
낫다. 내 생각 같아서는 학교를 줄여야 한다. 학교가 학생들을 반쯤 깨
우고 있다. 반쯤 선잠만 깨고서 잠투정만 하니 애초에 깨우지 말아야
한다. 물론 인생이란 잠깨자고 하는 건데 인생이 깨지 못하면 아무것도
못한다. (1960)
▶우리 사람이 이렇게 많이 퍼지는 건 특별한 은혜를 받은 것이다. 종
당에는 먹으려고 가축을 기르듯이 사람도 특권을 가지고 이렇게 번성
했는데 나중에 아주 특특한 번제를지낼는지 모른다. 잡아먹힐 놈이 제
일 귀여움을 받듯이 사람도 이렇게 특별한 은혜를 받았으니 나중에 잡
아먹힐지도 모른다. 이 시대에는 사회 전체로서의 문제지 나 혼자서만
어떻게 된다는 것은 없다. 전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한다.
되도록 아기를 낳지 말아요. 이렇게 말하면 내가 애 안 낳는다고 어
떻게 되나 하지만 이는 성공에 붙잡혀서 하는 소리다. 그렇게 해야 하
는 것이다. (1960)
▶잠 속에서는 잠을 잔 걸 얘기 못한다. 이 세상에서 말하는 게 모두
잠꼬대다. 사람이 무슨 학설을 입론(立論)하려고 하지만 그게 모두 잠
속에서 잠을 얘기한 것이다. 그러니 그게 틀린 것이다. 깨고 나서 잠을
이야기해야 한다. 어쨌든 우리는 지금 이상한 잠을 자고 있다. 젊어서
는 꿈이 있어야 한다. 꿈은 깨자고 꾸는 꿈이다. 깨자고 꾸는 꿈은 꾸
는 게 아니다. 꿈을 꾸려면 바로 꾸고 그렇지 않으면 무몽(無夢)해야
한다. 그저 밤낮 남에게 얻어서 살려는 생각은 못쓰는 것이다. 어떤 인
생관도 제 인생관이지 남에게 꼭 주장할 수는 없다. (1960)
▶우리는 새 것을 좋아한다. 새 것이란 다른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
이 특별히 다른 것을 추구한다. 어릴 때는 새 것이 많은 것 같다. 처음
본다든가 처음 먹어 본다라고 하는 게 많다. 그러나 좀 크면 다른 것이
하나도 없다. 다 그게 그것이지 별 게 없다. 역사도 되풀이하는 것 같
다. 전도서에서는 "해 아래는 새 것이란 없다"고 기자는 말했다. 왜 사
람들이 없는 새 것을 자꾸 찾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도시의
많은 사람들은 돈이 많이 남는 것으로 새 것을 삼는다. 이것으로 오늘
재미를 보았다고 한다. 음식이나 의복따위를 외국 제품을 쓰는 것으로
새 것을 삼는다. 입고 먹는 데 남보다 떨어지면 부끄럽게 생각한다.이
것은 정신을 가진 사람의 짓이 아니다. 단지 생물의 습관에 불과한 것
이다. 동서고금에 정신생활을 한 사람들이 자기는 날마다 새로워졌다
고들 말하고 있다.
그러나 참으로 새 것을 찾는 자는 퍽 드물다. 최신 유행에는 남에게
안 떨어지려고 열심히 찾는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찾는지는 생각 않는
다. 다시 말하면 새 것에 대한 뜻을 찾지 않는다. 단순히 허영으로 다
수에 따라갈 뿐이다. 자연히 흘러가는 데는 반드시 무슨 뜻이 있을 것
이다. 그런데 의지대로 움직이는 사람이 하는 일에 뜻이 없어서는 안
된다. 이 땅 위에 새 것이 없는데 새 것을 찾으려는 것은 어리석다. 시
간 공간을 초월한 절대존재(하느님)만이 영원히 새롭다. (1960)
▶이 세상에서 가장 새로운 것은 의식(意識)이다. 우리의 새로운 마음
같이 새 것은 없다. 우리의 의식(意識)이란 몸과 맘의 맨 끄트머리이
다. 의식(意識)이란 바늘보다도 더 뾰족한 점이다. 이것이 우리 몸뚱이
를 끌고 간다. (1960)
▶생일, 환갑, 관혼상제 등을 처음 만든 사람은 무슨 뜻이 있어서 만들
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은 그 뜻을 말해주어도 듣지 않는다.
이 대중(大衆)이란 뜻은 생각지도 않고 그저 좋다니까 한다. (1960)
▶아이 젖을 땔 때는 딱 떼어야 한다. 더 오래 자꾸 먹으면 지혜가 발
달하지 못하여 공부 못하는 어린이가 되어버린다. (1960)
▶사춘기에는 도로 어린애 맘이 된다. 그래서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데
아버지, 어머니가 받아 주지 않으니 고독을 느낄 수밖에 없다. 이런 시
기에는 운동이나 공부에 열중하면 쉽게 넘길 수 있다. 남자는 어머니에
게 여자는 아버지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도 할 수 없으니 아버지
어머니 대신 연인(애인)을 찾는다. 남자는 제법 영웅심을 부려 보고 싶
으나 그것은 겉으로 그렇고 이실직고(以實直告)하면 당신이 내 어머니
노릇 해주시오 하는 어리광이다. 여자도 당신이 아버지 대신이 되어 내
어릴 때 아버지가 나를 귀여워하듯 날 귀여워해 주시오 하는 것이
다. (1960)
▶'하느님이 짝지어 준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는 이것이야말로 참
말이다. 부부가 한몸이 된 것은 새 생명(자식)을 두고 한 말이다. 부부
가 결합된 서로의 정자 난자를 도로 찾아갈 수 있다면 이흔을 해도 좋
을 것이다. (1960)
▶사람과는 가까워질수록 졸라매야 한다. 고쳐 말하면 조심을 해야 한
다. 물질(몸)을 뒤집어쓰고 사는 인생이란 이런 것이다. 혼인 전에는
널리 생각하다가도 혼인 뒤에는 바싹 졸라매어야 한다. 더욱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제는 됐다 하고 방자하면 못쓴다. 개성이 없구나, 또
는 속았구나 할지 모른다. (1960)
▶하느님 아버지께서 주신 우리의 개성대로 살아야 한다. 짠 놈은 짠
맛을 매운 놈은 매운 맛을 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밖에 버림을 당한
다. (1960)
▶히브리 민족의 독특한 것은 애국사상이다. 구약성경에는 개인 사상
은 없다. 그러므로 전체를 떠나면 죽게 된다. 애족 애국사상은 히브에
에 근원한다. (1960)
▶성경에는 사람을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데 하느님이 만드신
그대로 밟아 가는 게 사람이 제 노릇 잘하는 아들의 일이다. 하느님 아
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하도록 힘써야 한다. (1960)
▶대장부는 집 속에만 있어도 될 수 있다. 밖에 나간다고 사내가 아니
다. 4 19 때 죽은 아우들은 세계에 드러내 놓은 사나이다. (1960)
▶자유당 정권이 이렇게 된 것은 모두가 프란체스카와 박마리아 때문
이다. 이승만, 이기붕만이 아니라 권력을 잡은 놈들은 제 계집의 허영
심을 만족시키자는 것이다. 사내가 출세하면 그 계집의 걸음걸이가 달
라진다는 것이다. (1960)
▶곧곧하여 올라가는 게 옳은 도(道)다. 옳은 도(道)를 말하는 사람은
하느님으로부터 왔다. 하느님으로부터 오지 않았으면 위로 올라가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늘에서 왔으니 하늘로 오르려 한다. (1960)
▶나는 대학을 반대하는 사람이다. 출세하여 대학 교수가 되려는 것은
일하기 싫어서 하겠다는 것이 분명히 있다. 성경에도 교만한자가 일하
지 않고 밥 먹으려 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 불합리한 대학 속에도 똑똑
한 자식들이 있어 학문에도 참이 있다. 그래서 대학생이 선봉이 되어
4.19가 났다. 의거에 나선 그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바로 되었다. 그
래서 나도 대학을 무시만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라의 주춧돌이 된다고
하여 고시(考試) 준비하는 놈들은 안 되고 주춧돌 되기를 버린 듯한
학생들이 턱 나라의 동량이 되었다. 4.19 의거가 젊은이들이 주체가
되어 일어난 것은 무한한 희망이 있는 것이다. (1960)
▶하루 한끼 먹어온 지 한 20년 된다. 새해 2월 18일이 꼭 20년이다.
다른 건 모르는데, 일중(日中)한다는 건 호기심으로 사람들이 물어본
다. (1960)
▶관념은 스스로 만들어 제가 그 속에 산다. 좋은 관념으로 사는 사람
은 좀더 자유롭자는 생각을 갖고 있다. 사람은 한 동그라미(一圓, 하느
님) 속에서 자기의 관념을 높이는 것이다. 된 것은 한 동그라미에서 된
다. 안 되는 것은 제 관(觀)에 안 되지 큰 데서는 저절로 된다. 내가
하면 된다는 것은 안 된다. (1960)
▶보통 일이 없어서 논다는 것은 일이 너무 많은 데서 나온다. 일 나
면 일 해야지란 말이 안 된다. 취직이 일이고 실직하면 일 없다는 그까
짓 놈의 일이 무슨 일인가?(1960)
▶성사(成事)하나 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일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세
상에서 귀찮은 일은 없애자고 자꾸 노력하는데 그 일 마치면 또 거기
서 새 일감이 나온다. 편리하게 자가용을 가지면 또 귀찮은 여러 가지
일이 따라온다. (1960)
▶우리말에 마지막에 크게 되는 걸 돼진다고 한다. 되어지는 것이 돼
진다(死)가 된다. 일나면 하고 되어지니 되게 하면 일이 쉽다. 자연에
따라 하면 일이 쉽게 저절로 된다. 모가 나면 좋은 것 같아도 잘못되면
모질어지고 둥글면 좋은 것 같아도 잘못되면 못쓴다. 둥근 것도 있고
모진 것도 있어야 한다. (1960)
▶나 아닌 남이 해 준다는 건 믿지 말라. 조그만 일에는 성공이 있을
수 있으나 하느님 아들의 성품에는 성공이란 없다. 죄다 하늘나라 또는
니르바나 나라가 되기 전에는 성공이란 없다. (1960)
▶글을 읽을 때 입으로만 읽으면 그것은 원 글 읽는 것이 아니다. 글
을 줄줄 읽는 가운데 그 글이 내 속에 피가 되고 맘이 되어야 한다. 그
것을 체득(體得)이라고 한다. (1960)
▶아프다가 나으면 하느님, 붓다님의 은혜라 하고 제 집이 잘되어 가
면 온 나라가 다 잘 되어 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런 속알머리가 어디
있는가?(1960)
▶이 세상은 어른이 없는 시대이다. 영화나 광고에 나오는 키스(입맞
춤)가 무언가?어린이들에게 성생활을 하게 허용하지 않으려면 대낮에
극장 앞에 그런 그림 붙이지 말아야 한다. 어린이들이 그런 음란한 그
림을 본 뒤에 저희들끼리 입만 맞출 것 같은가?그렇게 커서 뭘 할 것
인가? 이건 우리가 단단히 싸워야 할 것이다. 나는 종말관은 믿지 않
는 사람이지만 나는 다른 의미로 종말관이다. 원자전쟁이 아니라면 인
구폭발이나 공해문제로 지구에 종말이 올 것이다. (1960)
▶그림이란 착각이다.원근법이 생긴 것도 착각 때문이다. 이 착각이
없다면 학문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착각이 불행이 아니다. 아이들
은 부지깽이 타고 기차 탔다고 한다. 영원하신 아버지 앞에서는 우리가
제법 사람 노릇 한다는 게 다 이런 것이다. (1960)
▶사람이 노여움이 있어야 한다. 4.19에 학생들은 노여워서 나온 것
이다. 12년 동안 입에 똥칠을 해 두어도 늙은 것들은 노여움을 낼 줄
몰랐다. (1960)
▶예수와 석가처럼 도(道)를 꿰들을 관도(貫道)의 기량을 길러야 한
다. 성경에도 불경이나 도경(道經)처럼 관도(貫道)가 있다. 그걸 찾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기량(器量)이 모자라서다. 예수 석가는 기량이
높아서 이 우주라는 편지, 이 세상이라는 편지를 바로 읽고 바른 길을
걸었다. (1960)
▶며칠 전에 20살쯤 되는 애들이 몇이 절에 가서 돈을 털고 거기 있던
54살 되는 여인을 윤간한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게 우리에게
오는 편지다.
이게 모두 성급해서 그런 것이다. 싸는(사정) 게 급해서 추행이요,
돈이 급해 도둑질이다. 그러나 그런 구차한 꼴이 어디 있을까? 우리
속에는 그렇게 하고 싶은 게 있으니 삼독이란 짐승의 욕심이다. 이 몸
이란 그런 것이다. 사람들이 성(性)을 사랑이라 하는데 수성(獸性)이
무슨 사랑인가?(1960)
▶자기 식구 몇 사람을 먹이려고 해도 게으름을 멀리해야 하는데 영원
히 갈 바탈(性)인 하느님의 속알(얼나)을 기르는데 어찌 게으름이 있
겠는가?(1960)
▶의(義)는 그때 따라서 하는 것이다. 인(仁)은 온통이라 하느님의 생
명(성령)이요 사랑이다. 의(義)는 인(仁)의 대용품이다. 그래서 의부
(義父)니 의치(義齒)니 하는 것이 그것이다. (1960)
▶모름지기 깊이 이 뜻을 체받아라(順深體此意). 그러면 바야흐로 천
지만물과 내 몸이 하나임을 안다. 요한복음이 통히 일체 하나가 되는
것을 얘기했는데 이 서명(西銘)이 이렇게 얘기했다. 나는 무식해서 퇴
계 이황 선생을 모른다. 그런데 성학십도(聖學十圖)를 보고 정말 깊다
고 느꼈다. 장횡거의 서명(西銘)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되면 이 천지의
물건들을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있다고 보지 않는다. 보통은 사람들이
사물은 자기가 이용하기 위해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것이 물욕의 근
원이다. (1960)
▶처음에는 사람들이 죄과를 적게 범한다. 이때는 벌도 안 받고 고통
도 없다. 자꾸 가면 죄가 가득 차서 죽어 망해버린다. 남녀간의 색(色)
도 처음에는 작다가 나중에는 업(業)이 무거워 어쩔 수 없이 된다. 사
람의 감각으로 지각되는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에서 색(色)이
대표된다는 것은 9할의 감각이 색(色)이기 때문이다. 색(色)은 음란만
이 아니다. (1960)
▶이 세상에 왜 책이 많이 나오나? 책을 읽어도 깨닫지 못하고 깨달아
도 그대로 행치 않으니 책이 많이 나온다. 모든 게 모순이다. (1960)
▶참사람이 되려면 나라는 게 무엇인가를 규정해야 한다. 제가 참인지
아닌지를 알아야 한다. 나는 예 있으니 곧 나는 참이다. 나 있는 '예'
라는 사실이 보통으로 쓰니까 그렇지 여간한 사실이 아니다. 예(here),
이제(now)에 사는 게 삶이지 이제 예에 내가 살지 않으면 참 삶이 아
니다. 다른 사람은 자기를 인정함으로써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예 있
으니까 남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남을 실감할 수
없다. 예에 살지 않으면 다음 순간 예는 가 버린다. 예에서 만족해야
한다. 예에서 무엇을 찾아야 한다. 진 선 미 되시는 하느님을 찾아야
한다. (1960)
▶분(分)을 나눈다고 한다. 내 눈은 무얼 하러 있나?내 것 지키려 있
다. 그러므로 눈은 나와 너 나눈 거다. 그러니 하나되려면 눈을 감아야
한다. 나는 무슨 문제든지 사람에게 묻지 말고 말에 물으라고 한다. 그
런데 말을 찾으려고 성급하게 굴지는 말아야 한다. 쉬지 않고 가면 자
연히 말을 만나게 된다. (1960)
▶언(仁)이 클 대로 커지면 언큼(大仁)이다. 엉큼한 놈이란 성현(聖
賢)보다 좋은 말이다. 이 세상에 그 사람 좋다는 이는 많아도 언큼(大
仁)한 놈이 없다. 이게 슬픈 거다. 언큼한 놈이 있어서 엉큼성큼 걸어
가면 좋지 않을까?세계 구원사상이나 중생제도 사상이 다 언큼(엉큼)
이다. 언(仁)이 클 대로 커지면 엉큼이다. 4.19의 어린 아우들은 살신
성인(殺身成仁)을 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린 것이 살신성인이다.정
몽주, 성삼문의 죽음도 살신성인이다. 제 몸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살신성인함이다. 언(仁)은 우리말에 '언니' 또는 언짧다'에
언 (仁)이다. (1960)
▶조물주니 창조주니 하는 게 다 이 맘속에 서려 있다. 하늘 알기가
제일 쉽다. 지리학을 바로 하려면 세계를 답사해야 하지만 천문학을 하
려면 제 자리에서 하늘만 쳐다보면 된다. 사도 바울도 하느님 찾기는
뭘 더듬어 찾는 것보다 쉽다고 했다. (1960)
▶어제 거울에 비친 찌그러진 내 얼굴을 보고 글을 썼다. 찌그러들면
서도 찌그러들지 않으려니 그게 뭣인가? 찌그러든 얼굴이 내게 글을
보냈다. 그걸 읽고서 적어 보았다. (1960)
▶군자(君子)의 잘못은 일식 (日蝕) 월식 (月蝕)과 같다고 한다. 군자가
잘못한 것은 천하(天下) 사람이 다 안다. 그러나 고치면 그대로 된다.
사람이니 잘못해 실수를 할 수 있다. 아무리 건강해도 병이 있듯이 양
심적으로 산다 해도 허물이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도 선한 선생님
이란 말을 듣고는 펄쩍 뛰면서 하느님께로 돌렸다. 병이 있으면 고쳐야
하지만 병이 없으면 더 좋은 것처럼 잘못이 있으면 고쳐야 하지만 잘
못이 없다면 더 좋은 것이다. (1960)
▶사는 것은 보는 것이다. 살려면 보고 살아야 한다. 참으로 잘 보려면
눈을 감고 보아야 한다. 눈으로 보는 것은 견(見) , 시(視)라 하고 눈을
감고 맘으로 보는 것을 관(觀)이라 한다. 눈으로는 이 우주의 한 부분
밖에 못 본다. 눈을 감고 맘으로 보아야 전체를 볼 수 있다. 자기가 자
기를 보는 것이 자꾸 달라짐에 따라 관(觀)이 달라진다. 같은 5척 작은
키라도 비관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낙관하는 이도 있다. 관이 달라서
그렇다. 사람은 관에서 사는 거지 시공(時空)의 제약 속에서 사는 것
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1960)
▶영원한 본 바탈(性, 얼나)이 '그' 인데 '그' 리로 가는 이가 그이(君
子)다. 한마디로 말하면 옳게 사는 사람이다. (1960)
▶ 주규식 예수 석가 두 분 가운데 누가 더 참되다고 할 수 있습니
까?
류영모: 예수.석가 중에 누가 더 참을 가졌느냐는 모릅니다. 비교
할 일이 있으면 모르지만 비교해선 안됩니다. 그것은 절대
자(하느님)만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규식: 불교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데 기독교는 도대체 모르겠습
니다.
류영모' 불교는 이지(理智)적이고 철학적이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주규식: 죽은 뒤엔 완전히 없어지지 않습니까?
류영모: 완전히 없어진다면 이렇게 분명히 있을 리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렇게 있다는 게 완전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증거
입니다. 정말 없어진다면 참으로 감사할 것입니다. (1960)
▶아침에 천주교 방송에서 계시 종교라야 되지 자기가 스스로 윤리 도
덕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데, 된다면 뭐가 어떻게 되는지
나는 묻고 싶다. (1960)
▶시골의 농부나 아낙네 가운데 마음을 바로 쓰려고 하는 사람이 꽤
있다. 이런 사람에게 가서 뭐라고 말하지 말라, 예수를 믿어라, 불도를
닦으라는 등 말을 할 필요가 없다. 그들은 이미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1960)
▶짐승은 안 붙이면 새끼를 안 낳는데 사람은 왜 산아제한을 할 수 없
을까? 이제는 대(代)를 잇기 위해서 지구가 텅 빌까봐 혼인을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다. (1960)
▶아이를 정말 잘 인도함은 애가 따라올 만큼 걸으면서 제가 걸어오는
대로 내버려둬야 한다. 바쁘면 업고 가서 놓아두고 따로 제 볼 일을 봐
야 한다. 교육이란 학생을 제대로 내버려두어야 한다. 제가 올(理)을
타고 갈 수 있도록 내버려두어야 한다.
늙은이에겐 늙은이의 일을, 젊은이에겐 젊은이의 일을 하도록 해야
순리다. 일이란 왈칵왈칵해선 안 된다. 조금씩 만져가면서 해야 한다.
모든 일에 올(理)을 타지 않으면 보기도 싫고 괜한 노력을 하게 된
다. (1960)
▶자유(自由)는 제 맘대로 한다는 게 아니다. 전능자도 제 맘대로 못
하는데 그 이외의 딴 게 어떻게 제 맘대로 하는가? 자유란 내가 한다
는 뜻인 유기(由己)다. 책임을 제가 단단히 져서 옆에 사람에게도 책
임을 묻는 게 자유다. 그게 니르바나(Nirvana)에 든 사람이다. 4 19
혁명에 일어선 어린 아우들은 책임을 단단히 묻지 않았는가?(1960)
▶정신이 물질에 휘감겨서는 못쓴다. 언제든지 정신이 물질을 부려써
야 한다. 육근(六根)의 몸은 부림치(使喚)지 참나가 아니다. 여기에 내
가 팔려선 안 된다. 아들(얼나)이 종(제나)의 심부름을 해서는 안 된
다. 아들이 종에게 끌려다녀서는 안 된다. 이 주객(主客)이 뒤집히면
실성(失性), 실진(失眞)이라 멸망인 것이다. 몸이 성하고 눈이 잘 생기
고 코가 잘 생기고 눈이 잘 보인다고 거기에 끌려다녀서는 멸망이다.
이게 죄다 몸나가 아닌 참나(얼나)에게로 가자는 거다. 참나인 얼나가
제대로 하자는 것이다. (1960)
▶마음은 넓게 가지고 몸은 꼭 졸라야 한다. (博而約之) 조른다는 것은
대단히 좋은 거다. 금욕 절제함이 졸름이다. 졸라 매야 지조를 잃지 않
는다.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졸라 맬 줄을 모른다(1960)
▶예수 석가의 정신혁명은 우주혁명이다. 혁명은 진리인 하나(하느
님)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진리만이 위아래의 차별을 없앤다. 나는
이 상대세계에서 뭐가 된다는 것은 부정한다. 되는 것은 진리(하느님)
에 있을 뿐이다. (1960)
▶하느님(절대)을 모르고 나는 됐다, 나는 낫다, 나는 높다고 하는 것
은 거짓된 모양내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것이 이 세상 사람들
이 하는 짓이다. 이 세상이 죄다 이렇게 못 깨어났다. 왜 이렇게 되어
버렸나? 우리의 성품이 하느님께로 갈 건데 하느님을 모르고 땅에만
붙어 있어서다. 하느님을 모르고서 이 세상에서 높아지고 싶은데 그 방
법으로 깊은 구덩이 옆에 서서 자기가 높거니 하고 생각한다. 요새 자
기 차가 지나갈 때 박수를 치게 해놓고 그 박수 소리를 듣고는 내가
높거니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런 얼빠진 짓이 어디 있는가? 남은 모두
형편없는데 나만 무엇이 됐지라고 생각하는 자는 양심이 없는 이다. 이
는 참(하느님)을 믿지 않아서 이 꼴이 된 것이다. 우리 모두가 왜 이리
못났을까? 하고 한탄하는 것은 하늘 양심이다. 양심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찬송이요, 염불이다. 정말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는 참 드물
다. (1960)
▶불가사의(不可思議)를 알고 깨닫는 것이 내 인생철학의 결론이다.
신학(神學)은 신앙하면서 철학하는 거다. 철학이란 생각하는 것인데
신앙이란 모르기 때문에 믿고 또 깨달은 후 믿는 것이다. 우리가 과거
에 실패한 걸 회한(侮恨)할 필요는 없다. 다음부터는 다시는 그런 잘
못을 안 하리라 결심하면 된다. (1960)
▶무슨 말인지 모를 테지만 젊었을 때가 좋다. 신앙 없이 늙어지면 주
름살과 횐머리만 남을 뿐 아무것도 아니다. 젊을 때는 생각만 해서는
안 되고 자꾸자꾸 배워야 한다. 공자(孔子)도 밤새도록 생각하는 것이
배우는 것보다 못하다고 했다. 젊었을 때는 깨달았다는 것도 안다는 것
도 다 껍데기이다. 젊었을 때는 동서고금의 고전을 읽어야 한다. 젊었
을 때 참된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 (1960)
▶나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 방송을 듣는 수신기(受信機)다. 우리
는 작지만 작다고 큰 것과 다른 게 아니다. (1960)
▶예수 전에도 보내신 이가 있었다. 보내신 이(얼나, 성령)는 아담시대
전부터 있었다. 예수의 독특한 점은 하느님의 씨(얼나)를 싹티워 완성
한 것이다. (1960)
▶철학은 우리말로 '알맞이'라고 할 수 있다. 알(知)을 자꾸 맞아들인
다는 뜻이다. 철학이란 다른 게 아니고 생각하고 말하는 게 철학이
다. (1960)
▶진리의 생명을 실에 비길 수 있다. 시간.공간.생명이 모두 이 실
과 같이 끝이 없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줄은 끊어질 것 같지만 끊어지
지 않는다. (1960)
▶좋은 것은 머리에 이어야 한다. 우리의 머리가 위로 들린 것은 하느
님을 모시려 함이다. 하느님 소리가 싫으면 마하트마 간디나 석가붓다
처럼 진리 (Dharma)라고 해도 좋다. (1960)
▶우리가 좀더 깊게 넓게 살 수 없는가 하는 문제가 이 사람이 말하는
것이다. 정신적인 생명으로 말이지 육체적으로는 그렇게 안 된다. 예
수 석가 노자는 정신적으로 영생한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 그들
의 말을 듣지 그렇지 않으면 그들하고 상관이 없다. 예수가 인간을 위
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린 것을 믿으면 영생한다고 믿는 것은 나
와 상관이 없다. (1960)
▶이 상대세계에서는 정신이 국가·사회 등은 떠날 수 있어도 몸에서
만은 떠나지 못한다. 몸뚱이만은 우리의 정신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
다. (1960)
▶군 사 부(君師父)가 있어 왔는데 그 있는 필요를 아는 것이 중요
하다. 군사부가 자기보다 더 나은 신(臣), 더 나은 제자, 더 나은 자식
을 길러 내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선생을 키우려면 선생 자
신보다 월등 나은 제자를 기를 수 있는 스승을 키워야 한다. 이것이 꼭
필요한 것인데 나라를 연 지 5천 년이 되어도 못하고 있다. 군 사 ·
부는 맨 꼭대기가 아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걸 맨 꼭대기(目標)로
아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군 ·사·부는 잠시 하느님 아버지를 대신한
거짓 자리요 비교하는 자리다. (1960)
▶참으로 어린이를 잘 기르려면 깨끗하고 더러운 걸 잘 구별할 수 있
도록 길러야 한다. 또 한편으론 더럽고 깨끗한 게 없다고 가르쳐야 한
다. 물건에 더럽고 깨끗한 게 없다. 자기에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으면
깨끗한 거다. 자기에게서 나온 것은 다 더럽다. 물건에는 더럽고 깨끗
한 게 없다. 거저 우리 맘이 깨끗하다면 받아들이고 더럽다면 내버린
다. (1960)
▶이 세상은 졸리는 세상이다. 학교에 가면 공부해야지, 숙제해야지
시험치러야지 죄다 졸리는 일이다. 그런데 제일 못 견디는 것은 제가
저한테 제 양심에 졸리는 거다. 산골 깊숙이 먹을 것 좀 준비해 놓으면
졸릴 게 없다. 빚을지더라도 졸리지만 않는다면 빚도 귀찮지 않다. 마
음 살림을 잘 하면 빚에 졸리지 않는다. 마음을 밝게 하여 이 세상 일
에서 떠나면 시원할 거다. (1960)
▶이 못돌(坤)의 세계는 번뇌와 모순의 세계다. 저 성큼(乾)의 세계는
번뇌와 모순이 없다. 번뇌를 벗으려면 성큼의 세계로 솟나야 한다. 이
상대세계에 온 것은 어떻게 하다가 만난 거다. 이 상대세계에 번뇌가
많은 것은 이 만남의 값을 치르지 않아서인지도 모른다. (1960)
▶히브리 사람들이 유월절에 양의 피를 집 대문에 칠하는 것과 우리나
라 풍속에 동지에 팥죽을 대문에 바르면 홍역 마마가 침범치 못한다
는 것과는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반드시 무슨 근거가 있을 것
이다. 충분히 연구재료가 된다. (19fo)
▶용납이란 용서해 준다는 건데 그건 겉으로만 그렇지 잠재의식에는
아무래도 가시가 들어 있어 어떤 때 그것이 상처로 터진다. 그러나 겉
으로 보면 화평한 것 같다. 통히 상대세계란 이런 데다. 이렇게 상대세
계란 붙잡을 수도 놓을 수도 없는 데다. (1960)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는 말씀(로고스)과 법(法, Dharma)으로 뜻은
같아 참이다. 진리는 그 이상 더 없으니 이를 믿는다. 하느님(니르바
나님)은 진리의 근원이다. 이것을 아니까 삶의 맛을 참으로 알고 삶의
맛을 참으로 아니까 진리인 얼나로 영생한다. (1960)
▶지식을 얻어들어 손해갈 것 없으니 알아두자는 생각으로 집회에 나
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될 말인가? 제 속에 있는 영원한 생
명(얼나)을 깨달아야 한다. 스승의 말씀을 듣는 것이나 불경.성경을
보는 것은 삶을 알아보자 하는 데 참고가 되는 것이다. 그 밖에 더도
덜도 아니다. 인생에 대한 하나의 참고서다. 나와 불경.성경의 관계가
이러하다. 그 밖에 더도 덜도 아니다. 불경을 열심히 읽는다고 성불(成
佛)이 빨리 된다는 법도 없고 성경을 줄줄 외운다고 영원한 생명(얼
나)으로 솟난다는 일도 없다. 제나(自我)로 죽고 얼나(靈我)로 솟나는
길밖에 없다. (1960)
▶벌린 춤이라 안 추지 못하고 추는 체하는 게 이 세상이다. 목사, 중
노릇도 일생 하는 것은 벌린 것이라 안 하지는 못하고 하는 체하는 것
이다. 그건 생명외 노래가 아니다. (1960)
▶예수 석가를 다 몰랐다. 누구를 존경하고 좇는 것은 다 제 욕심 채
우려드니까 모르게 되는 거다. 예수 석가도 바른 말을 했는데 사람들
이 못 알아들었다. 공자(孔子)는 모르는 게 없는 줄로 알았다. 그게 잘
못인 것이다. (1960)
▶남을 본받아 흥내내는 것을 효빈(效顰)이라 한다. 이 세상은 통히
효빈하는 세상이다. 이따위 짓을 한다면 성불(成佛)이고 구원이고 소
용없다. 언제나 무슨 일을 지극 정성으로 해야 한다. (1960)
▶유교에 들어가는 이는 처음 대학(大學)을 읽는다. 대학은 덕(德)을
생각해야 한다. 지금의 대학은 과학을 공부하는데 이 과학과 기술을 어
떻게 인간답게 쓰느냐를 생각해야 한다. 과학에는 목적이 없다. 이 세
상은 궁극적으로 없어지는 것인고로 과학으로는 막을 재주가 없다. 구
경(究竟)의 목적은 과학으로는 달성할 수 없다. 과학은 중간에 있는
목적에 불과하다. (1960)
▶모든 사람들이 연구한 것, 생각한 것은 모두 우리 재산인데 왜 그것
을 안 쓴단 말인가?모든 생각, 사상들은 모두 사람들의 이 가슴속에
서 우러난 것이다. 정말 하느님이 말씀한다면 간접으로 할 리가 없다.
모든 것이 이 가슴에서 나온 것이다. (1960)
▶의식(意識)이 있으면 살았다고 하는데 누구나 살기를 좋아한다. 곧
의식(意識)을 좋아한다. 다시 말하면 앎, 느낌,깨달음을 좋아한다. 이
렇게 생각하면 바로 아는 게 많은 것이 잘 사는 것이다.
▶안다는 것은 가장 귀한 것인데 앎이란 맛을 알자는 것이다. 이 세상
의 대부분은 향락을 위하여 돼 먹었다. 나는 이런 게 아니라 맛을 바로
알자는 생각이다. 정말 재미있는 것을 재미있다고 해야 한다. 맛은 맛
맛으로 보라는 것이다. 거기 들러붙으라는 게 아니다. 맛은 조금만 보
고 지나가야 만날 것을 만난다. 만나야 할 것을 만나면 큰 것을 깨닫는
다. 큰 것을 깨달으면 할 일을 안다. 할 일을 바로 알아야 사람이 된
다. 옳게 알고 뚫어지게 알아야 한다. 맛을 좇는 지식은 막힌 앎이다.
맘이 팅 비는 게 참 아는 것이고 참 아는 것은 맘이 팅 빔이다. (1960)
▶보기 좋은 선악과는 함부로 미리 따먹지 말아야 한다. 맛이 좋은 것
같아도 뉘우치게 된다. 생심 (生心)은 해야지만 바로 내야 한다. 섣불리
생심(生心)하다간 날마다 도깨비가 되고 만다. 도깨비 노릇밖에 못한
다. 사람이란 물질을 먹고 알짬을 갖고서 하늘 뚫린 길로 가는 것이
다.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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