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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어록- 빈탕한데(虛空,허공) 본문

마스터와 가르침/다석

다석어록- 빈탕한데(虛空,허공)

柏道 2020. 1. 2. 11:43

  

다석어록- 빈탕한데(虛空,허공)

 

▶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빈탕한데(허공)이다. '빈탕한데' 란 허공을 내

가 순 우리말로 말해본 것이다. 백 칸짜리 집이라도 고루고루 쓸 줄 알

아야 하듯 우주 또는 그 이상의 것도 내 것으로 쓸 줄 알아야 한다. 그

래서 빈탕한데(허공)인 하느님 아버지의 품에서 살아야 하는 것이다.

늘 스스로 반성하면서 좋은 일에 힘을 다하면 마음이 슬플 때나 괴로

울 때나 악해질 리가 없다. 악한 사람이 길지 못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다. 이 세상은 거의 세기말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

느님의 아들들이 살고 있다. 하느님의 아들들은 겉으로는 나타나지 않

지만 악에 무릎을 꿇지 않고서 버티고 있다. 그들이 없다면 세상은 오

래 가지 못할 것이다. 악한 세상에 무슨 하느님의 아들들의 시대가 오

겠느냐고 하지만 하느님의 아들들의 시대는 반드시 올 것이다. 이것을

믿지 않으면 미끄러질 위험이 많다. (1956)

 

▶ 사람들이 색(色)을 찾는 데 너무 정성을 쏟는다. 색(色)을 찾느니

만큼 공(空)도 찾아야 한다. 미인을 찾는 것만큼 허공을 찾아야 한다.

허공에 대한 애착 이것이 미인에 대한 애착만큼 강할 때 비로소 사람

은 공색일여(空色一如)라고 할 수 있다. 지건대축(止健大畜)할 수 있

는 사람만이 공색일여 (空色-如)할 수 있는 사람이다.

 

 [주]지건대축(止健大畜) 마음속에 하느님의 생명인 얼나를 품고 이 세상을 부정하고

하느님 얼나라에 머문다는 뜻. 주역(周易)에서 따온 말임

 

▶ 사람은 피리와 같다. 마음속이 비어야 하느님의 가락이 흘러나온다.

피리소리의 가락이 하느님 뜻이다. 빈 마음에 하느님의 얼이 비친다.

그래서 장자(莊子)가 허실생백(虛室生白)이라고 했다. 나는 피리요 피

리를 부는 이는 하느님이시다. 피리에서 아름다운 가락이 흘러나온다.

그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마음이 비어야 한다. 허공이 피리의 본질이

요 가락이 피리의 생명이다. 예수는 마음속에 영원한 생명의 생수가 한

없이 솟아 흐른다고 했다. (1956)

 

▶ 단 하나밖에 없는 하나는 허공(虛空)이다. 색계(色界)는 물질계이

다. 단일(單一) 허공에 색계(色界)가 눈에 티검지와 같이 섞여 있다.

이 사람은 단일허공을 확실히 느끼는데 하느님의 마음이 있다면 하느

님의 마음이 허공으로 느껴진다.

   허공을 지구보다 작은 것으로 느끼는 사람이 많다. 그 소견 가지고는

얘기를 하지 못한다. 우리는 기껏 과학의 결과로 추상(抽象)하여 절대

(하느님)를 알려고 하나 이 땅 위에서는 절대를 볼 수 없다. 있지만 보

지 못하니까 오히려 없다고 한다. 우리가 있다 없다고 하는 한정(限

定)이 얼마만한 것인가를 이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다. 우리는 쉽게 있

다는 존재로 허공을 알아서는 안 된다. 허공은 우리 오관(五官)으로

감지해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과학과 수학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허공은 테두리 없이 무한한 것이다. 잣알 하나 깨어보고서 빈

탕이다라는 그따위 허공이 아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조건을 붙여서라

도 단일 허공을 구경해야 한다. (1956)

 

▶ 빈탕한데(허공)에 맞춰 놀이하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나는 해와 달

에 맞춰서 놀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맘(心)과 몬(物)

을 생각한다. 몬(物)에 함이 살아나면 마음속의 얼나가 어두워지고 참

된 생각이 사라지고 만다. 그러므로 두려운 것은 몬(物)에 맘이 살아나

속맘이 어두워지는 것이다. 몬(物)에 마음이 살면 마음의 자격을 잃고

만다. 이 세상의 광명세계는 사이비(似而非)의 거짓 밝음이다. 이 거짓

광명 속에서 마음이 살아나면(집착하면) 안 된다.

   빈 몸이 홀가분하다는 것은 우리가 다 맛을 보고 알고 있다. 물건을

많이 지니고 다니면 몸이 무겁지만 빈 몸으로 다니면 흘가분하다. 이

세상의 욕심쟁이는 그저 많이 달라고만 하여 짐을 잔쪽 지는 것을 좋

아한다. 정말 참사람은 순금이나 비단을 무겁게 몸에 갖추지 않는다.

정말 홀가분한 것을 알려면 빈탕한데(허공)에 얼로 이어져야 한다. 그

러면 얼을 담은 몸이 홀가분하게 살 수 있다. (1956)

 

▶ 빈탕한데(허공)는 석가와 장자(莊子)가 처음으로 분명하게 얘기했

다. 그런데 근기(根器) 낮은 사람들이 빈탕한데(허공)를 바르게 이해하

지 못하여 이단시(異端視)하여 배척했다. 쓸데있는 것만 찾는 사람들

에게는 빈탕한데 (허공)는 쓸데없다고 하겠지만 빈탕한데 (허공)를 모르

면 모두가 거짓이다. 빈탕한데(허공)가 쓸데있고 없고는 하느님 나라에

까지 가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1956)

 

▶ 참(truth)이라는 것은 상대세계인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다. 빈탕한

데(허공)에 들어가야만 참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참을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세상의 것은 모두가 거짓이다. 거짓에 집착

할 필요가 없다. 잠깐 우리가 빌려쓰는 것이다.

   절대공(絶對空)을 사모한다.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나?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라야 참이 될 수 있다. 참으로 무서운 것은

허공이다. 허공이 참인 하느님이기 때문이다. 허공 없이 실존이고 진실

이고 어디에 있는가?우주조차도 허공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

허공 없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1956)

 

▶ 태극(太極)은 하느님이시다. 우주는 무한한 공간과 영원한 시간이

다. 이 하나(절대)가 늘이라 한늘이라고 한다. 태양은 쳐다보지 말고

오직 하느님만 보자는 것이다. 여기에 빔(허공)과 몬(물체)이 있는데

빔과 몬은 하나이다. (空色一如) 빔(허공)에 몬(물체)이 나오고 나온 몬

이 다시 빔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1956)

 

▶ 사람을 무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업신여긴다는 말이다. 업신여긴

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처럼 여긴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허공을

멸시한다는 뜻이 전제되어 있다. 허공을 너무나 무시하기 때문에 다른

인격도 허공처럼 무시한다는 것이다. 사람을 무시하는 것은 결국 허공

처럼 여겨 허공을 보태 주는 것이 된다. 그러나 허공은 아무렇지도 않

게 허공 그대로 있다. 허공은 더하고 덜하고가 없다. (1957)

 

▶ 꽃이 그 테두리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속에 꽃이 있고 밖으로

보면 허공이 테두리를 지어주고 있다. 만물의 테두리는 허공이 해 준

것이다. 이것이 곧 천계시(天啓示)이다. (1957)

 

▶ 하느님은 '없는 하나 오직 하나' (無一唯一)이다. 그래서 없이 계시

는 빈탕한데(허공)의 하느님이다. 아무것도 없는 하나(無一)만이 전체

인 오직 하나(唯一)이다. 이러한 영원 절대의(하느님)님을 찾는 것이

얼나인 하느님 아들이다. (1957)

 

▶ 우주라든지 천지라든지 이러한 것들은 본래 없는 것인지 있는 것인

지 알 까닭이 없다. 나를 생각해도 본래 나라는 것이 없었던 것만은 사

실이다. 68년 전에는 나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나를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지금 내가사니까 이 모든 것들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

져보고 해서 있는 것을 안다고 한다. 내가 못 본 것, 못 만져 본 것에

대해서는 암만 생각을 한다고 해도 있다고 하기 어렵다. 그래서 아직

내가 모르는 것을 있다고 하자는 것이 아니다.

   본래 없는(本無) 이것을 있다고 하고 싶다. 본래 없는 것만이 참 있

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본래 없는 것이 바로 없이 계시는 하느님이다.

이렇게 없다·있다를 생각하면 철학이 나온다. 철학 중에도 유무(有

無)의 관(觀)을 말하려고 하면 한(限)이 없다. 그 까닭을 알 수 없는

것은 어떻게 할 수 없다.

   내가 나온 것을 도로 물릴 수 없고 외길로 보내기만 해야 하니 어찌

할 수 없이 이것을 정업(定業)이라고 한다. 누가 정했는지? 누가 마름

질한 것인지는 몰라도 마련해 놓은 것이다. 무슨 대리자가 있어서 한

것은 아니다. 이 일은 누구나 때놓을 수 없이 당해야 할 일이고 여기서

도망가지는 못한 정한 노릇이다.

   있기는 생각이 있다는 것인데 있는 것부터 없어져 본무(本無, 하느

님)로 돌아가야 한다. 없어진다면 아주 실패하고 마는 것같이 생각이

드나 여기서는 본래 없는 곳으로 가는 것이다. 본무(本無)로 가자는

것이다. 이같이 하는 것이 곧 덕(德)을 높이는 것이다. 덕(德)이라는

것은 우리 속에 얻고자 하는 것이니 이것을 높여주어야 한다. 덕(德)은

속알(얼나)이다. 속알 높이자는(崇德) 삶이다.

 

▶ 빈탕한데(허공)에 다 같이 가야 하는데 다 같이 가기가 힘들다. 무

엇을 하고 있는지 괜한 소리만 떠든다. 무슨 종교, 무슨 학설이 다 무

엇인지 모르겠다. 유교가 나온 지 2천5백 년이나 되었는데 잘 되어야

할 정치가 아직 안 되고 있지 않는가? 그리스도가 와야 한다고 하고

미륵불이 올 것이라고 한다. 미륵불이 마하트마 간디가 될지 모르겠다.

간디를 몰라보는 멍팅구리 이 세상에 또 누가 나타나면 알아주겠는

가?(1957)

 

▶ 참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다. 빈탕(허공)에 들어가서만

이 참이라는 것을 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참을 생각할 수 없다.

그래서 이 세상의 것은 모두가 거짓이고 속임이라 볼 수밖에 없다. 잠

깐 우리가 빌려쓰는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1957)

 

▶ 우리는 세상에서 가정이라는 데서 살림을 하지만 세상을 지나간 뒤

에 보면 빈 껍질 살림을 가지고 실생활로 여기고 살은 것이다. 물질생

활이란 변화하여 지나가는 것뿐이다. 예수·석가는 가정에 갇혀 살지

않았다. 하느님의 가슴속인 빈탕한데(허공)에서 살았다. 나는 이 빈탕

한데'를 '속한 데' 라고 한다. (1957)

 

▶ 때(時)가 때(垢)이다. 때(時)는 모든 물질을 때(垢)로 만든다. 이때

(垢)를 자꾸 벗기지 않으면 우리는 때(垢)에 파묻혀 죽게 될 것이다.

이런 때와 터를 다 불살라 버리라는 것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원자탄

전쟁이 일어나서 모두가 멸망한다지만 원자탄 전쟁이 없어도 다 멸망

하여 빔(空)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빔(空)을 찬송하지 않을

수 없다. (1960)

 

▶ 절대의 아버지께는 조금도 부족한 것도 아쉬운 것도 없다. 그게 아

들로서 하느님 나라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가 여기서 이렇

 게 너와 나로 갈라졌는지 모르겠다. 현상계의 이 나라는 것은 참으로

 형편없다.

   재주도 힘도 아무것도 없다. 그야말로 외롭고 홀홀하다. 맨 처음의

뜻(하느님)이 고독을 느껴 이 천지를 창조했다고 하지만 이것도 사람

이 생각해 낸 것이다. 이건 사람이 자기가 그렇지 절대(하느님)의 그

자리는 외로울 리가 없다. 이렇게 너와 나로 갈라져 나왔어도 서로 마

음으로 통할 수만 있어도 참으로 좋을 것이다. 그런데 잘 통하지 않는

다. 이 몸뚱이라는 게 감방 중에서도 독감방이다. 우리는 나와 너로 나

눠져 나와서 외로운 것이다.

   여기서 서로 만났다고 서로 속이고 하지만 그건 일시적이다. 또 다시

헤어져서 빔(空)에 돌아간다. 내가 믿는 것은 이것이다. 교회 분들이

들으면 허무 사상을 가지고 어떻게 믿느냐고 할 것이다. 아무래도 뭐가

있어야 좋아한다. 빔(空)에 가야 평안하다. 빔(空)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과는 다르다. 태공(太空)이다. 일체가 태공에 담겨 있다. 모든 게 허

공에 담겨 있다. 이걸 믿지는 못해도 한 번 생각해 봐야 한다. (1960)

 

▶ 빈(虛)다는 게 무엇인가 하면 지극히 거룩한 것이다. 지극히 거룩하

다면 빈 것일 것이다. 뜻은 한뜻이라야 한다. 이러쿵저러쿵 하는 뜻은

못쓴다. 얼나로 솟나 짐승에서 사람될 뜻이 하느님을 공경할 뜻이

다. (1960)

 

▶ 이 세상이란 낮은 거다. 이 세상이란 내가 깔고 앉을 거다. 세상에는

높은 게 없다. 나는 이 세상을 내어놓겠다. 그러나 빔(空)만은 못 내놓

겠다. 이 몸은 더러운 것인데 깨끗(淨)한 걸로 알면 빔(空)을 싫어하는

것이다. (1960)

 

▶ 사람의 맘같이 싱거운 것이 없다. 맘은 없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마음은 허공과 같은 것이다. 그

러나 굳은 게 있다면 맘이야말로 굳은 것이다. 불교에서는 맘을 금강심

(金剛心)이라고 한다. 이런 맘을 싱겁게 가지니까 굳은 맘 가진 사람

이 없다. 맘이 몸이 시키는 대로 하면 완고심(頑固心)이 된다. 몸이 맘

에 순종할 때 정고신(貞固身)이 된다. 사람은 어떠한 일이든 우선 곧

이(貞)를 지켜야만 된다. 정고(貞固)를 잃어서는 안 된다. 가지고 온

곧이를 그대로 가지고 가는 게 해탈이요 구원이다. (1960)

 

▶ 참(眞)이란 허공밖에 없다 없어야 참이고 있는 것은 거짓이다 마음

과 허공은 하나라고 본다. 저 허공이 내 마음이요 내 마음이 저 허공이

다. 여기 사는 것에 맛을 붙여 즘더 살겠다는 그따위 생각은 하지 말아

야 한다. 마음하고 빈탕이 하나라고 아는 게 참이다. 허공에 가야 한

다. 마음이 식지 않아 모르지 마음이 식으면 허공과 하나가 된다 허공

이 마음이고 마음이 허공이라는 자리에 가면 그대로 그거다.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아니다. (1960)

 

▶ 실감한 것은 부정하기가 지극히 어렵다. 허공과 마음은 같은 것이

다. 이것은 나의 실감이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증명할 수는 없다. 이

마음이란 지극히 작아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또 지극히 큰 것이라

면 한없이 큰 거다. 이는 비과학적인 점이 있지만 그렇다고 이것을 버

리지 못함이 이 사람의 생각이다. (1960)

 

▶ 몸을 지닌 이는 누구나 빚진 것, 꾸어온 것(몸)으로 사는 것이다. 시

간.공간에 빛진 것을 마지막 때 털어 버리는 것은 송장되어 드러눕는

것이다. 시간·공간에 빛진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

에 나왔다는 것은 몬(物)에 갇혔다는 말이다. 이 세상에 나온 것은 참

못난 것이다. 물질에 갇혀 있음은 참 못난 짓이다. 이 틀(몸) 쓴 것을

벗어버리기 전에는 못난 거다. 내가 말하자는 것은 빔 (空)을 말하는 것

이다. 빔(空)이 아니면 안 된다.

   맘속에 아직 나라는 생각이 남았다면 불안을 못 면한다. 속이 없을

만큼 제나가 없어져야 평안하다. (1960)

 

▶ 어쩐지 나는 수십 년 전부터 마음을 허공 같다고 생각한다. 허공은

저 위에 있는 것인데 맘을 비우면 허공과 같을 것이다. 우리 맘을 비우

면 하느님 나라도 들어온다. (1960)

 

▶ 맨 처음에 없(無)이 있었을 것 같다. '없(無)'하면 참으로 엄숙한 것

(하느님)이다. '없(無)'은 나도 안다하고 지내버릴 수 없다. (1960)

 

▶ 다시 없이 크면 없는 데 들어간다. 없는 것은 내가 되는 것이다. 없

는 데 가면 없는 게 없다. 무일물무진장(無一物無盡藏)이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으면 일체(一切)를 가지는 것이다. 다시 없이 큰 것, 이것만

은 우리가 할 일이다. 서양 사람은 없(無)을 모른다. 있(有)만 가지고

제법 효과를 보지만 원대(遠大)한 것을 모른다. 그래서 서양문명은 벽

돌담 안에서 한 일이라 갑갑하기만 하다. (1960)

 

▶ 나는 20살 전후에 불경과 노자(老子)를 읽었다. 그러나 없(無), 빔

(空)을 즐길 줄은 몰랐다. 요새 와서야 비로소 빔(空)과 친해졌다. 불

교에서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진일보(進一步)해야 빈데 갈 수 있다

고 한다. 백척간두에 매달려 있는 한 빔에 갈 수가 없다. (1960)

 

▶ 이 때(垢)는 자꾸 벗기지 않으면 우리는 때(垢)에 파묻혀 죽을 만큼

때가 많다. 이러한 물질인 때와 터를 다 불살라 버리라는 것이 하느님

의 말씀이다. 있는(有) 것은 더러운 것이다. 없는(無) 것은 거룩한 것

이다. 원자 전쟁이 일어나서 우리가 멸망한다고 하지만 원자전쟁이 없

어도 멸망하는 것이다. 모든 유(有)는 마침내 없어져서 빔(空)으로 돌

아간다. 거기서 나왔으니 거기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빔(空)을

찬송하는 것이다. (1960)

 

▶ 있다 없다는 게 무엇이냐 하면 확실치 않다. 우리의 오관(五官) 이

외에도 느낄 수 있는 물질이 더 많이 있을지 모른다. 물질이 아니면 없

다고 보통 말한다. 그러나 있다는 것은 작다. 우리가 감각해 알 수 있

는 것은 대단히 작은 것이다. 일률적으로 있다 없다고 할 수 없다. 있

다고 있는 게 아니고 없다고 없는 게 아니다. (1960)

 

▶ 마음과 허공은 하나라고 본다. 저 허공이 내 마음이요 내 마음이 저

허공이다. 여기 사는 것에 맛을 붙여 좀더 살겠다는 그따위 생각은 하

지 말자. 마음하고 빈탕(허공)이 하나라고 아는 게 참이다. 빈탕 허공

에 가야 한다. 마음이 식지 않아서 모르지 마음이 식으면 허공과 하나

된다. 허공이 마음이고 마음이 허공이라는 자리에 가면 그대로 그거다.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아니다. 불경이니 성경이니 하는 것은 마음을 죽

이는 것이다. 살아 있어도 죽은 거다. 제나(自我)가 한 번 죽어야 마음

이 텅 빈다. 한 번 죽은 마음이 빈탕(太空)의 마음이다. 빈 마음에 하

느님 나라, 니르바나님 나라를 그득 채우면 더 부족이 없다. (1960)

 

▶ 장엄(莊嚴)은 정말이지 허공이 장엄하다. 허공의 얼굴인 공상(空相)

이 장엄하다. 이 우주는 허공을 나타낸 것이다. 이 만물들이 전부 동원

해서 겨우 허공을 나타내고 있다. 그런데 못끝 같은 물(物)만 보고 허

공을 못 보다니 제가 좀팽이 같은 것이라서 물(物)밖에 못 본다. (1961)

 

▶ 어디 들러붙어서 마음을 내는 것을 주착생심(住着生心)이라고 한다.

한 번 볼 걸 여러 번 보고 여러 번 보다가 데리고 살 맘을 낸다. 이렇

게 생심(生心)하는 게 사람으로서 도깨비가 되는 것이다. 이 조그마한

것에 붙어서 온통 전체를 못 본다. 평화를 얻으려면 태공심(太空心)을

가져야 한다. 제나를 내버린다고 해서 쓰레기통에 내버리는 게 아니다.

만물에 턱 맡겨 두고서 그 만물을 포용하는 거다. (1961)

 

▶ 이 만물이란 허공을 보라는 건데 만물(物)만을 보고 허공은 못 본

다. 꽃을 봐도 그 꽃과 허공의 마주치는 곳이 선(線)을 이루는데 꽃만

보았다고 하고 허공은 못 봤다고 한다. 인도 사람은 색즉시공(色卽是

空) 공즉시색 (空卽是色)이라 했다.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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